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월요일(1. 20) 한겨레 신문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 연재에 실릴 막스 베버 편 글을 올립니다. 

 

본격적인 연재의 시작인데, 독자들에게 어떤 반응이 나올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 신문에 수록될 때에는 다소간의 첨삭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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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막스 베버: 정치의 비극-근대성의 쇠우리에 갇힌 러시아혁명

 

 

 

막스 베버(1864~1920)는 생애의 말년에 ‘직업’과 ‘소명’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독일어 ‘베루프’(Beruf)를 제목으로 삼아 두 차례의 강연을 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충격이 유럽을 휩쓸던 무렵인 1917년 11월 7일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강연을 했고, 약 1년 뒤 이번에는 독일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1919년 1월 28일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을 했다. 이 두 개의 강연은 막스 베버의 이론적 유언으로 불릴 수 있을 만큼 그의 사상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강연은 왜 베버가 마르크스주의의 영원한 이론적 적수라고 불리는지 그 이유를 잘 보여준다. 러시아혁명 및 독일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베버는 도처에서 볼셰비키 혁명과 독일의 혁명 운동에 대한 비판과 불신을 감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두 강연, 특히 ‘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일종의 ‘반(反)사회주의 혁명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베버를 반동적인 사상가, 적어도 보수적인 이론가라고 규정해야 할까? 베버의 정치 사상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사상은 단순히 보수주의로 분류되기에는 너무 심원한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 두 개의 강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처 간파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더 나아가 해방의 정치 일반)의 한계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실로 베버의 문제제기는 죄르지 루카치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를 넘어 한나 아렌트, 모리스 메를로퐁티, 위르겐 하버마스를 거쳐 오늘날의 에티엔 발리바르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비판적 정치 사상에 지속적인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사상적 반향의 첫 번째 장소를 베버의 두 강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논점과 관련해보면 베버의 두 강연의 핵심 주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서양의 근대성을 탈주술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탈주술화란 세계의 배후나 근저에 이 세계를 움직이는 무언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 대신 합리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사람들은 이 세계와 사물들을 계산을 통해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근대적 개인이 미개인들에 비해 더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미개인은, 인류학자들이 잘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가령 미개인은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고 각종 약초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반면 현대인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전철을 타고 다녀도, 정작 그것의 작동 원리나 설계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베버의 논점은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를 통해 근대인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이전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에게 자연을 포함한 세계는 더는 숭배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가 더는 내재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베버는 그것을 죽음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찾는다. 생명의 유기적 순환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전통 사회의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면 무한한 진보와 끊임없는 변화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근대의 인간에게 죽음은 의미 없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진보 자체가 어떤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삶이란 그 진보의 선상에 놓인 작은 한 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버의 탈주술화 테제는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의 사회학적 변용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탈주술화로서의 합리화 과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베버는 그렇다고 믿었으며, 그것을 우리 시대의 운명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이제는 집단적인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과거에는 예언자의 성령 아래 대중의 격렬한 열정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이제 그것은 광신적인 종파를 만들어낼 뿐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베버가 볼셰비키 혁명을 “‘혁명’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장식되고 있는 광란제”(‘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라고 조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대인에게 남은 것은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조종하는 정령(Daimon)을 찾아 그에게 복종하는 길이다.

 

탈주술화의 사회ㆍ정치적 표현은 관료제로 나타난다. 베버는 근대 정치의 핵심적인 특징을 관료제의 발달에서 찾는다. 베버는 국가를 일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관계로 규정한다. 과거에는 군주나 지배자 이외에도 자주적인 귀족들이 독립적인 폭력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지만, 근대 국가에서 이것은 주권자에게 모두 귀속된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이 독립 생산자들의 소유물을 몰수함으로써 이루어졌다면, 근대 국가도 행정 관리 및 노동자로부터 정치적 경영 수단을 몰수하고 그들을 직업적인 관료 집단으로 만들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료제는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정치가 합리적인 경영의 문제가 되면서 잘 훈련받은 전문적인 관료 집단은 더욱 더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국가라는 지배관계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행정이 필요하며, 위계와 규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료제 아래에서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된”(곧 독자적인 지적 판단 및 생산 능력을 상실하고 “물건처럼 되어버린”) 대중적 개인들은 독자적인 가치관과 판단 능력에 따라 결정을 하기보다는 지도자의 명령을 추종하는데 그치기 때문에, 위대한 정치는 불가능해지고 만다.

