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에 철학아카데미에서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강의를 했습니다.

 

원래는 12강으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강의를 모두 끝내려고 했는데,

 

번역본들에 워낙 문제가 많아 번역을 수정해가면서 꼼꼼하게 읽다 보니까 절반도 채 진도를 못나갔네요.

 

1996년에 민음사에서 출판된 김성도 교수의 번역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번에 강의 참고본으로 채택한 김웅권 교수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동문선, 2004)나

 

2010년에 개역본으로 출간된 김성도 교수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2010) 모두

 

많은 문제를 내포한 번역본입니다. 이 후자의 두 번역본 역시 거의 질적인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만큼

 

심한 오역들로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한글본으로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새로운 번역본이 꼭 필요합니다.

 

언제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존의 번역본들은 데리다의 의도나 논의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무튼 이런 이유 때문에 2학기에도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계속 읽기로 했습니다.

 

2학기에는 2부 2장인 "이 위험한 대체보충 ..."에서부터 읽기를 시작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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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2부 2장. ‘이 위험한 대체보충 ...’

2강. 2부 2장. ‘이 위험한 대체보충 ...’

3강. 2부 3장 1절. 󰡔언어기원에 대한 시론󰡕의 위치

4강. 2부 3장 1절. 󰡔언어기원에 대한 시론󰡕의 위치

5강. 2부 3장 2절. 모방

6강. 2부 3장 2절. 모방

7강. 2부 3장 3절. 분절

8강. 2부 3장 3절. 분절

9강. 2부 4장. 대체보충에서 원천으로

10강. 2부 4장. 대체보충에서 원천으로

 

 

강의와 관련된 좀더 자세한 사항은 철학아카데미 홈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acaphilo.or.kr/xe/lecture_2_2/143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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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9-09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이 다 번역하시죠. 84세에도 번역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런데 굳이 대체보충이라고 해야 하나? 대체나 보충 둘 중 하나만 써도 되지 않을까요? 전 아무리 봐도 중복되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동해(東海) 바다' 라고 말하는 거하고 뭐가 달라요?

그리고 애매하다는 표현보다는 모호하다는 표현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냥 프랑스 어로 수업하세요. 푸코를 프랑스 어로 수업하는 사람도 있어요. 영어 못하면 인간 취급 안 하는 한국이니 영어본으로 공부해도 될 듯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국민주의(國民主義)'만 쓰시죠. 그게 발마스 님 생각에 더 부합하지 않나요? 또 갑자기 최초로 그 번역어를 쓴 것처럼 말씀하시지 마시고 지금부터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쓰실 것 아닙니까?

쾅! 2013-09-16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후쿠시마의 방사능 오염 사태를 보니 예전에 발마스 님이 예전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발마스 님이 과학기술을 디스토피아 또는 지구 종말을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미신적인 거부 또는 종교적인 금기" 의식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일갈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면서 유전자 조작 기술의 善用에 대해 말하는 도미니크 리쿠르에 대해 얘기하시지 않았나요?

과학기술에 대한 종교적인 반대에서 벗어나자는 것은 동의하지만(어디까지난 종교적인 면에서)

과학 기술을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나 善用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과학기술이 엄청난 재앙을 몰고 왔고 지구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나요?

저는 오히려 과학이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는 발마스 님마저 공유하고 있는 그 "과학기술이 인간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고 문명이라는 위계적 개념 그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보는데 저와 발마스 님은 그런 점에서 서로 길이 갈라지는 것 같군요.

과학기술 개발하는 시간에 우주에 달나라에 가려고 돈을 낭비하지 말고 그 돈으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더 낫지 않나요?

무슨 유전자 조작 기술로 생산한 음식을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에 먹이는 것보다 과학기술에 투자한 돈으로 식량 지원을 하거나 공공도서관이나 짓는
게 더 낫다는 겁니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준다는 이데올로기와 싸워야 할 판에 발마스 님은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를 긍정하라고 말하고 계시죠.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펴내는 [철학논집] 34집에 수록될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이 완료되지 않은 판본이기 때문에, 이 글에 관해 토론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철학논집]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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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정의: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

 

 

