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학] 4월호에 게재될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이 원고는 최근 국문학계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꽤 널리 쓰이는 "정동"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적 고찰입니다. 지면의 제약이 있어서 이 글에서는 간단한 논의로 그쳤는데, 앞으로 다른 지면에서 이 문제를 좀더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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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인가 정서인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초보적 논의


 

 1. 정동?

 

최근 국내 인문학계, 특히 국문학계에서 정동’(情動)이라는 용어가 꽤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 일상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 이 낯선 용어[국어사전에서 정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있다. “갑자기 일어나는 노여움, 두려움, 기쁨, 슬픔 따위의 급격한 감정.”(다음 국어사전) 그런데 이 단어 자체는 일본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국어사전에서는 영어의 emotion에 상응하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가 인문학자들, 특히 우리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국문학 연구자들이나 비평가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는 현상은 현재의 한국 인문학에 대해 꽤 증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른 지면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정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스피노자의 정서론에 관해 다루려고 하는 것은, 요즘 일부 국문학 비평가들이나 네그리 연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정동이라는 용어의 이론적 기원이 스피노자(특히 들뢰즈와 네그리에 의해 재해석된)에 있는데, 정작 이 비평가들이나 연구자들이 스피노자의 정서론에 관해 초보적인 수준에서부터 잘못된 이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정서론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통해서도 정동에 관한 국내의 용법이 지닌 문제점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한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 사례만 지적하겠다. {현대시학} 20161월호에 실린 시와 정동기획의 첫 번째 글인 조강석 교수[이하 인명을 사용할 때에는 직위 없이 사람 이름만 표기하겠다.]정동적 동요와 시 이미지라는 글은 affectionaffect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동 개념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과 이해가 필요할 것이지만 간략히 정리하자면, 정동은 이미지의 순간적이고 정태적인 효과인affection과 대비되는 것으로 한 정서로부터 다른 정서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재해석하고 공교화하는 데 공을 들인 들뢰즈에 의하면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한다.[조강석, 정동적 동요와 시 이미지, 󰡔현대시학󰡕 560, 20161월호, 44.]

 

이 짧은 인용문은 내가 보기에 국내 문학계의 affectioaffectus에 대한 수용과 이해가 지닌 문제점을 아주 집약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그리고 조강석이 이 대목의 참고문헌으로 {비물질노동과 다중}이라는 책에 수록된 들뢰즈의 스피노자 강의록 번역문을 제시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2005.] 이런 오류의 기원에는 조정환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네그리 연구의 들뢰즈 이해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기원적인 오류는 갈무리 출판사에서 연이어 출간된 정동에 관한 일련의 저작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가령 최근에 나온 두 권의 책을 참조할 수 있다.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정동이론󰡕,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및 이토 마모루, 󰡔정동의 힘󰡕, 김미정 옮김, 갈무리, 2016 참조.] 조강석 같은 명민한 비평가가 여기에 담긴 문제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꽤 심각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다른 글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네그리 연구자들의 들뢰즈/스피노자 이해의 오류가 정동에 관한 문제의 뿌리라는 점만 지적해두기로 하자.


조강석은 인용문에서 두 가지 지적을 하고 있다. (1) “정동은 이미지의 순간적이고 정태적인 효과인 정서affection와 대비되는 것으로 한 정서로부터 다른 정서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며, (2) “들뢰즈에 의하면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 그가 이 인용문에서 afection정서로 옮기고, affect정동이라는 용어로 옮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하의 논의는 이 세 가지 점에 대한 몇 가지 논평이다.


조강석이 앞의 인용문에서 근거하고 있는 문헌은 질 들뢰즈의 정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다. 사실 이것은 들뢰즈가 생전에 따로 발표한 글이 아니라, 그가 1970년대 말~80년대 초 프랑스 뱅센느 대학에서 했던 스피노자에 관한 몇 편의 강의에 대한 녹취록을 편역한 것이다. 이 강의에서 그는 자신의 두 권의 스피노자 연구서에 입각하여[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권순모이진경 옮김, 인간사랑, 2003;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1999.] 아펙치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 개념을 매우 평이하면서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문제는 조강석이 준거하고 있는 들뢰즈 강의록에 대한 저 번역이 초보적인 오역을 범하고 있다는 점이다. (2)에서 조강석은 정서와 정동, affectionaffect의 차이를 정서는 봉인하고 정동은 이행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뭔가 그럴 듯한 대비로 읽힌다. 그런데 과연 봉인하다는 말의 원어는 무엇일까? 번역서 36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자신의 술어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affectio(정서)가 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변경된 신체의 성질을 가리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을 봉인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첫 번째 종류의 관념들이 신체의 정서를 재현하는 모든 사유양식이라고 말하겠습니다.[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앞의 책, 36~37.]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들뢰즈의 이 글을 번역한 역자나 이 대목을 참조하여 글을 쓰는 사람들이 과연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해당 대목의 원문을 한 번 살펴보자. 프랑스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Pour garder la rigueur de sa terminologie, Spinoza dira qu’une affectio indique la nature du corps modifié plutôt que la nature du corps modifiant, et elle enveloppe la nature du corps modifiant. Je dirais que la première sorte d’idée pour Spinoza, c’est tout mode de pensée qui représente une affection du corps.

[Gilles Deleuze, “Cours sur Spinoza”(Vincennes, 1978. 1. 24), webdeleuze.com (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11&groupe=Spinoza&langue=1)(2016.3.7 접속)]

 

In order to preserve the rigor of his terminology, Spinoza will say that an affectio indicates the nature of the modified body rather than the nature of the modifying body, and it envelopes the nature of the modifying body. I would say that the first sort of ideas for Spinoza is every mode of thought which represents an affection of the body.

