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모레면 5.18 광주민주화항쟁 36주년 기념일이 됩니다. 


5.18을 이틀 앞두고 좋은 언론기사가 나와서 같이 공유하고자 링크해둡니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이 분석한 5.18 왜곡의 현황과 메커니즘에 관한 분석입니다. 


상세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5.18 왜곡의 면면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575064#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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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 메일 주소로 아래와 같은 메일이 왔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조사와 해명, 해결의 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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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 한홍구 이사의 전횡과

시민단체 사유화에 대한 사무처 입장

 

 

2013년 평화박물관에서 근무하던 활동가 6명이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의 인사 전횡에 항의하며 평화박물관을 떠나는 사태가 있었습니다이는 한 활동가에 대한 부당한 권고사직에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당시 활동가들은 평화박물관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단체가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에 의해 사유화되었다고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가슴 아픈 사태였습니다이러한 사태에 대해 한홍구 당시 상임이사가 책임을 지고 상임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평화박물관은 정상화되는 듯 하였습니다그러나 평화박물관이 한홍구 현 이사의 독단에 의해 좌우되는 고질적인 병폐는 해결되지 않았으며이 때문에 지금 평화박물관은 또 다시 파행을 겪고 있습니다. 2016년 328일에 열린 제34차 이사회는 이사들의 언쟁 속에 파행되었으며한홍구 이사는 이해동 대표의 방조 또는 묵인 아래 사무처장에 대해 보직 해임을 하고사무처에 대한 업무 정지사무처 폐쇄를 지시하는 등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이는 전적으로 한홍구 이사의 독단과 전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13년 권고사직, 2016년 보직해임

 

2013년 활동가 집단 사직 사태 직후한홍구 이사는 상임이사직을 내려놓았지만이후에도 변함없이 상임이사아니 그 이상의 역할을 지속했습니다평화박물관의 인사재정활동 등은 모두 한홍구 이사 1인에 의해 좌우되었습니다한홍구 이사의 독단과 전횡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사업(이하반헌법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2015년 9월 이후더욱 노골화본격화되었습니다.

이사회 결의는 물론기본적인 논의와 보고도 없이반헌법 사업은 별도의 사무처를 구성하였습니다또한 재정도 별도로 운영하였습니다반헌법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논의나 결의도 없이 활동가를 상근반상근아르바이트를 포함해 16명 이상 늘렸고평화박물관 사무처 활동가를 반헌법 사업에 데려가려는 과정에서 이에 항의하였지만결국 해당 활동가가 사실상 부당해고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한홍구 이사는 줄곧 사무처와 갈등을 겪게 됩니다한홍구 이사는 마치 사무처의 정당한 문제제기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사무처가 회원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신입 회원을 등록하지 않는 방식의 업무 해태를 통해 평화박물관에 재정적인 손실을 끼쳤고심지어이 액수가 2년 동안 3억 원에 이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음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평화박물관의 단체 규모로 보나무엇보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활동가들이 회원가입서를 받아두고도 입력을 하지 않아서일부러 평화박물관에 재정적 손해를 입혔다는 한홍구 이사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평화박물관 사무처는 단체의 감사에게 감사요청을 하기도 하였고이 문제에 대해 이사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논의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3월 28일 열린34차 이사회에서 감사는 감사보고서를 통해 회원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인하였고다른 이사들의 항의와 권유로 한홍구 이사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는 재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사무처 활동가들에게 공개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더 큰 문제는 이후에 벌어집니다34차 이사회에서 한홍구 이사가 사과하며 사태가 일단락되자이해동 대표는 사무처를 음해했던 한홍구 이사를 상임이사로 임명하고사무처장을 보직해임하겠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합니다그러나 이해동 대표의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이 안건은 다른 이사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정이 보류되었고사무처를 비롯한 인사 문제 등을 논의할 소위원회를 3인의 이사들로 구성하여그 소위원회에 결정을 위임하기로 하고이사회는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이사회에서 결정사항을 위임한 소위원회는 아예 소집조차 되지 않았습니다이런 상황임에도 한홍구 이사는 이사회 회의 이틀 후이해동 대표의 지시사항이라며사무처에 업무정지를 명령합니다이는 이사회 결정을 정면으로 뒤엎은 결정입니다.

