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번역된 E. P. 톰슨의 [이론의 빈곤]에 대한 서평을 프레시안에 하나 실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110813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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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박 2014-01-1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선생님 드디어 어려운 길을 가시는 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샘이 가고자 하는 길은 많은 텍스트를 낳는 진정한 산모의 아픔이 아닐런지요? 힘네세요. 항상 진샘이 가는 길을 엿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키치박 2014-01-1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선생님 드디어 어려운 길을 가시는 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샘이 가고자 하는 길은 많은 텍스트를 낳는 진정한 산모의 아픔이 아닐런지요? 힘네세요. 항상 진샘이 가는 길을 엿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키치박 2014-01-1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선생님 드디어 어려운 길을 가시는 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샘이 가고자 하는 길은 많은 텍스트를 낳는 진정한 산모의 아픔이 아닐런지요? 힘네세요. 항상 진샘이 가는 길을 엿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키치박 2014-01-13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선생님 드디어 어려운 길을 가시는 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샘이 가고자 하는 길은 많은 텍스트를 낳는 진정한 산모의 아픔이 아닐런지요? 힘네세요. 항상 진샘이 가는 길을 엿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balmas 2014-01-13 01:51   좋아요 0 | URL
ㅎㅎ 예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역사비평] 겨울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지난 9월 27-28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단 "도래할 한국민주주의" 팀 주최로 열린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한 글입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을 다 마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글에 관한 토론이나 인용을 원하는 분들은 [역사비평] 지면에 실린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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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1. 문제로서의 포퓰리즘

 

2000년대 한국 정치의 특징 중 하나는 ‘포퓰리즘’이 담론과 실천의 두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모두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야당 후보인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이른바 ‘민주화 정권’이 시작되고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연이어 집권을 하게 되면서 해방 이후 6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보수 우익 세력 및 그들과 결탁된 보수 언론은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노무현 정권을 공격했다. 이 와중에 동원된 용어 중 하나가 포퓰리즘이었는데, 이는 2007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특히 무상급식 논쟁을 기점으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주로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국내에서 사용되는 포퓰리즘의 용법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주로 ‘대중영합주의’, ‘대중선동주의’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복지 정책’으로 표현되는 재분배 정책이나 다양한 형태의 사회권에 대한 공격을 함축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무상급식 논쟁이 대표적이거니와, 최근에는 지난 대선 박근혜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었던 노인 기초 연금 20만원 지급 공약이 공식적으로 폐기ㆍ수정되면서, 포퓰리즘은 재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보다 많은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공약이나 정책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표(票)퓰리즘’이라는 언론의 신조어는 이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준다.

두 번째 특징은 국내에서 포퓰리즘은 주로 보수적인 정치가들 및 언론에 의해 언급되고 있고, 야당이나 시민사회단체를 공격하기 위한 부정적인 용어법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의 경우 포퓰리즘이라는 명칭이 대개 프랑스의 국민전선(FN: le Front national)이나 이탈리아의 북부동맹(LN: Lega Nord) 또는 오스트리아 자유당(FPÖP: Freiheitliche Partei Österreichs) 등과 같은 우파 정당을 지칭하고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1990년대 이후 유럽의 포퓰리즘에 관한 최근의 논의로는 이번 호에 수록된 장문석의 글 이외에 정병기, 「서유럽 포퓰리즘의 성격과 특징」, 󰡔대한정치학회보󰡕 20집 2호, 2012 및 Daniele Albertazzi & Duncan McDonnell eds., Twenty-First Century Populism: The Spectre of Western European Democracy, Palgrave Macmillan, 2008 참조. 하지만 유럽의 포퓰리즘이 반드시 우파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유럽과 달리 동유럽에서는 말하자면 ‘좌파 포퓰리즘’ 역시 나타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Luke March, “From Vanguard of the Proletariat to Vox Populi: Left-Populism as a 'Shadow' of Contemporary Socialism”, SAIS Review, vol. 27, no. 1, 2007 참조.] 사실 서구 학계에서 최근 포퓰리즘에 관한 논의가 급격하게 증대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적절한 평가인지 여부는 차치한다 해도) 극우파 정당이 주도하는 포퓰리즘 정치가 민주주의에 큰 위협이 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Cristobal Rovira Kaltwasser, “The Ambivalence of Populism: Threat and Corrective for Democracy”, Democratization, Vol. 19, no. 2, 2012, p. 185.] 복지의 확대와 인권 및 사회권의 강화에 대한 요구들이 포퓰리즘으로 지칭되고 비난받는 것은 극히 역설적인 현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좀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정치적 현상으로서의 포퓰리즘이다. 2000년대 한국 정치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 중 하나는 ‘촛불시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지난 2004년 탄핵 정국 때 벌어졌던 촛불시위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대규모 촛불시위, 또한 2009년 여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이은 죽음을 빌미로 표출되었던 격렬한 애도의 정치는 2000년대의 한국 정치가 계급적 기반이나 조직적인 운동과 거의 관계가 없는 포퓰리즘적인 정치의 양상을 띠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우리는 이 글에서 ‘포퓰리즘’을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자 한다. 약한 중심을 갖는 이데올로기(thin-ideology)로서의 포퓰리즘은 1) 사회가 평범한 ‘인민’ 내지 ‘민중’과 지배적인 ‘엘리트’의 대립에 의해 분할되어 있다고 간주하고 2) ‘일반 의지’를 구성하는 평범한 인민 대중의 목소리와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파악하며 3) 이를 실현해줄 수 있는 탁월한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의는 최근 포퓰리즘을 연구하는 상당수의 학자들이 채택하는 정의다. 주 11)의 문헌들 및 주 45)에 나오는 라클라우의 정의를 참조하라.] 1987년 민주화 투쟁 및 노동자 대투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면, 2004년이나 2008년 촛불시위가 1987년 투쟁의 강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1987년 투쟁과 2004년 및 2008년의 촛불집회는 수십 만 명의 대규모 군중이 한 달 이상 동안 거리에서 전개했던 대규모 정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더욱이 전자의 투쟁이 학생 및 재야 조직, 노동자 운동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면, 후자는 조직적인 동원과 지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어떤 측면에서는 더 괄목할 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자가 (그것이 지닌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은 투쟁이었다는 점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사뭇 평가가 엇갈린다. 가장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multitude) 개념을 동원하여 촛불집회가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의 다중이 드디어 한국에도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반겼던 반면, 주로 사회운동권에 속한 좌파 쪽 사람들은 촛불집회는 엄밀한 의미의 정치적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이라는 문제, 따라서 전형적으로 중간 계급의 관심사와 결부된 대중적 불만의 표현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 낳았던 격렬한 정서적 반응에 대해서는 더 반응이 엇갈리게 나타난 바 있다.

 

따라서 촛불시위를 비롯한 2000년대 한국 정치(또는 어쩌면 그 이전 시기를 포함한 한국 현대 정치 일반)는 포퓰리즘 정치로 평가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포퓰리즘 정치는 비단 이른바 ‘민주화 정권’의 정치적 행태를 지칭할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이나 박근혜 정권도 포함되는 보수 우익 세력의 정치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나 2012년 대선의 박근혜 후보가 모두 박정희의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기대면서 고도 경제 성장의 신화를 동원하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으며, 특히 여야를 막론하고 정책의 형성이나 결정에서 여론의 동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현상은 이들이 전형적인 포퓰리즘적인 정치를 전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시화된 여론조사가 국민 내지 인민 그 자체(‘민심’)로 간주되는 것이 2000년대 한국 정치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징들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 국내에서 통용되는 포퓰리즘의 용법은 매우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협소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매우 부적절한 이유는 포퓰리즘의 역사나 전개과정, 외국의 사례들에 대한 분석에 기반을 둔 용어법이 아니라 자의적이고 정치 수사법적인 의도에 따라 야당을 공격하거나 복지 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친재벌적인 경제신문들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며, 지극히 협소한 이유는 주로 야당의 특정한 정책을 지칭하고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될 뿐, 여당과 야당 모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정치 현상 및 새로운 정치적 논리로 파악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홍윤기는 이처럼 ‘대중영합주의’나 ‘대중추수주의’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는 ‘popularism’이지 ‘populism’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포퓰리즘의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홍윤기, 「한국 "포퓰리즘" 담론의 철학적 검토」, 한양대학교 제3섹터연구소 편, 󰡔시민사회와 NGO󰡕, 4권 1호, 2006.]