 

따라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정치적 경영 수단으로서 ‘장치’(machine)를 수반하는 지도자민주정치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도자 없는 민주정치, 곧 카리스마적 자질이 없는 직업정치가의 지배를 택할 것인가? 신념윤리에 따라 위대한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결과들에 대한 책임윤리를 지닌 지도자의 카리스마적인 정치만이 탈주술화되고 관료제의 쇠우리에 갇혀 가는 근대 세계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러한 베버의 관점에서 보면 볼셰비키 혁명은 대의에 대한 헌신이라는 점에서는 신념윤리에 충실할지 모르지만, 근대 국가 및 정치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이며, 순진한 낭만주의에 빠져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의 이율배반에 대해 맹목적이다. 감격적인 혁명이 지나가면 일상이 찾아온다. 혁명의 성과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합리적인 경영이 요구된다. 가령 국가와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맞서 싸운 부르주아 제도를 다시 받아들이고 외국 자본을 이끌어 들여야 하며, 과거 러시아의 비밀경찰 요원들을 국가권력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폭력의 악마성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점이다. 베버에게 정치 윤리의 근원은 정치가 폭력을 통해 수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폭력을 사용하여 지상(地上)에 절대적인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요구되며, 이것은 추종자들을 도구화하는 것, 곧 정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해 성립한 새로운 질서 내에 이미 타락과 부패의 씨앗을 심어놓는다. 그들 각자가 고귀한 윤리적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는 한, 그들은 쉽게 또 하나의 지배 계급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버에게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의 지배와 구체제 권력집단의 지배 사이에는 인물이 교체되었다는 점과 이들의 아마추어리즘을 제외하면”(‘직업 및 소명으로서의 정치’)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울한 베버의 진단은 냉철하지만 또한 뚜렷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특히 젊고 야심만만한 사상가들에게 그것은 여러 모로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베버가 죽은 뒤 곧바로 두 명의 이단적인 제자들이 베버를 넘어서는 것을 이론적 목표로 삼았다. 한편으로 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출신의 보수적인 법학자 칼 슈미트는 가톨릭 신학에 기반을 둔 정치학으로 베버를 넘어서려고 했다. 극히 대조적인 이 두 가지 시도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의 정치와 사상의 경로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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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경향신문에 "뉴파워라이터" 연재 인터뷰에 제 인터뷰 기사가 실렸네요.

 

아래 링크로 따라가시면 인터뷰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02038305&code=960205

 

 

인터뷰 기사에 대해 약간 오해가 있을 수 있어서 몇 가지 부연을 해두겠습니다.

 

 

 

1. "번역 오류에 철학자 탓하는 현실 고치려 공격적 비평"

 

 

이렇게 요약문이 나와 있는데, 축약된 요약문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을 듯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저는 학부생 시절인 1988년-89년 무렵부터 알튀세르, 발리바르를 비롯하여

 

푸코와 데리다, 들뢰즈 같은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흥미를 갖게 됐는데, 예전에 그린비에서 나온 [인터뷰-한국 인문학 지각변동]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http://blog.aladin.co.kr/balmas/4982414 참조), 이것은 당시에 한국에 번역된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연구]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서 생겨난 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막 번역되기 시작한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의 책이나 글들을 읽으면서 프랑스철학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철학자들의 저작과 관련하여 오역 시비가 일어나지만 90년대 당시에는 

 

특히 오역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럴 만한 것이, 전문가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독자들의 수요는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충분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분들이 난해한 책들의 번역을 맡게 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데리다나 라캉 저작의 오역이 특히 심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저작이 특별히 난해하고 또

 

문체가 가장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사실 90년대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저작 가운데 읽을 만한 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분들은 심각한 오역으로 인해 독서가 불가능한 것을

 

마치 이 사상가들의 기본적인 소양이나 자질 문제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일반 독자들이 아니라

 

철학을 오래 공부하고 철학계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이 그런 식의 비난과 불만을 제기하곤 했습니다.

 

저에게 특히 문제로 여겨졌던 것은, 푸코나 데리다, 들뢰즈 사상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중요한 통찰이 여럿 존재함에도, 독서가 어렵고 생소한 이들의 사상을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나

 

자본의 이데올로기 정도로 치부하려는 진보적인 연구자들의 시각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개선해보기 위해 이런저런 번역 비평을 하게 되고 또 직접 몇 권의 책을 번역하게 된 것입니다.

 

 

2. 공격적 비평

 

 

이 인터뷰에는 "공격적"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사진도 너무 공격적으로(?) 나와서 약간 부연을

 

해두어야 할 듯합니다.

 

 

사실 제가 공격적 비평을 한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일부분 시인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좀 억울한

 

측면도 있습니다. 제가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제가 조금 공격적으로 비평한 책들의 경우는

 

오역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책들입니다. 특히 데리다 책들의 경우가 그랬고 얼마 전에는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그랬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관련해서는 이미 해당 역자로부터

 

여러 차례 형사 고발과 민사 소송을 당해서 송사를 겪고 있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적절한 시점에 소상하게

 

사건의 전말을 밝혀두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오역이라면, 선진국, 가령 프랑스 같은 데서는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매장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해당 번역자만이 아니라 출판사까지 제가 한 비평보다 훨씬 더 심각한 공격과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식의 오역은 해당 사상가를 지적으로 죽이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의

 

학술이나 문화의 기본적인 토대를 위협하고 독자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앞으로도 제가 생각하기에 너무 심각한 오역으로 점철된 책들이 있다면, 기회가 되는 대로

 

비평을 통해 바로 잡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역자나 출판사들이 오역 비평에 대해 소송이라는

 

고약한 방법으로 대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필요하다면, 고소를 당하든 고발을 당하든

 

번역 비평을 지속할 것입니다.