대표의 업무정지 지시 이후 사무처는 일손을 놓고다만 다른 명령이나 업무지시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이러한 상황이 2주 동안 계속되자사무처는 4월 18일 이사진 앞으로 평화박물관 정상화 호소문을 보냈습니다호소문을 보낸 지 3시간 만에 이해동 대표는 이메일을 통해 사무처장을 보직해임한다고 통보하였습니다뿐만 아니라이사회에 출석하여 회원가입과 관련한 사무처의 업무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감사보고서를 제출했던 감사가 갑자기 입장을 바꿔한홍구 이사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감사보고서를 보냅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홍구 이사는 이해동 대표와 함께 5월 3일 제35차 이사회를 소집하였습니다이는 제34차 이사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인사전횡과 해직사태

 

한홍구 이사의 인사 전횡은 2013년 권고사직과 이로 인한 6명 활동가의 집단 사직그리고 반헌법 사업과 관련한 활동가의 부당해고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무처에 대한 업무정지와 사무처장 보직해임만이 아니었습니다한홍구 이사의 인사전횡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습니다한홍구 이사는 2015년 평화박물관이 주관했던 손배가압류 관련 시민운동 손잡고의 사업 담당 활동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폭력적 언행을 반복했고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이 조직에 대한 실망으로 반복적으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한홍구 이사는 선의를 갖고 시민운동에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갑질을 반복했습니다부당한 업무지시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한홍구 이사는 부당한 업무지시에 대해 사무처장이 문제제기를 하자, “삼성도 이병철이 결정하면 그 밑에 사장은 따르는 거다라며 윽박지르기도 하였습니다이 발언은 평화박물관이 한홍구 이사 개인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발언입니다인사전횡을 일삼고반발이 있으면 사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사회를 움직여 자신의 전횡을 절차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손잡고’ 사업이 비판하고 있는 악덕 재벌기업의 행태와 꼭 닮아 있습니다한홍구 이사는 해고를 하게 되면법률적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이유로권고사직이나 보직해임 등을 남발하였고이는 13명의 이사 중 한 명에 불과한 한홍구 이사가 법률적으로나 평화박물관 정관으로나 사회 상규 상 결코 가질 수 없는 권한이었습니다없는 권한을 남용한 것입니다.

 

 

단체 운영의 사유화

 

한홍구 이사는 평화박물관이 공익단체로 건강하게 운영될 수 있는 논의구조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고 무력화시켰습니다사단법인 설립 당시 300현재 5,000명에 달하는 후원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10여명의 회원만으로그것도 형식적으로 치르고 있습니다. 2013년 부당한 권고사직과 관련한 사무처 활동가 집단 해고 사태 당시에도 그랬지만이사회와 대표는 한홍구 이사가 열심히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결론을 내주기만 하였습니다정관은 있지만형식적인 것일 뿐실제는 모든 운영권과 모든 결정권이 한홍구 이사 1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평화박물관의 공식명칭은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입니다그렇지만평화박물관의 설립 목적과 무관하게평화박물관 건립기금은 현재한홍구 이사의 개인 연구실 전세금으로 묶여 있습니다이 공간을 반헌법 사업과 함께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한홍구 이사는 안방을 자신의 침실로 사용하고,개인 연구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그 이전에 시민단체가 관리비도 많이 드는 50평이 넘는 고급 아파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큰 문제입니다. 5천원, 1만원씩 후원금을 내는 많은 시민들의 정성이 한홍구 이사 개인을 위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한홍구 이사는 제34차 이사회에서 아예 평화박물관 사업을 없애자는 제안을 하고 현재 사무처 폐쇄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단체의 설립목적이며단체명이기도 한 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을 위해 회원들의 회비를 받아놓고는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그냥 접어버리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이는 10년 넘게 평화박물관 사업에 참여했던 회원들을 우롱하는 일입니다아무리 단체를 사유화했다고 해도많은 회원들과의 약속을 이렇게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아무 것이나 트집을 잡아 사무처장에게 인사와 급여에서 불법적 불이익을 주고사무처 전체의 업무를 정지시키고그것도 모자라 아예 사무처를 폐쇄하겠다는 한홍구 이사의 작태는 재벌 대기업의 반인권적 노동자 탄압보다 훨씬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재정의 사유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한홍구 이사가 평화박물관 재정을 자의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일입니다한홍구 이사가 지금까지 평화박물관의 회원 확대를 위해 노력해 온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공익단체가 공익적 목적으로 모금한 자금은 공익적 활동에 쓰여야만 합니다평화박물관의 회비는혈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돈입니다그래서 재정을 운용할 때는 신중을 거듭해야 하고반드시 목적사업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저희는 평소 방만한 재정운용을 했던 한홍구 이사가 갑자기 회원관리 문제를 두고 사무처를 공격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회원관리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 인식했다면당연히 회비가 제대로 쓰이지 않도록 했던 자신의 행태부터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한홍구 이사는 이미 퇴직했으며 평화박물관에 근무하지도 않는 전임 사무처장에게 급여를 지급하라는 등의 부당한 업무지시를 남발했습니다이렇듯 지난 10년 넘는 세월 동안 공과 사의 구분도 없이 자의적으로 운영되는 평화박물관 재정 운용 실태는 즉각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평화박물관은 작은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공익단체