I. 메시아주의적 전회?

[이 글은 2013년 3월 9-10일 도서출판 길 주최로 서울 정독도서관에서 열린 “벤야민 커넥션” 심포지엄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다소 수정ㆍ보완된 상태로 2013년 4월 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제220차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되었다. 두 차례의 발표에서 좋은 논평을 해주신 참석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철학논집󰡕의 익명의 심사위원들 가운데 두 분이 이 글에 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해준 바 있다. 그 중 일부는 수용하여 본문의 해당 대목에 반영했는데, 문제제기 중 일부는 필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이유에 대해 해명해두고자 한다. 우선 심사위원 A는 “논문 제목과 내용의 일치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보이며, 결론이 용두사미 격이다. 보충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글의 제목이 글의 내용과 불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데리다 자신이 󰡔마르크스의 유령들󰡕 1장에서 ‘시간과 정의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와 벤야민을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벤야민과 하이데거(및 데리다)의 관계를 다루는 외국의 여러 논의들도 시간과 정의의 관계를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Fritsch 2005; Hamacher 2002, 2005; Johnson 2007; Kleinberg-Levin 2007; Weber 2009 등을 참조). 더 나아가 결론이 ‘용두사미격’이라는 심사위원 A의 주장이 어떤 근거에서 제기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필자 자신이 보기에 이 글 마지막에서 필자가 제기한 쟁점(특히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이라는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해방의 정치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은 현대 정치철학, 특히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이 대결해야 할 핵심적인 주제이며, 그 이유는 5절의 논의를 통해 충분히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라도 심사위원 A의 주장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좀 더 상세한 해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심사위원 A는 15쪽 이하에서 논의되는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나오는 “현존자”라는 개념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현존재’라고 하는데, 굳이 ‘현존자’라 표현한 이유를 밝힐 것”이라고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현존재라고 번역하는 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사용된 ‘Dasein’ 개념이며, 이 글에서 사용되는 ‘현존자’는 후기 저술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나오는 ‘das Anwesende’의 번역어다. 이는 필자가 참고한 하이데거 저서의 국역본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번역어이며, 국내 하이데거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법으로 알고 있다. 심사위원 B는 “논문에서 “메시아주의”에 대한 분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논의를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다. 한 예로 필자는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은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메시아주의“의 분석이 부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메시아주의,” ‘강한 메시아주의“에 대비되는 “약한 메시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필히 첨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문제제기를 수용하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4절 전체의 내용이 메시아주의 및 메시아적인 것에 대한 논의이고, “약한 메시아주의”에 관한 벤야민과 데리다 또는 하마허의 견해 차이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약한 메시아주의에 대한 논의가 필히 첨가되어야 할 것”이라는 심사위원 B의 주장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설마 대중적인 개론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학술 논문에 관한 심사에서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사용한 “약한 메시아적 힘”의 뜻풀이를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필자는 심사위원 B에게 나중이라도 자신의 논점을 좀 더 정확히 밝혀줄 것을 요청한다. 혹시 심사위원 B가 “약한 메시아주의” 개념의 지성사적 배경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가 해서 이 개념의 지성사에 관하여 각주 하나를 추가해 두기는 했다. 또한 심사위원 B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이 논문의 핵심은 벤야민의 메시아적 정치사상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 굳이 하이데거의 시간개념과 정의개념이 다루어져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필자는 1절과 2절에서 벤야민과 하이데거를 이 글에서 다루게 된 논의의 배경을 밝혔으며, 3절에서는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 1장에서 시간과 정의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을 탈구축의 대상으로 삼게 된 이유 및 쟁점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5절에서는 데리다의 유사초월론 또는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이라는 문제설정에 대하여 하이데거의 말년의 성찰이 의미 있는 이론적 통찰을 제시해주지만 그 나름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역시 충분히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심사위원 B가 이러한 논평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필자가 3절과 5절에서 제시한 논의에 대하여 좀 더 정확한 비판을 제시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이후에라도 이 점에 관한 심사위원 B의 좀 더 분명한 견해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메시아주의의 열풍이 뜨겁다. 서양 인문학에 밝은 전공자들만이 아니라 서양 인문학의 최신 동향에 웬만큼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근 서양 인문학계에서 가장 각광을 받는 여러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메시아,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주의 또는 종말론에 관한 논의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기독교와 관련된 신학자들의 저작이나 보수적인 이론가들의 저작이 아니라, 급진적인 이론가들, 가장 좌파 쪽에 위치해 있는(또는 그렇다고 간주되는) 저자들의 책에서 이런 논의를 접하게 된다. 가령 최근 “공산주의라는 이념”이라는 제목 아래 일련의 학술회의를 조직하고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슬로베니아의 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의 이런저런 저서에서 우리는 사건, 예외 및 메시아적인 것, 메시아적 폭력 등에 관한 논의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가령 Badiou 1993, 1997, 2009; Zizek 2003, 2006, 2009). 또한 󰡔호모 사케르󰡕(1995)라는 출세작을 통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떠오른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의 여러 저작에서도 우리는 메시아적 시간성 및 메시아주의적 정치와 관련된 지속적인 준거를 발견할 수 있다(Agamben 1990, 1998, 1999, 2001, 2010). 그밖에도 메시아주의나 종말론 또는 정치신학에 관한 이런저런 저작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가령 De Vries 2002, 2006) 가히 메시아주의적 전회 또는 정치신학적 전회라고 할 만한 흐름이 아닐 수 없다.[또는 Hamacher 2002나 Weber 2009처럼 벤야민의 단편 “종교로서의 자본주의”(1922)에 기초를 둔 작업 역시 일종의 메시아주의적 역사철학에 대한 탐구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된다. 왜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풍이 나타나고 있는가? 그것도 보수주의 이론가들이나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술이 아니라, 가장 급진적인 정치 사상을 제시하는 좌파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메시아주의에 관한 논의가 왜 이렇게 집중적으로 표출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닌 이론적ㆍ실천적 특징들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답변해볼 수 있다. 우선 자유주의 정치의 위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유일하게 보편적인 정치체 또는 정치 원리로 자부하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보편적인 정치적 가치가 퇴조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이주 및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과 인종주의, 민족 갈등이 확대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자유 민주주의 정체들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실효성 있는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위기의 뿌리로 지목되면서, 자유 민주주의적인 정체 자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근본적인 정치에 대한 요구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와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곧 자본주의의 종언을 어떻게 사고하고 또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 자본의 시간성을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 같은 질문이 메시아주의 정치를 불러온 핵심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2007년 위기 이후 붕괴하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화됨에 따라, 신자유주의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좀 더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메시아주의로 나타날까? 그것은 ‘종말’, ‘단절’, ‘사건’, ‘예외’ 같은 범주들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시간성이 압도적인 질서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것과의 단절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시간성,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간성을 사유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마르크스주의적 시간성 개념과 현대 유럽 철학의 시간성 개념에 관한 흥미 있는 비교로는 Osborne 2008 참조.] 이 때문에 종말과 단절, 새로운 시작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전통적인 메시아주의 사상, 특히 정치신학 사상에 대한 재고찰이 필요할 수 있다. 더욱이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보편적인 해방의 계급, 곧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주체성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단절과 새로운 시작의 사건을 사유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메시아주의, 또는 종말론은 종교 내지 신학으로의 퇴보를 뜻한다기보다는 종말론의 종교, 메시아주의 신학에 담겨 있는 깊은 철학적 통찰과 그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그런데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사실 이미 마르크스의 저작 자체 내에 이미 이러한 쟁점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역사적 생성의 경향들과 결과들의 분석을 지향하는 시간의 정치철학(즉 ‘목적론’)과 다른 한편으로 ‘극단적’이거나 ‘묵시록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 —착취 세력과 해방 세력이 서로를 상쇄(相殺)하는 상황 —의 의미와 결말의 발본적 불확실성을 지향하는 시간의 정치철학 사이의 딜레마란, 마르크스의 작업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독해들이 외부에서 마르크스에게 투사한 딜레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발전과 반자본주의적 혁명에 관한 마르크스의 구상 전체를 가로지르고 갈라놓는 딜레마다.” Balibar 2011, 145쪽. 강조는 발리바르.]

 

바로 여기에서 현재 전개되는 좌파 메시아주의의 또 다른 특징이 나온다. 그것은 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가 매우 사변적인 정치학이라는 점이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과 같은 대표적인 좌파 메시아주의 이론가들 중에서 누구도 (막연하고 일반적인 정식들을 제외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인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철학에서, 신학에서, 이론 내에서의 투쟁이다. 더욱이 이들의 이론적 투쟁은 경험적인 현실 구조를 다루는 사회과학과의 연계 속에서, 그것에 대한 비판적 성찰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이라기보다는 주로 사변적인 역사철학이나 정치신학, 문화이론적 차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항상 혁명과 봉기, 사건, 단절을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종말을 외치지만, 그것은 사변적인 차원에서의 성찰이고 호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수행할 만한 혁명적 주체와 그 조직 형성에 관한 고민이 없을뿐더러, 이들이 단절을 외치는 자본주의 질서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관한 면밀한 분석도 수반되지 않기 때문이다.[바디우 자신은 “절대적 시작”에 기반을 둔 존재 사유, 어떤 상황에 대한 “개입은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으며, 자기 자신의 부정적 의지 이외에 다른 지주 없이 상황과 절연한다”고 상상하는 관점을 “사변적 좌익주의”(gauchisme spéculatif)(Badiou 1988, p. 233)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입장과 거리를 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997년 출간된 󰡔성 바울󰡕이나 󰡔공산주의적 가설󰡕에서 바디우 자신이 정확히 이러한 종류의 사변적 좌익주의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바디우의 정치적 입장을 사변적 좌익주의로만 규정하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이 점에 관해서는 Bosteels 2009 및 Sauvêtre 2011를 참조), 바디우 자신이 사변적 좌익주의에서 벗어나는 설득력 있는 이론적 입장을 제시해주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좌파 메시아주의는 ‘바깥의 정치’라고 명명될 수 있는 현대 정치철학의 한 분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진태원 2012a 참조) 넓은 의미에서 바깥의 정치에는 아감벤이나 바디우, 지젝을 포함하여 네그리, 랑시에르 등까지 포함되므로, 이들의 관점은 네그리나 랑시에르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변적 메시아주의 내지 사변적 정치학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이들의 이론이나 주장이 현실에 대한 분석과 주체 형성에 대한 성찰을 수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실천적 수동성을 조장하거나 그것을 사변적 급진성으로 은폐하거나 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요컨대 현실과 실천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사변적 차원에서의 해방감으로 해소하는 식의). 따라서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철학이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있는 현상은 주목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과 난점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도래하게 된 지적ㆍ정세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것의 필요성과 동시에 한계를 꼼꼼하게 따져보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벤야민과 하이데거, 데리다에서 시간과 정의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세 명의 사상가의 연관성과 차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것은, 이들 사상의 독창성과 깊이도 중요한 이유가 되거니와, 또한 이들의 사상이 우리 시대의 급진적인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깊은 영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메시아적인 것’ 및 정치신학의 근대적, 현대적 논의를 검토하는 최근의 한 논문 모음집의 편자들은 현재 서양 인문학계에서 거론되는 메시아주의적 전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로 데리다를 꼽고 있는데,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데리다의 탈구축론은 메시아적인 것에 관한 동시대 철학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으로 남아 있다.” Fletcher & Bradley 2010, p. 3.] 실제로 아감벤은 벤야민과 하이데거 철학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형태의 메시아주의 내지 종말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으며, 지젝은 벤야민의 정치신학 및 역사철학을 원용하여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급진적인 정치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아감벤이나 지젝 또는 부분적으로는 바디우 모두 데리다(및 레비나스)에 관한 비판을 통해, 또는 그에 대한 비판을 위해 하이데거나 벤야민 또는 여타 다른 정치신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이른바 ‘윤리적 전회’ 내지 그 핵심으로서 ‘타자의 윤리학’(레비나스를 중심으로 하고 때로는 리오타르와 데리다도 포함되는)에 관한 바디우, 랑시에르, 지젝의 공통된 비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들의 비판의 의미와 난점에 관한 검토는 독자적으로 다뤄볼 만한 주제다. 바디우의 󰡔윤리학󰡕에 관한 비판적 고찰로는 Balibar 2012 중 「폭력과 시민다움」 참조.] 반대로 이 글에서는 오히려 벤야민과 하이데거와 대비되는 데리다 정치철학의 강점을 제시해볼 것이다. 곧 메시아주의 및 종말론에 맞서 단절의 가능성, 사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데리다는 이를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일체의 교리들이나 심지어 일체의 형이상학적·종교적인 규정, 일체의 메시아주의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는 어떤 해방적이고 메시아적인 긍정, 약속에 대한 어떤 경험이다. 그리고 어떤 약속은 지켜진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곧 ‘정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과 새로운 형태의 활동, 실천, 조직 등을 생산해 낼 것을 약속해야 한다. ‘당 형태’나 이러저러한 국가 형태 내지 인터내셔널의 형태와 단절한다고 해서 모든 실천적이거나 현실적인 조직 형태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정확히 정반대의 것이다.” Derrida 2007, 180쪽. 강조는 필자.]이야말로 데리다 정치철학의 중요한 교훈이라는 것이 이 글을 이끌어가는 나의 기본 가설이다.