 

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국내에서 통용되는 포퓰리즘의 용법이 협소하고 부적절하다는 점이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알렉산드르 헤르첸의 영향 아래 1870년대 러시아의 농민들을 계몽하려고 했던 러시아의 젊은 혁명가들(나로드니키)의 농촌개혁운동(나로드니체스트보) 및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대지주 및 금융재벌에 맞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했던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의 운동에서 유래한다.[여기에 대해서는 Paul Taggart, Populism, Open University Press, 2000 중 3~4장 참조.] 따라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전혀 부정적인 명칭이 아니었고, 우파나 극우파의 정치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었다. 포퓰리즘 운동의 기원은 기층 민중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에 참여한 이들, 특히 미국의 민중주의자들은 포퓰리즘을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생각했다.[미국의 포퓰리즘 또는 ‘민중주의’ 운동에 관한 연구로는, 안윤모, 「미국 민중주의의 기원: 제퍼슨, 페인, 잭슨의 경우」, 한국미국사학회 편, 󰡔미국사연구󰡕 13권, 2001 및 󰡔미국 민중주의의 역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 참조.] 또한 서유럽에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극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기 이전인 1960~80년대 초의 유럽에서는 공산당 중심의 전통적인 좌파와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 엘리트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그들의 삶이 직면하는 절실한 문제들을 제기하려고 했던 신좌파(New Left) 운동이나 신사회운동 또는 생태운동 같은 진보적 포퓰리즘 운동이 전개되었다.[이 점에 관해서는 Cas Madde, “The Populist Zeitgeist”, Government and Opposition, vol. 39, no. 4, 2004 참조.] 포퓰리즘의 대륙이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다양한 형태의 포퓰리즘이 나타났고 또한 최근에는 급진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장이 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 역시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나 ‘대중추수주의’ 따위의 저널리즘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천박한 태도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에 관한 국내의 연구로는 이성형, 󰡔라틴아메리카 영원한 위기의 정치경제󰡕, 역사비평사, 2002; 김은중,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에 대한 정치철학적 재해석」,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편, 󰡔이베로아메리카연구󰡕, 23권 2호, 2012 및 안태환,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담론의 시각으로 본 차베스 체제」,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편, 󰡔이베로아메리카연구󰡕, 23권 2호, 2012를 참조. 또한 이번 호 “포퓰리즘” 특집에 수록된 김은중의 글도 참조하라.]

 

이에 따라 현재 서양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수행되고 있는 포퓰리즘 연구에서 포퓰리즘을 극우 정치에 한정된 정치 이데올로기나 수사법적인 기만술로 파악하는 경우는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포퓰리즘은 더 이상 일시적이거나 특정한 지역에서 출현하는 병리적인 정치 현상이 아니라 20세기 말 자유민주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결부된 보편적인 현상으로 이해되며, 새로운 민주주의의 출현을 촉구하는 대중 운동으로 간주된다.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면, 포퓰리즘은 이제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되었다.[Cas Madde, “The Populist Zeitgeist”, Government and Opposition, op. cit.]

 

이런 이론적 경향을 대표하는 이들로는 마거릿 캐노번(Margaret Canovan), 벤자민 아르디티(Benjamin Arditi),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캐스 머드(Cas Mudde)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본격적인 포퓰리즘 이론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크 랑시에르의 정치철학 역시 현대 포퓰리즘 연구에 많은 이론적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련된 이론가로 간주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이론적 지향은 1980년대까지 지배적이었던 포퓰리즘 연구의 기본적인 관점(곧 포퓰리즘을 막연한 수사법과 선전술 및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개인적인 권위에 기반을 둔 병리적인 정치 현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포퓰리즘이 포함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요소에 주목한다는 점이다.[1990년대 이후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좀 더 객관적이고 정교하게 파악하려는 시도로는 다음과 같은 문헌들을 참고할 수 있다. Benjamin Arditi, Politics on the Edges of Liberalism: Difference, Populism, Revolution, Agita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07; Margaret Canovan, “Trust the People! Populism and the. Two Faces of Democracy”, Political Studies, vol. 47, no. 1, 2002; “Populism for Political Theorists?”, Journal of Political Ideologies, vol. 9, no. 3, 2004; The People, Polity Press, 2005; Cristobal Rovira Kaltwasser, “The Ambivalence of Populism: Threat and Corrective for Democracy”, Democratization, op. cit.; “The Responses of Populist to Dahl's Democratic Dilemmas”, Political Studies, 2013; Yves Mény & Yves Surel eds., Democracies and the Populist Challenge, Palgrave, 2002; Benjamin Moffitt & Simon Tormey, “Rethinking Populism: Politics, Mediatisation and Political Style”, Political Studies, 2013; Cas Mudde, “The Populist Zeitgeist”, Government and Opposition, op. cit.; Populist Radical Right Parties in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Cas Mudde & Cristóbal Rovira Kaltwasser eds., Populism in Europe and the America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Francisco Panizza ed., Populism and the Mirror of Democracy, Verso, 2005. 또한 SAIS Review. vol. 27, no. 1, 2007 특집호에 수록된 여러 논문들 참조.] 더 나아가 라클라우는 특정한 정치적 지향에 따라 포퓰리즘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평가하는 대신(곧 남미의 경우처럼 좌파적인 지향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유럽처럼 우파적인 성향을 보여주는지), 포퓰리즘 자체를 정치적인 것의 일반적인 논리로 이론화하려고 시도한다. 󰡔포퓰리즘적 이성에 대하여󰡕[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Verso, 2005.]라는 그의 저작의 제목으로 쓰인 ‘포퓰리즘적 이성’이라는 표현은 (마치 칸트의 순수 이성이나 실천 이성, 또는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과 비견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치적 합리성의 원리를 포퓰리즘 운동에서 찾으려는 라클라우의 야심을 잘 드러내준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이 글이 화두로 삼고 있는 질문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포퓰리즘은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민주주의의 적이거나 타자인가, 아니면 최근 몇몇 분석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조건인가? 또 만약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어떤 조건이며, 또한 어떤 민주주의를 위한 조건인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게 되면 자연히 라클라우의 논의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포퓰리즘적 이성에 대하여󰡕에 집약되어 있는 라클라우 작업의 독창성은 포퓰리즘을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논리로 이론화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는 심지어 포퓰리즘을 정치적인 것의 논리와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그의 작업은 특히 좌파적인 포퓰리즘을 설명하는 데 해석학적인 또는 방법론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의 이론으로 우파적인 포퓰리즘, 더 나아가 극우파 포퓰리즘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이러한 사실은 정치적인 것의 논리, 급진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로서 그것이 지닌 난점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셋째, 이러한 질문은 다시 처음의 문제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만든다. 만약 포퓰리즘이 단순히 민주주의의 타자 내지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관해 밝혀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어떤 민주주의에 대한 조건이 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특히 흥미로운 쟁점은 라클라우와 랑시에르 사이의 이론적 동일성과 차이점이라는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라클라우 자신이 랑시에르 정치학과 자신의 이론 사이의 친화성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이론적 간격을 지적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동일성과 차이점은 모두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배제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개념사적으로 본다면, 플레브스가 포퓰루스를 대표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이러한 쟁점과 관련하여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라는 문제를 간단히 지적해보려고 한다.

