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는 분들은 벌써 아시겠지만, 서교인문사회과학연구실에서 운영하는 "웹진 인무브"에 제가 번역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공산주의와 시민성: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하여]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제가 번역하고 있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그린비 출판사 간행 예정)에 수록된 글입니다. 



그밖에도 "웹진 인무브"에는 여러 흥미롭고 유익한 글들이 많이 있으니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http://en-movement.net/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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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고양이 2017-09-22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goo.gl/UV4Exq

혹시나 (저처럼) 진태원샘의 글을 두리번거리며 찾으시는 분들을 위해 찾아보았습니다. ^^;; (댓글에 하이퍼링크가 안 걸리면 복사&붙여넣기를...;;)
 

철학연구회에서 펴내는 [철학연구]에 수록될 논문 한 편 올립니다. 


여기 올리는 판본은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판본이니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은 


[철학연구]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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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


 

1. 발리바르 폭력론의 문제설정

 

폭력이라는 문제는 자명한 문제이거나 무기력한 문제가 되기 쉽다.[이하 1절은 논의는 {폭력과 시민다움} [역자 후기]의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폭력의 문제가 자명한 문제인 이유는, 폭력을 비판하거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폭력이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명 원칙인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비폭력이,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가장 자명한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폭력의 문제가 무기력한 문제로 간주되는 이유는,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대응할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폭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널리 의지하는 것은 법과 공권력이다. 그런데 만약 법과 공권력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곧 법과 공권력 자체가 지배를 위한 수단이거나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또 다른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비단 내전이나 준 내전 상태와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또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만 제기되는 질문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는 수많은 국가 폭력의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거니와,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도 이러한 국가 폭력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20144월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은 침몰해가는 배 안의 승객들에 대한 국가의 태만한 무관심에서, 냉혹한 폭력 기계 또는 치안 기계로서 국가의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진태원 2015b 참조).


20세기 초에 이미 막스 베버가 국가를 적법한 (또는 적법하다고 간주되는) 폭력Gewalt이라는 수단에 기반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라고 규정했거니와, 독일의 비평가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벤야민 2008a)에서, 또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데리다 2004)에서 각각 불법적인 폭력 대 정당한 공권력이라는 구도가 지닌 허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 바 있다.(진태원 2010 참조) 따라서 공권력 역시 불법적인(또는 불법적이라고 간주되는) 폭력과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물론 이것은 정당한 권력과 부당한 권력, 권력과 폭력, 합법적 질서와 비합법적 무력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가 자명한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역사적 상대성에 입각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0)의 평주를 참조.] 폭력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또 하나의 폭력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문제는 비폭력의 자명함과 대항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사이에서 순환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에 따르면 폭력의 문제,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개념 자체의 개조”(Balibar 2010c, 42)를 요구하는 문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그의 정치철학의 개념적 독창성 및 이론적 적합성을 측정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실제로 내가 보기에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사유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의 핵심을 이룬다.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들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고한다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주제는 가령 데리다[특히 데리다(2004) Derrida(2003) 참조. 후자의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데리다 2003), 번역이 좋지 않아 참조하기 어렵다.]나 아감벤[특히 Agamben(1998); 아감벤(2008); Agamben(2005); 아감벤(2010) 참조.] 같은 철학자들의 정치사상의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폭력의 문제를 해방의 관점에서 사고하지만, 이들은 맑스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게발트’: 맑스주의 이론사에서 본 폭력과 권력이라는 논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글에서도 늘 맑스주의를 몰락하게 만든(따라서 그것이 재개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아포리아라는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발리바르(2012) 참조. 사실 발리바르가 폭력에 관해 처음으로 발표한 글에서도 폭력의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Balibar(2010c)에 수록된 Violence et politique: quelques questions참조. 이 글은 1992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현대 정치철학의 동향에 대해 얼마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맑스주의의 역사(그 쟁점들과 모순들)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거니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러한 역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오랜 천착과 더불어 상당한 지적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발리바르 폭력론의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의 핵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이라는 관점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이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폭력을 대항폭력이나 비폭력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폭력의 문제설정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이론가들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을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폭력을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특히 지젝(2011) 참조. 지젝과 발리바르 폭력론을 비교하고 있는 김정한(2011)도 참조. 김정한이 발리바르의 폭력에 관한 글이 많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과 시민다움󰡕의 존재를 간과한 발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의 문제를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정치의 문제는 순수한 힘의 문제가 된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듯이 인간 역사 속에서도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무력 다툼만이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다). 고전적인 맑스주의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지배 세력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정당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 및 피지배 계급들의 대항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항 폭력은 착취 없고 지배 없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정당한 목적이 수단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이는 사실은 1950년대 이후 사르트르가 대표했던 관점이기도 하다. 폭력의 문제를 둘러싼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에 대해서는 베르네르(2012). 또한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지만 좀 더 미묘한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입장에 대해서는, 메를로-퐁티(2004) 참조.] 따라서 폭력은 수단 내지 전술의 문제일 뿐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좌파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관점 속에서 맑스주의를 역사적 몰락으로 이끈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


반대로 비폭력의 관점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폭력 그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한다. 비폭력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악의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비폭력의 관점은 목적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간에 폭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비폭력의 관점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선악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반대로 악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 내지 인권을 옹호하려는 이러한 비폭력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선의 존재론적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학(및 따라서 선에 근거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알랭 바디우(내지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발리바르(2012), 150 이하.]  하지만 발리바르는 폭력은 역사의 동력중 하나이며, “고유한 창조성’”(발리바르 2012, 124)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에, 폭력을 무차별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비폭력의 관점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운동의 경우 그것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폭력에 맞선 정치 투쟁의 한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민다움civilité의 한 전략으로서 독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가령 레닌(또는 마오) 같은 사람이 발전시킨 바 있는 맑스주의 전통 내의 시민다움 전략과 대조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Étienne Balibar, “Lénine et Ghandi”(Balibar(2010c)에 수록) 참조. 또한 간디와 마오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 Balibar(2011)도 참조.]


이러한 관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는 문제로 다룬다. 이것은 곧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일차적인 수준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관련된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정치(특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이든 민중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간에,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 한 정치가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보기에 폭력, 특히 그가 극단적 폭력extrême violence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또 그것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감축할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은 가운데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거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공문구에 그치기 십상이다.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경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이라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마지막으로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은 반()폭력의 문제를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의 발명의 문제와 연결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사실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발터 벤야민 이후, 또 한나 아렌트[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저작은 폭력론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관점에서, 폭력론󰡔혁명론󰡕,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된 아렌트의 몇몇 보수적인 테제를 탈-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폭력론(아렌트(2011)에 수록) 및 아렌트(2006) 참조. 아렌트에 대한 발리바르의 독해로는,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발리바르(2010) 7)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을 각각 참조.]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들뢰즈와 가타리의 폭력론은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실로 군주정 체제의 최고의 비밀monarchici summum arcanum, 그 주요 관심사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을 매어놓아야 할 두려움을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Spinoza(1925), 7. 이 질문은 󰡔()오이디푸스󰡕의 화두이자 또한 󰡔천 개의 고원󰡕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착취와 모욕, 예속을 감내해 왔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 착취와 굴종, 예속을 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라이히가 파시즘을 설명하기 위해 대중들의 몰인식이나 미망에 의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욕망에 의한, 욕망의 견지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을 요구했을 때, 그는 사상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아니 대중들은 속지 않았다. 그 순간, 그 상황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욕망했고,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군중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들뢰즈가타리(2014) 64-65(강조는 들뢰즈-가타리가 한 것이고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자크 데리다(데리다(2004) 및 데리다(2014) 참조) 이후 현대 폭력론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극복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 정치철학이 역사적 맑스주의의 몰락과 파시즘(또는 전체주의’)의 유령이라는 20세기의 두 가지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프롤레타리아운동이자 계급투쟁이론이라는 자신들의 토대 위에서 나치즘과 대결하는 데 무력했으며, 나치즘을 분석하고 나치즘이 위력적인 이유들을 이해하는 데 무능력했(발리바르(2010), 188. 강조는 발리바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유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가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해방의 정치가 어떻게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데리다 식으로 표현하면) 상속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가 그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무능력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한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수의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러한 한계를 지양하거나 전위(轉位)시키려는 다수의 실천 전략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독창성은, 거의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반()국가적인 관점, 더 나아가 반()제도적인 관점을 택하고 있는 데 반해(가령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현대 정치철학에서 반()국가적 관점 및 메시아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적 토론으로는 Dean & Villadsen(2016)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2012) 및 진태원(2014)를 각각 참조.]), 파시즘과의 대결이라는 문제,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의 퇴치라는 문제를 시민권 제도의 쇄신 내지 재발명의 문제와 결부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권 제도야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 곧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을 이루며, (정치적) 주체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발리바르의 깊은 이론적 신념에서 비롯하는 생각이다. 반폭력의 정치가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 과제 중 하나를 이룬다면, 그것은 극단적 폭력의 메커니즘이 폴리테이아 또는 시민권 헌정 내부에서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시민권의 재발명이라는 과제가 반폭력의 정치를 위한 조건을 이룬다면, 그것은 시민권의 재발명 없이 정치적 주체화를 사고하고 실천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극단적 폭력 개념

 

반폭력의 정치철학의 두 가지 이론적 핵심은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극단적 폭력은 몇 가지 개념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2.1.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은 우선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 경우 정치는 개인들과 그들이 일부를 이루는 공동체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립하는 근본적인 양식, 즉 개인들을 집단화하고 역사적 집합체의 성원들을 개인화하는 (물질적이자 상징적인) 양식(발리바르 2012, 101)으로 규정된다. 이처럼 넓게 정의된 정치에는 맑스주의적인 혁명적 정치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정치까지 포함된다.


앞서 말했듯이 발리바르에게 폭력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맑스주의적인 정치, 곧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게발트라는 논문에서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맑스의 두 가지 방식 사이의 긴장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을 “‘자연화하려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원인과 결과의 연쇄 속으로 통합’”(발리바르 2012, 37)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지닌 허무주의적인 차원을 지칭하게 된다. 곧 맑스는 자본주의는 이전의 생산양식과 달리 그 자체의 논리에 의해 자신들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프롤레타리아트]의 삶과 재생산 조건을 파괴하고, 그리하여 부르주아지 자신들의 존재 조건을 파괴하게 된다”(발리바르 2012, 42)고 간주한다. 이는 특히 󰡔자본󰡕 1권의 노동일에 관한 분석이나 기계와 대공업에 관한 분석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경향적인 과잉착취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살아 있는 원천, 곧 대지와 노동자를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을 발전시킨다”(발리바르 2012, 44)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경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이 정당화된다. 그렇다면 맑스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적대적인 두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한 계기로 간주하는 셈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는 극단적 폭력에서 정치의 실재le réel de la politique라고 불릴 수 있는 것, 즉 정치에 비극적 성격을 부여하는 예견 불가능한 것 내지 계산 불가능한 것”(발리바르 2012, 37. 강조는 발리바르)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 ‘정치의 실재라는 라캉적인 정식화가 시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극단적 폭력에 대하여 그 적대자들이 맞세우는 혁명적 폭력이 과연 극단적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맑스가 다분히 회의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압력을 받아 국가가 자본에 대하여 개혁을 강제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시초 축적이 산출하는 과잉착취와 극단적 폭력의 효과를 주변부로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성이라는 생각에 전제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극단화 경향이 다른 수단들을 통해 완화되거나 우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과연 혁명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문이다. 맑스 자신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에서 보여주었듯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지지였다. 자본주의에 고유한 궁핍화 과정의 산물인 프롤레타리아 또는 적어도 그 중 일부는 이러한 궁핍화 과정 및 착취에 맞서 조직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본과 그 대표자들의 지지자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이후의 맑스주의 이론가들은 문화산업론(프랑크푸르트학파), 이데올로기론(알튀세르), 통제사회론(들뢰즈) 등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예속의 효과를 낳는 예속적 주체화 작용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자 계급의 주체화, 곧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로의 전화는 무한정하게 멀어지는 지평으로, 그럴 법하지 않은 반경향으로, 심지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기적적인 예외로 나타”(발리바르 2012, 56)나게 된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더욱이 게발트라는 것이 마음대로 활용 가능한 도구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된다. 이 문제는 혁명적 계급의 조직화라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조직화가 필수적이고 조직화를 위해서는 노동자 조직, 특히 노동자 정당이 불가결하지만, 이러한 정당이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일부가 아닐 수 있는가, 또는 국가장치의 전도된 거울 이미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실로 19세기 말 노동자 계급 정당이 등장한 이래, 또한 러시아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지배 계급으로 구성된 이래, 맑스주의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가 아니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1970년대 말-80년대 초에 발리바르 연구의 중심 주제를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들이다. 이 주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탐구는 특히 다음 연구에 집약되어 있다. “La vacillation de l'idéologie dnas le marxisme”(Balibar(1997)에 수록). 이 글의 국역본은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의 동요(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이 시기 발리바르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논의는 서관모(2011)을 참조.] 


