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안에 부산 경성대 출판부에서 출간될 리오타르의 [쟁론] 역자후기입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애를 먹었는데, 마침내 이렇게 책으로 출판되니 감회가 깊습니다.
후련하다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입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게 되길 기대해봅니다.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자로 잘 알려져 있다. 실로 1979년 발표된 [포스트모던 조건]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20세기 말 사상ㆍ예술ㆍ문화의 ‘시대정신’으로 고취시켰으며, 위르겐 하버마스, 미셸 푸코, 프레드릭 제임슨 같은 사상가들이 연루된 국제적 논쟁을 촉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980년대 말 이래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포스트 담론’ 맨 앞에는 늘 리오타르의 이름이 놓여 있었으며, 그 뒤로 데리다, 푸코, 보드리야르 등과 같은 이름이 따라 붙은 바 있다.
여기 우리가 번역해서 내어놓는 [쟁론]은 [포스트모던 조건]에 비해 우리나라에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외국 학계에서는 처음 출간된 1983년 이래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저작으로 널리 인정받아 왔으며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으나, 국내에서 리오타르는 거의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 거대 서사의 종말, 작은 이야기 등과 같이 [포스트모던 조건]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들과 연결되었을 뿐, [쟁론]에 관한 논의나 연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는 어찌 보면 리오타르 자신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리오타르 스스로 “나의 철학책”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쟁론]은 그의 철학의 정수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고 또한 그의 사상적 여정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저작임에도, 리오타르라는 이름은 [쟁론]보다는 늘 [포스트모던 조건]과 결부되어 왔기 때문이다. 후자의 책이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캐나다 퀘백주 정부의 요청으로 수행된 일종의 정책연구보고서에 해당하는 [포스트모던 조건]이 [쟁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다.
사실 [쟁론]은 어떤 측면에서 보든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계가 배출한 탁월한 걸작 중 한 권으로 꼽혀야 마땅하다. 이 책이 다섯 손가락 안에 포함되어야 할지(그렇다면 이 책은 가령 라캉의 [에크리]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푸코의 [감시와 처벌],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셈이다) 아니면 적어도 열 손 가락 안에는 포함되어야 할지(그렇다면 이 책은 가령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 캉귈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등과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평가자의 관점이나 취향에 달려 있는 문제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 책을 빼놓고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의 흐름을 파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리오타르는 추종자들에게나 비판가들에게나 늘 [포스트모던 조건]의 높이에 비춰 평가되고 규정되었으니,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번역을 통해 리오타르 사상의 진면목이 조금 더 정확히 드러나고, 그의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난다면 역자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을 것이다.
***
이 번역본에서 채택한 몇 가지 번역어에 대해 조금 덧붙여두겠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불어의 디페랑différend을 역자는 ‘쟁론’으로 옮겼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불어의 디페랑은 의견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빚어지는 ‘분쟁’이나 ‘쟁의’, ‘갈등’을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리오타르가 이 책 첫머리에서 이 단어에 부여한 정의를 보면, “계쟁litige과는 달리 쟁론은, 두 가지 논의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판단 규칙의 결여로 인해 공정하게 해결될 수 없는, (적어도) 두 당사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한 경우다.”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의 위치에서 어떤 문제에 관해 다툼을 벌이는 경우를 계쟁이라고 할 수 있다면, 쟁론은 두 당사자들 사이의 다툼을 (원칙적으로) 공정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규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한 또는 억압당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가리킨다. 또한 쟁론은 서로 다른 담론의 장르에 속하는 문장들 사이에서 발생하게 되며, 리오타르는 “쟁론의 경우들을 검토하고, 이러한 경우들을 유발하는 이질적인 담론 장르들의 규칙을 탐구하는 것”을 자신이 이 책에서 “유일한 규칙”으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한편으로 칸트의 비판철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대한 적극적 수용에 기반을 두고(그의 말에 따르면 “두 저자는 근대성의 종막이며 영예로운 탈근대성의 서막이다”), 하지만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소피스트 철학 및 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재해석에 입각하여 “쟁론을 증언”하고 “일어남”(occurrence, arrive-t-il?)에 관해 사유하려고 시도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비판 및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헤겔 변증법으로 대표되는 사변적 장르, 곧 모든 갈등의 내재적인 해결 및 지양 가능성을 주장하는 담론 장르다.
