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인문논총] 37집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지난 6월 8일 동 연구원 주최로 열린 콜로퀴엄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이 글에 관해 토론하거나 인용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인문논총]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I. 서론
II. 아렌트와 인권의 역설
III. 희생자들의 권리로서 인권: 랑시에르의 비판
IV.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발리바르의 아렌트 해석
V.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
I. 서론
이 글에서 우리는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도발적인 주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이 글의 제목은 명백한 용어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무정부주의가 국가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면, 시민성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국가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사고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주제는 처음부터 그다지 의미 있는 논점을 제기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굳이 이처럼 도발적인 제목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같이 현재 서구 인문학계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고 국내에도 널리 소개되어 있는 현대 유럽 철학자들 및 이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바깥의 정치’[‘바깥의 정치’는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카르젠티(Bruno Karsenti)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 나타난 푸코의 정치적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으로, 필자는 이 표현을 원용하여 현대 유럽 철학자들 및 이론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의 정치적 지향을 ‘바깥의 정치’로 개념화한 바 있다.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집, 2012 참조.]의 합리적 핵심을 바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바깥의 정치를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유사파시즘적인 정치체로 환원하고, 이에 따라 그러한 정치체를 내적으로 개조하려는 문제를 도외시하고, 더 나아가 예속적 주체화에서 해방적 주체화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제기는 현재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가 단순한 정세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인 위기이며, 그 핵심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들이 자신들의 토대를 이루는 민중 내지 인민의 봉기적 역량을 잠식하는 데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귀기울여볼 만한 논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바깥의 정치론은 봉기적 역량에 근거를 둔 정치체는 어떻게 가능한가(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적 인민의 봉기적 역량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점에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상론하겠다.
둘째, 우리의 생각에 이는 한나 아렌트의 현대적 유산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을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제기한 근대 정치의 핵심적인 아포리아 중 하나는 인권의 역설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근대 정치의 토대에 있는 기본적인 원리인데, 이것이 풀기 어려운 역설에 빠져 있다면, 그것에 기반을 둔 근대 민주주의 정치 역시 역설적인 결과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민주주의 정치가 현재 직면한 위기에 대한 해법 중 하나는 이러한 인권의 역설에 대한 면밀한 고찰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쟁점 중 하나는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평가하는 매우 상반된 방식의 함의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 정치철학, 특히 그녀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에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해낸다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더욱이 이는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해 유사한 관점을 지닌 두 사람이 아렌트에 대하여 거의 상반된 해석을 제시하는가라는 문제는 꽤 흥미 있는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발리바르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110호, 2013년 여름호 참조.]
셋째, 아렌트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민주주의에 본래적인 무정부성 및 그것에 기반을 둔 시민성의 가능성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나 무정부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정부성에 기반을 둔 시민성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또한 그것이 현재 민주주의 정치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해 무언가 의미 있는 전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이 글에서 제기해보려는 쟁점이다.
II. 아렌트와 인권의 역설
한나 아렌트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체주의의 기원 9장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기에 인권의 이념이 직면했던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인권은 양도할/소외될(inalienable) 수 없다고 추정되지만, 주권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항상—심지어 인권에 기초한 헌법을 보유한 국가에서조차—인권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Harcourt, 1973,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파주: 한길사, 2006, 528쪽. 번역에 관해 한 마디 지적해두자면, 한글 번역본은 전체적으로 원문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비교적 무난한 번역이지만, 원문의 논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는 꽤 지장을 준다. 이는 특히 번역자들이 (몇몇 오역 이외에도) nation, nationalism, nationality, tribal nationalsm, minority, people 등과 같은 주요 개념들을 일관성 없이, 또한 피상적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논의를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에 대한 참조가 꼭 필요하다. 이하 번역본의 인용문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지만, 수정 사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았음을 밝혀둔다.]로 집약되는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난민들과 무국적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렌트는 1914년 8월 4일 이후, 곧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유럽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서술하기는 현재에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이 “이제까지 어떤 전쟁도 하지 못한 일, 즉 유럽의 국제 외교 관계를 복구 불가능한 정도로 파괴시켰”고,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수많은 중간 계급의 몰락을 낳았으며, 대규모의 “집단 이주”[인용문은 모두 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489쪽의 것이다.]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489~90쪽.]
이 때문에 아렌트는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가 전간기(戰間期)에 사실로 드러났고, 이런 점에서 버크의 논리가 “아이러니컬하고 신랄한 형태”[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9; 전체주의의 기원, 537쪽.]로 확인되었다고 지적한다. 곧 버크는 인권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 “자신의 권리는 인권이라기보다 “영국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지적했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적을 상실한 소수 민족들과 망명자들, 이주민들이 겪은 사태는 그의 지적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의 권리 상실은 어떤 경우에든 인권의 상실을 수반했다. 최근의 사례인 이스라엘 국가가 입증하듯이, 인권의 회복은 국민적 권리의 확립이나 회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권 개념은 인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인권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다른 자질과 특수한 관계들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마주치는 순간, 인권 개념은 파괴되었”[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9; 전체주의의 기원, 537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이 어떤 나라의 국민이나 시민이든 간에,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로 인해 지니게 되고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따라서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임에도, 실제로는 어떤 개인이 이러한 인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특정한 나라의 시민 내지 국민의 자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독립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것을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국가의 성원이 지닌) 시민의 권리에 의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 또는 “인권의 아포리아”다.[아렌트는 영어판 9장 2절의 제목을 “The Perplexities of the Rights of Man”으로 붙이고 있으며, 국역자는 이를 “인권의 난제들”이라고 옮기고 있다. 필자가 이를 “인권의 아포리아”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렌트 자신이 감수한 전체주의의 기원 독어판(Elemente und Ursprünge Totaler Herrschaft, Frankfurt am Main: Europäischer Verlagsanstalt, 1955)에서는 “die Aporen der Menschenrechte”라는 제목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당혹감’이나 ‘곤란’을 뜻하는 perplexity라는 단어보다는 아포리아나 역설이라는 말이 아렌트의 논점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Christoph Menke, “The “Aporias of Human Rights” and the “One Human Right”: Regarding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Argument”, Social Research, vol. 74, no. 3, 2007 참조.]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제기하려는 문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인권의 박탈은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의 박탈을 뜻한다는 점이다. “인권의 근본적인 박탈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 행위로 만드는 그런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6; 전체주의의 기원, 532쪽.] 둘째, 이러한 인권의 역설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에 고유한 세상,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장소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구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정치적 삶의 공간은 초월적(가령 신과 같은)이거나 자연적인(가령 민족과 같은)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우발적인 토대, 따라서 토대 아닌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 그러므로 인권의 역설이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것은, 인권에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정치 상황이 출현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권리들을 가질 수 있는 권리(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특별한 권리의 상실이 아니라 어떤 권리이든 기꺼이 보장해주고 보장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상실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닥친 재난이었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근본 자질과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른바 말하는 인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단지 정치 조직의 상실만이 그를 인류로부터 추방한 것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7; 전체주의의 기원, 534쪽.]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한 번도 인권의 항목 가운데 언급된 적이 없는 권리”이며, 이것은 “18세기의 범주에서는 표현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권리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직접 생겨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7; 전체주의의 기원, 534쪽.]