자유주의 정치의 경우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제, 일차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의 이중적인 본성에서 생겨나는 문제다. 곧 자유주의 국가는 한편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보편주의적 측면을 구현하는 국가로,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을 제도화하고 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국가이며, 이러한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치안 기계로 전화될 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국가는 법치국가이지만 또한 치안국가이기도 하다. 개인들과 집단들을 시민들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국가이지만 또한 반항자, 비정상인, 일탈자 및 이방인들을 배제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사회국가이지만 또한 자본주의 시장 및 그 불굴의 인구 법칙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계급국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적이고 문명화된 국가이지만 또한 무력국가이자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국가이기도 하다. 잠재적이지만 때로는 공개적인 방식으로 극단주의는 단지 주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또한 중심에 위치해 있다.(Balibar(2010c), 328. 강조는 발리바르)

 

더 나아가 이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에 고유한 배제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다. 이는 근대 민주주의의 병리성이나 이런저런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편주의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시 말하면 근대 민주주의는 그것의 고유한 보편주의적 원칙으로 인해 이전의 정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본적인 배제를 산출한다. 이는 외연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의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발리바르(2010) 4공동체 없는 시민권?“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Balibar(2010b)에 수록) 참조. 또한 이에 관한 평주는 진태원(2011) 및 진태원(2013b)을 각각 참조.] 외연적 보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는 단순히 약탈이나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선교나 문명화의 관점에서 식민화를 추구했지만, 식민지의 비유럽적인 인민들은 같은 국민들로 포섭되었음에도 본국의 시민들과 동일한 시민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동일한 정치체 내에 법적으로 동등한 시민이기는 하되 또한 불평등한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바로 외연적 보편주의가 산출하는 배제의 양상이다. 하지만 좀더 심각한 것은 내포적 보편주의의 측면인데, 발리바르가 말하는 내포적 보편주의는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인간=시민 명제, 곧 인간은 무매개적으로 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진태원 2013a 참조) 문제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평등자유명제에 따라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성립한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원리가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곧 특정한 정치체에 속하는 특정한 국민적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효성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니고,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진태원 2011, 188) 이것은 근대 보편적 민주주의에 고유한 배제 형식이며, 인권선언또는 그 핵심으로서의 평등자유명제의 아포리아를 구성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권선언은 아주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이어서 모든 특수한 차별받는 사람들 또는 배제된 사람들(프롤레타리아, 식민지인, 여성, 오늘날의 이주민)이 기성 질서에 맞서 투쟁할 때 이를 원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역사에서 바로 이러한 인권선언의 기치 아래 이 배제들이 유지되어 왔고 또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평등자유의 사회에 선행했던 어떠한 신분 또는 위계 사회에서도 우리 사회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배제 형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곧 사회가 위계화되어 있고 불평등한 자유의 원리에 따라 기능할 때에는 정치 참여 또는 기본권이 부재한 사람들을 굳이 인간 종에서 배제할 필요가 없으며, 또는 그들을 열등한 인간들로 전환시킬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Balibar 2010a, 12)

 

극단적 폭력이 근대 민주주의 또는 근대 문명 바깥의 어떤 특정한 예외적 상황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근대 민주주의 문명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보는 이러한 생각은 벌거벗은 생명 및 주권적 폭력에 관한 아감벤의 관념과 얼마간 공명하면서도 또한 그러한 관념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데, 이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부연하겠다.

 

2.2.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폭력

 

극단적 폭력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이러한 폭력이 주체성의 가능성을 잠식하거나 와해시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이를 저항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성 질서에 반대하고 불의에 맞서 정의를 옹호하는 부정적인 또는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을 넘어 능동적 주체성과 집합적 연대가 형성되는 장소라는 적극적 의미의 저항”(발리바르 2012, 118)을 가리킨다. 그는 이러한 의미의 저항에 대한 철학적 정식화를 스피노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생존해 있는 모든 개인에게 포함되어 있는 억압 불가능한 최소라는 생각, 곧 개인성 자체는 근본적으로 관개체적(transindividual)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스피노자에게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들의 능력을 이루는 것, 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이들은 개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있으며, 개인 자신 역시 다른 개인들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발리바르 2012, 119)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 폭력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실행되지 않는다. 발리바르는 특히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우선 그가 초객체적 폭력ultra-objective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인간 존재자들을 상품의 세계 속에서 마음대로 제거될 수 있고 도구화될 수 있는 사물의 지위로 환원”(발리바르 2012, 129)하는 폭력이며, “극단적인 빈곤과 기근 및 기타의 소위 자연적재앙들(전염병, 가뭄, 홍수나 지진 같은 재난시 사회적 보호망의 부재 등. 지역에 따라서 아주 불균등하게 인명 피해 효과를 낳는 이런 현상들에는 그 명칭 말고는 자연적인것이 전혀 없습니다)”(발리바르 2010, 244)을 통해 표출되는 폭력이다. 또한 그가 초주체적ultra-subjective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존재하는데, 이는 “‘의 세력을 일소한다는 기획의 집행자, 즉 주권적 권력의 광기에 개인과 공동체를 제물로 바”(발리바르 2012, 129)치는 폭력이다. 이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나 아프리카 내전 등을 통해 격렬한 형태로 표출된 바 있는 증오의 이상화를 낳는 폭력이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증오의 이상화는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동일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 정상적인 개인 주체들로 하여금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종교라는 이름 아래 어제까지 같이 살던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심지어 성폭력을 통해 다른 민족 내부에 자신들의 씨앗을 남기려는 끔찍한 잔혹성을 실행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폭력의 힘, 그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말하는 초주체적 폭력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폭력은 인간 주체를 상품이나 사물 또는 일회용 인간으로 환원하거나 아니면 무의식적인 충동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어떤 초주체의 의지를 집행하는 단순한 대행자(또는 자발적 예속의 주체)로 환원함으로써, 합리적인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의 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주체적 폭력과 초객체적 폭력은 다른 여러 폭력들과 함께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이를 가장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발리바르가 인용하는 피에르 세나르클랭이라는 인도주의의 활동가의 아프리카 상황에 대한 보고문이다. 발리바르(2010), 249.]


2.3. 전환 불가능한 폭력

 

또한 극단적 폭력은 전환 불가능한inconversible 폭력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폭력의 전환이나 전환 가능성이라는 관념은 근대 정치 문명에 고유한 관점으로, 발리바르는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이러한 관념이 가장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고 간주한다. 발리바르가 전환conversion이라고 부르는 것은 폭력이 (역사적으로) 생산적인 힘으로 전화되는 것, 파괴력으로서의 폭력의 소멸과 제도들의 내적인 에너지 내지 역량으로서의 재창조를 의미”(Balibar 2010c, 61)한다. 헤겔에게서 폭력의 생산력으로의 전환은 역사에서의 이성, 따라서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역사적 목적론을 단순히 비난하거나 처음부터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헤겔의 역사적 목적론의 핵심은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Balibar 2010c, 73)라는 관념이다. 역사를 우연의 제거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은 고대적인 섭리론이나 운명론과 대립하는 근대적인 합리성의 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의미에서의 섭리나 운명이란 자연적인 필연성에 거스르거나 그것을 파열하면서 실현되는 외재적인 또는 초월적인 힘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면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은 역사 과정에 내재적인 필연성을 뜻한다. 곧 겉보기에는 비합리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작용이나 힘들이 사실은 어떤 내재적인 경향이나 목적의 실현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그런데 헤겔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향이나 목적 또는 역사의 의미가 이미 시초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제하거나 아니면 먼 장래에 이러한 목적이나 의미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역사에 내재하는 목적들은 그것들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들(인간, , 의지, 제도)과 동일한 현재내부에서 생산된다는 것”(Balibar 2010c, 74)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 과정의 시초에는 역사적 필연성 내지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우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또는 정치적 제도 등과 같은 수단들을 통해 이러한 우연성을 제거하고 역사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되게 하는 것이 바로 우연의 제거로서의 역사가 뜻하는 바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 이후 법치국가(또는 인륜적 국가)의 구성을 통해 결국 인류가 우연의 전면적인 제거에, 곧 역사적 목적의 실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발리바르가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헤겔 식의 역사적 목적론이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과거나 현재에 산출되었고 또한 산출되고 있는 수많은 폭력, 특히 극단적 형태를 띠는 폭력들이 역사적 진보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생각이나, 무의미한 폭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쨌든 적어도 그러한 폭력들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보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9번째 테제에서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벤야민 2008b, 339)으로 역사를 묘사하면서도,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합의 ... 약한 메시아적 힘”(벤야민 2008b, 336)에 대해 말할 때, 벤야민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실천적 결과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수단을 (절망적으로) 찾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4.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

 

따라서 극단적 폭력의 전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에 깔려 있는 생각은 합리성 자체 내부에 환원할 수 없는 비합리성의 잔여가 존재한다는 점,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화의 형식과 제도 자체에 인간에 의한(곧 사회문화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생산인간에 의한 인간적인 것의 파괴가 공존한다는 점, 극한적으로는 서로 식별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발리바르 2012, 130. 강조는 발리바르)이다. 이로부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이라는 생각이 나온다. 발리바르는 폭력의 현상학에서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첫 번째는 인간에게 고유한 저항 가능성이 소멸되고 인간이 사물화되는 현상이다. 그는 시몬 베이유의 󰡔일리아드󰡕에 대한 주석에 의거하여 이를 설명한다. 베이유에 따르면 극단적 폭력은

 

