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푸코, 랑시에르, 발리바르"

안녕하세요?
아주 흥미롭고 유익한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내용에 대해 저도 충분히 수긍하고 ˝품행˝이라는 번역이 갖는 장점에 대해서도 공감합니다.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conduct/conduite 개념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풍부하게 잘 설명해주셔서 저도
공부가 됐습니다.

다만 제가 각주에서 이 개념의 한국어 번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1) conduite라는 개념이 일종의 도덕적, 규범적 코드 속에서 이해되고 실행되는 행위 방식을 뜻한다는 점에서 보면 `품행`이라는 번역어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푸코가 이 개념을 [주체와 권력]을 비롯한 몇몇 텍스트에서 일반화하려고 할 때, 푸코는 이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떠나 조금 더 일반적인 행위이론 속에서 이 개념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제가 각주에서 이 용어의 번역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도 바로 [주체와 권력]이라는 텍스트를 인용하고 논의하는 맥락에서였습니다.

2) 제가 ˝일반적 행위이론˝이라고 한 것은 바로 <주체화>(subjectivation)의 문제설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1970년대 푸코가 시도한 계보학 작업에서 중심적인 개념 중 하나는 <예속화> 또는 <예속적 주체화>라고 번역할 수 있는 assujettissement(불어 발음대로 읽으면 `아쒸제띠스망` ) 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conduite 개념은 <예속적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할 때와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할 때 조금 상이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2-1)
<예속적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하게 되면, conduite/conduct는 바로 지배적인 규범, 도덕적 코드에 따라 규격화된 행위, 실천 등을 뜻하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보면 <품행>이라는 번역어가 잘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contre-conduite의 경우에는 이러한 <품행>에 전제되어 있는 도덕적, 규범적 코드에 저항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가 되겠고, 따라서 <대항-품행>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할 듯합니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미셸 페쉬(Michel Pecheux)는 <자명한 진실>(1975)이라는 책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발전시키면서 <대항-정체화>(contre-identification)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바 있는데, <대항-품행>과 비슷한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반대로 <주체화>의 틀에서 이해할 경우, <품행>이나 <대항-품행> 같은 용어들은, 그것들이 기존의 도덕적, 규범적 체계에 대해 저항하고 반역한다고 해도,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러한 도덕적, 규범적 체계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구조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푸코가 1980년대 초에 [주체와 권력]을 비롯한 몇몇 텍스트에서 제안하려고 했던 것은, <예속적 주체화>의 틀 바깥에서 conduite/conduct와 sujet/subject를 사고하고 실행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페쉬의 경우에는 contre-identification과 구별되는 desidentification이나 desubjectivation 같은 개념으로 이런 길을 사고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바 있습니다.

3) 그런데 이렇게 볼 때 conduite/conduct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할까 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저 <품행>이라는 번역이 어떤 경우에는 푸코의 의도를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지만, <주체화>의 문제설정에서 볼 때에는 푸코의 conduite 개념의 함의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반면 <행위>라는 번역은 <품행>에 비해 conduite 개념에 더 넓은 여지를 마련해주기는 하지만, 막연하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말에서 <행위>, <행동>, <행태>, <활동>, <작용> 등은 개념적으로 아직 미분화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가 각주에서 지적한 것은 새로운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한 가지 문제제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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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Gray 2015-10-12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이렇게 단시간에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저는 푸코를 처음에는 근대에 대한 일반이론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사상사 관련 공부를 시작하면서 점차 그의 텍스트를 역사적 설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예속 및 저항에 관한 ˝일반행위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층위를 전제하니 특히나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난점을 마주치게 되는군요.