 

 

II.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타자인가 민주주의의 조건인가?

 

1. 민주주의의 타자로서 포퓰리즘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사회과학계만이 아니라 대중 언론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개념이다. 최근에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이 용어는 지난 1980년대 이후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우익 정치 운동을 표현하고 분석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의 장 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이라든가 오스트리아의 외르크 하이더(Örg Heider) 또는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같은 이들이 주도하는 극우파 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꼭 우파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나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의 집권이 보여주듯 중남미에서는 특히 좌파적인 성격을 띤 포퓰리즘 정치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또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포퓰리즘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견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포퓰리즘을 좀 더 폭넓은 비교정치학인 관점(유럽, 남미, 북미 등)에서 분석하거나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사이의 복합적인 관계를 좀 더 정치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과의 비교 속에서 유럽의 포퓰리즘을 조망하려는 시도로는 특히 Cas Mudde & Cristóbal Rovira Kaltwasser eds., Populism in Europe and the Americas, op. cit. 및 SAIS Review 2007년 특집호 참조.]

하지만 포퓰리즘은 국내에서는 주로 부정적이거나 심지어 병리적인 현상으로 간주된다. 이는 국내에 출판된 두 권의 포퓰리즘 연구서에서도 잘 나타난다.[서병훈, 󰡔포퓰리즘󰡕, 책세상, 2008; 정인경ㆍ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공감, 2006] 󰡔인민주의 비판󰡕에서 포퓰리즘은 “대중의 원한에 호소함으로써 세력을 확대하지만 시민권과 인민주권에 기초한 현대 정치에 미달”[정인경ㆍ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6쪽]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다양한 종류의 포퓰리즘의 공통 요소는 “인민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특권적인 세력을 악마화함으로써 그 호소력을 극대화”[같은 책, 64쪽]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된다. “인민주의[포퓰리즘]는 기존의 정치제도와 정치가에 대한 인민의 원한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적과 우리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확산되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해방과 변혁을 위한 정치의 발전은 제약된다. 이러한 점에서 인민주의의 득세는 대중의 수동화의 지표가 될 수 있다.”[같은 곳] 국내의 경우 김대중과 노무현 전(前) 대통령들이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치가로 언급된다.

 

또한 서병훈은 󰡔포퓰리즘󰡕에서 “‘인민에 대한 호소’와 ‘선동적 정치인에 의한 감성 자극적 정치’를 중심축으로 포퓰리즘을 정의할 것을 제안”[서병훈, 󰡔포퓰리즘󰡕, 19쪽]한다. 이러한 두 가지 규정이 중심축이 되는 것은, 포퓰리즘은 항상 인민주권이나 인민권력의 복권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주장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의 실체는 대단히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곧 “인민을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무게 중심은 소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에게 쏠려 있다. 엄밀히 말하면 인민은 동원되는 객체일 뿐, 운동의 열매는 몇몇 선동 정치인의 몫이다.”[같은 책, 20쪽] 따라서 포퓰리즘이란 “민주주의로 포장된” 대중 영합적 정치 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대중의 참여와 전문가의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민주주의’” 또는 “대중 지배의 틀 속에서 전문가가 능력을 발휘하는 ‘숙련 민주주의’”[같은 책, 246쪽]다. 단 그는 앞의 책과 달리 한국에서 포퓰리즘이 운위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좌파 정부’의 여러 부정적 양상을 설명하기”[같은 책, 247쪽] 위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노무현 정권을 포퓰리즘 정권으로 규정하는 데는 반대하고 있다. 그것은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 행태가 부분적으로 표출되기는 하지만 “‘인민주권 회복론’에 대한 명시적이고 전략적인 언급은 눈에 띄지 않는다”[같은 책, 256쪽]는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보기에 보수 성향의 정치 세력 역시 필요에 따라 노무현 정권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들 역시 필요에 따라 포퓰리즘 전술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요컨대 “비이성적인 단순 논리가 먹혀들고 장기적인 공익보다 눈앞의 사익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더 많은 한, 포퓰리즘의 출현은 막을 길이 없다”[같은 책, 257쪽]는 결론인 셈이다.

 

이 두 책은 각각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과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채택하고 있지만, 포퓰리즘을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특히 전자의 입장은 이른바 개혁 자유주의 정치 세력 일반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식의 평가를 통해서는 포퓰리즘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얻기 어려울뿐더러 포퓰리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첫째, 이런 식의 관점으로는 왜 포퓰리즘이 생겨나는지 그 이유를 해명할 길이 없다. 전자에 따르면 “자본 축적의 위기와 헤게모니적 이념으로서 자유주의의 쇠퇴는 개별 국가의 특수한 조건과 결합하여 인민주의가 등장하는 조건을 형성한다.”[정인경ㆍ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21쪽] 그러나 위기에 대한 저항이 반드시 인민주의로 표출되는 것은 아니며 “기존 정치에 대한 반감을 동원하는 인민주의의 부상은 자유주의의 부재 또는 무능력과 관련되는 동시에 대안적 이념의 부재 또는 무능력이라는 조건과 상호작용한다.”[같은 곳] 그런데 자유주의의 부재 내지 무능력과 동시에 그것을 대체할 이념의 부재 내지 무능력이 인민주의 내지 포퓰리즘이 출현하는 조건이라면, 그것은 사실상 근대의 시작부터 근대 정치에 내재해 있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헤게모니 이념이 자유주의이고 자유주의는 근 200여 년 동안 끊임없는 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화해왔다면, 그리고 지금까지도 자유주의를 대신하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사회주의 체계가 존재하던 시절을 제외한다면), 사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리고 사회주의가 다시 정치적 지배 이념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계속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정치 운동은 모두 병리적인 정치 운동으로서 포퓰리즘에 포괄될 수밖에 없다. 지극히 환원주의적인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후자의 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서병훈은 포퓰리즘의 특징을 “인민주권의 회복”에 대한 주장, “지배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 고취”,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으로 요약하고 또 정치 스타일 상으로는 “카리스마 리더십”과 “선정적 이분법에 바탕을 둔 ‘단순 정치’”[인용문은 각각 서병훈, 󰡔포퓰리즘󰡕, 97쪽, 101쪽, 112쪽 126쪽, 129쪽에서 인용했다]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규정은 이미 19세기 중엽 프랑스 혁명 이후 대중 정치가 전면에 등장하는 데 충격을 받은 보수적인 군중심리학자들이 대중 운동을 평가하기 위해 제시한 규정들과 대동소이하며,[세르주 모스코비치, 󰡔군중의 시대󰡕,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6 및 귀스타브 르봉, 󰡔군중심리󰡕, 이상돈 옮김, 간디서원, 2006 참조. 또한 르봉에서 발원하여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윌리엄 맥두걸(Willaim McDougall) 및 프로이트의 대중심리학으로 이어지는 군중심리학에 대한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앞의 책, 2~3장의 분석도 참조] 특별한 역사적 설명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이런 식의 비판으로는 왜 현대 정치에서 포퓰리즘이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또 현대 정치 자체에서 여러 가지 포퓰리즘적인 특성이 나타나는지 해명하기 어렵다. 가령 캐노번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서구의 거의 모든 정당은 전통적인 계급 노선을 포기하고 “전체 인민” 내지 “전체 국민”에게 호소하는 범국민적 정치 노선(catch-all-politics) 표방한다.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이라는 가치 아래 탈이념을 내세우며 정권을 탈취했던 토니 블레어의 영국 노동당이 대표적인 사례다.[Margaret Canovan, “Populism for Political Theorists?”, op. cit., p. 243] 또한 아르디티가 지적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집약적인 슬로건을 내세우고 감성에 호소하는 것은 현대 정치에 공통적인 현상이다.[Benjamin Arditi, Politics on the Edges of Liberalism: Difference, Populism, Revolution, Agitation, op. cit., p. 56 이하]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감성에 호소한다든가 선동적인 정치를 펼친다든가 아니면 인민이나 국민에게 직접 호소한다는 근거를 내세우는 것은 거의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

