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경향신문에 "뉴파워라이터" 연재 인터뷰에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네요.
아래 링크로 따라가시면 인터뷰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02038305&code=960205
인터뷰 기사에 대해 약간 오해가 있을 수 있어서 몇 가지 부연을 해두겠습니다.
1. "번역 오류에 철학자 탓하는 현실 고치려 공격적 비평"
이렇게 요약문이 나와 있는데, 축약된 요약문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저는 학부생 시절인 1988년-89년 무렵부터 알튀세르, 발리바르를 비롯하여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 같은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흥미를 갖게 됐는데, 예전에 그린비에서 나온 [인터뷰-한국 인문학 지각변동]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http://blog.aladin.co.kr/balmas/4982414 참조), 이것은 당시에 한국에 번역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서 생겨난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막 번역되기 시작한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의 책이나 글들을 읽으면서 프랑스철학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과 관련하여 오역 시비가 일어나지만 90년대 당시에는
특히 오역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럴 만한 것이, 전문가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독자들의 수요는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충분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분들이 난해한 책들의 번역을 맡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데리다나 라캉 저작의 오역이 특히 심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저작이 특별히 난해하고 또
문체가 가장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사실 90년대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저작 가운데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심각한 오역으로 인해 독서가 불가능한 것을
마치 이 사상가들의 기본적인 소양이나 자질 문제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철학을 오래 공부하고 철학계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이 그런 식의 비난과 불만을 제기하곤 했습니다.
저에게 특히 문제로 여겨졌던 것은,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 사상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중요한 통찰이 여럿 존재함에도, 독서가 어렵고 생소한 이들의 사상을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나
자본의 이데올로기 정도로 치부하려는 진보적인 연구자들의 시각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개선해보기 위해 이런저런 번역 비평을 하게 되고 또 직접 몇 권의 책을 번역하게 된 것입니다.
2. 공격적 비평
이 인터뷰에는 "공격적"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사진도 너무 공격적으로(?) 나와서 약간 부연을
해두어야 할 듯합니다.
사실 제가 공격적 비평을 한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일부분 시인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좀 억울한
측면도 있습니다. 제가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제가 조금 공격적으로 비평한 책들의 경우는
오역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책들입니다. 특히 데리다 책들의 경우가 그랬고 얼마 전에는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그랬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관련해서는 이미 해당 역자로부터
여러 차례 형사 고발과 민사 소송을 당해서 송사를 겪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소상하게
사건의 전말을 밝혀두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오역이라면, 선진국, 가령 프랑스 같은 데서는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매장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해당 번역자만이 아니라 출판사까지 제가 한 비평보다 훨씬 더 심각한 공격과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식의 오역은 해당 사상가를 지적으로 죽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의
학술이나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를 위협하고 독자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앞으로도 제가 생각하기에 너무 심각한 오역으로 점철된 책들이 있다면, 기회가 되는 대로
비평을 통해 바로 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역자나 출판사들이 오역 비평에 대해 소송이라는
고약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필요하다면, 고소를 당하든 고발을 당하든
번역 비평을 지속할 것입니다.
3. K군에게 보내는 편지
한 3년여 전에 교수신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2126)
한국 인문학, 특히 한국 철학의 제도적 현실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쓴 글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러 사람들이 그 글에 관심을 가져주었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공감을 표하는 분들도 있었고
또 어떤 분들은 서울대 학부 운운한 것에 대해 심각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죠. 서울대 학부를 나온 분들께
어떤 불편함을 드렸다면 그건 죄송한 일입니다. 학벌 위주의 학계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지만, 3년 뒤 현재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인터뷰에서 환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나라 인문학 대학원, 특히 서양 인문학 분야의 대학원은
이제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유능하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학생들은
이미 학부 때부터 유학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과정부터 외국, 특히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것이 관례화되고 정상적인 경로인 것처럼 굳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서양 인문학 분야를 전공하면서도
유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이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그럴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그럴 만한 지적 능력이
없거나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내 주장이 아니라 그렇게 평가된다는 뜻이죠. 따라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 인문학을 상징하는 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 주장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떻게든 이런 상황을 바로 잡아보려 애쓰지 않고
다만 제자들에게, 학생들에게 유학을 갈 것을 강권하고 그렇지 못한 제자들에 대해서는 눈을 딱 감아버리는 상황,
이것이 오늘날 한국 인문학계가 처해 있는 야만스러운 풍경입니다. 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
내가 생각하기에 대학원, 학문후속세대의 핵심은 박사과정입니다. 박사과정이 튼튼해야 대학원이 살고
대학원이 살아야 학문이 삽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인문학계, 특히 서양인문학계는 박사과정이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입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박사과정생은 그 대신 먼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미국의 대학원과 미국의 학계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오늘날도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선진 학문을 익히고 돌아온 그 연구자들이 나중에는 한국 대학원을 풍요롭게 하고 한국 학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내가 볼 때는 거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구자 역시
국내에 돌아와 다시 학부생이나 석사과정의 제자들을 미국의 명문 대학에 유학시키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죠. 영어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해야 취직이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명문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경로이기 때문이죠.
내가 궁금한 것은, 현실이 이런데 왜 국내 대학의 인문학 대학원에, 특히 서양 인문학 분야의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설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실업자들을, 비정규직 고등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기관과 다르지 않은 데도 말이죠.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를 쓴 다음, 그 후속편으로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한 j씨에게"라는
칼럼을 한 편 더 썼습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2545)
앞의 칼럼에 비하면 이 칼럼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k군에게 보내는 편지나
j씨에게 보내는 편지나, 내용은 달라도, 내 심정은 똑같이 진심입니다. 같은 문제를 보는 동일한, 하지만
상이한 두 개의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내가 후배들에게,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두 칼럼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길을 선택하는가는 그들 자신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