[Gilles Deleuze, “Course on Spinoza”(Vincennes, 1978. 1. 24), webdeleuze.com(http://www.webdeleuze.com/php/texte.php?cle=14&groupe=Spinoza&langue=2)(2016.3.7 접속)]

 

내가 번역한다면, 위의 인용문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서 번역할 것이다.

 

자신의 용어법의 엄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아펙치오는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보다는 오히려 변용되는 신체의 본성을 가리키며, 변용되는 신체는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을 포함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스피노자에게 첫 번째 종류의 관념들은 물체의 변용을 재현하는 모든 사유 양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인용문 가운데 밑줄 친 단어가 바로 봉인하다로 번역된 강의록의 불어 및 영어 단어다. 들뢰즈가 인용된 단락에서 이 단어를 통해 가리키는 스피노자 {윤리학}의 해당 구절은 2부 정리 16 및 따름정리 2이다. 라틴어 원문과 영역문 및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다.

 

Idea cujuscunque modi, quo corpus humanum a corporibus externis afficitur, involvere debet naturam corporis humani et simul naturam corporis externi.

The idea of any mode in which the human body is affected by external bodies must involve the nature of the human body and at the same time the nature of the external body.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에 대한 관념은 인간 신체의 본성과 동시에 외부 물체의 본성도 함축해야 한다(2부 정리 16)

[이 글에서 내가 참고한 󰡔윤리학󰡕 원문의 출전은 Carl Gebhardt ed., Spinoza Opera, vol. 2, Carl Winter Verlag, 2015이며, 영어번역은 최근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에드윈 컬리의 번역이다(Edwin Curley, The Ethics, Penguin Books, 1996). 한글 번역문은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국내의 󰡔윤리학󰡕 번역(또는 스피노자 저작 번역) 중에서 학문적으로 신뢰할 만한 번역은 하나도 없다.]

 

Sequitur secundo, quod ideae, quas corporum externorum habemus, magis nostri corporis constitutionem quam corporum externorum naturam indicant.

It follows, second, that the ideas which we have of external bodies indicate the condition of our oen body more than the nature of the external bodies.

둘째, 우리가 외부 물체들에 대해 갖는 관념들은 외부 물체들의 본성보다는 우리 신체의 상태를 더 많이 가리킨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 2)

 

들뢰즈가 “enveloppe”라고 표현한 것은 정리 16의 라틴어 원문의 “involvere” 동사이다. 이것을 컬리의 영역본에서는 “involve”라고 옮겼고 나는 함축하다로 옮겼다. involvere 동사가 전문적인 의미에 따라 사용되지 않은 이 맥락에서는 포함하다로 옮긴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전문적인 의미로 쓰일 경우 involvere의 뜻은 다음과 같다. “AB의 개념을 함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AB 없이 인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윤리학󰡕 2부 정리 49의 증명)]


정리 16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변용될 때 우리는 그 변용되는 것을 지각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인간 신체의 본성과 더불어 외부 물체의 본성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가령 우리가 저녁 무렵에 서쪽 하늘로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에는 태양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이 태양에 대한 이미지에는 태양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신체, 곧 우리 시각 기관의 본성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태양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주지 못하며, 우리의 신체의 성질을 반영한 상태로 재현하게 된다.


더욱이 따름정리 2에 의하면, 외부 물체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외부 물체 자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우리 신체의 성질을 더 많이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2부 정리 35의 주석에서 방금 내가 언급한 태양의 사례를 든다. 태양은 지구로부터 지구 지름의 600배 정도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지구와 태양의 거리다. 오늘날 측정된 거리로는 약 15천만 킬로미터 정도다.] 우리는 마치 200피트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둥근 물체와 같다고 지각한다. 이는 인식의 오류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구와 태양의 실제 거리를 알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태양이 마치 200피트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지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이렇게밖에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 기관이 그렇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2부 정리 16의 따름정리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다.[이 문제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변용의 질서와 연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2, 2010, 112쪽 이하 참조.]

 

3. affectio

 

이렇게 본다면, 들뢰즈 강의록 번역에 나오는 봉인한다는 번역은 매우 엉뚱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들뢰즈가 사용한 “envelopper”라는 단어를 그 일상적 의미 중 하나인 포장하다내지 덮다로 이해한 결과 생겨난 오역이다. 2부 정리 16의 밑줄 친 단어를 봉인한다로 바꿔서 한 번 읽어보라. 그 문장이 이해가 되는지.