아렌트는 인권의 역사를 두 가지 단계를 경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18세기 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역사적 권리는 자연권에 의해 대체되었고 ‘자연’은 역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이처럼 인권을 역사 대신 자연에 기초 지음으로써, 각각의 민족이나 국민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권리를 통해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거나 불변적인 것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지배 계급이나 특권 계급의 권리를 비판하고, 인간이 인간이라는 자연적 사실 자체를 통해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이제 역사만이 아니라 자연도 인간에게 낯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의 인간이 역사로부터 해방되었듯이 20세기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8; 전체주의의 기원, 535쪽.] 따라서 이제는 인류 자신이 과거에 자연이나 역사가 수행했던 역할을 떠맡게 되었는데, 이는 곧 “권리들을 가질 권리 또는 인류에 속할 수 있는 모든 개인의 권리가 인류 자체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8; 전체주의의 기원, 536쪽. ]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것이 과연 가능할지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국제 관계가 여전히 주권 국가들 간의 상호 협정과 조약에 입각한 국제법에 따라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세계 정부’의 건설 역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법이 될 수 없는데, 그러한 세계 정부라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면 이상주의적 경향을 가진 조직이 촉구한 버전과는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까”[H. Arendt, Ibid.; 같은 곳.] 짐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의 많은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박탈 경험에 입각하여 인권의 역설을 제기하고, 인권 속에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새로운 범주가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범주에 걸맞은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의 아포리아 및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이후 아렌트 연구의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철학, 특히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문제는 서양 학계에서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들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 개념에 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우선 이 개념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존재한다.[특히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참조.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인권을 이론적으로 근거 지으려는 시도는 불가능하거나(왜냐하면 이는 신학적 권위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무익하다(왜냐하면 인권을 정당화하려는 이론적 시도보다 과거에 벌어난 대학살이나 공포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인권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인권을 “의문의 여지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기보다는 인권을 정치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p. 83).] 앞서 말했듯이 한나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로 파악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제창된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을 “실용적으로 건전한”[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299; 전체주의의 기원 1, 537쪽.]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버크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국민국가에 소속될 권리만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이면서 강력한 국민국가에 소속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된다. 더 나아가 국제정치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인권을 유린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국가나 집단에 맞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함축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권은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존하게 되며 권리는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나 시혜를 의미하게 되는데,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을 훨씬 더 가중시키며, 인권이라는 개념을 무력화(無力化)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James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102, no. 4, 2008 참조. 이 글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적 해석과 칸트주의적 해석에 대한 비판은, 한두 가지 이견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인그램의 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뒤에서 좀더 논의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인그램은 랑시에르의 아렌트 해석이 지닌 난점을 충분히 검토하고 있지 않다.]
칸트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도 존재한다.[Jürgen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8; 위르겐 하버마스, 이질성의 포용, 황태연 옮김, 서울: 나남, 1998; Seyla Benhabib, The Rights of Other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세일라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서울: 철학과현실사, 2008,] 전자의 경우와 달리 이러한 해석에서는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제도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적인 것이 된다.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영구평화론을 비롯한 법철학 저술에서 칸트의 제안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좀더 발전시켜서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세계시민적 정치체 및 정치 제도의 확립 속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려고 한다. 가령 벤하비브가 보기에 칸트 자신 및 아렌트가 국제관계에서 인권의 확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이유는 그들이 주권적인 국민국가를 정치의 (자연적인) 토대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 공동체 및 법 제도의 가능성을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해 실질적인 해법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이고 국제적인 법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특히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4장 참조.]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서 이러한 세계정치적 인권 체제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첫 번째 관점과 비슷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구체적인 법적 제도로 실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하버마스의 용어법대로 하면 세계적인, 적어도 국제적인 공론장의 형성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대량 학살로 인해 고통 받는 동료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류의 도덕적 각성을 필요로 한다.[J.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op. cit.]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기에서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법적ㆍ정치적 제도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들의 권력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역시 인권은 그 권리의 당사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이들의 힘에 달려 있는 문제가 된다.[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op. cit. 물론 이러한 인그램의 비판에 대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들 내지 국제관계의 존재가 반드시 인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희생자의 지위로 한정하는가라는 반론을 제기해볼 수 있다. 하버마스와 벤하비브의 주장은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자기 해방, 자기 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봉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가능성 자체의 소멸이나 약화를 방지할 수 있는 국제 질서의 조건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III. 희생자들의 권리로서 인권: 랑시에르의 비판
따라서 이러한 해석들보다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과 좀더 정면으로 대결하는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실제로 최근에 여러 이론가들이 아렌트의 이론에 관한 새로운 해석 및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제안은 아렌트의 저작들에 대한 좀더 면밀하고 충실한 검토에 입각하고 있을뿐더러, 자유주의적이거나 칸트적인 해석과 달리 인권의 문제를 정치 그 자체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É. Balibar,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보편적인 것들」, 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서울: 도서출판 b, 2007; id.,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0; id.,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New Reflections on Equaliberty”,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월간 사회운동 2006년 11월호, 통권 69호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24; id.,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 id.,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 id., “On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Constellations, vol. 20, no. 1, 2013; 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s. 2-3, 2004; 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op. cit.; Peg Birmingham,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Bloomington, I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1, no. 1, 2011; Justine Lacroix, “Human Rights and Politics, 1980-2012”, Books & Ideas.net, 2012. http://www.booksandideas.net/Human-Rights-and-Politics.html]