 

 

 

3. K군에게 보내는 편지

 

 

한 3년여 전에 교수신문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2126)

 

 

한국 인문학, 특히 한국 철학의 제도적 현실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쓴 글이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러 사람들이 그 글에 관심을 가져주었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공감을 표하는 분들도 있었고

 

또 어떤 분들은 서울대 학부 운운한 것에 대해 심각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죠. 서울대 학부를 나온 분들께

 

어떤 불편함을 드렸다면 그건 죄송한 일입니다. 학벌 위주의 학계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지만, 3년 뒤 현재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더 나빠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인터뷰에서 환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나라 인문학 대학원, 특히 서양 인문학 분야의 대학원은

 

이제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유능하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학생들은

 

이미 학부 때부터 유학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과정부터 외국, 특히 미국에서 유학을 하는

 

것이 관례화되고 정상적인 경로인 것처럼 굳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서양 인문학 분야를 전공하면서도

 

유학을 가지 못한 학생들이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그럴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그럴 만한 지적 능력이

 

없거나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내 주장이 아니라 그렇게 평가된다는 뜻이죠. 따라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오늘날 한국 인문학을 상징하는 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 주장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떻게든 이런 상황을 바로 잡아보려 애쓰지 않고

 

다만 제자들에게, 학생들에게 유학을 갈 것을 강권하고 그렇지 못한 제자들에 대해서는 눈을 딱 감아버리는 상황,

 

이것이 오늘날 한국 인문학계가 처해 있는 야만스러운 풍경입니다. 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  

 

 

내가 생각하기에 대학원, 학문후속세대의 핵심은 박사과정입니다. 박사과정이 튼튼해야 대학원이 살고

 

대학원이 살아야 학문이 삽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인문학계, 특히 서양인문학계는 박사과정이 부재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입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박사과정생은 그 대신 먼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미국의 대학원과 미국의 학계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오늘날도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선진 학문을 익히고 돌아온 그 연구자들이 나중에는 한국 대학원을 풍요롭게 하고 한국 학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내가 볼 때는 거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연구자 역시

 

국내에 돌아와 다시 학부생이나 석사과정의 제자들을 미국의 명문 대학에 유학시키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애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현실을 감안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죠. 영어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해야 취직이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의 명문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경로이기 때문이죠.

 

내가 궁금한 것은, 현실이 이런데 왜 국내 대학의 인문학 대학원에, 특히 서양 인문학 분야의 대학원에

 

박사과정을 설치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실업자들을, 비정규직 고등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기관과 다르지 않은 데도 말이죠.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k군에게"를 쓴 다음, 그 후속편으로 "인문학 대학원에 진학한 j씨에게"라는

 

칼럼을 한 편 더 썼습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2545)

 

앞의 칼럼에 비하면 이 칼럼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k군에게 보내는 편지나

 

j씨에게 보내는 편지나, 내용은 달라도, 내 심정은 똑같이 진심입니다. 같은 문제를 보는 동일한, 하지만

 

상이한 두 개의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내가 후배들에게,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두 칼럼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중 어느 길을 선택하는가는 그들 자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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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1-1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경향보거든요 신문보다가 발마스님보구 자랑스러웠어요 평소잘할걸 그랬다싶었다는ㅅㅅ

balmas 2014-01-12 19:14   좋아요 0 | URL
하하 마태우스님 반갑습니다.^^

저야말로 마태우스님 칼럼 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실험과 연구로 바쁜 분이 깨알같이 재미있는 칼럼을 꾸준히 쓰신다는 게

저로서는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여느녘 2014-01-13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울대 학부 운운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중 서울대 학부출신들이 많았나요? 정확하게 글을 읽었다면, 진태원교수님이 쓴 의도는 더욱더 공고해지는 학력구조였을텐데 말이죠. 이 연장선상에서 읽어야 우리나라 대학원 문제 더 나아가 영미권으로 꼭 유학을 가야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그저 '네가 서울대 못 나왔으니..'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열 받아서 격하게 해석합니다.)

아직 학계상황을 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다만 영미권 유학의 유무가 저렇게 팽배한지는 몰랐네요. 저 역시, 한국에서 공부하는거랑 외국에서 공부하는 거랑 뭐가 다를까. 원효대사도 그랬는데. 게다가 베트남에서 공부하나 독일에서 공부하나 일본에서 공부하나 영미권에서 공부하나, 각각의 문화를 다 아는 것에 경중이 있어야 되나,라고 생각했지요. 지금 또한 그렇고요. 다만 참......