 

2. 민주주의의 증상으로서 포퓰리즘

 

따라서 그다지 설득력 없는 논거들을 들어 포퓰리즘을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현상으로 비난하려고 하기보다는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규범적 보편성을 전제한 가운데 포퓰리즘을 ‘정상화’하려고 하기보다는 포퓰리즘의 불가피성의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지닌 긍정적 측면은 어떤 것인지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더 낫다. 사실 국내 정치에서도 2000년 이후에는 넓은 의미에서 포퓰리즘의 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을 노사모(또는 ‘박사모’) 활동이나 국민경선제 또는 촛불집회 이외에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정치의 장에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난 적이 없다. 또한 2012년 대선 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나꼼수’ 방송 역시 포퓰리즘적인 대중 동원의 사례로 간주될 수 있다. 고(故) 노무현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또는 그 유령)의 이름 아래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했으며, 강렬한 정치적 적대 전선을 형성하면서 정적(政敵)의 도덕적ㆍ경제적ㆍ정치적 약점을 공격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는)이 집권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 운동을 배제한 가운데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정치를 분석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알맹이 중 하나를 처음부터 제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포퓰리즘을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증상(symptom)으로 이해하는 벤자민 아르디티의 분석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증상이라는 개념은 프로이트가 제시한 의미대로 이해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통상적인 의학적인 용법에서 말하는 증상, 곧 어떤 병의 징표나 표현이라는 의미 이외에 좀더 본질적으로는 “중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본능적 만족의 징후 아니면 대리 표상이며, 억압 과정의 결과”인 것으로 증상을 개념화한다. 특히 아르디티는 다음과 같은 프로이트의 규정에 주목한다. “증상들은 억압된 것으로부터 파생되며, 그것들은 말하자면 자아에 대한 억압된 것들의 대표들이다. 하지만 억압된 것은 자아에게는 ... 외국 영토―내부의 외국 영토―같은 것이다.”[Benjamin Arditi, Politics on the Edges of Liberalism, p. 75]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증상은 내부에 속한 어떤 것이되, 고유하게 내부에 속하지 않는, “외국의/이질적인”(foreign) 영토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낯설고 이질적인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것에 속한, 그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르디티는 증상과 자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도 증상의 관계라고 말한다. 곧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타자이거나 그것과 전혀 무관한, 이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해 불안과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내적 주변부”[Benjamin Arditi, Ibid.]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 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해 불안과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아르디티는 그 이유를 정치, 특히 민주주의 정치에 고유한 부정성에서 찾는다. 민주주의는 일상적으로는 정치인들 및 정당 관료들 및 행정 관료들 같은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영역으로서 존재한다. 보통의 경우는 이러한 정상적인 흐름이 중단되거나 소요를 겪을 염려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는 아무리 오랜 전통과 잘 정비된 전문적인 체계를 갖춘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적어도 주기적으로는 정치의 영역 안으로 대중의 개입이라는 소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곧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기적으로 대중들, 인민들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대표자들을 뽑는 선거를 치러야 한다. 그러한 선거가 없이는 민주주의는 자신의 정당성, 자신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그것이 아무리 세련된 전문가들이 관리하는 영역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비전문가들의 주기적인 개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으며, 또 바로 거기에서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얻게 된다. 이처럼 전문화된 대의 민주주의 체계가 불가피하게 비전문가들의 개입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소요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바로 민주주의에 고유한 부정성이며, 그것이 포퓰리즘의 존재론적 뿌리가 된다.

 

캐노번의 어법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는 “실용성”의 측면과 “구제”(redemption)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Margaret Canovan, “Trust the People! Populism and the Two Faces of Democracy”, p. 11 이하] 대의적인 틀 안에서 전문가들의 미묘한 협상과 타협을 통해 정치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실용성의 측면이라면, 대중의 열망과 인민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지닌 구제의 측면이다. 어떤 민주주의도 대의적인 제도 체계만으로는 온전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으며, 반대로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어떠한 민주주의도 인민 내지 대중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인민 자신이 스스로 통치하는 형태로 운영될 수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할 수밖에 없는 한, 인민의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에 대한 열망으로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포퓰리즘은 배척하거나 제거해야 할 부정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대중의 정치에 대한 참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포퓰리즘이 다 바람직한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장-마리 르펜이나 외르크 하이더처럼 공공연히 극우적인 주장을 일삼으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정치 권력을 획득하려고 하는 세력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좋은 포퓰리즘과 그렇지 못한 포퓰리즘, 또는 포퓰리즘의 긍정적 측면과 병리적 측면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나 자크 데리다가 각자 잘 보여주었듯이,[Etienne Balibar,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보편적인 것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및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을 각각 참조]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해방에 대한, 정의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을 담고 있는 한에서 항상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것은 르펜이나 하이더가 주창하는 극우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것이 증상으로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왜곡되고 전위된 형태로 표현하는 대중의 열망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불러일으켰던 포퓰리즘 현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비판자들이 어떤 식으로 비난하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무런 조직도 권력도 없는 상태에서 단번에 권력을 장악하고 또 사후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커다란 정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그가 대중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어떤 간절한 열망을 건드리고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을 “원한”이니 “불만”이니 하는 다분히 경멸적인 용어들을 동원해서 폄하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가 과연 대중의 어떤 (해방의) 열망을 건드렸는지, 그럼에도 어떻게 그것을 (말하자면) 배반했는지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노무현을 전적으로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과 반동적으로 그를 온전히 숭앙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무현이라는 ‘증상과 동일화하는 것’(identification with the symptom)[Slavoy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1989;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참조], 곧 노무현에 맞서 노무현이라는 정신, 노무현이라는 유령을 끊임없이 불러오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아르디티와 마찬가지로 증상이라는 개념을 어떤 구조가 포함하고 있는 역설적인 요소로 이해한다. 여기서 역설적이라는 것은, 이 요소가 이 구조에 대하여 외재적이거나 모순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 구조는 이 요소가 없이는 하나의 구조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뜻한다. 지젝은 자본주의 체계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이러한 증상의 한 사례로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은 자본이 가치를 증식하기 위한 원천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계에 대하여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의 증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상과 동일화한다는 것은, 어떤 구조의 증상에서 그 구조를 성립시키고 또한 재생산시키는 측면에 맞서 그 구조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또는 변혁하는 측면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포퓰리즘의 경우라면, 이는 포퓰리즘이 표현하는 부정적 측면, 곧 복잡한 민주주의적 과정을 단순화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의 정서적 동일시를 통해 쉽게 선동이나 반민주주의적 정치에 휩쓸리는 경향을 비판하거나 해체하면서 그 대신 그것에 맞서 그것이 포함하는 민주주의적 측면, 곧 인민 주권이나 반(反)엘리트주의 내지 반(反)과두정치적인 참여 정치에 대한 열망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증상으로서의 포퓰리즘’이나 ‘증상과의 동일화’라는 개념은 포퓰리즘에서 민주주의적인 것과 반민주주의적인 것, 긍정적 측면과 병리적 측면을 구별하고 전자를 발전시키기 위한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는 아직 어떻게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적인 측면에 맞서 발전시킬 수 있는지(곧 어떻게 증상과의 동일화가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우며, 더 나아가 그러한 동일화를 통해 가능해진 정치가 과연 얼마나 새로운 정치이고 얼마나 더 민주주의적인 정치인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려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봐야 한다.

