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됐습니다. 


그다지 상업성이 없는 책을, 그것도 아주 촉박한 시일 내에,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준 출판사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토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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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뉴스를 통해 많이 접하셨겠지만, 일요일 프랑스에서는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총선도 대선과 


마찬가지로 1차 투표와 2차 투표로 나뉘어 치러지는데, 총선 1차 투표 결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속한 


신당 "레퓌블리크 앙 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가 32.6%의 득표율을 얻어서 1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은 선거구를 대상으로 치러지는 2차 투표에서 최대 445석


(총 의석수 577석의 77%)을 얻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결과입니다. 



이 총선 결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1) 창당된지 1년 남짓한 신당이 이처럼 압도적인 승리를 한 경우가 프랑스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다는 점입니다.


대통령 마크롱의 인기가 주요 요인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기존 제도권 정치 세력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염증이 


존재합니다. 특히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은 315석에서 10분의 1 수준으로 의석 수가 줄어드는 참패를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파인 공화당은 약 100여 석을 얻을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당보다는 낫다고 해도 


역시 참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따라서 이번 총선으로 인해 1958년 이후 프랑스 정치를 주도해온 우파와 좌파 양당 세력이 무너지게 


됐다는 점입니다. 프랑스 정치권이 엄청난 태풍을 겪게 된 셈입니다. 앞으로 이 태풍이 어떻게 프랑스 정치만이 


아니라 유럽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 마크롱의 대선 승리와 그의 정당의 총선 압승은 포퓰리즘 정치가 현대 정치의 구조적 특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뚜렷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정치 제도, 정당 체제는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하다는 것, 


하지만 그 대안이 무엇인지는알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 대선과 총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 사회당보다 좀더 좌파적인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엥수미즈(굴복하지 않는 프랑스)"가 


11-20석 정도를 얻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좌파 정치에 위로가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래는 국내 신문 보도와 프랑스 르몽드 기사 링크입니다.



http://news.joins.com/article/21655386



http://www.lemonde.fr/elections-legislatives-2017/article/2017/06/11/resultats-des-legislatives-2017-les-candidats-de-la-republique-en-marche-en-tete-du-premier-tour-des-legislatives_5142364_50766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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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소명출판사의 "문화동역학" 총서에서 출간될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엮은이 서문을 올립니다. 


이 책을 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출간을 앞두고 있어서 기쁩니다. 


연구자들과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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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엮은이 서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도래할 한국민주주의기획연구팀(현재는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팀으로 재편되었다)이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에 관한 학술 연구를 기획한 것은 2013년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론’(2011), ‘탈근대, 탈민족, 탈식민: 포스트 담론 20년의 성찰’(2012), ‘한국 문학 속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눈으로 본 한국문학’(2012)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개최한 이후 우리 기획연구팀은 네 번째 공동연구 주제로 어떤 것이 좋을지 모색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러 가지 주제들이 제안되었고, 엮은이는 포퓰리즘에 관해 한 번 논의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했다.

 

***

 