경향신문의 인터뷰에서 나온 알라딘 블로그주소를 보고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가네요. 죄송합니다.ㅜㅜ

balmas 2014-01-14 00:16   좋아요 1 | URL
여느녘 님, 댓글 감사합니다.^^

사실 당사자의 경우에는 불쾌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제 의도는 말씀하신 것처럼 학벌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린나비 2014-01-15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이런 분들이 계시는군요. 괜찮은 분들은 다 떠난 줄 알았던 이 땅에! 호기심에서 기웃거려 왔는데, 가까이에 있는 진지한 분들을 못 알아봤네요!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야겠어요. 불끈! (지하철 동행자)

balmas 2014-01-15 10:52   좋아요 1 | URL
정 작가님, 이런 곳까지 찾아주시고 영광입니다.^^

그린나비 2014-01-15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에구! 저야말로 진짜 학자를 만난거 같아 반가운 마음, 영광보다 더해요.셈해지지 않는 1인으로 살아오면서 선생님께서 해주는 이야기 곰곰히 새기게 되요.늦게라도 눈 떠서 감개무량합니다요. ^^

balmas 2014-01-17 16:20   좋아요 1 | URL
ㅎㅎ 앞으로 서재에서 종종 뵙기로 하죠.
 

오랜만에 글을 쓰네요.

 

집에 일이 있어서 그동안 서재에 들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찾아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감사 말씀 드리면서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오는 1월 6일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한겨레 기획연재를 안내해드리기 위해 페이퍼를 씁니다.

 

이번 연재는 격주로 총 28회까지 진행될 예정이니까 대략 1년 1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글이 실릴 듯합니다.

 

기획 연재의 제목은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로 잡았습니다.

 

기획의 취지는, 총론에 나와 있듯이,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사건과 전개과정에 대한 사상적 대응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21세기 새로운 진보 정치와 사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원래는 한 40여 명을 다뤄보고 싶었는데, 신문사 사정상 그렇게 오래 연재를 하기는 어렵다고 해서

 

줄이고 줄여서 (피눈물을 흘리면서 ㅠ.ㅠ) 27명의 사상가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상가들, 이론가들이 빠졌다고 생각하실 분들이

 

꽤 있으실 듯한데, 저도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낼 때는 이번 연재에서 다룰 27명 이외에 10여 명을 추가해서

 

40여 명 정도를 살펴볼 생각입니다.

 

아무튼 1년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될 이번 연재에 많은 성원과 조언, 비평을 부탁드립니다.

 

 

 

 

아래 링크로 가시면 전체 총론과 목차를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183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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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1. 러시아 혁명의 반향

 

2. 막스 베버: 근대성의 쇠우리에 갇힌 러시아 혁명

 

3. 지외르지 루카치: 베버를 넘어-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4. 칼 슈미트: 사회주의 혁명에 맞선 보수주의 선언

 

 

2. 파시즘과 저항

 

5. 안토니오 그람시: 파시즘을 극복하라-헤게모니ㆍ진지전

 

6. 발터 벤야민: 역사를 구원하는 좁은 문

 

7. 허버트 마르쿠제: 기술적 합리성이 일상을 지배할 때

 

 

3. 냉전과 자유주의의 재구성

 

8. 존 메이너드 케인스: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하라-수정 자본주의

 

9.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국가에 대한 공포에서 신자유주의로

 

10. 이사야 벌린: 전체주의의 대안-자유민주주의

 

11. 한나 아렌트: 근대적 인간 조건 속에서의 자유

 

12. 존 롤스: 자유주의의 철학적 정당성

 

 

4.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13. 장-폴 사르트르: 역사의 총체성을 다시 회복하기

 

14.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먼 우회의 길

 

15. 위르겐 하버마스: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대성으로

 

 

5. 68혁명의 철학

 

16.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욕망의 역사유물론

 

17. 미셸 푸코: 규율권력과 주체화

 

18. 마리오 트론티: 노동자 계급에 기생하는 자본

 

 

6. 여성, 해방을 말하다

 

19. 시몬 드 보부아르: 남성과 평등한 여성

 

20. 뤼스 이리가레: 성차의 권리와 정치의 변혁

 

21. 주디스 버틀러: 성 정체성 전복에서 타자의 윤리로

 

 

7. 유럽 중심주의 넘어서기

 

22. 에드워드 사이드: 서양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 원리

 

23.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8.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도래

 

24.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급진민주주의

 

25.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다중의 공산주의

 

26. 필립 페팃: 비지배로서의 자유-신공화주의적 민주주의

 

27. 자크 랑시에르: 몫 없는 이들의 몫-무정부주의적 민주주의

 