제가 선생님을 작은 문제로 지나치게 귀찮게 해드리는 게 아니라면, 추가적인 의문점을 적고 싶습니다. 이는 특히 (저로서는 몇몇 짧은 글을 제외하고는 한국어로 번역된 텍스트만 읽은) 80년대의 푸코와 ˝주체화˝의 문제가 언젠가는 좀 더 깊게 이해해보고 싶은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2에서 설명해주신 내용이 곧 사회적으로 이미 주어진 예속적 주체화를 ˝주체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푸코의 기획을 의미한다면, 저는 여기에 두 가지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1) ˝주체화˝는 기존의 체계 바깥에서 작동해야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바깥`이 없다는 전제 하에) 체계의 내부에서 주체화 양식의 재구축을 통해 작동할 수 있는 것인가? 2-2에서 해주신 설명에 따르면 후자는 대항-품행에 속하며 진정한 주체화는 전자에만 국한되는 것처럼 보이며, 적어도 <주체의 해석학>에서 탐구된 주체화 양식의 암묵적인 지향점 또한 (정신분석적 용어를 빌어오는 게 허용된다면) 대타자를 갖지 않는, 자기창조적인 주체화 과정의 탐색에 있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푸코가 ˝예속적 주체화˝를 벗어난 주체화 양식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가 기존의 사회적 체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으리라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물론 말년의 강의록들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갖는 오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주체와 권력>을 읽으면서, 푸코의 뉘앙스를 충분히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그것이 새로운 주체화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생님께서 ˝기존의 도덕적, 규범적 체계˝의 틀 바깥에서 가능한 주체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2) conduit 번역의 문제와도 희미하게 이어진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주체화의 가능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체화 과정을 구성하는 행위conduit 개념 자체에 어떤 도덕적인/윤리적인 속성이 함축되었는지의 여부를 질문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어떤 행위가 기존의 도덕적, 규범적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혹은 주체화 과정 자체가 어떤 규범적인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혹은 푸코가 여러 용어 중에서 conduit를 선택했을 때, 이러한 뉘앙스를 염두에 두었는가로 옮길 수도 있겠지요). 제 질문이 충분히 명확하지 못한 것 같아서 부연하자면, 예컨대 찰스 테일러와 같은 이가 인간의 자아self 혹은 자기이해에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수행하는 기제 자체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공부하신 입장에서 주어진 텍스트를 다 읽지 않고 성급하게 던지는 질문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알기에, 동시에 블로그에 적힌 것만으로도 선생님께서 얼마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지 짐작할 수 있기에 이런 질문을 추가로 제기하는 게 죄송스럽습니다^^;; 시간 나실 때 천천히, 간략하게 답변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balmas 2015-10-13 13:25   좋아요 0 | URL
첫번째 질문에 관해서는 ˝바깥˝이라는 통념의 애매성을 먼저 지적해야 할 듯합니다. 기존 체계의 ˝바깥˝이라고 할 때, 그 바깥은 공간적 바깥이나 제도적 바깥 또는 논리적 바깥, 메커니즘의 바깥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때의 ˝바깥˝은 ˝안˝이라는 것과 이항 대립적인 배타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바깥도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화 양식이 예속화 양식의 ˝바깥˝이라고 할 때는 기존에 작동하고 있는 예속화 양식의 공간적이거나 제도적 바깥이라는 점을 반드시 함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속화 양식의 제도적인 실현태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예속적 효과를 발휘하는지 구체적인 분석이 이루어진다면, 안과 밖이라는 다소 모호한 표현을 조금 더 분명히 규정하는 게 가능하겠죠.

두번째 질문의 경우, 아마도 새로운 주체화 양식 자체도 이미 어떤 규범적 틀이나 규칙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인 듯합니다. 그것은 그렇다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규범, 규범적인 것, 규범 체계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는 아니겠죠. 푸코는 어떤 경우에는 법칙이나 코드로 형태화된 규범 체계(도덕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주체화 양식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하고, 가톨릭의 고해성사에 기반을 둔 근대적 형태의 고백의 기술(정신분석을 포함하는)에 입각한 예속적 주체화 양식에서 탈피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도 합니다. 사실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윤리적 주체화 양식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은 이러한 근대적 주체화 양식의 한계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다른 식의 주체화 양식을 모색해볼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체화 양식이나 conduite 개념이 반규범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고, 또 그것이 푸코의 의도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푸코가 이 문제들에 대해 무언가 명확한 답변, 적어도 책을 출판할 수 있을 만큼의 답변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푸코의 말년의 강의록들은 이 문제들을 사고하고 새로운 이론화, 문제화 방식을 탐색하기 위한 역사적, 이론적 실험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강의록들에서 무엇을 이끌어내는가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린 일이겠죠.
 