포퓰리즘을 공동 연구의 주제로 제안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점 때문이다. 편자를 비롯한 연구팀의 성원들은 늘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미심쩍게 생각해왔다. 특히 이 용어가 국내에서 사용되는 방식에는 이상한 편향과 정치적 의도가 깊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실제로 국내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주로 경제신문들을 비롯한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가들이 무상급식 등과 같은 복지 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용어로 활용되어 왔다. 보수 언론과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대중영합주의를 뜻하는 표현이었으며, 그것도 보수 정권이 아니라 이른바 좌파 정권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였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좌파 정권[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학문적 기준에서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도 좌파 정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표현 자체가 지극히 선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이다. 여기에서는 보수 언론 및 정치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의 편향적이고 선동적인 측면을 보여주기 위해 이 단어를 따옴표를 쳐서 사용한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보수 언론과 정치권이 공격 무기로 활용하던 주요 어휘들 중 하나가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였던 것이다.[국내 보수 언론의 편향된 포퓰리즘 용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정재철, 한국 신문과 복지 포퓰리즘 담론, 󰡔언론과학연구󰡕 111, 2011 참조.] 최근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이 공공 부문 비정규직 철폐를 정권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실제로 인천공항을 중심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을 시도하자, 경제신문들을 비롯한 보수언론에서 예의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꺼내들기 시작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특히 유럽 등지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고찰해보면, 주로 프랑스의 민족전선이나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 정당 같은 극우파 정당의 노선이나 정책, 활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우파 내지 극우파 언론과 정치인들이 복지 정책이나 시민들의 정치 참여 확대 정책 등을 공격하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같은 보수 정권이 포퓰리즘과 무관한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이명박은 이른바 ‘747 공약’, 다시 말하면 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을 임기 내에 달성하겠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공약을 내걸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당선된 이후 이 공약은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인(自認)함으로써 그것이 말 그대로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내건 공약(空約)에 불과했다는 것을 실토한 바 있다. 박근혜 정권의 경우도 ‘747 공약을 숫자만 바꾼 ‘474 공약’(잠재성장률 4%, 고용율 70%,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이나 당선되자마자 유야무야 없었던 것이 되어버린 경제 민주화공약을 내걸었으며 국민행복정부를 정권의 명칭으로 사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명박 정권보다 포퓰리즘적인 성격이 더하면 더했지 덜했던 것은 아니다.[따라서 한 언론이 표현하듯이, 이는 포퓰리즘도 아니고 그냥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명박 '747', 박근혜 '474''대국민 사기극'”, 󰡔노컷뉴스󰡕, 2015728. http://www.nocutnews.co.kr/news/4450290] 이는 지난 10여 년 동안의 보수 정권들이 정권의 보수적 성격이나 기본적인 정책의 방향, 또는 공약의 실행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창한 속임수 공약을 남발하는 노골적인 포퓰리즘 정치 또는 오히려 대중영합주의 정치의 속성을 띠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본문에서 여러 필자들이 지적하듯이, 포퓰리즘과 대중영합주의는 정확히 구별되어야 할 용어다.]


더 나아가 포퓰리즘에 대한 국내 언론과 정치권의 이러한 용법은 지난 1990년대 이후 서구를 비롯한 외국 학계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포퓰리즘 연구의 방향과도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아주 이상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된 시기이다. 국경의 장벽이 약화되면서 자본의 이동과 사람들의 이주가 증대하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각 나라에서 국민주의(및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창궐하던 시기가 이 시기였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기존의 복지국가 정책들이 해체되거나 약화되었고, 국민국가가 갖는 정치의 자율성 역시 시장의 논리가 사회 전체로 확산됨으로써 훨씬 더 위축되었다. 높은 실업률이 만성화되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증대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국민주의와 인종주의가 세력을 얻으면서 문화적종교적 갈등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고통 받는 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시장의 요구에 대해 더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정치 영역 자체에 수익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시장 원리가 도입되면서 정치의 공공성과 대표성이 위협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권 내의 좌파와 우파 정당 대신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정치적 노선을 내걸면서 주로 국민주의적(인종주의적) 정서와 서민들의 피해 의식에 호소하는 정치 세력들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민족전선이나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세력이 유권자들의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면서 기성 정치 세력 역시 극우 정치 세력의 노선이나 정책을 무시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정치 영역 자체가 시장의 논리(더 정확히 말하면 대기업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이상, 그리고 국민국가 단위에 기반을 둔 정치적 대표 체계가 와해되기 시작한 이상, 기성 정치 세력이든 새롭게 등장한 극우 정치 세력이든 서민들의 관점에 기반을 둔 정치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으며, 이주자들과 하층 계급들을 겨냥한 치안 정치만 더욱 노골적으로 전개되었다. 사람들의 삶의 조건의 향상과 민주주의적 참여의 증대 없이 전개되는 이러한 치안 중심의 정치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조장하면서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만을 낳았다. 이것이 지난 30여 년 동안 유럽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된 배경이었다.