 

 

III 포퓰리즘: 민주주의를 위한 어떤 조건?

 

1. 정치적인 것의 논리로서 포퓰리즘

 

포퓰리즘에 관한 서양 인문사회과학계의 논의를 일신한 공은 아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샹탈 무프와 공동으로 저술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에르네스토 라클라우ㆍ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및 급진 민주주의라는 신조어를 학문적 유행어로 만들면서 20세기 말 좌파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면, 󰡔포퓰리즘적 이성에 대하여󰡕는 흔히 대중적인 선동술과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개인적 권위에 기반을 둔 정치적 이데올로기 내지 행태로 이해되는 포퓰리즘을 정치적인 것 일반의 논리로 확장함으로써, 급진민주주의에 관한 기존의 논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론적 야심만큼 정교하고 복합적인 논리를 전개하는 이 책을 이 글에서 온전하게 분석하기는 어렵고,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라는 우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중심적인 쟁점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포퓰리즘적 이성, 곧 정치적인 것의 일반적인 논리를 이론화하려는 라클라우의 이론적 야심은 책의 첫 머리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라클라우는 자신이 이 책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집합적 정체성들의 형성의 본성 및 논리”[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p. ix]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곧 사회학적으로 주어진 이러저러한 집단, 가령 계급이나 민족 또는 국민 같은 단위를 집합적 정체성의 기본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요구들”(demands)이라고 부르는 좀더 작은 단위를 기반으로 하여 어떻게 계급이나 민족 또는 국민이나 인민 같은 집합적 정체성들이 형성되는지 분석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나의 견해로는, 집단의 통일성은 요구들의 접합의 결과다.”[Ernesto Laclau, Ibid., p. x]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요구들이라는 단위로부터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될 수 있을까? 라클라우는 차이(difference)의 논리와 등가(equivalence)의 논리의 접합이라는 견지에서 이러한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차이의 논리란 특수한 요구들이 구성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논리를 뜻하며, 등가의 논리란 각각의 특수한 요구들이 자신들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대신 자신들의 공유하는 공통의 속성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논리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논리 중에서 “두 번째 양식은 적대적 경계선을 긋는 반면, 첫 번째 양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Ernesto Laclau, Ibid., p. 78]는 점에 양자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 두 가지 논리의 차이 및 접합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라클라우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Ernesto Laclau, Ibid., pp. 73 이하] 어떤 발전 중에 있는 산업 도시의 외곽 빈민가에 한 무리의 농업 이주자들이 거주하게 되었는데,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몰려들어서 주택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따라 이 이주자 집단은 도시의 정책 당국에게 문제의 해결책을 요구하게 된다. 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면, 이 요구는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될 경우, 해당 이주자들은 자기 주변의 다른 집단들도 이와 비슷한 다른 요구들(주택, 물, 전기, 학교 등)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아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얼마간의 기간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면, 충족되지 않은 요구들이 축적되며 제도적 체계가 이러한 요구들을 각각의 요구들에 알맞게 차별화된 방식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요구들 사이에는 등가적 관계가 설립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제도 체계와 인민을 분리시키는 “깊어지는 골”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내적 경계선이 형성되고, 충족되지 못한 요구들의 등가 연쇄의 등장을 통해 지역의 정치적 스펙트럼의 이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Ernesto Laclau, Ibid., p. 74]

 

라클라우는 서로 분리된 상태로 남아 있는 요구들을 “민주주의적 요구들”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등가 연쇄의 접합을 통해 “더 광범위한 사회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다수의 요구들을 민중적 요구들”(popular demands)[Ernesto Laclau, Ibid.. 강조는 라클라우. 우리는 이 글에서 people이나 popular를 ‘민중’ 및 ‘민중적’이라고 번역할 텐데, 그 이유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제시될 것이다]이라고 부른다. 민주주의적 요구들은 기존의 사회 체계, 또는 헤게모니적 관계 내부에서 수용될 수 있는 반면, 민중적 요구들은 기존 헤게모니적 관계가 변형될 경우에만 해결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요구들의 의미는 사회의 상징적 틀 내부에서 대부분 규정되며, 이러한 요구들의 좌절을 통해서만 이러한 요구들이 지닌 의미가 새롭게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만약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요구들이 광범위하게 증가하게 되면, 상징적 틀 자체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경우 민중적 요구들은 점점 더 기존의 차이적 틀 속에서 유지될 수 없게 되며, 새로운 차이적 틀을 광범위하게 재구성해야 한다.”[Ernesto Laclau, Ibid.. p. 84]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포퓰리즘적인 정치가 수행되지 않는다. 포퓰리즘적인 정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상이한 요구들의 통합을, 막연한 연대감을 넘어서 안정된 의미작용의 체계로 발전시킬 수 있는 좀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동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몇 가지 특정한 기표들이다. 곧 ‘우리’와 ‘그들’ 또는 ‘적’ 사이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규정하는 기표들(가령 지배자들, 엘리트, 독재, 이민자 대 서민, 민중, 국민, 프랑스인 등)이 구성되고 그것이 지속성을 얻게 되면, 요구들을 등가적으로 매개하던 보충물이었던 이 기표들은 역으로 등가 연쇄를 규정하고 강화하는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민중적 요구들의 등가 연쇄가 민중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들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이러한 요구들을 공통의 정체성으로 묶어주는 어떤 지도자의 이름이 요구된다. “어떤 사회가 내재적인 차이적 메커니즘에 의해 점점 더 유지되기 어려울수록, 그것은 자신의 일관성을 위해 점점 더 초월적이고 독특한(단수의) 계기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독특성의 극단적 계기는 개별성이다. 이렇게 해서 등가적 논리는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독특성으로 인도하고, 독특성에서 집단의 통일성과 지도자의 이름 사이의 동일시로 인도하게 된다.”[Ernesto Laclau, Ibid.. p. 100] 따라서 라클라우에게 민중적 정체성의 구성은 필수적으로 어떤 지도자의 이름을 요구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좀더 공고한 결속력을 획득하게 된다. 라클라우에 따르면 이러한 이름은 어떤 개별적인 지도자의 신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민중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결속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이름을 가리킬 뿐이다. “포퓰리즘은 오직 레닌-주의, 마오-주의, 페론-주의 등으로 존재할 뿐이다.”[Miguel Vatter, “The Quarrel between Populism and Republicanism: Machiavelli and the Antinomies of Plebeian Politics”, Contemporary Political Theory, vol. 11, no. 3, 2012, p. 247]

 

이에 따라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의 핵심 요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다수의 요구들을 하나의 등가 연쇄로 통합하기 2) 사회를 두 개의 진영으로 분할하는 내적 경계선을 구성하기 3) 등가 연쇄들의 단순한 총합 이상의 것인, 민중적 정체성의 구성을 통해 등가 연쇄를 공고히 하기.”[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p. 74]

 