 

 

II.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인: 데리다의 문제제기

 

데리다의 󰡔법의 힘󰡕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법의 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획기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우선 보통 해체론(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탈구축[필자는 데리다의 déconstruction이라는 말은 ‘해체’보다는 ‘탈구축’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믿는다.])이라고 불리는 현대 사상의 주요 흐름에서 획기적인 전회를 이룩한 저작이다.[McCormick 2001은 데리다의 󰡔법의 힘󰡕, 특히 그 1부를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했던 변론과 비교하면서 󰡔법의 힘󰡕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평가하고 있다.] 󰡔법의 힘󰡕 이전까지 탈구축 이론은 미국의 문학이론계에서 폭넓게 수용되었으며, 텍스트, 문자기록(écriture), 대체보충(supplément), 산종(散種, dissemination)과 같은 여러 개념들과 결부되어 주로 문학 작품의 분석을 위한 방법론으로, 정밀한 해석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법의 힘󰡕 이후 탈구축 이론은 정치철학 및 윤리학, 법철학 등과 같은 실천철학 분야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오늘 우리 주제와 관련해본다면, 󰡔법의 힘󰡕은 벤야민의 저술 가운데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를 현대 정치철학의 중심 텍스트로 위치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데리다가 󰡔법의 힘󰡕 2부인 「벤야민의 이름」에서 이 텍스트에 대하여 꼼꼼한 탈구축적인 독서를 제시한 이후, 이 책은 오늘날 벤야민 저술들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받는 글 중 하나가 되었고, 아감벤, 지젝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자들의 논평과 응용 및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법의 힘󰡕, 특히 그 책 2부에서 제시된 벤야민에 대한 독서는 숱한 논란과 비판을 불러왔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2부의 「서언」과 「후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책의 맨 앞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법의 힘󰡕, 정확히 말하면 그 1부는 1989년 10월 뉴욕의 카르도조 법대 대학원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2부는 참석자들에게 배포만 되고 읽지는 않았다. 2부는 그 다음해인 1990년 4월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열린 “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 표상의 한계들에 대한 검토”라는 제목의 콜로퀴엄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그리고 2부 텍스트에는 새롭게 「서언」(prolegomenon)과 「후기」(post-scriptum)가 추가되었다. 2부 텍스트에 대해서만 따로 「서언」과 「후기」가 나중에 추가되었다는 사실은 꽤 특이한 일이고, 따라서 무언가 의미 있는 전언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서언」과 「후기」에는, 「벤야민의 이름」 본문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매우 단호한 평가가 담겨 있다.

 

우선 데리다는 「서언」에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가 “근본적 파괴, 말살, 총체적 무화(無化)라는 주제 (...) 말살적 폭력이라는 주제에 신들려 있다”(Derrida 2004, 63~4쪽)고 말한다. 그것은 이 텍스트가 “언어의 도착과 타락인 표상(représentation)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의회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계인 대의(représentation)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며, “법을 파괴하는 신성한 폭력(유대적인)과, 법을 창설하고 보존하는 신화적 폭력(그리스적인)을 대립시키는 유대적 관점 속에 기입되어 있기”(같은 책, 65~6쪽) 때문이다. “이 ‘혁명주의적’ 논문(마르크스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주의적인 스타일에서 혁명주의적인)은 1921년 반의회주의적이고 반‘계몽주의’인 대세―나치즘은 1920년대와 30년대 초에 말하자면 이 조류의 표면 위로 부상하고, 심지어 ‘파도타기’를 하게 될 것이다―에 속하고 있었다.”(66쪽)

 

따라서 데리다는 벤야민의 이 텍스트가 ‘궁극적 해결책’이라는 주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양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단지 시간적인 차이(이 글은 1921년에 발표되었고 벤야민 자신은 1940년 자살한 반면,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모의한 반제회의는 1942년에 열렸다) 때문만이 아니라 “이 텍스트에서 중첩되는 코드들이 극히 예외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 또는 한정하자면, 단지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신화가 제거된 진정한 역사의 개시를 선포하는 메시아적 혁명의 언어에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의 언어가 접목되고 있다는 사실”(67쪽)로 인해,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데리다는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후기」에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이 텍스트의 논리 안에서―만약 이 텍스트 안에 하나의, 단 하나의 논리가 존재한다면―나치즘과 ‘궁극적 해결책’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물어볼 권리를 갖고 있지 않거나 제한된 권리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어떤 점에서는 그렇게 할 것이[다].”(128쪽) 이러한 입장에 따라 데리다는 ‘궁극적 해결책’과 벤야민 텍스트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논점을 제시한다.

 

첫째, 나치즘은 법의 신화론적 폭력의 체계이기 때문에, 우리는 “법의 신화론적 폭력이 속해 있는 이 공간과 다른 장소에서만 ‘궁극적 해결책’의 특유성을 사고하거나 상기할 수 있다.”(130~31쪽) 곧 궁극적 해결책에 대해 사고하기 위해서는 법, 신화, 표상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따라서 “이 체계를 그 타자에 따라, 곧 이 체계가 배제하고 파괴하고 몰살시키려고 했던, 하지만 외부 및 내부에서 이 체계에 유령처럼 따라다닌 것에 따라 사고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독특성(singularité)의 가능성에 따라, 서명과 이름의 독특성의 가능성에 따라 이 체계를 사고하려고 시도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대표[표상]의 질서가 몰살시키려고 시도했던 것은 수백만 명의 목숨일 뿐만 아니라 정의의 요구이기도 하며, 이는 또한 이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름을 부여하고 기입하고 부르고 상기할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131쪽-강조는 필자) 따라서 “아마도 벤야민은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모든 역사적이거나 심미적인 객관화를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어쨌든 사건을 측정하는 데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했을 텐데, 이런 객관화는 모든 객관화와 마찬가지로 표상 가능하고 심지어 규정 가능한 것의 질서에, 규정적이고 결정 가능한 판단의 질서에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133쪽)