그 중에서 먼저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랑시에르가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아렌트의 인권 해석에 대하여 제기한 비판이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이전에도 랑시에르는 아렌트 정치철학의 이런저런 측면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적이 있지만,[가령 J. Rancière, “Dix thèse sur la politique”, in Aux bords du politique, Paris: Gallimard, 2002; 「정치에 관한 열 개의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13(수정 재판) 참조.] 아렌트가 제기하는 인권의 역설에 관해 전면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이 글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아감벤이 자신의 이론적 실마리로 삼고 있는 아렌트의 인권 해석에 대한 반박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인권의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 자신의 관점을 제안하고 있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주목하는 것은 현재 국제정치에서 나타나는 인도주의적 인권 개념과 아감벤이 제시하는 종말론적인 정치 사이에 모종의 연관 관계가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은 이론적으로 볼 때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한 인권의 역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인권이야말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한 이후, 전지구적인 자유 시장 경제와 전지구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역사 이후의(posthistorical) 세계”의 명실상부한 이념적 원리, 헌장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갈등과 대량 학살, 종교적 근본주의의 분출, 새로운 인종주의 및 외국인 혐오증의 확산, 신자유주의가 산출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의 증가 등으로 인해 세계는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인권은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 곧 자신의 집과 땅으로부터 내쫒기고 인종 학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들의 권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인권은 점점 더 희생자들의 권리, 자신들의 이름으로는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주장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권리인 것으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권리는, ‘인도주의적 간섭’에 대한 새로운 권리—궁극적으로는 침략에 대한 권리가 되어버린—라는 이름 아래 국제 권리 체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타인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게 되었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p. 297~98.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인권은 미심쩍은 것이 되었는데, 인권에 대한 이러한 의혹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인권 비판보다는 버크의 인권 비판을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곧 “실제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국민 공동체 자체와 결부되어 있는 권리”이며,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한낱 추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생겨났다. 랑시에르는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 역시 버크의 이러한 인권 비판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인권은 단지 인간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권리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인권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이며, 권리에 대한 조롱에 불과하다.”[J. Rancière, Ibid., p. 299.]
이 대목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권이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한 이들,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권리에 대한 조롱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뒤에서 좀더 논의하겠지만, 랑시에르 자신이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로서의 인권은 해방 투쟁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랑시에르는 이것을 권리에 대한 조롱으로 이해하며, 더 나아가 인권의 역설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야말로 “50년이 지난 이후, ‘인도주의적’ 무대에 나타난 인간의 권리의 새로운 “난점”에 딱 들어맞는”[J. Rancière, Ibid.]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모종의 ‘예외상태’에 대한 아렌트의 개념화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처한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아무런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그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531쪽.] 여기서 랑시에르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아렌트의 말이 “명백히 경멸적인 말투”[
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299.]를 띠고 있다고 이해하는데, 그가 보기에 아렌트의 이 말은 “마치 이 사람들이 심지어 억압당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심지어 억압될 만한 가치도 없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J. Rancière, Ibid.]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와 아감벤 사이의 지적 계보의 근거를 발견하는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에게 이러한 진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근거 짓는 고유한 인간학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볼 수 있듯이 활동의 세 가지 형식, 곧 노동(labor)과 제작(work), 행위(action)의 형식을 구별하면서, 삶의 필요에 관한 작업과 관련된 사적 영역(곧 오이코스(oikos)의 영역)에 속하는 노동 및 제작과 구별되는 행위야말로 본래적인 공적 영역, 곧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H. Arendt, The Human Condition, Introduction by Margaret Canova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2nd Edition); 인간의 조건, 서울: 이진우ㆍ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참조. 참고로 국역본은 1958년의 초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성의 특징 중 하나는 고대 세계에서는 유지되었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무너지고 사적 영역에 속하는 노동이 공적 영역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또한 아렌트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차이점(및 전자의 우월성)을, 전자가 자유의 정초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후자는 “고통의 직접성”에 의해 규정되었고, “전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필요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요구”에 따라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On Revolution, LondonㆍNew York, Penguin Books, 1965, p. 92.] 아렌트는 1848년 이후 공적 영역 속으로 노동운동의 등장은 근대 정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지만, 노동운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노동운동이 사회 속으로 통합이 되고 노동자들이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게 되면, 노동운동은 오히려 공적 영역 및 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게 된다고 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아렌트 인간학의 특징을 생물학적 삶 및 사적 영역의 삶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위대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고유하게 정치적인 삶을 가리키는 비오스(bios) 사이의 엄격한 구별 및 분리에서 찾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감벤의 정치철학, 특히 그의 세계적인 출세작인 호모 사케르는 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에 의거하고 있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서울: 새물결, 2008 참조.] “아렌트가 보기에 인권과 근대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삶의 혼동—이는 궁극적으로는 비오스를 순전한 조에로 강등시키는 것을 뜻한다—에 의거한 것이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299.] 따라서 아렌트가 말한 “억압을 넘어선 상태”는 이 두 가지 삶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것의 이론적 귀결이다.[랑시에르의 관점을 따라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는 또 다른 논의에서도 유사한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 Andrew Schaap, “Enacting the Right to Have Rights: Jacques Rancière’s Critique of Hannah Arendt”,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0 no. 1, 2011; Jean-Philippe Deranty & Emmanuel Renault, “Democratic Agon: Striving for Distinction or Struggle against Domination and Injustice?”, in Andrew Schaap ed., Law and Agonistic Politics, Ashgate, 2009 참조. ]