죽이지 않는 힘, 곧 아직은 죽이지 않는 힘 ...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로 만드는 권력[이다]. ... 죽지도 않는 가운데 생애 내내 사물이 되어버리는 가장 불운한 존재들도 있다. 그들의 나날에는 어떤 놀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을 위한 어떤 여지도, 어떤 빈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도, 다른 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아래쪽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다른 종류의 인간, 인간과 시체의 타협물이다. ... 죽음이 끝장내기 이전에 이미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삶인 것이다.(발리바르 2012, 105)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사물처럼 만드는 폭력의 기저에 존재하는 두 번째 측면은 죽음보다 더 나쁜 것으로서의 삶이라는 측면이다. 이것은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지만, 발리바르가 세네갈 출신의 철학자 아쉴 엠벰베를 원용하여 지적하듯이 식민지나 포스트식민지에서 끝없이 계속되는 폭력의 상황에서 존속하는 삶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세 번째 측면은 목적 합리성, 효용성을 초과하는 것으로서의 폭력이라는 측면이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는 아무런 사회적 효용성도 없고 경제적 합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무익한 낭비에 불과함에도 대대적인 비용을 들여서 유대인 대학살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대표적이거니와, 합리적인 효용과 무관하게 심지어 자기 손해나 자기 파괴를 무릅쓰면서 감행되는 폭력이 나타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바로 극단적 폭력의 이 세 번째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극단적 폭력이 자양분으로 삼고 재생산하는 전능함의 환상, 극단적 폭력이 그 희생자들을 무기력으로 환원하는 것(극단적 폭력의 내재적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이에 상호연관성이 존재”(발리바르 2012, 112)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호연관성에는 폭력의 대상을 이루는 희생자들이 폭력에 감염되는 차원”(발리바르 2012, 112)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은 우리 시대에 자살폭탄테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감을 통해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제국주의적 폭력과 그에 맞선 절망적인 대항폭력 사이의 악순환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프리모 레비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바 있고 지그문트 바우만이나 조르조 아감벤이 나치즘에 관한 자신들의 분석에서 각자 분석한 바 있는, 도살자와 희생자 사이의 구별 불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희생자 자신을 도구로 삼아(이른바 특수부대’) 희생자를 도살하는 잔혹한 폭력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하는 폭력이라면, 이는 극단적 폭력에 의해 개인의 삶과 인간의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규범들이 애매해지거나 식별 불가능해진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역사적 진보는 고사하고 목적 합리성과도 무관한, 따라서 경제적 효용이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자행되는 폭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극단적 폭력이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의식의 차원, 특히 환상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이 때문에 극단적 폭력에 대한 분석에서는 정신분석(여기에는 자캉 라캉과 앙드레 그린 같은 정신분석가만이 아니라 조르주 바타이유,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자크 데리다 같이 정신분석에 관한 탐구를 수행하는 철학자이론가들의 작업도 포함된다)에 대한 준거가 본질적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Étienne Balibar, “Violence: idéalité et cruauté”(Balibar(1997)에 수록) 참조. 이 글의 번역본은 폭력: 이상성과 잔혹(발리바르(2007)에 수록)인데,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다. 또한 Balibar(2010c) 1부 두 번째 강의도 참조.] 물론 이 때의 환상은 순전히 심리학적인 의미의 환상, 곧 주관적인(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적인) 망상이나 공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관개체적인(Balibar 2011, 227)환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에서 극단적 폭력이 합리성을 초과한다는 것이 함축하는 또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극단적 폭력은 그 인과관계를 분석하기가 어려운 폭력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태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태의 원인이 정확히 식별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극단적 폭력의 특징은 관찰 가능하지만 그 원인(대개 중요하고 궁극적인 원인)부재하는효과들의 구조”(발리바르 2012, 129)라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나 인과적 설명 대신에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을 제안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폭력의 현상학이 인과관계에 대한 분석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증적인 차원에서 완결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3. 시민다움의 전략

 

시민다움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몇 가지 핵심적인 윤곽만 제시해보겠다.[시민다움의 전략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5a)를 참조.]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을 중심으로 한 폭력에 맞서는 정치, 곧 반()폭력의 정치를 시민다움의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전적인 부르주아 정치 또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로서의 해방의 정치와 맑스주의적인(또는 푸코적인) 변혁의 정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를 이루고 있다.[Étienne Balibar, “Trois concepts de la politique: É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é”(Balibar(1997)에 수록). 이 논문의 국역본(발리바르(2007)에 수록)에서는 논문 제목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민다움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 그 이유는 봉건적인 도덕 질서를 가리키는 인륜이라는 용어를 발리바르가 말하는 civilité 개념에 대해 사용하는 것은 (시민이라는 한정이 붙는다 해도) 얼마간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제안은 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발리바르(2011)에 수록) 참조. 그렇다고 해도 발리바르 자신이 말하듯이 civilité라는 개념 자체가 기본적으로 번역 불가능한 용어라는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Balibar et al.(2015)(이 좌담은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Rue Descartes nos. 85~86, 2015에 수록된 것이다) 참조. 곧 이 개념의 번역은 독자적인 개념적 발명의 작업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여전히 새로운 개념적 발명의 가능성들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곧 해방의 정치 또는 정치의 자율성은 인권선언을 비롯한 고전적인 시민혁명 내지 부르주아 혁명을 정초하는 문헌들에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국가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변혁의 정치 또는 정치의 타율성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발리바르는 맑스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대표자로 제시한다). 반면 시민다움의 정치는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발리바르 2010, 229)을 목표로 삼는다.


시민다움의 정치에 관해서 발리바르는 세 가지의 전략을 구별한다. 우선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개념[이 개념은 임석진 교수가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이래로 국내 헤겔학계에서는 대부분 인륜성으로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말의 인륜 내지 인륜성이라는 용어가 전근대적인 도덕적 질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데 반해,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도덕성 및 개인성을 전제하고 그것을 지양하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번역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을 그냥 음역해서 사용하겠다.]을 통해 고전적으로 표현된 바 있는 헤게모니의 전략이 존재한다. 발리바르가 이를 그람시의 용어법을 빌려 헤게모니의 전략이라고 부른 이유는,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 개념이 표현하는 것이 의고적 민족주의나 심지어 유기체론적인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버마스가 제안한 바 있는 헌법애국주의Verfassungspatriotismus와 유사한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곧 지틀리히카이트를 구현하는 헤겔 식의 국가는 시민들의 공동체로 간주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국민국가는 가족 및 친족과 같은 일차적 공동체에 대한 속박에서 개인들을 해방시켜 국가 자신이 조직하는 이차적 공동체(, 공공성과 관련된)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또는 법치국가의 헤게모니 아래 근대적 다원성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재구성하는 헤겔의 정치철학은 오늘날 많은 헤겔 연구자들의 관점과 더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가령 Siep(1982), Kervegan(2008), Pippin(2008), 7-8, 김준수(2012)를 각각 참조.] 그럼에도 발리바르는 헤겔 식의 헤게모니 전략은 여러 가지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가령 헤겔은 일차적 동일성에서 개인을 분리시켜 이차적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해방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폭력적인 과정(푸코적인 의미에서 규율적 폭력이면서 부르디외적인 의미에서 상징적 폭력인)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근대적인 헌정국가는 동시에 허구적 민족성에 기반을 둔 국민적인 국가, 따라서 본래적인 배제와 차별을 함축하는 국가라는 점 역시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헤겔 식의 시민다움 개념은 공과 사의 구별에 관한 지나치게 규범적인 관점, 곧 사적 영역에 대하여 정상성을 강제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두 개의 상이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는 이것을 각각 다수자 전략소수자 전략이라고 명명한다. 다수자 전략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고전적인 해방 운동에서 나타나는 주체화의 전략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전략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아포리아의 핵심에는 피지배자들의 다수-되기가 존재하는데, 발리바르의 이 개념을 피지배자들의 비지배적인 주체-되기라는 문제로, 곧 피지배자들이 이전과 같은 지배 계급(곧 피지배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기초를 둔)으로 구성되지 않으면서 헤게모니적인 집단적 주체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진태원 2015a, 222. 강조는 원문)로 번역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자 전략은 푸코 및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이 대표하는 것인데, 이것의 핵심에는 “‘국가 장치와 국가 권력의 폭력에 맞서고 그것을 소멸시키려고 했던 혁명 운동의 역사가 이러한 폭력을 재생산하거나 모방하게 되었다는 생각(Balibar(2010c), 180. 강조는 발리바르)이 놓여 있다. 따라서 다수자 운동, 곧 대중운동에 고유한 미시파시즘적인 욕망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소수자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수 되기라는 개념이 이 전략의 핵심을 이룬다.[아래로부터의 시민다움의 전략이라는 발리바르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한국 현대 문학사를 재구성하려는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도로는 김익균(2017)을 참조.] 문제는 소수자들minorities(이들은 어원이 말해주듯이 또한 약소자들이면서 (정치적사회적) 미성년자들이기도 하다)의 확산(이것을 시사적인 용어법에 입각하여 ()들의 확산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2017) 참조))으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시대에 탈정체화의 작용을 특권화하는 소수 되기의 개념만으로는 정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는 연대와 결합의 과정, 또는 그들의 용어법대로 하면 이접적 종합의 과정을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다수자 전략과 소수자 전략의 결합,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양자의 동시적인 변증화를 요구하고 있다.

 

4. 몇 가지 쟁점

 

이제 끝으로 간략하게 몇 가지 논평을 제시해보자. 바깥의 정치 또는 좌파 메시아주의에 입각해 있는 현대 정치철학의 흐름의 영향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따라서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곧 법은 폭력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되어 있다. 아마도 이를 가장 도발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조르조 아감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충격적이게도 근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인권선언을 벌거벗은 생명들의 주권적인 포섭을 천명한 문헌으로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인권선언과 강제수용소 사이에는 직접적인 논리적정치적 연속성이 존재하게 되며, 일체의 법은 주권적 폭력의 표현이 된다.(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아감벤 2008 중 3부 참조) 극단적 폭력의 현상학의 차원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분석과 아감벤의 분석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 내지 유사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인권선언에 대한 해석 및 민주주의와 근대 시민권 제도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양자 사이에는 뚜렷한 대립 관계가 존재한다. 발리바르는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아감벤과 자신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나는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들(불가능성의 조건들과 분리될 수 없는)은 정치의 와해의 형태들로부터 사유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아감벤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와해의 형태들이 유일한 모델(그것이 수용소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로 귀착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조건들은 이질적이며, 그 조건들은 어떤 존재론이 아니라 어떤 구조의 정세적 변이에 속하는 우연적 상황들 속에서만 자신들의 효과를 산출한다고 믿는다. 2) 이 때문에 내가 보기에는 역사 개념”(좀더 근원적으로는 역사성의 도식)을 그 목적론적 정식화들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런데 여러 시각에서 볼 때 아감벤이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독서로부터 발전시킨 역사성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여전히 목적론의 지평 속에 위치해 있다. 이 관점은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주권과 그의 권력을 서양 정치의 형이상학적 운명으로 만든다(이 때문에 특히 아감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주권적역량에 대한, 그리고 비오스 폴리티코스와 시민권의 설립을 통한 조에의 내적 배제에 대한 최초의 인물을 판독해내는 게 중요하다). 3) 이것과의 대비를 통해 도출되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메시아적관점(호모 사케르 연작에 앞서 출간된 저작, 󰡔도래할 공동체󰡕(1990)의 테제들과 합치하는)은 근원적으로 반()제도적이다. 나는 제도 그 자체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보증물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제도가 그러한 보증물이 될 수 있는 영속적인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제도적 지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메시아적 관점이 아니라 비극적 관점을 소묘한다. 내가 시민다움의 전략들이라는 이름 아래 검토해보려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Balibar 2010c, 148-49)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 또는 정치 제도는 양가적이다. 곧 정치의 공간을 개방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으로서의 제도는 한편으로 (한 계급, 한 카스트, 한 관료제 내지 한 국가장치에 의한) 권력의 독점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자유와 평등의 현실적인 획득으로서의 시민권으로의 경향 사이의 갈등(Balibar 2010c, 152)사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 없는 정치 또는 제도 바깥의 정치를 꿈꾸는 것은 반폭력의 정치의 입장에서는 자멸적인 결과를 산출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제도를 더욱 더 폭력의 집적으로, 치안기계의 장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고 따라서 주체성의 가능성 또는 역량이 더욱 더 잠식되도록 조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법 또는 제도 그 자체는 전적으로 폭력적인 것도 또한 전적으로 해방의 역량인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폭력 또는 역량의 이중적 공간으로서의 법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지, 또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것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이제 발리바르의 극단적 폭력 개념에 담겨 있는 몇 가지 모호성을 지적해두고 싶다.