2.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라클라우 이론의 강점은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를 위협하거나 내부로부터 잠심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극복하고,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맺는 내적인 관계를 누구보다 정교하게 이론화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포퓰리즘을 이런저런 지역에서 나타나는 국지적이고 특수한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정치적인 것 자체를 가능케 하는 정치의 보편적 조건으로 이론화했다.[이 점에 관해서는 Oliver Marchart, “In the Name of the People: Populist Reason and the Subject of the Political”, Diacritics, vol. 35, no. 3, 2005 및 Rasmus Kleis Nielsena, “Hegemony, Radical Democracy, Populism”, Distinktion: Scandinavi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7, no. 2, 2006을 각각 참조] 따라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더 나아가 포퓰리즘과 정치의 관계에 관해 논의하는 데서 라클라우의 작업은 우회할 수 없는 필수적인 준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이 민주주의에 관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주는지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의 관점을 자크 랑시에르의 이론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이는 라클라우 스스로 랑시에르와 자신의 입장을 비교ㆍ고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클라우 자신의 평가 방식과 다른 각도에서 둘의 입장을 비교해보면, 두 사람이 공통으로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또한 그것이 함축하는 새로운 점과 난점은 어떤 것인지 좀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라클라우 자신의 용어법을 빌려 표현한다면, 사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의 부분은 단순한 한 부분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질서에서 억압되고 배제된 부분이다. 이를 라클라우는 플레브스(plebs)와 포풀루스(populus)라는, 로마 시대의 정치적 집단을 지칭하는 두 가지 상이한 명칭을 통해 표현한다. 포풀루스가 어떤 정치 공동체의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따라서 가령 국민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들 전체로서의 ‘인민’)이라면, 플레브스는 포풀루스의 일부분이기는 하되, 기존의 사회 현실과 정치 질서 속에서 제대로 인정받거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집단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로마 시대의 포풀루스와 파트레스(patres), 플레브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Kurt A. Raaflaub ed., Social Struggles in Archaic Rome: New Perspectives on the Conflict of the Orde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에 수록된 글들을 참조] 이러한 집단들은 각자 상이한 이해관계 및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분산되어 있는 플레브스로 계속 머물게 될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서로 접합된다면, 다시 말해 공동의 대의를 통해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곧 포퓰리즘적 주체로 구성된다면, 그들은 분산된 플레브스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전체를 자임하는 부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포풀루스는 진정한 인민, 곧 민중이 아닌 억압적이고 기만적인 인민으로 드러나며, 반대로 기존의 사회 질서에서는 부분으로 나타났던 플레브스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포풀루스를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주어진 것으로서의 포풀루스(현재 존재하는 대로의 사회적 관계의 총화)는 자기 자신을 허위적 총체성으로, 억압의 원천인 부분성으로 드러나게 된다. 반면 플레브스의 경우 그것의 부분적 요구는 온전하게 충족된 총체성의 지평 속에 기입될 것이며, 진정으로 보편적인 포풀루스를 구성하는 것을 열망할 수 있게 된다. 포풀루스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엄밀하게 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성, 곧 플레브스는 자기 자신을 이상적 총체성으로 인식된 포풀루스와 동일시할 수 있게 된다.[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p. 94]

 

랑시에르는 󰡔불화󰡕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라클라우와 유사하게, ‘몫 없는 이들의 몫’이나 또는 ‘셈해지지 않은 이들의 셈’ 같은 개념을 통해 이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그의 정치철학의 요체를 집약하는 「정치에 대한 열 개의 테제」에서 배제된 부분과 전체, 또는 플레브스와 포풀루스 사이의 관계로 민중을 재규정하는 랑시에르의 관점이 잘 나타난다.

 

테제 5.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민중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민중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partie supplémentaire)으로,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Gallimard, 2004, pp. 233~34;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242쪽. 번역은 수정. 데리다의 대체보충(supplèment) 개념을 원용한 이러한 재정의는 좀더 심층적인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대체보충, 기입, 자기면역: 데리다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 󰡔프랑스철학회 2012년 가을학회보󰡕, 2012 참조]

 

그렇다면 라클라우와 랑시에르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존재할까? 라클라우 자신은 현대 이론가들 중 랑시에르에게서 특히 자신의 민주주의적 관점과 아주 가까운 관점을 발견하며, 거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그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랑시에르가 정치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와 사회학적 집단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구별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구별의 일관성을 충분히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p. 248] 민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와 마찬가지로, 원래 마르크스 자신이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특정한 사회 계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하고 이질적인 배제된 집단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랑시에르 자신도 이 점을 잘 유념하고 있지만, 때로는 이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두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좀 더 핵심적인 차이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라클라우는 민주주의 정치를 위해 지도자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반해, 랑시에르는 전혀 그런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라클라우가 이처럼 지도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포퓰리즘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구들의 차이적인 연쇄를 민중적 요구로 결집하고, 또한 이것을 단일한 민중의 정체성으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상징적 준거로서의 지도자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도자의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의 이름으로’).[하지만 이점은 특히 비평가들의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Benjamin Arditi, “Populism is Hegemony is Politics? On Ernesto Laclau's On Populist Reason”, Constellations, vol. 17, no. 3, 2010 및 Jean-Claude Monod, “La force du populisme”, Esprit, Janvier 2009 참조] 따라서 지도자의 이름에 대한 라클라우의 강조는, 민중적 정체성 및 민중적 요구들의 형성이 쉽지 않은 과제이며, 또한 그것을 공고히 유지하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인식을 함축한다.

 

둘째,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곧 주체화(subjectivation)를 의미하며,[주체화라는 개념은 미셸 푸코가 1980년대 초에 만들어낸 신조어로, 규율권력을 통해 생산되는 예속적 주체들과 다른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사고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안된 것이다] 이러한 주체화는 항상 독특한 보편화를 의미하는 반면(곧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의 주체화, 20세기 초의 여성의 주체화, 20세기 말의 이민자의 주체화 등과 같이), 라클라우에게는 이와 비견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랑시에르 정치학의 강점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 및 헤게모니 이론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투쟁들을 어떻게 접합하고 결속시킬 것인가에 있는 데 반해, 랑시에르는 주체화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투쟁들의 고유성과 이질성을 강조할 뿐,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대를 형성하고 결속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파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평가라는 문제가 있다. 몇몇 연구자들이 지적했다시피, 포퓰리즘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가령 Cristobal Rovira Kaltwasser, “The Ambivalence of Populism: Threat and Corrective for Democracy”, Democratization, op. cit.; “The Responses of Populist to Dahl's Democratic Dilemmas”, Political Studies, op. cit.; Benjamin Moffitt & Simon Tormey, “Rethinking Populism: Politics, Mediatisation and Political Style”, Political Studies, op. cit.; Cas Mudde, “The Populist Zeitgeist”, Government and Opposition, op. cit. 참조] 자유민주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포퓰리즘은 병리적인 현상처럼 나타나며, 무언가 비정상적이고 일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급진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를 옹호하는 관점에서 보면 포퓰리즘은 기존 정치 체계에서 배제되고 억압받던 기층 민중의 목소리가 표출되는 한 방식(표출 방식 그 자체는 아닐지 몰라도)을 가리킨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급진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유럽에서 오늘날 나타나는 우파 포퓰리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제기된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즘적 이성에 대하여󰡕의 한 대목에서 프랑스 국민전선의 사례를 통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이 사회 체계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호민관 기능’을 수행해왔다. 그런데 역사적 공산주의가 몰락한 이후 공산당은 더 이상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없으며, 사회당은 우파 드골주의 정당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공산당이나 사회당이 수행하지 못하는 호민관 기능, 곧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기능을 누가 수행할 것인가? 라클라우에 따르면 국민전선이 떠맡은 것이 바로 이 역할이다. 이는 국민전선이 전통적인 공산당 지지 세력이었던 많은 노동자들의 표를 얻고 있다는 데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을 라클라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적 분할을 표현해야 할 존재론적(ontological) 필요성은, 더 이상 이러한 분할을 형성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좌파 담론에 대한 존재적(ontic) 결속보다 더 강력했다. ... 나는 서유럽에서 오늘날 우파 포퓰리즘이 재등장한 것이 이와 유사한 노선을 따라 대부분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포퓰리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나는 존재론적 기능과 그 존재적 충족 사이의 비대칭성을 급진적 변화에 대한 담론과 관련하여 제시했지만, 이는 또한 다른 담론 구성체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민중이 급진적인 무질서(anomie)에 직면하게 되면, 모종의 질서에 대한 필요성은, 그것이 실제로 가져오는 존재적 질서보다 더 중요해진다. 홉스의 세계는 이러한 간극의 극단적 버전이다. 곧 사회가 총체적 무질서(자연상태)의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이 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내용과 관계없이), 그로부터 질서가 귀결되는 한에서 정당한 것이다.[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pp. 87~88. 강조는 라클라우]

