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흥미로운 기사가 있어서 링크해둡니다.

 

한겨레 신문사의 최원형 기자와 미디어스의 인터뷰인데, 학술 출판과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나오네요.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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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근대철학회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저술하고 조만간 창비에서 출간될 [근대종교철학]에 수록될

 

원고 한 편 올립니다. 저는 니콜라 말브랑슈의 종교철학을 소개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원고는 최종적인 교열을 거치지 않은 원고이므로, 공적인 매체에서 인용하거나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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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브랑슈와 변신론: 지양 불가능한 악

 


I. 서론

 

  우리나라에는 주로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이라는 학설의 대변자로 알려진 니꼴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1638~1715)는 데까르뜨 이후 프랑스 철학계의 중심에 있던 철학자였으며,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자신의 철학 체계를 가다듬고 데까르뜨주의가 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말브랑슈의 사상에서 기회원인론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변신론(theodicy)의 문제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변신론이라는 용어는 라이프니쯔가 처음 고안해냈다. 그는 1710년 출간된 [변신론](Essais de Théodicée)에서 악이라는 문제에 대한 형이상학적ㆍ신학적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의 철학적 신학의 범형을 제시한 바 있다. 라이프니쯔의 [변신론]과 그 저작에서 제시된 체계적인 이론이 워낙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까닭에 동시대에 제시된 다른 이론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특히 말브랑슈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말브랑슈는 [진리탐구에 대하여](1674~75)를 출간한 이후 [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1680)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변신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아르노 및 라이프니쯔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다듬어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탐구를 통해 그 이전까지 서양 신학에서 변신론의 주요 패러다임으로 존재해왔던 아우구스티누스 및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과 단절하는 새로운 변신론을 제시하게 되었다. 


  더욱이 말브랑슈의 이론은 라이프니쯔나 헤겔의 이론과도 구별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이론보다 현대 사상에 좀더 부합하는 상당히 급진적인 관점을 담고 있다. 그것은 라이프니쯔에서 헤겔에 이르는 (또는 그 이후 다른 사상가들까지 포함하여) 기독교적인 관점을 고수하는 사상가들과 달리, 말브랑슈는 이 세상에 악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지양 불가능하다는 것, 더욱이 그러한 악의 지양 불가능성은 신의 전능함이나 완전성 또는 선함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말브랑슈의 변신론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무언가 의미 있는 사유 과제들을 제시해준다면, 그것들 중 하나는 이러한 악의 지양 불가능성에 관한 독특한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변신론에 초점을 맞춰 말브랑슈 종교철학의 주요 논점과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글은 크게 네 단계로 전개될 것이다. 우선 2절에서는 말브랑슈 이전의 서양 기독교 신학에서 변신론의 요체를 제시해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간략히 살펴본 뒤, 3절에서는 말브랑슈의 변신론이 어떤 의미에서 이들의 사상과 단절하고 있는지 검토해보겠다. 그리고 4절에서는 말브랑슈에 대한 앙뚜안 아르노(Antoine Arnauld)의 비판과 말브랑슈 자신의 답변을 살펴볼 것이며, 5절에서는 변신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라이프니쯔와의 논쟁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 두 절의 논의를 통해 근대 변신론의 흐름 속에서 말브랑슈가 차지하고 있는 사상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좀더 정확히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 6절에서는 말브랑슈 변신론의 현대적인 의의에 관해 간략히 지적해볼 것이다.
 

 

II. 서양 기독교 신학의 변신론: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서양 기독교 사상 전 분야에 걸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변신론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변신론 문제에 관한 두 사람의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악을 결여(privatio)로 정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악을 ‘좋음의 결여’(privatio boni)로 정의하고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악을 ‘좋음의 결여’로,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좋음의 결여’(privatio boni debiti)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창조된 모든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좋은 것이라는 명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곧 악은 사실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좋음)가 없는 것, 따라서 존재론적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뜻한다. 따라서 두 사람에게 악이란 사실상 무를 뜻한다.


  그런데 만약 악이 좋음의 결여를 뜻하며, 더욱이 존재론적으로는 무에 불과한 것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악들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그림이나 음악 작품과 비교함으로써 이를 설명하려고 한다. 곧 그림이나 음악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의 부분들 자체가 가장 아름답거나 탁월한 것이 아니라, 그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의 조화의 아름다움이나 탁월함인 것처럼,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최선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부분들 사이의 최선의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이 경우 그 질서를 이루는 부분들 각각은 반드시 최선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세계를 이루는 부분들 중 열등하거나 덜 완전한 부분 역시 세계의 최선의 질서를 이루는 한 구성 요소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연적인 악의 기원에 관한 물음은 성립하지 않는 물음이 된다. 신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악의 창조주, 따라서 악의 기원이 아닐뿐더러,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범죄, 불완전성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을 의지의 도착에서 찾는다. 곧 악은 “우리 주 하느님으로부터 의지가 등을 돌리는 것”(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2권 20장)에서 생겨나며, “의지의 도착 이외의 다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신국론] 11권 17절)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모두 이 세상이 완전한 세상이라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 악과 범죄, 불완전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적인 자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학적 설명에서 악은 결국 존재론적으로 무에 불과한 것으로 귀착되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과 불완전성은 세계의 최선의 질서의 한 부분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악의 원인은 의지의 그릇된 사용에서, 곧 윤리적 관점에서만 설명될 뿐, 아무런 존재론적 실재성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III. 말브랑슈의 변신론: 세계의 불완전성, 일반 의지, 단순성