 

4.1.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

 

극단적 폭력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첫 번째 쟁점은 그것이 구조적 폭력, 특히 자본주의적인 착취 및 상품화의 폭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극단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과 동일한 것(또는 개념적으로 구별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사실상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의 가능성만이 남게 된다. 극단적 폭력이 구조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라면, 구조 자체의 완전한 전복 내지 파괴 이외에는 다른 인간적 삶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극단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과 별개의 것이라면, 극단적 폭력은 예외적인 상황 또는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될 것이다.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같은 상황이나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내전적인 상황이 그것이다(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파시즘이고 아닌지 사후에만 식별할 수 있다. 곧 우리가 생성 중에 있는 새로운 파시즘 속에 있는지 여부, 따라서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실히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이 우리에게는 부재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극단적 폭력이 우리에게, 곧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모면하고 있는(또는 그렇다고 믿고 있는)[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로 인해 전쟁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은 과연 극단적 폭력의 상황과 무관한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현 상황이 두 주요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전략적전술적 고려의 산물이며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계산된 연출의 결과라고 해도, 극단적 폭력의 주요 특징을 계산의 합리성을 초과하는 우발적 비합리성이 산출하는 대규모 학살과 재난에서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정확히 극단적 폭력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 예견되는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겪을 당사자인 남한의 시민들이 이 상황을 통제하는 데 매우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보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이 전쟁의 문제를 매우 중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시민다움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더 숙고해보는 것은 매우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려는 시도는 자칫 구조적 폭력을 정상적인 폭력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역사 및 문명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극단적 폭력이 단지 예외적인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적 쟁점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 할 텐데, 발리바르에게서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는 점이 이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극단적 폭력이 일종의 문턱이라고 말하고 또한 구조적 폭력과 달리 극단적 폭력은 목적 합리성이 부재한 폭력이라고 말함으로써 구조적 폭력과 극단적 폭력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경제는 지난 2008년의 위기 및 2010년 이후 유럽 재정 위기를 통해 드러났듯이, 점점 더 목적 합리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합리성 또는 광기의 차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에서 목적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는 어떻게 식별될 수 있는가?


또한 지난 정권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를 통해(아울러 국정역사교과서 간행 시도 및 위안부 합의에서도) 드러난 바 있는 정부의 통치에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경계가 어떤 것인지, 곧 우리가 여기에서 일종의 극단적 폭력의 한 형태를 목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익명의 심사자 한 분은 필자의 글에 대한 논평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는 명백히 합리성이 결여된 사건, 즉 극단적 폭력의 한 양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내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와는 약간 초점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내가 너무 간략하게 논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점에 관해 약간 부연해보고 싶다. 나는 이 문장에서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또는 조류독감 사태 같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 극단적 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를 극단적 폭력의 사례로 보는 것 자체가 다수의 세부적 분화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이 사태들을 극단적 폭력의 사례로 보면서 그것을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에서 비롯된 필연적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박근혜 정권의 비합리적 광기나 박근혜 자신의 무지 내지 비정상적 성품 등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러한 폭력의 원인을 박근혜 정권 배후에 있는 한국 수구 세력의 본래적 잔인성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것을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 자체의 비합리성의 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생겨난다. 만약 이 문제를 박근혜 정권의 광기와 무능력에서만 찾는다면, 새로운 정권에서는 이와 유사한 문제가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반면 이 문제가 한국 정치의 제도적 구조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정권에서도 얼마든지 재발할 수 있는 소지를 지니고 있다. 내가 다음 문장에서 지적하려는 것이 이점이었다.] 아울러 새로 들어선 정권이 이러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온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보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혹시 현 정권이 앞으로 드러낼지도 모를 이런저런 한계들은 극단적 폭력의 잠재력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 질문해볼 수 있다.

 

4.2. 극단적 폭력의 유형들

 

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질문이 극단적 폭력의 유형에 관한 질문이다. 발리바르는 여러 글에서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을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발리바르 자신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형태에 대한 개념화 또는 그것의 예시는 극단적 폭력을 예외적인 상황 또는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된 폭력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폭력의 형태와 다른 또 다른 형태의 극단적 폭력의 유형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또는 적어도 일상적인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 곧 상당히 안정된 정치 과정을 영위하는 서구 자유주의 정치체나 그에 준하는 다른 정치체들 내부에서 극단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과정의 내부에서 어떤 위협으로 잠재되어 있는지 해명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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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 2017-09-22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에 지인이 폭력과 시민다움 책을 사서 읽으려고 하기에 과거 막 출간 됐을 때, 호기롭게 사서 읽었다가 매우 매우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어떻게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조언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인-무브에 올리신 글 읽다가 오랜만에 선생님 블로그를 왔는데 오자마자 이런 반가운 글이 있어서 내심 기쁩니다.

참 인무브에 올리신 글도 과거에는 그냥 알튀세르가 풀란차스를 논쟁에서 이겼다고 정리한 글만 봐서 잘 몰랐는데 이번기회에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balmas 2017-09-22 14:12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인무브에 올린 발리바르의 글을 먼저 보셨네요.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습니다. :)

dldiddn8429 2017-09-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수강하고 있는 강의 주제가 현대프랑스철학과 폭력의 문제인데, 올려주신 글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다른 참고 문헌도 읽어봐야겠어요~

balmas 2017-09-24 00:39   좋아요 0 | URL
ㅎㅎ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네요.^^
 

이번 [황해문화] 가을호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쓴 글인데요,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계속 이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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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치철학적 단상들

[이 글은 촛불집회의 과정에서 구상되어 봄, 여름에 걸쳐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 토론회, 강연회에서 발표되고 조금씩 다듬어진 글이며, 이 글 자체가 아직 미완성인 포괄적인 작업의 단편이다. 여러 차례의 발표 과정에서 좋은 논평과 문제제기, 제안을 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I. ‘을의 민주주의에 관해 말하기

 

이 글은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미 󰡔황해문화󰡕의 지면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는데,[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 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황해문화󰡕 2016년 겨울호.] 두 글의 문제의식을 조금 더 심화하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본격적으로 개념화해보자는 뜻에서 이 문제를 더 논의해보고 싶다. 아마 몇 가지 단상 이상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문제는 거듭 제기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첫 번째 이유는, 최근 갑과 을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문제들을 표현하는 담론으로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기업과 하청 업체들 간의 불공정한 관계,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에 대한 본사의 횡포, 다양한 업종의 알바생들에 대한 착취, 대학원생들에 대한 교수들의 갑질,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차별, 여러 분야의 소수자들(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등)에 대한 혐오와 폭력 등을 표현하기 위해 갑질’, ‘을의 눈물등과 같은 방식의 담론이 쓰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용어가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실 을들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는 갑에 의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무시당하는 을이라는, 우리는 갑질의 공통적인 피해자인 을이라는, ,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폭력을 참을 수 없다는, 익명적인 을들의 고통의 소리들이다. 따라서 주로 계약관계에서 당사자 중 한 쪽(채무자나 피고용인 등)을 지칭하기 위해 통용되던 이 말은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고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적 언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제 필자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성찰을 강제하고 있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논의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진보 정치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다른 글에서 논의한 바 있듯이,[진태원, 포스트담론의 유령들: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7, 2012 참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국내 학계는 커다란 인식론적 전환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이전까지 국내 진보 인문사회과학계의 논의를 주도하던 마르크스주의 및 민중 담론이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을 계기로 급속히 위축되고 그 대신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여러 담론, 곧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담론이 짧은 시간 내에 국내 학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중 민주주의론에서 포스트 담론으로의 이러한 이행은 한편으로 전자의 담론들에 내재한 모순과 난점으로 인한 인식론적실천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투항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는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된 시기, 진영(정치 체제라는 의미에서 진영이든, 국가 대 반()국가 내지 반정부 조직(이른바 운동권’)의 대립이라는 의미에서 진영이든) 중심의 계급투쟁에서 말하자면 계급 없는 계급투쟁’,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개인적 실존 자체가 계급투쟁의 장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계급적 모순을 주로 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개인적 실존 속에서 감당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실존적 계급투쟁으로 이행하게 된 시기였지만, 이는 한편으로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개성이라는 이름 아래 제대로 인식되거나 문제화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인문사회과학의 보편적 담론에서 일부 좌파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담론’(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내지 경제학 비판”)으로 축소되었고, 역으로 포스트 담론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포스트주의,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거나 더 나아가 새로운 문화 담론을 제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소비담론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진태원, 앞의 글, 32.]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대로 제기되지 못했다.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앞에서 새로운 종류의 계급투쟁, 새로운 종류의 적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적대와 갈등을 설명하지 못했고 또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가?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론적실천적 해법들이 모색되어야 하는가?[같은 글, 20.]


내가 보기에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러한 질문들을 제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개된 이래 소수 거대 기업들의 부와 권력은 막대하게 증대한 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으며,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약자들은 실업과 빈곤, 혐오와 무시의 위험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더욱이 기존 자유주의 정치 체제가 대다수 을들의 삶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과 불안정성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정치에 대한 실망과 혐오 속에서 오히려 기존 정치 체제를 엘리트 집단들의 독점 체제라고 비난하는 극우파 정당들이 세력을 얻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더 많은 민주화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심화에 스스로 앞장섬으로써 그 이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수구 세력의 집권을 조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의 과두적 지배 체제가 더욱 공고히 되었고, 이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 자체를 잠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어떤 민주주의냐를 따지기 이전에, 또는 바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으로서 민주주의 자체를 회복하는 일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진보를 위한 결정적인 쟁점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좌파적 기획과 우파적 기획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좌파적 기획만이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샹탈 무페히로세 준, 포데모스 혹은 좌파포퓰리즘에 대한 두 개의 시선, 󰡔진보평론󰡕 68, 2016, 128.]다는 샹탈 무페의 발언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다시 회복하는 게 필수적”[같은 글, 129.]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오늘날 좌파 정치의 핵심 화두로 제시하고, 시민다움(civilité)의 정치 또는 반()폭력의 정치라는 기획에 따라 정치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극단적 폭력의 감축과 퇴치를 주장하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작업과도 통하는 문제의식이다.[이는 물론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이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자세히 논의하기 어렵지만 양자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쟁점들이 존재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문제설정에 대해서는 진태원,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두 방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6, 2012를 참조하고, 그의 시민다움의 정치에 대해서는 진태원,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에 대하여(미간행 원고) 참조.]


그런데 오늘날 좌파적 관점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민주화 기획을 추구하려고 할 경우 곧바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정치적 주체 또는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속에서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과두제 체제가 더욱 강화됨으로써, 자본의 영향력은 더 이상 좁은 의미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일자리만이 아니라 주거와 환경, 교육, 건강, 노후생활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성원들, 특히 을 내지 을의 을(, ...)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일부 경제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일상생활의 금융화라고 부른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예전과 같은 진영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으며(노조 조직률이 10% 남짓 하고 통합진보당 사태를 겪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더 이상 설득력 있는 정치적규범적 대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1 : 99’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극소수의 과두제 지배자들에 맞서 최대 다수의 주체들을 주체화하는 전략 또는 민주주의의 급진화[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급진민주주의 리뷰 데모스󰡕 1, 2011 참조.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학술지에는 조희연, 서영표, 김진업, 이승원, 장훈교 등의 주제 논문이 실려 있다.] 내지 좌파 포퓰리즘[좌파 포퓰리즘에 관해서는 Ernesto Laclau, On the Populist Reason, Verso, 2005 Íñigo Errejón & Chantal Mouffe, Podemos: In the Name of the People, Lawrence & Wishart, 2016 참조. 아울러 유럽과 중남미, 한국의 포퓰리즘에 관한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엮음,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소망출판사, 2017 참조.전략이 오늘날 좌파 정치 내지 진보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과연 주체 내지 주체화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급진 민주주의 내지 좌파 포퓰리즘의 전략적 목표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민 내지 민중을 구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인민 내지 민중이 해방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주체인지(곧포퓰리즘을 좌파적인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여부가 불확실할뿐더러,[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역사비평󰡕 2013년 겨울호, 207쪽 이하 참조.] 이러한 다수자 전략에서 소수자들의 위상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오늘날 99를 이루는 다수가 사실은 소수자/약소자들의 다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앞의 경우처럼 내용상으로만이 아니라 형식화에서도 급진 민주주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 을의 민주주의라는 우리의 화두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좋은 답변을 제시해주지는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더 정확하게 문제를 제기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작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전국을 뒤덮었던 촛불집회 및 그 결과로 수립된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하면서 마침내 5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촛불은 518 광주의 정신 위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라는 점을 역설했다.