 

셋째, 그런데 문제는 규정적이고 결정 가능한, 표상 가능한 객관화는 그것이 신화론적 질서에 속하기 때문에 궁극적 해결책을 사고하는 데 쓸모없는 것이라면, 반대로 “이 질서에서 벗어나자마자 역사—와 신성한 정의의 폭력—가 시작되지만, 우리 인간은 판단들—및 결정 가능한 해석들—을 가늠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 곧 “두 질서(신화론적인 질서와 신성한 질서)를 함께 구성하고 한정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궁극적 해결책’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능력 밖이라는”(133쪽-강조는 필자) 점이다. 따라서 신화론적 질서 대 신성한 정의의 질서, 표상의 언어 및 계몽주의 대 순수한 표현의 언어 사이의 대립과 양극성이 순수하게 유지될 수는 없으며, “공약 불가능하고 이질적인 두 차원 사이의 타협”(134쪽)이 이루어져야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이질적인 질서들 사이의 타협의 숙명, 더욱이 표상[대표]의 법칙(...)에 복종하도록 명령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특유한 것 및 모든 특유성이 일반성이나 비교의 질서로 재기입되는 것을 피하도록 해주는, 표상을 초월하는 법칙에도 복종하도록 명령하는 정의의 이름에 따라 이루어지는 타협의 숙명”(134쪽)이야말로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다.

 

넷째, 그런데 데리다는 “마지막으로” 그가 “이 텍스트에서 발견하는 가장 가공할 만한 것, 심지어 참기 어려운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이것이 열어놓으려고 하는, 특히 ‘궁극적 해결책’의 생존자들 내지는 희생자들에게, 그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잠재적인 희생자들에게 열어놓으려고 하는 유혹이다. 어떤 유혹 말인가? 대학살을 신의 폭력의 해석 불가능한 발현의 하나로 사고하려는 유혹이다.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이 신의 폭력은 말살적ㆍ면죄적이면서 동시에 비유혈적인 것으로, 이 폭력은―다시 벤야민을 인용하자면―“내리치고 면죄시키는 비유혈적 심판”을 통해 현행의 법을 파괴한다. (...) 가스실과 화장용 가마를 생각한다면, 비유혈적이기 때문에 면죄적인 어떤 말살에 대한 이러한 암시를 깨닫고 어떻게 몸서리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학살을 하나의 면죄로, 정의롭고 폭력적인 신의 분노의 판독할 수 없는 서명으로 만드는 해석의 발상은 끔찍한 것이다.(134~35쪽-강조는 필자)

 

이 때문에 데리다에 따르면, 벤야민의 이 텍스트는 다의성을 지니고 있고 의미론적인 반전의 여지를 지니고 있지만, “결국 자신이 그에 반대하여 행동하고 사고하고 행위하고 말해야 하는 것에 현혹되어 혼동스러울 만큼 이와 너무 유사해져버린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벤야민의 다른 많은 텍스트들처럼 이 텍스트는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다.”(135쪽-강조는 필자)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데리다의 해석 가운데서 특히 이 부분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가령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반(反)데리다론”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다수의 벤야민 연구자들 역시 데리다의 해석이 지닌 문제점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Haverkamp 1994에 수록된 여러 글을 참조할 수 있다. 또한 Greenberg 2008도 참조.] 심지어 탈구축 이론가들로 분류될 수 있고 데리다와 가까운 여러 이론가들 역시 데리다의 해석에 대해 유보를 표시하거나 암묵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가령 베르너 하마허(Werner Hamacher)는 데리다의 󰡔법의 힘󰡕과 거의 같은 시기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제시한 바 있으며(Hamacher 1994), 이후 몇몇 글에서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에 대하여 암묵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Hamacher 1999, 2002 참조. 미국의 대표적인 해체론 이론가이자 저명한 벤야민 연구자이기도 한 새뮤얼 웨버는 데리다의 글이 발표된지 2년 후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친화성을 지적한) 벤야민과 슈미트의 차이점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Weber 1992 참조.] 따라서 「벤야민의 이름들」 전체에 대해서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서언」과 「후기」에서의 평가는 다소 성급하고 과도한, 또는 면밀하거나 정확하지 못한 판단이라는 것이 여러 연구자들의 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데리다의 평가가 성급하고 과도한, 또는 부정확한 것일까? 이 점에 관한 여러 비판가들의 판단 자체가 오히려 다소 성급하고 과도한 또는 면밀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데리다의 해석에 대한 비판들 못지않게 데리다의 평가를 옹호하는, 또는 그러한 평가의 의미를 좀 더 면밀하게 해명하는 주목할 만한 논의들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데리다에 대한 아감벤의 평가를 반비판하는 논의들도 있거니와,[특히 Thurschwell 2005 및 Johnson 2007, Librett 2007 참조.] 데리다의 「서언」과 「후기」에 대한 매우 꼼꼼하고 세심한 연구들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서언」과 「후기」에 대한 최근의 주목할 만한 독해로는 Zacharias 2007 및 Staikou 2008 참조.] 따라서 데리다의 벤야민 평가를 성급하거나 부정확한 것으로 기각하기 이전에 그 해석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시도해보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데리다의 평가의 함의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는 󰡔법의 힘󰡕 2부의 「서언」과 「후기」 자체를 분석하거나 그것이 2부 본문 및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맺는 관계를 따져보는 대신 데리다가 「후기」의 마지막에서 제기한 테제, 곧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가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고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다”라는 테제의 의미를 검토해보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 벤야민의 텍스트는 여전히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왜 이 텍스트는 “여전히 너무 하이데거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너무 “하이데거적”이라거나 너무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 또는 시원-종말론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왜 “하이데거적”이거나 “메시아-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 문제가 될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역사와 정치를 사고하는 데서 한계를 지닌 것일까?

 

 

III.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정의의 사건, 사건으로서의 정의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여러 주석가들이 그러듯이) 󰡔법의 힘󰡕이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텍스트에 한정할 수 없으며, 데리다의 다른 저작 및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고찰해봐야 한다. 내가 보기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텍스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법의 힘󰡕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한 쌍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서언」과 「후기」에서 데리다가 모호한 암시로 남겨놓은 테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이고 분명한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를 모티프로 삼고 있는 이 책에서도 데리다는 벤야민과 하이데거와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좀 더 본격적인 탈구축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시간론, 또는 현존(Anwesen), 현존성(Anwesenheit)의 관점에서 시간과 정의(dike)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1946)을 읽으면서 존재론과 정의, 시간론의 교차점을 탐색하며,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 유령적인 시간성의 관점에서 그러한 교차점을 넘어설 수 있는 길, 아니 오히려 그러한 교차점에 존재하는 어긋남, 균열, 탈구를 모색한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서 서양 철학의 가장 오래된 단편인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을 다시 사유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이 금언에 대한 문헌학자 헤르만 딜스(Hermann Diels)와 청년 니체의 해석에 반대하여(그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디케(dike)를 법적ㆍ도덕적으로 표상한다)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인 사유의 경험에 따라 디케와 아디키아(adikia)를 현존에 대한 그리스적인 이해 방식으로 읽으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딜스와 니체가 불의(不義, Ungerechtigkeit)로 이해하는 아디키아는 “현존자의 근본 특성”, 곧 “그것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물들이 올바로 존립하지 못한다는 사실”,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aus den Fugen)”(Heidegger 1951, 518~19쪽-번역은 약간 수정),[aus den Fugen 또는 Un-Fug는 번역자에 따라 “안배된 곳에서 벗어나 있다”(신상희)나 “불응”(박찬국ㆍ설민. Heidegger 1991, 181쪽 이하 참조)으로 옮겨지는데, 우리는 데리다의 해석을 따라 이를 “이음매에서 벗어난” 또는 “이음매가 어긋난”으로 옮긴다. 번역의 차이는, 데리다 식의 번역이 이 단어가 지닌 일상적이고 기술적인 어법에 좀 더 충실한 반면, 국역자들의 경우는 그 존재론적인 의미에 좀 더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 식의 번역은 사실 영역본이나 불역본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번역이다.] 이음매가 어긋나 있고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아디키아는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음”,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뜻할까? 하이데거의 이러한 재해석은 현존자에 대한 재규정을 전제하고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의 의미에서 타 에온타(ta eonta)는 “현재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때의 ‘현재적인 것’이란, 시간의 흐름의 한 단계로서의 ‘지금의 것’(das jetzige)을 뜻하는 게 아니라, ‘현재적’(gegenwärtig)이라는 의미에서의 현재적인 것을 가리킨다.