랑시에르는 이것을 아렌트 정치철학에 고유한 “아르케 정치적 입장”으로 간주한다. 아르케 정치(archi-politique)는 랑시에르가 불화의 4장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플라톤이 창설한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Galilée, 1995 참조.] 아르케 정치의 고유한 특징은 정치적 활동을 소수의 집단에게만 할당하고, 데모스 또는 인민은 정치의 영역 밖으로 배제하고 오직 삶의 필요와 관련된 일에만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케 정치는 정치적 활동을 전담하는 소수 지배 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위한 정치를 뜻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정치적 계급은 아무런 사적 소유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케 정치의 특징은, 정치적 행위에 걸맞은 자격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따로 있으며, 정치는 이 사람들이 전담하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자격과 능력에 적합한 일에 전념해야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이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농부는 농부답게, 장인은 장인답게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 아르케 정치의 이념인 셈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관점을 아르케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순수한 정치의 영역과 삶의 필요와 관련된 영역을 구별하고 후자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전자의 영역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렌트의 고유한 관심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순수한 정치 영역을 보존하려는 의지는 궁극적으로 이 영역을 국가 권력과 개인적 삶의 관계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이며, 따라서 아감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를 권력과 같은 것으로, 곧 “점점 더 저항할 수 없는 역사-존재론적 숙명(오직 신만이 우리를 여기에서 구원할 수 있으리라)으로 여겨지는 권력”[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302.]과 같은 것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랑시에르는 이러한 아렌트-아감벤의 계보에 맞서 인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하지만 랑시에르 특유의 환원적이고 단언적인 주장과 반대로, 아감벤의 저작에서 ‘인간적인 것’ 및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논의를 참조. John Lechte and Saul Newman, “Agamben, Arendt and Human Rights : Bearing Witness to the Human”,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15, no. 4, 2012.] 그는 이를 아렌트가 만들어낸 두 가지 진퇴양난의 딜레마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길의 형태로 제시한다.
아렌트는 인권과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을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는 진퇴양난으로 만든다. (1) 시민권은 인권이다. 그러나 인권은 정치화되지 않은 사람의 권리다. 이 권리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결국 무로 귀착된다. (2) 또는 인권은 시민권이다. 이러한 시민권은 이러저러한 헌정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이 권리가 권리를 지닌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뜻하며, 이는 결국 동어반복으로 귀착된다.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이거나 아니면 권리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 공허한 것이거나 아니면 동어반복이라는 것, 그리고 양쪽 다 속임수라는 것. 이것이 아렌트가 조립한 자물쇠다. 이러한 자물쇠는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가정을 일축하는 대가를 치를 경우에만 작동하게 된다. 실로 세 번째 가정이 존재하는데,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겠다. 인권은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302.]
랑시에르가 제시한 세 번째 가정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우선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기록된 권리들”, 곧 성문화된 권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기입들(inscriptions)”[J. Rancière, Ibid.]인 이러한 성문화된 권리들은 개인들이 이러한 권리에 기초하여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사회ㆍ정치적 상황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근거들로 작용한다.[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인권 및 시민권을 단순히 불평등한 경제적 착취 현실을 은폐하는 법적 이데올로기로 치부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의 마르크스 및 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비판한다. 불화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관점을 메타정치(meta-politique)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권은 그들에게 부여된 성문화된 권리를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는 개인들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인권이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은, 이러한 개인들이 단지 이미 기입되어 있는 권리를 옹호하고 그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입을 바탕으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권리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권리 주체들을 생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와 평등은 한정된 주체들에 속하는 술어들이 아니다. 정치적 술어들은 열린 술어들이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어떤 경우에 누구와 관계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열어놓는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303.]
따라서 랑시에르에게서 인간과 시민의 차이, 또는 인권과 시민권의 차이는, 아렌트가 제시하는 진퇴양난에서처럼 공허하든가 동어반복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간격을 폐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치의 공간,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생산의 장을 뜻한다. 정치적 주체들은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실현하고 그러한 권리들에 근거하여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해내는 이들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주체들을 총칭하여 데모스 또는 인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가난한 이들의 권력”이나 “벌거벗은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할 자격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력”[J. Rancière, Ibid., p. 305.]으로 정의한다. 곧 “민주주의는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통치하는 데 필요한 어떤 특별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권력”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불화를 비롯한 다른 저작에서 민주주의를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IV.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발리바르의 아렌트 해석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더 부연하기로 하고, 이제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대해 제시하는 해석을 살펴보자. 발리바르는 1990년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관해 논의한 바 있는데, 그의 성찰의 핵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권의 역설론이다.[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논의로는 주 22)의 문헌들 참조.]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또는 ‘권리들에 대한 권리’[아렌트의 불어 번역본에서는 right to have rights를 ‘droit aux droits’로 번역하고 있으며, 발리바르도 불어로 글을 쓸 경우에는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는 말 그대로 하면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뜻한다.])라는 개념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렌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랑시에르가 정치적 공간에서의 만인을 위한 실질적 평등의 척도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의 기원에서부터 ‘몫 없는 이들의 몫’에 대한 인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배제―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제이지만 또한 다른 차별의 범주들도 여기에 속합니다―의 과정을 정치체 안으로의 포함 과정으로 전화시킴(이는 정치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킵니다)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재정식화하려고 시도했던 것과 가까운 관점입니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32쪽.]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 프랑스어로 2001년에 출간되었고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가 2004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랑시에르가 자신의 글에서 발리바르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는 해도,[사실 랑시에르는 다른 곳에서도 전혀 발리바르의 작업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발리바르의 이러한 (부당한?) 연결에 대한 반론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역으로 발리바르는 랑시에르의 글이 출판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권의 역설론, 특히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재고찰하면서 자신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드러내고 문제의 쟁점을 심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아렌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권의 정치 및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해석과 비교해볼 때 발리바르의 해석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는 랑시에르의 해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이 개념에 초점을 두고 인권의 역설을 고찰하게 되면, 아렌트 문제제기의 핵심에는 정치 공동체의 무근거성, 아르케 없음이라는 문제, 아르케 없는 정치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음이 드러난다. 셋째, 만약 이것이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의 핵심 쟁점이라면, 그로부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포리아적 성격 또는 이율배반적 성격이라는 문제다.