518, ‘촛불혁명’, 국민 주권. 이 세 개의 단어를 연결하고 더 나아가 이것들 사이의 등가성을 선언한 이 기념사는 여러 모로 감회가 깊은 것이었다. 특히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518 항쟁의 의의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폄훼되고 그것이 상징하듯 한국 사회의 인권과 시민권이 크게 후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기념사는 남다른 울림을 준다. 이 기념사의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국민 주권이다. 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 주권이라는 단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헌법의 첫머리에 기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한 헌법 조문은 오랫동안 유명무실한 조문으로 남아 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은 통치자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로만 제한되어 있었던 반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들로 인식되었으며 또 스스로 그렇게 처신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촛불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었고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다는 말은 국민이 단순히 피통치자에 머물지 않고 통치자를 통제하거나 적어도 실질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그러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정권 초기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여러 측면에서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어놓는 정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국민 주권이라는 말은 일종의 허구이기 때문이다. 주권의 주체로서 인민내지 국민과 같은 것은 실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의 실물 내지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현존한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성과 젠더로 구별되고 지역출신학벌 등으로 나뉜다. 특히 우리가 정치공동체 안에 존재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국민은 지배자와 복종하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몫을 가진 이들과 몫 없는 이들, 갑과 을로 분할된다.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라는 범주에는 갑의 위치에 있는 국민과 을의 위치에 있는 국민, 1퍼센트의 국민과 99퍼센트의 국민의 차이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감춘다. 이러한 은폐가 우연적인 사태이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아니라, 보편적 평등을 표현하는 국민 주권 개념의 구조적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문제적이다. 더욱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다른 주권자 국민들과 맞서는 범주일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 있는 국민 아닌 이들을 시민 아닌 이들,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에 따르면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아닌 이들로 배제하는 개념이다.[한나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관해서는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5 중 특히 9장을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Etienne Balibar,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및 진태원,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편, 󰡔서강인문논총󰡕 37, 2013 참조.]


그렇다면, ‘국민 주권의 시대를 열겠다는 새 정권의 의지에 주목하고 그것에 힘을 실어주되, 그것에 내재적인 아포리아를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국민 주권 개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한 여러 쟁점들을 새롭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II. 을을 위한, 을에 의한,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링컨 대통령의 말로 잘 알려져 있는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국민(인민)을 위한, 국민(인민)에 의한, 국민(인민)라는 경구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의 시도, 또는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언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을의 민주주의는 우선 을을 위한 민주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흔히 말하듯 우리 사회가(아울러 세계의 많은 지역과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민족주의적 또는 국민주의적 배타성과 충돌이 강화되고 있으며,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 곧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사회적 안전 메커니즘의 약화와 해체 속에서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의 논리를 강요받으면서 불안정한 노동과 삶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질서가 평등한 자유의 이념 위에서 시민들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공동체의 원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 바 있다.[지나치는 김에 몇 가지 문헌만 언급해둔다면, 리처드 세네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조용 옮김, 문예출판사, 2002;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민주주의󰡕, 이한 옮김, 미지북스, 2008; Pierre Dardot &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La Découverte, 2009;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 󰡔새로운 세계 이성: 신자유주의 사회에 관한 시론󰡕, 오트르망 옮김, 그린비, (근간); 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홍지수 옮김, 봄아필, 2013을 각각 참조.]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따라 세계와 사회가 재편되면서 생겨난 많은 을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기 위한 정책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각자 존엄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시민으로서의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인 대안이나 정책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가령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 최악의 실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을 위한 실업대책,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주거, 육아, 복지 제도 확충, 질병과 가난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빈곤 노인들을 위한 정책, 차별과 모욕, 배제에 시달리는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이주자들을 위한 인권 보호 정책 등이 을을 위한 정책의 사례들이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공화국의 이념에 걸맞은 사회가 되기 위해 이런 정책들은 실로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시행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만약 을의 민주주의가 이것에 그치게 된다면, 그때 을의 민주주의는 을을 그냥 약소자의 처지, 피통치자, 피억압자의 처지에 놓아두게 되며, 따라서 (용어모순적이게도) 일종의 후견적인(paternalistic)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약소자로 머물러 있는 약소자들을 위해 윗분들이 알아서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우리가 좀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를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을에 의한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떤 것인지 질문해봐야 한다.


여기서 을에 의한 민주주의는, 정확히 말하면 을의 의지와 목소리가 잘 대표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부분 대의 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고, 따라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인민)의 의지를 잘 대표하고 그 목소리를 정책과 제도에 잘 구현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공정하게 선출하며 그들을 잘 감시,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대표의 문제에 관한 국내 학자들의 논의로는 홍철기, 「󰡔대표의 개념선거는 민주적인가: 정치적 대표와 대의 민주주의의 미래, 󰡔진보평론󰡕 61, 2014 및 이관후, 대의민주주의가 되었는가?: 용례의 기원과 함의, 󰡔한국정치연구󰡕 252, 2016, 한국 정치에서 대표의 위기와 대안의 모색: 정치철학적 탐색, 󰡔시민과 세계󰡕 28, 2016 등을 참조.] 반대로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과 불만이 제기된다면, 이는 이러한 대표자들이 국민 전체, 특히 대다수 을의 의지와 이해관계를 대표하기보다는 권력자나 재벌을 비롯한 소수의 갑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구현하고 집행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계화 시대 국민국가는 세계시장의 압력에 항상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가 입법 및 정책 과정에 반영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어떻게 을에 의한 민주주의, 을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 곧 약소자로서 을을 배려하고 보호하는 정책과 제도만이 아니라, 또한 을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잘 대표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고 통제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을들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 을의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관심사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주체로서의 을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하는 게 적절할지 모른다. 과연 그런 것인지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을은 누구인가? 우리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자들, 성적 소수자들, 여성들, 청소년들, 소규모 자영업자들, 교수의 각종 뒤치다꺼리를 감당해야 하는 대학원생들, 빈곤 노인들, 또는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늘 손해와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지방 도시 및 농어촌에 사는 사람들 등이 을인가?


만약 이들이 을이라면, 이들은 을을 위한 민주주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각자 이해관계의 주체로서 압력 집단이 되어 각종 정책과 입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이들을 을에 의한 민주주의의 행위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을들은 항상 자신보다 더 강한 다른 갑들의 이해관계에 밀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약소자로 남게 될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현할 만한 길을 처음부터 차단당한, 이해관계의 주체로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을들, 그리하여 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제대로 재현되거나 대표되지도 못하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들이 이처럼 을로, 병으로, 정으로 남아 있는 한,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민주주의, 모든 국민 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을을 배제한 배제의 민주주의로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이해관계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을들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고 구성되는 길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대표의 과정을 포함하여 이러한 을들의 이해관계와 의지를 광범위하게 대표하고, 이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로 구성하고 주체화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III. ‘정치적 주체로서의 을: 몇 가지 개념적 비교

 

그러므로 다시 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라는 말은, 얼핏 보기에는 자명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재벌 가족의 횡포에 시달리는 직원들,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 그 알바생들, 하청업체 직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적 소수자들 등이 바로 을들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는 이론적 성찰의 소재로서의 을이지, 이론적 작업을 통해 개념화된 것으로서의 을은 아니다. ‘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시사적 용어에서 이론적 개념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을은 계급 개념인가 그렇다면 그것과 전통적인 계급 개념의 차이는 무엇인가?

 

을이 다양한 형태의 피지배 집단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과학적 계급 개념과 어떻게 관련시킬 수 있을지는 매우 불분명해 보인다. ‘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며, 빈민 계급도 아니고, 더욱이 중간 계급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실재성을 결여한 가공적인 용어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용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들, ‘20 : 80’, ‘10 : 90’, 또는 ‘1 : 99’ 같은 표현들이 지칭하는 사회적 현실을 정확히 가리키는 기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라는 용어는, 최근 촛불집회에서 주권의 주체로 호명되고 있는 국민(nation)이라는 개념이 담지 못하는 계급적 함의, 곧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사회경제적정치적 불평등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는 전통적인 계급 개념이 아니지만 다양한 형태의 계급적 불평등과 차별을 표현하는 을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식으로 질문해본다면, 을이라는 용어는 계급에 관한 전통적인 표상/재현(representation) 방식(리프리젠테이션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논의하겠다)을 어떻게 해체하는가? 을이라는 용어 자체는, 계급적 불평등의 현실, 따라서 계급투쟁의 현실(이것의 완화된 표현이 갑질일 것이다)을 표현하되, 전통적인 계급 표상/재현 양식을 해체하는 가운데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을이라는 용어가 표현하는 것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의 현상,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계급 표상/재현 양식으로 적절히 설명되지 않는 계급투쟁의 현상이 아닌가?

 

2.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인가?

 

이러한 질문은 바로 을과 민중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종류의 피억압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을은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오래 사용되어온 민중이라는 용어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는 을은 민중이라는 개념의 시사적인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을과 민중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을이라는 용어는 (적어도 그 현행적 용법을 고려해볼 때) 민중이라는 개념과 달리 저항의 주체나 변혁의 주체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을은 피해자, 피착취자, 피억압자, 피차별자 등과 같이 수동적으로 피해를 겪는 존재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쓰인다. 을이라는 용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쓰임에도 불구하고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이 용어에 별로 주목하지 않거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터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을의 이러한 용법은, 민중이라는 개념에 담긴 가상적 측면 및 그 한계를 드러내주지 않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특히 두 가지 측면이 중요한 것 같다. 곧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표준화된 민중이라는 개념은 피억압자, 피착취자들 사이의 연대나 통일성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민중이라는 개념은 피억압자, 피착취자로서의 민중, 수동적 피해자로서의 민중과 능동적인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 사이의 거리를 이상적으로 최소화하거나 제거해온 것은 아닌가?


반면 을이라는 용어는, 그 통일성이 문제적일 뿐만 아니라, 80년대 진보적인 인문사회과학이 이상화한 변혁의 주체로 자처하지도 않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또한 사회의 거대 다수를 형성하는 약소자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갑과 대립하는, 갑에게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지배당하는 을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들을 정치적 집합체로서 정체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을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18년 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를 지지했던 것은 다수의 을이었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연속적으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준 동력은 다름 아닌 박정희의 유령을 호명했던 을들의 욕망이었다.


아마도 을은 민중의 다른 이름이고, 을의 민주주의는 민중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민중은, 우리가 상상해온 민중보다 훨씬 더 이질적이고 다양한, 더욱이 훨씬 더 분할되고 갈등적인 집합체일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로서 민중 민주주의는 하나의 해답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명칭일 것이다.

 

3. 을은 소수자(minority), 서발턴(subaltern),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을과 민중의 이러한 차이점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꽤 널리 쓰이는 용어들이 소수자, 서발턴, 프레카리아트 같은 용어들이다. 을은 이러한 이론적 용어들의 시사적인 표현인가?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을이라는 용어는 이 용어들과도 꽤 의미 있는 차이점을 지닌 것 같다. 우선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노동자 계급을 지칭하는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과 불안정한을 의미하는 ‘precarious’라는 용어를 결합하여, 현대 사회의 많은 노동자들이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 노동(임시직, 기간제, 파견, 외주 등) 업무에 종사하면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다.[가이 스탠딩,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14 및 이광일,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 프레카리아트의 형성가 해방의 정치, 󰡔마르크스주의 연구󰡕 10, 3, 2013 참조.]이라고 지칭되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이러한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을과 프레카리아트는 서로 겹치는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을이라는 용어는, 주로 노동 관계의 특성을 지칭하는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에 비해 이러한 불안정 노동자들은 동시에 모욕당하고 차별당하고 때로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특성, 곧 사회적 인정 관계 내지 상징적 위계 관계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속해 있다는 특성도 지닌다는 점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을이라는 용어는 인문사회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소수자라는 용어와도 일정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사실 영어의 마이너리티(minority)나 불어의 미노리테(minorité)라는 용어에 비하면 우리말의 소수자라는 용어는 의미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인 편이다. 영어나 불어에서 이 용어들은 우리말로 미성년이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으며, 또한 약소자라는 뜻도 담고 있다. 칸트가 유명한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1784)의 서두에서 계몽이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미성숙으로서의 미성년이라는 의미이며,[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이다.”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13(강조는 칸트).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Aufklärung ist 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Unmündigkeit ist das Unvermögen, sich seines Verstandes ohne Leitung eines anderen zu bedienen.”] 이것은 영어나 불어로는 minority 또는 minorité로 번역된다. 또한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는 약소자라는 뜻도 담고 있는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해방’(émancipation)을 정의하면서 이를 미노리테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염두에 둔 것이 이러한 다층적인 의미이다.