 

사무처장 보직 해임은 한홍구 이사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무처장에 대한 보복성 조치이자 해고에 준하는 결정입니다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이미 평화박물관 이사들의 사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지난 34차 이사회에서는 두 명의 이사가 사임 의사를 밝혔고평화박물관 내부의 파행이 거듭되자또 한 명의 이사가 개인 성명을 발표하고 사퇴하였습니다한홍구 이사가 독단과 전횡을 거듭하기에 생긴 일입니다공익단체 중에서 평화박물관처럼 활동가와 이사들이 잇따라 사퇴를 반복하는 사태가 있었던 단체는 일찍이 없었습니다이런 사태가 반복되는 것은 한홍구 이사의 독단과 전횡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박물관 내부 문제와 관련하여 끝도 없이 논란을 일으키고평화박물관의 설립 목적을 위해 헌신하겠다 다짐했던 젊은 활동가들이 상처를 받고 단체를 떠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거듭 말씀드립니다만이는 전적으로 한홍구 이사의 책임입니다당장 지난 2년 동안 벌써 네 차례나 인사 파행이 있었고이 과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평화박물관을 떠난 활동가가 10여 명이 넘습니다.

한홍구 이사는 평화박물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렇지만그의 신분은 그저 여러 이사 중의 한 명일뿐이기에지금까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고또한 어떤 책임의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한홍구 이사의 이런 전횡이 가능했던 것은 이해동 대표의 묵인과 방조 때문입니다.

평화박물관은 시민들이 다만 평화박물관의 설립목적에 동의해서, 5천원, 1만원씩 회비를 내면서 운영하는 공익단체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한홍구 이사와 이해동 대표는 평화박물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합니다다시는 평화박물관이 독단과 전횡 때문에 회원들의 기대와 바람을 외면하고공익단체의 면모를 잃어버리고 파행을 거듭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한홍구 이사와 이해동 대표의 즉각 사퇴를 통해 평화박물관이 조속히 정상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저희 평화박물관 사무처 활동가들은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했습니다저희는 공익단체의 대부분이 그렇듯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또한 인간적인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데다한홍구 이사의 개인 비서 역할이나 수행해야 하고잠자코 그의 부당한 지시를 따라야 하는 상황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전횡에 눈감는다면 다음에 오게 될 활동가들이 또다시 상처를 받고 저희가 겪었던 좌절과 슬픔분노를 되풀이할 것이란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부디 이 글을 통해평화박물관이 회원들의 정성으로 운영되는 공익단체답게 과거의 악행에서 벗어나 신뢰받을만한 단체로 거듭나게 되었으면 합니다평화박물관이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고맙습니다.

 

2016년 5월 10

 

평화박물관 사무처 활동가 일동

석미화 최성준 김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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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우편적 -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 바리에테 18
아즈마 히로키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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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여름호에 실릴 촌평 하나 올립니다. 


일본의 비평가인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에 대한 서평입니다. 