우선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발리바르는 아렌트의 핵심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권리들의 인간학적 토대라는 관념 및 정치적인 것의 토대로서 ‘인권’의 고전적 교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 중 하나를 전개하면서도 이 권리들 중 몇 가지를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극단적으로 옹호했으며, 이러한 권리들에 대한 무시는 인간적인 것의 잠재적인 또는 현행적인 파괴로 귀착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전형적인 인권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일반, 특히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É. Balibar,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op. cit., p. 728. 강조는 발리바르.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인용문의 강조 표시는 원저자의 것임을 일러둔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아렌트의 정리”(Arendt's theorem)라는 수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된다.”[É. Balibar, Ibid., p. 732.] 정리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인권과 관련된 이러한 역설적 사태가 일시적이거나 역사적 우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이다. 아렌트의 정리가 지니는 보편적 함의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정리가 인간의 권리에 함축된 권리라는 것이 개인 주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 말 그대로 양도/소외 불가능한 자연적 성질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서로에게 부여해주고 또한 서로에 대해 보증해주는 자격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 있다. 개인들이 지닌 인권은 이것 이외에는 다른 보증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민의 권리가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는 이유는, 인권이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랑시에르가 주장하듯이, 아렌트가 버크를 옹호하면서 인권은 국민의 권리의 부속물이라는 것, 국민 국가(또는 주권적 권력)에 소속되는 것이 개인들의 역사적 숙명이며, 그러한 공동체 바깥에서는 권리라는 통념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고 개인들은 오직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자연적 성질만을 지닐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아렌트의 논점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첫째, 아렌트가 말하려는 것은 “행위의 상호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공동체의 제도/설립 바깥에는, 인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0.] “완전하게 조직된 인류와 더불어 고향과 정치적 지위의 상실은 인류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4; 전체주의의 기원, 533쪽.] 또는 역으로 표현한다면, 인간 존재 그 자체는 개인들이 공동으로 형성된 세계 속에서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권리들과 다르지 않으며, 그 권리들만큼 실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둘째, 인간의 인간성 자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공동의 세계 형성은 특정한 정치 제도나 공동체의 형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아렌트가 명시적으로 말하듯이 인권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는, 또는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인권의 항목들을 보호하고 성립하게 해줄 수 있는 일차적인 권리로서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윤소영 옮김, 서울: 공감, 2003, 23쪽.]라고 바꿔서 표현하며,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89)의 한 가지 핵심(그가 인간=시민 명제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에서 찾는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권리선언은 인간을 시민으로, 인권을 시민권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권리선언이 개인의 자율성, 개인적 권리의 영역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다 정치로 환원하며, 따라서 공포정치 및 전체주의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나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식의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 해석 및 반(反)전체주의론적 비판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인간=시민 명제의 핵심을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 파악한다면, 인간=시민 명제는 인간을 시민으로 환원하거나 자유를 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나 개인적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란, 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불변적인 자연적 사실에 기초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쪽. 이 부분은 2010년 판본에는 빠져 있다.]이라는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이라는 것이 시민적 권리에 선행하지 않으며, 이러저러한 시민적 권리들과 더불어 인권 역시, 서로에 대해 권리를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개인들의 공동의 세계 구성 행위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이거나 본질적인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민들의 호혜적인 행위 이외의 다른 기초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아르케 없는 것으로서의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가라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되는데, 그것은 이러한 아르케 없는 공동체로서의 민주주의 공동체에 본래적인 이율배반적인 또는 아포리아적인 성격이라는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한 가지 심원한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리들을 창조하는 동일한 제도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들이 그것들을 통해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함으로써 인간 주체들이 되는 그러한 동일한 제도들은, 그것들이 이 권리들을 파괴할 경우에는, 또는 권리들을 실행하는 데 장애가 될 경우에는 또한 인간적인 것에 대해 위협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1.]
아렌트가 국민국가에 고유한 인권의 역설을 통해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인권선언에 기초를 두고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호혜적인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수립되었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평등과 자유를 제한할뿐더러, 그 성원들 중 일부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소수민족 조약은 평이한 언어로 그때까지 오로지 국민국가의 현 시스템에서만 적용되었던 것들을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단지 한 나라의 국민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고, 같은 민족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법 제도의 완벽한 보호를 누릴 수 있으며,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완전히 동화되지 않거나 자신의 혈통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예외법을 필요로 한다는 것들이 거기 쓰여 있었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501쪽.] 아렌트는 이것이 단순히 국민국가에만 고유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좀더 외연이 넓은 초국민적인 국가 및 일종의 세계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그 국가나 정부는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체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축소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는(곧 배제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었던 칼 야스퍼스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안한 ‘세계 연방 국가’ 방안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그 국가는 고도로 강력한 “연방 치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무력은 또 다른 억압과 폭력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Hannah Arendt, “Karl Jaspers: Citizen of the World”, in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1968 참조.]
