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 출판사에서 나온 시노하라 마사타케 교수의 [인간 이후의 철학] 추천사를 올립니다. 시노하라 교수는 몇 년 전에 [인류세의 철학]이라는 책이 국역되기도 했는데, 이 책도 역시 인류세의 문제를 다루는 책입니다. 좋은 책을 많이 내는 이비출판사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
붕괴의 상상력, 사물적 유령론, 촉각의 언어: 인류세를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
며칠 전 국제층서위원회(ICS) 산하 인류세실무그룹(AWG)이 캐나다 토론토 시 부근의 크로퍼드 호수를 인류세의 시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선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른바 ‘대가속기’가 시작된 1950년대 이후 핵실험과 원자력 발전에서 발생하는 플루토늄이나, 석탄 같은 화석연료를 발전소에서 태울 때 배출되는 구형탄소입자(SPC) 같이 인류세를 대표하는 주요 마커가 지구상에서 급속히 증가했다는 지질학적 흔적들이 이 호수의 퇴적층에 뚜렷이 나타나 있고, 이는 우리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 선정 이유다. 이제 제4기층서위원회(SQS)와 내년 국제층서위원회에서 차례로 투표를 거쳐 이 선정안이 통과되면, 내년 국제지질학총회(IGS)에서의 최종 비준을 통해 인류가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퍼드절에 들어섰다는 점이, 적어도 지질학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승인이 되는 것이다.
사실 2000년 미국의 생물학자인 유진 스토머(Eugene F. Stoermer)와 네덜란드의 화학자인 파울 크뤼천(Paul Crutzen)이 공식적으로 사용한 이후 인류세 개념은 지구 시스템과학이나 지질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분야, 그리고 대중적 담론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확산되어왔기 때문에, 이런 뉴스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과학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문학 또는 철학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학적 사건은 단지 새로운 지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과학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사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특히 그것이 인류의 삶의 형태 및 방향, 우리의 윤리적 책임과 관련하여 무엇을 함축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류가 지금처럼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지(심지어 더욱 강렬하게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식의 삶의 형태와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인류세와 관련한 인문학 또는 철학의 고유한 물음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시노하라 마사타케 교수의 이 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인류세 문제를 사유하는 인문학적인 사유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특징은 저자가 붕괴의 상상력에 입각하여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는 사실이다. 붕괴의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왜 인류세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붕괴의 상상력이 필요한가? 그 이유는 먼저 인류세가 인간의 조건에 관한 근대적 사유 및 문명의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 관한 근대적 사유가 “인간세계가 자연과 단절된 것이며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되어 왔다”(5쪽)고 보는 이해방식이라면, 인류세는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으로 상정된 인공적인 문명 질서가 “붕괴하거나 잠재적으로 폐기물이 될 수 있”(6쪽)음을 위협적으로 보여준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잘 보여준 바와 같이 근대 문명에서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는 것을 넘어 자연의 지배자가 되기를 추구해왔는데, 인간의 자연 지배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자연이 인간의 지배에 순응하는 존재자라는 가정, 물론 이런저런 저항과 부작용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결국 인간이 점차적으로 탐사하고 통제하고 길들일 수 있는 수동적 대상이라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중엽 이후 지배자로서 인간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그만큼 여기에 대한 ‘자연’ 또는 지구 시스템의 반작용도 더욱 강해져서 더 많은 폭염과 산불, 가뭄, 태풍과 침수, 영구 동토층의 해빙, 전염병의 빈번한 확산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가 산출되고 있다. 