따라서 서구 학계의 포퓰리즘 연구에서는 극우파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한 포퓰리즘 운동의 성립과 전개, 발전 과정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 더하여 포퓰리즘의 확산을 낳게 한 또 다른 요인인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 제도와 원리의 문제점에 대한 규범적(또는 이론적) 연구도 함께 진행되었다. 예전에는 포퓰리즘이 주로 남아메리카의 페론주의나 서유럽의 극우 정당 같은 예외적이고 심지어 병리적인 정치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오늘날의 포퓰리즘 연구에서는 더 이상 포퓰리즘을 비정상적인 병리적 현상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 정치체의 표준적인 형태였던 국민국가 체제의 역사적 쇠퇴를 반영하는 현상이며, 규범적으로 보면 국민국가의 전개와 연동되어 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2016년에 일어난 거대한 사건, 곧 영국의 유럽공동체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Brexit)나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정권의 성립은 포퓰리즘이 일시적인 일탈 현상이 아니라 현대 정치의 위기를 나타내는 매우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현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흔히 자유주의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듯, ‘성숙한 민주주의’(이 문구의 숨은 뜻은 선진 자유주의정치 체제일 것이다)를 포퓰리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문제를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것(다시 말하면 포퓰리즘을 일시적인 병리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순환논리에 만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포퓰리즘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위기 내지 한계를 드러내주는 데 자유민주주의를 그 대안으로 호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팀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포퓰리즘에 관한 학술대회를 기획하게 되었으며, 그 최종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한 편을 제외하고는 지난 2013927~28일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열린 포퓰리즘과 민주주의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들이다. 오승은의 글은 동유럽 포퓰리즘에 대한 연구를 보완하기 위해 이후에 따로 청탁하여 수록되었다.


이 책은 유럽을 전공하는 역사학자들과 라틴 아메리카를 연구하는 학자들, 그리고 한국 정치의 전문가들과 철학 연구자가 참여함으로써 자연히 학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10여 년 동안 정치학이나 사회학, 또는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포퓰리즘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발표해왔고, 한국 정치의 포퓰리즘 현상에 대해서도 언론학자나 정치학자들의 비판적 논의들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이 책과 같이 여러 전공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유럽과 남아메리카, 한국 등의 포퓰리즘을 포괄적으로 검토한 연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국내 보수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정략적으로 남용하는 포퓰리즘 개념의 왜곡된 용법을 바로 잡고, 현대 정치의 구조적이고 편재적인 현상으로서 포퓰리즘에 대한 좀 더 진지하고 성찰된 연구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보면,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엮은이는 포퓰리즘에 관한 현대 서구 학계의 이론적 논의(특히 마거릿 캐노번, 벤자민 아르디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를 소개하고 그것이 국내의 포퓰리즘 연구에 대하여 어떤 함의를 띠고 있는지 제시하고 있다.