 

 

  말브랑슈에게 변신론의 문제는 그의 기회원인론 때문에 매우 첨예한 쟁점이 된다. 기회원인론에 따르면 유한한 사물들 또는 피조물들 사이에는 진정한 인과 작용이 성립하지 않으며, 오직 무한한 역량을 지닌 신만이 진정한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변신론의 문제는 신은 본성상 선하고 자비롭고 완전한 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악과 결함, 불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러한 괴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하여 기회원인론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변신론의 문제는 좀더 첨예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회원인론에서는 오직 신만이 진정한 원인이고,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원인 역시 신일 수밖에 없으며, 신은 이 세상의 악과 결함, 불의에 대해 책임 당사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브랑슈는 이 세상에는 불완전성과 악, 불의가 존재한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악의 존재론적 실재성이나 우주론적 불가피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악의 존재론적 실재성을 긍정한 가운데, 이를 신의 완전성 및 지혜와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바로 이 점이 그의 변신론의 독창성을 이룬다.

  말브랑슈 변신론의 쟁점은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1688)의 한 대목에서 분명하게 제시된다.

 

떼오도르: 그렇다면 우주는 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것인가? 하지만 현실을 보게! 그토록 많은 기형아들과 그토록 많은 무질서, 수많은 불경한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완전성에 기여하는 것인가?

아리스뜨: 신은 가능한 가장 완전한 작품을 만들기를 원하네. 왜냐하면 그 작품이 더 완전할수록 그것은 신의 영예를 더 드높이게 될 것이기 때문일세. 이 점은 내게는 명백해 보이네. 하지만 나는 만약 이 작품이 그것을 왜곡시키는 수많은 결함에서 자유로웠다면 더 완성도가 높았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네. 바로 이 점이 나를 곧바로 멈추게 만드는 모순일세. 신은 당신의 계획을 완수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의 속성들에 가장 걸맞은 계획을 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네.(말브랑슈,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9장 9절)

 

이 대화에 나타나듯이 말브랑슈가 풀고자 하는 변신론의 문제는, 완전하고 전능한 존재인 신은 그가 하려고 하면 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완전하게 창조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는 이처럼 수많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세상을 창조했을까 하는 점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말브랑슈에게 세계의 불완전성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 무질서, 결함의 실재성은 처음부터 주어진 전제로 간주되고 있다. 악, 불완전성, 무질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따라서 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완전성을 해치는 것, 따라서 무보다 더 나쁜 것들이다.


  그렇다면 말브랑슈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 그것은 신의 의도의 완전성과 더불어 신이 행위하는 방식의 단순성과 일반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말브랑슈는 이전의 다른 기독교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은 이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하게 창조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긍정한다. 이 세계의 완전성은 신의 무한한 완전성에 걸맞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신의 지고한 선함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이 세계는 가능한 한 최선의 세계, 가장 완전한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수많은 악과 무질서,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만큼 무능력한 존재인가? 이것은 무한하게 완전한 신의 속성 중 하나로 전능함을 들고 있는 말브랑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그게 아니면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악과 무질서, 불완전성은 그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완전한 질서를 구성하는 부분들인가? 따라서 이 세계는 부분적인 악과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 질서에서 보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이 세상의 악과 불완전성의 존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변신론의 요점이며, 또한 라이프니쯔나 심지어 헤겔(“이성의 간지”)의 답변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과 달리 말브랑슈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의도와, 실제로 신이 그러한 창조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 및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는 방식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다음 대목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신은 그의 모든 피조물이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며, 아이들이 엄마의 자궁 속에서 죽게 되기를 원치 않고 기형아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런 존재자들이 산출되게 하는 자연법칙들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동등하게 단순한 방식으로 좀 더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할 수 있었다면, 그는 그처럼 많은 기형아들이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 있는 법칙들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특수한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그의 의지를 다수화하는 것은 그의 지혜에 걸맞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말브랑슈, [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22절)

 