28. 에티엔 발리바르: 평등자유명제-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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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를 시작하며

 

 

  20세기는 끝났는가? 21세기는 시작되었는가? 이 연재가 품고 있는 화두는 바로 이 질문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2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자축했을 때, 20세기의 종말은 자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10월 혁명에서 시작된 세계의 변혁을 향한 거대한 대장정이 결국 부질없는 백일몽에 불과했다는 고해성사를 수반했다. 하지만 거칠 것 없는 것으로 보였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지난 2008년 이후 심각한 균열과 모순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와 더불어 아랍의 민주화 운동,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의 봉기, 뉴욕의 오큐파이 운동이 전개되었고, 중남미에선 좌파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민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역사란 객관적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과 저항, 지배와 해방의 세력들이 전개하는 길항의 과정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지난 세기의 진보의 실패를 딛고 일어설 새로운 해방 운동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세계의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는 이런 관점에서 20세기~21세기 초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사상적 대응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역사와 시대가 던진 질문에 답하고자 했던 사상가들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새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낳은 사상적 반향이 연재의 출발점이다. 20세기의 시작을 알린 러시아 혁명은 환호와 더불어 공포와 불안을 낳았다. 막스 베버가 말년의 강연에서 정치의 비극이라는 이름 아래 러시아 혁명의 미래를 불길하게 예언했던 반면, 지외르지 루카치는 러시아혁명에서 베버 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의 주체 프롤레타리아를 발견했다. 다른 한편 칼 슈미트는 소비에트주의와 아메리카주의에 맞설 수 있는 보수주의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정치적 반응은 파시즘으로 표출되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로 이어지는 반동의 정치는 유럽을 어두운 대륙으로 만들었다. 이 반동의 흐름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파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고, 발터 벤야민은 좌절의 끝자락에 역사의 메시아를 호출하여 파시즘에 저항하려고 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 자본주의 세계 속에 일상적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음을 폭로했다.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유주의 진영은 곧바로 새로운 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른바 냉전이 시작되었고, 자유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우위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수정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제시했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이에 맞서 신자유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었다.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가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한나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입각한 정치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또한 존 롤스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소련과 중국의 갈등으로 표출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이라는 문제였다. 장-폴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조건이라고 선언하면서 역사적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탐색했다. 반면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로 돌아가기 위해 스피노자, 프로이트를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서독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주의 대신 근대성의 미완의 잠재력에서 비판이론의 토대를 발견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휩쓴 68 혁명은 전후 자본주의 체계의 모순을 드러냈으며, 동시에 정통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급진적인 해방의 사상을 위한 동력을 제공해주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반(反)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근거를 둔 역사유물론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미셸 푸코는 이 책을 격찬했지만, 그들과는 사뭇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역사유물론의 길을 걸어갔다. 이탈리아에서는 마리오 트론티가 마르크스주의 생산양식 개념을 급진화하면서 노동자주의에 입각한 역사유물론을 구상하고 있었다.

 

20세기 사상이 이룩한 탁월한 성과 중 하나는 페미니즘 및 서구 중심주의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과 평등한 여성의 가능성을 모색했고, 뤼스 이리가레는 여기에 맞서 성적 차이에 기반을 둔 정치 문명을 추구했다. 초기에 젠더 정체성의 문제에 주력하던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에는 근대의 실패와 폭력을 윤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길을 탐색하고 있다. 영원한 망명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 문명이 보편 이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비서구인들을 차별하고 지배하기 위한 원리였음을 보여주었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해체론의 관점에서 서발턴이라는 이름에 담긴 아포리아를 해명했다. 그것은 피억압자를 위한 해방 운동 속에 피지배자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담겨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신자유주의적 예속화를 동반하면서 이론가들에게 새로운 사상적 과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이라는 과제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제창하면서 급진민주주의의 길을 탐색하고 있다면, 󰡔제국󰡕의 공저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다중에 기초를 둔 공산주의적 민주주의를 제창하고 있다. 또한 영미 정치철학의 후예인 필립 페팃은 로마적인 공화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비지배 공화주의 이론을 제안하고 있다. 한편 알튀세르와 결별한 뒤 오랫동안 노동자 문서고에서 작업했던 자크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의 몫에 기반을 둔 정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제시한다. 그리고 에티엔 발리바르는 1789년 󰡔인권선언󰡕에 대한 재독해를 통해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연재가 20세기 변혁 운동의 실패와 한계를 딛고 새로운 해방의 세기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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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4-01-0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단독으로 글을 쓰시나요? 아니면 다른 (전공자) 필자분들도 참여하시나요?

balmas 2014-01-04 23:45   좋아요 0 | URL
예 이번 기획은 저 혼자 단독으로 쓰는 기획입니다.