 

에온타의 성격을 지닌 ‘현재적’이라는 낱말은, “비은폐성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고자 다가와 있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 그렇게 다가와 있음(Angekommenheit)이 본래적인 다가옴(Ankunft)이고, 본래적인 현존자의 현존이다. 과거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도 또한 현존자이며, 다시 말해 비은폐성의 영역 바깥에 현존하는 것이다. 비현재적으로 현존하는 것은 부재하는 것이다. (...) 부재하는 것도 또한 현존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비은폐성의 영역으로부터 [떠나가] 부재하는 것으로서, 비은폐성 속으로 [또 다시 출현하여 나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현존하고 있다.(같은 책, 508~09쪽)

 

따라서 지금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과거에 존재하는 것과 미래에 존재할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현존자, 현존하는 것이란, “생성하다가 소멸하는 것, 다시 말해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Vergängliche)”(같은 책, p. 343; 503쪽),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것, “‘그때마다-체류하는 것’(je-weilige)”[이것은 “그때그때 겨를을 지니는 것”(Heidegger 1991, 185쪽)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같은 책, 513쪽)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으로서 아디키아는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현존자가 자신이 존재하는 바의 그런 현존자로서 이음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곧 일시적으로 머물렀다가 가는 것, 그때그때 잠깐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현존자의 존재 양식임에도, 현존자가 계속 현존할 것을 고집할 때 이음매가 어긋나고 아디키아가 일어나게 된다. “그때마다-체류하는 것은 자신의 현존을 고수한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자신의 이행적인 머무름으로부터 스스로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것은 완고한 고수 속으로 펼쳐진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현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치 이러한 것이 머무름이라고 하는 듯 지속적 존립을 완강히 주장한다. 자신에게 적합한 체류 기간 속에 현존하면서 현존자는 이음매에서 벗어나 이음매가 빠진 상태로 그때마다-체류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때마다-체류하는 모든 것은 이음매에서 벗어난 곳에 서 있다.”(같은 책, 520~21쪽)

 

그러므로 아디키아, “어긋남은, 불화다(die Un-Fuge, ist der Un-Fug).”(523쪽) 반대로 디케는 “연결해주고 어울리게 해주는 일치(der fugend-fügende Fug)”다. 곧 그때그때마다 체류하는 현존자들이 그에게 부여된 체류 속에서 현존하게 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현존자들에게 고유한 체류, 현존과 어긋나거나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어떤 현존자가 자신의 현존을 완강하게 고수하여 다른 현존자들의 현존을 가로막거나 그것과 어긋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디케이며, 디도나이 디켄(didonai diken), 곧 디케를 줌, 디케를 선사함(딜스와 니체의 번역을 따르면 ‘벌을 받음’ 내지 ‘죗값을 치름’이지만)이다. “그때마다-체류하는 것들이 그저 단순히 지속하려고 끊임없이 고집을 피우고 그리하여 이러한 집착 속에서 현재적인 현존자로부터 서로를 밀어내고자 완전히 흩어지지 않는 한에서, 그것들은 일치를 속하게 한다(didonai diken).”(528쪽)

 

이러한 하이데거의 주장을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만약 하이데거가 하듯이 우리가 디케를 현존으로서의 존재로부터 사고한다면, “정의”는 무엇보다, 궁극적으로는, 특히 고유하게는 일치의 이음매다. 타자에게 고유한 이음매는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한 이에 의해 타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불의는 어긋남 내지 부조화다.”(Derrida 2007, 69쪽) 그리고 곧바로 이런 반론을 제기한다.

 

하이데거는 항상 그렇듯이, 그가 호의/은혜, 베풀어진 호의/은혜의 가능성 자체로 해석하는 것에, 곧 조화롭게 한데 모으거나 받아들이는 허여하는 일치 (...) 에 호의적으로 기울어 있는 것 아닌가? (...) 타자와의 관계로서의 정의는, 존재 안에서 그리고 시간 안에서 어긋남 또는 몰시간성의 환원 불가능한 초과를, 어떤 운푸게(Un-Fuge), “이음매가 어긋난” 어떤 탈구를 가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어긋남이야말로 항상 악, 비전유, 불의의 위험―이것들을 확실하게 제어할 수 있는 계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을 무릅쓰면서, 유일하게 타자로서의 타자에게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또는 정의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같은 책, 69~70쪽)

 

데리다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현존을 고수하는 것으로서의 아디키아를 “어긋남 내지 부조화”로 이해하고, 디케는 이러한 어긋남이나 부조화를 바로 잡는 것, 일치를 허여(許與)하는(Zugeben)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바로 잡아야 하거나 올바르게 만들어야 할 부당한 사태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긋남을 바로 잡음으로써, 무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날 가능성, 전혀 이질적인 타자가 도래할 사건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것은 정의의 가능성을 총체화하는 현존의 경제 속으로 가두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시간과 정의의 관계, 사건으로서의 정의의 문제에 관한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차이는 디케를 현존자들에게 고유한 현존을 허락해주는 “연결해주고 어울리게 해주는 일치”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의 관계로 이해하느냐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데리다가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저명한 현상학자 프랑수아즈 다스튀르(Françoise Dastur)는 데리다에게 헌정된 논문에서 (헌정의 말 이외에는 데리다를 전혀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가운데)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은 이음매가 어긋남, 이음매가 빠져 있음을 “존재 그 자체의 중심에 기입”(Dastur 2000, 188쪽)해 넣는다고 말한다. 사실 하이데거는 데리다가 다루지 않는 논문 뒷부분에서 현존으로서 존재 내부에는 어긋남, 불일치가 존재함을 지적하고 있다. “[자연의 섭리적] 필요(Brauch)는 일치와 배려를 관장하면서 체류 속으로 놓아주며, 현존자를 그때마다 체류하도록 양도해 준다. 그러나 이로써 그것이 체류하는 머무름으로부터 순전한 지속으로 굳어지게 될 위험이 항존하게 된다. 따라서 필요는 그 자체가 동시에 현존을 불일치(Un-Fug) 속으로 넘겨주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는 [불일치의] 불(Un-)을 이어준다.” (Heidegger 1951, 541쪽) 따라서 다스튀르의 주장에 의하면 “존재는 동시에 불일치 또는 아디키아의 빛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서는 일치 또는 디케로 사유될 수 없다.”(Dastur 2000, 188쪽-강조는 다스튀르)

 