신은 그가 원했다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의인이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중단시키고, 가뭄에 시달리는 곳에 비를 뿌리고 홍수가 난 곳에서 비를 멈추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만약 신이 기형아가 태어나는 것을 막고 수많은 범죄와 죄악을 방지하고, 가뭄이나 홍수 또는 태풍 같은 자연 재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는 수많은 특수한 상황들에 특수한 방식으로, 곧 다수의 특수한 의지(volonté particulière)를 통해 개입해야만 한다. 곧 신은 수많은 특수한 상황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해야 한다. 하지만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는 신의 “지혜에 걸맞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에게 지속적인 기적을 요구하거나 매순간마다 신에게 기적들을 귀속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21절) 여기서 말브랑슈가 말하는 신의 지혜란 가장 복잡하고 가장 완전한 일을 가장 단순한 법칙에 따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13절) 따라서 신의 세계 창조 및 보존이 신의 지혜에 걸맞은 일이 되기 위해서는 신은 자신이 확립한 가장 단순한 법칙들, 곧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을 위반하지 않는 가운데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이 창조한 세계는 단순히 이 세계를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세계로 만들려는 신의 의도만이 아니라,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이 지닌 단순성과 일반성이 반영되어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다. “선과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한 이는 신이다. 신은 선량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던 악당만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을 도우려고 하던 의인에게도 집 지붕 위의 기와를 떨어뜨린다.”(말브랑슈, [기독교적ㆍ형이상학적 성찰] 7번째 성찰, 19절) 그러면 신은 자신의 확립한 일반 법칙, 곧 자신의 일반 의지에 걸맞게 행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선과 악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것인가? 말브랑슈는 여기에서 선과 악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하지만 신은 선을 행하고(fait) 악은 허용하는데(permet), 이는 신이 직접적이고 실정적으로는(positivement) 선을 원하며 악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다. 나는 신이 악은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신은 결코 기형아들을 산출하도록 자연 법칙들을 제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법칙들이 아주 단순한 까닭에 깜짝 놀랄 만한(admirable) 산물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이처럼 신은 실정적으로는 그의 산물의 완전성을 원하며, 오직 간접적으로만 불완전한 것과 맞닥뜨리기를 원한다. [...] 신이 선을 행하는 것은 그의 산물이 완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신이 악을 행하는 것은 신이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행위 방식이 단순하고 규칙적이고 일양적이며 견고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그의 행동이 그 자신에게 걸맞은 것이 되고 그의 속성들의 특징을 가시적으로 지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말브랑슈, [기독교적ㆍ형이상학적 성찰] 7번째 성찰, 19절)

 

선과 악에 대한 신의 태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신은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선을 원하며, 반대로 악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허용한다. 악을 원하지 않음에도 허용하는 이유는 신이 제정한 자연법칙, 곧 신이 행위하는 방식이 아주 단순해서 그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불가피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신의 행위 방식의 단순성은 다른 말로 하면 신이 제정한 자연 법칙이 우주에서 “단순하고 규칙적이고 일양적이며 견고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자연 법칙은 선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그리하여 선한 사람이 우연히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에 맞는 일이 발생한다), 메마른 땅이나 비옥한 땅에도 규칙적으로 작용한다(그리하여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브랑슈는 그가 무한하게 완전한 신의 속성들로 제시한 역량(puissance)과 지혜(sagesse) 중에서 후자에 좀더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의 전능함에 따르면 신은 그가 의도한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고 또한 바꿀 수 있음에도, 신은 그가 지닌 무한한 지혜에 따라 항상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행위하기 때문이다.


 

IV. 말브랑슈와 아르노의 논쟁: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

 

 

  이처럼 말브랑슈의 변신론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신의 역량보다 신의 지혜를 좀더 강조하고, 그리하여 신의 역량을 제한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처럼 신의 역량을 신의 지혜에 종속시키는 듯한 말브랑슈의 관점에 대한 가장 엄격하고 단호한 비판가는 앙뚜안 아르노였다. 아르노의 비판의 핵심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아르노는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위하는 것’과 ‘일반 의지에 의해 행위하는 것’은 분명 서로 다른 것임에도 말브랑슈는 양자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아르노는 일반 의지를 특수하지 않은 일반적 내용을 지니고 있고, 특수한 것들에 대해 직접 작용하지 않는 의지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분명히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위한다. 하지만 신이 법칙에 따라 어떤 것을 실제로 산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일반적일 수 없다. 신은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특수하게 하지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다. 신이 하나의 영혼을 창조할 때 신은 특수한 작용을 통해서 그것을 창조한다. 그리고 신에게는 ‘행위하기’와 ‘의지하기’가 하나의 동일한 것인 만큼, 신이 어떤 것을 특수하게 한다면, 그것은 특수한 의지를 수단으로 삼아 하는 것이다.(아르노, [자연과 은총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철학적ㆍ신학적 성찰]) 분명 이 특수 의지들은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사된다. 하지만 이는 의지들 자체가 본성상 일반적이거나 범위상 보편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은 일반 법칙에 일치하기는 하지만, 특수한 것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결과를 항상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의지한다.(아르노, [자연과 은총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철학적ㆍ신학적 성찰]) 그의 창조의 모든 측면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신에게 다른 행위 양식은 걸맞지 않다. 아르노가 볼 때 말브랑슈는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그는 일반 법칙 내지 일반 의지 또는 일반 원인(신에게 이 세 가지는 모두 같은 것을 의미한다)을 두 종류로 구별한다. 첫 번째 종류의 일반 원인은 그의 관심 내지 활동이 모든 사물들에게 미치되, 각각의 모든 특수한 사물에 대하여 특수한 이해나 관심을 기울이는 것(따라서 특수 의지를 갖는 것)을 수단으로 하여 그렇게 한다는 의미에서 일반 원인일 수 있다. 반면 두 번째 종류의 일반 원인은 국가 신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초연하게 존재하는 왕이 오직 일반 법령(“거리에 거지가 없게 하라.”)을 수단으로 하여, 하지만 이 법령들이 개인 신민들과 어떤 관련이 있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아무 관심도 없이, 또는 법령들이 실행되는 세부 방식이나 그 법령들의 질에 관해 아무런 이해도 없이 왕국을 통치하는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일반 원인일 수 있다.(아르노, [자연과 은총의 새로운 체계에 대한 철학적ㆍ신학적 성찰]) 아르노가 보기에 말브랑슈의 신은 두 번째 종류의 일반 원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수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오직 일반적인 법령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하지만 여러 현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아르노의 비판은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 및 변신론의 실제 논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진 비판이다. 아르노는 말브랑슈의 신이 특수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일반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신은 항상 특수한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아르노 자신이 사용하는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라는 개념은 말브랑슈가 사용하는 두 개념의 의미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아르노가 말하는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신은 오히려 말브랑슈가 말하는 일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신에 더 부합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은 말브랑슈가 말하는 일반 의지 또는 일반 원인으로서의 신이 어떤 것을 뜻하는지 잘 보여준다.