이제 (1)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조강석은 이미지의 순간적이고 정태적인 효과정서affection”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조강석의 규정은 사실 들뢰즈 강의록에 대한 번역문에 의거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번역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의 술어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affectio(정서)가 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변경된 신체의 성질을 가리킨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인용문을 읽고 드는 의문은 정서변경을 가하는 신체의 성질보다는 오히려 변경된 신체의 성질을 가리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이다. 강의록 조금 앞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첫번째 결정에서 정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한 신체의 상태입니다. ... 여러분 신체의 정서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의 행위 혹은 여러분에게 내리 쬐는 태양의 효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효과,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 위에 생산하는 행위입니다.[질 들뢰즈, 정동이란 무엇인가?, 󰡔비물질노동과 다중󰡕, 35~36.]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강의록을 번역한 역자나 이 책을 엮은 엮은이들, 또는 그 독자들은 이 대목을 읽고 무엇을 이해한 것인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우리말에서 정서(情緖)란 어떤 것인가?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1.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2. 지역이나 집단 따위와 관련된 한정적 특성을 가진 성향 3. [심리] 갑자기 일어나는 노여움, 두려움, 기쁨, 슬픔 따위의 급격한 감정”[내가 참조한 국어사전은 포털사이트 다음의 온라인 사전이다. 네이버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 이러한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의 정서는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 감정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들뢰즈는 줄곧 affection신체와 관련시킨다. 그것은 한 신체의 상태또는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 위에 생산하는 행위”(‘행위보다는 작용이 더 자연스러운 번역일 것이다)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affection정서라고 번역하고, 또 그 번역을 자연스럽게 인용하여 활용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인용문에 나오는 들뢰즈의 affection에 대한 규정은 {윤리학} 2부 정리 13과 정리 14에 나오는 이른바 자연학 소론의 논의를 가리키고 있다.[지나치는 김에 지적해두자면, 자연학 소론은 스피노자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자연학에 관한 일종의 보론에 해당하는 이 부분의 논의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명칭이다.] 자연학 소론공리 1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변용되는 모든 방식은 변용된 물체의 본성과 동시에 변용하는 물체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온다.”[“Omnes modi, quibus corpus aliquod ab alio afficitur corpore, ex natura corporis affecti et simul ex natura corporis afficientis sequuntur.”] 여기서 내가 변용되는변용하는이라고 번역한 라틴어 동사의 원형은 아피키오afficio(또는 아피케레afficere). 이 동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하다또는 신체나 정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쳐 이러저러한 상태에 이르게 만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는 주로 후자의 뜻으로 이 동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2부에서는 물체들이나 물체-신체 간의 물리적 작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고, 3부 이하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어떤 대상에 의해 심리적으로 특히 정서적으로 변화되는 작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afficio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가 바로 affectio.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에서는 이 단어를 주로 양태와 동의어로 사용하데, 2부에서는 물체나 신체 사이의 물리적 작용 및 그것이 남긴 흔적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따라서 들뢰즈가 인용문에서 언급하는 affectio는 물체와 물체 또는 물체와 신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작용을 가리키는 용어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그러면 손이 시리고 내 살갗에 좁쌀 모양의 도톨도톨한 소름이 돋고 입에서는 입김이 난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affectio. 또한 이런 예를 생각해보자. 조용한 독서실에서 갑자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래 소리가 나의 청각을 자극하면서 공부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고 나를 불쾌하게 만들어 누구야?”라고 말하게 만든다. 반면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강남스타일은 똑같이 나의 청각을 자극하지만, 나를 흥겹게 하면서 내가 몸을 꿈틀거리게 만든다. 이것도 역시 affectio. 그렇다면 이것을 정서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번역한 것처럼 변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들뢰즈 인용문에 나오는 정서라는 단어를 변용이라고 고쳐서 읽어보라. 훨씬 더 내용 이해가 잘 될 것이다.

 

4. affectus

 

위의 인용문에서 조강석은 affect정동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한 정서로부터 다른 정서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정서를 변용이라고 고쳐 쓰면, “한 변용에서 다른 변용으로의 이행과 변이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affect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 들뢰즈 강의록의 논지와 부합하는 것이다. 실로 들뢰즈는 affection, 곧 변용은 신체의 상태를 가리키는 반면 affect연속적인 변이”, 곧 행위 역량의 증대나 감소를 나타내는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affect 또는 라틴어로 하면 affectus의 정확한 의미를 해명하는 것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6) 7장을 참조.] 하지만 초보적인 논의의 차원에서 본다면 들뢰즈의 규정은 통찰력이 있고 유용한 규정이다. 문제는, 행위 역량의 증대나 감소를 나타내는 affect정동이라는 낯선 용어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정서또는 감정이라는 흔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간단하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가 affectus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마지막에 일종의 부록을 제시하고 있다. 이 부록에서 스피노자는 자신이 3부에서 논의했던 정서들을 모두 열거하면서 각각의 정서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때로는 그 정의에 대한 보충 설명을 붙이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affectus는 바로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미움, 좋아함, 싫어함, 희망, 공포, 안도감, 낙담, 만족, 실망, 연민, 호감, 분개, 비하, 시기심, 동정심, 자족감, 자괴감, 후회, 자만, 자기비하, 자부심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정서 내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아닌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슬픔, 미움, 싫어함, 공포, 낙담, 실망, 분개, 비하, 자괴감, 후회 같은 정서는 우리의 행위 역량을 감소시키는 정서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정서를 겪을 때, 또는 이러한 정서들로 변용될 때 우리의 행위 역량은 감소하고 우리의 수동성은 더욱 강화된다. 반면 기쁨, 사랑, 좋아함, 희망, 안도감, 만족, 호감, 자족감 같은 정서는 우리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는 정서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정서들로 변용될 때 우리는 여전히 수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행위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영양분이 좋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기쁨과 사랑, 만족 같은 정서로 변용되면서 우리의 행위 역량이 증대함을 느낀다. 반면 불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할 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수밖에 없을 때, 불쾌한 소음에 시달릴 때, 매연과 황사, 먼지로 뒤덮인 거리에서 장시간 일을 해야 할 때,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겨우 끼니를 때워야 할 때 우리는 슬픔과 미움, 분노, 낙담, 자괴감 등으로 변용되며, 우리가 무력해지고 나약해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에게 정동이라는 낯선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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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2016-04-0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갑자기 `정동`이라는 말들이 쓰이기 시작해서 안그래도 궁긍했습니다.
전 저만 무식한 줄 알았는데....

balmas 2016-04-02 21:26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대로 그게 ˝정동˝이라는 말의 가장 불쾌한 정치적 효과 중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언중을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또는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리는 ...