독자2 2014-01-0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아침 한겨례에서 읽었습니다. 의미있는 작업이 되실 것 같군요. 그런데 서양사상사위주라 이걸 동양과 한국에서 받아들이면서 일어났던 사상가, 철학가들을 중간중간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들었습니다.

balmas 2014-01-07 01:01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갖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양이나 비서구 사상가들이 좀더 많이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저도 좀 유감입니다. 나중에 단행본으로 낼 때는 고려하도록 하겠습니다.

2014-01-09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4-01-09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이 기획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습니다.

이 기획은 연재가 끝난 후에 수정과 보완 작업을 거쳐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김동우 2014-01-10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다 서구 유럽과 북미 지식인들이군요. 20세기 사상에 비서구는 없나 보네요

balmas 2014-01-10 20:2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 비평이 당연히 나올 수 있겠죠.

그런데 사이드나 스피박은 적어도 유럽인이나 북미인은 아니죠.

저도 비서구 사상가를 몇 사람 더 추가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네요.

책으로 낼 때는 조금 더 보완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달 말에 출간된 [역사비평] 겨울호에 실릴 "책 머리에"를 올립니다.

 

"책 머리에"는 [역사비평] 편집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서론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서양철학도가 뜬금없이 [역사비평] 편집위원으로 일하게 된지도 벌써 3년 가까이 되었는데,

 

그동안 곁에서 동료 편집위원들이나 다른 필자분들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책머리에"를 쓰면서 또 한 번 더 좋은 공부를 했습니다.

 

이번 호 [역사비평]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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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간, 운동의 시간

 

 

1991년 미국의 젊은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펴낸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은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고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의 책은 크게 두 가지 논지를 담고 있었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에서 자유주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는 모든 정치 체제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목적이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는 그 원리에서 더 발전할 필요가 없을 만큼 완성된 것이므로 앞으로 문제는 이념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좁히는 일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역사는 말하자면 역사 이후(post-history)가 되리라는 것이 이 일본계 미국 학자의 예언이었다.

 

그 이후 역사의 흐름은 그의 예언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었다. 역사 이후의 시대라는 말에 담긴 평화와 화합의 이미지와 달리 세계는 인종과 종교가 다른 민족들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분쟁으로 얼룩졌으, 9·11테러와 이라크 침공, 아랍의 민주화운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과 침탈, 저항과 투쟁이 지속되고 있. 더욱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삶의 궁핍화는 한층 더 심화되어, ‘2080’, ‘199’, ‘갑을 관계같은 수많은 신조어들이 표현하듯 대다수 서민들의 삶은 훨씬 더 힘겹고 고통스러워졌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이익 보호 기구와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이른바 민주화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이제 운동의 시대는 끝났고 정치 제도의 정비를 통해 민주화를 완성할 때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다수 제시된 바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 자신도 한나라당이 집권하든 열린우리당이 집권하든 차이가 없다는 말로 이런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의 경험은 우리 사회에 역사 이후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았으며, ‘운동의 시간이 지나가지도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최근 벌어진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 논쟁은 오히려 다방면에 걸쳐 조직적이고 집요한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쪽은 과두제 세력이라는 점을 뚜렷이 입증하고 있다.

 

그러니 아마 문제는 다시 우리 스스로 역사의 시간, 운동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운동의 시간에서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기존의 성과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을 ‘87년 체제라 부르든 민주화라고 부르든, 현재의 반동의 시발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 성과의 허술함과 빈곤함에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좀 더 철저하고 급진적인 민주화운동,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민주화운동만이 지금의 반동이 파시즘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모두의 지혜와 노력이 절실한 때다.

 

***

 