 

해방이란 소수파/약소자/미성년(minorité)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탈출할 수 없다. 노동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노동을 새로운 사회의 정초 원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의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자, 그들이 정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이 정말 공통 공간 속에서 모두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도래할 사회를 지배할 대항 권력을 정초하는 것보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그것은 또한 공동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중요하다.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세계를 함께 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상대와 같은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수정 재판), 92~93. 번역은 다소 수정했다. 특히 번역문에서는 minorité소수파로만 번역했지만, 우리가 보기에 저 단어에는 약소자미성년이라는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로 이해된 마이너리티 또는 미노리테는 소수자라는 용어가 담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쟁점을 표현해준다(가령 최근 화제가 된 선거 연령의 문제가 그렇다).


그렇다고 해도 이라는 용어는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로 환원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라는 용어는 마이너리티나 미노리테라는 용어에 비해, 소수자나 약소자는 수적으로 소수가 아니라 사실은 압도적 다수라는 것(‘1:99’에서 ‘99’라는 숫자가 표현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산출하는 주요 현상 중 하나는 소수자들/약소자들의 다수화 현상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곧 신자유주의적 사회화는 노동자 계급 조직을 비롯한 사회적 연대 조직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고 더 나아가 개인들이 속해 있는 소속 관계를 불안정화함으로써(비정규직화, 조기 정년, 프리랜서, 자영업 등이 그 한 사례일 것이다) 대다수 개인들을 단자화(單子化)하고 불안정한 존재자들로 만든다. ‘은 수적으로는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들의 독자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못한 단자적이고 불안정한 소수자들/약소자들이다.[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앞의 책; Robert Castel, La montée des incertitudes: Travail, protections, statut de l'individu, Seuil, 2009; 에티엔 발리바르, 보편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을 각각 참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라는 용어는 서발턴(subaltern)이라는 개념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고안해낸 이래 인도 서발턴 역사학 연구자들 및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같은 문예이론가들이 발전시킨 서발턴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지배 엘리트 집단과 대비되는 대다수의 피지배 집단을 가리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체화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라나지트 구하, 󰡔서발턴과 봉기󰡕,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8;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로절린드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그린비, 2013; 존 베벌리, 혼종이냐 이분법이냐? 하위주체와 문화연구에서 다루는 민중의 범주에 관하여, 󰡔하위주체성과 재현: 라틴아메리카 문화이론 논쟁󰡕, 박정원 옮김, 그린비, 2013을 각각 참조.]


하지만 을이라는 용어는 서발턴 개념과도 일정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인도 역사학자들과 가야트리 스피박이 이론화한 서발턴 개념은 두 가지 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 개념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의 흔적을 깊이 포함하고 있다. 곧 이 개념은 국민 대다수가 문맹자 농민이었던 식민지 시기 또는 포스트 식민 초기 시기의 인도 상황(대략 1960년대까지의 시기)을 표현하고 있다. 반면 그 이후 인도는 급속한 산업화 과정 및 사회적 분화 과정을 겪었으며, 원래 서발턴 개념의 주요 지시체였던 문맹자 농민들은 더 이상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발턴 역사학자들 중 일부는 피통치자’(governed)라는 푸코적인 개념으로 서발턴 개념이 지닌 역사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하고 있다.[Partha Chatterjee, The Politics of the Governed: Reflections on Popular Politics in Most of the World,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4.] 둘째, 서발턴 개념은 지배 엘리트와 대비되는 피지배 집단, 특히 자신을 표현하거나 주체화할 수 없는 집단들의 일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피지배 집단 내의 이질성과 차이, 따라서 갈등적 상황을 표현하는 데 난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을이라는 용어는 서발턴이라는 용어가 지닌 이러한 난점들을 반드시 수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을이라는 용어 자체는 을과 병, ... 과 같은 내재적 분할과 또 다른 위계 관계를 그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을이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복수적이며 내적으로 분할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탄핵 정국에서 촛불집회와 대결하는 또 하나의 대중 집회로 주목을 받은 이른바 태극기집회야말로 을의 이러한 복수성과 내적 분할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이라는 범주, ‘몫 없는 이들이라는 개념에 제대로 포함되지도 않는 존재자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올 겨울 AI 파동으로 인해, 또 몇 해 전에는 구제역 파동으로 인해, 살아 있는 채로 매몰되거나 살처분당한 수천 만 가축들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을이면서 역설적으로 을이라는 범주에 포섭되지 못하고 그 지위를 인정받지도 못하는, 따라서 그야말로 역설적인 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들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자연 환경, 생태계 자체 역시 이러한 역설적인 을에 포함시킬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AI, 곧 인공 지능과 로봇의 문제에도 역설적인 을의 문제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4. 을은 다중인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정치적 주체를 표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로 다중(multitude)이라는 개념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미국인 제자인 마이클 하트의 공동 저작인 󰡔제국󰡕, 󰡔다중󰡕, 󰡔공통체󰡕[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다중󰡕, 서창현 외 옮김, 세종서적, 2008; 󰡔공통체󰡕, 윤영광정남영 옮김, 사월의책, 2014.]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이 용어는, 그 저자들에 따르면 근대 서양정치철학에서 정치적 주체를 지칭해온 몇 가지 주요 개념들과 차이를 지닌 개념이다. 이들에 따르면 우선 다중은, 주권 개념과 한 쌍을 이루며, 통일성과 환원을 특징으로 하는 인민’(people) 개념남한의 헌법이나 정치적 원리에서는 국민개념에 해당하는과 구별된다.

 

인민은 하나(일자)이다. 물론 인구는 수없이 다양한 개인들과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인민은 이 사회적 차이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종합하고 환원한다. 이와 달리 다중은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복수적이고 다양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정치철학의 지배적 전통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인민이 주권적 권위로서 지배할 수 있고 다중이 그럴 수 없는 이유이다. 다중은 독특성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독특성은 그 차이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주체, 차이로 남아 있는 차이를 뜻한다.[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135.]

 

또한 다중은 대중’(mass) 개념과도 차이를 지니는데, 이는 대중 개념이 근본적으로 수동적이고 지도를 받아야 하는, 지리멸렬하고 공통성이 없는 개인들의 집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대중은 다른 측면이며, 동질적이고 분산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해체된 인민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 다중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노동자 계급과도 구별되는 개념이다. 노동자 계급이 주로 산업 노동자 집단이나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반해, 이들에 따르면, 다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같은 책, 143.]하는 개념이다. 특히 이들은 종래의 물질노동과 구별되는 비물질노동,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382.]이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에서 종래의 물질노동에 대하여 질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되면서, 좁은 의미의 산업노동자 계급을 넘어서는 새로운 계급 주체, 실로 공산주의의 주체로서의 다중이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다중은 을이라는 용어와 상당히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을은 정치 공동체의 성원 전체 및 그 통일성을 가리키는 인민(또는 국민)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표현한다. 또한 을은 당연히 넓은 의미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그 중 상당수는 네그리와 하트가 비물질노동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을이라는 용어와 다중 개념의 중요한 차이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던 것처럼 을이라는 용어가 이질성과 다양성을 넘어서 갈등성을 자신의 본질적 요소로 포함하는 데 반해 네그리와 하트가 이론화한 다중 개념에서는 이러한 내적 갈등과 분할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로 다중 개념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현대 철학에서 사용되는 주체화의 문제를 사고하기 어렵게 만드는(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개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에 대한 비평가들에 대해 답변하는 대목에서 다중 개념이 함축하는 두 개의 시간성을 구별한다. 하나는 영원성으로서의 다중으로, 이러한 다중은 그것이 없이는 우리의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 272.]는 다중, 곧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서의 다중이다. 이러한 다중은 강한 의미의 정치적 주체로서의 다중, 곧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다중, 따라서 자율적인 사회적정치적 역량을 지닌 주체로서의 다중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다중,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직 아닌다중이다. 이러한 다중은 첫 번째 영원성의 다중에 걸맞은 다중으로 아직 구성되지 않은 다중, 따라서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형성되어야 하는 다중을 가리킨다. 문제는 두 가지 시간성에 따라 구별되는 다중은, 내적 갈등과 분할의 문제에서 비껴나 있는 다중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다중은 항상 이미 첫 번째 다중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다중, 곧 목적론적 발전 경향 속에서 포착된 다중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두 유형의 다중은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을지언정,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다. 다중이 이미 우리의 사회적 존재 속에 잠재되어 있지 않고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중을 하나의 정치적 기획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날 다중을 실현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재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같은 곳.]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탄핵 정국의 와중에서 탄핵에 집요하게 반대하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도 여전히 탄핵에 불복하면서 계엄령을 내려달라고 호소하는 이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또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를 했던 51%의 유권자들은 다중인가 아닌가? 만약 이들이 다중이라면,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반동적인 정치 세력도 다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방의 주체로서의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제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이들이 다중이 아니라면, 아마도 수구 보수 세력을 지지하지 않고 적어도 자유주의적인 세력 이상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다중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공산주의의 주체로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를 계승하는 해방의 주체로서의 다중에 걸맞은 개인들과 집단을 추출하려면 그 지표는 훨씬 더 엄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48%의 사람들 전체가 다중은 아닐 것이며, 아마도 그중의 일부, 구 통합진보당이나 오늘날의 소수 진보정당, 곧 정의당이나 노동당 또는 녹색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의 다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다수는 다중이 아닐 터인데, 어떻게 다중을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라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다중이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다중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보수적인 또는 더 나아가 수구반동적인 세력을 포함해야 한다. 반대로 다중이 이미 하나의 실제적인 잠재력으로 존재하는해방의 정치적 주체로 존재하려면, 다중은 상당히 축소된 범위의 개인들 및 집단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회의 존재론적 토대로 간주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네그리와 하트가 가능한 한 최대로 다중의 외연을 확장하면서도 이들을 해방의 주체, 공산주의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목적론적 추론의 가상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론적 추론의 가상은 정치적 분석이 분석하고 설명해야 할 대상 자체를 말소시켜 버린다. 그것은 곧 갑과 을의 대립을 넘어서 을들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 그리고 갈등성이라는 문제이며, 랑시에르,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에티엔 발리바르 및 여러 현대의 정치 이론가들이 푸코에서 유래하는 주체화(subjectivation)라는 개념을 갖고 씨름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현대 정치철학에서 주체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태원,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진보평론󰡕 2015년 봄호 참조.]