V.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필자가 보기에 아렌트와 랑시에르,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문제는 근대 정치체,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체는 근본적으로 아르케 없는 정치체, 무-정부주의적 정치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정부주의적’이라는 표현은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랑시에르의 통찰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화에서 그리스어 아르케가 지닌 여러 의미를 활용하면서 민주주의는 아르케 없는(an-arkhe) 것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이래로 서양의 정치철학에게 하나의 스캔들로 간주되었음을 역설한 바 있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op. cit. 참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본다면 아르케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아르케는 만물의 시원이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둘째, 이러한 시원이나 근원은 또한 원리나 토대, 근거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마지막으로 아르케는 지배나 통치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에는 지배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원리 또는 토대가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이를 민주주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양 정치철학이 추구했던 것은,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귀족, 부자, 평민)에게 돌아갈 합당한 자격과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사실은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본성적인 정치 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주주의 또는 정치(랑시에르에게 이 양자는 동의어다)는 아르케의 질서에서 몫을 배제당한,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추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세 사람이 갈라지는 것은 이처럼 민주주의가 본래적으로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체, 아르케 없는 정치체로서의 민주주의적 정치체는 어떤 것인가, 아르케 없는 시민성이란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해서다. 그런데 만약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배제라는 문제가 된다. 아르케는 내부와 외부, 동일성과 비동일성, 자격자와 비자격자, 시민과 비시민(이방인)을 구별하는 원리이며, 아르케에 기반을 둔 모든 정치체는 이러한 구별에 입각한 배제를 통해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민주주의 정치체, 특히 근대 국민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가 직면한 화두의 하나로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문제는 아르케 없는 시민성, 배제 없는 시민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인권의 역설에 대한 아렌트의 성찰 및 그것에 대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대조적인 해석은 이 문제가 지닌 여러 가지 함의를 숙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 자신은 이러한 질문을 질문으로 남겨 두었으며, 그것에 대하여 뚜렷한 답변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손쉬운 답변들을 통해 이러한 질문이 지닌 아포리아적인 깊이를 은폐하거나 봉쇄하지 않으면서 그것의 난점을 온전히 드러냈다는 점이야말로 아렌트 사상의 강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아렌트 사상에서 아포리아 논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op. cit. 참조.]
반면 랑시에르는 아렌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렌트 사상에 고유한 한계의 징후를 읽어낸다. 그가 보기에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로 제시한 것은 사실은 아렌트 정치철학이 또 하나의 아르케 정치라는 점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며, 따라서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은 인권의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한 방식에 불과하고,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깊은 비관주의와 종말론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입각하여 종말론적인 호모 사케르의 정치철학을 제시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아렌트가 제기하는 인권의 역설에 대한 해석 및 해법의 제안에서 랑시에르는 매우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독해와 해법은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아렌트에 대한 그의 해석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랑시에르의 해석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과 아감벤의 종말론적인 정치철학 사이에 본질적인 지적 연관성이 존재하며, 그것은 조에와 비오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삶의 양태의 엄격한 구별에 기초하여 인권 및 정치를 이해하려는 아렌트 사상의 본질주의적인 경향에 근거를 둔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몇몇 주석가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아감벤이 아렌트 사상에 (부분적으로) 의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감벤과 달리 아렌트 사상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아렌트와 아감벤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John Lechte & Saul Newman, “Agamben, Arendt and Human Rights : Bearing Witness to the Human”,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op. cit. 참조.] 또한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과연 아렌트가 버크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버크의 논리가 “아이러니컬하고 신랄한 형태”로 확인되었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국민국가가 벗어날 수 없는 근대인의 운명이라는 점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치 조직으로서 국민국가의 근본적인 한계가 드러났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둘째, 여기서 더 나아가 인권의 정치에 관한 랑시에르 자신의 해법이 품고 있는 난점에 관해 지적해볼 수 있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에 맞서 자신의 세 번째 가정을 제시했을 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공동체(따라서 랑시에르 자신이 ‘치안’(police)이라고 부른 것과 구별되는)가 성립할 수 있으며,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인간의 권리가 성문화된 권리로 기입되어 있고, 이러한 권리는 인권 및 시민권을 위한 투쟁의 효과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이 제기하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는 인권의 역설을 감당할 만한 정치 공동체,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것이었다.[아렌트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책에서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인권의 역설에 관한 아렌트의 논의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아렌트의 개인적 경험 및 성찰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렌트가 제기하는 유대인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계몽주의가 정치적 권리를 전면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권리’―추상적 인간의 권리―로 이해되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계몽주의에 의해 형성된 ‘해방’은 어떤 이의 유대인성으로부터의 해방(즉 유대인으로서의 유대인의 해방이 아니라 유대인의 자살)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곳에 그토록 많은 저항과 불관용이 존재했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근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즉 유대인 문제에 아렌트가 주의를 기울였을 때, 이 문제는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그녀는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실패를 나치 전체주의의 발생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리처드 J. 번스타인,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 김선욱 옮김, 서울: 아모르문디, 2008, 44쪽. 강조는 번스타인.]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것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공동체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권의 역설에 관한 아렌트의 문제제기가 지닌 의의 중 하나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이주자, 이민자, 난민들이 처한 인권의 상황을 50여 년 전에 아렌트가 명철하게 포착해냈다는 점에 있다. 곧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수많은 국적 없는 이들이 직면했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이 국적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이 50년 전 또는 70년 전의 일시적이고 상황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함의를 지닌 문제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랑시에르 자신이 제안하는 해법은 설득력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해법 자체는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이 현실적인 역설이라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지, 더 나아가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아렌트의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지 반문해볼 수 있다.[따라서 랑시에르가 아렌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지만, 사실 랑시에르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렌트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주 22)에서 제시한 James Ingram 및 Justine Lacroix의 논문을 참조.]
