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대담집인 [에코그라피]가 재출간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책이 언제 다시 출간되는지 문의했던 분들이 많은데, 무려 12년만에 재판을 내게 되어

 

죄송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합니다.

 

새로 출간된 이 책이 새로운 독자를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재판 역자 서문]은 아래 주소로 가시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689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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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획 연재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8번째 원고입니다.

 

<제 3부: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중에서는 첫번째 원고이고, 케인스에 관한 글입니다.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324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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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2014-07-20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송하지만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쓰지 말아주세요.

balmas 2014-07-20 16:20   좋아요 0 | URL
제 연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제가 함부로 썼는지 좀 말씀해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제가 케인스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은 없어도 함부로 쓴 것은 없는 듯한데, 혹시 지적해주시면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듯합니다.

도라에몽 2014-07-2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말도 없지만 아는 것이 없는데 함부로 쓴것도 없다는 말 자체가 함부로 썼다는 겁니다. 뭘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어떤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생각을 좀 해보세요. 다큰 사람 가르쳐달라는 말도 좀 그러네요 본인이 쓰신 저글을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balmas 2014-07-21 10: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예, 댓글 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좋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운영위원으로 일하는 "시민행성" 모임에서 이번 봄 학기 강좌를 시작합니다.

 

"시민행성"은 고려대 선생님 몇 분과 시인, 예술가, 사회활동가 등이 꾸리는 시민 인문학 운동 모임입니다.

 

한 2년 동안 고려대 생활도서관을 중심으로 강의와 모임을 갖다가

 

이번에 경복궁 바로 옆에 새로 공간을 만들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들의 권유로 운영위원으로 일하게 되어

 

이번 봄학기에 시민행성에서 강의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이번 강의는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에 관한 강의입니다.

 

이 강의는 지난 겨울에 철학아카데미에서 한 차례 한 적이 있는데, 시민행성의 강의 요청으로

 

이번에 다시 한번 더 하게 됐습니다.

 

 

시민행성 강의에 관한 자세한 소개는 아래 주소에 나온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itizenplanet.tistory.com/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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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프리즘 총서 신간 소식을 전합니다.

 

프리즘 총서 12권은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헤겔]입니다.

 

이 책은 초판이 출간된 1975년 이래 영어권에서 가장 탁월한 헤겔 연구서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고

 

독일어로도 일찍이 번역된 바 있습니다.

 

찰스 테일러의 헤겔 연구로는 약 20여 년 전에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번역으로

 

[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서광사, 1990)

 

라는 책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테일러의 헤겔 연구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이

 

프리즘 총서로 출간되어 기획자로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국역본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책이 훌륭한 번역으로 출간된 것은

 

무엇보다 역자인 정대성 선생의 노고 덕분입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선배이자 성실한 철학자인

 

정대성 선생은 독일과 영미의 비판이론의 정수를 소개하기 위해 그동안 애를 많이 써왔는데,

 

이 책의 번역을 통해 그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고 유능한 연구자인지 다시 한번

 

입증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방대한 책을 꼼꼼하게 교정을 보느라 애쓴 그린비 김재훈 씨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국내의 헤겔 연구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라고, 테일러의 사상을 좀 더 정확히

 

알리는 데도 일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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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창녀 2014-06-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거 재간 아닌가요?

W 2014-12-3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가 될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번역이 `훌륭한` 건가요? 아니면 원서로 500페이지를 넘기는 그 분량에 비추어 봤을 때 그렇다는 건가요? 자잘자잘한 것들은 차치하고, 완전한 오역, 그러니까 정반대로 해석한다거나 아니면 몇몇 구절을 누락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의미에서 `훌륭하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balmas 2014-12-30 13:08   좋아요 0 | URL
예, 그건 전체적으로 좋은 번역이라는 뜻이죠. 혹시 읽다가 번역에 의문이 가는 점이 있으시면, 그린비출판사에 연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저런 대목에서 잘못이 있을 수 있는데, 나중에 2쇄를 낼 때 고칠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겠죠. 프리즘 총서에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겨레 기획연재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7번째 원고 올립니다.

 

신문에 실린 원고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문에서는 "폭력을 정당화한 나치스의 무기는 '욕망의 결속'"이라고 제목을 잡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30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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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누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를 읽는가? 마르쿠제는 주지하다시피 1968년 세계 여러 곳을 휩쓸었던 반역과 저항 운동의 지적 상징이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 마오쩌둥과 더불어 68 혁명의 ‘3M’ 중 하나로 불리며 세계 각국의 청년들에게 반역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인 <일차원적 인간>(1964)은 출간된지 5년 만에 미국에서만 1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하지만 68혁명의 정신적 스승(guru)이라는 이미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상가로서 마르쿠제에게 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확산시킨 도구적 합리성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망의 해방적 성격을 찬양하고 학생, 빈민, 일용직 노동자 같은 사회의 주변부 집단을 새로운 혁명의 주체로 예찬하는, 68 혁명 시대의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사상가, 히피 철학자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만한 철학자다. 파시즘과 서구 자유주의 사회를 연결하는 깊은 연속성에 주목하고,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사상가가 바로 마르쿠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 유행하는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은 마르쿠제의 데자뷔라고 할 수도 있다.