아직 교열이 끝난 글이 아니므로, 혹시 논평을 하거나 토론을 하실 분은 [창비]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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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를 읽다 말기

   

 

우선 내게 아즈마 히로끼(東浩紀)는 매우 낯선 인물이라는 점을 밝혀두어야 할 것 같다. 서평 대상인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存在論的,郵便的, 조영일 옮김)을 비롯해서 그의 책이 국내에 몇권 번역되어 있지만, 나는 아즈마 히로끼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른다. 사실 나는 일본의 문화계 및 학술계 전반에 관해 꽤 무지한 편이다. 우리나라에 많은 책이 번역되어 있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책 두어권을 읽어본 정도이고, 그외에 니시까와 나가오(西川長夫)나 우까이 사또시(鵜飼哲) 같은 이들의 저작, 그리고 얼마 전에 국내에 소개된 사또오 요시유끼(佐藤嘉幸) 같은 젊은 연구자들의 현대 프랑스철학에 관한 연구서를 필요에 따라 한두권씩 읽어본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데리다(J. Derrida)에 관한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20대 중반의 아즈마 히로끼를 일약 카라따니 코오진의 후계자로 부각시킨 역작이라는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기에, 과연 어떤 책일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읽었던 몇몇 일본 학자나 비평가 들의 책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도 대단한 소문과는 달리 그저 그런 저서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예상도 있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은 특이하게도 평자의 이 두가지 기대 내지 예상에 모두 들어맞았다. 이 책은 역작이라고 볼 만한 장점과 자신의 지적 성취를 스스로 잠식하는 약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첫 문장에서 저자는 본서의 목적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해설(9)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데리다 해설서라기보다는 한가지 집요한 질문을 바탕으로 데리다 사상을 재구성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탈구축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이 책을 이끌어가는 주도적인 물음은 도대체 데리다는 왜 그와 같은 기묘한 텍스트를 쓴 것일까?”(13)이다. 여기서 기묘한 텍스트라고 지칭되는 것은 1970년대에 출간된 데리다의 {산종(散種)}(La dissémination, 1972), {조종(弔鐘)}(Glas, 1974), {회화에서의 진리}(La vérité en peinture, 1978), {우편엽서}(La carte postale, 1980) 같은 저술이다. 이 저술들의 기묘함은 1960년대 저작들과 달리 더이상 제도적인 논문’, ‘저작의 체계를 지키지 않고, 극도의 실험적 스타일, 신조어들의 빈번한 출현, 데리다 자신의 여러 텍스트에 대한 암묵적 참조 등으로 인해 극도로 난해하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이론화의 칸스터티브(constative)한 형태에서 에크리튀르(écriture)의 퍼포머티브(performative)한 양태로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 자신의 넘어짐(15)을 가리킨다.


어떤 넘어짐이 문제일까? 그리고 데리다는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책의 후반부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1970년대의 실험적 텍스트들을 통해 하이데거처럼 심연에 대해 사색하는 위대한철학자(263)가 되는 것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아즈마가 데리다파(397)라고 부르는 전이(轉移)의 메커니즘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곧 데리다는 자신이 스승으로 숭배되고 자신의 철학적 주제와 스타일이 모방됨으로써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하나의(또는 여럿의) 학파가 만들어지는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이 일종의 초월론적 중심, 부재하면 부재할수록 더욱 숭고해지는 그런 중심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편적 탈구축(235)을 시도했지만, 1980년대 이후 그는 전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끼가 특히 {우편엽서}에서 읽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전이를 둘러싼 철학적·정신분석적·정치적 쟁점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데리다의 탈구축에는 두 종류가 존재한다는 점으로 집약된다. 아즈마가 카라따니 코오진을 따라 괴델적 탈구축”(또는 부정신학적 탈구축)이라고 부르는 첫번째 탈구축은 어떤 하나의 체계에서 출발하여 그 체계의 내재적인 역설을 드러내는 것, 오브젝트레벨과 메타레벨 사이의 결정불가능성에 의해 텍스트의 최종적 심급을 무효화하는 전략(111~12)으로, 그는 특히 초기 데리다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데리다에게는 이것과 구별되는 또다른 탈구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편적 탈구축이다. “우편=오배(誤配) 시스템(185)이라고 지칭되는 우편적 탈구축은 하이데거, 라깡, 크립키, 지젝이 벗어나지 못한 부정신학적 탈구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편적 탈구축을 집약하는 편지가 도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명제는 시니피앙의 분할 가능성(117)을 가리키며, 따라서 비세계적 존재를 복수적이고 능동적으로 파악(204)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역으로, 괴델적 탈구축에서 부각되는 초월론적 시니피앙은 우편공간이 야기한 망령적 효과’, ‘불가능한것의 복수성을 말소시(155) 결과이다.