이번 겨울호는 당연히,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특집 주제로 잡았다. 지난 830일 교학사판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 심의를 통과한 이후, 이 교과서는 지금까지 끊임없는 논란과 비평의 중심에 놓여 있다. 특집에는 네 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먼저 지수걸은 교학사판 󰡔한국사󰡕의 논리와 책략을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교학사판 교과서는 교과서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원칙이나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오직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수구 권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 교과서가 일제나 독재 세력에 대한 유구한 저항의 흐름을 무시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역사를 비판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교학사판 교과서의 맹점과 오류를 따지는 일은 이준식이 맡았다. 이준식은 교학사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역사 쿠데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교과서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부분인 일제강점기에 관한 서술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이준식은 특히 일본의 극우 사관을 대표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한국 뉴라이트의 교과서포럼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전자의 후쇼사 교과서와 후자를 모태로 출범한 한국현대사학회의 교학사판 교과서는 한일 양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역사의 극우화 경향의 두 상징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홍석률은 냉전적인 사고방식으로 불구화된 자유주의관을 문제 삼았다. 교학사판 교과서는 뉴라이트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의 이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본래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反共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기본적인 자유 및 다양성까지 제한할 수 있다는 냉전 시기의 반쪽짜리 자유민주주의의 지속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교과서를 제외한 다른 7종의 검정 교과서들을 좌경 용공 교과서로 몰아붙이는 교학사판 교과서 저자들의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직접 가르치는 김민수는 교학사판 교과서 자체에 대한 비판적 분석보다는 검정 교과서가 도입된 이후 학교 현장에서 역사 교육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상세히 서술하면서 검정 제도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있다. 검정 교과서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최대의 강점이지만, 이명박 정권 및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 교과서 선택권이 일선 교사에서 정치권의 압력을 받은 교육청 및 학교장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올바른 역사 교육을 위해서는 검정 제도의 내실을 기하면서 역사 교육의 중립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네 명 필자의 글을 통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교학사판 교과서는 보수 우파의 역사관을 담고 있는 편향된 교과서이기 이전에, 여러 오류와 사실 왜곡, 친일과 독재의 미화 등으로 점철된 수준 미달의 엉터리 교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교과서 논란을 빌미로 과거의 국정 교과서 체제로 돌아가자고 부추기는 일부 수구 언론의 행태는, 편향과 왜곡으로 점철된 교학사판 교과서와 거기에 깔려 있는 극우파 역사관을 이 기회에 한국의 공식적인 역사관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역사적 퇴행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에는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라는 주제 아래 세 편의 글을 수록했다. 포퓰리즘에 관한 기획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현재 한국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운위되는 포퓰리즘에 관한 용어법과 인식이 지극히 천박하고 자의적이라는 인식에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주로 보수 여당이나 우익 언론에 의해 복지 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수사법적 용어로 정착되고 있다. 하지만 포퓰리즘에 관한 이런 용어법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운동에서 유래한 포퓰리즘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현재 서양 학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포퓰리즘 연구의 방향과도 배치된다는 것이 이번 기획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전공하는 김은중은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포퓰리즘에 대한 우리의 이해방식이 얼마나 왜곡되고 천박한 것인지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좌파 민중 정권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는 대중 영합적 선동정치가 아니며 오랫동안 외세와 지주, 독점 자본에 시달려온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해방 의지의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 정치는 적어도 라틴아메리카의 맥락에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이탈리아사 전공자인 장문석은 베를루스코니와 북부동맹의 포퓰리즘을 분석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 포퓰리즘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정치 및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현재 이탈리아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 포퓰리즘은 무엇보다 정상 국가로의 복귀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탈리아 포퓰리즘은 정치 계급의 권력 독점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민주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지만, 베를루스코니의 통치를 경유하면서 권위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논점이다. 정치철학을 전공하는 진태원은 2000년대 한국 정치가 포퓰리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현재 서양 학계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포퓰리즘 연구를 소개한 뒤, 그것이 한국 정치를 인식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라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피플19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중심 개념이었던 민중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단 이때의 민중 개념은 다원적이고 저항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번호 ‘21세기 역사학을 찾아서에서는 냉전사를 다룬다. 사실 휴전 상태의 한반도는 냉전의 종식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남북한 간의 군사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긴장이 높고, 이를 구실로 상시적인 정치적 억압과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는 남북한 과두제 세력의 뿌리 깊은 지배 구조가 재생산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은 한반도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엄연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권헌익은 냉전이라는 개념과 현실을 둘러싼 유럽과 제3세계의 이해방식과 경험의 차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유럽에서 냉전이 장기적인 평화의 시기였다면, 한국이나 베트남 같은 제3세계에서 냉전은 국가와 민족, 가족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파괴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지정학적 의미의 냉전은 종결되었을지 몰라도 사회적 질서로서의 냉전은 끝나지 않았음을 인식하는 것이 글로벌 역사의 시각에서 냉전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학재는 냉전의 박물관이라 불리는 한반도의 현실에 주목하면서, 전쟁을 종식하는 평화의 제도적 형태 중 하나로 판문점 체제가 지닌 역사적 특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판문점, 제네바, 반둥을 연결하는 아시아 냉전의 틀 속에서 판문점 체제의 특징을 해명한다. 그에 따르면 판문점 체제는 진정한 의미의 탈냉전을 시도했던 반둥 회담과 달리 전쟁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한 미개한 군사 정전이면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반사회적·반민주적 체제이다. 두 편의 글은 우리 현실에 입각하여 냉전을 다시 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논쟁에서는 출간 50주년을 맞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남긴 논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의 원인을 반유대주의에서 찾지 않고 악의 평범성’, 곧 사유 능력과 판단력을 상실한 관료제하의 수동적 개인들에서 찾는 이 연구는 출간 당시부터 격렬한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송충기는 이 비판과 논쟁의 과정을 상세히 추적하면서 이 책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소개한다. 비록 역사적인 사실의 측면에서 아렌트가 여러 오류를 범한 것이 사실이긴 해도,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전체주의적 폭력의 집행자가 될 수 있다는 철학적 통찰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아렌트의 저서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이번 호 기획서평은 두 명의 필자를 다룬다. 우선 평생 한국사 연구에 매진했으며 올해 자신의 한국사 연구를 총괄하는 두 권의 저서를 출간한 일본 학자 미야지마 히로시의 업적을 기리고 평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일본의 후배 연구자이자 동료이기도 한 이타가키 류타는 미야지마가 역사학자로서 보기 드물게 독자적인 사관을 정립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면서 그의 한국사 및 동아시아 근대에 관한 연구에 대해 총괄적인 평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미야지마 사학의 특징으로, 서구의 봉건제 개념을 대신하는 동아시아의 고유한 근대성론, ··3국의 역사적 경험을 비교하는 비교사 방법, 현재와 역사의 긴장관계를 들고 있다. 그의 연구에는 근대 개념의 애매성과 자본주의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의 난점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러한 난점들을 새로운 연구의 기회로 삼는다는 점이 미야지마 역사학의 진정한 강점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왕현종 역시 미야지마의 두 책의 특징을 동아시아 비교사에 대한 추구로 간주하고 있지만, 이타가키와는 다소 다른, 또 조금 더 비판적인 시각에서 저작을 평하고 있다. 그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미야지마의 비판이다. 그는 미야지마 실증사학의 최고 업적으로 꼽히는 󰡔조선토지조사사업사의 연구󰡕(1991)가 불러일으킨 파장을 검토하면서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미야지마의 비판의 난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어떻게 소농사회론 및 유교적 근대론과 연결되어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미야지마 사학은 동아시아 전통사회 및 근대성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음에도 아직 완결적이고 정합적인 역사론으로 집대성되지는 못했다는 것이 필자의 비판적 결론이다. 두 필자의 결론이 어찌되었든 간에 40여 년에 걸친 한국사 및 동아시아사 연구를 통해 한국 역사학계에 새로운 화두를 제기한 것은 미야지마 히로시의 부인할 수 없는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기획서평은 최근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를 다뤘다. 프랑스철학을 전공한 박기순은 서평의 제목을 잊혀진 이름의 귀환이라고 붙였다. 이는 1965년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루이 알튀세르 외)에 공동 저자로 참여한 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잊혀 있다가 1990년대 이후 서양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국내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동시대의 사상가로 떠오른 랑시에르를 지칭하기에 적절한 제목이다. 서평은 랑시에르 사상의 전개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왜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망각되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왜 그토록 주목받는 사상가로 떠오르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해명하고 있다.