음... 2016-04-04 17: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성급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원고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원고 게재를 철회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1). 정동이란 말은 정신분석학 관련 문헌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이나 스피노자의 용례를 들어 이 개념의 사용을 비판하고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은 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2). 감정, 정서, 정동... 이런 개념들은, 여전히 애매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구별가능한 개념들입니다. 자극자가 나의 신체에 일으킨 변용이 감정입니다. 나의 정신에 의해 파악된 감정이 곧 정서입니다. 정동은 좀 더 복합적인 현상을 포착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우울이나 불안 같은 것. 거의 준-실체적인 것. 정동을 무의식과의 관련 하에서, 혹은 신경 생리학적으로 특수한 기제와의 관련 하에서, 혹은 죽음에의 존재라는 식으로 철학적 장치를 통해 이해하려는 노력들은 정동이 정서와 전적으로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정동은 정서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겠지요. 그런데 발마스님이 이런 입장이신가요?

3).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다시 바라보시지요.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는 코나투스와의 관련 하에서, 역량의 증대와 감소라는 동적인 측면을 포착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말한 정동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부록에 잔뜩 나열된 항목들을 다시 살펴보세요.

4). 그렇다면 정서를 봉인으로, 정동을 이행으로 규정한 것은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에티카 본문은 발마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문제는 위에 인용하신 학자들이 그런 초보적인 이해도 하지 못한 바보들이라고 예단을 할 것인가, 아니면 창조적 오독의 가능성을 열어 둘 것인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무조건 후자를 먼저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야 토론이 생산적이 되고 독자나 청중은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balmas 2016-04-04 20:30   좋아요 2 | URL
반론할 게 있으시면 여기 댓글 달지 마시고 [현대시학]에 기고를 하세요. [현대시학]에서도 환영을 할 겁니다.

저야 어차피 앞으로 이 주제에 관해 더 글을 쓸 생각이니까, 반론을 해주시면 저도 기꺼이 답론을 드리죠.

[현대시학]이 아니라 다른 매체에 기고하실 거라면 저에게도 알려주세요. 꼭 답론을 드리겠습니다.

ㅈㅈ 2016-05-0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성급한 비판˝ ㅎㅎ
`무사`들과 달리 `문사`들의 싸움에 진정성과 삼가는 마음이 없어 보이는 것은
칼은 상대를 벨 수 있지만 말은 아무리 베어도 베어지지 않기 때문일까요.
문사의 폐습 중 하나는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며 혹은 모른 채 아무에게나 칼을 겨누고,
수십 번 베이고도 이겼다는 착각 속에(정신 승리!ㅎ) 서서히 경화되어/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음... 님의 반론을 보면 이제 갓 호구를 입은 이가 무게도 감당 못할 진검을 들고 허우적 대는 모습이 연상되네요.
발마스님이 응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칼/말을 섞을 마음 자체가 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발마스님과 음...님이 진검으로 승부하는 무사들이었다면, 그리고 발마스님이 맞상대를 해주었다면,
음...님은 이미 형체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겠지만요.

glamorlee 2017-05-3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쭤보려고 이렇게 댓글을 답니다.

제가 얼마전에 바흐찐의 <예술과 책임>, 뿔에서 출판된 책을 읽었는데요,
두 번째 챕터인 <행위철학>에서 ‘정동 의지적 태도‘라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정동에 대해서 조금, 알아봤어요. 하지만 제가 식견이 짧아서 그런지,
제가 이해한 바흐찐의 ‘정동 의지적 태도‘와는 좀 다른 것 같았어요.

책 뒤편의 편집부로 전화를 해보니, 이미 없는 번호라.. 왜 ‘정동 의지적 태도‘로 번역을 한 건지..
바흐찐이 정말 한국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 ‘정동‘이라는 개념으로 쓴 건지 궁금한데요 ㅠㅠ
(제가 생각하기엔 전혀 아닌 것 같아서요...)

혹시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balmas 2017-06-01 00:48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제가 여러 곳에서 질문을 많이 받네요.^^ 아무튼 질문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바흐친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질문에 답변드리려면 책을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도서관에 가기가 어려우니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양해해주세요.

다음 주 월요일쯤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glamorlee 2017-06-0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책을 직접 확인해보시고, 답을 달아주실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햇어요.

선생님께 수고를 끼쳐드린 것 같아 죄송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더 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balmas 2017-06-05 14:51   좋아요 1 | URL
제가 바흐친 책을 찾아보니까 국역본 [예술과 책임] 2부에 해당하는 <행위철학> 77쪽 이하에서 ˝정동-의지적 어조˝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되고 있네요. 바흐친 글의 영역본인 M. M. Bakhtin, Toward a philosophy of the act, University of Texas Press, 1993의 해당 페이지수는 pp. 33 이하인데, 여기에서 ˝정동-의지적 어조˝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은 ˝an emotional-volitional tone˝입니다. 따라서 번역자는 영어의 emotion을 ˝정동˝이라고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바흐친의 이 글에서 이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분들은 영어의 affect를 <정동>으로 번역하는 만큼, 바흐친 번역자는 <정동>이라는 용어를 약간 다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glamorlee 2017-06-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를 정도로요, 영역본 표현까지 함께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ㅠㅠ 바흐찐이 의미한, 정동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그 의미를 고찰해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

