이번 [황해문화] 겨울호 "권두언"을 올립니다. [황해문화] 편집위원이 되고서 처음 쓰는 권두언이네요. 


이번 [황해문화] "특집"이 <젠더 전쟁>이어서 그것을 중심으로 썼습니다. 


[황해문화] 겨울호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



젠더 전쟁과 을의 민주주의

 

1

 

지난 해 가을과 겨울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의 열기에 힘입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지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18 기념사에서 문재인 정부는 5.18 광주 정신과 촛불혁명의 기반 위에서 탄생했다고 선언하면서 국민주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 이후 촉발된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해 한반도가 살얼음판 같은 위태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온 국민의 관심은 북한의 통치자와 미국의 통치자가 주고받는 살벌한 말의 전쟁에 쏠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수동성의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우리 자신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상황,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누구인지 자체가 타자에 의해 압도적으로 규정되는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우리를 규정하는 이러한 외재적 조건은 내재적 조건과도 연결되어 있다. 지난 촛불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의 위기 상황은 더욱 예측할 수 없고 불안한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수구세력과 언론이 촛불혁명 이후 급격하게 위축된 보수 세력의 결집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이번 위기를 더욱 조장하고 군사적 대결의 양상으로 몰고 가려는 모습을 보이는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현재 당면한 위기 상황을 우리가 현명하게 헤쳐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부의 민주적 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길임을 말해준다. 내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을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구현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난 6개월 간 문재인 정부는 참신하고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기도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인사 실패와 정책의 혼란을 드러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보여주는 이러한 다소 불안한 행보는 국민주권이라는 말이 지닌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국민이라는 말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편으로는 독재 정권에 순응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수동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이라는 말과 더불어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의 주체로 호명되어 왔다. 독재자들이나 야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국민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작년의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가사로 한 헌법 제1라는 노래가 널리 사랑을 받은 것도 국민이라는 말이 갖는 저항적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하지만 우리가 국민이라는 말이 지닌 이러한 저항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감안한다고 해도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담는 데는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이라는 말에 담긴 동질성은 실제 국민을 구성하는 계급적, 성적, 지역적 차이와 대립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 및 사회화가 산출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10 : 90’, ‘1 : 99’ 같은 숫자로 표현되어 왔다. 이 숫자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극소수의 부자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차지함에 따라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줄어드는 몫을 둘러싸고 더욱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서 늘 피해자 내지 패배자의 위치를 강요당하는 것은 성적경제적사회적 약소자들이다. 또한 국민이라는 말의 전체성에는 다양한 개인들 및 소수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차별이 식별되고 정정될 여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이라는 말이 정상성의 기준이 될 때 그것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배제와 차별, 무시의 폭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이라는 말에서, 그리고 국민주권이라는 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을들을 정치적으로 재현하고 대표할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을의 민주주의를 이제 사고하고 실험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촛불혁명이 혁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신기원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2

 

이처럼 을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젠더 문제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 중 하나다. 우리 사회의 가장 많은 을들이 공유하는 문제, 또는 우리 사회의 가장 많은 사람들을 을로 또는 을의 을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특집의 제목인 한국 사회 젠더 war’의 장면들의 문구를 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에 젠더 war’, 젠더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그렇게 격렬한 젠더들 사이의 갈등, 특히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 전개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고, 또 그것이 과연 󰡔황해문화󰡕에서 특집 주제로 다룰 만큼 중요한 의제인가에 대해서도 문제제기를 할지 모르겠다.


첫 번째 의문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이전에 비하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이나 불평등이 상당히 줄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번 특집에 수록된 글들에서 여성필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준다. 가령 2016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한국의 성별격차지수는 144개 국 중 116위였으며, 이는 경제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더 벌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특집의 필자들과 더불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시각의 차이(또는 명백한 현실에 대한 남성들의 맹목과 외면)가 왜 생겨나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 사회 젠더 문제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두 번째 의문은 나와 같이 SNS를 별로 활용하지 않고 온라인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은 구세대 사람들이 갖기 쉬운 의문이다. 온라인에서는 이른바 여성들에 대한 각종 여성혐오 발언과 무차별 신상털이’, ‘조리돌림이 횡행하고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영상들이 남성 초과 사이트의 게시판들과 웹페이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 SNS 계정들을 통해 공유되고 확산되고 있지만, 많은 남성들은 이를 일부 젊은 아이들의 일시적인 치기와 일탈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집에 실린 글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고 또한 훨씬 더 구조적이며 뿌리 깊은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집중적인 피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20~30대 젊은 여성들, 더욱이 그들 중 일부의 문제로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남성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증상이자, 젠더 차원의 갑질과 폭력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번 호 특집은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여성혐오에 대한 많은 여성들의 분노와 조직적 대응, 그리고 이에 맞선 이른바 일베를 비롯한 여성 혐오자들의 역공격과 강화된 혐오 표현들로 촉발된 젠더 사이의 격렬한 갈등을 배경으로 마련되었다. 따라서 특집의 문제의식은 최근 몇 년 간 심각하게 증폭된 여성혐오와 젠더 갈등의 문제에서 기원하지만, 이 특집에 실린 글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듯이 여성혐오의 문제가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며 또한 일정한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요인들이 누적된 역사적 성격을 띤 것임을 드러내고 공론화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며 정치적 주체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신경아는 총론에 해당하는 젠더 갈등의 사회학에서 현재 전개되는 젠더 전쟁의 상황 및 그 사회적 요인들을 요령 있게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젠더 갈등은 길게는 지난 20, 그리고 짧게는 지난 10년 동안 전개된 사회적 실천의 결과이며, 특히 정책 실패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 핵심 이유는 “‘차별을 인정하는 것보다 우대를 강조하는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여성 정책은 불평등과 차별의 시정을 위한 정책보다는 특정한 집단으로서 여성에 대한 시혜 정책으로서의 성격을 띠어 왔으며, 그 결과 생활 전반에 걸쳐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기보다는 예컨대 내각 30% 여성 할당 목표치를 달성하는 데만 주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 우대 정책이 오히려 사회 구조와 일상적인 삶에서 여성 차별을 방치하고 누적시키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


필자에 따르면 이는 비단 노동시장만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폭력에 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축학 개론󰡕을 많은 남성들이 실패한 첫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하는 이유, 그리고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치안 당국과 일부 언론이 여성혐오 사건이 아닌 정신질환자에 의한 우발적 강력 범죄로 해석하려 드는 이유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불평등과 폭력, 차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는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섣부르게 봉합하기보다는 터져 나온 갈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필자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김영희는 시선의 주체와 포획된 신체: ‘몰래카메라보는 눈보이는 몸에서 최근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디지털 폭력을 주제로 삼으면서 시선의 폭력이라는 문제를 살피고 있다. 한동안 소라넷이라는 이름의 국내 최대의 불법 음란물 유통 사이트가 큰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10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각종 불법 음란물을 게시하고 유통하면서 20년 가까이 성황을 이룬’(?) 이 사이트는 2016년에 폐쇄되었지만,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변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라넷이 폐쇄된 이후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한 불법 음란물과 영상들은 훨씬 더 은밀하고 산재된 형태로 계속 유통되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상들 및 음란물들을 게시하고 서로 돌려보면서 남성들은 남성 연대의 끈을 형성하며, 이를 통해 여성 및 여성의 신체는 더욱 상품화되고 물신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물들은 제대로 단속하거나 제재하기가 어려울뿐더러, 적발된다 하더라도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여성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가 적발된 현직 판사가 약식기소 처분을 받은 것은 특권 여부를 떠나서 이 문제에 관한 법적 인식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준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필자에 따르면 더 심각한 문제는 디지털 성폭력의 근저에 놓여 있는 남성 중심적인 젠더 구조가 법원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의 신체를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할 만한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그렇거니와, 여성은 영상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촬영자에 대해 격렬한 저항의 표시를 제시해야 비로소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 역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관점의 소산이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언제 어떻게 은밀한 촬영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을까 늘 불안과 공포에 떨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훔쳐보는 시선의 일부만을 범죄화하고 다른 시선은 정상적인 것으로 묵인하는 젠더 위계 질서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필자의 견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영미는 노동시장 구조변동의 부수적 피해와 피해자 경쟁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사회적 뿌리를 밝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구사회나 우리사회 모두 여성혐오의 뿌리에는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재편이 존재한다. 서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성장이 지속되던 황금의 30이 지나고 신자유주의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경쟁에서 탈락한 남성들이 생계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정체성 상실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여성혐오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사회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하위 비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시장 경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았으며, 2000년대에는 저학력 청년 남성들이 가장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 저학력 중년층-장년층 집단에서 남녀 임금 격차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고학력층의 전 연령 집단에서도 젠더 격차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데 비해, 유독 저학력 남성과 여성만 공히 프레카리아트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재편 이후 전개된 계급 편향적인 노동 개혁에 있으며, 이러한 구조적 원인의 비가시성으로 인해 그 직접적 피해 대상인 청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젠더 전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서 자본 소득 비율은 크게 증가한 데 반해 노동 소득 비율은 줄어들었으며, 이처럼 줄어든 몫을 둘러싼 노동자들 내부에서의 경쟁, 배제, 차별과 반목의 상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던 것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현재 전개되는 젠더 전쟁의 사회적 뿌리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두 가지 측면에서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 지난 20여 년 간 줄어든 노동소득의 몫을 키우고 특히 지금 악화되어 있는 중하위 소득집단의 소득분배율을 높이는 것은 남녀 노동자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이다. 또한 고학력 여성의 경력 단절과 유리 천장을 깨는 것 역시 남성의 이익과 부합한다는 점이다. 둘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생계부양자로서의 지위를 위협받으면서 이로 인해 남성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남성들이 젠더 과수행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 좀 더 평등한 젠더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선희의 퓨리오숙 현상의 이율배반성과 젠더전쟁의 주체들은 많은 인기를 모았던 종합편성채널의 한 예능프로그램의 여성 연예인의 별명 퓨리오숙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끌어낸다. 미국 영화 󰡔매드맥스󰡕에서 절대 권력의 독재자에 맞서 여성들을 해방의 땅으로 이끄는 여성 전사 퓨리오사의 이름을 본따 퓨리오숙이라고 불리는 이 연예인은 마치 가부장 구조의 남성 가장을 여성 가모장으로 바꿔놓은 듯한 캐릭터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다. 아내의 호통에 남편이 쩔쩔 매고 순응하는 것을 보고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대리 만족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퓨리오숙은 가부장의 희화화된 전도물에 불과할 뿐이며, 가모장 퓨리오숙은 현실의 젠더 전쟁에서 여성 전사의 모습을 형상화하기에는 여러 모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IMF 외환 위기 이후 치열해진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이 인터넷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 일베를 비롯한 여성혐오 사이트의 기원이었다고 진단한다. 이들은 딸기녀’, ‘된장녀’, ‘김치녀등을 비롯한 각종 ○○를 생산하고 또한 여성의 신체를 촬영한 불법 영상물을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경쟁자로 등장한 여성들을 제압하거나 통제하려고 시도해온 것이다.


필자는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맞선 퓨리오사, 페미전사들은 도처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불법 영상물과 음란물은 근절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방관하거나 묵인하는 사람들에 맞서 그것을 디지털/사이버 성폭력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근절하고 방지하기 위한 각종 대책 및 피해자 지원에 나선 많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더 많은 퓨리오사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관심과 연대를 아끼지 않는 것이 많은 남성들의 과제일 것이다.


나영은 얼굴을 가린 목소리들과 혐오의 디파워링(depowering)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에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전개되어온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과 그로부터 1년 뒤에 일어난 여성 왁싱사에 대한 살해사건은 우리 사회 여성혐오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영이 주목하는 것은 이 두 사건의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여성들이 한결같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고 또 운동권이나 단체와의 연대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6년 여름 86일 간의 본관 점거 투쟁을 통해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에서도 학생들은 하나같이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것은 나중에 이른바 일베를 비롯한 남성 중심 온라인 사이트에서 신상이 털려각종 성희롱과 폭력에 시달리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지난 20여 년 간 한국 사회에서 누적되어온 여성혐오와 이에 맞선 여성들의 투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간주한다. 2015년 일어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선언, 사회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성폭력에 대한 공론화, ‘메르스 갤러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유명한 미러링작업은 많은 여성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지만, 역으로 새로운 형태의 격렬한 반발과 강화된 혐오를 초래했다. 특히 운동을 주도하거나 눈에 띄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집중적인 신상털이와 인신공격은 많은 여성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 글에서 유심히 살펴봐야 할 점은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처해 있는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분석이다.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을 바탕으로 구성된 페미니즘 운동과 온라인을 기반으로 조직된 메갈리아나 워마드 같은 그룹들은 지향이나 연대의 방식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낳고 있다. 특히 워마드 등이 대표하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생각하는 입장과 성적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입장 사이의 차이는 꽤 의미 있는 쟁점으로 보인다. 특히 동성애가 보수 집단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데 반해, 문재인 정권은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 시점에서 보면 더 그렇다. 따라서 “‘진짜 여성이 누구인지를 대신하여 지금 누가 여성의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라는 필자의 말은 많은 울림을 낳는다.

 

3

 

비평에도 을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여러 글이 실렸다. 이진오는 종교인 과세! 낼 건 내고 받을 건 받자는 글에서 종교인 과세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지난 2015년 종교인 과세를 명문화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18년부터 종교인 과세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지만, 일부 개신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진행되고 있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 2년을 더 유예하자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종교인 과세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하여 왜 종교인 과세가 필요하며 또 정당한 일인지 상세하고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특히 보수 기독교계의 반대 논리의 허점을 간명하게 밝혀주고 있어 이 주제에 관해 익숙지 않은 독자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적폐 청산과 관련하여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가 MBC, KBS 등과 같은 공영방송의 정상화 문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공영방송이 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공정성과 신뢰도가 크게 하락했을 뿐 아니라,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방송국 내부의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 등을 무차별적으로 징계하고 해고함으로써 방송국 내부에도 큰 균열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MBC 해직기자인 박성제는 내부인의 시각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던 MBC가 어떻게 처참하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점 중 하나는 이명박 정권 시절 MBC는 청와대와 국정원 같은 외부의 강한 압력과 통제를 통해 장악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외부의 압력 없이도 MBC 스스로 정권의 충실한 홍보 도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MBC KBS의 현재 경영진이 물러난다고 해서 공영방송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필자가 강조하듯 근본적인 지배구조 개혁을 통해 다시는 공영방송이 정권의 꼭두각시가 되는 길을 막아야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송 환경 속에서 공영방송이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찾을 수 있도록 내부 개혁과 쇄신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적폐청산 과제는 사학비리 청산의 문제다. 상지대는 시사 문제에 웬만큼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학비리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각종 비리와 불법의 책임을 지고 퇴출되었던 김문기 중심의 구()재단이 2010년 다시 복귀하여 상지대 정상화에 앞장섰던 교수, 학생, 직원들에게 각종 징계를 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고 다시 상지대가 비리의 온상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하지만 상지대 구성원들은 지역사회 및 각종 단체와 힘을 합쳐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 끝에 두 번째의 상지대 민주화를 이룩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상지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고 이제 상지대 총장직무대행을 맡고 있는 정대화는 상지대 민주화 투쟁의 교훈과 과제에서 그동안 지난했던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들을 열거하면서, 상지대 사태에서 가장 큰 책임이 교육부에 있음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교육부는 김문기의 상지대 인수와 장악, 각종 비리의 자행 등을 묵인하고 방조했을 뿐만 아니라 부실한 감사로 이 사태를 장기화한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학의 발전을 위해서 교육부와 정부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 하나인 공영형 사립대학모델에서 사학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계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80% 이상 사학대학인 만큼 사학비리 척결과 민주적 운영을 위해서는 상지대가 선도적으로 모범을 보인 공영형 사립대학의 모델을 더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김애령은 인문한국’(HK)이라는 실험에서 지난 2007년에 시작되어 올해 8월로 1기 사업이 마무리된 인문한국 사업의 의미와 한계를 다루고 있다. 필자가 말하듯 인문한국 사업은 인문학 지원 사업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학과 중심의 인문학 연구 이외에 학제 연구 및 융합 연구에 기반을 둔 연구소 중심의 인문학 연구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업이었다. 10년 동안의 국가 지원을 바탕으로 이전까지는 유명무실한 껍데기 연구소에 불과했던 대학의 인문학 연구소들은 활력과 창의력을 갖추었고, 인문학 연구의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인문학의 오랜 학문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시대적 도전을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인간다움의 규범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인문한국 사업은 수행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1기 사업 종료 시점을 두 달 앞두고 기존 인문한국 사업단이 새로운 인문한국플러스 사업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함으로써, 지난 10년 동안 구축해놓은 인문학의 새로운 인프라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100여 명에 달하는 인문한국 연구교수들을 실업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교육부는 이러한 방침에 대한 기존 인문한국 사업단의 항의를 플러스 사업에 새로 진입하는 연구소들과의, 혹은 인문한국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인문학 연구자들과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함으로써 인문학자들에게 큰 모욕감마저 주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인문학이 당장의 실용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사회적 의미와 시대적 가치를 성찰하고 구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라면, 그리고 1기 인문한국 사업이 그 작업을 위한 중요한 인프라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그것을 계속 살리고 육성하는 방향의 정책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포토에세이 및 문학, 문화비평, 서평 등에서도 페미니즘과 관련된 여러 글을 실었다. 하나하나 거론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젠더 문제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고 값진 통찰들을 담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일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대면하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이 바로 그런 역사적 사건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군사 독재의 강고한 틀이 시민들의 작고도 거대한 힘에 밀려 깨어지는 것을 감동적으로 체험했고, 또 얼마 뒤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래 70여 년을 지속해왔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내 생애 또 다시 그런 거대한 역사성의 시기를 경험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지난 겨울 다시 한 번 내가 역사의 거대한 현장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 역사성의 시간은 지금도 진행 중일 것이다. 이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되고 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진부하지만, 우리의 실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많은 을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를 정치화하는 것이 바로 그 실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시작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 가톨릭철학회에서 발간하는 [가톨릭철학] 29집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최종 교정이 끝나지 않은 글이니,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가톨릭철학]에 수록된 


글을 참고하십시오. 


------------------------------------------------------


규율권력, 통치, 주체화: 미셸 푸코와 에로스의 문제

 

 

I. 푸코 사상의 수수께끼와 을의 민주주의

 

미셸 푸코(1926~1984)가 사망하고 난 뒤 2000년대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푸코 연구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는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1976)󰡔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1984)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1984) 사이의 공백내지 단절이라는 문제였다. 단일한 제목을 달고 있는 연작의 1권과 2-3권 사이에 8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더욱이 푸코는 8년 동안 아무 책도 출간하지 않았다), 양자 사이에는 또한 커다란 주제 상의 차이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1975) 󰡔앎의 의지󰡕에서 전개된 권력의 계보학에서는 규율권력에 의한 예속적 주체의 생산이라는 문제가 중심 주제였던 반면에, 󰡔성의 역사󰡕 2-3권에서는 오히려 윤리적 주체의 구성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성의 역사기획의 변화에 관한 푸코 자신의 해명으로는, Michel Foucault, “Le retour de la morale: entretien avec G. Barbedette et A. Scala”, “Le souci de la vérité: entretien avec F. Ewald”, in Dits et écrits, vol. II, “Quarto”, Paris: Gallimard, 2001 참조.]