 

 

IV. 아포리아로서의 을의 민주주의

 

만약 을이라는 용어가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주요 개념들과 이러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면, 을을 주체로 하는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와 어떤 차이점을 지니는가라는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나는 우선 을의 민주주의가 매우 아포리아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자체가 매우 아포리아적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포리아(aporia)는 알다시피 아(ἀ) + 포로스(πόρος), 길이 없음’, 따라서 더 이상 진전이 불가능한 논리적 궁지를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개념이었다. 이 개념을 현대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자크 데리다였으며, 그를 준거로 삼아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들을 숙고하기 위한 유사초월론적 토대로 아포리아 개념을 활용한 이는 에티엔 발리바르였다.[발리바르가 아포리아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 참조. 그 이후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탈구축, 관국민적 시민성 개념에 대한 모색,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을 중심으로 한 폭력론에 관한 연구, 시민주체 및 공산주의에 관한 탐구에서 늘 아포리아는 발리바르 사유의 유사초월론적, 방법론적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용법과 달리 이들의 성찰에서 아포리아는 단순히 부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개념들과 이론, 실천의 한계를 나타내기 위한, 따라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극한의 노력을 표현하는 개념이었다. 물론 이러한 돌파의 노력이 아무런 성공의 보장이 없는 모험적인 기획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아포리아는 철학적으로는 우리의 합리성 자체, 정치적으로는 정치공동체 자체가 토대가 없는 것임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한편으로 본다면 아포리아에 기반을 둔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아포리아를 봉쇄한다. 그의 데리다 비판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랑시에르의 데리다 비판에 대한 검토는, 진태원, 대체보충, 자기면역, 아포리아: 자크 랑시에르와 자크 데리다의 민주주의론(미간행 원고) 참조.] 을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적인 성격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를 뚜렷하게 부각시켜 준다.

 

1. 을을 잘 대표하는 것으로서의 을의 민주주의

 

을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일차적으로 을을 잘 대표하는 민주주의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을을 잘 대표하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제도적 함의를 제시해볼 수 있다. 가령 최근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제 민주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경제 민주화라는 표제 아래 우리 사회 극소수 파워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는 재벌 체제를 해체하고, 그 대신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을의 경제적 이해관계 및 지위를 강화하는 여러 가지 법적제도적 대안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재벌 지배구조를 개혁하고 소수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서부터 산업적 시민권을 강화하는 방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제안이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대표의 틀 자체를 개혁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보수 양당 체제가 독점해온 정치적 대표의 틀을 해체하고 다수의 진보 정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을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은 을의 민주주의의 주요 내용을 구성할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지적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비롯하여 선거 연령 인하, 결선투표제 도입, 지방 자치제도의 정비 등이 이러한 대안에 포함될 것이다.


아울러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법적제도적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민주화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나 정치적법적 제도를 통해 완전히 포괄되지 않는, 하지만 대다수의 을들이 삶 속에서 겪는 억압과 차별, 착취 등을 개혁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가령 여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청소년 등에 대한 차별과 억압, 착취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피해를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하는 일을 넘어, 그들을 예외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존재자들, 피해자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주체들, 민주주의의 중심적인 구성원들로 재현하는/대표하는(represent), 그리고 구성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대표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2. 을을 대표한다/재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촛불 집회 이후 직접 민주주의 내지 참여 민주주의가 언론 및 학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헌정사에서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 탄핵을 성취하고 새로운 정권을 출현시키는 데 촛불 집회의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만큼 이는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직접 민주주의나 참여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논객들이 대개 이를 대의 민주주의와의 대립의 관점에서 거론한다는 점이다. 곧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의 민주주의 대신 참여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며, 설령 대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될 수 있는 한 최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자주 제기된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조야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말하듯 현대 국가처럼 복잡하고 다원적인 정치 조직을 국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로 통치하거나 운영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더욱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반론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대표의 문제를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이다. 참여 민주주의 내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뒤에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생각이다. 첫째, 현재 한국의 정치 체제의 성격상 대표자들은 국민, 특히 을로서의 국민의 의지나 목소리를 대표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정당이나 권력 질서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이들이며, 이들 자신이 갑으로서의 통치자 내지 지배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둘째, 따라서 갑으로서의 대표자들에게 정치 권력을 부여하는 대의 민주주의보다 을로서의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앞에서 간략하게 제시했던 좁은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 곧 을들 자신이 정치적 주체로서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라는 관념과도 부합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은 대표(또는 재현)의 과정 이전에 이미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 더 나아가 을들이 현존해 있다는 관념을 전제한다. 그런데 과연 국민 내지 인민은 대표/재현의 과정에 앞서 미리 현존해 있는가? 가령 프랑스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혁명 및 더 나아가 근대 민주주의 헌정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이것은 프랑스 헌법의 전문(前文)으로 사용된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제헌헌법에서는 재산의 유무(일정한 납세액)에 따라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을 구별했으며, 전자에 해당되는 25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피선거권은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에게만 부여했다. 1848년 이후에야 성인 남성들은 보편적 선거권을 얻게 되었다. 또한 여성의 경우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얻게 되었으며, 미국에서 흑인들이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정치적 권리를 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만 19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주 노동자들과 같이 우리나라 국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대표/재현의 과정 이전에는 정치적 주체란 존재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주권자로서 또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국민 내지 인민은 처음부터 동일하게 존재해온 이들이 아니라 대표/재현의 과정에 따라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거나 확장되어 온 것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따라서 미국의 한 연구자가 적절하게 말한 바 있듯이 대표의 반대말은 참여가 아니라 배제”[David Plotke,“Representation is Democracy”, Constellations, vol. 4, no. 1, 1997. 강조는 인용자.]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적절한 대표의 제도나 실천이 없다면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적 약자들인 을들과 을의 을들은 대표가 없다면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게 위해 늘 목숨을 건 필사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참여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대의 제도의 모순과 문제점을 그대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대표제란 본성상 과두제적인 메커니즘이며, 대표자들은 원래 유권자나 국민의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마련이라면, 그것을 애써 개선하거나 개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참여와 대표를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참여를 위해 더 잘 대표할 수 있는 제도와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대표하기내지 대의하기라고 부르는 개념, 곧 영어로는 리프리젠트(represent) 내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용어들로 표현되는 개념은 꽤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의미를 지닌다.


1) 재현하기: 리프리젠테이션의 기본적인 의미는 표상내지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표상으로서의 재현(再現), 인식하는 주관 바깥에 이미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또는 현존하는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다시-제시함(re-presentation)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재현은 첫째, 재현 과정에 앞서 미리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사물이나 대상의 현존을 전제하며, 둘째, 재현 작용 자체는 이러한 사물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잘 묘사하거나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2) 대표하기: 이것의 정치적 표현이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인식론적 의미의 재현과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활동으로서 대표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들이 자신을 선출해준 피대표자들, 곧 주로 유권자들의 목소리나 욕망, 이해관계를 잘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정치적 활동으로서의 대표역시 재현과 마찬가지로, 대표 과정에 앞서 이미 그 자체로 성립해 있는 피대표자들 내지 유권자들이라는 사물 내지 대상의 현존을 전제하며, 이러한 사물 내지 대상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다시-제시하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 욕망,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다시-들려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3) -현하기: 그런데 포스트 담론의 주요한 이론적 기여는, 재현에 관한 통상적 생각과 달리 재현 과정과 독립해서 이미 성립해 있는 사물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현 과정이란,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이라는 말의 원래 뜻과 달리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 자체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재현은 오히려 -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때의 재-현은, 재현 과정을 통해 기존에 존재하는 사회적 범주들이나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과정, 이를 통해 이전까지 드러나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것을 드러나게 하고 보이게 만드는 변형적인 현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처럼 (‘치안체제 안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만드는 것을 정치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대표/재현은,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나 욕망,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대표한다는 소극적인 목표(때로는 기만적이기까지 한)에 만족할 수 없으며, 그러한 대표/재현은 적극적인 변형적 현시로서의 재-현 작용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3. ()주권적 ()주체로서의 을?

 

하지만 우리가 화두로 제안하는 을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재-현의 차원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이러한 재-현 과정 자체는 주체의 문제를 그냥 방치해두기 때문이다. 우리가 재현을 단순한 다시-제시하기로 이해하지 않고 -으로 이해하게 되면, 주체의 문제, 특히 정치적 주체의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다. 그런데 만약 현대 사회 체제의 성격상 부재하지만, 정의상 존재해야 하고 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 주권적인 주체가 사실은 허구적인 개념에 불과하다면, 주권자로서의 국민 같은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면 또는 항상 부재하는 원인으로서만 현존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인민 주권 내지 국민 주권 개념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것은 권력의 정당성의 궁극적 기초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국민 내지 인민이라는 주권자의 허락이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정치권력도 성립하거나 유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정당성의 궁극적 기초로서의 국민은 항상 부재하는 이상, ‘국민은 기존 권력 또는 그러한 권력을 산출하고 재생산하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때때로 일정한 사건들을 통해 이러한 유령 같은 주권자가 출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 어느덧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주권자로서의 인민 내지 국민인 이상 그것은 늘 자신의 대리자를 정당화하는 역할(‘연기’) 이상을 수행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주권의 주체는 국민을 넘어서 인민으로 또는 민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요컨대 국민 주권이 아니라 인민 주권 내지 민중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을의 민주주의란 을을 주권의 주체로서의 인민 내지 민중으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몇몇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서 인민내지 민중이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내적 분할의 문제가 생겨난다. 영어의 피플(people)이나 불어의 푀플(peuple) 또는 스페인어의 푸에블로(pueblo) 같은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다. 곧 이 용어들은 한편으로 어떤 국가 내지 정치체의 합법적 성원이라는 의미, 따라서 우리말의 국민에 더 가까운 의미를 가리킨다(라틴어로는 포풀루스(populus)라는 개념에 해당하는 것).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용어들은 라틴어의 플레브스(plebs)라는 말이 역사적으로 뜻했던 것처럼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런 후자의 의미에서 본다면 피플, 푀플, 푸에블로는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이면서 또한 그 안에서 착취당하고 모욕당하고 차별받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 참조.]


따라서 인민 내지 민중이 주권자가 되는 민주주의는 아마도 피플, 푀플, 푸에블로가 지니는 이러한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해체하거나 제거하는, 또는 적어도 줄이거나 최소화하려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 차이와 위계 관계를 해체하거나 축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령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가 국민 주권을 인민 주권이나 민중 주권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현행 헌법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새로운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로 바꿀 수 있을까? 요컨대 인민 내지 민중으로서의 을은 헌법 속에 권력의 주체, 주권의 주체로서 명기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민 내지 민중으로서의 을은 계속해서 더 나은 대표/재현의 대상으로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을들이 (법적) 주권의 주체로 존재하지 않지만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해볼 때가 된 것인가? 가령 대의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법적 틀인 의회제 대표와 독립적인 또 다른 대표의 체계를 조직할 수 있으며, 또한 조직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헌법 상의 지위는 어떤 것인가? 아니면 이것은 헌법 밖의 체계이자 조직으로 남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만약 이 주권자가 사실은 주권자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우리가 촛불 정국에서 대선 정국으로 이행하면서 관찰했고, 또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관찰하고 있는 것은, 몇 달 동안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계속 운동을 지속할 수 없으며 또 그럴 의사도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수행할 대표자를 뽑고 싶어 하며, 자신들은 정치의 장에서 물러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실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의 부재 때문이든 아니면 스스로 통치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 또 아니면 민주주의 정치가 지닌 무정부주의적 본성(랑시에르가 말하듯 아르케 없음’(an-arkhe)이라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때문이든, 주체가 주체되기를 거부한다면, 그때 민주주의는, 특히 을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질문들은 이라는 주체가 지닌 본질적인 특성들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질문들이며, 바로 이점이 을의 민주주의를 민중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와 다른 것으로 만든다. 민중 민주주의나 인민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불가능한 또는 제기되지 않고 제기하려고 하지도 않는 질문들, 아마도 민주주의의 본성과 한계에 대한 핵심 질문들을, ‘을의 민주주의는 열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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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에 다들 건강히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보다 덜한 것 같긴 해도 한낮에는 35-6도까지 올라가고 새벽에도 27-8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지지 않으니 


밤잠 설치시는 분들 많을 듯합니다. 말복이 이제 일주일 남짓 남았으니 더위도 막바지에 접어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강 잘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9월 18일부터 고전비평공간 규문에서 시작하는 "스피노자와 현대 정치학" 강의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규문의 홈페이지에 가서 알아보시면 되고, 


(규문: http://qmun.org/?mod=document&uid=3358&page_id=568)


강의 주제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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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강의 주제

 

이 강의에서는 스피노자와 현대정치학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스피노자 철학은 오랫동안 범신론 철학으로 알려져 왔으며, 정치철학이나 사회이론과는 무관한 은둔과 고독의 신비한 사상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지난 1960년대 말 프랑스에서 마르샬 게루, 알렉상드르 마트롱, 질 들뢰즈 등과 같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이전의 스피노자 해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스피노자 해석을 제시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역량과 해방의 사상가로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된다.