2부의 주제는 라틴 아메리카의 포퓰리즘이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는 포퓰리즘의 대륙이라고 불릴 만큼 포퓰리즘 정치가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고 오늘날에도 우파적인 포퓰리즘만이 아니라 좌파적인 형태의 포퓰리즘 정치들이 나타나고 있다. 김은중은 193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어온 라틴 아메리카 포퓰리즘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검토하면서, 이 대륙에서 나타난 포퓰리즘의 탈식민주의적 특성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한편 박구병은 멕시코 살리나스 정권의 네오 포퓰리즘, 곧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 간의 특이한 결합을 사례 연구로 택하여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 포퓰리즘의 한 가지 특성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살리나스 정권의 네오 포퓰리즘 전략은 포퓰리즘이 좌파와 우파 모두가 전유할 수 있는 정치적 전략이나 지배 유형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의 병리성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곧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부패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3부에는 유럽의 포퓰리즘 현상을 고찰하는 세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우선 김용우는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 극우정당 민족전선을 중심으로 포퓰리즘과 파시즘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로 민족전선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한편으로 민족전선의 극우파적인 성격이 희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과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조장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내적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전선을 포퓰리즘 정당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프랑스 및 유럽의 파시즘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고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장문석은 이탈리아의 포퓰리즘을 검토하고 있다. 사실 이탈리아는 20세기 전반기의 무솔리니와 20세기 말의 베를루스코니라는 이름이 대변하듯이 파시즘 및 포퓰리즘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나라이며, 그만큼 포퓰리즘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그는 이탈리아 포퓰리즘의 기원을 정상국가담론에서 찾는다. 곧 엘리트 정치가들의 권력 독점과 부패에서 벗어나 국민의 이익과 요구를 대변하는 정치 체계에 대한 열망이 포퓰리즘 정치의 기원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차 이탈리아라든가 북부동맹같은 이탈리아의 포스트모던 포퓰리즘은 단순히 권위주의적 우파 지도자에 의한 여론 조작이나 대중 지배 현상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폭넓은 문화적 헤게모니 현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오승은은 동유럽 포퓰리즘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동유럽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나라들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포퓰리즘 현상이다. 동유럽에서 포퓰리즘의 확산은 1990년대 이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주도한 자유주의 세력과 개혁 공산주의 세력이 새로운 지배 엘리트로 권력을 장악하고, 대다수의 민중은 체제 이행의 패배자들로 전락하게 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동유럽 포퓰리즘은 체제 이행 과정에서 소외된 다수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개혁적이지만, 그들을 동원하기 위해 민족주의 정서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반동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글은 국내 연구로는 처음으로 동유럽의 포퓰리즘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4부는 한국의 포퓰리즘을 다루는 두 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광일은 포퓰리즘에 관한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용법을 비판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포퓰리즘 정치를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선 대중의 실질적인 정치적 참여를 지향하는 정치로 규정한다. 하지만 대중 자신이 능동적이거나 자치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지도할 수 있는 민중 지향적인 지도자가 필요한데, 한국 정치에서는 1971년 대선 당시 대중경제론과 평화통일을 공약으로 제시한 김대중이 이런 의미의 포퓰리즘 정치가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1997년 집권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함에 따라 김대중은 오히려 대중영합주의라는 의미에서 포퓰리즘 정치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는 노무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은 평범한 대중의 입장에 기초한 정치를 수행하려고 했지만, 그 역시 모순적인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해 이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광일에 따르면 수구 세력의 포퓰리즘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오히려 실질적인 대중 민주주의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영표는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불러내기 위한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관점에서 한국 정치의 포퓰리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민중민주주의적 포퓰리즘을 구별한 스튜어트 홀의 논의를 참조하여 그는 민주화의 결실로 성립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체계적으로 전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게 민주주의내지 진보의 이름을 붙여준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불만을 가져왔으며, 이것이 한국 정치의 포퓰리즘의 동력을 이루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진보 정치는 이러한 포퓰리즘적인 현상을 비난하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여기에서 민중의 정치적 역량의 확장을 위한 대항 헤게모니 기획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포퓰리즘을 진정한 민중주의로 전화하는 길이다.

 

***

 

한 마디 덧붙인다면, 이 책에서 포퓰리즘에 대한 어떤 통일된 입장이나 관점을 찾아서는 안 된다. 이는 이 책에 참여한 필자들의 전공 분야나 이론적 시각이 상이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라는 대상 자체가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형태와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퓰리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재적인 잣대로 재단하거나 심지어 지극히 편향된 방식으로 용어를 남용하기보다는 현상들을 가능한 한 상세히 관찰하고 비교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책이 이러한 이해에 얼마간 기여한다면 엮은이나 필자들에게는 큰 보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퓰리즘이 한국 정치 및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핵심 개념이라는 점에 대해 깊이 동의해주고 공동 연구에 참여해준 필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특히 별도의 청탁을 흔쾌히 수락하고 공들인 원고를 보내준 오승은 선생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76월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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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에 공지했던 것처럼 엑스플렉스 출판사에서 1월부터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에티카] 본문을 한줄한줄 읽어가는 강의인데, 5월 17일에 1부 강의를 마치고 


이번 주 금요일인 6월 2일부터 [에티카] 2부 강의를 시작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엑스플렉스 출판사 주소에 가시면 자세한 강의 안내를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xplex.org:49408/products/xplex-lecture/spinoza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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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될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제목의 책에 대한 서론을 올립니다. 


