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알튀세르에 관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트위터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하다가, 이런 문구에 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서
페이퍼로 한 마디 적어둔다.
"알튀세르는 생애의 끝에 가서야 마키아벨리와 여타 서구 철학의 고전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 마르크스의 저작도 일부만 불충분하게 알고 있었다고 인정한다(혹자는 알튀세르의 출판된 저작에서 이 점을 추단했을지도 모른다).
https://twitter.com/jeongtaeroh/status/647449425959235584
내가 SNS를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SNS 상에 이런 류의 저질스러운 문구들이 넘쳐나기 때문인데,
이 문구를 작성한 사람은 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번역하고 있는 책 중에 알튀세르가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55년부터 1970년대까지 했던
강의들을 묶은 정치철학 강의록이 있다. 사실 이미 몇 년 전에 출판이 되었어야 하는 책인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늦어져서 출판사에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의 목차만 훑어봐도 트위터에 있는 저 문구가 얼마나 어이 없는 주장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아래 내용이 책의 제목과 목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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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편집자 서론
차례
1부. 역사철학의 문제들(1955~56)
1장. 17세기의 네 가지 기본 사조
A.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B. 실천적 비관주의
C. 종교적 논쟁들
D. 정치적, 법적, 경제적 논쟁들
2장. 18세기
A. 몽테스키외
B. 볼테르
C. 콩도르세
D. 엘베시위스
E. 루소
3장. 헤겔
A. 역사의 상이한 형태들
B. 역사와 철학
C. 역사의 본질
D. 정신의 수단들
E. 정신의 실존: 국가
F. 역사의 동력
4장. 마르크스의 청년기 저술에서 역사의 문제설정
A. 국가 = 헤겔적인 의미에서 실현된 이념
B. 포이어바흐의 영향
C. 마르크스의 확정적인 관점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
단상.
혁명가 엘베시위스 (1962)
2부. 마키아벨리 (1962)
1장. 출발점: 공국들에 대한 개관
2장. 군대와 정치
3장. 통치의 방법들
4장. 포르트나와 비르투: 하나의 행위 이론?
결론
단상들
3부. 루소와 그의 선구들. 17-18세기 정치철학 (1965-66)
1장. 17-18세기 정치적 문제설정의 기본 개념들
2장. 홉스 [시민론]
A. 자연 상태
B. 자연법
C. 사회 상태
3장. 로크
A. 자연 상태
B. 사회 계약과 시민 사회 및 정치 사회
4장. 루소와 [인간불평등기원론]의 문제설정
A.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루소의 위치
B. 순수한 자연 상태와 그 귀결들
C. “추측적 논법”과 원환들
D. 귀결들
E. 출발점: 순수한 자연 상태
F.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세계의 청년기로의 이행
루소의 두 번째 [논고]에서 세계의 청년기에서 사회 계약으로의 이행
루소에서 역사의 지위
5장. [사회계약론]
A. [사회계약론] 독해에 대하여
B. [사회계약론] 독서의 요소들
4부. 홉스 (1971-72)
1장. 서론
A. 홉스의 방법
B. 인간학
C. 권리
D. 인공물
2장. 홉스의 정치 이론
A. 자연 상태
B. 사회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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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이 강의록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빼어난 강의록인지는 읽어보기 전에는 이해를 못한다.
사실 고등사범학교 졸업생들에게 알튀세르의 강의는 전설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는데,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에 관해서는 더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목차에서 보듯 알튀세르의 강의는, 현재 남아 있는 강의 기록만으로 보더라도 1955-56년부터
"서구 철학의 고전"에 대한 강의로 가득 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알튀세르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고등사범학교 학생들이 치러야 하는 교수자격시험을 위한 강의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그레가시옹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교수자격시험에서는 서양 철학의 주요 고전들이 매해 시험 과제로
정해지고(가령 올해는 플라톤의 [국가]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작년에는 에피쿠로스의 [서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 이런 식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여두는데,
내가 예시한 게 작년과 올해 실제의 주제 텍스트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예시일 뿐이다),
고등사범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에서는
1년 동안 이 텍스트에 관한 강의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시험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강의를 고등사범학교에서 수십년 동안 한 사람이 알튀세르인데,
"생애의 끝에 가서야 마키아벨리와 여타 서구 철학의 고전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고???
아울러 "마르크스의 저작도 일부만 불충분하게 알고 있었다"는 저 문구의 기원이 어디인지
분명히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제목으로 번역된 알튀세르의 자서전이다.
알튀세르는 이 자서전에서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에 대한
자신이 지식이 보잘 것 없고 형편 없으며, 그 중 몇몇 사람에 대해서만 조금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위의 트위터의 저 문구는 알튀세르의 이런 '고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몇 년 전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썼던 것처럼
( http://blog.aladin.co.kr/balmas/2006069 )
알튀세르가 자서전에서 했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자서전 집필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생애의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부정하려는 정신병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글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그 자신(및 여러 분석가들)의 설명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 없이 다른 사람으로 살고 존재했다고 느꼈으며, “인위적으로, 그리고 속임수들을 통한(인위적인 것에서 속임수까지는 금방이다) 유혹의 기교들인 바로 그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뿐”(64)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사실상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은 인위적인 가짜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고통이야말로 평생 알튀세르의 무의식의 구조를 지배한 “정서적 감정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인 감정의 상태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낳았으며, 또 결국 엘렌느의 살해로 이어졌는가에 대한 해명의 시도다."
마르크스나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등에 관한 자신의 지식 및 자신의 이론적 업적을 폄훼하고 축소하려는
알튀세르의 발언은 바로 이러한 "자기 부정", "자기 파괴"의 정신적 욕망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스피노자에 대해, 마키아벨리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의 이론적 작업이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 판단하는 올바른 길은,
자기 파괴의 욕망에 입각해서 쓰인 자서전의 일부 문구를 특권화해서 재단하는 길이 아니라
그가 남긴 이론 저작을 실제로 읽어보는 길이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몇 년 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하나 소개해보겠다.
미국의 저명한 알튀세리언 중 한 사람인 워렌 몬탁이 알튀세르가 남긴 유고들
(이 유고는 프랑스 국립현대문서기록원(IMEC)에 기탁되어 있다) 을 검토하고서 발리바르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고 한다. 알튀세르가 고등사범학교 시절 스피노자에 관한 강의를 여러 차례 했다고 하는데,
강의록이 없어서 꽤 실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원고 꾸러미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책 분량으로 몇 백 페이지 쯤 되는 이 원고는 스피노자 저작들에 나오는 라틴어 어휘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그 용례들을 기록해놓은 일종의 [스피노자 어휘사전]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도 없는 시절에 이런 식의 어휘 사전을 만들려면 텍스트를 얼마나 꼼꼼하게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그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한번도 자기가 스피노자를 잘 안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냥 좀 알고 있을 뿐이라고 언급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