 

더욱이 새로운 스피노자 해석은 1960~70년대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앙드레 토젤,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같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 재해석 작업과 결합됨으로써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문헌학적 해석을 넘어서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흐름을 열어놓았다. 1980년대 이후 네그리와 발리바르 및 다른 연구자들이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스피노자 해석에 기반을 둔 정치철학 작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면서 이는 아주 뚜렷하고 풍부하게 입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스피노자 인식론과 인간학, 심리철학에 대한 풍부하고 다채로운 연구, 정서 개념에 기반을 둔 문화연구와 경제학 및 사회학 연구, 페미니즘 연구에서 스피노자 철학의 문제설정을 도입하려는 시도 등이 어우러지면서, 오늘날 스피노자 철학은 과거의 다른 어떤 서양 철학자들 못지않게 활발한 연구와 응용,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강의에서는 10주 동안에 걸쳐 현대정치학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이 현대 철학 및 사회문화이론, 페미니즘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역으로 이러한 작업들은 스피노자 철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II. 강의 일정

 

1. 현대 스피노자주의의 기원

 

첫 번째 강의에서는 지난 196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스피노자 혁명과 그 철학적정치적 귀결을 다룬다. 마르샬 게루, 알렉상드르 마트롱, 질 들뢰즈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는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철학 연구와 결합됨으로써 현대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 구조인과성, 인식론적 절단, 이데올로기: 루이 알튀세르

 

2번째 강의에서는 스피노자 철학을 기반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려고 했던 알튀세르의 작업을 살펴본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을 읽자󰡕, 󰡔재생산에 대하여󰡕(1970) 등과 같은 저술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식론, 상상이론을 바탕으로 구조인과성, 인식론적 절단, 이데올로기 개념을 이론화하여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을 열어놓았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다.

 

3. 일의성의 존재론, 일반 행동학, 반파시즘의 정치: 질 들뢰즈

 

3번째 강의에서는 현대 스피노자 연구의 기원 중 한 사람인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의 독창성과 효과를 살펴본다. 들뢰즈는 박사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표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들뢰즈 철학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은 진정한 내재성의 철학으로서 일의성의 존재론과, 역량의 윤리학으로서 일반 행동학, 반파시즘의 정치로서 소수-되기의 미시정치의 철학적 지반을 제시해준다.

 

4. 역량의 형이상학, 다중의 정치학: 안토니오 네그리

 

안토니오 네그리는 󰡔야생의 별종󰡕(1981)에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과 정치학에는 다중’(multitudo) 개념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함으로써 스피노자 정치철학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그 이후 네그리는 이러한 스피노자 해석에 입각하여 그의 제자인 마이클 하트와 함께 󰡔제국󰡕, 󰡔다중󰡕, 󰡔공통체󰡕 3부작을 저술하여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4번째 강의에서는 역량과 다중 개념을 중심으로 네그리 스피노자 해석의 특징을 살펴보겠다.

 

5. 대중의 공포, 민주주의의 역설, 시민다움의 정치: 에티엔 발리바르

 

5번째 강의에서는 알튀세르의 제자였으며, 현대 정치철학의 주요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 해석을 살펴본다. 발리바르는 네그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스피노자의 물티투도 개념을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했으며, 스피노자가 한편에서는 보수주의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였다는 역설을 스피노자 정치철학을 해명하기 위한 준거로 삼는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을 산출하며, ()폭력의 정치로서 시민다움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6. 스피노자와 권력: 들뢰즈, 네그리, 아감벤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에는 역량(potentia) 개념이 존재하며, 이는 권력 개념을 새롭게 이론화하기 위한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해준다. 들뢰즈는 역량과 권능(potestas) 개념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스피노자주의 권력론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가 네그리다. 그는 󰡔야생의 별종󰡕에서 󰡔다중󰡕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 역량/포텐샤 개념을 다중의 해방적 힘으로, 다른 한편으로 권능/포테스타스는 지배의 예속적 힘으로 이원화함으로써, 스피노자를 21세기 해방의 사상가로 부각시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량/잠재력’(dynamis) 개념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을 통해 스피노자와 권력의 문제를 사고하기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6번째 강의에서는 한편에서는 이 철학자들의 통찰력에 기대어,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스피노자주의 권력론의 가능한 향방을 따져보고자 한다.

 

7. 스피노자와 권력 II: 푸코, 아감벤, 발리바르

 

스피노자의 권력론을 독해하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 1󰡕에서 스피노자를 전혀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스피노자주의적인 권력론을 제시한다. 아감벤은 푸코를 원용하지만 푸코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권력 개념을 이론화하며, 메시아주의적인 ()역량 개념을 다듬고 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와 푸코, 알튀세르와 아렌트에 대한 독서에 의지하여 역시 매우 독특한 권력론, 말하자면 힘을 덜어내는 권력이론을 사고한다. 이러한 권력론들은 주체화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8. 스피노자와 공화주의: 마키아벨리, 스키너, 페팃

 

스피노자 연구자들이나 현대 공화주의 이론가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스피노자와 공화주의라는 주제는 꽤 흥미롭고 매력적인 주제다. 이는 스피노자 당대 네덜란드 급진 개혁파들의 정치적 지향이 공화주의였기 때문이며, 또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이 마키아벨리를 매개로 공화주의와 상당한 친화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적인 공화주의는 퀜틴 스키너 및 필립 페팃 등이 이론화한 신공화주의 이론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8번째 강의에서는 스피노자 정치철학과 ()공화주의의 관계를 살펴볼 생각이다.

 

9. 정서의 인간학, 정서의 정치학: 브라이언 마수미, 프레데릭 로르동

 

9번째 강의는 스피노자의 정서(affectus) 개념을 다룬다. 정서 개념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개념 중 하나이며, 최근 영미 문화이론에서 각광받는 주제 중 하나다. 이 강의에서는 브라이언 마수미를 중심으로 현대 영미 문화이론에서 이 개념이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본 뒤, 이와 다른 각도에서 스피노자 정서 개념이 어떤 인간학적, 정치학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겠다.

 

10. 스피노자주의 페미니즘: 뤼스 이리가레, 모이라 게이튼스, 주디스 버틀러

 

마지막 10번째 강의는 스피노자주의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주제는 가장 도발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여성의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더욱이 󰡔정치론󰡕에서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본질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페미니즘 연구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이리가레의 비판적인 독해 이외에도 게이튼스의 페미니즘적인 스피노자 해석, 그리고 버틀러의 독창적인 작업을 통해 스피노자주의 페미니즘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 강의에서는 이들의 작업을 소개하고 평주하면서 스피노자 철학과 페미니즘 이론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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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설솔술 2017-08-07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간 책으로도 묶여나왔으면 합니다. 소개만으로도 아주 흥미롭네요.

balmas 2017-08-08 08:04   좋아요 0 | URL
그럼요. 책으로 내기 위해 강의도 하고 그러는 거니 당연히 내야죠.^^

오즈의고양이 2017-08-2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오늘 이 글을 읽고 규문 홈페이지 갔더니 정원이 다 찼네요!! 선생님의 인기가!! _ b 전 책으로 나오면 봐야겠군요. 흑흑~~

balmas 2017-08-26 16:31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안타깝게 됐습니다. ㅜ.ㅜ

쌈장 2017-08-28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을 듣고 공부 하고 싶었는데...아쉽네요

balmas 2017-08-29 11:04   좋아요 0 | URL
ㅎㅎ 이 강의는 [신학정치론]을 직접 다루는 강의가 아니니 그렇게 아쉬워하실 필요는 없겠습니다.
 

난민인권센터에서 아래와 같이 시민강좌를 개최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미리 공지했어야 하는데 좀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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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인권센터 시민강좌
[한국사회와 난민인권]

일시: 6.22(목) ~ 11.16(목) 저녁 7시, 총 10회
장소: 서울혁신파크 미래청 1동 2층 큰이야기방
수강료: 무료

오늘도 우리는 뉴스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죽음과 생명, 국경과 국경 사이의 경계에 놓인 난민들의 삶을 보고-듣지만, 그 앞에서 우리의 삶은 좀처럼 ‘멈춤’을 모르는 듯합니다. 이는 흔히 생각하듯 난민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전 세계적 위기로 재현된 난민이라는 거대한 광경을 마주한 개인이 필연적으로 감각하게 되는 ‘무력함’과 그것의 반복으로 생성된 ‘무기력’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서울시가 지원하고 난민인권센터가 주최하는 이 강좌는 '동시대적인 것'으로서의 ‘난민문제’에 대한 ‘무관심’과 ‘무기력’ 즈음에 있는 모든 동료시민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무관심이 대상과의 만남과 접촉의 부재에서 비롯된 감각이라면 무기력은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와 이를 함께 할 동료의 부재에서 얻어지는 감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강좌는 ‘난민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을 통해 난민인권의 이해와 인식을 넓히고 이와 함께 ‘난민문제’의 해결을 위해 동료시민으로서 우리가 시도해볼 수 있는 연대의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해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90년대 초-중반을 시작으로, ‘난민법’을 제정한 2013년, 그리고 현재까지, 한국에 보호를 ‘희망’하는 난민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난민의 유입과 인정-정착과정에서의 문제들이 유럽과 아프리카 주변국들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사회에도 당면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또한, 전 지구적 추세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은 난민이 한국사회의 ‘성원’이 될 것이며 이는 정부와 동료시민들이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난민인권에 대한 인식, 서로-인정의 문화, 민주주의적 난민제도 등을 준비해 나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번 강좌가 이에 대한 더 나은 고민과 답을 찾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강의내용>

1강. 6.22, 난민과 국제정치, 최원근(하와이대)
"왜 난민은 계속 발생하는가? 다른 국가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난민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추세를 알아본다."

2강. 7.6, 국제협약으로 보는 난민의 정의, 김세진(공익법센터 어필)
"누가 난민인가? 국제협약을 통해 난민의 정의를 알아본다."

3강. 7.20, 한나아렌트로 읽는 난민문제,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한나 아렌트를 통해 난민문제를 살펴본다"

4강. 8.24, 에티엔 발리바르와 관-국민적 시민권의 정치,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발리바르를 통해 알아보는 국민국가의 한계와 난민의 관-국민적 시민권의 가능성"

5강. 9.7, 국내 난민인권의 현황과 실태, 김연주(난민인권센터)
"한국사회의 난민현황을 통해 난민들의 삶과 인권실태를 알아본다."

6강. 9.14, 난민과 젠더 : 국내 난민여성의 인권실태를 중심으로, 송효진(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내거주 난민 여성의 인권과 삶을 알아본다."

7강. 10.5, 난민아동 : 영화 '대답해줘'의 상영과 GV, 이야기손님 : 이슬(난민인권센터)
"영화 대답해줘 를 통해 난민아동의 삶을 알아본다."

8강. 10.19, 한국사회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 가야트리(난민당사자, 가명)
"난민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난민의 삶과 그들을 대하는 한국사회에서의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9강. 11.2, 난민인권운동의 현재, 난민인권활동가들(난민인권센터, M.A.P)
"난민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난민인권운동의 내용과 중요성 그리고 난민인권운동의 전망에 대해 알아본다."

10강. 11.16, 난민과 더불어 살아가기, 김현미(연세대)
"난민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는 그들을 동료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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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주소로 가서 살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nancen.org/posts/1546182952067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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