그녀의 주장은 하이데거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독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반론이다. 사실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 대한 다스튀르의 독해는 데리다에 관한 그녀의 몇 편의 텍스트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독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다스튀르는 후설이나 하이데거에 관한 데리다 독해의 새로움과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데리다 자신의 관점은 이미 후설이나 하이데거 텍스트에 존재함을 보여주려는 전략을 즐겨 채택한다(가령 Dastur 2007). 그것은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의 반론은 데리다의 독해에 대한 충분한 반론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불일치나 어긋남을 배제하거나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에 비하여 일치를 더 강조한다고, 일치 쪽에 더 기울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데리다는 우리가 적어도 불일치나 어긋남에 대해 동등한 비중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특히 새로운 사건의 조건으로서 불일치를 파악하지 않는다면, 현존을 사건 내지 생기(Ereignis)로 충실히 이해하기 어려울뿐더러, 정의의 문제를 하이데거 자신이 비판하는 법적ㆍ도덕적 표상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스튀르의 반론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하이데거가 불일치나 어긋남에 대해 적어도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그것을 사건의 사건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또 다른 반론이 가능할 수 있다. 곧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에서는 사건의 우발성이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다른 텍스트에서는 그것이 좀 더 깊이 있게 제시되고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하이데거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저작인 󰡔사유의 사태로󰡕(Zur Sache des Denkens)에서 하이데거 사상의 이러한 면모가 좀 더 풍부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이제 벤야민과 데리다의 관계를 메시아주의 또는 메시아적인 것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IV.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유사초월론 대 무초월론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벤야민과 관련하여 데리다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두 번째 테제에 나오는 “약한 메시아적 힘”[이 개념의 지성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Deuber-Mankobsky 2008 참조.]을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벤야민 식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Derrida 2007, 343쪽 주 32)). 하지만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비평에 대한 답변으로 󰡔유령의 모습을 그리기󰡕(Ghostly Demarcations, 1999)에 수록된 「마르크스와 아들들」에서는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과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차이점을 아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는 세 가지 논점으로 집약된다.

 

첫째, 데리다는 자신이 말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이러저러한 메시아주의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구조, 실존의 구조”를 가리키며, 따라서 그것은 벤야민과 달리 “약화된 메시아주의, 감소된 힘을 지닌 메시아적인 기대가 아니다.”(Derrida 2009, 217쪽-강조는 데리다) 오히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언어행위, 다른 모든 수행문 및 심지어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모든 전 언어적인 경험을 조직하는 약속(하지만 또한 약속의 주심에 놓여 있는 위협)의 수행문이 보여주는 역설적인 경험에 대한 분석”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위협하는 약속과 교차하는 기대의 지평에 대한 해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의 지평은 (...) 기대 없는 어떤 기대, 말하자면 사건(기다려짐 없이 기다려지는)에 의해 그 지평이 파열된 어떤 기대, 곧 사건에 대한 기대, “도착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규정하는 예상을 넘어서고 놀라게 해야 하는 어떤 “도착하는 것/이”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미래 아닌 미래의 걸음(pas de future), 장래 아닌 장래의 걸음(pas de l'avenir), 다르게 다른 것 아닌 다르게 다른 것의 걸음,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사건 아닌 사건의 걸음, 혁명 아닌 혁명의 걸음, 정의 아닌 정의의 걸음.”(218쪽-강조는 데리다)

 

둘째, 벤야민의 약한 메시아적 힘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위기와 궁지에 몰린 상황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그 힘은 “약한”이라는 형용사로 규정되는 데 반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보편적이고 유사초월론적인 구조”로서, 이는 “역사(...)의 어떤 특수한 순간과도, 어떤 특수한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성은 어떤 메시아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어떤 메시아주의도 모방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주의도 확증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같은 책, 226쪽)

 

셋째, 따라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또는 메시아성은 “우리가 메시아주의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곧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과는 아무런 본질적인 관계도 없다. 메시아주의는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규정된 계시―유대적인 계시이든 아니면 유대ㆍ기독교적인 계시이든 간에―에 대한 기억,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규정된 메시아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그 구조의 순수성 자체에서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을 배제한다.”(219쪽-강조는 데리다)

 

이 주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데리다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을 “보편적이고 유사초월론적 구조”라고 부를 때 “유사초월론”(quasi-transcendantal)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1967)나 󰡔조종󰡕(1974) 같은 저작들에서 가끔 “유사초월론” 내지 “과잉초월론”(ultra-transcendantal)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그가 이 표현을 좀 더 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돌프 가쉐(Rodolphe Gasché)가 󰡔거울의 주석박: 데리다와 반성철학󰡕(The Tain of the Mirror: Derrida and the Philosophy of Reflection)(Gasché 1986)에서 독일 관념론 전통과의 대비 속에서 데리다 철학의 독창성을 설명하면서 “유사초월론”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중요한 위상을 부여한 다음부터다.

 

과잉초월론이나 유사초월론이라는 명칭은, 이것이 칸트나 후설 철학을 특징짓는 초월론 철학과 무언가 관련성을 지니면서도 또한 그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초월론철학을 어떤 것(이것이 인식 경험이든 실천이든 또는 언어이든 간에)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하여 탐구하는 철학으로 규정하고, 초월론적인 것을 경험적인 것의 가능 조건을 이루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초월론 철학의 특징은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뚜렷한 구별위계적 비대칭성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초월론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을 근거 짓는 반면, 경험적인 것의 변화 여부와 무관하게 불변적인 것으로 남아 있고, 또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데리다가 말하는 유사초월론은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사이의 원칙적 분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양자 사이에 비대칭성 내지 일방향적 관계를 설정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유사초월론은 초월론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 내부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경험적인 것의 변화를 통해 초월론적인 것 자체도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가령 데리다는 󰡔불량배들󰡕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에 본질적이고 기원적이고 구성적이고 종별적인 가능성으로서, 곧 민주주의적인 것의 역사성 자체”(Derrida 2003, p. 106)에 관해 언급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도래할 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도래할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그 자체 내에서, 그 개념 자체 내에서 자기 비판과 개선 가능성에 대한 권리라고 불리는 자기면역의 공식을 환영하는 유일한 체계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원칙상, 민주주의라는 관념, 그 개념과 그 역사, 그 이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할 권리를 사람들이 지니거나 떠맡게 되는 유일한 체계, 유일한 헌정 패러다임이다.”(Ibid., p. 127)] 그렇다면 초월론적인 것은, 가령 단지 역사적 변화를 규정하고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역사 바깥의 불변적이고 보편적인 틀 내지 질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를 갖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면, 근원 내지 근거로서의 기원은 후속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가령 이런저런 최초의 사건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러한 사건이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사건으로 남으려면, 그 사건은 일회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며, 계속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초의 사건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회적인 것에 그치게 된다면, 그것은 이후의 시간의 계열들과 단절된 채 소멸되거나 망각될 것이고, 따라서 최초의 어떤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초의 사건이 최초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그것 다음에 오는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등등의 사건들 속에서 되풀이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사건으로서의 기원은 그 이후에 오는 시간 내지 역사의 계열에 의거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기원을 기원으로서 성립 가능하게 만들고, 또한 기원을 기원으로서 재생산되게 만드는 반복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데리다의 유사초월론에 관해서는 Gasché 1986 이외에도 Fritsch 2005 중 2장, Hurst 2005 참조. ]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나오는, 처음 보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다음 대목은 이런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반복 최초의 순간. 이것은 아마도 환영의 문제로서 사건의 문제일 것이다. 환영이란 무엇인가? 유령, 곧 허상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이고 잠재적이며 비실체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의 현실성 내지 현존이란 어떤 것인가? 거기에, 사물 그 자체와 그것의 허상 사이에는 어떤 대립이 존재하는가? 반복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반복 최후의 순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최초의 순간의 독특성은 또한 최초의 순간을 최후의 순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매 순간마다 그것은 사건 그 자체이며, 어떤 최초의 순간은 최후의 순간이다. 전적으로 다른 것/모든 다른 것(tout autre). 역사의 종언의 무대를 마련하기. 이것을 유령론(hantologie)이라고 부르자. 이러한 신들림의 논리는 어떤 존재론이나 어떤 존재 사유(...)보다 단순히 더 광범위하거나 더 강력한 것만은 아니다. 신들림의 논리는 자신 안에 종말론이나 목적론을 수용하고 있지만, 한정된 장소들 내지는 특수한 효과들로 수용하고 있다.”(Derrida 2007, 34쪽-강조는 데리다)