 

아리스뜨: 운동하는 물체란 무엇이겠나? 그것은 신의 행위에 의해 운반되는 물체일세 [...] 이러한 행위, 이러한 운동력은 결코 물체에 속하지 않네. 그것은 물체들을 창조하는 또는 상이한 장소에서 연속적으로 물체들을 보존하는 이의 의지의 작용력일세. [물질은] 능동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사실은 창조주의 지속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 그것들[물체들] 사이의 마주침은 기회 원인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원인은 물체들의 침투 불가능성 때문에 원동자(原動者) 또는 창조주가 자신의 행위를 분배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네.”(말브랑슈, [형이상학과 종교에 관한 대화] 7장 12절)

 

또한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바늘이 나를 찌를 때 신은 영혼과 신체의 연합과 관련된 일반 법칙(신은 이러한 법칙에 일치하여 지속적으로 내 안에서 작용한다)의 결과로 내가 고통을 느끼게 만든다.([아르노의 철학적ㆍ신학적 고찰에 대한 반론])

 

  반면 말브랑슈에게서 신이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은 일반 법칙에서 벗어나서 행위한다는 것, 따라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그의 의지의 작용이 어떤 일반 법칙에 의해 어떤 결과를 산출하도록 전혀 규정되지 않는 경우에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첫 번째 해명") 가령 말브랑슈 자신이 든 사례를 보면, 신이 자연 법칙에 따라 나의 신체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가운데 나에게 찔린 듯한 통증을 불러일으킬 때, 신은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또는 신이 드넓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던 두 기슭 사이에서 갑자기 바다를 가로질러 길을 만들어냈을 때, 신은 일반 의지가 아니라 특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다.


  말브랑슈가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를 구분하고, 특수 의지를 기적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하는 것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불완전성과 악, 불의 등이 소멸 불가능하다는 것, 또는 지양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적인 용어법을 빌려 말하면,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신의 의도(따라서 악의 지양 가능성)는, 신의 무한한 지혜에서 비롯된 신의 의지의 일반성과 그의 행위 방식의 단순성 때문에 결코 온전하게 실현되지 못하며, 항상 불완전성과 악의 여지를 남겨둔다는 것을 뜻한다. 말브랑슈는 아르노의 비판에 대한 답변에서도 계속 이 점을 고수한다.

 

확실히 신은 그가 영혼과 신체의 일반 법칙들을 통해 살인자에게 부여한 힘을 살인자가 사악하게 사용하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 자신의 방식들의 단순성과 일양성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 따라서 신은 살인자의 팔을 움직이는데, 왜냐하면 신은 이러한 팔의 운동이 따르는 법칙들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이러한 범죄적인 행동을 실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영혼과 신체의 법칙들을 확립한 것은 이러한 행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지혜와 선함을 더 가치 있고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효과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허용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가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진실로 이 행동이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해도 그렇다. ([아르노의 철학적ㆍ신학적 고찰에 대한 반론])


 

V. 라이프니쯔와의 논쟁: 최선의 세계 대 행위 방식의 단순성

 

 