이 때문에 푸코의 계보학 기획은 실패했으며, 󰡔성의 역사󰡕 2-3권은 푸코가 고전적인 주체 개념으로 회귀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는 비판들이 숱하게 제기되었다.[이런 비판은 각자 상이한 철학적 입장에 근거를 둔 다음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낸시 프레이저, 푸코의 권력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경험적 통찰과 규범적 혼란(1982), 정일준 엮음,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서울: 새물결, 1994; Charles Taylor, “Foucault on Freedom and Truth”, Political Theory, vol. 12, no. 2, 1984; 위르겐 하버마스,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4; Peter Dews, Logics of Disintegration: Post-tructuralist Thought and the Claims of Critical Theory, LondonNew York: Verso, 1987;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서울: 난장, 2012; Lois McNay, “‘The Foucauldian Body and the Exclusion of Experience”, in Hypatia, vol. 6, no. 3, 1991; Foucault: A Critical Introduction, Cambridge: Polity Press, 1994. 프레이저는 비판이론적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푸코에게서 규범적 이론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으며, 테일러는 자율성의 원천으로서 주체 개념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하버마스는 새로운 보수주의라는 시각에서 푸코를 비판하고 있으며, 듀스는 포스트구조주의 일반의 관점을 탈통합의 논리로 제시하면서, 푸코의 권력론과 후기 푸코의 윤리적 주체이론 사이의 비일관성을 비판하고 있다. 사토 역시 이러한 비일관성을 지적한다. 또한 맥니는 권력과 신체의 관계를 드러낸 점이 푸코 이론의 장점이지만, 여기에서는 해방 이론을 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의 비판에 맞서 통치성 내지 통치의 관점에서 푸코 사상의 연속성을 보여주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들도 많이 제시된 바 있다. 특히 Thomas Lemke, “Foucault, Governmentality, Critique”, in Rethinking Marxism, vol. 14, no. 3, 2002; “Foucault’s Hypothesis: From the Critique of the Juridico-Discursive Concept of Power to the Analytics of Government”, in Parrhesia, no. 9, 2010 Mark Bevir, “Foucault and Critique: Deploying Agency against Autonomy”, in Political Theory, vol. 27, no. 1, 1999 참조.] 하지만 1997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은 8년의 공백기 동안 푸코가 통치(gouvernement) 내지 통치성(gouvernementalité)이라는 새로운 문제설정을 실험하고 있었으며, 이는 권력의 계보학과 단절하거나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이 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 양식과 구별되는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였음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지난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제기되었던 류의 비판들은 이론적 적실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 2012 Thomas Lemke, “Foucault’s Hypothesis: From the Critique of the Juridico-Discursive Concept of Power to the Analytics of Government”, op. cit. 참조.]


내가 이 글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규율권력에서 통치성 내지 통치의 문제설정으로의 이행이 어떤 이론적 쟁점을 지니고 있는지 검토한 뒤, 통치의 문제설정에 따라 새롭게 제기되는 주체화 양식의 관점에서 에로스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난 1980년대 이래 여러 비판가들이나 주석가들이 주장해왔던 것과 달리 통치성의 문제설정에 따라 고찰해보면, 성 또는 에로스의 문제[내가 사용하는 에로스(eros)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의 성적 관계를 뜻한다. 곧 이성애만이 아니라 동성애 관계를 포함하며, 성욕이나 성적 쾌락의 관계만이 아니라 부부, 동반자, 연인 사이의 관계 및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윤리적정치적 실천들을 지칭한다.]는 예속적 주체화와 다른 자유로운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려는 푸코의 일관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푸코가 성 또는 에로스의 문제에서 탐구하려고 했던 실존의 미학은 권력의 계보학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연속적이라는 것이 내 주장의 논점이다.


푸코와 에로스의 문제는 이미 여러 연구자들의 관심을 끈 주제였다. 푸코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만큼 푸코 저작은 특히 동성애 활동가 및 퀴어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나 이브 코소프스키 시즈윅(Eve Kosofsky Sedgwick) 또는 데이비드 핼퍼린(David Halperin) 등과 같은 저명한 퀴어 이론가들의 작업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이로든) 큰 영향을 미쳤다.[퀴어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개론서로는,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이론 입문󰡕, 박이은실 옮김, 서울: 여이연, 2012를 참조하고 푸코와 퀴어 이론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는 푸코와 퀴어 이론”(Foucault and Queer Theory)을 특집으로 엮은, Foucault Studies, vol. 14, 2012 참조.] 또한 존 라이크만(John Rajchman)1991년 저작인 󰡔진리와 에로스󰡕에서 푸코 후기 윤리학의 핵심을 에로스의 문제로 파악하면서, 이를 자유의 기술 내지 실천에 입각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John Rajchman, Truth and Eros: Foucault, Lacan, and the Question of Ethics, New YorkLondon, Routledge, 1991, p. 112.] 또한 최근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린 허퍼(Lynne Huffer)는 푸코의 초기 대표작인 󰡔광기의 역사󰡕의 문제설정에 따라 푸코 사상에서 에로스의 문제를 재구성하려는 야심적인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Lynne Huffer, “Foucault’s Ethical Ars Erotica”, in Sub-Stance, vol. 38, no. 3, 2009; Mad for Foucault: Rethinking the Foundations of Queer The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참조. 그는 에로스의 윤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합리주의적 도덕성에 대한 윤리적 대안곧 그 도덕적 프레임에서 풀려난 성적 경험이라고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어떤 것이 내가 푸코의 에로스의 윤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Ibid., p. xvi)] 이 글에서 나는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주체화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에로스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내가 에로스라는 주제를 통치성 및 주체화 양식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단지 푸코 사상에 대한 학문적 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2~3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는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와도 관련되어 있다.[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황해문화󰡕 96, 2017 참조.]


주지하다시피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헬조선’, ‘망한민국’, ‘흙수저금수저등과 같은 자조적 담론과 더불어 갑과 을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하청업체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프랜차이즈 본사의 가맹점주 및 알바생에 대한 갑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대학원생에 대한 교수의 갑질, 다문화 가정과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을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등이 이러한 사회적 담론이 유행하게 된 배경을 이루고 있다. 더 넓게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소수자/약소자(minority), 을의 다수화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사회화는 노동자 계급 조직을 비롯한 사회적 연대 조직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고 더 나아가 개인들이 속해 있는 소속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비정규직화, 조기 정년, 프리랜서, 자영업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개인들을 단자화(單子化)하고 불안정한 존재자들로 만든다. ‘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들의 독자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못한 단자적이고 불안정한 소수자들/약소자들이다.”[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같은 글, 61.] 따라서 대다수의 국민이 을의 지위로 전락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의 연대나 조직화는 매우 문제적이고 불분명한 상황이야말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쇠퇴 경향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이는 약소자들의 삶과 사회적 지위를 더욱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및 알바생, 영세 자영업자, 대학원생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소자들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적인 동정 여론이 존재하고 정책적 대안이 모색되고 있지만,[물론 여기에도 집요한 저항이 존재하며, 더욱이 이러한 정책이 얼마나 일관성 있고 철저하게 전개될 수 있는가 여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유독 성적 소수자들 문제에 관해서는 첨예한 찬반 양론이 맞서고 있으며 더욱이 반대 여론이 우위를 보이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되는 혐오 담론이 여성을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이를 방증해준다.[혐오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이 문제에 관한 여러 논의가 나오고 있다. 특히 여성 혐오 및 성적 소수자 혐오에 관해서는, 윤보라 외,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서울: 현실문화, 2015;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파주: 들녘, 2016; 홍재희 외, 󰡔그건 혐오예요󰡕, 서울: 행성B(행성비), 2017 등을 참조.]된장녀에서 김치녀로 이어지는 여성 혐오 담론은 오늘날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공격과 혐오로 나타나고 있으며,[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폐지운동본부라는 명칭을 가진 보수 학부모단체가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교사를 고발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페미니즘' 가르친 교사를 검찰에 고발한 학부모단체”, 󰡔경향신문󰡕 2017920. 또한 인권의 최종적인 보호자가 되어야 할 대법원장 국회 인준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동성애 문제가 부각되고 있고, 대법원장 후보자는 자신이 동성애를 지지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김명수 동성애 지지한 적 없어 ... 허위사실 유포에 심각한 우려””, 󰡔뉴스1󰡕 2017.9.20.]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을 지닌 이들만이 아니라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고 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하는 이들 중 상당수도 이러한 공격을 지지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젠더 폭력 개념을 둘러싸고 또 다른 인식론적정치적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권은 대통령 직속기구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하고 가칭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을 제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설치젠더폭력방지기본법 제정”, 󰡔KBS뉴스󰡕 2017.7.10.(http://news.kbs.co.kr/news/view.do?ncd=3513071)]이때 젠더 폭력의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적 소수자 일반을 지칭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며, 이러한 불분명함은 문재인 정권의 지지자들 사이에 성적 소수자에 대한 입장에 상당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반면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젠더 폭력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무지할 뿐더러 그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음이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홍준표, “젠더폭력이 뭔데? ... 여성정책토론회서 혼쭐”, 󰡔뷰스앤뉴스󰡕 2017.9.19.(http://www.viewsnnews.com/article?q=149523)]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들은 단순히 을이 아니라 을의 을이라고 불릴 만한 존재자들이며, 우리가 을의 민주주의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라고 간략히 규정할 수 있다면,[진태원,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앞의 글 참조.] 성적 소수자들의 문제야말로 을의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한 시금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을 또는 을의 을로서의 성적 소수자의 문제는 착취 관계나 정치적 지배 관계로 환원되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를 예속적인 지위에 놓이게 만드는 (불평등과 부자유로서의) 지배의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반면 국내의 혐오 논의는 푸코의 규율권력이나 통치성 개념보다는 크리스테바의 개념인 비체’(abject)에 입각하거나(특히 이현재 등이 그렇다) 아니면 넓은 의미의 인권의 문제설정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우리가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서, 그리고 에로스의 문제를 주체화 양식의 문제로 이해하는 그의 시각에서 이러한 쟁점을 사고하는 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이 글을 인도하는 또 다른 주요 관심사다.

 


II. 규율권력에서 통치성으로: 어떤 이행?

 

1. 규율권력과 예속적 주체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1975년 출간된 󰡔감시와 처벌󰡕에서, 평등과 자유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기원에는 예속적 주체화(assujettissement) 메커니즘으로서 규율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다음 두 개의 인용문은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의 이론적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잘 드러내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예속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M.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aris: Gallimard, 1975, p. 38;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서울: 나남, 1994, 60-번역은 수정.]

 

부르주아지가 18세기를 통해 정치적 지배 계급이 된 과정은 명시적이고 명문화되고 형식적으로 평등한 법적 틀의 설정과 의회제 및 대의제의 형식을 띤 체제의 조직화에 의지한 것이다. 하지만 규율 장치의 발전과 일반화는 이러한 과정의 어두운 이면을 만들어 놓았다. 원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권리 체계를 보증했던 일반적인 법률 형태는 이러한 사소하고 일상적이며 물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규율로 형성된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불균형적인 권력의 모든 체계에 의해 그 바탕이 만들어진 것이다. (...) 현실적이고 신체적인 규율은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자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 [Ibid., p. 258; 같은 책, 322~23-번역은 수정했으며 강조 표시는 인용자가 추가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푸코는 관계론적 권력론이라 부를 수 있는 관점에 입각하여 주체에 관한 서양 근대 철학 및 정치학의 관점을 뒤집고 있다. 곧 전자의 인용문이 인간 또는 주체에 관한 근대적인 관점을 뒤집고 있다면, 후자는 근대 정치의 질서에 관한 자유주의적계몽주의적 관점을 전복하고 있다.[푸코의 관계론적 권력론에 관해서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앞의 글 참조.]


데카르트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칸트 이래로[󰡔니체󰡕 2권에서 서양 철학사를 형이상학의 역사(또는 역운’(歷運, Geschick))으로 이론화하면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개념을 cogito me cogitare의 의미로 풀이하고 이를 주관성의 형이상학의 기원으로 제시한 사람은 하이데거였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이라는 고전적인 부르주아 혁명과 이에 관한 철학적 성찰 속에서 근대적 주체 개념이 성립했다고 본다면, 근대적인 주체의 기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사실 그에게는 근대적인 의미의 주체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칸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Etienne Balibar,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2011 참조.주체라는 범주는 서양 근대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존재해왔다. 근대 철학의 기본 범주로서 이해된 주체는 무엇보다 인식과 실천의 원리, 곧 인간의 모든 인식 및 도덕적 실천의 토대로 기능하며, 따라서 그보다 상위의 원리에 예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자로 간주된다. 또한 서양 근대 정치학의 지배적인 모델을 이루는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사회를 구성하려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근대 국가의 규범적 토대를 발견한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의 자명한 전제는 자유롭게 토론하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개인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푸코는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들의 권력을 자유롭게 양도하는 이상적 주체들에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상적 주체들 또는 자유로운 개인들은 권력 관계 이전에, 그리고 그 바깥에서 항상 이미 성립해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존재하고 재생산될 수 있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권력 관계는 사람들을 근대의 지배 질서가 성립하고 유지되는 데 필요한 순종적인 주체들로 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를 핵심 기능으로 삼는 권력 관계이며(푸코가 규율권력이라고 부른), 이러한 예속적 주체화를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들은 주체들로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적 주체들은 권력 관계의 기원에 놓인 정치적 질서의 창시자들이 아니라, 지배 질서에 예속되어 그러한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할 임무를 부과 받은 예속적 주체들이다.


여기서 영어로는 subject, 또는 불어로는 sujet라는 말이 지닌 이중적 의미를 유념해야 한다.[subject 내지 sujet 개념에 함축된 이중적 의미에 관해서는 Etienne Balibar, “Subjection and Subjectivation”, in Joan Copjec ed., Supposing the Subject, LondonNew York: Verso, 1994;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앞의 책 참조.] 근대 철학이나 정치학에 의해 subject가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로 부각되기 이전에, 또는 그 이면에서 subject는 예속적인 존재자, ‘신민’(臣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이다. “권력을 관계의 원초적 항들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할 게 아니라, 관계야말로 자신이 향하고 있는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인 한에서, 관계 자체로부터 출발해서 연구해야 한다. 이상적 주체들에게 그들이 스스로 예속될(assujettir) 수 있도록 그들 자신으로부터 또는 그들의 권력으로부터 양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어떻게 예속 관계들(relations d'assujettissement)이 주체들을 제작할(fabriquer) 수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M.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5-1976), Paris: Gallimard/Seuil, 1997;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김상운 옮김, 서울: 난장, 2015, 315번역은 수정했으며,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 철학과 정치학,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하는 근대 사회(곧 자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는 권력 관계 이전에, 그리고 그 바깥에서 이미 존재하는 자유로운 개인 주체들을 가정하고 있지만,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가정은 그 이면, 그 하부구조에서 작동하는 규율 권력, 곧 예속적인 주체들을 생산하는 예속적 주체화의 메커니즘을 은폐하고, 이에 따라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체들이란 사실은 이미 예속적 권력 관계들에 의해 생산된 예속적 신민-주체들이라는 점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규율권력에서 통치성으로

 

푸코의 주장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고, 특히 푸코의 규율권력론은 일종의 기능주의적 권력론이라는 고발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규율권력론에 따를 경우, 규율권력을 통해 제작된 개인들은 자본주의 체계의 재생산 속으로 완전히 포섭되기 때문에 더 이상 변혁이나 심지어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 이후 푸코의 작업은 규율권력론에 내재한 난점들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록이 유고집으로 출판되면서 우리가 더 잘 알게 된 것이 이 작업에서 통치 내지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통치성은 품행인도(conduire des conduites 영어로는 conduct of conducts)라고 규정할 수 있다.

 

2.1. 관계론적 권력론으로서 통치 개념

 

이것은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푸코가 말하는 통치성 내지 통치는 그가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서 이론화한 관계론적 권력론 또는 권력의 계보학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심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통치라고 말하는 것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에 의거하여 주권자인 국민(또는 인민)의 동의에 따라 선출된 합법적인 정부의 활동을 지칭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통치 개념이 법적 관점에 기반을 둔 권력론의 산물이라고 간주한다. 실제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서 푸코는 주권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법적 권력론을 생산적이고 다원적이며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관계론적 권력론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했으며, 이러한 권력론에 따라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발전시킨 것이 통치 개념이다. 1981~82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인 󰡔주체의 해석학󰡕의 한 대목은 이를 아주 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더 일반적인 통치성, 곧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된 통치성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권력 관계의 전략적 장으로 이해된 통치성의 문제에 권력, 정치권력의 문제를 위치시키면서 다룬다면, 우리가 통치성을 권력 관계가 갖는 유동성전환 가능성역전 가능성을 지닌 권력 관계의 전략적 장으로 이해한다면, 통치성 관념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요소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도로서의 정치권력에 관한 이론은 보통 권리 주체에 관한 법적 관점에 준거하는 반면, 통치성에 대한 분석다시 말해 역전 가능한 관계의 총체로서의 권력에 대한 분석은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 주체의 윤리에 준거해야 합니다. [Michel Foucault, L’herméneutique du sujet: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Paris: Gallimard/Seuil, 2001, pp. 241~42;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서울: 동문선, 2007, 283~84(번역은 약간 수정).]

 

2.2. 규율 개념의 진정한 함의


둘째, 새로운 통치 개념의 근저에는 권력과 주체의 관계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규율권력 이론의 핵심 중 하나가 예속적 주체화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주체가 권력 이전에 성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를 통해 비로소 주체로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것이라면,[이점에서 푸코의 규율권력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두 이론 사이의 연관성과 차이 및 갈등이라는 문제는 독립적으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기존의 논의로는 특히 Warren Montag, “Althusser and Foucault: Apparatuses of Subjection”, in Althusser and His Contemporaries: Philosophy's Perpetual War,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3 참조.] 주체가 권력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푸코를 기능주의자나 허무주의자라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푸코의 새로운 권력이론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여전히 자유와 대립하는 것으로, 곧 억압하거나 금지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권력 바깥에서만 자유가 가능하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푸코의 규율권력 개념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나는 비판이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체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통제를 가능케 하고 체력의 지속적인 복종을 확보하며 체력에 순종-효용(docilité-utilité)의 관계를 강제하는 이러한 방법을 규율’(discipline)이라고 부를 수 있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 139;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216.그리고 조금 뒤에서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규율의 역사적 시기는 신체의 능력 확장이나 신체에 대한 구속의 강화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신체가 유용하면 할수록 더욱 신체를 복종적인 것으로 만드는, 또는 그 반대로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하게 만드는 관계의 성립을 지향하는, 신체에 대한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는 시기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 139; 미셸 푸코, 같은 책, 217. 번역은 약간 수정했고, 강조는 인용자가 한 것이다.따라서 규율은 신체를 단순히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기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주체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이런 점에서 한 연구자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인용할 만하다. “그렇다면 규율, 감시 또는 파놉티즘 개념들은 가치론적인 측면에서 중립적이라는 점(또는 항상 그래야 마땅하다는 점)을 상기시켜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규율 또는 자기감시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며, 주체화 내지 자기 실천은 필연적으로 긍정적이고 탈소외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서술적인 것이며, 이 개념들이 지칭하는 실재들은 일정하게 정치적으로 규정된 저항들 내지 투쟁들의 관점에서만 비판될 수 있다.” Stéphane Legrand, “Le marxisme oubliée de Foucault”, in Actuel Marx, no. 36, 2004, p. 27. 강조는 원문.] 그것의 핵심은 신체를 더욱 더 유용한 신체로, 더 생산적이고 유능한 신체로 만들되, 동시에 그 신체가 권력의 지배적인 질서에 잘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역으로 지배적 질서에 잘 복종하는 것이 신체의 유용성을 증가시키는 조건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스피노자는 바로 이것을 수동 개념이라고 불렀다. 이에 관한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푸코: 관계론의 철학(), 서동욱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서울: 민음사, 2017 참조.이것은 신체로 하여금 일정한 매뉴얼 또는 표준적 규범(예컨대, 군대의 총검술이나 사격술, 학교의 글쓰기 자세, 공장의 생산 과정의 표준화, 감옥의 세세한 일과표 등)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렇게 해서 생산성을 높이고 신체의 능력을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신체가 권력의 지배에 잘 복종하게 되는 메커니즘이 확립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어쨌든 이것이, ()근대적인 주권 권력과 구별되는 규율권력의 특징이었다.

 

2.3. 규율 권력론을 넘어서

 

따라서 푸코를 기능주의자로 고발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당전제에 입각한 비판이지만, 낸시 프레이저나 찰스 테일러 등이 제기한 규범적 쟁점은 여전히 남게 된다. 곧 푸코 식의 규율권력론에 입각할 때 부당한 권력과 정의로운 권력의 차이,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권력과 이를 가능하게 하고 고무하는 권력 내지 역량의 차이는 어떻게 식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더욱이 근대 정치 및 윤리가 인식과 실천의 근거로서 주체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푸코의 규율권력은 이러한 주체를 권력의 산물로 간주하고, 따라서 주체는 본래적으로 예속적 주체일 수밖에 없다면, 이 문제는 더욱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푸코의 통치 개념은 관계론적 권력론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에 입각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푸코의 논점을 이해하려면 그가 권력과 지배 개념을 구별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자유들 사이의 전략적 게임으로서의 권력 관계이러한 전략적 게임은 어떤 사람들이 타인들의 행위를 규정하려고 시도하게 만들며, 여기에 대해 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규정되지 않게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처음의] 타인들의 행위를 역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보통 권력이라고 부르는 지배 상태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서, 권력 게임과 지배 상태에서 우리는 통치 기술을 갖게 됩니다. 통치 기술이라는 이 용어는 아주 넓은 의미, 곧 제도를 통치하는 방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통치하는 방식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닙니다.[Michel Foucault, “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in Dits et écrits, vol. II, p. 1547;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123-24. 번역은 다소 수정.]