 

따라서 반복 가능성은 기원 이후에, 최초의 사건 이후에 비로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 그 자체 속에 기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반복될 수 없는 것은 기원으로서 성립할 수 없으며, 기원이 기원이기 위해서 그것은 항상 이미 반복되어야 한다. 󰡔법의 힘󰡕에서 데리다가 ‘되풀이 (불)가능성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폭력의 엄격한 구분을 위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되풀이 (불)가능성의 역설―벤야민이 이를 말하지 않은 것은 이를 배제하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이다. 되풀이 (불)가능성은 기원이 기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곧 스스로를 반복하고 스스로를 변질시킬 수밖에 없게 만든다. (...) 되풀이 (불)가능성은 정초의 본질적 구조 안에 보존을 기입한다.(Derrida 2004, 98쪽-강조는 데리다)

 

유사초월론이 낳는 또 하나의 효과는 무조건적인 것(가령 정의)과 조건적인 것(가령 법)의 절대적 대립의 해체다. 가령 󰡔법의 힘󰡕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법의 힘󰡕이 법보다 정의를 더 중시하고, 법을 초월하는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데리다가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계산 불가능한, 해체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하고, 그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법과 정치를 사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것은 데리다가 법 바깥에 있는, 법을 넘어서 있는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데리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정의가 법과 계산을 이처럼 초과하고, 현존 불가능한 것이 규정 가능한 것을 이처럼 범람한다고 해서 이를 제도나 국가 내부에서, 제도들이나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적ㆍ정치적 투쟁을 회피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삼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사하는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에는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는 가장 도착적인 계산에 의해 재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계산 불가능한 정의는 계산할 것을 명령한다. (...) 계산 가능한 것과 계산 불가능한 것의 관계를 계산하고 협상해야 하고, 우리가 ‘던져져’ 있는 곳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곳에서 재발명되어야 하는 규칙들 없이 협상해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장소를 넘어서, 그리고 기존의 식별 가능한 도덕이나 정치 또는 법적인 지대를 넘어서,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등의 구분을 넘어서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멀리 이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해야 함의 질서는 정의에도, 법에도 고유하게 귀속되지 않는다.(앞의 책, 59~60쪽―강조는 데리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또는 도래할 민주주의나 정의, 장래 같은 것)을 칸트 식의 규제적 이념으로 잘못 파악하게 되거나, 유토피아주의의 한 형태(그것도 규정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빈곤하고 불모적인)로 간주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데리다에게 정의나 도래할 민주주의 또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은 경험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고 그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규제적 이념이나 유토피아주의와 무관하다. 더욱이 정의나 도래할 민주주의 또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 유사초월론적인 것인 한에서, 이것들은 모두 경험적 사건들을 통해 그것 스스로 변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초역사성을 주장하는 입장(가령 하버마스 식의 비판이론가들이나 최장집 교수 같은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과도 무관하다. 또한 그것은 역사의 완성이나 종결로서의 종말론과도 무관한데, 왜냐하면 역사의 완성이나 종결 또는 최후라는 것은 정의상 그 후속하는 시간 내지 역사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의 완성이나 종결로서 판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사초월론적 관점에서는 상이한 시간성의 대립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데리다는 이미 「실체와 기록」(Ousia et Gramme)(Derrida 1972 수록)이라는 논문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본래적 시간성(eigentlich Zeitlichkeit)과 비본래적 시간성(uneigentlich Zeitlichkeit)이라는 대립쌍을 해체한 바 있거니와, 그 이후에도 상이한 시간성의 대립을 전제한다거나 둘 중 하나의 시간성에 대하여 우위(거짓된 시간성 대 진정한 시간성, 지배의 시간성 대 해방의 시간성 같이)를 부여한다거나 한 적이 없다. 그 대신 그는 시간의 질서 자체가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어긋남은 분명 불의와 폭력, 기능 이상의 표현일 수 있지만, 또한 정의의 가능성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데리다가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두 번째 테제에 나오는 “약한 메시아적 힘”과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연결하면서 동시에 분리하는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처음 보기에는 시간에 관한, 역사에 관한 데리다의 관점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왜냐하면 벤야민은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테제 13)과 “지금 시간(Jetztzeit)”(테제 14)을 대립시키고(Benjamin 2008a, 344~45쪽), 전자를 파시즘의 시간으로, 후자를 역사유물론의 시간으로 규정함으로써 뚜렷한 이원론적 시간관을 표현하고 있고, 더 나아가 역사의 연속체가 폭파되는(테제 15), 그리하여 과거에 억압된 이들의 구원이 이루어지는(테제 3) 지금 시간을 통해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주의적인 역사관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뛰어난 벤야민 연구자들 덕분에 우리는 사정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베르너 하마허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매우 일관성 있고 심오하게 벤야민의 시간관과 역사관을 재구성하고 있다(특히 Hamacher 2002, 2005). 그의 연구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가 (하이데거 및) 데리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재구성하고 있으며, 다스튀르가 그렇듯이, 데리다를 전혀 (또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그의 벤야민 해석을 정정하거나 비판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하마허는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중 특히 2번째 테제와 17번째 테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두 테제에 입각하여 벤야민의 역사 개념을 체계화하고 있다. 특히 그는 두 번째 테제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약한 메시아적 힘”을 특수한 역사적 상황, 궁지에 몰린 위기의 상황(가령 나치즘의 파리 침공)과 결부시키고, 이를 통해 그것을 역사의 보편적 구조와 분리시키려는 데리다의 해석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반면 미카엘 뢰비는 벤야민의 「역사 개념에 대하여」를 역사적 정세 및 19~20세기 혁명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독해한다. Löwy 2001. 따라서 뢰비의 저작은 하마허의 독해보다 덜 사변적이지만 벤야민 글의 이론적ㆍ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한 것―가능한 행복―은 현재화―현재의 행복―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 속에 이러한 요구의 목적(telos)이 기입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현재화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고 또 앞으로 이러한 현재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 (...) ‘우리’가 과거의 모든 것에 의해 ‘부여받은’ 메시아적 힘은 약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능력이 아니라 [과거에 실현의 기회를] 놓쳐 버린 가능태들 및 충족에 대한 그것들의 요구의 소실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약한 힘인 이유는 또한 그것이 각각의 미래(그것이 지각되고 현재화되지 못하는) 속에서 소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Hamacher 2005, p. 42-강조는 하마허, 꺾쇠 추가는 필자)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한 것과 달리 메시아적 힘은 단지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적인 특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마허는 다음과 같이 암묵적으로 데리다를 반박한다. “‘약한’은 더 커다란 힘과 관련하여 이러한 힘의 양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 원칙적으로 그것이 실패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오직 실패할 수 있는 경우에만 메시아적 힘이 존재한다. 따라서 메시아적 힘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약한 메시아적 힘이다.” (같은 글, p. 44-강조는 하마허) 또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더욱 명시적으로 데리다 철학의 관점에 입각하여 벤야민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데리다의 벤야민 해석을 반박하고 있다.