  아르노와 말브랑슈가 서로 명백히 대립하는 관점에 입각해서 논쟁을 벌였다면, 라이프니쯔와 말브랑슈 사이의 관계에는 뚜렷한 일치점들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라이프니쯔는 󰡔변신론󰡕에서 말브랑슈의 변신론의 주요 논점들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말브랑슈가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를 구별하고 “보편 법칙들의 실행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은 신의 특수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고 밝힌 점, 신의 행위로부터 “몇몇 무익한 [...] 사건들이 생겨난다 할지라도, 신에게는 그 방식이 더 복합적이고 규칙적인 다른 방식보다 선호할 만한”(라이프니쯔, [변신론], 206항) 것일 수 있다는 점 등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감을 전제하면서도 그는 몇 가지 측면에서 말브랑슈와 자신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귀결된다. 첫째, 라이프니쯔는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에 관한 말브랑슈의 구별이 미흡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말브랑슈는 기적을 행하는 신의 의지는 특수 의지라고 규정한 반면, 라이프니쯔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신의 역시 어떤 근거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 역시 일반 의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이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브랑슈 신부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일반 의지와 특수 의지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멀리 간다. 신은 기적적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근거 없이 행위할 수 없는 바, 개별 사건들에 대한 신의 의지는 진리나 일반 의지의 귀결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따라서 나는 신은 결코 말브랑슈가 이해하는 그대로의 특수 의지, 곧 원초적으로 특수한 의지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겠다.(라이프니쯔, [변신론], 206항)

 

라이프니쯔가 여기서 시사하고 있는 신의 기적적인 행위의 근거는 “자연의 질서보다 상위의 질서에 속한 이유들”(라이프니쯔, [변신론], 207항), 곧 우리 유한한 인간들로서는 알 수 없지만, 신의 무한한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명백한 어떤 근거들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쯔의 입장에서 보면 신이 기적적인 행위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신의 보편 법칙들을 위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신은 더 적절한 다른 법칙을 통해서만 어떤 법칙을 위반하며, 질서가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 법칙에 속하는 질서의 규칙과 일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이프니쯔, [변신론], 207항)


  라이프니쯔는 또한 신이 행위하는 방식이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양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로 인해 신이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의 방식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양적이다. 왜냐하면 신은 서로 가장 덜 제한하는 규칙들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길들은, 길들의 단순성과 관련해 볼 때 가장 풍요로운 것들이다. 이는 같은 예산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것 가운데 최선의 집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단순성과 풍요성이라는 두 조건은 가능한 최대의 완전성을 산출한다는 한 가지 장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말브랑슈 신부의 체계는 이러한 점에서 나의 체계로 귀착된다.(라이프니쯔, [변신론], 208항)

 

라이프니쯔에게 신은 가능한 최대의 선함을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러한 선함은 세계 그 자체가 지닌 본래적인 특징이다. 따라서 신에게 걸맞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는 그 자체로 최대의 완전성 또는 실재성을 포함하는 세계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쯔에게 신의 지혜는 선에 대한 지혜이며,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최선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신의 지혜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말브랑슈의 체계는 결국 그 자신의 변신론 체계로 귀결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말브랑슈의 어떤 구절을 보면 실제로 말브랑슈 스스로 라이프니쯔와 자신의 입장이 동일한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그의 지혜의 무한한 보고 가운데서 무한하게 가능한 세계를 발견하면서 [...] 이 세계를 창조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 이 세계는 이것을 생산하거나 보존하는 데 필요한 방식들의 단순성과 관련해 볼 때 가장 완전한 것임에 틀림없다.” ([자연과 은총에 관한 논고] 제1 논고 1부 13절) 또한 그는 라이프니쯔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선생께서는 [...] 신이 그의 지혜 속에서 발견한 모든 가능한 작업 계획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아주 잘 증명하셨습니다.” (라이프니쯔에게 보내는 1711년 12월 14일자 편지)


  하지만 말브랑슈가 “이 세계가 [...] 가장 완전한 것”이라거나 신이 “모든 가능한 작업 계획 가운데 최선의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라이프니쯔의 생각과는 꽤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라이프니쯔에게 보내는 같은 편지에서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신의 작품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작품이지만, 이는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이 실행되는 방식들과 비교해볼 때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그의 작품의 탁월함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단순성과 풍요성에 의해, 방식들의 지혜에 의해서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앞의 편지) 

 

이는 [변신론] 208항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쯔는 “단순성과 풍요성”이 “가능한 최대의 완전성을 산출한다는 한 가지 장점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말브랑슈는 세계의 완전성은 “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작업이 실행되는 방식들과 비교해볼 때 그러한 것”이라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곧 라이프니쯔가 신의 완전성은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세계의 완전성을 통해 표현된다고 보는 반면, 말브랑슈는 그것은 오직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방식, 더 나아가 신이 행위하는 방식의 “단순성”에 대하여 상대적이라고 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차이가 드러내는 것은 무엇일까? 찰스 라모어(Charles Larmore)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결과론”대 “의무론”의 차이로 표현한 바 있다(찰스 라모어, [근대성과 도덕]) 곧 라이프니쯔가 신이 창조해낸 결과의 최선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말브랑슈는 결과의 완전성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신의 자신의 필수적인 원칙을 준수하느냐 여부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도덕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여러 저술을 감안하면, 두 사람 사이의 입장에 이처럼 확연한 대립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의 차이로 보는 것이 조금 더 적절할 것이다. 곧 라이프니쯔가 신의 도덕적 완전성과 전능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교리와 자연 세계의 불완전성 사이의 괴리에 대하여 이상적인 조화의 가능성을 주장했다면, 말브랑슈는 그러한 괴리가 지양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수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브랑슈에게 신은 오직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위할 뿐, 이 세계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무관심하다. 아르노 같은 교조적인 신학자들이 보기에 이는 신의 도덕적 완전성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한 발언처럼 보였지만, 말브랑슈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신의 자유와 완전성을 구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속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입장이 좀더 현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VI. 맺음말