 

푸코에게 권력은 지배 계급이 다소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계급 지배의 도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주체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전략적 게임이며, 또한 자유로운 주체들의 존재와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1982) in Paul Rabinow & Nikolas Rose eds., The Essential Foucault: Selections From the Essential Works of Foucault 1954-1984, New York: New Press, 2003, p. 342.따라서 권력 관계는 가변성과 역전 가능성(곧 통치와 피통치자의 지위)을 핵심으로 한다. 반면 푸코는 대개 권력으로 통칭되는 것을 지배라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권력과 달리 지배는 관계의 두 항 사이에 존재하는 비가역적이고 불평등한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갑과 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갑이 항상 갑의 지위에서 행위하고 을은 항상 을의 지위에서 행위하게 될 때가 바로 지배가 작동하는 경우이며, 역으로 갑과 을 사이에 가변성과 역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경우가 푸코가 말하는 권력 관계다. 따라서 권력은 자유나 해방의 대립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해방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되며(그 역도 성립한다), 해방은 어떤 권력의 지배적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권력 관계를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푸코가 규율 권력 개념을 통해 제시했던 주체와 권력의 관계가 상이한 방식으로 재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치 개념에 입각해 보면 규율 권력론의 특징과 한계는 다음과 같이 집약될 수 있다.


1) 권력 관계 이전에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주체들, 특히 인식과 실천의 중심으로서의 주권적 주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 철학 및 정치학의 인간주의적-계몽주의적 관점은 기각된다. 이러한 관점은 푸코가 후기에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관점이다.[푸코는 자신의 관점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다. “첫째, 저는 실로 도처에서 발견되는 주권적이고 정초하는 주체, 보편적 형식의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체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며, 그에 적대적입니다. 반대로 저는 주체는 예속화의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고, 또는 좀 더 자율적인 방식으로는, 고대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화, 자유의 실천들을 통해 구성된다고 믿습니다. 이는 물론 문화적 맥락에서 재발견되는 일정한 수의 규칙, 스타일, 관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Michel Foucault, “Une esthétique de l‘existence”, in Dits et écrits, vol. II, p. 1552.]


2) 주체는 권력 관계의 산물이지만, 이는 주체가 완전히 타율적이라는 것, 또는 전적으로 피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규율의 핵심은 신체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주체의 능력 내지 역량을 신장시키는 것이다.


3) 그런데 이러한 주체의 능력의 신장은 지배적인 권력에 대한 주체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규율 권력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되 권력의 인도에 순종하는 주체들을 생산하는 것, 곧 예속적 주체화의 작용이다.


4) 통치 개념을 제안하면서 푸코가 자신의 이전 작업에 대해 비판적으로 묻는 것은, 이것이 주체 생산의 유일한 방식인가, 주체화의 방식, 절차에는 이러한 방식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는 권력의 본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함축되어 있다. 주체가 권력의 산물이라는 것, 권력 관계의 핵심은 주체의 생산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푸코는 이미 규율권력론에서 권력 관계에 의해 생산된 주체는 전적으로 타율적이거나 피동적인 주체가 아니라는 점을 밝혔는데, 규율권력이 생산하는 주체는 유능한 주체, 효율적이고 우수한 수행성을 발휘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지배 권력 또는 권력의 지배적 관계에 대한 복종의 결과라는 점이다. 따라서 주체가 자신의 능력을 신장하는 길은 지배 권력이 부과하는 주체화 절차에 따르는 길밖에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푸코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984)라는 말년의 글에서 제기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질문이다. “어떻게 능력의 신장이 권력 관계의 강화와 분리될 수 있는가?”[M. Foucault, Dits et écrits, vol. II, p. 1595.]

 

3. 규율권력론의 세 가지 정정

 

3.1. 존재론적 정정


이러한 질문에서 통치 개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측면의 정정이 필요하다. 우선 관계론적 권력 개념을 존재론적 측면에서 더 심화할 필요가 있다. 통치의 문제설정에 입각해 보면 규율권력론에 함축된 권력 개념은 관계론적인 개념이기는 하되,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푸코가 통치의 문제설정에 따라 어떻게 권력을 새롭게 개념화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주체와 권력에서 통치성 내지 통치의 관점에서 권력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에게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고유한 행위에 대해 작용하는 행위 양식이다. 행위에 대한 행위(une action sur action), 잠재적이든 현행적이든, 미래의 행위든 현재의 행위든 간에 행위들에 대한 행위”[M. Foucault, Dits et écrits, II, p. 1055. 강조는 인용자.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푸코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행위가 정확히 말하면 가능성의 장()” 위에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권력 관계는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행위들의 집합이다. 권력 관계는, 행위하는 주체들의 행동이 기입되는 가능성의 장 위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고무하고 유발하고 우회하고 촉진하거나 아니면 더 어렵게 만들고 확장하거나 한정하고 개연성을 높이거나 저하시킨다.”[Ibid., p. 1056. 강조는 인용자.그리고 푸코는 이를 콩뒤트”(conduite, 영어로는 conduct) 개념, 품행개념과 연결시킨다. “‘품행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지닌 다의성과 함께 아마도 권력 관계에 존재하는 종별성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용어 중 하나일 것이다. ‘품행은 타인들을 (다소간 엄격한 강제 메커니즘에 따라) ‘인도하는행위이면서 동시에 다소간 개방된 가능성들의 장 속에서 처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권력의 행사는 품행들을 인도하는’(conduire des conduites, conduct of conducts) 것에, 그리고 개연성을 관리하는(aménager) 것에 있다.”[Ibid.]


이것은 간단해 보이지만, 이전의 규율권력론에 대한 중요한 존재론적 정정을 제시하는 정의다. 규율권력론에서 권력의 규율 기술은 신체에 대해 작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체를 직접, 무매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겨냥하는 대상인 신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신체 자신이 권력이 원하는 방식, 인도하는 방식대로 행위하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규율권력 개념은 이미 권력의 핵심은 행위에 대한 행위라는 것을 함축한다. 하지만 푸코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작용작용에 대한 작용내지 행위에 대한 행위를 구별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권력이 겨냥하는 신체는 피동적인 대상, 곧 외부로부터 어떤 직접적인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작용하게 되는 관성적인 물체가 아니라 스스로 행위하는 행위자, 따라서 일정한 능동성 또는 행위 능력(pouvoir)을 지니고 있는 행위자라는 점이다. 행위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해 작용하는 것을 푸코는 권력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구적 기술 관계 또는 객체적 능력”(capacités objectives)의 관계라고 부른다. 그런데 행위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현실태가 아닌 가능태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다수의 가능성들 사이에서의 선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권력의 행사를 타인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 양식으로 정의할 때, 이를 어떤 인간들의 다른 인간들에 대한 통치”(이 단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로 특징지을 때”, 여기에는 중요한 한 가지 요소, 자유라는 요소[Ibid.]가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하지만 이때 푸코가 말하는 자유는, 관계론적 권력론이 폐기한 법적인 권력론에 가정되어 있는 자유로운 주체, 다시 말해 권력 관계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주체의 자유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 대해서만, 그들이 자유로운한에서만 행사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주체라는 말을, 자신들 앞에 가능성의 장, 곧 다수의 품행, 다수의 반작용 및 다양한 처신 양식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갖고 있는 개인적이거나 집합적인 주체들로 이해하도록 하자.”[Ibid. 강조는 인용자.]

 

3.2. 윤리적 정정


이처럼 권력 관계가 가능한 행위들에 대한 행위를 의미하고, 여기에는 가능성의 장을 갖고 있는자유로운 주체가 전제되어 있다면, 규율권력은 권력 관계의 특수한 한 가지 방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규율에 대한 푸코의 관점에는 그 관계론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권력 관계를 맺는 파트너들사이의 대칭성이라는 논점이 결여되어 있다.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규율 권력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로 특징지을 수 있는 권력이다. 곧 규율의 관계에서 피통치자는 자신의 행위 능력을 신장하기 위해 통치자가 설정한 행위 내지 품행의 표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갖지 못한 (또는 매우 적은 가능성들만을 갖고 있는) 행위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때 피통치자에게서 윤리는 행위의 규칙 내지 법칙(곧 규율권력이 설정한 규범)에 맞춰 행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 통치의 관점에서 재정의된 권력 관계에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대칭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통치자만이 아니라 피통치자 역시 자기의 기술로서 윤리적 실천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 개념의 중심에는 주체화 양식의 관점에 근거를 둔 윤리적 실천의 문제가 존재한다. 푸코는 1980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서 주체성과 진리라는 제목 아래 이루어진 강연에서 통치의 문제를 두 가지 기술의 접합의 문제로 해명한다.[Michel Foucault, “About the Beginning of the Hermeneutics of the Self: Two Lectures at Dartmouth”, Political Theory, vol. 21, no. 2, 1993.] 그에 따르면 기술(technique)에는 세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사물들을 생산하고 변형하고 조작하는 생산 기술과, 기호 체계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작용 기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들의 행위를 규정하고 그들에게 어떤 의지들을 부과하고 그들을 어떤 목적 내지 목표에 종속시키는”[Ibid., p. 203.] 지배의 기술이 그것이다(다소간 용어상의 혼동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서 푸코가 지배의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다른 맥락에서 푸코가 통치술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성(sexuality)에 관한 탐구를 통해 이 세 가지 기술 이외에 또 다른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자기의 기술(techniques or technology of the self)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개인들이 그들 자신의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신체와 영혼,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에 대해 일정한 숫자의 작용을 실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전환시키고 변형하고 완전성과 행복, 순수성, 초자연적 능력 등과 같은 일정한 상태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Ibid.]을 의미한다. 통치는 바로 지배의 기술과 자기의 기술이 접촉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통치는 한편으로 개인들이 지닌 지배의 기술이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행하는 자기의 기술에 의거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 기술이 강압이나 지배의 구조로 통합되는 지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개인들 각자가 지닌 자기의 기술과 개인들 각자가 타인들의 행위를 인도하기 위해 행사하는 지배의 기술의 상호 전제와 상호 연관성, 상호 접촉 관계를 푸코는 통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의 범위가 보통 말하는 좁은 의미의 통치를 넘어서 인간들 사이의 훨씬 더 다양한 사적공적 관계로 확장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통치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대칭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가 단순히 외적인 강압 관계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며, 갑의 자기의 기술과 을의 자기의 기술 또는 갑과 을 각자가 실행하는 지배의 기술의 복합적 작용의 표현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을과 병, 또는 병과 정 등과 같은 또 다른 관계에 대해서도 타당할 것이다.

 

3.3. 정치적 정정: 탈주체화와 대항품행


이렇게 규율권력에 기반을 둔 권력론에서 통치의 문제설정으로 나아가면서 권력 개념이 존재론적이고 윤리적 측면에서 정정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도 정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새롭게 사고하는 방식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 1󰡕에서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으며 ... 권력과 관련하여 하나의 위대한 거부의 장소(반역의 정신, 모든 반란의 온상, 혁명가의 순수한 법칙)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제각기 특별한 경우인 여러저항들 이 있다”[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I, La Volonté de savoir, Paris: Gallimard, 1976, pp. 125-27;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서울: 나남, 2010(수정 3), 109-11.]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1978년 프랑스철학회에서 했던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는 더 나아가 비판을 “‘통치 받지 않기 위한 기예(art)’,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또 이런 대가를 치르면서 통치 받지 않으려는 기예’”[Michel Foucault, Qu’est-ce que la critique suivi de La culture de soi, Paris: Vrin, 2015, p. 37;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수양󰡕, 오트르망 옮김, 파주: 동녘, 2016, 45. 번역은 약간 수정.]로 정의하면서 탈예속화또는 탈예속적 주체화(désassujettissement)[Michel Foucault, Ibid., p. 39; 같은 책, 47.]를 비판의 본질적 기능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안전, 영토, 인구󰡕 강의록에서는 탈예속화 내지 탈예속적 주체화와 긴밀하게 연결된 또 다른 개념, 대항 품행(contre-conduite)라는 개념을 도입한다.[이 개념의 함의에 관해서는 특히 Arnold I. Davidson, “In Praise of Counter-Conduct”, in History of the Human Science, vol. 24, no. 4, 2011 참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 개념을 발전시키려는 최근의 시도들로는 특히 Daniele Lorenzini, “From Counter-Conduct to Critical Attitude: Michel Foucault and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Quite So Much”, in Foucault Studies, no. 21, 2016 Lauri Siisiäinen (2016) “Foucault and Gay Counter-Conduct”, in Global Society, vol. 30, no. 2, 2016 참조. 앞의 글은 대항 품행의 문제가 푸코 사상에서 비판 내지 비판적 태도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뒤의 글은 대항 품행에 입각하여 게이 운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논평하겠다.]


푸코가 말하는 대항 품행은 어떤 통치성의 인도에 따라 행위하는 대신, 그러한 통치성이 원하는 것과 다른 식으로 행위하는 것을 가리킨다. 푸코는 초기 기독교의 사목 권력의 특성을 인간의 품행을 대상으로 삼는 매우 특이한 유형의 권력”[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서울: 난장, 2011, 269.]이라고 규정하면서, 사목 권력은 동시에 품행과 관련된 특이한 반란”, “품행상의 반란”[미셸 푸코, 같은 책, 269-270.] 또는 품행상의 봉기”[미셸 푸코, 같은 책, 313.]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수반했음을 지적한다. “주권을 행사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과도 다르고, 착취를 확보하고 보장하는 [권력에 맞서는 경제적 반란]과도 구별되는 품행상의 반란의 사례로 푸코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12세기 여성수도원에서 일어난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 반란, 18세기에 나타난 비밀결사, 곧 프리메이슨이나 혁명가들의 비밀결사, 18세기 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의학에 대한 강한 거부 등의 사례를 든다. 그러면서 이러한 품행상의 반란을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으로서 대항 품행”[미셸 푸코, 같은 책, 285.]이라는 단어를 제안한다.


󰡔안전, 영토, 인구󰡕에서 대항품행 개념은 시론적이지만, 매우 중요한 개념적 위상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품행상의 반란 내지 품행상의 봉기가 단지 초기 기독교나 15~16세기 기독교의 전환기에서만 의미를 갖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봉기와 혁명의 조건이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다른 목표와 쟁점을 지닌 봉기와 혁명의 절차에서도 품행상의 봉기, 품행상의 반란이라는 차원이 늘 존재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 17세기 영국의 혁명에서 ... 프랑스 혁명에서도 ...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품행상의 봉기라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 등은 [그것의] 현시, 유일한 현시였습니다.”[미셸 푸코, 같은 책, 314. 강조 표시는 인용자.] 다른 한편 대항 품행은 국가 이성 및 내치(內治, police)의 도입을 통해 개시된 근대적 통치성과 대립하면서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대항 통치성으로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푸코는 맨 마지막 강의(197845)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이러한 대항 품행의 세 가지 형식을 지적한다. 첫 번째는 국가권력이 시민사회 속으로 흡수되는 것을 꿈꾸었던 19~20세기의 혁명적 종말론”[미셸 푸코, 같은 책, 481.]이며, 두 번째는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인구가 지닌 절대적 권리 ... 혁명 자체의 권리라는 형식이며, 세 번째는 사회의 진리, 국가의 진리, 국가이성 등은 이미 국가 자체가 보유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그 보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형식이다. 요컨대 시민사회를 국가에 대립시키는 것, 인구를 국가에 대립시키는 것, 국민을 국가에 대립시키는 것”[미셸 푸코, 같은 책, 483.]이 근대적 통치성과 대립하면서 그것과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어 온 대항품행의 형식들이라는 것이다. 대항 품행이라는 개념이 이처럼 󰡔안전, 영토, 인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지만, 다음 해의 강의에서는 더 이상 출현하지 않는다.


아무튼 예속적인 주체화 양식이 함축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 이를 위해 탈예속화 및 대항품행의 양식을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푸코가 규율권력론에 대해 제시하는 세 번째 정치적 정정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주체화의 문제로서 에로스

 

1. 주체화의 의미

 

이처럼 통치, 품행 인도, 대항 품행 같이,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 등장하는 푸코의 새로운 개념들을 통해 우리는 1976년 무렵부터 푸코가 예속적 주체화에서 탈예속화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사고하고자 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푸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 새로운 개념, 곧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용어는 1983년 무렵 푸코가 이런저런 학술지에 발표한 글에서 처음 발견된다.[가령 순결의 투쟁(Le combat de la chasteté), Communications, no. 35, 1983; 자기에 대한 글쓰기(L'écriture de soi), Corps écrit, no. 5, 1983; 쾌락의 활용과 자기의 기술(Usage des plaisirs et techniques de soi), Le Débat no. 27, 1983. 이 글들은 모두 Dits et écrits II권에 수록돼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푸코 자신에 의해 온전하게 이론적으로 가공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 제안될 당시에는 얼마간 애매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애매성은 주체화라는 개념이 한편으로는 지배 권력에 의한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예속적 주체 생산 양식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주체 형성 양식을 뜻하기도 한다는 데서 생겨난다.


한 편으로 주체화라는 개념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에서 도입한 예속화 개념의 연장선상에 사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주체화라는 개념은 객체화”(objectivation)를 뜻한다. 이 경우 주체화는 개인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주체들로 변형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푸코는 주체와 권력에서 바로 이러한 객체화의 관점에서 자신의 작업 전체를 분류한 바 있다. “나는 우선 지난 20여 년 동안 나의 작업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말하고자 한다. (...) 나의 목표는 우리 문화에서 인간이 주체로 되는 방식인, 상이한 양식들의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내 저작은 인간을 주체로 변형시키는 객체화의 세 가지 양식을 다루어왔다.”[M. Foucault, Dits et écrits, II, pp. 1041-42.]


첫 번째는 이른바 고고학 시기의 작업에 해당하는 것으로(1960~1969), 푸코는 이러한 작업을 자기 자신에게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질문양식들에 관한 탐구로 규정한다. 여기서 인간은 이러저러한 앎의 대상으로서 객체화된다. 두 번째는 1970년대에 푸코가 전념했던 이른바 계보학적 작업으로서, 여기에서는 내가 분할하는 실천들이라 부르게 된 주체의 객체화를 연구했다. 주체는 자기 내부에서 분할되거나 또는 다른 이들로부터 분할된다. 이 과정은 그를 객체화한다. 미친 자와 정상인 자, 병자와 건강한 자, 범죄자와 착한 소년들이 그 예들이다.”[Ibid.] 세 번째는 인간이 자신을 그 또는 그녀라는 주체로 전환시키는 방식(이것이 나의 최근 작업이다)”에 관한 작업이다. 푸코는 19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1984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바로 이러한 세 번째 작업, 곧 윤리적 주체화에 관한 작업에 전념한다.