이는 결국 랑시에르 정치학이 지닌 근본적인 난점과 연결된다. 랑시에르가 자신의 정치학에서 좀처럼 제기하지 않는 문제는 인권 선언 또는 봉기 일반에 고유한 불안정성이라는 문제, 다시 말하면 (혁명적) 봉기와 그것을 구현하고 실현하려는 민주주의 헌정 사이의 아포리아적인 또는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문제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적 봉기는 자신의 고유한 유한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봉기의 결과를 구현하고 그것에 대해 상대적 영속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제도를 필요로 하는 반면, 봉기를 구현하기 위해 제도화된 헌정 질서는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봉기를 제한하고 퇴락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사실 사이의 갈등 또는 아포리아라는 형태를 지닌 문제다.
사실 이 문제는 이미 몇몇 이론가들이 자신의 정치철학의 고유한 대상으로 제기한 바 있는 문제다. 가령 자크 데리다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한 탈구축적인 독서에서 이를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사이의 아포리아적인 관계, 또는 필연적인 “차이적(差移的) 오염”(différantielle contamination)[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90쪽. 강조는 데리다.]의 관계라고 부른 바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이적 오염은 “법정초적이거나 법정립적 폭력 자체는 법보존적 폭력을 포함해야만 하며 결코 그것과 단절될 수 없다”[법의 힘, 88쪽.]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법 내지 정치체를 새롭게 정초한 폭력은 그것이 정초적 폭력으로 기억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계속 보존되어야 하며, 따라서 보존적 폭력을 자신의 구조 속에 포함해야 한다. 역으로 법보존적 폭력은 자신이 보존하려는 것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정초해야 한다. 곧 원래부터 존재하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보존적 폭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보존적 폭력은 정초적 폭력의 계기를 그 자체 내에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가지 폭력, 또는 봉기와 헌정은 차이적 오염의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발리바르는 이를 민주주의와 시민권 헌정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문제로 정식화한 바 있다.[É. Balibar, “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한편으로 시민권 헌정은 자신의 토대로서 민주주의에 근거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급진적인 보편성을 온전히 수용할 경우 그 제도적 틀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한해야 한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제도로 구현된 모든 민주주의 헌정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고대 민주주의에서 노예가 시민권 헌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점이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에 기초를 둔 근대 민주주의 역시 자신의 고유한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 초기의 무산 계급에 대한 배제나 여성에 대한 배제 또는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배제들 이외에 국민국가에 고유한 배제라는 쟁점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시민성(citoyenneté)=국적(nationalité)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시민권=국적’ 등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4장 및 정치체에 대한 권리, 131쪽 이하 참조.] 곧 정치적 자격으로서의 시민성을 국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 헌정, 곧 국민 국가의 본질이며, 이것은 인권선언에서 천명된 보편적 인권 및 시민성 원리와 모순을 빚는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화의 과제는 이러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반면 랑시에르에게는 이러한 문제설정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그가 민주주의와 헌정 사이의 관계를 정치와 치안 사이의 배타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앞의 책 참조.] 민주주의와 헌정 사이의 관계가 정치와 치안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대립적 관계로 정의되면,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항상 치안 질서에 대한 위반과 단절, 파열의 행위로 나타나게 되며,[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지배의 논리를 이러한 평등의 효과가 가로지를 때 정치가 존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항상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는 심지어 매우 드물게, 간혹 존재할 뿐이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p. 37.] 다른 한편으로 정치 공동체 내지 헌정(또는 그것을 구조화하는 논리)으로서의 치안은 늘 소수 특권 계급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의 질서, 본성상 과두제적인 지배의 논리로 나타나게 된다. “치안은 온갖 종류의 재화들(biens)을 공급할 수 있으며, 어떤 치안은 다른 치안보다 무한하게 더 좋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치안의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p. 54.] 이 경우 사고 불가능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민주주의적 정치는 어떻게 일회적인 봉기적 행위를 넘어서 지속될 수 있는가? 단절과 위반을 통해 표출된 인민의 봉기적 힘은 어떻게 구조적ㆍ제도적 역량으로 전화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사건과 행위를 넘어 민주주의적 조직, 민주주의적 정치체로 구성될 수 있는가? 반대로 정치와 치안 사이의 배타적인 대립 논리를 따른다면,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오직 위반과 단절의 사건 내지 행위로 국한되고, 모든 조직, 모든 정치체는 본성상 치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반대하여 제시하는 해법 역시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랑시에르의 해법은,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기입들”, 곧 성문화된 권리들이 치안 질서 내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해방의 삼단논법”에 관한 그의 탁월한 논의 역시 이러한 기입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앞의 책 참조.] 그렇다면 랑시에르는 한편으로 민주주의적 투쟁을 위해 자유와 평등의 법적ㆍ물질적 기입을 요구하면서도(다시 말해 치안과 구별되는 민주주의적 공동체(또는 적어도 민주주의적 공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공동체 일반을 치안으로 환원하고,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p. 79]라고 간주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셈이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최근 이루어진 몇몇 대담에서 정치와 치안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 관계를 완화하거나 정정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가령 랑시에르는 2008년의 인터뷰에서 ‘드문 것으로서의 정치’라는 표현이 바디우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표현을 재고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J. Rancière, Moments politiques: Interventions 1977~2009, Paris: La Fabrique, 2011, p. 181 참조. 또한 2011년에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서는 정치와 치안의 관계를 재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급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역량의] 증식의 형태를 취할 수 있기 위해, 이미 지금 자신의 형태, 자신의 도구,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Antoine Janvier & Alexis Cukier, “La question politique de l’émancipation: Entretien avec Jacques Rancière”, in Alexis Cukier, Fabien Delmotte & Céecile Lavergne eds., Émancipation, les métamorphoses de la critique sociale, Éditions du Croquant, 2013, p. 159.(꺾쇠 추가는 인용자) 물론 랑시에르의 철학 체계(또는 랑시에르가 자신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 내지 이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반감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에, 논리) 내에서 어떻게 급진 민주주의가 ‘자신의 형태, 자신의 도구, 자신의 공간을 이미 지금 가질 수 있는지’(랑시에르는 흥미롭게도 이를 명령 내지 요구(또는 당위)의 의미를 함축하는 ‘deveoir’ 조동사를 사용해서 “가질 수 있어야 하는”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곧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진 임기응변식 정정과 이론적 정정은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9장 마지막에서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인간학적ㆍ정치적 쟁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시대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잃어버린 인간, 또 그의 행위와 운명의 일부를 일관된 총체로 구성하는 법적 인격을 잃은 인간에게는 보통 사적 영역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특성이 남겨지고, 공적인 모든 사안에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단순한 실존(mere existence)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 신비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 단순한 실존, 우리의 외모나 우리의 정신적 재능을 포함하는 이 단순한 실존은 단지 우정 및 공감 같은 예상할 수 없는 우연이나 위대하고 계산 불가능한 사랑의 은총에 의해서만 적절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은총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네가 존재하기를 원하노라”(Volo ut sis)라고 말하지만, 이처럼 지고하고 넘어서기 어려운 긍정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이유를 제시할 수는 없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301; 전체주의의 기원, 539쪽.]