 

 

  어떤 측면에서 보면 17세기 후반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심신 문제도 실체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도 아니었고, 오히려 변신론 또는 창조된 세계의 명백한 불완전성과 불의에 직면하여 신의 방식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신론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보면 말브랑슈의 저작은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그것은 첫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라이프니쯔는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을 비판하면서, 말브랑슈의 신은 자연 중에 개입하면서 물체와 사유의 법칙을 중단시킨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우리가 본 것처럼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말브랑슈의 신은 오히려 항상 자신이 제정한 일반 법칙에 일치하게 행위하며, 그의 기회원인론이 의미하는 것은 신은 그가 제정한 일반 법칙, 곧 자연 법칙에 따라 자연적인 사물 내에서 행위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진정한 원인으로 간주될수록, 자연적인 법칙은 더욱 철저하게 작동하고 일양적으로 준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회원인론과 종종 결부되곤 하는 인격적이고 자의적인 신에 관한 인상이 상당히 그릇된 것임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말브랑슈의 변신론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매우 현실주의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곧 그와 논쟁했던 다른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신의 완전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불완전성과 악, 불의 등을 부정하거나 완화시키려고 또는 헤겔 식으로 말하면 지양하려고 했지만, 말브랑슈는 다름 아닌 신 자신의 속성에 의거하여, 그리고 그가 제정한 일반 법칙에 의거하여 이 세상의 불완전성과 악은 지양 불가능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인 도덕철학이나 정치철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관점이다.

 

 

참고문헌


 

Aquinas, Thomas(1997). 󰡔신학대전󰡕 3권, 정의채 옮김, 서울: 바오로딸.
Arnauld, Antoine(1775). Réflexions philosophiques et théologiques sur le nouveau système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in Oeuvres de Messire Antoine Arnauld, vol. 39, Paris: Sigismond D'Arnay.
Augustinus(1998). 󰡔자유의지론󰡕, 성염 옮김, 대구: 분도출판사.
      (2004). 󰡔신국론 11~18권󰡕, 성염 옮김, 대구: 분도출판사.
Larmore, Charles(1993). Modernité et morale, Paris: PUF.
Leibniz, G.W.(1969). Essais de Théodicée, ed., Jacques Brunschwig, Paris: Flammarion; 󰡔변신론󰡕, 이근세 옮김, 아카넷, 2014.
Malebranche, Nicholas(1976). Oeuvres complètes de Nicolas Malebranche, ed., André Robinet, Paris: Vrin.
      (1992). Treatise on Nature and Grace, trans., Patrick Rile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Moreau, Denis(1999). Deux cartésiens: la polémique entre Antoine Arnauld et Nicholas Malebranche, Paris: J. Vrin.
Nadler, Steven(2000).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Malebranche, Cambridgeㆍ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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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이리뷰"에 한국일보 토요일치 신문에 실릴, [유럽을 지방화하기] 서평을 올렸는데,

 

올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평 안에 책의 구체적인 내용이 좀더 담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마이리뷰"에 올린 서평을 거의 새로 쓰다시피해서 어젯밤에 다시 보냈습니다.

 

한국일보 서평 수정본을 이 책의 소개를 겸하여 여기에 다시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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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0년에 출간된 이래 많은 화제를 불러온 역작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저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 곧 종속적인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는 인도 역사를 서술하는 영국의 식민주의적 관점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도 부르주아 역사학의 민족주의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서술하려는 급진적인 기획이었다. 라나지트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가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구하는 19세기 인도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서발턴 농민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그들을 인도 역사의 주체로 새롭게 세우려고 했다. 일종의 민중사 기획인 셈이다.


 

  그런데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프리즘 총서 12권)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구하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재현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구하가 들려주는 서발턴의 목소리는 역사가로서의 구하가 설정한 틀에 따라 재현된 것이며, 그가 생각하듯 진짜 서발턴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문젯거리로 남게 된다.


  차크라바르티는 이 책에서 서발턴과 재현의 문제를 좀더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이번에는 역사라는 것의 성격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주의는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텅 빈 시간이라는 개념, 곧 역사적 사건들이 그 속에서 전개되는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틀로서의 시간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역사주의를 문제 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역사주의야말로 유럽의 식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통찰이다. 역사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둘째, 역사주의는 서발턴 역사의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는 데 근본적인 장애물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캘커타 공장 기계 노동자들의 예를 든다. 이 노동자들은 매년 가을마다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례를 지낸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이는 전(前)근대적 의식의 흔적이다. 곧 자신들의 기계가 잘 가동되도록 모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계 숭배는 우발적인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이 노동자들의 의식과 생활에 늘 함께 하는 신성(神聖)을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따라서 사라져야 하고 세속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노동자들 자신이 지닌 의식과 믿음, 생활은 이미 역사주의적 틀 바깥으로 배제되어 버린다.