푸코가 이러한 작업을 객체화의 한 양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푸코의 작업은 1970년대 수행되었던 권력의 계보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푸코의 관심은 1960년대 이래 서구 사회 및 비서구 사회(곧 탈식민주의 사회)에서 막 등장하고 있던 새로운 투쟁의 형식과 목표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 투쟁 유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배의 형식들(민족적, 사회적, 종교적)에 대한 투쟁이며, 두 번째는 개인들을 그들이 생산하는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착취 형식들에 대한 투쟁이고, 세 번째가 개인을 그 자신에게 묶어 놓고, 이런 식으로 그를 타인들에게 복종시키는 것에 대한 투쟁(예속적 주체화에 대한 투쟁, 주체성과 복종(soumission) 형식들에 대한 투쟁)”[Ibid., p. 1046.]이다. 이러한 투쟁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과학적 또는 행정적인 심문에 대한 거부이며, 권력의 테크닉과 형식을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때 공격의 대상이 되는 권력은 개인을 범주화하고 개인을 그의 개별성에 따라 표시하고 개인을 그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에 결부시키고, 그가 인정해야 하고 타인들이 그에게서 식별해내야 하는 진리의 법칙을 부과하는 권력, 개인을 주체들/신민들(sujets)로 만드는[Ibid.] 권력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주체화라는 개념은 이처럼 종속화 내지 객체화라는 뜻과 구별되는 좀더 적극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주체와 권력에서 이미 이러한 새로운 의미의 단초가 엿보인다. 푸코는 4절로 이루어진 이 글의 첫 번째 단락을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목표는 우리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ce que nous sommes, what we are)를 거부하는 것일 것 같다. (...) 우리 시대의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국가나 국가제도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국가로부터 그리고 국가와 결부되어 있는 개체화의 유형 둘 다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것이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수 세기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 온 이런 종류의 개체성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Ibid., p. 1051. 강조는 푸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의 존재를 거부할 수 있는가? 수 세기 동안 우리에게 부과되어온 개체성,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사실 말년의 푸코 작업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의 강의록, 특히 1980년대 초의 강의록들[󰡔주체의 해석학󰡕, 앞의 책;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Gallimard/Seuil, 2008; Le Courage de la vérité: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II: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4), Gallimard/Seuil, 2009.]이 밝혀주고 있는 것은 푸코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규율권력에 대한 분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윤리적 차원, 곧 자기로서의 주체가 자기 자신 및 타인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차원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푸코는 이를 통치 내지 통치성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기의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탐구하며, 이러한 탐구를 통해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개인들의 객체화 양식과 구별되는(따라서 그것의 역사적 한계 및 대안에 대해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고대적인 자기의 기술, 주체화 양식을 발견한다. 사실 푸코는 이미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성의 역사 3: 자기 배려󰡕에서 이러한 상이한 주체화 양식들의 특징과 차이에 관해 설명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의가 갖는 함의를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1980년대 초의 강의록들을 통해서다. 이 강의록들은 󰡔성의 역사󰡕 2권과 3권에 대한 초기 독해들이 제시했던 것처럼, 푸코의 실존의 미학이 관계론적 권력론과 단절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고대 그리스로마, 그리고 초기 기독교에 나타난 윤리적 주체화 양식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곧 푸코가 고대의 윤리적 주체화 양식을 찬양했다거나 이를 근대적인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생각, 아울러 그 핵심은 법적인 형식을 띤 주체화 양식에 저항하는 자기 제어또는 자기 주인화의 기술에 있다는 관점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주체화 양식의 단선적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긍정적이거나 그 자체로 부정적인 주체화 양식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오히려 이제 한계에 직면한 기존의 주체화 양식과 다른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모색하는 것이고, 과거의 주체화 양식들의 역사에 대한 검토를 통해 그 가능성의 지평을 좀더 넓히는 일이다.[이하에서는 원래 고대 그리스로마, 초기 기독교의 윤리적 주체화 양식들에 관한 푸코 분석들을 검토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전체 논문의 구도와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있어서 이 부분은 별도의 논문에서 다뤄볼 계획이다.]


2. 주체화, 대항 품행, 에로스

 

이러한 주체화 및 대항 품행 개념에 입각하여 푸코에게서 에로스의 문제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곧 푸코가 󰡔성의 역사󰡕 1권 및 2~3권에서 추구했던 작업은 사실은 대항 품행으로서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동성애자였으며, 동성애의 경험은 그의 지적 작업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은 그가 생전에 출간한 저작들 속에서 명시적인 주제로 다루어지기보다는 그의 저작의 암묵적인 실천적이론적 동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동성애자로서의 푸코의 경험이 그의 이론적 작업, 특히 그의 후기 주체화에 관한 문제설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고, 역으로 그가 주체화 개념에 입각하여 동성애 문제를 어떻게 이론화하려고 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재구성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것은 푸코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했던 여러 대담들이다. 푸코는 이 시기에 게이 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과 여러 차례 대담을 했으며, 이 대담을 통해 명시적으로 주체화 및 대항 품행에 입각하여 동성애 운동의 함의를 규명하려고 했다.


푸코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우정이라는 제목의 대담에서 동성애에 대한 단순화된 이미지, 동성애란, 거리에서 만난 두 명의 젊은 남자애들이 서로를 눈짓으로 유혹하고 서로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서로 쾌감을 느끼면서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Foucault, “Amitié comme mode de vie”, in Dits et écrits, vol. II, p. 983.]은 외관과 달리 기성사회가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그렇게 비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반면 동성애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동성애적] 성행위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적인 삶의 양식”[Ibid.]이다. 곧 이성애적인 사회 질서 및 관습, 규범과 맞지 않는 동성애적인 삶의 양식(또는 주체화 양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관습적인] 규범이나 확립된 행위 양식이 부재한 가운데새로운 관계 설정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관계들은 기존의 성적 관계들이나 삶의 관습 내에 단락(court-circuit)을 창출해내며, , 규칙, 관습이 존재해야 할 곳에 사랑을 도입한다.”[Ibid.]는 것이다. 푸코가 개인적인 동성애의 경험을 넘어, 동성애 운동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해내는 능력, 또는 대항품행의 가능성을 도입하는 힘이다.

 

[동성애] 문화는 개인들 사이에 진정으로 새롭고, 일반적인 문화적 형식과 동질적이지 않은, 또한 그러한 형식에 강요되지도 않는 관계 양상, 실존 양식, 가치 유형, 교환 형태를 발명해냅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게이 문화는 단순히 동성애자들을 위한 동성애자들의 선택으로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성애자들에게도 전달 가능한 관계들을 창출해낼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다소 전도시켜, 사람들이 이전 시기에 말했던 것처럼, “사회적 관계의 일반적 정상성 속에 동성애를 재도입하도록 하자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와 정반대의 것을 말해야 합니다.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에게 제안된 관계 유형들로부터 그것[동성애]이 가능한 한 멀리 탈주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직면해 있는 빈 공간 속에서 새로운 관계적 가능성들을 창출해내도록 하자.”[Foucault, “Le triomphe social du plaisir sexuel: Une conversation avec Michel Foucault”, in Dits et écrits, vol. II, p. 1130.] 

 

이 대목에서 드러나듯이, 푸코가 동성애자 운동에서 주목한 것은 좁은 의미의 인권 운동이나 인정 투쟁이 아니다. 곧 푸코는 기존 사회의 법이나 사회적 규범, 삶의 양식의 근저에 있는 일반적인 원칙, 곧 인권 등에 의거하여 소수자로서 동성애자들의 성적 권리 및 개인적 권리를 옹호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푸코가 보기에 새로운 법을 만들고 이것에 의거하여 동성애자들의 성적 권리와 개인적 권리를 보장하려고 하는 것은 (특히 동성애의 권리가 심하게 억압받고 사회적인 불관용의 대상이 되는 곳에서는)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혁신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성애자들의 결혼의 권리와 동일한 동성애자들의 결혼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곧 기존의 삶의 양식이나 규범적 관계를 되풀이하는 것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인적 권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성애적인 것과 동일한-인용자] 결혼 관계를 재생산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성취된 진보는 사소한 것이 될 것입니다.”[같은 글, p. 1128.]


오히려 푸코는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서 동성애자 운동에 고유한 창조의 능력, 기존의 사회 질서나 규범, 법체계가 구속하고 협소하게 만든 주체화의 능력 및 삶의 양식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확장할 수 있는 능력에 주목한다. 동성애자 운동이 이러한 대항 품행의 가능성, 탈예속화 내지 주체화의 전망을 발굴할 수 있을 때, 동성애자 운동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의 규범과 관계, 삶의 양식을 똑같이 영위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성애자들을 포함한 사회 전체의 성적 관계, 삶의 양식, 행위 방식의 변화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운동의 윤리적 의의는 정상성으로서의 보편성을 균열시키고 그 안에 차이를 도입할 수 있는가 여부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의 윤리를 확립하는 것은 오늘날 긴급하고 근본적인 과제, 정치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만약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와 다른,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저항의 지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 294.이러한 자기의 윤리, 주체화를 확립하는 데서 성의 문제가 특별히 중요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성이 우리 영혼보다 더 중요하고, 거의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해”[Michel Foucault, Histoire de la sexualité, t. 1, p. 206; 󰡔성의 역사 1󰡕, 181.]졌기 때문이다. 곧 현대 사회에서 성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쾌락과 고통, 비밀을 함축하고 있는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어떤 것, 우리의 자아 내지 자기와 거의 등가를 이루는 어떤 것이 된 것이다.


반면, 성이 이렇게 내밀해지면 내밀해질수록, 성은 더욱 더 공적 담론, 비판적 토론의 대상에서는 제외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철학이 성의 문제를 주제로 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허버트 마르쿠제나 빌힐렘 라이히, 또는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같은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통, 또는 정신분석학적인 전통 또는 조르주 바타이유 같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철학에서 성이라는 문제는 금기의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푸코가 󰡔성의 역사󰡕 연작을 비롯한 후기 작업에서 성의 문제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개인들 그 자체와 거의 동일시될 만큼 내면화되고 개인화되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인 침묵의 대상이 된 성의 문제야말로 예속화와 주체화, 품행 인도와 대항 품행의 쟁점이 집약된 주제였기 때문이다.

 

IV. 비판적 고찰

 

푸코의 사상은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 그것은 푸코의 이론적 작업의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인 철학 및 동시대 철학자들과 관련하여 철학자로서 푸코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보통 철학의 대상이라고 간주되는 것과 다른 대상들에 관심을 쏟고 그것의 이론적현실적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가령 그의 초기 저작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인 󰡔광기의 역사󰡕광기또는 광인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1970년대의 계보학 연구에서도 다른 권력에 대한 분석자들이나 정치철학자들과 달리 저명한 정치철학자들의 작업을 탐구하거나 국가 권력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감옥, 병원, 학교, 군대 같은 사회의 말단 조직들에서 작용하는 권력을 탐구했으며, 헤르큘린 바르뱅(Herculine Barbin), 피에르 리비에르 같은 비정상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을 또는 을의 을들의 삶과 그들을 분류하고 규율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권력이 곧 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둘째, 이는 방법론과도 연결된다. 푸코는 1975~76년 강의록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자신이 수행한 계보학적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에서 “‘예속된 지식의 반항”[Michel Foucault,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p. 9;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28. 강조는 인용자.]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예속된 지식(savoir)이라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학문과 인식의 체계 안에 포함되어 있되, 그 속에서 안정된 지위를 누리지 못하거나 그 과학성 내지 학문성을 의심받고 있는 지식을 가리킨다. 정신의학이나 정신병리학, 범죄심리학 등과 같이 푸코가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 또는 󰡔성의 역사󰡕 등에서 분석했던 지식들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한편 예속된 지식이라는 것은 권력과 지식의 전문가들의 대상이 갖고 있는 지식을 뜻한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지식, 정신병리학의 대상이 되는 비정상인들의 지식 등이 그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예속된 지식을 분석하고 드러냄으로써 국지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들의 구체적인 기능 방식을 밝혀내려고 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이런 지식들과 권력들이 우리 사회와 역사, 정치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드러내려고 했다. 이 때문에 푸코는 자신이 일반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문제를 극단적으로 파편화거나 국지화’”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탐구 방식의 정당성을 굳게 주장한다.

 

권력의 문제란, 광기, 의학, 감옥 등등의 문제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들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문제로서, 어떠한 이론 체계도역사철학도, 일반적인 사회이론 혹은 정치이론에서도다루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 정신병자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 병동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간호사의 일은 무엇인가? 병자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 내가 제기하는 문제들, 즉 일상생활과 관련된 성, 광기, 범죄 등의 복잡함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 문제들을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풀뿌리 수준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발언과 정치적 상상의 권리를 사람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는,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작업이 필요할 겁니다.[미셸 푸코, 󰡔푸코의 맑스: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승철 옮김, 서울: 갈무리, 2004, 142~152. 이것은 철학자 또는 이론가들이 역사를 소비하는 데, 곧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역사를 사용하는 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직접 역사적 분석을 수행하고자 노력”(같은 책, 121~22)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방법론적 원칙과 연결되어 있다.]

 

셋째, 권력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푸코의 권력 개념이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법적인 권력론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에 따르면 법적인 권력론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는 권력의 핵심을 금지하고 허가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권력의 실제 작동방식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권력 또는 지배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사고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특히 이는 공적인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는 아래쪽에 위치한 사람들, 을들 및 을의 을들이 예속적 지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반면 푸코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가 196868혁명 이후에 권력에 관한 탐구에서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예속된 사람들이 스스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나는 권력의 현실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고심해 왔습니다. 내가 이 작업을 한 이유는, 그 권력 관계 속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천과 저항, 반란을 통해 그것들로부터 탈출하고, 그것들을 변환시켜 더 이상 예속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미셸 푸코, 같은 책, 164~65.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푸코의 권력론에 의거하여 우리는 을과 을의 을이 누구인지 조금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을은 피통치자, 따라서 권력 관계에서 통치자에 의해 행위들의 가능성을 일정한 방식으로 제한당하는 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을의 을은 이러한 가능성이 극도로 축소된 행위자, 따라서 통치자들이 부과한 매우 한정된 방식 이외의 다른 행위 양식을 시도하거나 사고하기 어려운 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있다. 푸코의 개념을 따른다면, 이들은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 따르도록 강제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푸코가 지배 상태라고 부른 상태에 가까이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성적 소수자들을 을의 을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들이 갑(또는 여러 유형의 갑들)으로서의 통치자들이 부과하는 품행의 방식과 다른 식으로 행위하고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극도로 축소된 행위자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갑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갑질은 단지 법적(계약적)제도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푸코가 말하는 넓은 의미의 품행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성적 소수자들이 법적제도적인 틀 내에서 이성애 연인들과 동등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성적 지향을 표현하고 결혼을 비롯한 결합 양식을 추구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감추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자기 제한 및 은폐에 실패하거나 그것을 거부한다면, 여기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이러한 을의 을로서의 성적 소수자들이 강압적인 형식의 예속적 주체화에 저항할 수 있는지, 이러한 강요된 예속적 주체화에 맞서 대항 품행을 수행하고 탈예속화 및 다른 형식의 주체화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물론 성적 소수자들에게만 고유한 질문은 아니다. 그것은 을들 일반 및 특히 을의 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자들(가령 장애인들이나 무국적자들, 또는 중첩된 방식의 예속과 종속, 착취를 경험하는 이들) 일반에게 모두 해당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들의 대항 품행 양식과 관련하여 푸코 자신의 몇몇 인터뷰들만이 아니라, 푸코에서 영감을 얻은 퀴어 이론가들 및 운동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경향이 존재한다. 그것은 성적 소수자들의 대항 품행의 핵심을 기존의 성적 질서 및 문화적 질서에 대한 위반에서 찾으려는 경향이다. 이는 1990년대 게이 및 레즈비언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으며, 최근에도 다수의 이론가들이 이러한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퀴어 이론가들의 입장에서는 남성 가부장제의 억압적 질서를 강조하고 여성의 평등 및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조차 이성애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해방적이지 못하며,[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파주: 문학동네, 2008 참조.] 진정한 의미의 대항 품행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이고 유기체적인 질서에 기반을 둔 성적 질서도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신신체의 이분법 및 이성애동성애라는 관례적 이분법까지도 중단”[Lauri Siisiäinen (2016) “Foucault and Gay Counter-Conduct”, in Global Society, op. cit., p. 303.]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퀴어 개인들 및 집단들에 고유한 정서적 관계 및 문화적 태도(가령 공유(sharing)와 끊임없는 실험과 생성적인 삶의 양식) 등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가령 Mark Kingston, “Subversive Friendships: Foucault on Homosexuality and Social Experimentation”, in Foucault Studies, Vol. 7, 2009, pp. 717; Steve Garlick, “The Beauty of Friendship: Foucault, Masculinity and the Work of Art”, in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Vol. 28, No. 5, 2002를 각각 참조.]


하지만 한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이것이 과연 푸코적인 의미의 대항품행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은 “‘사회적인 것을 고질적으로 규범적인 것으로 구성함으로써 ... 격렬하고 독특한 성적 향락이 주는 쾌락이 ...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에 고유한 이성애 규범적이고 재생산중심적인 논리에 포섭되지 않는 위반적이고 (따라서) 저항적인 경험의 지평에 접근하는 독특한 지점을 제시해줄 것이라고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퀴어의 성적 경험을 이성애적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하고 몰아적(沒我的)인 것으로 제시하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그만큼 그것을 시공간 바깥에, 의미의 역사적이고 사회적 영역 바깥에[Shannon Winnubst, “The Queer Thing about Neoliberal Pleasure: A Foucauldian Warning”, Foucault Studies, Vol. 14 (2012), p. 95.] 위치시키고, 따라서 탈역사화하는 위험을 겪게 될 것이다.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푸코의 비판 개념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자기(self)는 자기 자신을 형성하지만, 주체화 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련의 형성적인 실천들 내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한다. 이러한 주체화 양식들에 의해 그것의 가능한 형식들의 범위가 미리 한정된다는 사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기가 온전하게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 하지만 만약 이러한 자기 형성이, 어떤 이가 그에 따라 형성된 바로 그 원칙들에 대한 불복종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이 경우 미덕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탈종속 내에서 형성하는 실천이 되며, 이는 이 자기가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탈형식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을 의미한다.[Judith Butler, “What is Critique? An Essay on Foucault’s Virtue’, in David Ingram ed., The Political, Oxford: Blackwell, 2001, p. 226.]

 

곧 주체로서의 자기 또는 자기로서의 주체는 항상 이미 권력 관계 내에 실존하며, 따라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형성하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방식은 항상 이미 기존의 권력 관계 및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권력 관계 및 주체화 양식 바깥에, 그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 내지 자기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 기존의 권력 관계와 주체화 양식이 부과하는 정체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인 것은 아니다. 주체의 자기 형성은 자신이 그 속에 존재하고 또한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그 권력 관계 및 주체화 양식에 불복종하여, 자신에게 부과된 (특정한)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탈-주체화하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권력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행위이며, 따라서 자신이 작용하는 대상의 행위 능력 및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주체화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주체가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권력 관계가 행위자들의 자유를 전제한다면, 그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실행하는 방식(또는 그 가능성의 범위)권력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버틀러가 말하듯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탈형식화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곧 탈-주체화, -예속화라는 것은 주체의 자기 무화(無化)의 위험을 항상 내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지적이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상당히 제한적인 함의를 갖는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기존의 주체화 양식에 저항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능성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푸코는 권력 관계와 지배의 상태를 구별함으로써 기능주의 내지 허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났지만, 우리가 규율권력과 같은 또는 더 심한 경우는 노예제와 같은 지배 상태에 처해 있을 때 여기에서 어떻게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대칭적 관계로서의 권력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곧 푸코 식으로 말하면 해방/자유화(liberation)와 자유의 관계에 대한 질문,[“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in Dits et écrits, vol. II, op. cit;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 앞의 책 참조.] 또는 에티엔 발리바르 식으로 말하면, 해방(emancipation)과 변혁(transformation), 시민다움(civility)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변하지 않았다. 이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론적 가능성 및 윤리적 자기 관계의 가능성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째, 다양한 형태의 권력 관계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강화하는지 또 때로는 서로 갈등 및 길항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푸코는 때로는 마치 주권적 권력과 규율 권력, 그리고 생명 권력과 신자유주의적 통치성 사이에 역사적인 계승 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이점에 관해서는 Thomas Lemke, “Foucault, Politics and Failure: A Critical Review of Studies of Governmentality”, in Jakob Nilsson & Sven-Olov Wallenstein eds., Foucault, Biopolitics and Governmentality, Huddinge: Sodertorn University the Library, 2013 참조. 곧 주권적 권력이 전근대적인 또는 절대주의적인 군주정 시기의 권력 유형이라면, 규율 권력은 17세기 후반에, 그리고 생명 권력은 18세기 이후,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20세기에 등장한 권력이라는 식(따라서 마치 상호 대체의 연속적인 관계에 있는)의 역사적 서사를 제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권력들은 계승 관계나 대체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전제하거나 강화하고 또는 갈등을 빚는 복잡한 연관망 속에서 작동한다. 가령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기업가 주체를 생산함으로써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규율 권력과 결합하기도 하고(예컨대 대학이 점점 기업화되고 기업에 필요한 인적 자원 양성소로 변화하는 것이나 사회 곳곳에서 점점 확산되는 인턴제도 같은 것 또한 분단 체계 속에 놓인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있는 군사 문화 등이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때로는 주권적 권력을 불러오기도 하며(중국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시진핑이나 러시아의 푸친, 미국의 트럼프 등), 새로운 생명 권력과 결합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들이 동시에 그 권력에 고유한 주체화 양식들을 수반하는 것이라면, 대항 품행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이 권력들이 작동하고 결합되는, 또는 서로 갈등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과 분리될 수 없다. 을의 을로서 성적 소수자들의 대항 품행, -예속화의 실천에 관한 질문의 경우에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 푸코의 이론은 필수적인 준거점이 되겠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낸시 프레이저(1982). 푸코의 권력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경험적 통찰과 규범적 혼란, 정일준 엮음,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서울: 새물결, 1994.

미셸 푸코(1990a).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 문경자신은영 옮김, 서울: 나남출판사.

(1990b). 󰡔성의 역사 3: 자기에의 배려󰡕, 이혜숙이영목 옮김, 서울: 나남출판사.

(1994a). 주체와 권력,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1994b).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기 배려,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2003).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서울: 나남.

(2004). 󰡔푸코의 맑스: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승철 옮김, 서울: 갈무리.