데리다 자신은 명확히 하지 않은 우편적 탈구축을 작업가설로 설정한 이후, 아즈마는 4장에서 데리다를 넘어 카르나프,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논리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접목이라는 시각에서 검토한다. 그러다가 372면 이하에서 정신분석적인 전이의 문제를 제기한 뒤 그의 논의는 얼마 못 가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그가 전이작용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편적 탈구축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데리다 및 데리다 학파에 관한 논의와 참조를 중단하는 것, 그리고 데리다 읽기를 중지하는 것이 데리다파의 전이(398), 즉 서양 형이상학의 체계를 근원적으로 탈구축하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탈구축적인 논문과 저서를 산출함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형이상학의 제도를 지속하고 데리다를 포함한 탈구축 사상을 그 형이상학의 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결과와 절단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책의 독창성은 {우편엽서}를 데리다 사상의 중심(또는 중심 아닌 중심)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특히 두가지 논의를 인상깊게 읽었다. 첫번째는 1장과 2장에서 제시된 쏠 크립키(Saul A. Kripke)의 명명이론에 대한 탈구축적인 독서로, 이는 지젝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훨씬 넘어서는 흥미로운 분석이다. 두번째는 2장과 3장에서 전개된 우편적 탈구축에 관한 논의인데, {우편엽서}에 관한 분석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반면 이 책은 뚜렷한 약점과 한계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괴델적 탈구축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이라고 할 만큼 끝도 없이 괴델적 탈구축, 부정신학적 탈구축에 대한 언급이 끝도 없이 나온다. 하지만 그 내용은 실상 매우 단순하고 빈곤하다. 유일한 초월론적 중심, 더욱이 역설로만 표시되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중심을 설정하는 사상이 그가 말하는 괴델적 탈구축이기 때문이다. 초기 데리다 작업(및 더 나아가 하이데거와 라깡의 사상)이 과연 이러한 괴델적 탈구축으로 환원되는지 여부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지만,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이라는 이원론적 문제설정이 데리다 사상을 분석하기에 적절한 것인지는 더 의심스럽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가 유사 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 국역본에는 의사 초월론(258)이라고 되어 있다)에 관해 단 한차례, 그것도 괴델적 탈구축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는 것은 매우 증상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유사 초월론이야말로 그가 작위적으로 설정한 괴델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이분법을 탈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문제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끼는 이 책의 논의를 중단하는 것이 그 자신의 관점에 일관된 태도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가 더 썼다 하더라도 데리다 사상에 관해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밝혔을지는 의문이다.

 

상당히 전문적인 철학적 논의를 다루는 책인데 매끄럽게 잘 읽히는 것은 역자의 노고 덕분이다.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 표현들(‘소행’ ‘폐역’ ‘쟁이’ ‘지견’ ‘비급)이 적지 않게 그대로 사용되어 독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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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16-05-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데리다의 해체가 `유물론`인지 잘 보여주는 책이었다 생각이 드네요
 

저 아래에 "음 ... "님이 댓글을 다신 것을 보고 생각이 나서 한 말씀 드립니다. 


이것은 꼭 "음 ..." 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제 블로그에서 제 글에 대해 이런저런 비평이나 


반론을 제시하는 분들 모두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제 블로그를 오래 전부터 보아온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블로그를 10년 넘게 하면서 몇 차례에 걸쳐 제 블로그 상에서 


이런저런 온라인 상의 토론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개중 어떤 것은 논문 1편 이상의 긴 분량을 지닌 토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몇 차례 토론을 해본 결과 얻게 된 결론은, 온라인 상의 토론이 상당히 소모적이고 별로 유익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가 열심히 논거를 들어서 반론을 해도, 상대방이 제 반론에 대해 납득할 만한 재반론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논점이 자꾸 빗나가는 논의들이 이어지면서 오히려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던 기억만


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블로그 상에서 온라인 토론이나 논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 점은 제가 이미 몇 차례 제 페이퍼에서 피력한 바 있습니다.  