황봉구 2018-10-09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작년 공부모임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들었던 황봉구입니다. 지금 모임에 나가지 않고 남해에 계속 머물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을의 민주주의는 아직 독파하지를 못했습니다. 워낙 현실정치와 사회학 등에서 아웃사이더로 살다보니 선생님의 세계로 선듯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 같습니다. 선생님이 스스로 지적한 대로 ‘추상적 보편주의‘에 빠져 있거나 그저 예술을 빙자한 탐미세계에만 몰두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평론가 한 분을 만났는데, 스피노자의 정동에 관해 자꾸 이야기하길래, 그게 무엇인가 찾아보다 선생님 블로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번역본으로 읽기는 했지만 원문의 하나의 개념어가 그렇게 우리 문학계에 영향을 주는지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정동이라는 단어는 무척 낯이 섭니다. 책을 그래도 많이 읽은 축에 속하는데도 그렇습니다. 현재의 시류가 생산한 새로운 개념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과거부터 사용되어온 것, 번역된 것, 외국철학자들이 또 재해석한 개념이라는 사실에 그만 할 말을 잃었습니다. 무식을 탓할 수 밖에요.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들뢰즈나 서양철학자들은 자기들의 전통에 입각하여, 자기들이 그 어감을 예리하게 파악할 정도의 자국어를 바탕으로, 과거의 단어나 개념어를 분석하거나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거나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려고 하니 너무 힘이 들고 갖가지 오해와 억측이 빚어집니다. 마치 새로운 개념어를 사용해야만 어떤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나아가서 현재의 우리 상황을 이러한 개념어들이 잘 분석해주리라 믿고 있는 거 같습니다. 하나의 개념에는 반드시 이를 뒷받침하는 거대한 체계가 먼저 자리잡고 있습니다. 단편적인 것만을 취해 우리의 것에 대입하려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굳이 정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스스로 하나의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고 별도의 새로운 개념어를 창출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철학은 개념어의 창출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뒤를 따라가야먄 하겠습니까. 우리의 근대화과정, 지난 백년간의 과정은 정말로 이러한 따라가기의 연속입니다. 따라가고 배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게 전부인 것처럼 스스로 제한되고 규정짓는 것은 벗어나야 합니다. 우주에서 새로움은 무한입니다. 열려 있습니다.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바라보기만 하면 엄청나게 새로운 것들이 스스로 활짝 걸어나올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언어로 기술하기만 하면 됩니다. 정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선생님에게 나는 한표를 던집니다.

balmas 2018-10-09 19:39   좋아요 0 | URL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블로그까지 찾아와주시고, 직접 댓글로 귀중한 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말씀 하나하나 모두 깊이 동의합니다. 선생님 스스로 오랫동안 깊은 사유를 펼치고 끈기 있는 지적 노력을 수행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좋은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전출처 : balmas님의 "에티엔 발리바르에 관한 인터뷰"

예 제가 4월 8일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 주 뒤로 연기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의 시작 날짜는 4월 15일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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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 2016-03-2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러셨군요
4월 8일에 가서 허탕 칠뻔했네요 ㅋㅋㅋ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전에 수유너머N에서 오는 4월 15일부터 진행될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좌 소개글을 올렸는데, 


강사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서면 인터뷰를 했습니다. 


앞으로 수유너머N 홈페이지에도 게재가 될 예정인데, 여기에도 참고 자료 삼아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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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사 인터뷰 질문>



1. 강의의 부제가 “대중, 민주주의, 반폭력” 입니다. 이 주제들을 부제로 삼으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세 가지 단어는 제가 보기에 1980년대 이후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을 선별해본 것입니다. 


“대중”이라는 주제는 한편으로는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재해석과 관련되어 있고(네그리와 더불어 스피노자 철학에서 다중(multitudo)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밝혀 준 연구자가 발리바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정치의 주체로 간주된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 행위자, 가령 인종, 민족 내지 국민 같은 행위자를 사고하기 위한 준거의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환원 불가능한 복합성을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주제 역시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주제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주제는 겉보기에는 진부한 주제 같지만, 사실 국내에 널리 소개된 유럽 사상가들 중에서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론가는 별로 없습니다. 아마 자크 랑시에르 정도가 민주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주목할 만한 철학자이고, 바디우가 됐든 지젝이나 네그리, 아감벤이 됐든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은 그가 “평등자유명제”라고 부르는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한편으로 계급 관계에 기초를 둔 맑스주의 정치학과 다른 한편으로 흔히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18세기 프랑스혁명 및 미국 독립혁명에 토대를 둔 근대 민주주의의 유산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발로입니다. 과거에 맑스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계급 착취의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했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자들은 맑스주의 정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전체주의 정치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역사적 맑스주의가 종언을 고함으로써 오늘날 이러한 논쟁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또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승리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그 대안적인 체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개 ‘진보적인’ 학자들이 내놓는 답변은 북유럽식 복지국가입니다. 복지국가가 중요한 역사적 업적이기는 하지만, 발리바르는 국민국가의 역사적 성취로서 복지국가 또는 그의 용어법대로 하면 국민-사회국가 내지 사회적 국민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좀 더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반폭력”은 지난 19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정치철학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반폭력은 폭력 일반에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극단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폭력의 극단적 형태들에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극단적 폭력은 사람들을 일회용 상품으로 만드는 폭력이면서 자신들과 다른 타자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배척하는 폭력이기도 합니다. 발리바르는 극단적 폭력은 정치적 주체성을 잠식하는 폭력이기 때문에 특히 위험하고 심각한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에 맞서 정치적인 것을 보존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을 표현하는 것이 반폭력이라는 개념입니다.