(2007). 󰡔주체의 해석학: 1981~82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심세광 옮김, 서울: 동문선.

(2010).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 이규현 옮김, 서울: 나남(수정 3).

(2011). 󰡔안전, 영토, 인구: 1977~78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오트르망 옮김, 서울: 난장.

(2012).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978~79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오트르망 옮김, 서울: 난장.

(2015).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975~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김상운 옮김, 서울: 동문선.

(2016). 󰡔비판이란 무엇인가?/자기 수양󰡕, 오트르망 옮김, 서울: 동녘.

사토 요시유키(2012). 󰡔권력과 저항󰡕, 김상운 옮김, 서울: 난장.

심세광(2011). 푸코에게 주체란 무엇인가? 실천이론으로서 푸코의 주체이론의 변모, 󰡔문화과학󰡕 65.

애너메리 야고스(2012). 󰡔퀴어이론 입문󰡕, 박이은실 옮김, 서울: 여이연.

위르겐 하버마스(1994).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윤보라 외(2015).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서울: 현실문화.

이현재(2016). 󰡔여성혐오, 그 후󰡕, 파주: 들녘.

주디스 버틀러(2008).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조현준 옮김, 파주: 문학동네.

진태원(2012).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 2012.

        (2017a). 스피노자와 푸코: 관계론의 철학(), 서동욱진태원 엮음, 󰡔스피노자의 귀환󰡕, 서울: 민음사.

        2017b).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 󰡔황해문화󰡕 96.

홍재희 외(2017). 󰡔그건 혐오예요󰡕, 서울: 행성B(행성비).

Balibar, Etienne(1994). “Subjection and Subjectivation”, in Joan Copjec ed., Supposing the Subject, LondonNew York: Verso, 1994.

        (2011). “Citoyen sujet”, in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Bevir, Mark(1999). “Foucault and Critique: Deploying Agency against Autonomy”, Political Theory, vol. 27, no. 1.

Butler, Judith(1999).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LondonNew York, Routledge(2nd Edition).

        (2001). What is Critique? An Essay on Foucault’s Virtue’, in David Ingram ed., The Political, Oxford: Blackwell.

Davidson, Arnold I.(2011). “In Praise of Counter-Conduct”, in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vol. 24, no. 4.

Dews, Peter(1987). Logics of Disintegration: Post-tructuralist Thought and the Claims of Critical Theory, LondonNew York: Verso, 1987.

Foucault, Michel(1975). Surveiller et punir, Paris: Gallimard.

(1976). Histoire de la sexualité I, La Volonté de savoir, Paris: Gallimard.

(1983). “Sujet et pouvoir”, in DE I.

(1984a). Histoire de la sexualité II, Le souci de soi, Paris: Gallimard.

(1984b). “L'éthique du souci de soi comme pratique de la liberté”, in DE II.

(1997).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

(2001a). Dits et écrits, vol. I-II, Paris: Gallimard.(DE I-II로 약칭)

(2001b). L’herméneutique du sujet: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Paris: Gallimard/Seuil.

(2004a).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Gallimard/Seuil.

(2004b).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Paris: Gallimard/Seuil.

(2008).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2-1983), Paris: Gallimard/Seuil.

(2009). Le Courage de la vérité: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II: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4), Paris: Gallimard/Seuil.

Huffer, Lynne(2009). “Foucault’s Ethical Ars Erotica”, in Sub-Stance, vol. 38, no. 3.

        (2010). Mad for Foucault: Rethinking the Foundations of Queer Theor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Legrand, Stéphane(2004). “Le marxisme oubliée de Foucault”, in Actuel Marx, no. 36.

Lemke, Thomas(2002). “Foucault, Governmentality, Critique”, in Rethinking Marxism vol. 13, no. 4.

        (2010). “Foucault’s Hypothesis: From the Critique of the Juridico-Discursive Concept of Power to the Analytics of Government”, in Parrhesia, no. 9.

        (2013). “Foucault, Politics and Failure: A Critical Review of Studies of Governmentality”, in Jakob Nilsson & Sven-Olov Wallenstein eds., Foucault, Biopolitics and Governmentality, Huddinge: Sodertorn University the Library.

Lorenzini, Daniele(2016). “From Counter-Conduct to Critical Attitude: Michel Foucault and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Quite So Much”, in Foucault Studies, no. 21.

McNay, Lois(1991). “‘The Foucauldian Body and the Exclusion of Experience”, in Hypatia, vol. 6, no. 3.

        (1994). Foucault: A Critical Introduction, Cambridge: Polity Press.

Montag, Warren(2013). “Althusser and Foucault: Apparatuses of Subjection”, in Althusser and His Contemporaries: Philosophy's Perpetual War, De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3.

Rajchman, John(1991). Truth and Eros: Foucault, Lacan, and the Question of Ethics, New YorkLondon: Routledge.

Siisiäinen, Lauri(2016). “Foucault and Gay Counter-Conduct”, in Global Society, vol. 30, no. 2.

Taylor, Charles(1984). “Foucault on Freedom and Truth”, in Political Theory, vol. 12, no. 2.

Vlieghe, Joris(2014). “Foucault, Butler and corporeal experience: Taking social critique beyond phenomenology and judgement”,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vol. 40, no. 10.

Winnubst, Shannon(2012). “The Queer Thing about Neoliberal Pleasure: A Foucauldian Warning”, in Foucault Studies, no. 14.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얄라알라 2017-10-3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고 클릭했다가....출력해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야하는 글이었네요. 공유 감사합니다.

balmas 2017-11-01 01:2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감사합니다.

dldiddn8429 2017-11-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많이 배워 갑니다!!

2017-11-04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7-11-04 23: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데리다 철학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말씀하신 그 논문은 지금 다듬고 있고, 내년 봄쯤에 학술지에 발표할 계획이니, 그때쯤이면 완성된 글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

dldiddn8429 2017-11-0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벌써 아시겠지만, 서교인문사회과학연구실에서 운영하는 "웹진 인무브"에 제가 번역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공산주의와 시민성: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제가 번역하고 있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그린비 출판사 간행 예정)에 수록된 글입니다. 



그밖에도 "웹진 인무브"에는 여러 흥미롭고 유익한 글들이 많이 있으니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http://en-movement.net/category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즈의고양이 2017-09-2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goo.gl/UV4Exq

혹시나 (저처럼) 진태원샘의 글을 두리번거리며 찾으시는 분들을 위해 찾아보았습니다. ^^;; (댓글에 하이퍼링크가 안 걸리면 복사&붙여넣기를...;;)
 

철학연구회에서 펴내는 [철학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여기 올리는 판본은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판본이니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은 


[철학연구]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


 

1. 발리바르 폭력론의 문제설정

 

폭력이라는 문제는 자명한 문제이거나 무기력한 문제가 되기 쉽다.[이하 1절은 논의는 {폭력과 시민다움} [역자 후기]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폭력의 문제가 자명한 문제인 이유는, 폭력을 비판하거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명 원칙인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비폭력이,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가장 자명한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폭력의 문제가 무기력한 문제로 간주되는 이유는,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대응할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폭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널리 의지하는 것은 법과 공권력이다. 그런데 만약 법과 공권력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곧 법과 공권력 자체가 지배를 위한 수단이거나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또 다른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비단 내전이나 준 내전 상태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또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만 제기되는 질문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국가 폭력의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거니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국가 폭력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2014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침몰해가는 배 안의 승객들에 대한 국가의 태만한 무관심에서, 냉혹한 폭력 기계 또는 치안 기계로서 국가의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진태원 2015b 참조).


20세기 초에 이미 막스 베버가 국가를 적법한 (또는 적법하다고 간주되는) 폭력Gewalt이라는 수단에 기반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라고 규정했거니와, 독일의 비평가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벤야민 2008a)에서, 또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데리다 2004)에서 각각 불법적인 폭력 대 정당한 공권력이라는 구도가 지닌 허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 바 있다.(진태원 2010 참조) 따라서 공권력 역시 불법적인(또는 불법적이라고 간주되는) 폭력과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물론 이것은 정당한 권력과 부당한 권력, 권력과 폭력, 합법적 질서와 비합법적 무력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가 자명한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역사적 상대성에 입각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0)의 평주를 참조.] 폭력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또 하나의 폭력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문제는 비폭력의 자명함과 대항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사이에서 순환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에 따르면 폭력의 문제,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개념 자체의 개조”(Balibar 2010c, 42)를 요구하는 문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그의 정치철학의 개념적 독창성 및 이론적 적합성을 측정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사유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의 핵심을 이룬다.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들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고한다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주제는 가령 데리다[특히 데리다(2004) Derrida(2003) 참조. 후자의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데리다 2003), 번역이 좋지 않아 참조하기 어렵다.]나 아감벤[특히 Agamben(1998); 아감벤(2008); Agamben(2005); 아감벤(2010) 참조.] 같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의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폭력의 문제를 해방의 관점에서 사고하지만, 이들은 맑스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게발트’: 맑스주의 이론사에서 본 폭력과 권력이라는 논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글에서도 늘 맑스주의를 몰락하게 만든(따라서 그것이 재개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아포리아라는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발리바르(2012) 참조. 사실 발리바르가 폭력에 관해 처음으로 발표한 글에서도 폭력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Balibar(2010c)에 수록된 Violence et politique: quelques questions참조. 이 글은 1992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현대 정치철학의 동향에 대해 얼마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맑스주의의 역사(그 쟁점들과 모순들)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거니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러한 역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오랜 천착과 더불어 상당한 지적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발리바르 폭력론의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의 핵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이라는 관점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이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폭력을 대항폭력이나 비폭력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폭력의 문제설정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을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폭력을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특히 지젝(2011) 참조. 지젝과 발리바르 폭력론을 비교하고 있는 김정한(2011)도 참조. 김정한이 발리바르의 폭력에 관한 글이 많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과 시민다움󰡕의 존재를 간과한 발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의 문제를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정치의 문제는 순수한 힘의 문제가 된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듯이 인간 역사 속에서도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무력 다툼만이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다). 고전적인 맑스주의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지배 세력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정당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 및 피지배 계급들의 대항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항 폭력은 착취 없고 지배 없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정당한 목적이 수단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이는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사르트르가 대표했던 관점이기도 하다.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에 대해서는 베르네르(2012). 또한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지만 좀 더 미묘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입장에 대해서는, 메를로-퐁티(2004) 참조.] 따라서 폭력은 수단 내지 전술의 문제일 뿐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좌파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관점 속에서 맑스주의를 역사적 몰락으로 이끈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


반대로 비폭력의 관점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폭력 그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한다. 비폭력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악의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비폭력의 관점은 목적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간에 폭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비폭력의 관점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선악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반대로 악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 내지 인권을 옹호하려는 이러한 비폭력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선의 존재론적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학(및 따라서 선에 근거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알랭 바디우(내지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발리바르(2012), 150 이하.]  하지만 발리바르는 폭력은 역사의 동력중 하나이며, “고유한 창조성’”(발리바르 2012, 124)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에, 폭력을 무차별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비폭력의 관점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운동의 경우 그것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폭력에 맞선 정치 투쟁의 한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민다움civilité의 한 전략으로서 독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가령 레닌(또는 마오) 같은 사람이 발전시킨 바 있는 맑스주의 전통 내의 시민다움 전략과 대조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Étienne Balibar, “Lénine et Ghandi”(Balibar(2010c)에 수록) 참조. 또한 간디와 마오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 Balibar(2011)도 참조.]


이러한 관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는 문제로 다룬다. 이것은 곧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일차적인 수준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관련된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정치(특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이든 민중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간에,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 한 정치가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보기에 폭력, 특히 그가 극단적 폭력extrême violence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또 그것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감축할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은 가운데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거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공문구에 그치기 십상이다.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경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이라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마지막으로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은 반()폭력의 문제를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의 발명의 문제와 연결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사실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발터 벤야민 이후, 또 한나 아렌트[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저작은 폭력론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관점에서, 폭력론󰡔혁명론󰡕,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된 아렌트의 몇몇 보수적인 테제를 탈-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폭력론(아렌트(2011)에 수록) 및 아렌트(2006) 참조. 아렌트에 대한 발리바르의 독해로는,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발리바르(2010) 7)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을 각각 참조.]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들뢰즈와 가타리의 폭력론은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실로 군주정 체제의 최고의 비밀monarchici summum arcanum, 그 주요 관심사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을 매어놓아야 할 두려움을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Spinoza(1925), 7. 이 질문은 󰡔()오이디푸스󰡕의 화두이자 또한 󰡔천 개의 고원󰡕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와 모욕, 예속을 감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착취와 굴종, 예속을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라이히가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몰인식이나 미망에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욕망에 의한, 욕망의 견지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사상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군중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들뢰즈가타리(2014) 64-65(강조는 들뢰즈-가타리가 한 것이고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자크 데리다(데리다(2004) 및 데리다(2014) 참조) 이후 현대 폭력론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극복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 정치철학이 역사적 맑스주의의 몰락과 파시즘(또는 전체주의’)의 유령이라는 20세기의 두 가지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프롤레타리아운동이자 계급투쟁이론이라는 자신들의 토대 위에서 나치즘과 대결하는 데 무력했으며, 나치즘을 분석하고 나치즘이 위력적인 이유들을 이해하는 데 무능력했(발리바르(2010), 188. 강조는 발리바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유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가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해방의 정치가 어떻게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데리다 식으로 표현하면) 상속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가 그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무능력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한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수의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러한 한계를 지양하거나 전위(轉位)시키려는 다수의 실천 전략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독창성은, 거의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반()국가적인 관점, 더 나아가 반()제도적인 관점을 택하고 있는 데 반해(가령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현대 정치철학에서 반()국가적 관점 및 메시아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는 Dean & Villadsen(2016)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2012) 및 진태원(2014)를 각각 참조.]), 파시즘과의 대결이라는 문제,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의 퇴치라는 문제를 시민권 제도의 쇄신 내지 재발명의 문제와 결부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권 제도야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 곧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을 이루며, (정치적) 주체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발리바르의 깊은 이론적 신념에서 비롯하는 생각이다. 반폭력의 정치가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 과제 중 하나를 이룬다면, 그것은 극단적 폭력의 메커니즘이 폴리테이아 또는 시민권 헌정 내부에서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시민권의 재발명이라는 과제가 반폭력의 정치를 위한 조건을 이룬다면, 그것은 시민권의 재발명 없이 정치적 주체화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극단적 폭력 개념

 

반폭력의 정치철학의 두 가지 이론적 핵심은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은 몇 가지 개념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2.1.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은 우선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 경우 정치는 개인들과 그들이 일부를 이루는 공동체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립하는 근본적인 양식, 즉 개인들을 집단화하고 역사적 집합체의 성원들을 개인화하는 (물질적이자 상징적인) 양식(발리바르 2012, 101)으로 규정된다. 이처럼 넓게 정의된 정치에는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정치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정치까지 포함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맑스주의적인 정치, 곧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게발트라는 논문에서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맑스의 두 가지 방식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을 “‘자연화하려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으로 통합’”(발리바르 2012, 37)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지닌 허무주의적인 차원을 지칭하게 된다. 곧 맑스는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산양식과 달리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자신들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재생산 조건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부르주아지 자신들의 존재 조건을 파괴하게 된다”(발리바르 2012, 42)고 간주한다. 이는 특히 󰡔자본󰡕 1권의 노동일에 관한 분석이나 기계와 대공업에 관한 분석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경향적인 과잉착취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살아 있는 원천, 곧 대지와 노동자를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을 발전시킨다”(발리바르 2012, 44)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경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이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맑스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적대적인 두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한 계기로 간주하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에서 정치의 실재le réel de la politique라고 불릴 수 있는 것, 즉 정치에 비극적 성격을 부여하는 예견 불가능한 것 내지 계산 불가능한 것”(발리바르 2012, 37. 강조는 발리바르)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정치의 실재라는 라캉적인 정식화가 시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극단적 폭력에 대하여 그 적대자들이 맞세우는 혁명적 폭력이 과연 극단적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맑스가 다분히 회의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압력을 받아 국가가 자본에 대하여 개혁을 강제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시초 축적이 산출하는 과잉착취와 극단적 폭력의 효과를 주변부로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성이라는 생각에 전제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극단화 경향이 다른 수단들을 통해 완화되거나 우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과연 혁명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이다. 맑스 자신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보여주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지지였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궁핍화 과정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 또는 적어도 그 중 일부는 이러한 궁핍화 과정 및 착취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본과 그 대표자들의 지지자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이후의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문화산업론(프랑크푸르트학파), 이데올로기론(알튀세르), 통제사회론(들뢰즈)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예속의 효과를 낳는 예속적 주체화 작용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의 주체화, 곧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로의 전화는 무한정하게 멀어지는 지평으로, 그럴 법하지 않은 반경향으로, 심지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기적적인 예외로 나타”(발리바르 2012, 56)나게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이 게발트라는 것이 마음대로 활용 가능한 도구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이 문제는 혁명적 계급의 조직화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조직화가 필수적이고 조직화를 위해서는 노동자 조직, 특히 노동자 정당이 불가결하지만, 이러한 정당이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일부가 아닐 수 있는가, 또는 국가장치의 전도된 거울 이미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실로 19세기 말 노동자 계급 정당이 등장한 이래, 또한 러시아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구성된 이래, 맑스주의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1970년대 말-80년대 초에 발리바르 연구의 중심 주제를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들이다. 이 주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탐구는 특히 다음 연구에 집약되어 있다. “La vacillation de l'idéologie dnas le marxisme”(Balibar(1997)에 수록). 이 글의 국역본은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이 시기 발리바르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논의는 서관모(2011)을 참조.] 


자유주의 정치의 경우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제, 일차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의 이중적인 본성에서 생겨나는 문제다. 곧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주의적 측면을 구현하는 국가로,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을 제도화하고 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국가이며, 이러한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치안 기계로 전화될 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는 법치국가이지만 또한 치안국가이기도 하다. 개인들과 집단들을 시민들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국가이지만 또한 반항자, 비정상인, 일탈자 및 이방인들을 배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사회국가이지만 또한 자본주의 시장 및 그 불굴의 인구 법칙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계급국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적이고 문명화된 국가이지만 또한 무력국가이자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국가이기도 하다. 잠재적이지만 때로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극단주의는 단지 주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또한 중심에 위치해 있다.(Balibar(2010c), 328. 강조는 발리바르)

 

더 나아가 이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에 고유한 배제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병리성이나 이런저런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근대 민주주의는 그것의 고유한 보편주의적 원칙으로 인해 이전의 정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본적인 배제를 산출한다. 이는 외연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의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발리바르(2010) 4공동체 없는 시민권?“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 참조. 또한 이에 관한 평주는 진태원(2011) 및 진태원(2013b)을 각각 참조.] 외연적 보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는 단순히 약탈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선교나 문명화의 관점에서 식민화를 추구했지만, 식민지의 비유럽적인 인민들은 같은 국민들로 포섭되었음에도 본국의 시민들과 동일한 시민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동일한 정치체 내에 법적으로 동등한 시민이기는 하되 또한 불평등한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바로 외연적 보편주의가 산출하는 배제의 양상이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것은 내포적 보편주의의 측면인데, 발리바르가 말하는 내포적 보편주의는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인간=시민 명제, 곧 인간은 무매개적으로 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진태원 2013a 참조) 문제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평등자유명제에 따라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성립한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리가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곧 특정한 정치체에 속하는 특정한 국민적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효성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니고,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진태원 2011, 188) 이것은 근대 보편적 민주주의에 고유한 배제 형식이며, 인권선언또는 그 핵심으로서의 평등자유명제의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권선언은 아주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어서 모든 특수한 차별받는 사람들 또는 배제된 사람들(프롤레타리아, 식민지인, 여성, 오늘날의 이주민)이 기성 질서에 맞서 투쟁할 때 이를 원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인권선언의 기치 아래 이 배제들이 유지되어 왔고 또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평등자유의 사회에 선행했던 어떠한 신분 또는 위계 사회에서도 우리 사회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배제 형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곧 사회가 위계화되어 있고 불평등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 기능할 때에는 정치 참여 또는 기본권이 부재한 사람들을 굳이 인간 종에서 배제할 필요가 없으며, 또는 그들을 열등한 인간들로 전환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Balibar 2010a, 12)

 

극단적 폭력이 근대 민주주의 또는 근대 문명 바깥의 어떤 특정한 예외적 상황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근대 민주주의 문명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보는 이러한 생각은 벌거벗은 생명 및 주권적 폭력에 관한 아감벤의 관념과 얼마간 공명하면서도 또한 그러한 관념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부연하겠다.