 

  이 사례는 구하가 분석했던 19세기 인도 농민 봉기의 사례와 곧바로 연결된다. 농민 봉기 당시 어떤 농민들은 봉기는 자기들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니라 타쿠르라는 신이 명령한 것이며, 그 신이 직접 싸움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하는 이들의 의식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되살리려고 노력하면서도 이것을 “그들에게 진리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역사가 구하와 서발턴 농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발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주의를 포기하고, 거기에 입각한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을 포기한 가운데 서발턴의 의식과 믿음을 역사가 자신도 있는 그대로 따라야 할까? 하지만 그 경우 보편성과 합리성은 상실될 것이다. 더욱이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근대 문명 역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은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발턴의 의식과 삶이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역사학에 대하여 일종의 도전이자 한계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발턴이라는 틈새를 포함하기 위해 역사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들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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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1) `文明`이란 개념 자체가 발전주의적이거나 역사주의적인 것이죠. 애초부터 문화의 위계서열을 전제한 유럽중심적이고 근대중심적인 개념입니다.

마르크스도 그렇지만 헤겔이야말로 역사주의자입니다.

2) 나는 차크라바리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1부는 이론적으로 흥미진진한데 2부는 퇴행적이고 신통치 않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2부는 이론적으로 빈곤해요.

탈구축적 보편성이건 탈중심적 보편성이건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보편성이나 보편주의를 앞세우는 ˝근대˝ 또는 근대성 혹은 유럽중심주의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뿐이에요.

오히려 근대를 흐트러뜨려야 합니다. 한마디로 근대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거지요.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그러면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이른바 근대 문명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보편성이 상실되는 게 난 오히려 바람직해 보이는군요. 그리고 근대적 이성이 무너진다고 합리성이 상실된다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웃기군요.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근대주의자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역사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고 근대 또는 보편성을 무너뜨리는 역사학을 추구하면 되는 겁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편적 인식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이 그런 위치를 찬탈한 겁니다.

보편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차이로 구성되는 것일 뿐입니다.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데 남자만 달랑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때 그 ˝남자˝라는 그 단어의 의미가 성립합니까?

보편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유럽중심주의의 효과입니다.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보편적 인간이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차이를 배제하지 않았던 역사학이라는 것은 없었죠.

각각의 인간들의 차이(젠더, 계급, 종교, 나이, 지역 등등)를 최대한 드러내는

˝차이의 역사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군요.

이른바 근대 문명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겁니다.

근대를 그 안에서 최대한 흐트러뜨려서 더 이상 근대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탈구축적 보편성이든 그냥 근대적 보편성이든 그것들을 추구하거나 거기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변형된 유럽중심주의에 불과합니다.

비교사 좋아하는 강철구나 벤틀리(이른바 지구사) 같은 사람들이 그 예죠.

르네상스 창녀 2014-10-13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정리하자면

1) 문명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문화를 위계서열화하는 폭력적인 유럽중심주의의 지배효과라는 것.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세계의 모든 역사는 하나의 단일한 과정이고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올라간다는

헤겔 같은 역사주의자 또는 발전주의자가 좋아하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문명˝이라는 개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유럽중심주의의 시선을 이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죠.

유럽의 지방화를 애기하면서 이 개념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하고 ˝절망적˝인 것입니다.

2) 보편은 그 자체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 인식은 ˝원래부터 또는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보편적 인식이란 것은 애당초 없습니다!

단지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유럽이 그 보편의 ˝자리˝를 찬탈할 것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려는 생각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지배효과입니다.

3) 따라서 유럽중심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또는 유럽을 지방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안에 머무르거나 (근대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적이므로) 보편성 또는

탈구축적 보편성 및 탈중심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에는 유럽중심주의에 함몰되는 행위이거나 변형된 유럽중심주의에 머물고 말 거라는 겁니다.

(절대주의나 객관주의, 상대주의나 다원주의도 다를 바 없습니다.)



3) 오히려 근대에 머물지 말고 그 안에서 근대를 흐트러뜨려야 합니다.

더 이상 근대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보편성을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차이˝를 더 드러내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위에 써있는 글의 표현을 빌려오면 역사주의적 근대 문명을 배제해 버리고

이른바 보편성과 합리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역사주의를 벗어나고 유럽중심주의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유럽중십주의의 선물인 근대 국가도 파괴해야 합니다!)


4) 따라서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도 그 근대적 성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럽중심적인 이른바 ˝보편성˝이나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파괴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는 보편으로 근대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질적이고 저항적인 ˝차이˝를

최대한 드러내는 역사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5) 보편을 추구하면서 ˝차이˝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을 폐기 처분하면서 ˝차이˝를 재현하는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차크라바르티의 견해와 발마스 님의 견해에 반대하는 거죠.