2. 발리바르는 80년대 PD의 사상적 준거였다고 하셨는데, 2016년의 우리에게 발리바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에티엔 발리바르는 오늘날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1) 제가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황해문화] 2014년 봄호)에서 말한 바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각광받는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 안토니오 네그리, 또는 어느 정도는 자크 랑시에르 같은 이론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깥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바깥의 정치라고 부르는 사상은 현대 정치의 대표적인 모델로 간주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라고 간주하며, 따라서 인민의 권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 중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첫째, 우선 바깥의 정치의 사상가들처럼 반동적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와 거기에서 벗어나는 해방적인 정치 체제를 전면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명쾌하고 선명해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는 정치체의 역사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둘째, 더 심각한 것은 이런 관점은 역설적이게도 제도적인 민주주의 정치가 지배의 체제로 기능하는 것을 이론적ㆍ실천적으로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바깥의 정치에서 주장하듯이 제도적인 정치가 본성상 지배의 체제라면,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는 그 바깥에서 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제도적인 정치 자체를 내부에서 개조하는 일은 헛수고에 불과하거나 사소한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제도적인 정치 내부에서 어떠한 퇴락이나 퇴행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비판하거나 제어하는 것 또는 그것을 개혁하는 것은 어렵게 됩니다. 제도적인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배자들로서는 오히려 환영할 만한 관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반면 발리바르는 바깥의 정치 사상가들처럼 제도적인 정치 바깥에서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찾지 않으며, 최장집 교수처럼 제도적인 정치(특히 정당정치)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이라고 강변하면서 운동을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바깥의 정치와 제도 정치 사이의 변증법에 주목합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근대 민주주의는 1789년의 프랑스혁명과 같은 봉기적인 사건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제도적 민주주의의 퇴락과 보수화 경향에 맞서 그 생명력을 유지ㆍ강화시켜 주는 것 역시 시민들의 봉기적인 투쟁입니다. 하지만 봉기가 일회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강한 의미에서 제도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봉기와 제도의 변증법 속에서 자신의 민주주의론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2)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어 있는 동시대의 많은 유럽 사상가들에게 특징적인 점은 매우 환원적인 사상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한 바깥의 정치를 주창하는 이론가들이나 특히 제가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가들이라고 부른 바디우, 지젝, 아감벤은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사상가들입니다. 가령 아감벤에게서 정치의 문제는 주권과 생명의 문제로 환원되고, 지젝은 고전적인 혁명론을 실재의 차원에서 되풀이하고 있으며, 바디우나 네그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대로 이론화한 공산주의야말로 진정한 정치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제가 5강에서 다루겠지만, 발리바르는 근대 시민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해방(emancipation) 개념, 맑스주의와 푸코 정치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혁(transformation) 개념, 그리고 반폭력의 정치의 요체를 이루는 시민다움(civility) 개념 같이 적어도 세 가지 개념을 통해 정치의 복합적인 다면적인 측면을 파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맑스주의적인 변혁의 정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근대 시민혁명에서 유래한 민주주의의 이상과 연결하려는 시도이며, 또한 두 가지 정치만으로는 제대로 개념화할 수 없는 폭력의 문제를 시민다움 개념으로 사고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처럼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한 가지 개념이나 관점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시도에 그칠 수 있으며, 더욱이 체제 전체를 단숨에 뒤집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중 매체의 관심을 끌기는 좋겠지만, 의미 있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구체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활동가나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복지국가론이나 제도적 민주주의론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제도권 정당 활동에 투신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이런 연구나 활동이 나름대로 중요성을 지닌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발리바르의 작업은 바깥의 정치냐 제도 정치냐, 정당이냐 운동이냐, 대항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불모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3.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라든지, “시민다움”과 같은 개념들은 계몽적인 느낌이 나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좌파지식인이 이런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은 사실 한편으로 맑스주의적인 정치학과 다른 한편으로 18세기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에서 표출된 근대 시민혁명 또는 부르주아 혁명의 유산을 함께 사고하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등자유명제”라는 것 자체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발표되었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재해석에서 도출된 명제입니다. 보통 맑스주의자들은 계급적 관점에서 근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또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주창하곤 했습니다. 「인권선언」에서 제시된 인간의 권리나 시민의 권리 같은 것은 이미 낡았을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제한적인 민주주의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맑스주의적인 민주주의론은 숱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제대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자유주의적인 비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곧 당의 독재에 대한 옹호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또한 최근 국내에 번역된 [불화: 정치와 철학]에서 랑시에르는 맑스주의적 정치학을 메타정치라고 규정하면서 그 한계를 고발한 바 있습니다.


발리바르의 경우는 맑스주의에 대하여 자유주의적인 의미의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보충하거나 접합하기보다는, 민주주의 개념 그 자체를 다시 사고해보기 위해 1789년 발표된 「인권선언」 텍스트로 되돌아가 이 텍스트에서 “평등자유명제”를 추출해냅니다. 이 명제의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였던 클로드 르포르의 작업이 꽤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르포르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구별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본질을 새롭게 사고하려고 시도한 바 있습니다. 프랑스어에서 정치를 가리키는 단어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이며, 르 폴리티크(le politique)는 원래 ‘정치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 르포르는 경제나 사회, 문화와 구별되는 인간 활동의 한 영역을 지칭하는 정치와 구별되는 좀더 근원적인 차원, 곧 어떤 사회를 하나의 사회로 성립하게 해주는 상징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로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개념을 정의합니다. 특히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 근대성 및 그것을 창설한 프랑스혁명의 새로움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고안되었습니다(L’invention démocratique, Fayard, 1981; Essais sur le politique, Seuil, 1994).