  청년 시절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으로서 열성적으로 정치 운동에 가담했던 마르쿠제는, 독일 혁명의 실패에 실망하여 정치 활동을 접게 된다. 하지만 1923년 출간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그리고 1927년에 나온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마르쿠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두 저작을 통해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정치 전략과 전술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결여되어 있던 인간의 실존적인 삶의 모습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하이데거에게 가서 4년 동안 <헤겔의 존재론과 역사성 이론의 기초>라는 제목의 교수자격논문을 쓴다.


  하지만 1932년 하이데거의 거부로 이 논문은 통과되지 못한 채 그대로 출간되었다. 마르쿠제는 1년 뒤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하이데거가 나치스 당에 가입하고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나치스의 검은 그림자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고 마침 역시 미국으로 자리를 옮긴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와 합류한다. 1930년대 이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쿠제는 어떻게 나치스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대중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탐구가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저술은 그가 미국 정보국 요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의 글들이라는 점이다. 이 글들에는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 산업사회의 지배 양식을 분석하는 마르쿠제의 기본 논리가 이미 나타나 있다.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로부터 공동 저술을 제안 받았지만, 그 제안 대신 미국 전략사무국(OSS) 요원으로 근무하는 것을 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가야 할 책임감 때문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대신 아도르노와 공동 저작을 집필하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계몽의 변증법>(1943)이다.


  마르쿠제가 전략사무국 요원이 된 또 다른 이유는 그 활동의 주요 부분 중 하나가 나치 독일에 대한 지적ㆍ이데올로기적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나치즘을 무너뜨리고 독일의 해방을 앞당기고 싶어 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나치즘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모든 지적 작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즉 진정한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이 현실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대에 도대체 왜 혁명이 와해되거나 타도되었고, 구시대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더욱 악화된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을까?”(<혁명이냐 개혁이냐>)


  “현대 기술의 몇 가지 사회적 함의”(1941)라는 글에서 마르쿠제는 나치스가 건설한 제3제국은 현대의 “테크노크라시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나치 독일이 서구의 다른 산업 국가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 곧 무력과 폭력, 억압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라, 고도의 기술적 합리성을 구현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뜻한다. 테러리즘과 강압이 나치즘의 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치스의 전체주의적 지배의 핵심에는 기술적 합리성의 양가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는 고도로 합리화되고 기계화된 경제 및 극히 효율적인 생산성이 또한 전체주의적 억압 및 지속적인 물질적 희소성의 이해관계를 위해 작용할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한 놀라운 사례 중 하나다.”


  기술적 합리성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인간을 노동의 고역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적인 힘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고 즉물적인 이해관계를 추종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개인들이 군중을 이루고, 군중 속의 인간들은 이러한 삶의 양식을 위협하는 적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군중의 일원으로서 인간은 단순한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표준화된 주체가 되었다. 군중 안에서는, 사회가 경쟁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에 대하여 부과하는 제약이 효력을 상실하고 이에 따라 공격적인 충동이 쉽게 표출된다.”(“현대 기술의 몇 가지 사회적 함의”) 이러한 충동은 그 사회의 “가장 약한 경쟁자들 및 눈에 띄는 이방인들”, 곧 유대인, 외국인, 국민 내의 소수 집단을 향해 집중된다.


  따라서 기술적 합리성은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것의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독일의 심성”(1942)이라는 글은 이를 국가사회주의의 심성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하나는 즉물성, 효율성과 성공, 기계화와 합리화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적인 이교주의, 인종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같은 신화론적 측면이다. 기술적 합리성은 나치스 지배의 핵심을 이루지만, 이것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감정, 욕망, 충동의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신화론적 요소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론적 요소는 단순히 조작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내면화하는 가치의 핵심이며, 이것이 공동체의 통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고 절멸 전쟁을 추진하게 만드는 심성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나치스 지배의 인간학적 기초는 심성과 욕망에 대한 지배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것의 합리화, 심성과 욕망의 지배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에게만 고유한 것인가? 마르쿠제는 1954년 <이성과 혁명> 재판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의 패배는 전체주의로의 조류를 중지시키지 못했다. 사유의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 영역에서도 자유는 퇴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생활의 안락을 늘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적 기구에 복종”(<일차원적 인간>)하는데, 이는 개인들이 지닌 욕망이 ‘허위 욕망’이기 때문이다. 곧 선진 산업사회에서 개인들은 지배 계급이 만들어낸 욕망을 자신들의 자율적인 욕망이라고 믿고 있으며, 상품의 보편화가 가능하게 만든 평준화된 삶의 양식으로 인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제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같은 티비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같은 자동차를 탄다. 혹시 누군가는 벤츠를 타고 누군가는 경차를 탄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이지 사회적 모순의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경쟁력을 높이는 것, 자기계발에 힘쓰는 것이다.


  마르쿠제가 보기에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도 “생산력에 대한 물신숭배”(<반혁명과 반역>)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기술적 합리성에 지배되고 있는 사회다. 오히려 서독의 노동자들이 폴크스바겐을 탔다면 동독의 노동자들은 품질이 떨어지는 트라반트를 탔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경쟁력이 훨씬 처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더는 마르쿠제가 제안한 해법을 채택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제시한 분석은 여전히, 적어도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만큼은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다시 마르쿠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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