이에 따라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지구 평균 기온을 2도 내지 1.5도 이하로 낮추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더욱 예측 불가능한 파괴적 결과들이 초래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인류세는 역설적 성격을 지닌 사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인류세는, 인류의 인공적 행위성이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지구 시스템 자체를 변동시킬 수 있는 위력을 보여주는 한에서, 주체와 객체 이원론 및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관점에 입각한 근대 철학과 문명의 정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류세는 이러한 변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지구의 폭력적인 힘과 인류의 가능한 종말을 가리키는 한에서, 인류의 왜소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의 행위성과 주체성의 정점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역설적으로 인류의 약소함과 의존성을 보여주는 사태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류세의 역설에서 반드시 붕괴의 상상력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에코모더니스트(Eco-modernist)라고 불리는 이들은 인류세라는 사태를,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자연’ 내지 지구시스템의 도전으로 이해하면서, 지금까지의 인류 문명의 기본 방향에 입각하여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과학과 더 많은 기술을 통해 인류세의 도전을 극복하고 더 많은 발전과 더 많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길이다. 그것은 때로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역배출기술(NETs)이나 우주 양산 같은 기술적 대응의 시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화성 이주와 같은 우주공학적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핵심은,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서 지구시스템의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반면 시노하라 교수는 인류세의 의미를 지금까지 인류의 근본적인 생존 조건이라고 자각되지 못한, 따라서 “사실상 배제되고 무시되어 온”(249쪽) 지구시스템이라는 조건이 동요하면서 인류의 인공적인 문명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무너지게 된 사태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저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서 이러한 붕괴의 전조를 예감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붕괴의 가능성 및 현실성이 단지 지역적인 사태가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와 관련된 보편적인 사태라는 점이다. 그것은 수만 년 동안 인간이 구축해온 문명 질서 내부에 어두운 바깥이 존재하며, 인간이 소멸하거나 부재하는 미래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아니 그 세계는 이미 도래한 현실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 여기에서 붕괴의 상상력이 나온다.
붕괴의 상상력은, 인류세를 통해 우리 인류가 어떤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했으며, 여기에서 우리의 삶의 형태와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생명체들에게는 파멸의 길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절박한 철학적ㆍ윤리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반드시 소멸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변적인 문제이다. 생태적 위기라는 현 시대의 생존 조건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종 또한 소멸할 수 있는 상황을 연결 지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202쪽)
여기서 독자들은 SF의 여러 광경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우거진 잡초와 황량한 들판, 부스러기 잔해로 남은 문명의 흔적들, 마치 원시인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는 소수의 생존자들 사이의 치열한 생존 경쟁 ... 하지만 시노하라 교수의 붕괴의 상상력은, 통속적인 SF의 상상력과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첼피시 극단의 <고무지우개 산>이라는 연극은 저자의 붕괴의 상상력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연극의 한 대목에는 돌연 고장난 세탁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부분적인 파탄 내지 붕괴를 보여주는 것인데, 보통의 경우라면 서비스센터로 연락해서 수리를 받거나 아니면 코인 세탁방에 가서 세탁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붕괴의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카다 도시키와 함께 저자는 이러한 사물의 부분적인 붕괴에서 다른 측면을 파악한다. 그것은 “세탁기가 비활성화”(134쪽)되었다는 사실이다. 세탁기의 비활성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세탁기의 각 부분이 “세탁기라는 전체로부터 해방”(137쪽)되는 것을 의미하며, 세탁기가 고장 나면서 들려오는 ‘바삭바삭’하는 소리는 “세탁기로부터 벗어난 부품의 소리”(134쪽)를 나타낸다.
세탁기라는 전체로부터 부분의 해방. 그것은 인간이 구축해 놓은 인공적 문명의 질서에서 세탁기가 벗어남을 가리키는 것이고, 세탁기를 포함하는 문명적인 사물의 질서를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관점이 깨지는 것을 뜻한다. 인공적 문명의 질서 내부에서 보면 세탁기의 고장(좀 더 큰 사례를 들자면, 카카오톡 서비스 장애 같은 것)은 상당히 번거롭고 불편한, 그리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일로 표상될 것이다. 그것은 하루빨리 수리되거나 해결이 돼서 다시 원래의 정상적인 기능 상태로 복원되어야 하는, 일시적인 일탈이나 장애 상황일 뿐이다.