그에게 근대 민주주의 체제가 이전의 체제와 다른 점은, 예전에 왕으로 대표되던 주권자의 자리, 곧 “권력의 자리”를 “빈 장소”로 비워놓았다는 점입니다. 이 자리는 상이한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영원히 차지할 수는 없으며, 그 자리의 점유자는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교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전체주의 체제는 총통이나 수령, 당의 이름으로 비어 있는 그 자리를 (영속적으로) 메우려고 했으며, 이것이 두 체제를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점입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반(反)전체주의로 규정하고 주기적인 선거와 다당제를 그것의 핵심 특징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르포르 정치학은 일면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닙니다. 하지만 르포르가 르포르가 상징적 통일성과 현실적인 분열 사이의 괴리를 가리키는 ‘빈 장소’를 강조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인권선언」에서 표방된 권리가 제도화된 법적 틀을 넘어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은 법적ㆍ제도적인 틀을 기초 지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틀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권리의 창조를 촉발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봉기적 원천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로 재해석하려는 것이 바로 근대 민주주의의 이러한 봉기적 특성입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자유민주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제도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시민다움’(civility)이라는 개념은 반폭력의 정치를 사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약간 곤혹스러운 측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어의 civilité나 영어의 civility에는 우리말로 하면 ‘공중도덕’ ‘사회적 예법’ 같은 의미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나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거리에 침을 뱉지 않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 등이 civilité나 civility의 일상적 용법일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데, 문제는 이처럼 공중도덕이나 사회적 예절을 강조하는 것이 쉽게 치안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동원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2005년 프랑스의 방리유 소요를 촉발했던 계기 중 하나도 당시 프랑스 내무장관이었던 사르코지가 내걸었던 ‘엥시빌리테(incivilité)와의 투쟁’, 곧 사회 질서나 공중 예절을 어지럽히는 무뢰배들(주로 이주자들)과의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시빌리테 또는 시빌리티라는 용어에서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적인 유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탈리아어인 키빌리타civilità라는 용어가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빌리테의 더 직접적인 이론적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키아벨리 시대에 ‘시민적인 것’(시민적인 업무/활동)과 ‘시민적인 삶의 양식’을 가리키던 이 개념은 발리바르의 시빌리테라는 개념이 목표로 삼는 것을 잘 드러내줍니다. 시빌리테라는 개념은 단순한 사회적 예절이나 공중도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극단적 폭력으로 인해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시민적인 것, 곧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역을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 특히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민들 자신의 윤리적 노력과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시빌리테라는 개념은 시민권 내지 시민성(citoyenneté/citizenship)이라는 개념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들이 계몽적인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습니다. 발리바르는 이 개념들을 군주정이나 봉건 질서에 맞선 근대 초기의 시민들의 투쟁이나 시민혁명 그리고 그에 대한 이론적 성찰에서 이끌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은 ‘새로운 계몽주의’를 추구하려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단, ‘새로운 계몽주의’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두 가지 점만 간략하게 지적해보겠습니다.


말년에 푸코가 관심을 기울인 텍스트는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 대해 강의도 하고 또 같은 제목의 논문도 발표하면서 푸코가 강조한 점 중 하나는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이라는 다양한 뜻을 갖는 minorité/minority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벗어날 것인가가 계몽주의의 핵심 주제였으며, 푸코 자신의 ‘역사적 존재론’의 화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는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에서도 중요한 문제였고, 랑시에르도 매우 강조하는 논점이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방이란 소수파/약소자/미성년(minorité)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소수파/약소자/미성년에서 탈출할 수 없다. 노동자들을 해방하는 것은 노동을 새로운 사회의 정초 원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소수파/약소자/미성년의 상태에서 탈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자, 그들이 정말 사회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고, 그들이 정말 공통 공간 속에서 모두와 소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도래할 사회를 지배할 대항-권력을 정초하는 것보다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그것은 또한 공동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중요하다. 스스로 해방된다는 것은 이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 세계를 함께-나누는 자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 비록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리가 상대와 같은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93쪽)


어떻게 노동자 또는 대중 또는 민중 또는 을(乙)들이 소수파와 약소자 또는 정치적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는, 18-19세기에만 중요했던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제일 간절한 질문입니다. 헬조선, 망한민국, 금수저, 흙수저라는 혐오 담론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 담론들이 증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약소자들, 소수파들, 정치적 미성년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로 이것이, 다시 말해 민중, 다중을 약소자들/소수파들/미성년들의 다수로 또는 을들의 다수로 만드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효과입니다. 이 문제를 중요한 정치적 질문으로 간주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계몽주의입니다.


둘째,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약소자/소수파/미성년 또는 을이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간단한 숫자로 드러납니다. 몇 년 전 뉴욕에서 벌어졌던 오퀴파이 운동의 구호는 “1 : 99”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숫자는 심각한 착각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를 염두에 둔다면, 오히려 더 현실성 있는 숫자는 “51 : 48”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숫자는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50대 이상, 특히 60대 이상의 노년 유권자들은 박근혜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노년 유권자들 중 대다수는 우리가 방금 전에 약소자/소수파/미성년 또는 을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거공학적인 숫자놀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매우 새로우면서도 심각한 현상입니다. 저는 이것도 역시 새로운 계몽주의가 화두로 삼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4. “평등자유명제”가 궁금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이 생기는데 “자유”와 “평등”을 한꺼번에 말할 수 있다는 건가요?


“평등자유명제”(proposition of the equaliberty)는 2010년 발리바르가 프랑스어로 출간한 책 제목이면서, 그가 1989년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제목에서 흥미로운 표현은 “평등자유”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프랑스어로 하면 l'égaliberté이고 영어로 하면 equaliberty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것은 ‘평등’을 뜻하는 égalité/equality와 ‘자유’를 뜻하는 liberté/liberty를 합쳐서 만든 합성어입니다.