제가 비평이나 반론을 제시하는 분들께 가급적 이런저런 매체에 공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게 저에게도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께도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반론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학술지나 계간지 또는 기타 매체에 반론을 제시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인데, 


다만 저는 제 블로그의 글에 댓글 형태로 제기된 반론이나 비평들에 대해서는 별로 답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비평이나 반론들 중에는 조금 더 논점을 발전시켜 보면 흥미로운 논쟁 거리가 될 만한 것들도 있는데, 


제 블로그에서 비평이나 반론을 제기한 분들 중 그것을 실제로 논문이나 글로 발전시킨 분들은 없는 것 같아서 


저는 그것이 오히려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런저런 매체에 공식적으로 반론을 해달라고 하는 것은 


조금 더 논점을 정교하고 분명하게 전개해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저도 더 분명하게 잘 다듬어진 논거를 바탕으로 


제 답변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 블로그는 '공론장'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 알라딘 서점을 이용하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시작하게 된 공간이고, 


제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이런저런 매체에 발표한 글들을 가급적 올려두는 공간입니다. 


제 글을 읽고 이런저런 비평이나 반론을 댓글로 다는 것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시되, 


제가 꼭 거기에 대해 답글이나 재반론을 달거라고 기대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마십시오. ㅎㅎ 


제 답글을 간절히(?) 원하신다면, 이런저런 매체에 투고하시고 저에게 알려주시면 제가 가능한 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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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16-04-05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짜증스러우시겠지만 마지막으로 댓글 한번 더 달겠습니다.

온라인 토론이 소모적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라인 토론이 너무 소모적이므로 토론은 지양하겠다고 한 마디 하시면 못 알아듣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냥 서로 예의만 지키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제 댓글은 정동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뜬금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마스님에게 단지 ˝알려˝ 드리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왜 꼭 다른 사람들이 발마스님께 토론을 강요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떻게 ˝제 답글을 간절히(?) 원하신다면˝ 이란 표현을 쓰실 수가 있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예의를 지키세요.

소조 2016-04-05 09:17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음...님의 덧글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제 답글을 간절히(?) 원하신다면˝이라는 표현은 유감스럽습니다. 온라인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어리둥절. 이곳이 개인적인 곳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내용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ㅈㅈ 2016-05-0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의라... ㅎㅎ
음...님이 애초 ˝너무 성급한 비판˝이라느니
˝원고 게재를 철회하는 편이 낫겠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을 때가
더 예의 없어 보이는데요?
 
 전출처 : balmas님의 "현대시학 4월호-정동인가 정서인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초보적 논의"

반론할 게 있으시면 여기 댓글 달지 마시고 [현대시학]에 기고를 하세요. [현대시학]에서도 환영을 할 겁니다.

저야 어차피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 더 글을 쓸 생각이니까, 반론을 해주시면 저도 기꺼이 답론을 드리죠.


[현대시학]이 아니라 다른 매체에 기고하실 거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꼭 답론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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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16-04-04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답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반론을 댓글로 달든 말든은 제 소관 아닐까요?
발마스님께서 그에 답하든 말든은 발마스님의 소관인 것처럼요.
발마스님께서, 저널에 실리는 글에 대해서는 온라인 토론을 지양하려 한다는 등으로 양해를 구하셨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예의였을 텐데요...

이런 주제를 가지고 저널에 기고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애초 댓글을 단 것도 발마스님을 만류하려 한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발마스님의 글에서 본 것은 한국 인문학계의 고질적인 풍토병이었습니다. 토론 상대를 미니멈으로 상정하지 마세요(저 사람은 에티카에 대한 초보적 이해도 없다...). 또, 당파성을 드러내지도 마세요(알지도 못하면서 스피노자를 소비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국문학계, 또 이를 조장하는 국내 네그리 학자들...). 한국 인문학계가 아프다면, 바로 발마스님이 옮기고 있는 그 병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에 대한 댓글은 사양할께요. 물론 대댓글을 달든 말든은 발마스님의 소관이겠지만요.

참, 엉뚱한 곳에서 ˝~할게 있으시면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이러 저러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세요˝ 소리를 듣네요. 암튼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ㅈㅈ 2016-05-05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론 상대를 미니멈으로 상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래 답글이 보여주는 공소한 논리나 지식을 보면 그냥 미니멈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발마스님의 글이 당파성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이셨다니, 참 갑갑할 따름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