이 책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내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연구팀에서 지난 2년 동안 수행했던 

학술활동의 결과 중 일부를 엮은 책입니다. 


이 책 1부에는 2016년 1월-8월 사이에 한겨레신문에 연재됐던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원고들 및 추가 원고들이 수록됐고, 2부에는 2017년 3월 고려대에서 열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학술대회 중 첫째날 좌담회 내용을

녹취한 글이 수록됐습니다. 


학술대회의 다른 발표문들은 별도의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비평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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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하 민연으로 약칭) HK연구단 내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연구팀이 구성된 것은 지금부터 2년 전인 20156월이었다.


그것은 다소 우연적인 계기로 시작되었다. 민연 조성택 원장은 20153월 신임 원장으로 부임한 뒤 4월 초에 열린 공식 회식 자리에서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20164월이면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되는 시기인데, 민연도 학술연구기관으로서 뭔가 뜻깊은 학술행사를 한번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에는,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여의 시간이 지나면서 정권의 탄압 속에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옅어지는데, 그것을 그냥 수수방관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면서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학술 연구팀을 내가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이 제안을 받고 잠깐 생각을 한 뒤, 나는 조 원장에게 역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그러시면 연구 모임의 주제를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제안을 그가 흔쾌히 받아주었고, 민연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6월부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연구팀이 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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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획연구팀의 이름을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로 제안을 한 것은 2014416일 세월호가 침몰되고 나서 일주일쯤 뒤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가 계기가 되었다. 그 집회는 세월호 피해자 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집회였는데, 거기에서 예은 아빠로 우리한테 잘 알려진 유경근 씨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세월호처럼 대한민국도 침몰하고 있다, 침몰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우리 국민이 나서서 구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세월호처럼 영원히 침몰할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을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영원히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내게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 연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선 그 당시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부모들 같으면 자기 자식, 가족, 피해자에 대한 근심과 슬픔, 절망 등으로 온 정신이 사로잡혀 있을 시기인데, 세월호 유가족들, 당시에는 피해자 가족들이 세월호 사건을 우리나라 전체의 장래와 연결시켜 생각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게 굉장히 인상 깊고 가슴에 와 닿았다. 나에게는 유경근 씨가 제안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 말이 모든 시민, 특히 지식인들에게 세월호 유가족이 전하는 하나의 메시지이자 호명으로 들렸고, 마땅히 이러한 호명에 응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우리 사회가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분수령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었다.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 시대를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시대로 규정한 바 있다. 로마법에서 이 용어는 원래 지금까지 통치하던 왕이 사망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기간을 의미했다. 일종의 정권 이행기, 공위기(空位期)라는 뜻이다. 이 용어에 단순한 정권 이행기라는 뜻을 넘어 포괄적인 사회정치적 격변기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바우만 자신은 세계화 시대를 인터레그넘의 시대로 규정했다. 세계화는 영토국민(또는 인구)주권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 중심의 질서를 해체했는데, 우리는 아직 그 대안적 질서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시장과 자본의 권력이 오늘날 사회적개인적인 삶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 및 그것이 대표하는 국민의 주권적 힘은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연의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연구팀은 바우만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한국인들 역시 인터레그넘의 시기, 곧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을 맞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1945년 해방될 무렵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고, 전쟁의 폐허와 빈곤의 공포에 시달리던 나라가 지난 70여 년 동안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으니, 지난 한국 현대사는 참으로 기적과 같은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에서 크게 보도된 바 있듯이, 이러한 현대사의 성취가 무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갑질 공화국’, ‘헬조선’, ‘망한민국’, ‘금수저흙수저같은 혐오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이를 일부 철없는 젊은이들이 그릇된 역사관으로 인해 갖게 된 잘못된 생각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바 있지만,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혐오담론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다. 사실 다음과 같은 통계 지표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1년 연속 자살율 1, 노인빈곤율 1, 의료비 증가율 1, 저임금 근로자 비율 2, 임금 불평등 비율 3, 삶의 만족도 36개국 중 29, 국민총생산(GDP) 대비 복지비율 최하위, 출산율 최하위 . 이것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013국민행복정부를 표방하면서 출범한 박근혜 정부 하의 대한민국 이야기다. 이러한 지표들은 지난 7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역사가 이제는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감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본다면, 이는 바로 지난 70년 한국 현대사의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잘 먹고 잘 사는 것 하나만을 유일한 가치로 숭앙해온 경제성장 제일주의의 필연적 결과가 바로 이것 아닌가? 실로 정치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대한민국에는 먹고 사는 것 하나 말고는 공동의 가치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다. 오직 나 하나, 우리 가족, 우리 집단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섬겨 왔을 뿐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체제는 이러한 각자도생의 논리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고 있다.