 

2.2.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이러한 폭력이 주체성의 가능성을 잠식하거나 와해시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저항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성 질서에 반대하고 불의에 맞서 정의를 옹호하는 부정적인 또는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을 넘어 능동적 주체성과 집합적 연대가 형성되는 장소라는 적극적 의미의 저항”(발리바르 2012, 118)을 가리킨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저항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를 스피노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생존해 있는 모든 개인에게 포함되어 있는 억압 불가능한 최소라는 생각, 곧 개인성 자체는 근본적으로 관개체적(transindividual)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에게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이루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이들은 개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있으며, 개인 자신 역시 다른 개인들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발리바르 2012, 119)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실행되지 않는다. 발리바르는 특히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우선 그가 초객체적 폭력ultra-objective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자들을 상품의 세계 속에서 마음대로 제거될 수 있고 도구화될 수 있는 사물의 지위로 환원”(발리바르 2012, 129)하는 폭력이며, “극단적인 빈곤과 기근 및 기타의 소위 자연적재앙들(전염병, 가뭄, 홍수나 지진 같은 재난시 사회적 보호망의 부재 등. 지역에 따라서 아주 불균등하게 인명 피해 효과를 낳는 이런 현상들에는 그 명칭 말고는 자연적인것이 전혀 없습니다)”(발리바르 2010, 244)을 통해 표출되는 폭력이다. 또한 그가 초주체적ultra-subjective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존재하는데, 이는 “‘의 세력을 일소한다는 기획의 집행자, 즉 주권적 권력의 광기에 개인과 공동체를 제물로 바”(발리바르 2012, 129)치는 폭력이다.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나 아프리카 내전 등을 통해 격렬한 형태로 표출된 바 있는 증오의 이상화를 낳는 폭력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증오의 이상화는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동일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 정상적인 개인 주체들로 하여금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종교라는 이름 아래 어제까지 같이 살던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심지어 성폭력을 통해 다른 민족 내부에 자신들의 씨앗을 남기려는 끔찍한 잔혹성을 실행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폭력의 힘, 그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말하는 초주체적 폭력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은 인간 주체를 상품이나 사물 또는 일회용 인간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인 충동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어떤 초주체의 의지를 집행하는 단순한 대행자(또는 자발적 예속의 주체)로 환원함으로써, 합리적인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의 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주체적 폭력과 초객체적 폭력은 다른 여러 폭력들과 함께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이를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발리바르가 인용하는 피에르 세나르클랭이라는 인도주의의 활동가의 아프리카 상황에 대한 보고문이다. 발리바르(2010), 249.]


2.3. 전환 불가능한 폭력

 

또한 극단적 폭력은 전환 불가능한inconversible 폭력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폭력의 전환이나 전환 가능성이라는 관념은 근대 정치 문명에 고유한 관점으로, 발리바르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이러한 관념이 가장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발리바르가 전환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폭력이 (역사적으로) 생산적인 힘으로 전화되는 것, 파괴력으로서의 폭력의 소멸과 제도들의 내적인 에너지 내지 역량으로서의 재창조를 의미”(Balibar 2010c, 61)한다. 헤겔에게서 폭력의 생산력으로의 전환은 역사에서의 이성, 따라서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역사적 목적론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처음부터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헤겔의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은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Balibar 2010c, 73)라는 관념이다. 역사를 우연의 제거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고대적인 섭리론이나 운명론과 대립하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의미에서의 섭리나 운명이란 자연적인 필연성에 거스르거나 그것을 파열하면서 실현되는 외재적인 또는 초월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면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은 역사 과정에 내재적인 필연성을 뜻한다. 곧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작용이나 힘들이 사실은 어떤 내재적인 경향이나 목적의 실현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그런데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이나 목적 또는 역사의 의미가 이미 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제하거나 아니면 먼 장래에 이러한 목적이나 의미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역사에 내재하는 목적들은 그것들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인간, , 의지, 제도)과 동일한 현재내부에서 생산된다는 것”(Balibar 2010c, 74)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 과정의 시초에는 역사적 필연성 내지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우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또는 정치적 제도 등과 같은 수단들을 통해 이러한 우연성을 제거하고 역사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게 하는 것이 바로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가 뜻하는 바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 이후 법치국가(또는 인륜적 국가)의 구성을 통해 결국 인류가 우연의 전면적인 제거에, 곧 역사적 목적의 실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발리바르가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이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과거나 현재에 산출되었고 또한 산출되고 있는 수많은 폭력, 특히 극단적 형태를 띠는 폭력들이 역사적 진보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생각이나, 무의미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쨌든 적어도 그러한 폭력들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9번째 테제에서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벤야민 2008b, 339)으로 역사를 묘사하면서도,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합의 ... 약한 메시아적 힘”(벤야민 2008b, 336)에 대해 말할 때, 벤야민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실천적 결과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수단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4.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

 

따라서 극단적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에 깔려 있는 생각은 합리성 자체 내부에 환원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잔여가 존재한다는 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화의 형식과 제도 자체에 인간에 의한(곧 사회문화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생산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점, 극한적으로는 서로 식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발리바르 2012, 130. 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로부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발리바르는 폭력의 현상학에서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인간에게 고유한 저항 가능성이 소멸되고 인간이 사물화되는 현상이다. 그는 시몬 베이유의 󰡔일리아드󰡕에 대한 주석에 의거하여 이를 설명한다. 베이유에 따르면 극단적 폭력은

 

죽이지 않는 힘, 곧 아직은 죽이지 않는 힘 ...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권력[이다]. ... 죽지도 않는 가운데 생애 내내 사물이 되어버리는 가장 불운한 존재들도 있다. 그들의 나날에는 어떤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을 위한 어떤 여지도, 어떤 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다른 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아래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 인간과 시체의 타협물이다. ... 죽음이 끝장내기 이전에 이미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삶인 것이다.(발리바르 2012, 105)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처럼 만드는 폭력의 기저에 존재하는 두 번째 측면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의 삶이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지만, 발리바르가 세네갈 출신의 철학자 아쉴 엠벰베를 원용하여 지적하듯이 식민지나 포스트식민지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폭력의 상황에서 존속하는 삶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세 번째 측면은 목적 합리성, 효용성을 초과하는 것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측면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는 아무런 사회적 효용성도 없고 경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익한 낭비에 불과함에도 대대적인 비용을 들여서 유대인 대학살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거니와, 합리적인 효용과 무관하게 심지어 자기 손해나 자기 파괴를 무릅쓰면서 감행되는 폭력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바로 극단적 폭력의 이 세 번째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이 자양분으로 삼고 재생산하는 전능함의 환상, 극단적 폭력이 그 희생자들을 무기력으로 환원하는 것(극단적 폭력의 내재적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존재”(발리바르 2012, 112)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는 폭력의 대상을 이루는 희생자들이 폭력에 감염되는 차원”(발리바르 2012, 112)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은 우리 시대에 자살폭탄테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통해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그에 맞선 절망적인 대항폭력 사이의 악순환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프리모 레비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바 있고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조르조 아감벤이 나치즘에 관한 자신들의 분석에서 각자 분석한 바 있는, 도살자와 희생자 사이의 구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희생자 자신을 도구로 삼아(이른바 특수부대’) 희생자를 도살하는 잔혹한 폭력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극단적 폭력에 의해 개인의 삶과 인간의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규범들이 애매해지거나 식별 불가능해진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보는 고사하고 목적 합리성과도 무관한, 따라서 경제적 효용이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행되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극단적 폭력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차원, 특히 환상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이 때문에 극단적 폭력에 대한 분석에서는 정신분석(여기에는 자캉 라캉과 앙드레 그린 같은 정신분석가만이 아니라 조르주 바타이유,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데리다 같이 정신분석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는 철학자이론가들의 작업도 포함된다)에 대한 준거가 본질적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Étienne Balibar, “Violence: idéalité et cruauté”(Balibar(1997)에 수록) 참조. 이 글의 번역본은 폭력: 이상성과 잔혹(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또한 Balibar(2010c) 1부 두 번째 강의도 참조.] 물론 이 때의 환상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의미의 환상, 곧 주관적인(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인) 망상이나 공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관개체적인(Balibar 2011, 227)환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에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한다는 것이 함축하는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극단적 폭력은 그 인과관계를 분석하기가 어려운 폭력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태의 원인이 정확히 식별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극단적 폭력의 특징은 관찰 가능하지만 그 원인(대개 중요하고 궁극적인 원인)부재하는효과들의 구조”(발리바르 2012, 129)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나 인과적 설명 대신에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을 제안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폭력의 현상학이 인과관계에 대한 분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증적인 차원에서 완결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3. 시민다움의 전략

 

시민다움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몇 가지 핵심적인 윤곽만 제시해보겠다.[시민다움의 전략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5a)를 참조.]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을 중심으로 한 폭력에 맞서는 정치, 곧 반()폭력의 정치를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전적인 부르주아 정치 또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로서의 해방의 정치와 맑스주의적인(또는 푸코적인) 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를 이루고 있다.[É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É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Balibar(1997)에 수록). 이 논문의 국역본(발리바르(2007)에 수록)에서는 논문 제목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민다움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 이유는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가리키는 인륜이라는 용어를 발리바르가 말하는 civilité 개념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얼마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안은 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발리바르(2011)에 수록) 참조. 그렇다고 해도 발리바르 자신이 말하듯이 civilité라는 개념 자체가 기본적으로 번역 불가능한 용어라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Balibar et al.(2015)(이 좌담은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Rue Descartes nos. 85~86, 2015에 수록된 것이다) 참조. 곧 이 개념의 번역은 독자적인 개념적 발명의 작업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여전히 새로운 개념적 발명의 가능성들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곧 해방의 정치 또는 정치의 자율성은 인권선언을 비롯한 고전적인 시민혁명 내지 부르주아 혁명을 정초하는 문헌들에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국가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변혁의 정치 또는 정치의 타율성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발리바르는 맑스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대표자로 제시한다). 반면 시민다움의 정치는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발리바르 2010, 229)을 목표로 삼는다.


시민다움의 정치에 관해서 발리바르는 세 가지의 전략을 구별한다. 우선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개념[이 개념은 임석진 교수가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이래로 국내 헤겔학계에서는 대부분 인륜성으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말의 인륜 내지 인륜성이라는 용어가 전근대적인 도덕적 질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데 반해,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도덕성 및 개인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지양하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번역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을 그냥 음역해서 사용하겠다.]을 통해 고전적으로 표현된 바 있는 헤게모니의 전략이 존재한다. 발리바르가 이를 그람시의 용어법을 빌려 헤게모니의 전략이라고 부른 이유는,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 개념이 표현하는 것이 의고적 민족주의나 심지어 유기체론적인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버마스가 제안한 바 있는 헌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와 유사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곧 지틀리히카이트를 구현하는 헤겔 식의 국가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간주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국민국가는 가족 및 친족과 같은 일차적 공동체에 대한 속박에서 개인들을 해방시켜 국가 자신이 조직하는 이차적 공동체(, 공공성과 관련된)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는 법치국가의 헤게모니 아래 근대적 다원성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재구성하는 헤겔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많은 헤겔 연구자들의 관점과 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가령 Siep(1982), Kervegan(2008), Pippin(2008), 7-8, 김준수(2012)를 각각 참조.] 그럼에도 발리바르는 헤겔 식의 헤게모니 전략은 여러 가지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가령 헤겔은 일차적 동일성에서 개인을 분리시켜 이차적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해방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과정(푸코적인 의미에서 규율적 폭력이면서 부르디외적인 의미에서 상징적 폭력인)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근대적인 헌정국가는 동시에 허구적 민족성에 기반을 둔 국민적인 국가, 따라서 본래적인 배제와 차별을 함축하는 국가라는 점 역시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헤겔 식의 시민다움 개념은 공과 사의 구별에 관한 지나치게 규범적인 관점, 곧 사적 영역에 대하여 정상성을 강제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두 개의 상이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는 이것을 각각 다수자 전략소수자 전략이라고 명명한다. 다수자 전략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전적인 해방 운동에서 나타나는 주체화의 전략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전략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아포리아의 핵심에는 피지배자들의 다수-되기가 존재하는데, 발리바르의 이 개념을 피지배자들의 비지배적인 주체-되기라는 문제로, 곧 피지배자들이 이전과 같은 지배 계급(곧 피지배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초를 둔)으로 구성되지 않으면서 헤게모니적인 집단적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진태원 2015a, 222. 강조는 원문)로 번역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전략은 푸코 및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이 대표하는 것인데, 이것의 핵심에는 “‘국가 장치와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고 그것을 소멸시키려고 했던 혁명 운동의 역사가 이러한 폭력을 재생산하거나 모방하게 되었다는 생각(Balibar(2010c), 180. 강조는 발리바르)이 놓여 있다. 따라서 다수자 운동, 곧 대중운동에 고유한 미시파시즘적인 욕망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소수자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수 되기라는 개념이 이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아래로부터의 시민다움의 전략이라는 발리바르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한국 현대 문학사를 재구성하려는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로는 김익균(2017)을 참조.] 문제는 소수자들minorities(이들은 어원이 말해주듯이 또한 약소자들이면서 (정치적사회적) 미성년자들이기도 하다)의 확산(이것을 시사적인 용어법에 입각하여 ()들의 확산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7) 참조))으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탈정체화의 작용을 특권화하는 소수 되기의 개념만으로는 정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연대와 결합의 과정, 또는 그들의 용어법대로 하면 이접적 종합의 과정을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다수자 전략과 소수자 전략의 결합,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의 동시적인 변증화를 요구하고 있다.

 

4. 몇 가지 쟁점

 

이제 끝으로 간략하게 몇 가지 논평을 제시해보자. 바깥의 정치 또는 좌파 메시아주의에 입각해 있는 현대 정치철학의 흐름의 영향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따라서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곧 법은 폭력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다. 아마도 이를 가장 도발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조르조 아감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충격적이게도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인권선언을 벌거벗은 생명들의 주권적인 포섭을 천명한 문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인권선언과 강제수용소 사이에는 직접적인 논리적정치적 연속성이 존재하게 되며, 일체의 법은 주권적 폭력의 표현이 된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아감벤 2008 중 3부 참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분석과 아감벤의 분석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 내지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인권선언에 대한 해석 및 민주주의와 근대 시민권 제도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양자 사이에는 뚜렷한 대립 관계가 존재한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아감벤과 자신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나는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들(불가능성의 조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은 정치의 와해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아감벤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와해의 형태들이 유일한 모델(그것이 수용소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로 귀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조건들은 이질적이며, 그 조건들은 어떤 존재론이 아니라 어떤 구조의 정세적 변이에 속하는 우연적 상황들 속에서만 자신들의 효과를 산출한다고 믿는다. 2) 이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역사 개념”(좀더 근원적으로는 역사성의 도식)을 그 목적론적 정식화들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런데 여러 시각에서 볼 때 아감벤이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독서로부터 발전시킨 역사성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여전히 목적론의 지평 속에 위치해 있다. 이 관점은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주권과 그의 권력을 서양 정치의 형이상학적 운명으로 만든다(이 때문에 특히 아감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주권적역량에 대한, 그리고 비오스 폴리티코스와 시민권의 설립을 통한 조에의 내적 배제에 대한 최초의 인물을 판독해내는 게 중요하다). 3) 이것과의 대비를 통해 도출되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메시아적관점(호모 사케르 연작에 앞서 출간된 저작, 󰡔도래할 공동체󰡕(1990)의 테제들과 합치하는)은 근원적으로 반()제도적이다. 나는 제도 그 자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보증물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제도가 그러한 보증물이 될 수 있는 영속적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제도적 지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메시아적 관점이 아니라 비극적 관점을 소묘한다. 내가 시민다움의 전략들이라는 이름 아래 검토해보려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Balibar 2010c, 148-49)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 또는 정치 제도는 양가적이다. 곧 정치의 공간을 개방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으로서의 제도는 한편으로 (한 계급, 한 카스트, 한 관료제 내지 한 국가장치에 의한) 권력의 독점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의 현실적인 획득으로서의 시민권으로의 경향 사이의 갈등(Balibar 2010c, 152)사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 없는 정치 또는 제도 바깥의 정치를 꿈꾸는 것은 반폭력의 정치의 입장에서는 자멸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제도를 더욱 더 폭력의 집적으로, 치안기계의 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고 따라서 주체성의 가능성 또는 역량이 더욱 더 잠식되도록 조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 또는 제도 그 자체는 전적으로 폭력적인 것도 또한 전적으로 해방의 역량인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폭력 또는 역량의 이중적 공간으로서의 법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지, 또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이제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 개념에 담겨 있는 몇 가지 모호성을 지적해두고 싶다.

 

4.1.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

 

극단적 폭력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첫 번째 쟁점은 그것이 구조적 폭력, 특히 자본주의적인 착취 및 상품화의 폭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극단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과 동일한 것(또는 개념적으로 구별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의 가능성만이 남게 된다. 극단적 폭력이 구조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라면, 구조 자체의 완전한 전복 내지 파괴 이외에는 다른 인간적 삶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극단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과 별개의 것이라면, 극단적 폭력은 예외적인 상황 또는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될 것이다.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같은 상황이나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내전적인 상황이 그것이다(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파시즘이고 아닌지 사후에만 식별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생성 중에 있는 새로운 파시즘 속에 있는지 여부, 따라서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는 부재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극단적 폭력이 우리에게, 곧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하고 있는(또는 그렇다고 믿고 있는)[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해 전쟁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은 과연 극단적 폭력의 상황과 무관한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현 상황이 두 주요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전략적전술적 고려의 산물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계산된 연출의 결과라고 해도, 극단적 폭력의 주요 특징을 계산의 합리성을 초과하는 우발적 비합리성이 산출하는 대규모 학살과 재난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확히 극단적 폭력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 예견되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을 당사자인 남한의 시민들이 이 상황을 통제하는 데 매우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보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이 전쟁의 문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시민다움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더 숙고해보는 것은 매우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려는 시도는 자칫 구조적 폭력을 정상적인 폭력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역사 및 문명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단지 예외적인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적 쟁점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 할 텐데, 발리바르에게서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는 점이 이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극단적 폭력이 일종의 문턱이라고 말하고 또한 구조적 폭력과 달리 극단적 폭력은 목적 합리성이 부재한 폭력이라고 말함으로써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경제는 지난 2008년의 위기 및 2010년 이후 유럽 재정 위기를 통해 드러났듯이, 점점 더 목적 합리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합리성 또는 광기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서 목적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는 어떻게 식별될 수 있는가?


또한 지난 정권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를 통해(아울러 국정역사교과서 간행 시도 및 위안부 합의에서도) 드러난 바 있는 정부의 통치에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가 어떤 것인지, 곧 우리가 여기에서 일종의 극단적 폭력의 한 형태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익명의 심사자 한 분은 필자의 글에 대한 논평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는 명백히 합리성이 결여된 사건, 즉 극단적 폭력의 한 양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와는 약간 초점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내가 너무 간략하게 논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점에 관해 약간 부연해보고 싶다. 나는 이 문장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또는 조류독감 사태 같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 극단적 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를 극단적 폭력의 사례로 보는 것 자체가 다수의 세부적 분화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이 사태들을 극단적 폭력의 사례로 보면서 그것을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적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박근혜 정권의 비합리적 광기나 박근혜 자신의 무지 내지 비정상적 성품 등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러한 폭력의 원인을 박근혜 정권 배후에 있는 한국 수구 세력의 본래적 잔인성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것을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 자체의 비합리성의 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생겨난다. 만약 이 문제를 박근혜 정권의 광기와 무능력에서만 찾는다면, 새로운 정권에서는 이와 유사한 문제가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반면 이 문제가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정권에서도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는 소지를 지니고 있다. 내가 다음 문장에서 지적하려는 것이 이점이었다.] 아울러 새로 들어선 정권이 이러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보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혹시 현 정권이 앞으로 드러낼지도 모를 이런저런 한계들은 극단적 폭력의 잠재력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4.2. 극단적 폭력의 유형들

 

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질문이 극단적 폭력의 유형에 관한 질문이다. 발리바르는 여러 글에서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을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발리바르 자신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형태에 대한 개념화 또는 그것의 예시는 극단적 폭력을 예외적인 상황 또는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된 폭력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폭력의 형태와 다른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 폭력의 유형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또는 적어도 일상적인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 곧 상당히 안정된 정치 과정을 영위하는 서구 자유주의 정치체나 그에 준하는 다른 정치체들 내부에서 극단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과정의 내부에서 어떤 위협으로 잠재되어 있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김익균(2017). 독서 대중과 시민다움의 정치형성의 한 계기가 된 릴케 현상, 󰡔정신문화연구󰡕 148.

김정한(2011). 폭력과 저항: 발리바르와 지젝, 󰡔사회와 철학󰡕 21.