발리바르가 이렇게 두 개의 단어를 합쳐서 합성어를 만든 첫 번째 이유는 평등과 자유라는 것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본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바로 프랑스혁명 및 「인권선언」의 철학적ㆍ정치적 핵심을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평등과 자유를 정치의 핵심적인 원리이지만 또한 서로 상반된 또는 적어도 매우 상이한 지향을 갖는 원리라고 간주합니다. 평등을 추구할 경우 자유가 침해되거나 약화되고 반면 자유를 추구할 경우 평등이 위태로워지거나 훼손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발리바르가 ‘평등자유’, 곧 평등=자유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평등이 반박되고 부정당하는 역사적 상황은 자유가 반박되고 부정되는 역사적 상황과 정확히 같다는 사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즉 폐지하지 않으면서—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둘째, 중요한 것은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자유,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을 구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어떤 것인지 묻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유가 평등이 아니라면, 곧 자유가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성립하는 자유라면, 그때 자유는 우월성이나 특권의 표현(강자의 자유, 귀족의 자유 등)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보다 우월한 어떤 힘이나 세력에 복종할 수 있는 ‘자유’(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가 평등과 분리되어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평등과 결합되고, 그것과 동일화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평등은 “모든 예속과 지배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일반 형식으로, 곧 자유 그 자체의 자유화/해방(libération)으로 사고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불평등한 상태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고, 또한 자유롭지 않은 가운데 진정으로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이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를 통해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추출해낸 명제입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평등자유명제를 「인권선언」의 이론적 핵심으로 제시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근대 정치, 근대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선언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억압받고 착취 받고 차별 받는 피지배자들, 을들의 해방은 을들 스스로 쟁취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근대 정치는 더 이상 신과 같은 초월적 원칙이나 본성이나 혈통 같은 자연적 원칙에도 근거하지 않고, 시민들 자신의 상호 이익 내지 호혜성을 위한 결사체라는 데 자신의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끝으로 발리바르를 처음 읽는 수강생들이 미리 읽었으면 좋을 만한 책을 1~2권 소개해 주시죠.   


제가 권하고 싶은 책은 우선 제가 번역한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책에 비하면 분량도 많지 않고, 문체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편입니다. 특히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같은 글은 1990년대 발리바르가 고민했던 민주주의의 핵심 쟁점을 아주 구체적이면서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글입니다. 


두 번째로 권하고 싶은 책은 [스피노자와 정치]라는 책입니다. 특히 1부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1부는 원래 프랑스에서 문고판 단행본 저작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정치학에 관한 가장 탁월한 입문서로 평가받고 있는 책입니다.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려는 독자나 발리바르 정치철학에서 스피노자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려는 독자 모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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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2016-03-2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모호했던 발리바르에 대해 적확한 해설 감사합니다. 주말 오전부터 너무 좋은 글을 봤습니다.

balmas 2016-03-26 16:32   좋아요 0 | URL
ㅎㅎ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습니다.

촛불승 2016-03-2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아주 유용하게 잘 정리된것 같습니다. 강의 듣고 싶지만 너무 멀어서... 녹음 파일이라도 있으면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듯합니다만... 오늘 문득 보니 책장에 오래 전부터 꽂혀있는 <EQUALIBERTY>가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아 보입니다. 갈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항상 선생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balmas 2016-03-27 23:18   좋아요 0 | URL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나중에 영상이나 녹음으로 기록할 기회도 있겠지요. :)

궁금 2016-03-2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강의 일정이 바뀌었나요.
밑에는 4월 8일로 되있었는데
위에서는 15일이라고 하셔서요.
15일이 맞는 건가요?

balmas 2016-03-27 23:19   좋아요 0 | URL
예 제가 4월 8일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 주 뒤로 연기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강의 시작 날짜는 4월 15일이 맞습니다.
 

오랜만에 강좌 안내를 하나 합니다. 


오는 4월 8일부터 수유너머 N에서 "대중, 민주주의, 반폭력-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이라는 제목으로 


6강짜리 강좌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주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nomadist.org/xe/lecture/2415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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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라인 2016-03-19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온라인 강의는 안하시나요
꼭 듣고싶은데 상황이 안돠서요
아트 앤 스터디 보면 온라인 옾라인 같이 운영되는 강좌도 있던데....
온라인 운영도 해주시면 안되나요?!

데리다 강의 2016-03-19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문 TV에서 선생님 데리다 강의 들었는데 좋더라구요
반복해서 들을 수 았어 어려운 개념 파악도 되고요
발리바르도 그렇게 반복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balmas 2016-03-19 16:01   좋아요 0 | URL
예 그러시군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번 수유너머N 강의는, 따로 동영상 녹화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발리바르 강의도 온라인으로 해보겠습니다. :)

2016-03-22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6-03-22 23:05   좋아요 0 | URL
예 안녕하세요?

그러시면 아래의 책이 입문서로서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872793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이라는 네 인물을 중심으로 구조주의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또한 창비에서 나온 [현대프랑스철학사] 중에서 2부 ˝구조주의˝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6869161

nicky 2016-03-23 11:14   좋아요 0 | URL
선생님 책 추천 감사합니다. 열심히 읽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
 

캐나다의 젊은 총리가 20여 년만에 미국을 방문했다고 하는데요, 


오늘 뉴스를 보니까 다음과 같은 발언이 영상으로 나오네요. 


인상적인 발언입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60311210013741&RIGHT_COMM=R4


"우리는 피부색과 언어, 종교, 배경이 아니라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희망, 포부가 있는지로 캐나다 국민임(Canadian)을 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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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따 2016-03-12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외모만 출중한게 아니네요
우리는 언재쯤....저런 지도자가 나올래나

balmas 2016-03-12 11:55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그렇습니다. 단편적인 발언 하나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저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를 갖는다는 건

부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