더욱이 박근혜 정권 하에서 점차 증대한 빈부격차, 인권과 시민권의 축소, 남북 관계의 악화에 더하여 계속 노골화되는 공안통치로 인해 우리나라는 유신 시대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유와 평등, 평화와 생명의 가치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 직면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유경근 씨의 연설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또 다른 이유였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화두는 한편으로 세월호 참사를 통해 희생된 수많은 넋들을 애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가 이제 몰락해가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여 추구해야 할 공동의 가치는 어떤 것이며, 이러한 가치에 기반을 둔 공공의 것(res publica)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른 시민들과 더불어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을 공동으로 모색하자는 것이 우리 연구팀의 기본적인 목표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연구팀은 우리 사회의 저명한 학술 연구자, 원로 지식인, 활동가 등을 초빙하여 20152학기부터 20161학기까지 매주 월요모임 포럼이라는 공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강연회는 정치, 경제, 복지, 사회, 한미관계, 환경, 도시, 여성, 인권, 세월호, 서울-지방 관계 등과 같은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는 주요 문제들을 살펴보고 토론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강연회에 대한 높은 호응에 힘을 얻어 이를 조금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 20161월부터 8월까지 한겨레신문과 공동 기획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라는 제목 아래 격주로 기획연재를 진행했다. 당시 신문에 연재했던 글들과 이 연재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 추가한 몇 편의 원고가 이 책의 1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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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민연에서 월요모임 포럼을 진행하고 한겨레신문에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과연 우리가 시작한 이 학술 활동이 얼마나 사회적 반향을 얻게 될지, 그리하여 우리 연구 팀 제목이 가리키듯이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데 얼마나 기여하게 될지 무척 막막하고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월요모임 포럼에 강연자로 참석한 한 원로 학자조차 뜻은 좋지만 제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활동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럴 만한 것이, 20164월 총선 전까지 우리 기획 연구팀이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민연의 우리 자신도, 당시의 박근혜 정권 및 새누리당이 장기 집권을 이어가리라는 암담한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의 이면에서 이심전심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열망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곧 총선에서 집권 새누리당의 패배라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작년 10월 이후 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뜨겁게 타오른 촛불의 민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일 집회로는 역사상 최대 인파인 230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 2016123일 촛불집회를 비롯하여 20여 차례 촛불집회 기간 동안 1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 탄핵과 관련자 처벌, 새로운 나라 건설의 열망을 외쳤다.


이번 촛불집회는 단지 규모만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6개월 가까이 장기간 지속된 집회 기간 내내 한 사람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평화 집회가 이어졌고 각계각층 다양한 시민들이 가족, 친구, 직장, 지역, 동창, 연인, 또는 혼참러’(혼자서 집회에 참석한 사람을 일컫는 말) 방식으로 참여했다. 문화제 형태의 부드럽고 대중적인 집회 형태가 기조를 이루었지만, 대통령 (하야 또는) 탄핵이라는 구호는 뜨겁게 지속되었다. 그 결과 역사상 처음으로 올해 310일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이 만장일치로 인용되었으며, 59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됨으로써 촛불혁명이라고 불리는 시민들의 거대한 열망은 첫 번째 결실을 맺게 되었다.