 

두 꼭지의 기획서평 이외에 이번호 역비에서 주목한 책은 동포로서 불완전하고, 다문화에도 해당되지 않는재외 동포들의 실태를 다룬 󰡔귀환 혹은 순환아주 특별하고 불평등한 동포들󰡕이다. 이 책은 재외동포의 이주 현황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의 다문화주의적 현실 또는 트랜스내셔널 실천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이용일은 서평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과 연구 성과에 주목하면서도 현대 이주 연구의 관점에서 이 책의 난점들을 꼼꼼히 지적하고 있다.

 

***

 

애초에 기획했던 원고들이 몇 편 빠지는 바람에 이번호 역사비평의 부피가 다소 홀쭉해졌지만, 수록된 원고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하기 어려운, 묵직하고 중요한 주제들이다. 귀한 원고를 보내주신 필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리며, 다음 호에서는 더욱 의미 있고 유익한 모습으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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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규 2013-11-22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다음 학기에 어느 학교에서 강의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외대에서 계속 푸코 강의 하시나요?

balmas 2013-11-22 23:57   좋아요 0 | URL
예 다음 학기에는 연대 비교문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요, 아직 주제를 정하지 못했는데,

아마 공화주의나 반폭력의 정치 둘 중 하나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 2013-12-2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선생님-이번 방학에는 시민행성 강좌는 안 열리나요? 혹시 학생들과 (정치)철학 관련 세미나 안 하시나요?

balmas 2014-01-03 23:54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예 이번에는 시민행성 강좌를 하지 않습니다. 방학 때 다른 일도 많고 해서
이번에는 다른 일정이 없습니다.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미국에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Reading Capital) 5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리네요.

 

http://www.versobooks.com/events/780-reading-capital-1965-2015

 

 

이 책은 1965년 초판이 나왔으니까, 2015년이 50주년이 됩니다.

 

이 책의 5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열린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입니다.

 

미국에서 알튀세르 및 알튀세리언들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그동안 다른 철학자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미미했을 뿐더러, 특히 알튀세르는 주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라는

 

논문으로만 알려지고 논의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50주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외국 여기저기서 이런 류의 학술대회가 많이 개최될 텐데

 

한국에서도 비슷한 행사를 한번 고려해봐야겠습니다.

 

그 전에 [자본을 읽자] 번역을 끝내야 하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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