오늘 알튀세르에 관해 검색하다가 우연히 트위터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려고 하다가, 이런 문구에 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서


페이퍼로 한 마디 적어둔다. 




"알튀세르는 생애의 끝에 가서야 마키아벨리와 여타 서구 철학의 고전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보이며, 심지어 마르크스의 저작도 일부만 불충분하게 알고 있었다고 인정한다(혹자는 알튀세르의 출판된 저작에서 이 점을 추단했을지도 모른다).


https://twitter.com/jeongtaeroh/status/647449425959235584



내가 SNS를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SNS 상에 이런 류의 저질스러운 문구들이 넘쳐나기 때문인데, 


이 문구를 작성한 사람은 무슨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번역하고 있는 책 중에 알튀세르가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1955년부터 1970년대까지 했던 


강의들을 묶은 정치철학 강의록이 있다. 사실 이미 몇 년 전에 출판이 되었어야 하는 책인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늦어져서 출판사에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의 목차만 훑어봐도 트위터에 있는 저 문구가 얼마나 어이 없는 주장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아래 내용이 책의 제목과 목차이다.


---------------------------------------------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까지

 

 

편집자 서론

 

 

차례

 

1부. 역사철학의 문제들(1955~56)

 

1장. 17세기의 네 가지 기본 사조

 

A.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B. 실천적 비관주의

C. 종교적 논쟁들

D. 정치적, 법적, 경제적 논쟁들

 

 

2장. 18세기

 

A. 몽테스키외

B. 볼테르

C. 콩도르세

D. 엘베시위스

E. 루소

 

 

3장. 헤겔

 

A. 역사의 상이한 형태들

B. 역사와 철학

C. 역사의 본질

D. 정신의 수단들

E. 정신의 실존: 국가

F. 역사의 동력

 

 

4장. 마르크스의 청년기 저술에서 역사의 문제설정

 

A. 국가 = 헤겔적인 의미에서 실현된 이념

B. 포이어바흐의 영향

C. 마르크스의 확정적인 관점에 대한 방법론적 성찰

 

 

단상.

 

혁명가 엘베시위스 (1962)

 

 

2부. 마키아벨리 (1962)

 

1장. 출발점: 공국들에 대한 개관

 

2장. 군대와 정치

 

3장. 통치의 방법들

 

4장. 포르트나와 비르투: 하나의 행위 이론?

 

결론

 

단상들

 

 

3부. 루소와 그의 선구들. 17-18세기 정치철학 (1965-66)

 

 

1장. 17-18세기 정치적 문제설정의 기본 개념들

 

2장. 홉스 [시민론]

 

A. 자연 상태

B. 자연법

C. 사회 상태

 

3장. 로크

 

A. 자연 상태

B. 사회 계약과 시민 사회 및 정치 사회

 

4장. 루소와 [인간불평등기원론]의 문제설정

 

A. 계몽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루소의 위치

B. 순수한 자연 상태와 그 귀결들

C. “추측적 논법”과 원환들

D. 귀결들

E. 출발점: 순수한 자연 상태

F. 순수한 자연 상태에서 세계의 청년기로의 이행

 

루소의 두 번째 [논고]에서 세계의 청년기에서 사회 계약으로의 이행

루소에서 역사의 지위

 

 

5장. [사회계약론]

 

A. [사회계약론] 독해에 대하여

B. [사회계약론] 독서의 요소들

 

 

4부. 홉스 (1971-72)

 

1장. 서론

 

A. 홉스의 방법

B. 인간학

C. 권리

D. 인공물

 

 

2장. 홉스의 정치 이론

 

A. 자연 상태

B. 사회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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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의 이 강의록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빼어난 강의록인지는 읽어보기 전에는 이해를 못한다. 


사실 고등사범학교 졸업생들에게 알튀세르의 강의는 전설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는데,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에 관해서는 더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목차에서 보듯 알튀세르의 강의는, 현재 남아 있는 강의 기록만으로 보더라도 1955-56년부터


"서구 철학의 고전"에 대한 강의로 가득 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알튀세르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고등사범학교 학생들이 치러야 하는 교수자격시험을 위한 강의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그레가시옹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교수자격시험에서는 서양 철학의 주요 고전들이 매해 시험 과제로 


정해지고(가령 올해는 플라톤의 [국가]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작년에는 에피쿠로스의 [서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 이런 식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여두는데, 


내가 예시한 게 작년과 올해 실제의 주제 텍스트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예시일 뿐이다), 


고등사범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에서는 


1년 동안 이 텍스트에 관한 강의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시험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강의를 고등사범학교에서 수십년 동안 한 사람이 알튀세르인데, 


"생애의 끝에 가서야 마키아벨리와 여타 서구 철학의 고전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고???