촛불집회의 와중에 우리 연구팀은 또 하나의 학술모임을 기획했다.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 평범한 시민들의 뜨거운 변화의 열망을 이어받아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탐구해보기 위한 학술대회였다. 323~25일까지 3일간에 걸쳐 개최된 이 학술대회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날은 우리 사회의 원로 4(강대인, 이남곡, 이부영, 정성헌)을 초청하여 현재 우리나라가 직면한 문제들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좌담회가 진행되었다. 둘째날과 셋째날에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소장중견학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서 정치, 경제, 사회, 사법, 기본소득, 장애인, 청소년, 난민, 을의 민주주의 등에 관해 발표하고 난상토론을 전개했다. 323일에 있었던 학술좌담회 내용을 녹취한 것이 이 책의 2부를 이루고 있으며, 24~25일 열린 학술대회 발표 내용은 앞으로 별도의 저작으로 출간될 계획이다.


따라서 이 책은 상호보완적인 두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부는 우리 사회 각 분야의 구체적인 문제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1부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좌담회 내용을 녹취한 2부는 우리 사회 내부의 전반적인 문제점도 살피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북한의 심각한 갈등 관계 및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아울러 문명론과 생태론, 인문 정신의 관점이 녹아 있는 원로들의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사회의 장래를 고민하는 우리의 동료 시민들에게 좋은 토론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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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나 자신의 관점에서는 이 책에 실려 있는 논자들의 다양한 견해와 목소리를 ()의 민주주의라는 시각에서 갈무리해보고 싶다. 1부와 2부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이 책의 논자들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위기가 일시적이거나 표층적인 현상이 아니라, 개항 이후 또는 적어도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누적된 문제점들이 중층적으로 표출된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 복지 체계의 결여, 정치적 갈등 구조의 왜곡, 종속적인 한미 관계와 연동된 적대적인 남북 관계, 사회적 관계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성, 국가 폭력과 대기업 지배 사회, 이윤 중심의 도시 질서, 패거리들끼리의 쟁투로 전락한 정치, 노동자를 일회용 인간으로 전락시키는 비정규직 체제, 반민주적 사회 질서의 거울로서 서울-지방 관계, 여성 혐오에서 표출되는 한국 사회의 반인권적 현실 등은 모두 뿌리 깊고 다면적인 지배 구조의 표현들이다.


둘째, 따라서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전면적인 변화와 개조를 지향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논자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아울러 이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개조의 방향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나 정책적 대안 마련 이전에 아래로부터의 주체적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는 인식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기성세대와 다른 젊은 세대에 대한 호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약자들의 사회력에 기반을 둔 연성권력,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모색, 국가 및 재벌 권력을 민주적으로 규율해야 할 필요성, 시민의 도시에 대한 권리의 실현, 노동자들의 연대에 기초를 둔 우리 사회의 가치 재구성, 인권에 대한 공감력의 증대 같은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 좌담회에 참석한 원로들은 문명의 전환과 인문 정신을 고취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하지만 이러한 공통적인 관심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차이는 우선 상이한 주제에서 생겨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복지라는 주제로 접근하는 필자와 여성·인권의 문제를 생각하는 필자, 서울-지방 관계에 주목하는 필자가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상이한 진단을 내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차이는 또한 정치적 관점의 차이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 사회주의를 새롭게 정치의 지평에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는 관점과 사회력에 기반을 둔 연성 정치를 추구하는 관점, 통치 개념에 입각하여 시민사회와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입장, 그리고 화쟁의 정치를 요구하는 관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구체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느냐, 아니면 한반도와 동아시아 및 인류 전체 문명을 시야에 놓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차이점들을 최소화하거나 부인하기보다 이것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형성될 수 있는지,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구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사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조건을 고려할 때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체인 우리는 다원적이고 갈등적인 우리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이러한 갈등적인 복합체로 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는 바로 이러한 현실적 조건에서 출발한다.