이것은 인류가 구축한 현대 문명이 목적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고 있으며, 이러한 원리는 문명 내의 거의 모든 것이 기능적인 적합성 내지 최적의 상태에 따라 작동하도록 통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떻게든 전력공급망은 무사히 작동해야 하고 어떻게든 카카오톡 서비스도 지장 없이 가동되어야 하고 어떻게든 교통연결망도 지체를 유발하지 않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만약 이것들 중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심지어 해체되는 날이 온다면, 우리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이 망가지게 될 것이다. 전기가 수주일 동안 들어오지 않는 밤, 카카오톡이 1주일, 1달째 연결되지 않는 생활, 도로, 철로, 항공로가 막혀서 이동이 불가능해지는 삶 ...
그런데 저자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문명적 질서가 붕괴된 상황을 상상해보도록, 그리고 그 상황을 재난이나 재앙이 아니라 해방으로, 적어도 우리 인류가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환영해야 하고 감수해야 하는 해방의 상황으로 생각해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기존 생활세계의 파탄으로부터 사물이 흘러넘치고 이와 더불어 인간도 이로부터 해방된다”(216쪽)고 사유하는 것이다. 오직 인간의 편리와 유익을 위해 디자인되고 구축된 현대 문명의 인공적 질서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작동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도적으로 환경을 훼손하거나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의 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우리는 이미 지속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자연 생태계의 파괴 및 지구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형 활동에 동참하는 셈이다. 저자의 붕괴의 상상력은, 그 존재 자체의 속성상 생태계 파괴 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현대 문명의 기본 속성을 성찰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 책의 두 번째 인문학적 또는 철학적 특징이 도출된다. 이러한 특징을 (저자는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 자크 데리다의 용어법을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유령론의 관점에서 인간 이후를 사고한다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유령론은 무엇보다 물질적인 유령 내지 사물적인 유령에 관한 것이다. 사물적인 유령이란, 사물들이 실체로서 존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잔해 내지 흔적으로서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사물의 본질 또는 사물성이란, 그처럼 자기 자신으로-존립하지-않음, 완결되지-않음, 자립적이지-않음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주제와 관련하여 저자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사상가들은 최근 국내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생태철학자 티머시 모턴과 영문학자 프레드 모튼, 그리고 일본의 사진작가 요네다 도모코 같은 사람들이다. 티머시 모턴은 생태적인 것을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며 상호연관된다는 것”(161쪽)으로 정의하는데, 여기서 상호의존 내지 상호연관성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서로 관계를 맺기에 앞서 이미 모종의 자립적 실체들로서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이 2차적인 존재 방식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됨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턴이나 저자가 이해하는 관점에 따르면, 상호연관으로서 자연 또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물들을 그것들의 고정성과 독립성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지닌 세계상을 탈구축하는 작업이다. 첫째 이것은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립하며, 불변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 실체로서의 자연 및 사물의 질서에 대한 탈구축을 함축한다. 자연적인 사물들의 부동적이고 자립적인 질서는, 사실은 ‘자연’이라는 것을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이 탐구하고 개척하고 정복해야 할 수동적인 대상으로 이해하는 관점 위에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변적이고 자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연이라는 표상은 인공주의적 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세계상인 것이다. 인류세로 표현되는 생태적 위기가 깨뜨리고 있는 것이 자연 및 사물의 질서에 대한 이러한 표상이다.