아울러 "마르크스의 저작도 일부만 불충분하게 알고 있었다"는 저 문구의 기원이 어디인지 


분명히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제목으로 번역된 알튀세르의 자서전이다. 


알튀세르는 이 자서전에서 마르크스만이 아니라 스피노자,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서양 철학자들에 대한 


자신이 지식이 보잘 것 없고 형편 없으며, 그 중 몇몇 사람에 대해서만 조금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위의 트위터의 저 문구는 알튀세르의 이런 '고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내가 몇 년 전에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썼던 것처럼


( http://blog.aladin.co.kr/balmas/2006069 )


알튀세르가 자서전에서 했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자서전 집필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생애의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부정하려는 정신병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글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그 자신(및 여러 분석가들)의 설명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 없이 다른 사람으로 살고 존재했다고 느꼈으며, “인위적으로, 그리고 속임수들을 통한(인위적인 것에서 속임수까지는 금방이다) 유혹의 기교들인 바로 그 인위적인 것들 속에서만 내가 존재할 뿐”(64)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사실상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은 인위적인 가짜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고통이야말로 평생 알튀세르의 무의식의 구조를 지배한 “정서적 감정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인 감정의 상태가 어떻게 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낳았으며, 또 결국 엘렌느의 살해로 이어졌는가에 대한 해명의 시도다."  


마르크스나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등에 관한 자신의 지식 및 자신의 이론적 업적을 폄훼하고 축소하려는 


알튀세르의 발언은 바로 이러한 "자기 부정", "자기 파괴"의 정신적 욕망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마르크스에 대해, 스피노자에 대해, 마키아벨리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의 이론적 작업이 얼마나 독창적이었는지 판단하는 올바른 길은, 


자기 파괴의 욕망에 입각해서 쓰인 자서전의 일부 문구를 특권화해서 재단하는 길이 아니라

 

그가 남긴 이론 저작을 실제로 읽어보는 길이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몇 년 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하나 소개해보겠다. 


미국의 저명한 알튀세리언 중 한 사람인 워렌 몬탁이 알튀세르가 남긴 유고들


(이 유고는 프랑스 국립현대문서기록원(IMEC)에 기탁되어 있다) 을 검토하고서 발리바르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다고 한다. 알튀세르가 고등사범학교 시절 스피노자에 관한 강의를 여러 차례 했다고 하는데, 


강의록이 없어서 꽤 실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원고 꾸러미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책 분량으로 몇 백 페이지 쯤 되는 이 원고는 스피노자 저작들에 나오는 라틴어 어휘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그 용례들을 기록해놓은 일종의 [스피노자 어휘사전]이라는 것이다. 



컴퓨터도 없는 시절에 이런 식의 어휘 사전을 만들려면 텍스트를 얼마나 꼼꼼하게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그것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한번도 자기가 스피노자를 잘 안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냥 좀 알고 있을 뿐이라고 언급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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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accarat
    from Baccarat 2023-09-15 15:25 
    알튀세르가 자본론을 반밖에 안 읽었다는 날조 - 독서 마이너 갤러리
 
 
mayham 2015-10-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인용하신 저 글은 토니 주트의 책 <재평가>의 한 구절입니다.