데리다, 자크(2003). 󰡔불량배들󰡕, 이경신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04). 󰡔법의 힘󰡕, 진태원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2014).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서울: 그린비.

들뢰즈, 가타리, 펠릭스(2015). 󰡔앙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서울: 민음사.

메를로-퐁티, 모리스(2004). 󰡔휴머니즘과 폭력󰡕, 박현모 외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발리바르, 에티엔(1995).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서울: 문화과학사.

       (2007).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10). 󰡔우리, 유럽의 시민들? 세계화와 반폭력의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1).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2).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서울: 난장.

베르네르, 에릭(2012).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변광배 옮김, 서울: 그린비.

벤야민, 발터(2008a). 폭력비판을 위하여,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서울: 도서출판 길.

       (2008b).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서울: 도서출판 길.

서관모(2011). 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에게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과 정치의 개조, 진태원 엮음(2011).

아감벤, 조르조(2008).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서울: 새물결.

       (2010). 󰡔예외상태󰡕, 김항 옮김, 서울: 새물결.

아렌트, 한나(2006).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박미애 옮김, 파주: 한길사.

       (2011). 󰡔공화국의 위기󰡕, 김선욱 옮김, 파주: 한길사.

지젝, 슬라보예(2009). 󰡔잃어버린 대의를 찾아서󰡕, 박정수 옮김, 서울: 그린비.

       (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정일권 외 옮김, 서울: 난장이.

진태원(2010). 폭력의 쉬볼렛: 벤야민, 데리다, 발리바르, 󰡔세계의 문학󰡕 135.

        (2011).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2011.

        (2012).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 2012.

        (2013a).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2013년 여름호.

        (2013b).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아렌트, 랑시에르, 발리바르, 서강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편, 󰡔서강인문논총󰡕, 39.

        (2014).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 󰡔황해문화󰡕 2014년 봄호.

        (2015a).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진보평론󰡕 63.

(2015b).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폭력, 국가, 주체화, 인문학협동조합 엮음,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서울: 현실문화.

        (2017). 을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철학적 단상들, 󰡔황해문화󰡕 96.

        엮음(2011). 󰡔알튀세르 효과󰡕, 서울: 그린비.

Agamben, Giorgio(1998). Homo Sacer,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5). State of Exception, trans. Kevin Attell,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Balibar, Etienne(1997).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2010a).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Vacarme, no. 51.

        (2010b).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c). Violence et civilité, Paris: Galilée.

        (2011). “Pour une phénoménologie de la cruauté: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Tracé. Revue de Sciences humaines, no. 19.

         et al(2015). “Philosophie et politique: la Turquie, l’Europe en devenir”, Rue Descartes, nos. 85-86.

Deleuze, Gilles & Guattari, Félix(1972).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Paris: Éditions du Minuit.

         (1980). Mille plateaux, Paris: Éditions du Minuit.

Derrida, Jacques(2003). Voyous, Paris: Galilée.

Mitchell, DeanVilladsen, Kaspar(2016). State Phobia and Civil Society: The Political Legacy of Michel Foucaul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Spinoza, Benedictus de(1925).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in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III, Carl Winter Verlag.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방방 2017-09-2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에 지인이 폭력과 시민다움 책을 사서 읽으려고 하기에 과거 막 출간 됐을 때, 호기롭게 사서 읽었다가 매우 매우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어떻게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조언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인-무브에 올리신 글 읽다가 오랜만에 선생님 블로그를 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반가운 글이 있어서 내심 기쁩니다.

참 인무브에 올리신 글도 과거에는 그냥 알튀세르가 풀란차스를 논쟁에서 이겼다고 정리한 글만 봐서 잘 몰랐는데 이번기회에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balmas 2017-09-22 14:12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인무브에 올린 발리바르의 글을 먼저 보셨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습니다. :)

dldiddn8429 2017-09-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수강하고 있는 강의 주제가 현대프랑스철학과 폭력의 문제인데, 올려주신 글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다른 참고 문헌도 읽어봐야겠어요~

balmas 2017-09-24 00:39   좋아요 0 | URL
ㅎㅎ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네요.^^
 

이번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쓴 글인데요,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계속 이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치철학적 단상들

[이 글은 촛불집회의 과정에서 구상되어 봄, 여름에 걸쳐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 토론회, 강연회에서 발표되고 조금씩 다듬어진 글이며, 이 글 자체가 아직 미완성인 포괄적인 작업의 단편이다. 여러 차례의 발표 과정에서 좋은 논평과 문제제기, 제안을 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I.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말하기

 

이 글은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황해문화󰡕의 지면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 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황해문화󰡕 2016년 겨울호.] 두 글의 문제의식을 조금 더 심화하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개념화해보자는 뜻에서 이 문제를 더 논의해보고 싶다. 아마 몇 가지 단상 이상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문제는 거듭 제기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첫 번째 이유는, 최근 갑과 을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표현하는 담론으로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기업과 하청 업체들 간의 불공정한 관계,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에 대한 본사의 횡포, 다양한 업종의 알바생들에 대한 착취, 대학원생들에 대한 교수들의 갑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차별, 여러 분야의 소수자들(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등)에 대한 혐오와 폭력 등을 표현하기 위해 갑질’, ‘을의 눈물등과 같은 방식의 담론이 쓰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용어가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실 을들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는 갑에 의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을이라는, 우리는 갑질의 공통적인 피해자인 을이라는, ,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폭력을 참을 수 없다는, 익명적인 을들의 고통의 소리들이다. 따라서 주로 계약관계에서 당사자 중 한 쪽(채무자나 피고용인 등)을 지칭하기 위해 통용되던 이 말은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고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적 언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제 필자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성찰을 강제하고 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논의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진보 정치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다른 글에서 논의한 바 있듯이,[진태원, 포스트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7, 2012 참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국내 학계는 커다란 인식론적 전환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이전까지 국내 진보 인문사회과학계의 논의를 주도하던 마르크스주의 및 민중 담론이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계기로 급속히 위축되고 그 대신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여러 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담론이 짧은 시간 내에 국내 학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중 민주주의론에서 포스트 담론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한편으로 전자의 담론들에 내재한 모순과 난점으로 인한 인식론적실천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투항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는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된 시기, 진영(정치 체제라는 의미에서 진영이든, 국가 대 반()국가 내지 반정부 조직(이른바 운동권’)의 대립이라는 의미에서 진영이든) 중심의 계급투쟁에서 말하자면 계급 없는 계급투쟁’,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개인적 실존 자체가 계급투쟁의 장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주로 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개인적 실존 속에서 감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실존적 계급투쟁으로 이행하게 된 시기였지만, 이는 한편으로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개성이라는 이름 아래 제대로 인식되거나 문제화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인문사회과학의 보편적 담론에서 일부 좌파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담론’(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내지 경제학 비판”)으로 축소되었고, 역으로 포스트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포스트주의,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거나 더 나아가 새로운 문화 담론을 제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소비담론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진태원, 앞의 글, 32.]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대로 제기되지 못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앞에서 새로운 종류의 계급투쟁, 새로운 종류의 적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적대와 갈등을 설명하지 못했고 또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론적실천적 해법들이 모색되어야 하는가?[같은 글, 20.]


내가 보기에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된 이래 소수 거대 기업들의 부와 권력은 막대하게 증대한 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으며,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약자들은 실업과 빈곤, 혐오와 무시의 위험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더욱이 기존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대다수 을들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과 불안정성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정치에 대한 실망과 혐오 속에서 오히려 기존 정치 체제를 엘리트 집단들의 독점 체제라고 비난하는 극우파 정당들이 세력을 얻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더 많은 민주화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심화에 스스로 앞장섬으로써 그 이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 세력의 집권을 조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의 과두적 지배 체제가 더욱 공고히 되었고, 이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어떤 민주주의냐를 따지기 이전에, 또는 바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으로서 민주주의 자체를 회복하는 일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한 결정적인 쟁점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좌파적 기획과 우파적 기획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좌파적 기획만이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샹탈 무페히로세 준, 포데모스 혹은 좌파포퓰리즘에 대한 두 개의 시선, 󰡔진보평론󰡕 68, 2016, 128.]다는 샹탈 무페의 발언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는 게 필수적”[같은 글, 129.]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오늘날 좌파 정치의 핵심 화두로 제시하고, 시민다움(civilité)의 정치 또는 반()폭력의 정치라는 기획에 따라 정치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극단적 폭력의 감축과 퇴치를 주장하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작업과도 통하는 문제의식이다.[이는 물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자세히 논의하기 어렵지만 양자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쟁점들이 존재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문제설정에 대해서는 진태원,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두 방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6, 2012를 참조하고, 그의 시민다움의 정치에 대해서는 진태원,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미간행 원고) 참조.]


그런데 오늘날 좌파적 관점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민주화 기획을 추구하려고 할 경우 곧바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정치적 주체 또는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과두제 체제가 더욱 강화됨으로써, 자본의 영향력은 더 이상 좁은 의미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일자리만이 아니라 주거와 환경, 교육, 건강, 노후생활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성원들, 특히 을 내지 을의 을(, ...)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일부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일상생활의 금융화라고 부른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예전과 같은 진영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으며(노조 조직률이 10% 남짓 하고 통합진보당 사태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더 이상 설득력 있는 정치적규범적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 : 99’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극소수의 과두제 지배자들에 맞서 최대 다수의 주체들을 주체화하는 전략 또는 민주주의의 급진화[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급진민주주의 리뷰 데모스󰡕 1, 2011 참조.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학술지에는 조희연, 서영표, 김진업, 이승원, 장훈교 등의 주제 논문이 실려 있다.] 내지 좌파 포퓰리즘[좌파 포퓰리즘에 관해서는 Ernesto Laclau, On the Populist Reason, Verso, 2005 Íñigo Errejón & Chantal Mouffe, Podemos: In the Name of the People, Lawrence & Wishart, 2016 참조. 아울러 유럽과 중남미, 한국의 포퓰리즘에 관한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엮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소망출판사, 2017 참조.전략이 오늘날 좌파 정치 내지 진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과연 주체 내지 주체화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급진 민주주의 내지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적 목표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민 내지 민중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인민 내지 민중이 해방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주체인지(곧포퓰리즘을 좌파적인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여부가 불확실할뿐더러,[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역사비평󰡕 2013년 겨울호, 207쪽 이하 참조.] 이러한 다수자 전략에서 소수자들의 위상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99를 이루는 다수가 사실은 소수자/약소자들의 다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앞의 경우처럼 내용상으로만이 아니라 형식화에서도 급진 민주주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화두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좋은 답변을 제시해주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더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국을 뒤덮었던 촛불집회 및 그 결과로 수립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하면서 마침내 5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촛불은 518 광주의 정신 위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라는 점을 역설했다.


518, ‘촛불혁명’, 국민 주권. 이 세 개의 단어를 연결하고 더 나아가 이것들 사이의 등가성을 선언한 이 기념사는 여러 모로 감회가 깊은 것이었다. 특히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518 항쟁의 의의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폄훼되고 그것이 상징하듯 한국 사회의 인권과 시민권이 크게 후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기념사는 남다른 울림을 준다. 이 기념사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국민 주권이다. 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 주권이라는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기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한 헌법 조문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조문으로 남아 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통치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만 제한되어 있었던 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들로 인식되었으며 또 스스로 그렇게 처신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고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다는 말은 국민이 단순히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통치자를 통제하거나 적어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그러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정권 초기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어놓는 정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민 주권이라는 말은 일종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주권의 주체로서 인민내지 국민과 같은 것은 실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의 실물 내지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현존한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성과 젠더로 구별되고 지역출신학벌 등으로 나뉜다. 특히 우리가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국민은 지배자와 복종하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몫을 가진 이들과 몫 없는 이들, 갑과 을로 분할된다.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범주에는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 1퍼센트의 국민과 99퍼센트의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 이러한 은폐가 우연적인 사태이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아니라, 보편적 평등을 표현하는 국민 주권 개념의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문제적이다. 더욱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다른 주권자 국민들과 맞서는 범주일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있는 국민 아닌 이들을 시민 아닌 이들,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에 따르면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아닌 이들로 배제하는 개념이다.[한나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관해서는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5 중 특히 9장을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Etienne Balibar,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및 진태원,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서강인문논총󰡕 37, 2013 참조.]


그렇다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겠다는 새 정권의 의지에 주목하고 그것에 힘을 실어주되, 그것에 내재적인 아포리아를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국민 주권 개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한 여러 쟁점들을 새롭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II.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링컨 대통령의 말로 잘 알려져 있는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국민(인민)을 위한, 국민(인민)에 의한, 국민(인민)라는 경구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의 시도, 또는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언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을의 민주주의는 우선 을을 위한 민주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흔히 말하듯 우리 사회가(아울러 세계의 많은 지역과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민족주의적 또는 국민주의적 배타성과 충돌이 강화되고 있으며,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 곧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안전 메커니즘의 약화와 해체 속에서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의 논리를 강요받으면서 불안정한 노동과 삶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질서가 평등한 자유의 이념 위에서 시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공동체의 원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 바 있다.[지나치는 김에 몇 가지 문헌만 언급해둔다면, 리처드 세네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조용 옮김, 문예출판사, 2002;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08; Pierre Dardot &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La Découverte, 2009;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 이성: 신자유주의 사회에 관한 시론󰡕, 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근간); 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홍지수 옮김, 봄아필, 2013을 각각 참조.]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라 세계와 사회가 재편되면서 생겨난 많은 을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각자 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시민으로서의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대안이나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가령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 최악의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한 실업대책,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주거, 육아, 복지 제도 확충, 질병과 가난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빈곤 노인들을 위한 정책, 차별과 모욕, 배제에 시달리는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이주자들을 위한 인권 보호 정책 등이 을을 위한 정책의 사례들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공화국의 이념에 걸맞은 사회가 되기 위해 이런 정책들은 실로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시행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만약 을의 민주주의가 이것에 그치게 된다면, 그때 을의 민주주의는 을을 그냥 약소자의 처지, 피통치자, 피억압자의 처지에 놓아두게 되며, 따라서 (용어모순적이게도) 일종의 후견적인(paternalistic)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약소자로 머물러 있는 약소자들을 위해 윗분들이 알아서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우리가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을에 의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


여기서 을에 의한 민주주의는, 정확히 말하면 을의 의지와 목소리가 잘 대표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 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따라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인민)의 의지를 잘 대표하고 그 목소리를 정책과 제도에 잘 구현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공정하게 선출하며 그들을 잘 감시,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대표의 문제에 관한 국내 학자들의 논의로는 홍철기, 「󰡔대표의 개념선거는 민주적인가: 정치적 대표와 대의 민주주의의 미래, 󰡔진보평론󰡕 61, 2014 및 이관후, 대의민주주의가 되었는가?: 용례의 기원과 함의, 󰡔한국정치연구󰡕 252, 2016, 한국 정치에서 대표의 위기와 대안의 모색: 정치철학적 탐색, 󰡔시민과 세계󰡕 28, 2016 등을 참조.]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과 불만이 제기된다면, 이는 이러한 대표자들이 국민 전체, 특히 대다수 을의 의지와 이해관계를 대표하기보다는 권력자나 재벌을 비롯한 소수의 갑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구현하고 집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화 시대 국민국가는 세계시장의 압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가 입법 및 정책 과정에 반영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어떻게 을에 의한 민주주의, 을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곧 약소자로서 을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정책과 제도만이 아니라, 또한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잘 대표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고 통제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을들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관심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주체로서의 을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과연 그런 것인지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을은 누구인가?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자들,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청소년들, 소규모 자영업자들, 교수의 각종 뒤치다꺼리를 감당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빈곤 노인들, 또는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늘 손해와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지방 도시 및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 등이 을인가?


만약 이들이 을이라면, 이들은 을을 위한 민주주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각자 이해관계의 주체로서 압력 집단이 되어 각종 정책과 입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들을 을에 의한 민주주의의 행위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을들은 항상 자신보다 더 강한 다른 갑들의 이해관계에 밀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약소자로 남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만한 길을 처음부터 차단당한, 이해관계의 주체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을들, 그리하여 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제대로 재현되거나 대표되지도 못하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이 이처럼 을로, 병으로, 정으로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모든 국민 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을을 배제한 배제의 민주주의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해관계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을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고 구성되는 길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대표의 과정을 포함하여 이러한 을들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광범위하게 대표하고,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로 구성하고 주체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III. ‘정치적 주체로서의 을: 몇 가지 개념적 비교

 

그러므로 다시 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라는 말은, 얼핏 보기에는 자명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재벌 가족의 횡포에 시달리는 직원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 그 알바생들, 하청업체 직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적 소수자들 등이 바로 을들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는 이론적 성찰의 소재로서의 을이지, 이론적 작업을 통해 개념화된 것으로서의 을은 아니다. ‘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시사적 용어에서 이론적 개념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을은 계급 개념인가 그렇다면 그것과 전통적인 계급 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을이 다양한 형태의 피지배 집단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과학적 계급 개념과 어떻게 관련시킬 수 있을지는 매우 불분명해 보인다. ‘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며, 빈민 계급도 아니고, 더욱이 중간 계급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실재성을 결여한 가공적인 용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들, ‘20 : 80’, ‘10 : 90’, 또는 ‘1 : 99’ 같은 표현들이 지칭하는 사회적 현실을 정확히 가리키는 기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라는 용어는, 최근 촛불집회에서 주권의 주체로 호명되고 있는 국민(nation)이라는 개념이 담지 못하는 계급적 함의,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경제적정치적 불평등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는 전통적인 계급 개념이 아니지만 다양한 형태의 계급적 불평등과 차별을 표현하는 을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식으로 질문해본다면, 을이라는 용어는 계급에 관한 전통적인 표상/재현(representation) 방식(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하겠다)을 어떻게 해체하는가? 을이라는 용어 자체는, 계급적 불평등의 현실, 따라서 계급투쟁의 현실(이것의 완화된 표현이 갑질일 것이다)을 표현하되, 전통적인 계급 표상/재현 양식을 해체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을이라는 용어가 표현하는 것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의 현상,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계급 표상/재현 양식으로 적절히 설명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현상이 아닌가?

 

2.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인가?

 

이러한 질문은 바로 을과 민중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종류의 피억압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을은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오래 사용되어온 민중이라는 용어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을은 민중이라는 개념의 시사적인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을과 민중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을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그 현행적 용법을 고려해볼 때) 민중이라는 개념과 달리 저항의 주체나 변혁의 주체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을은 피해자, 피착취자, 피억압자, 피차별자 등과 같이 수동적으로 피해를 겪는 존재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쓰인다. 을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쓰임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이 용어에 별로 주목하지 않거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터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을의 이러한 용법은, 민중이라는 개념에 담긴 가상적 측면 및 그 한계를 드러내주지 않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특히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한 것 같다. 곧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표준화된 민중이라는 개념은 피억압자, 피착취자들 사이의 연대나 통일성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민중이라는 개념은 피억압자, 피착취자로서의 민중, 수동적 피해자로서의 민중과 능동적인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 사이의 거리를 이상적으로 최소화하거나 제거해온 것은 아닌가?


반면 을이라는 용어는, 그 통일성이 문제적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진보적인 인문사회과학이 이상화한 변혁의 주체로 자처하지도 않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또한 사회의 거대 다수를 형성하는 약소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갑과 대립하는, 갑에게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지배당하는 을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을 정치적 집합체로서 정체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을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18년 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를 지지했던 것은 다수의 을이었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연속적으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준 동력은 다름 아닌 박정희의 유령을 호명했던 을들의 욕망이었다.


아마도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이고, 을의 민주주의는 민중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민중은, 우리가 상상해온 민중보다 훨씬 더 이질적이고 다양한, 더욱이 훨씬 더 분할되고 갈등적인 집합체일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로서 민중 민주주의는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명칭일 것이다.