 

따라서 포퓰리즘이 광범위한 대중 동원을 통해 기존 사회체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기능(존재론적 기능)을 충족시키고, 또 무질서의 시기에는 새로운 질서를 산출하는 기능을 충족시키는 것인 한에서, 그것은 실제로 산출된 변화 및 질서의 내용(존재적 내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라클라우가 포퓰리즘을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자 더 나아가 정치적인 것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만약 그렇다면 르펜(또는 그를 등가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이름들 ...)을 지지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그가 다른 좌파 정당이 수행하지 못하는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면 말이다. 또는 역으로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 좌파 포퓰리즘 내지 진정한 민주주의적 포퓰리즘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 포퓰리즘을 우파 내지 극우파와 구별되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일종의 초월론적(transcendental) 기호학에 의지하고 있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이론 및 포퓰리즘 이론이 공백으로 남겨 놓는 질문이 바로 이것일 텐데,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우리’가 더 나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에 관한 논의가 절실한 쟁점으로 제기되고, 또 라클라우를 비롯한 급진 민주주의적인 포퓰리즘 이론가들의 작업이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오늘날 포퓰리즘 운동 이외에 실제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에 관해 무언가 의미 있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포퓰리즘 내부에 위치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포퓰리즘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플레브스로서의 민중은 포풀루스로서의 민중 또는 인민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질문을 제기하도록 촉구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포퓰리즘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마지막으로 포퓰리즘의 번역 문제에 관해 간략히 지적해보겠다. 포퓰리즘에 관해 제시된 번역어는 다양하다. ‘대중영합주의’, ‘대중추수주의’, ‘인기영합주의’ 등과 같은 다분히 저널리즘적이고 인상비평적인 용어법은 제외한다면, 몇 가지 제안이 특별히 눈에 띈다. 정인경과 박정미는 ‘인민주의’라는 용어를 제안한 바 있고(정인경ㆍ박정미 외), 민중주의라는 번역어를 사용한 경우도 많이 눈에 띄며(최초의 사례로는 노재봉의 연구가 있고,[노재봉, 「민족주의 연구: Populism(민중주의) 논고」,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편, 󰡔국제문제연구󰡕, 8권 1호, 1984] 안윤모는 미국의 포퓰리즘 운동과 관련하여 이 용어법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으며, 중남미 포퓰리즘 연구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보인다), 최근에는 서민주의라는 제안도 제시된 바 있다.[이희재, 「'포퓰리즘'의 잃어버린 뜻을 찾아서」, 󰡔프레시안󰡕 2013년 7월 26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725185620 이 기사에 대해 알려준 김정한 선생께 감사드린다]

 

간단히 필자의 입장을 밝힌다면, 필자는 서민주의나 인민주의라는 용어보다는 민중주의라는 용어가 좀더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영어의 피플(people)이나 불어의 푀플(peuple) 또는 독일어의 다스 폴크(das Volk) 등에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은 ‘인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이 밝혀준 바 있듯이, 해방 이후 제헌 헌법에 관한 논의에서 주권의 담지자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널리 거론되던 ‘인민’이라는 용어는 남한의 단독 정부 구성 및 남한과 북한의 좌우 대립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 있는 학문적ㆍ일상적 용어로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특히 김성보, 「남북국가 수립기 인민과 국민 개념의 분화」, 󰡔한국사연구󰡕 144집, 2009 및 박명규, 󰡔국민, 인민, 시민: 개념사로 본 한국의 정치주체󰡕, 소화, 2009 참조] 그 대신 ‘국민’이라는 용어가 서양어의 피플이나 푀플에 대응하는 법적ㆍ정치적ㆍ대중적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지난 1990년대 이후 국내 학계에서도 다시 ‘인민’이라는 용어가 비교적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정치학이나 법학 또는 사회학 분야에서 인민의 용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피플에서 직접 유래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의 우리말 번역어로는 ‘인민주의’가 적절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클라우와 랑시에르의 논의를 통해 살펴본 것처럼, 포퓰리즘에서 진정한 정치의 주체로 호명되는 피플은 일반적인 의미의 ‘인민’과는 구별되는 피플, 또는 포풀루스가 아닌 플레브스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민주의라는 번역어는 피플과 포퓰리즘 사이의 연결 관계를 잘 보여주기는 하지만, 포퓰리즘에서 문제가 되는 주체는 기존의 정치 질서나 사회 질서의 전체 성원으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제되고 그 속에서 소외나 억압, 또는 차별을 겪는 집단들이라는 점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서민주의’라는 용어는 우리말에서 ‘서민’이라는 말이 보통 사람을 대표하는 단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서민이라는 표현 자체는 정치적 함의를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서민주의’를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인 포퓰리즘의 번역어로 사용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민중주의라는 용어가 포퓰리즘에 대한 번역어로 좀더 적합해 보인다. 왜냐하면 일제 시대에서 유래하여 1970년대에는 민중신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하고 1980년대에는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중심 개념이 된 ‘민중’이라는 개념은, 어떤 정치체의 법적 주체 내지 법적 주권의 담지자를 뜻하는 외국의 ‘더 피플’이나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개념과 달리, 소외되고 억압받는 집단들, 따라서 억압과 지배의 권력에 맞서 저항하고 그러한 지배의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정치적 주체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민중 개념에 관해서는 배경식, 「민중과 민중사학」,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편,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2󰡕, 역사비평사, 2009 참조]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가 민중 개념에 대한 가장 탁월한 문학적 형상화로 널리 간주되고 또 인용된 것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990년대 이후 국내 학계나 언론 또는 일상적인 어법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민중 개념을 복권시키고, 또 이것을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사용하기 위해서는 민중 개념에 대하여 새로운 차원을 보충함으로써 그것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민중을 단일한 본질을 지닌 주체나 그 자체로 순수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갖는 주체로 개념화하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의 주체로서의 피플 역시 단일한 본질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질적인 집단들 사이의 연대와 접합을 보증하는 선험적 통일성을 함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중주의라는 용어가 포퓰리즘의 번역어로 정착될 수 있는가 여부는, 민중이라는 개념이, 억압받고 배제되어 있는 집단들이며 그런 한에서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 및 대의를 지니고 있지만, 또한 본질적으로 이질성과 내적 분할의 가능성을 지닌 집단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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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반가운 책이 하나 나와서 소개를 하고 싶네요. 이 책은 미국의 근대철학 전문가인 스티븐 내들러 교수가

 

스피노자의 [에티카] 또는 [윤리학]에 대한 입문서로 펴낸 책입니다. 영어 원서는 캠브리지대학출판부에서 200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Steven Nadler, Spinoza's Ethics :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이 책은 캠브리지대학출판부에서 펴내는 서양 철학의 고전을 직접 읽어보려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출간되었는데요, 각 권마다 유능한 전문가들이 집필해서 해당 고전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시리즈입니다.

 

 

내들러는 원래 니콜라 말브랑슈, 앙투안 아르노 같은 포스트-데카르트주의자들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해서

 

199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스피노자 연구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스피노자 전기]를 비롯해서

 

스피노자에 관한 좋은 저서, 논문들을 많이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대가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적어도 내들러는 허튼 소리나 근거 없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아주 견실한 연구자입니다.  