ㅁㅁㅁㅁ 2015-10-11 20:4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누가했든 부정확하고 수준 낮은 논평이지요.

balmas 2015-10-11 21:39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출처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말 그대로 부정확하고 수준 낮은 논평입니다.

mayham 2015-10-1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뭐 저는 토니 주트의 논평의 수준을 논할 정도는 아니고; 선생님께서 노정태씨가 한 말이라고 오해하신 것 같아서 알려드린 겁니다;;;

balmas 2015-10-12 01:5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제 말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노정태 씨가 누군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누가 이 말을 했느냐보다는 말 자체가 형편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rendevous 2015-12-17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열린연단에서 강의들었을 때 어떤 선생님이 가라타니 고진인가, 토니 주트가 알튀세르는 맑스를 읽지 않았다거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던 게 기억납니다. 알튀세르의 대표작이 <맑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임에도 불구하고...

balmas 2015-12-17 19:3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예전부터 보면 알튀세르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더군요. 토니 주트도 보니까 그런 부류 중 한 사람인 것 같고 ... 누구를 싫어하거나 혐오하게 되면 `이해`라는 것이 어려워지죠. 그런 사람이 좋은 연구자나 학자이기도 어렵겠죠.
 

한글날이 이제 막 하루가 지났지만, 그래도 한글날의 기운을 빌려서 한 마디 해보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오늘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된지도 모르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허탕을 친 후,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지나가는 길인데, 희한한 신조어가 적힌 학술 강연 안내문이 눈에 들어왔다. 


"제 7회 김준엽 렉처 ..."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소장과 총장을 역임한 사학자 김준엽 선생을 기념하는 강좌라는 뜻이겠는데, 


이게 언제부터 '렉처'로 표기되고 불리게 됐나 싶으면서도 ... 


곰곰히 생각해보니, '민족 고대'에서 '글로벌 KU' 로 구호가 바뀐지 10년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앞으로는 더 발전해서 아예 "Jun-Yeop Kim Lecture"로 표기해주면 그나마 민망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열어보니 알라딘 광고가 있는데,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with 10월 알라딘 굿즈"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굿즈"는 또 무슨 신조어인고, 하고 검색을 해보니 다음과 같은 친절한 설명이 나온다. 


https://namu.wiki/w/%EA%B5%BF%EC%A6%88


설명에 따르면 소설이나 만화, 영화, 게임에서 파생된 상품들을 통칭해서 '굿즈'라고 하는데(영어의 goods를 


발음나는 대로 표기한 셈이다), 이런 상품들을 굿즈라고 하는 것은 일본 외에는 딱히 없다고 한다. 


그리고 발음 표기 자체도 굿즈가 아니라 구즈가 맞다는 지적이다. 


이것도 영어 쓰는 김에 그냥 "알라딘 goods"라고 하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몇 년 전에는 '소구'라는 처음 들어본 단어가 종종 눈에 띄어서 페이퍼로 다룬 적이 있는데, 


(http://blog.aladin.co.kr/balmas/5395412)


소구, 소구력이라는 단어를 다시 검색해보니,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http://korean.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754561&ctg=


 


이 말들이 희한했던 이유는, 굳이 쓸 필요가 없는 말들, 더욱이 꽤 어색한 말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뭐 어색하지 않다면 할 수 없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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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신문 보다가 구구절절 공감이 되는 책에 대한 서평이 있어서 링크해둡니다. 


책 제목은 [미친 국어사전]. 


이 책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국어사전은 국립국어원에서 낸 [표준국어대사전]입니다. 


국립국어원이나 [표준국어대사전]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이 켜켜이 쌓여 있던 참에 


마침 시의적절한 책이 나왔고 또 적절한 서평 소개가 나왔네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121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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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전 2015-10-09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 밖에 안나오네요.

일본영화 <행복한 사전 만들기>(2013)가 생각나네요.
일본의 한 작은 출판사에 젊은이가 새로 들어와 15년 동안 사전 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인데,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이 부러웠던 기억이 나거든요.
돈이 안되는 그 일을 하게 내버려두는 그 작은 출판사,
반대급부가 별로 없어도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사전 작업을 하는 그 주인공.
우리 현실에선 꿈깥은 일이겠지만......

balmas 2015-10-09 18:57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점에 완전히 공감합니다.
 
 전출처 : balmas님의 "랑시에르 불화 역자 후기"

안녕하세요? 

이 페이퍼를 쓴 날짜가 5월 26일이니 벌써 5개월 가까운 시간이 흘렀네요.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동안 2교까지 봤고 출판사에서 3교를 보고 있으니, 제가 마지막 4교를 보면 책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출판사도 다른 책들 출간 일정이 있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조만간 출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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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o 2015-10-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