 

3. 을은 소수자(minority), 서발턴(subaltern),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을과 민중의 이러한 차이점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꽤 널리 쓰이는 용어들이 소수자, 서발턴, 프레카리아트 같은 용어들이다. 을은 이러한 이론적 용어들의 시사적인 표현인가?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을이라는 용어는 이 용어들과도 꽤 의미 있는 차이점을 지닌 것 같다. 우선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노동자 계급을 지칭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불안정한을 의미하는 ‘precarious’라는 용어를 결합하여, 현대 사회의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임시직, 기간제, 파견, 외주 등) 업무에 종사하면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4 및 이광일,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가 해방의 정치, 󰡔마르크스주의 연구󰡕 10, 3, 2013 참조.]이라고 지칭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러한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을과 프레카리아트는 서로 겹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을이라는 용어는, 주로 노동 관계의 특성을 지칭하는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에 비해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은 동시에 모욕당하고 차별당하고 때로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특성, 곧 사회적 인정 관계 내지 상징적 위계 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속해 있다는 특성도 지닌다는 점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을이라는 용어는 인문사회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소수자라는 용어와도 일정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사실 영어의 마이너리티(minority)나 불어의 미노리테(minorité)라는 용어에 비하면 우리말의 소수자라는 용어는 의미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인 편이다. 영어나 불어에서 이 용어들은 우리말로 미성년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약소자라는 뜻도 담고 있다. 칸트가 유명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1784)의 서두에서 계몽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미성숙으로서의 미성년이라는 의미이며,[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13(강조는 칸트).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Unmündigkeit ist das Unvermö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en zu bedienen.”] 이것은 영어나 불어로는 minority 또는 minorité로 번역된다. 또한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는 약소자라는 뜻도 담고 있는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해방’(émancipation)을 정의하면서 이를 미노리테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염두에 둔 것이 이러한 다층적인 의미이다.

 

해방이란 소수파/약소자/미성년(minorité)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탈출할 수 없다. 노동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노동을 새로운 사회의 정초 원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의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자, 그들이 정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이 정말 공통 공간 속에서 모두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도래할 사회를 지배할 대항 권력을 정초하는 것보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그것은 또한 공동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중요하다.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세계를 함께 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상대와 같은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수정 재판), 92~93. 번역은 다소 수정했다. 특히 번역문에서는 minorité소수파로만 번역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저 단어에는 약소자미성년이라는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로 이해된 마이너리티 또는 미노리테는 소수자라는 용어가 담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쟁점을 표현해준다(가령 최근 화제가 된 선거 연령의 문제가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이라는 용어는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라는 용어는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라는 용어에 비해, 소수자나 약소자는 수적으로 소수가 아니라 사실은 압도적 다수라는 것(‘1:99’에서 ‘99’라는 숫자가 표현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산출하는 주요 현상 중 하나는 소수자들/약소자들의 다수화 현상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곧 신자유주의적 사회화는 노동자 계급 조직을 비롯한 사회적 연대 조직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고 더 나아가 개인들이 속해 있는 소속 관계를 불안정화함으로써(비정규직화, 조기 정년, 프리랜서, 자영업 등이 그 한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개인들을 단자화(單子化)하고 불안정한 존재자들로 만든다. ‘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들의 독자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못한 단자적이고 불안정한 소수자들/약소자들이다.[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앞의 책; Robert Castel, La montée des incertitudes: Travail, protections, statut de l'individu, Seuil, 2009; 에티엔 발리바르, 보편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을 각각 참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라는 용어는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고안해낸 이래 인도 서발턴 역사학 연구자들 및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같은 문예이론가들이 발전시킨 서발턴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지배 엘리트 집단과 대비되는 대다수의 피지배 집단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체화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라나지트 구하, 󰡔서발턴과 봉기󰡕,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8;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로절린드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존 베벌리, 혼종이냐 이분법이냐? 하위주체와 문화연구에서 다루는 민중의 범주에 관하여, 󰡔하위주체성과 재현: 라틴아메리카 문화이론 논쟁󰡕, 박정원 옮김, 그린비, 2013을 각각 참조.]


하지만 을이라는 용어는 서발턴 개념과도 일정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인도 역사학자들과 가야트리 스피박이 이론화한 서발턴 개념은 두 가지 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개념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의 흔적을 깊이 포함하고 있다. 곧 이 개념은 국민 대다수가 문맹자 농민이었던 식민지 시기 또는 포스트 식민 초기 시기의 인도 상황(대략 1960년대까지의 시기)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그 이후 인도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 및 사회적 분화 과정을 겪었으며, 원래 서발턴 개념의 주요 지시체였던 문맹자 농민들은 더 이상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발턴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피통치자’(governed)라는 푸코적인 개념으로 서발턴 개념이 지닌 역사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Partha Chatterjee, The Politics of the Governed: Reflections on Popular Politics in Most of the Worl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4.] 둘째, 서발턴 개념은 지배 엘리트와 대비되는 피지배 집단, 특히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체화할 수 없는 집단들의 일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피지배 집단 내의 이질성과 차이, 따라서 갈등적 상황을 표현하는 데 난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을이라는 용어는 서발턴이라는 용어가 지닌 이러한 난점들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을이라는 용어 자체는 을과 병, ... 과 같은 내재적 분할과 또 다른 위계 관계를 그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을이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복수적이며 내적으로 분할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탄핵 정국에서 촛불집회와 대결하는 또 하나의 대중 집회로 주목을 받은 이른바 태극기집회야말로 을의 이러한 복수성과 내적 분할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이라는 범주, ‘몫 없는 이들이라는 개념에 제대로 포함되지도 않는 존재자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올 겨울 AI 파동으로 인해, 또 몇 해 전에는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살아 있는 채로 매몰되거나 살처분당한 수천 만 가축들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을이면서 역설적으로 을이라는 범주에 포섭되지 못하고 그 지위를 인정받지도 못하는, 따라서 그야말로 역설적인 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들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자연 환경, 생태계 자체 역시 이러한 역설적인 을에 포함시킬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AI, 곧 인공 지능과 로봇의 문제에도 역설적인 을의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4. 을은 다중인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정치적 주체를 표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로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미국인 제자인 마이클 하트의 공동 저작인 󰡔제국󰡕, 󰡔다중󰡕, 󰡔공통체󰡕[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다중󰡕, 서창현 외 옮김, 세종서적, 2008; 󰡔공통체󰡕, 윤영광정남영 옮김, 사월의책, 2014.]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용어는, 그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서양정치철학에서 정치적 주체를 지칭해온 몇 가지 주요 개념들과 차이를 지닌 개념이다. 이들에 따르면 우선 다중은, 주권 개념과 한 쌍을 이루며, 통일성과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인민’(people) 개념남한의 헌법이나 정치적 원리에서는 국민개념에 해당하는과 구별된다.

 

인민은 하나(일자)이다. 물론 인구는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민은 이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한다. 이와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치철학의 지배적 전통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인민이 주권적 권위로서 지배할 수 있고 다중이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다중은 독특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135.]

 

또한 다중은 대중’(mass) 개념과도 차이를 지니는데, 이는 대중 개념이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지도를 받아야 하는, 지리멸렬하고 공통성이 없는 개인들의 집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대중은 다른 측면이며, 동질적이고 분산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해체된 인민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다중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자 계급과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산업 노동자 집단이나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반해, 이들에 따르면, 다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같은 책, 143.]하는 개념이다. 특히 이들은 종래의 물질노동과 구별되는 비물질노동,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382.]이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에서 종래의 물질노동에 대하여 질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면서, 좁은 의미의 산업노동자 계급을 넘어서는 새로운 계급 주체, 실로 공산주의의 주체로서의 다중이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다중은 을이라는 용어와 상당히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을은 정치 공동체의 성원 전체 및 그 통일성을 가리키는 인민(또는 국민)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표현한다. 또한 을은 당연히 넓은 의미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그 중 상당수는 네그리와 하트가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을이라는 용어와 다중 개념의 중요한 차이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을이라는 용어가 이질성과 다양성을 넘어서 갈등성을 자신의 본질적 요소로 포함하는 데 반해 네그리와 하트가 이론화한 다중 개념에서는 이러한 내적 갈등과 분할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로 다중 개념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현대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체화의 문제를 사고하기 어렵게 만드는(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개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 대한 비평가들에 대해 답변하는 대목에서 다중 개념이 함축하는 두 개의 시간성을 구별한다. 하나는 영원성으로서의 다중으로, 이러한 다중은 그것이 없이는 우리의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272.]는 다중, 곧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다중이다. 이러한 다중은 강한 의미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다중, 곧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다중, 따라서 자율적인 사회적정치적 역량을 지닌 주체로서의 다중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다중,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직 아닌다중이다. 이러한 다중은 첫 번째 영원성의 다중에 걸맞은 다중으로 아직 구성되지 않은 다중,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형성되어야 하는 다중을 가리킨다. 문제는 두 가지 시간성에 따라 구별되는 다중은, 내적 갈등과 분할의 문제에서 비껴나 있는 다중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다중은 항상 이미 첫 번째 다중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다중, 곧 목적론적 발전 경향 속에서 포착된 다중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두 유형의 다중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을지언정,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다. 다중이 이미 우리의 사회적 존재 속에 잠재되어 있지 않고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중을 하나의 정치적 기획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날 다중을 실현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재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같은 곳.]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탄핵 정국의 와중에서 탄핵에 집요하게 반대하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도 여전히 탄핵에 불복하면서 계엄령을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또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를 했던 51%의 유권자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만약 이들이 다중이라면,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반동적인 정치 세력도 다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방의 주체로서의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제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이들이 다중이 아니라면, 아마도 수구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고 적어도 자유주의적인 세력 이상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다중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공산주의의 주체로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를 계승하는 해방의 주체로서의 다중에 걸맞은 개인들과 집단을 추출하려면 그 지표는 훨씬 더 엄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48%의 사람들 전체가 다중은 아닐 것이며, 아마도 그중의 일부, 구 통합진보당이나 오늘날의 소수 진보정당, 곧 정의당이나 노동당 또는 녹색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의 다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다수는 다중이 아닐 터인데, 어떻게 다중을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다중이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다중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보수적인 또는 더 나아가 수구반동적인 세력을 포함해야 한다. 반대로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제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는해방의 정치적 주체로 존재하려면, 다중은 상당히 축소된 범위의 개인들 및 집단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 간주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네그리와 하트가 가능한 한 최대로 다중의 외연을 확장하면서도 이들을 해방의 주체, 공산주의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목적론적 추론의 가상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론적 추론의 가상은 정치적 분석이 분석하고 설명해야 할 대상 자체를 말소시켜 버린다. 그것은 곧 갑과 을의 대립을 넘어서 을들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 그리고 갈등성이라는 문제이며, 랑시에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에티엔 발리바르 및 여러 현대의 정치 이론가들이 푸코에서 유래하는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개념을 갖고 씨름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현대 정치철학에서 주체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태원,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진보평론󰡕 2015년 봄호 참조.]

 

 

IV. 아포리아로서의 을의 민주주의

 

만약 을이라는 용어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개념들과 이러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면, 을을 주체로 하는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와 어떤 차이점을 지니는가라는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나는 우선 을의 민주주의가 매우 아포리아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아포리아적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포리아(aporia)는 알다시피 아(ἀ) + 포로스(πόρος), 길이 없음’, 따라서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한 논리적 궁지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자크 데리다였으며, 그를 준거로 삼아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들을 숙고하기 위한 유사초월론적 토대로 아포리아 개념을 활용한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였다.[발리바르가 아포리아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 참조. 그 이후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탈구축, 관국민적 시민성 개념에 대한 모색,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을 중심으로 한 폭력론에 관한 연구, 시민주체 및 공산주의에 관한 탐구에서 늘 아포리아는 발리바르 사유의 유사초월론적, 방법론적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용법과 달리 이들의 성찰에서 아포리아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개념들과 이론, 실천의 한계를 나타내기 위한, 따라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극한의 노력을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물론 이러한 돌파의 노력이 아무런 성공의 보장이 없는 모험적인 기획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아포리아는 철학적으로는 우리의 합리성 자체, 정치적으로는 정치공동체 자체가 토대가 없는 것임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한편으로 본다면 아포리아에 기반을 둔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아포리아를 봉쇄한다. 그의 데리다 비판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에 대한 검토는, 진태원, 대체보충, 자기면역, 아포리아: 자크 랑시에르와 자크 데리다의 민주주의론(미간행 원고) 참조.]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인 성격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를 뚜렷하게 부각시켜 준다.

 

1. 을을 잘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일차적으로 을을 잘 대표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을을 잘 대표하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제도적 함의를 제시해볼 수 있다. 가령 최근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제 민주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 민주화라는 표제 아래 우리 사회 극소수 파워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는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그 대신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을의 경제적 이해관계 및 지위를 강화하는 여러 가지 법적제도적 대안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재벌 지배구조를 개혁하고 소수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산업적 시민권을 강화하는 방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제안이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대표의 틀 자체를 개혁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보수 양당 체제가 독점해온 정치적 대표의 틀을 해체하고 다수의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을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은 을의 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을 구성할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지적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롯하여 선거 연령 인하, 결선투표제 도입, 지방 자치제도의 정비 등이 이러한 대안에 포함될 것이다.


아울러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법적제도적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나 정치적법적 제도를 통해 완전히 포괄되지 않는, 하지만 대다수의 을들이 삶 속에서 겪는 억압과 차별, 착취 등을 개혁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가령 여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청소년 등에 대한 차별과 억압, 착취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피해를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일을 넘어, 그들을 예외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존재자들, 피해자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주체들,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구성원들로 재현하는/대표하는(represent), 그리고 구성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대표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2. 을을 대표한다/재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촛불 집회 이후 직접 민주주의 내지 참여 민주주의가 언론 및 학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헌정사에서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 탄핵을 성취하고 새로운 정권을 출현시키는 데 촛불 집회의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만큼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직접 민주주의나 참여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논객들이 대개 이를 대의 민주주의와의 대립의 관점에서 거론한다는 점이다.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참여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며, 설령 대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자주 제기된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조야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말하듯 현대 국가처럼 복잡하고 다원적인 정치 조직을 국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통치하거나 운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더욱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대표의 문제를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이다. 참여 민주주의 내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뒤에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생각이다. 첫째, 현재 한국의 정치 체제의 성격상 대표자들은 국민, 특히 을로서의 국민의 의지나 목소리를 대표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정당이나 권력 질서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이들이며, 이들 자신이 갑으로서의 통치자 내지 지배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둘째, 따라서 갑으로서의 대표자들에게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대의 민주주의보다 을로서의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앞에서 간략하게 제시했던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 곧 을들 자신이 정치적 주체로서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는 관념과도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은 대표(또는 재현)의 과정 이전에 이미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 더 나아가 을들이 현존해 있다는 관념을 전제한다. 그런데 과연 국민 내지 인민은 대표/재현의 과정에 앞서 미리 현존해 있는가? 가령 프랑스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혁명 및 더 나아가 근대 민주주의 헌정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이것은 프랑스 헌법의 전문(前文)으로 사용된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제헌헌법에서는 재산의 유무(일정한 납세액)에 따라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을 구별했으며, 전자에 해당되는 25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피선거권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에게만 부여했다. 1848년 이후에야 성인 남성들은 보편적 선거권을 얻게 되었다. 또한 여성의 경우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얻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흑인들이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정치적 권리를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만 19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주 노동자들과 같이 우리나라 국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대표/재현의 과정 이전에는 정치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주권자로서 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 내지 인민은 처음부터 동일하게 존재해온 이들이 아니라 대표/재현의 과정에 따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거나 확장되어 온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따라서 미국의 한 연구자가 적절하게 말한 바 있듯이 대표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David Plotke,“Representation is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4, no. 1, 1997. 강조는 인용자.]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적절한 대표의 제도나 실천이 없다면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적 약자들인 을들과 을의 을들은 대표가 없다면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게 위해 늘 목숨을 건 필사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참여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대의 제도의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대표제란 본성상 과두제적인 메커니즘이며, 대표자들은 원래 유권자나 국민의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마련이라면, 그것을 애써 개선하거나 개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참여와 대표를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참여를 위해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제도와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대표하기내지 대의하기라고 부르는 개념, 곧 영어로는 리프리젠트(represent) 내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들로 표현되는 개념은 꽤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1) 재현하기: 리프리젠테이션의 기본적인 의미는 표상내지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표상으로서의 재현(再現), 인식하는 주관 바깥에 이미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또는 현존하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다시-제시함(re-presentation)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재현은 첫째, 재현 과정에 앞서 미리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사물이나 대상의 현존을 전제하며, 둘째, 재현 작용 자체는 이러한 사물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잘 묘사하거나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2) 대표하기: 이것의 정치적 표현이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의미의 재현과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활동으로서 대표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자신을 선출해준 피대표자들, 곧 주로 유권자들의 목소리나 욕망, 이해관계를 잘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정치적 활동으로서의 대표역시 재현과 마찬가지로, 대표 과정에 앞서 이미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피대표자들 내지 유권자들이라는 사물 내지 대상의 현존을 전제하며, 이러한 사물 내지 대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다시-제시하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 욕망,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다시-들려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3) -현하기: 그런데 포스트 담론의 주요한 이론적 기여는, 재현에 관한 통상적 생각과 달리 재현 과정과 독립해서 이미 성립해 있는 사물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현 과정이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말의 원래 뜻과 달리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 자체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재현은 오히려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때의 재-현은, 재현 과정을 통해 기존에 존재하는 사회적 범주들이나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 이를 통해 이전까지 드러나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드러나게 하고 보이게 만드는 변형적인 현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처럼 (‘치안체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만드는 것을 정치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대표/재현은,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나 욕망,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대표한다는 소극적인 목표(때로는 기만적이기까지 한)에 만족할 수 없으며, 그러한 대표/재현은 적극적인 변형적 현시로서의 재-현 작용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3. ()주권적 ()주체로서의 을?

 

하지만 우리가 화두로 제안하는 을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재-현의 차원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이러한 재-현 과정 자체는 주체의 문제를 그냥 방치해두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현을 단순한 다시-제시하기로 이해하지 않고 -으로 이해하게 되면, 주체의 문제, 특히 정치적 주체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다. 그런데 만약 현대 사회 체제의 성격상 부재하지만, 정의상 존재해야 하고 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주권적인 주체가 사실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면, 주권자로서의 국민 같은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면 또는 항상 부재하는 원인으로서만 현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 주권 내지 국민 주권 개념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것은 권력의 정당성의 궁극적 기초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주권자의 허락이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정치권력도 성립하거나 유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정당성의 궁극적 기초로서의 국민은 항상 부재하는 이상, ‘국민은 기존 권력 또는 그러한 권력을 산출하고 재생산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때때로 일정한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유령 같은 주권자가 출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 어느덧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주권자로서의 인민 내지 국민인 이상 그것은 늘 자신의 대리자를 정당화하는 역할(‘연기’) 이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주권의 주체는 국민을 넘어서 인민으로 또는 민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컨대 국민 주권이 아니라 인민 주권 내지 민중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란 을을 주권의 주체로서의 인민 내지 민중으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몇몇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서 인민내지 민중이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내적 분할의 문제가 생겨난다. 영어의 피플(people)이나 불어의 푀플(peuple) 또는 스페인어의 푸에블로(pueblo) 같은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곧 이 용어들은 한편으로 어떤 국가 내지 정치체의 합법적 성원이라는 의미, 따라서 우리말의 국민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가리킨다(라틴어로는 포풀루스(populus)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들은 라틴어의 플레브스(plebs)라는 말이 역사적으로 뜻했던 것처럼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런 후자의 의미에서 본다면 피플, 푀플, 푸에블로는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이면서 또한 그 안에서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 참조.]


따라서 인민 내지 민중이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는 아마도 피플, 푀플, 푸에블로가 지니는 이러한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해체하거나 제거하는, 또는 적어도 줄이거나 최소화하려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해체하거나 축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가 국민 주권을 인민 주권이나 민중 주권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새로운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로 바꿀 수 있을까? 요컨대 인민 내지 민중으로서의 을은 헌법 속에 권력의 주체, 주권의 주체로서 명기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민 내지 민중으로서의 을은 계속해서 더 나은 대표/재현의 대상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을들이 (법적) 주권의 주체로 존재하지 않지만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해볼 때가 된 것인가? 가령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법적 틀인 의회제 대표와 독립적인 또 다른 대표의 체계를 조직할 수 있으며, 또한 조직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헌법 상의 지위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헌법 밖의 체계이자 조직으로 남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만약 이 주권자가 사실은 주권자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우리가 촛불 정국에서 대선 정국으로 이행하면서 관찰했고, 또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관찰하고 있는 것은, 몇 달 동안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속 운동을 지속할 수 없으며 또 그럴 의사도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수행할 대표자를 뽑고 싶어 하며, 자신들은 정치의 장에서 물러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실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의 부재 때문이든 아니면 스스로 통치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또 아니면 민주주의 정치가 지닌 무정부주의적 본성(랑시에르가 말하듯 아르케 없음’(an-arkhe)이라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때문이든, 주체가 주체되기를 거부한다면, 그때 민주주의는, 특히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질문들은 이라는 주체가 지닌 본질적인 특성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질문들이며, 바로 이점이 을의 민주주의를 민중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와 다른 것으로 만든다. 민중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불가능한 또는 제기되지 않고 제기하려고 하지도 않는 질문들, 아마도 민주주의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핵심 질문들을, ‘을의 민주주의는 열어놓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