*보편성 폐기

*합리성 폐기

*근대 문명 배제 (예를 들어 근대 시민사회나 근대 국민-국가 파괴)

*역사주의와 발전주의 파괴

*근대적인 합리성이나 보편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역사학 추구.

*˝차이˝의 역사학을 추구하면서 재현의 문제에 대해 모색.

더 이상 ˝근대 사회˝라고 부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비로소 유럽중심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근대 국민-국가를 파괴하고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거나

보편성이나 보편적 인식을 폐기처분한 바탕에서 ˝차이˝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한  권의 프리즘 총서 출간 소식을 전합니다.

 

소식이 너무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빼놓고 넘어갈 수 없어서 페이퍼를 씁니다.

 

바로 <프리즘 총서> 13권으로 출간된 에밀 벵베니스트의 "인도유럽사회의 제도, 문화 어휘 연구 1"입니다.

 

이 책은 제가 예전에 "마이리스트-좀더 널리 읽혀야 할 책 1"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지난 1999년에 아르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곧 절판된 책입니다.

 

이 훌륭한 책이 그냥 사장되어버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프리즘 총서에 수록하게 됐고

 

역자이신 김현권 선생님은 이 책을 새로 출간하면서 초판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좀더 완성된 번역본이 되도록 애를 써주셨습니다.

 

 

이 페이퍼의 제목을 "서양 인문학을 전공하려는 사람에게 1순위로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붙였습니다.

 

이 제목은 다소 과장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약소한 것이기도 합니다.

 

 

과장된 이유는, 서양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1순위"로 꼽은 이유는, 서양 사회의 제도와 문화에서 가장 기본적인 어휘들, 가령

 

"주다와 취하다", "친족 관계', "도시와 공동체", "노예와 이방인", "왕권과 그 특권", "법", "신성", "제사" 등과

 

관련된 어휘들의 산스크리트적 기원과 그리스, 라틴어로의 전승, 그 이후 서양 개별 언어로의 분화 등을

 

아주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 유럽어에 속하는 다양한 고전어와 현대어에 능숙하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이 작업,

 

더욱이 개인이 혼자서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 작업은

 

오직 수십 개 언어에 능통한 벵베니스트만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서양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늘 곁에 두고 참고할 만한 책이라는 점에서

 

"1순위로 권하고 싶은 책"으로 꼽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많은 지식과 더불어 영감을 얻을 만한 사람이 꼭 서양 인문학 전공자는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 이 페이퍼의 제목은 너무 약소한 것입니다. 

 

한국학을 비롯한 동양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 또는 인문학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 모두에게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지식과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사실은 누구에게나 한번 읽어보고, 소장하기를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부디, 이 책이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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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지방화하기 -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 프리즘 총서 15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음, 김택현.안준범 옮김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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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트의 [유럽을 지방화하기]가 "프리즘 총서"  15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마이페이퍼"에서 소개할까 했는데, 마침 한국일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요청해서

 

한국일보 서평 원고로 이 책의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중요한 문제의식과 독창적인 개념화, 빼어난 문체 등이 어우러진 차크라바르티의 걸작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히고 논의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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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초판이 출간된 인도 출신 역사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아직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단언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이미 고전이 되어가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미 10여개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수많은 서평과 논평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책이 해체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럽 대륙 내부에서 유럽을 탈식민주의의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간된지 불과 15년만에 이 책이 이처럼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라나지트 구하를 비롯한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서발턴 역사학이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더욱이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려는 새롭고도 급진적인 역사학 기획이었다.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 스피박의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등이 바로 이러한 기획을 대표하는 저작이며, 차크라바르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유럽을 지방화하기] 역시 서발턴 역사학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책의 제목이 “유럽을 지방화하기”일까? 유럽을 지방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여기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주의를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서구 내지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적인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차크라바르티에 따르면 유럽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해준 것이 바로 역사주의였으며, 식민지 체계가 종식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런 사유 방식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역사에는 단일한 발전과정이 존재하며, 각 나라 및 문명은 이 과정에서 얼마나 앞서 있고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에 따라 그 수준의 정도가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을 해체하려는 것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이것을 새로운 보편을 세우자거나 보편을 다수화하자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유럽식 보편주의는 한물 갔으니 이제 아시아적 보편을 세울 때가 되었다, 이제 세계의 패권은 아시아로 넘어왔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유럽식 역사주의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할뿐더러, 헌팅턴 식의 문명충돌론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유럽의 사상 및 문명 전체를 거부하자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차크라바르티가 유럽을 지방화하기 위해 주로 의지하는 사상적 원천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및 푸코 같은 유럽의 사상가들이다. 중요한 것은 단일한 역사 발전 과정을 가정하는 관점을 해체하고, 각각의 문화, 각각의 나라, 각각의 지역에 고유한 역사적 삶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역사주의는 우리의 삶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정희 시절에는 조국 근대화라는 구호로 나타났고, 지금은 선진국 따라잡기라는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획일화된 도식이 얼마나 사람들의 삶을, 특히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몫 없는 이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역사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들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기획을 어떻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해보고 또 각자 답변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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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이 2014-10-0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갈 길이 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