 

 

이 책은 내들러의 학문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좋은 책입니다. [에티카]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잘 반영한

 

가운데 난해한 [에티카]의 주요 대목들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반가운 사실은, 번역이 꼼꼼하게 잘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스피노자 철학을 공부하는 역자가

 

정성스럽게 번역해서, 번역과 관련해서는 그다지 시비를 걸 만한 대목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동안 [에티카] 해설서를 찾는 분들에게 권해 드릴 만한 책이 거의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역자의 노고 덕분에 이제는 이 책을 믿고 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번역하느라 애쓴 역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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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11-0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발마스 님이 이 책을 소개 안 하는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출판사도 <그린비> 아닌가? 단지 시간이 없으셔서 그랬군요.

하지만 이런 책을 소개받을 때마다 묘한 생각이 듭니다. 발마스 님이 스피노자가 직접 쓴 책을 번역한 적이 없다는 거지요.

위의 역자 분이나 발마스 님이 번역한 스피노자가 직접 쓴 번역본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을 볼 때 한국은 이상한 나라가 틀림 없습니다.

쾅! 2013-11-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제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홉스봄은 제가 보기에는 사기꾼 같습니다. 자기가 마르크스주의자인 척 하는 사기꾼이요.

제가 안타까운 것은 <뉴레프트 리뷰>나 그린비 출판사에서 이 홉스봄을 대단한 마르크스주의자라 취급한다는 거지요.

이른바 진보적인 또는 좌파라는 사람들까지 그 모양이니 참!

그 정도 판별력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열심히 홉스봄 글을 읽었다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역시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인가?

진짜로 믿을 사람이 없구나!




김병준 2013-12-02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그래도 스피노자 공부하고 싶어서 초보자용 책을 찾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balmas 2014-01-03 23:55   좋아요 0 | URL
병준 씨, 답글이 늦어서 미안하네요.
집에 일이 있어서 한동안 서재에 들어오지 못했네요.
도움이 되신다니 반갑습니다. :)
그리고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룰루랄라 2013-12-2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를 독해해가는 중에 이 좋은 책을 발견해서 아주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번역이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술술 읽히는 번역은 처음입니다. 역자분이 정말 꼼꼼하신거같더라구요^^ 책 내용은 introduction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렵더군요. 제가 실력이 딸려서그런가^^; 에티카만큼이나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스피노자를 알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거 같은 좋은책입니다.

룰루랄라 2013-12-23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중간중간에 발마스님의 이름도 심심치않게 등장하더군요! 혹시 역자분이 역자후기에 밝힌, 에티카 번역을 준비중이라는 스피노자 전문가가 혹시 발마스님이 아닐까 하는 괜한 기대도 해봅니다. ^^ 에티카는 영역본이랑 같이 읽으니 기존 번역판본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하루빨리 양질의 번역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아니면 어학실력을 기르는수밖에... ㅠㅠ)

balmas 2014-01-03 23: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룰루랄라님. 답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신다니 반갑습니다. 번역이 상당히 잘되어서 읽기 편하실 겁니다.

에티카 번역은 아마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부터 시작할지는 딱히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아무튼 스피노자 번역의 필요성은 연구자들이 절감하고 있으니

조금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을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요즘 신문을 잘 안봐서 몰랐더니, 벌써 바디우와 지젝이 국내에 와서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있군요.

 

이왕 시작한 거, 좀더 뜻 깊은 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문에 실린 두 사람의 인터뷰 링크를 올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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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 인터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9262206405&code=960201

 

 

지젝 인터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9242154465&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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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미남 2013-10-1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왕'이란 단어가 인상적이군요.

쾅! 2013-11-0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정마을이나 밀양에 사는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분명히 국가는 사람들을 살기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여 영원하라! 를 외쳐야 하는가?

지적 또는 지제크 글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은 헤겔의 유럽중심주의나 식민주의적 사고 방식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

바디우 글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의 인간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게 과연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진리라고 간주될까? 진리의 효과를 따지는 게 낫지 않을까?
 

오는 9월 27일-28일 양일 동안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도래할 한국민주주의" 기획연구팀 주최로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심포지엄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안내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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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취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사업단에 속해 있는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 기획연구팀에서는 1945년 이후 2000년대까지 한국 정치의 전개 과정을 민주주의의 이념, 제도, 운동이라는 복합적 틀을 통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새로운 담론과 이론적 모델, 나아가 제도적 전망을 모색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심포지엄은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 <포스트 담론 20년의 성찰>, <한국 문학과 민주주의>에 이어서 개최하는 제4차 심포지엄입니다.

 

포퓰리즘은 흔히 대중영합주의, 대중추수주의 등으로 이해되어,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민주주의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외국 학계에서는 포퓰리즘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보려는 시도들이 존재합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유명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벤자민 아르디티(Bnejamin Arditi), 또는 마거릿 캐노번(Margaret Canovan) 같은 포퓰리즘 이론가들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한 요소이며, 민주주의의 조건이라는 점을 역설해왔습니다.

 

더욱이 20세기 말 냉전이 해체되고 좌·우파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대부분의 서구 정당은 전통적인 계급노선을 포기하고 국민 전체를 상대로 지지표를 구하는 포퓰리즘 전략을 취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정책이나 논리보다는 수사와 이미지로 유권자의 감성을 움직이는 정치가 세력과 진영을 막론하고 각광을 받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을 대립시키는 관점은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어렵게 됐습니다.

 

문제는 포퓰리즘을 어떻게 재규정하고, 그것을 내적으로 분류하고 평가할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포퓰리즘이 현대 정치의 일반적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해서 모든 포퓰리즘을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포퓰리즘과 중도좌파 정당인 공화국연합의 포퓰리즘을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으며, 차베스의 포퓰리즘과 이명박의 포퓰리즘을 동열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포퓰리즘 현상이 일반화되면 될수록 그것을 어떻게 내재적으로 분류하고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개조와 쇄신을 위해 더욱 더 중요한 쟁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최근 외국 학계에서 논의되는 포퓰리즘에 관한 논쟁을 검토하고, 유럽과 중남미, 한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의 문제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심포지엄 일정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 주최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 기획연구팀

◯ 일시 : 2013년 9월 27일(금)-28일(토) 13:00–18:00

◯ 장소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강당

 

 

● 유럽과 중남미의 포퓰리즘 9월 27일(금) 1시-6시

 

발표: 프랑스 민족전선, 포퓰리즘과 파시즘 - 김용우(한국교원대)

토론: 박단(서강대)

 

발표: 이탈리아의 ‘정상 국가’ 담론과 포퓰리즘 - 장문석(영남대)

토론: 이선필(한국외대)

 

발표; 라틴아메리카 포퓰리즘과 권력의 식민성 - 김은중(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토론: 이성훈(서울대)

 

발표: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의 '새로운 포퓰리즘':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와 국민연대프로그램 - 박구병(아주대)

토론: 김윤경(서울대)

 

 

● 한국의 포퓰리즘 9월 28일(토) 1시-6시

 

발표: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 진태원(고려대)

토론: 박영균(건국대)

 

발표: 포퓰리즘과 민중주의 사이에서: 대중영합주의와 민주주의의 급진화 - 서영표(제주대)

토론: 김윤철(경희대)

 

발표: 한국 사회운동의 민중주의 - 김정한(고려대)

토론: 황병주(국사편찬위원회)

 

발표: 한국의 신자유주의 정치와 포퓰리즘: 김대중, 노무현정권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 이광일(한신대)

토론: 조희연(성공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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