계약 관계에서 두 당사자 중 하나를 가리키거나 아니면 갑, , , 정 등과 같은 순서를 표현하던 용어였던 을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라는 용어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 학자나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갑에 의해 모욕당하고, 착취당하고,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익명의 을들이 스스로 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와 불공정한 질서를 고발하기 위해 창안해낸 말이다. 따라서 을이라는 이 용어야말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모순을 이해하고 개념화하기 위한 적절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을이라는 이 새로운 사회적 용어가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을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는 동료 시민들에게 지배되거나 모욕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다수를 이룬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을이라는 말이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을의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춰 보면, 이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민주주의적 사회가 아니든가 아니면 적어도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왜곡되거나 훼손된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현대 철학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을은 내적 배제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적 배제라는 개념이 뜻하는 것은 어떤 공동체 내부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하지만 또한 그 공동체 바깥으로 완전히 배제되지도 않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 안에 존재하되 그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집단, 곧 때로는 개돼지로 희화화되는 이등 국민’, 이등 시민이 바로 내적 배제의 대상이다. 을이라는 말보다 이러한 내적 배제 개념을 우리말로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을 것이다.


둘째, 갑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받고 무시당함에도 불구하고, 을들은 단일하거나 동질적인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을이라고 부르는 개인들과 집단들 사이에는 또 다른 불평등 및 지배 관계가 존재한다. 을 아래에는 병()이 있고, 병 아래에는 정()이 있으며, 을은 자신이 갑에게 당하는 것 못지않게 병 위에 군림하며, 병은 또 다른 자신의 을들을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투쟁은 20 80이나 1 99, 또는 갑과 을 사이에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을들 사이의 투쟁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갈등이고, 동료 노동자들 간의 투쟁이며, 남성과 여성 간의 투쟁이고,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의 반목이다. 또한 촛불집회에 대항하는 이른바 태극기집회역시 그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를 구성해야 하는 주체가 사회적 약자들, 다수의 을이라면, 이러한 주체는 매우 문제적인 주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을들 사이에는 선험적인 연대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함께 연대합시다!’, ‘민중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통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 해소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령 복지국가의 건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때로는 여성 혐오의 주체일 수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수 있다. 또는 비정규직 철폐에 앞장서는 사람이 종속적인 한-미 관계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수도 있으며, 진보 도시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서울과 지방 사이의 지배 관계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가 을의 민주주의, 을이 주체가 되는 정치 공동체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과제는 갑과 을 사이에 존재하는 강고한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지배구조를 지탱하고 또한 확산하는 매개체로서 을들 사이의 반목적 갈등 관계를 어떻게 화쟁의 연대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을의 민주주의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을이 지배자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주인이 아닌(따라서 또 다른 하인이나 노예를 전제하지 않는)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여부다. 이러한 을의 민주주의는, 빈민을 빈민이 아니라 데모스’(Demos, 민중)나 시민으로 만들어주며, 재벌이나 대통령, 국회의원도 하나의 데모스로, 시민으로 만들어주는 그러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가 더 이상 그들의 국가’, 치안 기계인 국가로 작동하지 않게 하려면 이러한 을들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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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 이제 보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역사적인 촛불집회의 열망을 담아 시작된 새 정권이 과연 많은 국민들의 기대에 걸맞은 통치를 보여줄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턱없이 이른 시점이다.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통해 희망의 빛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 최저 임금 1만원으로 인상, 재벌 개혁, 화력발전소 축소 및 폐쇄, 4대강 사업 감사 및 재검토, 검찰과 국정원 등 공안기관의 개혁, 5.18 정신의 헌법 전문 기입 등과 같은 정책 방향은 새 정부가 을을 위한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수의 지배자 및 권력자를 위한 노골적인 공안 통치를 전개했던 이전의 두 정권에 비하면 이는 신선하고 반가운 모습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을의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에 의한민주주의 및 을의민주주의를 통해, 대통령 자신이 천명했듯이 국민 주권 시대를 선포한 촛불혁명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기획연구팀도 앞으로 지속적인 연구 활동을 통해 새로운 나라, 새로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밑거름이 되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질정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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