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독창적인 독해에 근거한 사랑의 은총의 문제는 일단 제쳐둔다면,[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독해를 탄생성(natality)의 두 번째 원칙으로서 “주어짐”(givenness)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Peg Birmingham,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3장 참조.] 아렌트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경험 및 권리 없는 사람들의 재난에 대한 성찰에 입각해서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단순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존재자가 그러한 단순한 실존에 입각하여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고 주장할 수 있는 시민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이 말한 바 있는 호모 사케르 또는 무젤만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단순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특성 없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식별 가능한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 따라서 익명성과 타자성 또는 독특성(singularity)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타자로서의 타자, 익명적 독특성을 지닌 인간, 따라서 공동의 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에게는 낯설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이 단순한 실존의 인간 존재자에게 걸맞은 시민성은 어떤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문제는 평등의 문제설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순한 실존으로서 타자는 평등 속에서의 차이를, 평등한 익명성과 다른 비밀로서의 익명성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문제는 데리다가 말한 데모스의 이중적 측면을 어떻게 ‘결합할’(그런데 과연 여기서 이 동사가 적절한 것일까?)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데모스는 모든 ‘주체’에 선행하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입니다. 데모스는 시민이라는 자격 모두를 넘어, 모든 ‘국가’를 넘어, 나아가 모든 ‘인민’ 심지어는 ‘인간’ 생명체로서의 생명체라는 현 상태의 정의를 넘어, 존중할 만한 비밀을 지닌 사회적 탈유대(déliason)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데모스는 보편성입니다. 합리적 계산의 보편성, 법 앞에서 시민들이 갖는 평등의 보편성, 계약을 통해 또는 계약 없이 이루어진 공동 존재의 사회적 연관 등등입니다.[자크 데리다,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219~20쪽.]
참고문헌
데리다, 자크, 법의 힘, 진태원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데리다, 자크,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번스타인, 리처드 J.,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 김선욱 옮김, 서울: 아모르문디, 2008.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집, 2012.
진태원,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110호, 2013년 여름호.
Agamben, Giorgio,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Agamben, Giorgio,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서울: 새물결, 2008.
Arendt, Hannah,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Harcourt, 1973(19511).
Arendt, Hannah,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파주: 한길사, 2006.
Arendt, Hannah, The Human Condition, Introduction by Margaret Canova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2nd Edition).
Arendt, Hannah, 인간의 조건, 서울: 이진우ㆍ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Arendt, Hannah, On Revolution, LondonㆍNew York, Penguin Books, 1965.
Arendt, Hannah,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1968.
Balibar, Étienne,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Balibar, Étienne,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07.
Balibar, Étienne,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New Reflections on Equaliberty”,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
Balibar, Étienne,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월간 사회운동, 통권 69호, 2006년 11월호.
Balibar, Étienne,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
Balibar, Étienne,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
Balibar, Étienne,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서울: 공감, 2003.
Balibar, Étienne,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0.
Balibar, Étienne,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1.
Balibar, Étienne, “On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Constellations, vol. 20, no. 1, 2013.
Benhabib, Seyla, The Rights of Other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Benhabib, Seyla,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서울: 철학과현실사, 2008.
Birmingham, Peg,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Bloomington, I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Deranty, Jean-Philippe & Renault, Emmanuel, “Democratic Agon: Striving for Distinction or Struggle against Domination and Injustice?”, in Andrew Schaap ed., Law and Agonistic Politics, London: Ashgate, 2009.
Gündoğdu, Ayten,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1, no. 1, 2011.
Habermas, Jürgen,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8.
Habermas, Jürgen, 이질성의 포용, 황태연 옮김, 서울: 나남, 1998.
Ignatieff, Michael,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Ingram, James,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102, no. 4, 2008.
Lacroix, Justine, “Human Rights and Politics, 1980-2012”, Books & Ideas.net, 2012.
http://www.booksandideas.net/Human-Rights-and-Politics.html
Lechte, John & Newman, Saul, “Agamben, Arendt and Human Rights : Bearing Witness to the Human”,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15, no. 4, 2012.
Menke, Christoph, “The “Aporias of Human Rights” and the “One Human Right”: Regarding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Argument”, Social Research, vol. 74, no. 3, 2007.
Rancière, Jacques, La mésentente, Paris: Galilée, 1995.
Rancière, Jacques,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s. 2-3, 2004.
Rancière, Jacques,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Rancière, Jacques,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13(수정재판).
Rancière, Jacques, Moments politiques: Interventions 1977~2009, Paris: La Fabrique, 2011.
Rancière, Jacques, “La question politique de l’émancipation: Entretien avec Jacques Rancière”, in Alexis Cukier, Fabien Delmotte & Céecile Lavergne eds., Émancipation, les métamorphoses de la critique sociale, Bellecombe-en-Bauges: Éditions du Croquant, 2013.
Schaap, Andrew, “Enacting the Right to Have Rights: Jacques Rancière’s Critique of Hannah Arendt”,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0 no. 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