이러한 쟁론에는 “원고가 논변의 수단을 박탈당하고 이 사실 때문에 희생자가 되는 그런 경우”(12절)도 포함되어 있다. 가령 로베르 포리송 같이 아우슈비츠 가스실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대인 대학살의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부정주의자들에 대하여 유대인 희생자들이 바로 이러한 쟁론의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포리송에 대하여 고소를 제기하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두 당사자들을 대립시키는 갈등의 “타결”이 두 당사자 중 한 당사자의 관용어idiome 속에서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쪽이 겪은 잘못이 이러한 관용어 속에서 의미화되지 않을 때”(12절) 역시 쟁론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노동자나 그 대표자가 자본가들과 갈등을 빚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갈등은 한 쪽 편(곧 자본가 계급)에 고유한 법적ㆍ경제적 규범에 입각하여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곧 노동자는 자본주의 국가의 법체계 및 경제 논리에 의거하여 자신이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 이것 역시 쟁론의 한 사례가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주로 국제 정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분쟁’이라는 번역어나 우리말에서는 주로 ‘노동 쟁의’ 등과 관련된 법률적ㆍ사회적 용어로 쓰이는 ‘쟁의’라는 번역어보다는 ‘쟁론’이라는 말이 리오타르의 의도를 좀 더 폭넓게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번역어는 우리가 ‘잘못’이라고 번역한 토르tort(또는 불어 발음에 좀더 가깝게 표기하면 ‘또흐’)라는 말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재산이나 소유권, 인격 등에 발생하며, 법적 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침해’나 ‘손해’를 뜻하는 도마주dommage와 달리, 토르는 “손해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한 손해”(7절)를 가리킨다. 또한 원고가 “어떤 손해를 입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한 사람”을 가리킨다면, 어떤 손해를 당하고 따라서 원고로서의 객관적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자신의 피해나 손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할 때 그는 희생자가 된다.”(9절) 가스실에서 살해당한 유대인들이나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또는 그 밖의 다른 종류의 토르를 겪고 있는 피해자들이 이런 의미의 희생자 범주에 속한다.
리오타르는 청년 마르크스의 텍스트 중 하나인 「헤겔 법철학비판을 위하여」에서 자신이 사용하는 ‘잘못’이라는 개념의 또 하나의 사례를 발견하며, 이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1843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뿌리 깊은 굴레에 얽매어 있는 한 계급, 결코 시민사회의 계급이 아닌 시민사회의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인 한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 때문에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잘못이 아니라 잘못 그 자체(ein Unrecht schlechthin)가 그들에게 자행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권리도 요구하지 않는 한 영역.”(「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14쪽) 잘못은 감정의 침묵, 고통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모든 문장의 우주 및 그것들의 모든 연쇄가 자본(하지만 자본은 하나의 장르인가?)의 유일한 목적성에 종속되어 있거나 종속될 수 있고 그 목적성에 따라 판단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 따라서 자본이 문장들에 가하는 잘못은 보편적 잘못일 것이다. 비록 잘못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도(...), 어떤 쟁론을 표시하는 침묵하는 감정은 여전히 들려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사유 앞에서의 책임이 그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쟁론의 감정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종결되지 않았다.”(236절)
그러므로 리오타르에게는 쟁론에 권리를 부여하고 희생자의 침묵 속에 감춰져 있는 잘못을 드러내는 것 또는 잘못을 문장화하는 것이 철학 및 정치의 근본 쟁점이 된다(22절). “쟁론에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은, 잘못이 표현되고 원고가 희생자가 되기를 그칠 수 있도록 새로운 수신자, 새로운 발신자, 새로운 의미작용, 새로운 지시체를 설립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문장들의 형성과 연쇄를 위한 새로운 규칙을 요구하지요. 언어가 이 새로운 문장들의 가계 내지 이 새로운 담론의 장르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잘못은 문장으로 씌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능력/권한(또는 “실천적 지혜prudence”)을 찾아야 합니다.”(21절)
이미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런저런 논의에서 밝힌 바 있듯이, 리오타르와 랑시에르는 tort라는 단어를 자신들의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삼고 있다. tort라는 개념에 대해 각자 상이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tort라는 개념을 피해나 손해라는 의미에 더해 늘 불의라는 의미를 포함시켜 사용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피해나 손해 같은 용어보다는, 불의, 부당함의 의미를 폭넓게 전달할 수 있는 잘못이라는 번역어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
역자는 지금까지 10권이 넘는 책을 번역해왔다. 개중에는 난해한 사상으로 유명한 자크 데리다의 책이 4권 있고, 또 길고 난삽한 문장으로 유명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책도 4권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만큼 번역이 힘들었던 적은 없다. 수 년 전에 이 책의 번역을 의뢰받았을 때에는 과연 내가 이 책의 적절한 번역자인지 고민이 되어 번역을 맡을지 망설였지만, 어쨌든 20세기 후반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걸작 중 한 권이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덜컥 번역을 수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번역을 시작하고 나니 이 책에서 다루는 방대한 사상의 범위와 논의의 밀도 때문에 번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겨운 작업이 될 것이라는 점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간에 몇 번이나 번역을 포기할 생각을 했고, 경성대학교 출판부에도 그런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성대학교 출판부의 김미현 선생님과 다른 한편으로는 부산대학교 영문학과의 김용규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번역을 포기하지 않고 지금 ‘역자 후기’의 마지막 단어들을 써내려가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가 가장 많이 괴롭혀드린 분이 방금 언급했던 김미현 선생님이다. 계속 지연되는 번역으로 인해 여러 모로 많은 곤란을 겪었을 터인데, 선생님이 은퇴하시기 전에 책을 출간할 수 없게 되어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아무쪼록 이 번역이 출판인으로서 선생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