둘째,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사물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사물을 “형태 없는 흔적”(92쪽)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모턴이 말하듯 “간객체적 공간”(space of interobjectivity, 164쪽)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사물의 질서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여기서 간객체적 공간이란, 단어가 표현하듯이 “사물의 ‘사이’에 있는 공간”(164쪽)을 말하는데, 단 여기에서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사이”란 이미 자신의 확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실체로서의 사물들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이 실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사이는, 오히려 사물들을 성립하게 해주는 사이 또는 공간이다. 이러한 사이 내지 공간 이전에는 사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이 자체도 무언가 확고한 실체성을 지닌 어떤 것, 사물들이 공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가 멀어지고 벗어나 버리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164쪽)이며,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의 행위가 현실 세계에 남긴 흔적을 축적한 공간”(164쪽)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곧 “현실의 모든 사건은 존재하는 것이 그 흔적을 다른 것에 남겨 각인시킨 것이다. 간객체적 공간은 이런 모든 흔적의 총체에 불과하다.” 또는 요네다의 표현을 빌린다면 “역사는 눈에 보이는 기념품이나 건축물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이 무형으로 태연하게 존재”(93쪽)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독자들은 내가 왜 저자의 사유의 두 번째 특징이 사물적인 유령론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 입각하면 사물들은 흔적의 흔적이며, 간객체적 공간으로서의 상호연관은 실재성을 지니지 않지만 현실의 사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루는 것이다. 확고한 실재처럼 보이는 인류 문명의 인공적 질서의 기저에는 유령적인 “지하세계”(모튼)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여기에서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이러한 사물적 유령론이 필요한가? 왜 자연적 세계를 포함한 실재하는 모든 것의 실재성을 이렇게 철저하게 박탈해야 하는 것일까? 일차적인 이유는 저자가 보기에 인류가 구축해 놓은 인공적인 문명의 질서, 그 자체로 생태계 파괴적인 그 질서가 너무나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고, 그 질서는 자연과 문명에 관한 실체론적 세계상 및 자연의 정복자이자 주인으로서의 인류라는 관점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되고 정당화되고 있어서, 철저하게 이 질서 및 세계상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인류세가 제기하는 문제를 제대로 사유하고 그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의 세 번째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저자가 감각을 매우 중요시하는 철학자라는 점이다. 저자는 ‘공공권’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합리주의적인 철학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철학이야말로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 최종적인 보루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합리주의 철학 그리고 공공권에 기초를 둔 사유는 오직 감각에 의지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감각은 “취약성에 대한 실존 감각”(15쪽)이며, 소멸을 사물의 존재양식으로 파악하는 감각, 소멸을 “인간적 척도를 벗어난 곳에 남겨짐”(28쪽)으로 파악하는 감각이다. 이러한 감각은 일상적인 감각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인 감각, 예술가들의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을 통해 드러나고 고양될 수 있는 감각이다.
저자가 말하는 감각의 차원은, 프레드 모튼과 클레어 콜브룩이 각자 제시하는 소리와 음향의 구별에 관한 논의에서 파악될 수 있다. 소리가 개별화된 음을 가리킨다면 음향은 어떤 개체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무수한 익명의 노이즈”(208쪽)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음향은 “인간 신체가 형성되고 조직화되기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 신체와 무관한 곳, 인간 신체를 벗어난 곳에서 생겨나고 존재”(210쪽)하는 것이다.
이러한 음향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한편으로 그것이 “무언가 이야기되어야 함에도 이야기되지 않거나 이야기된다 해도 어떤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무시”되는 극한적 상황, “자격 박탈”의 상황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들린다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소리, 곧 음향으로만 들릴 뿐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소리와 구별되는 음향은 공공권에서 들리지 않은 세계의 파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계기를 전해준다. 다른 한편으로 음향은 인간적 신체를 넘어서는, 인간이 없는 “매끄러운 공간”(들뢰즈ㆍ가타리)의 차원을 감지하게 해준다. 그 공간은 “지점이나 대상처럼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바람, 눈 혹은 모래의 파동, 음향, 얼음 소리, 촉각적인 것과 같은 성질의 움직임, 방향성의 총체로서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212쪽)되는 공간이다. 진정으로 생태적인 차원은 시각에 기반을 둔 언어를 넘어서는 이러한 감각, 촉각적인 언어의 발명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아마도 저자의 논의에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여러 독자들, 특히 사회과학 분야의 독자들이 보기에 저자의 입장은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어쨌든 사회적 합리성의 차원을 너무 과도하게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공공권의 철학과 촉각의 철학을 그처럼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것이 인류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일까,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양자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반론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인문학 또는 철학적 가치는 이런 첨예한 논란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인류세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어떤 실정적인 대상(positive thing)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논란을 본질로 하는 개념”(W. B. Gallie)이라는 점, 이처럼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차원의 개방 속에서만 인류세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성숙하게 다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인류세의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