 

벤야민이 약함을 이러한 구조적 메시아성에 귀속시키는 것은, 이상적 상황에서는 치유될 수도 있는 우연적 결함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메시아성의 한 구조적 요소, 그것을 통해 이러한 메시아성이 자신의 가능한 실패와 연결될 수 있는 그러한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행복의 가능성은 오직 그것에 상응하는 행복의 실패 가능성과 함께 지시된다. 메시아적 인덱스는, 선험적으로 가능한 실패 및 따라서 가능한 불가능성에 대한 지시와 교차된다. 요컨대 (...) 자신의 비메시아성으로부터 출현하지 않는 메시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적 힘’의 약함은 그 구조적 유한성에 놓여 있다. 역사의 사라져 버린 가능성들을 현재의 행복으로 구원한다고 가정돼 있는 메시아 자신이 사라질 수 있다. 모든 메시아―그리고 그가 들어설 수 있어야 하는 각각의 순간, 각각의 지금―는 본질적으로 유한하다. 곧 오직 그가 메시아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메시아일 수 있다.(같은 글, p. 45)

 

그리하여 그는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최소의 메시아주의”(minimal messianism)로, 더 나아가 “무-메시아주의”(a-messianism)(같은 글, p. 66)로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마허의 밀도 높고 치밀한 재구성을 좀 더 엄밀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그리고 그의 해석과 아감벤의 벤야민 해석과의 친화성 및 차이점에 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좀 더 정교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한편 아감벤은 데리다의 철학을 “실패한 메시아주의”라고 규정한 바 있다. Agamben 2001, p. 103. 이는 󰡔호모 사케르󰡕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가 데리다의 철학, 그의 탈구축론이 기본적으로 결정 불가능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질문만 제기해보기로 하자. 하마허는 데리다 철학에 입각하여 하지만 또한 데리다에 맞서, 그의 역사철학과 경쟁할 만한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제시한다. 그는 약한 메시아적 힘이 구조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하며, 그의 메시아주의를 최소의 메시아주의, 무-메시아주의로 규정한다. 또한 데리다가 유사초월론을 주장하듯이, 그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무초월론(a-transcendental)임을 주장하고 있다.[또한 그는 “attranscendental”, “ad-transcendental”, “ante-transcendental” 같은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용법은 사실 하마허의 다른 글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용어법이다. 가령 Hamacher 1994, 1999 참조.] 그런데 그의 해석은 결국 그의 역사철학을 훨씬 더 초월론적인 것으로, 또는 훨씬 더 메시아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이러한 최소의 메시아주의 내지 무-메시아주의에 따를 경우, 역사의 매 시간, 매 순간, 매번의 지금은 역사의 가능성 자체, 과거의 억압받은 사람들의 구원 자체가 달려 있는 절박하고 위험한 순간, 역사 자체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메시아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순간, 그야말로 종말론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정의 책임은 특정한 계급, 특정한 집단, 특정한 지도자들, 특정한 지식인들에게만 할당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아무나 모두에게 할당되어 있기 때문에, 절박성은 훨씬 더 실존적으로 강화된다. 하마허에 따르면 어느 시간, 어느 순간, 어느 지금이든, 누구나, 아무나에게는 과거의 억압받은 이들을 구원하고 역사의 가능성을 실현할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 각자, 우리들 아무나는 매일매일, 매 시간, 매순간, 매 지금마다 치열한 계급투쟁을 치르고 있고 또 치러야 하는 셈이다.[내가 보기에 국내의 연구자들은 벤야민 역사철학이 지닌 이러한 종말론적 측면 및 그것이 지닌 난점들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벤야민 역사철학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독해로는 고지현 2005a, 2005b, 2007 및 김유동 2006, 이창남 2006, 최성만 2010을 참조.]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또는 우리가 누군가에게(또 사람들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규범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까?[이것은 물론 이러한 절박한 투쟁을 매일매일, 매 시간마다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류은숙의 증언을 보라. 류은숙 2012 참조. 하지만 그러한 극단적 존재 양상(극단적 폭력에 내몰려 있는)이 일상적인 존재 양상으로 보편화될 수는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

 

이러한 생각이 일리가 있다면, 하마허는 시종일관 데리다를 염두에 두고 데리다 철학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유사초월론의 특징 중 하나는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타협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으며, 지배와 해방의 날카로운 대립에 입각하여 대항폭력을 추구하기보다는 민주주의적 정치의 필요성,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 정치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지배의 폭력에 맞서는 손쉬운(물론 ‘개념적으로’ 손쉬운) 대항폭력에 의탁하기보다 지배의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분법을 넘어서려고 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정치철학은 매우 근접해 있다. 대항폭력의 위험에 대한 경고 및 반(反)폭력의 정치 내지 시민다움의 정치의 필요성에 대한 촉구에 관해서는 Balibar 1997, 2010 중 7장, 2012를 각각 참조. 반면 지젝은 고전적인 의미의 대항폭력을 옹호하되, 벤야민의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여기에 약간의 변주(신비화?)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Zizek 2009 참조.] 반면 하마허가 재구성한 역사철학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적 정치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도 매우 희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경우 정치적 삶, 더 나아가 인간적 삶의 영위 가능성 역시 매우 희박해지는 것 아닐까? 데리다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닫힘(closure)이 본질적입니다. 만야 내가 어떤 것 내지 어떤 이 또는 어떤 상황을 긍정하기를 원한다면 (...) 독특성이 존재해야 하는데, 독특성은 어떤 닫힘을 의미합니다. 곧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준다면, 그런 한에서 나는 어떤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는 것을 포기하는 셈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풂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내 집 문을 닫게 됩니다. 그것이 유한성입니다. 유한성 없이는 선물이나 환대도 없습니다. 따라서 유한성은 선택을 의미하며, 선택은, 내가 “예”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어떤 형태의 닫힘이 개입돼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라는 것이 긍정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 우리는 그저 여러 가지 가능한 열림들과 닫힘들 가운데에서 선택해야 하며, 이것은 전략의 문제입니다.(Derrida 1999, p. 250)[이는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반론 또는 적어도 문제제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Derrida 1996 참조.]

 

하마허가 재구성한 벤야민의 역사철학에서는 이러한 전략의 여지가 아주 협소해지는 것은 아닌가?

 

 

V.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인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 아니 단수의 역사가 아니라 복수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을 어떻게 사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내 생각에는 이 문제야말로 데리다와 벤야민, 하이데거를 둘러싼 논의가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서구중심적, 유럽중심적 관점에 입각한 종말론적인 역사철학과 메시아주의 정치철학에 관한 논의[실제로 바디우, 지젝, 아감벤의 공통적 특징 중 하나는 노골적인 유럽중심주의, 서구중심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적어도 바디우에게서는 다수의 초월론에 관한 논의의 한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같다. Badiou 2006 참조.]가 우리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이론적 기여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의를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들에 관한 화두로 변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포스트 담론에 관한 논의의 철학적 핵심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 담론의 국내 수용에 관한 비판적 고찰로는 진태원 2012b 참조.]

 

하이데거가 말년에 사유하고자 한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의 문제였다고 할 수도 있다. 가령 하이데거가 󰡔사유의 사태로󰡕에서 존재의 역사로서의 “존재의 역운(Geschick)”에 대해 말하면서 “[각각의 시대마다] 변화되는 존재의 모습들”을 “에포케”(epokhe)라는 개념으로 표현할 때, 일종의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를 사유하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이 존재를 이데아와 이데아들의 코이노니아(koinonia, 공동체)로서 표상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에네르게이아로서, 칸트는 정립(Position)으로서, 헤겔은 절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니체는 힘에의 의지로서 표상했다면, 이러한 것은 그저 우연히 전개된 이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은] 자기 자신을 은닉하는 보내줌(schicken) 속에서, 즉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말 속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의] 어떤 말 걸어옴에 대한 대답들로서의 존재의 낱말들입니다. 스스로 물러서는 보내줌 속에 그때그때마다 포함되어 머물러 있는 채, 존재는 자신의 에포케적 변화의 풍부함과 더불어 사유에게 탈은폐됩니다.(Heidegger 1976, 40~41쪽)

 

더욱이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말하자면 헤겔의 이성과 달리 역사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존재의 역운을 규정하는 일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존재는 항상 보내줌 속에서 스스로 삼간다는 점에서 하이데거가 사유하려는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는 목적론에서 탁월하게 벗어나 있으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종말론의 위험 역시 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역사는 존재의 역운을 뜻하는데, 이러한 역운의 보내줌들 속에서 보내줌과 보내주는 그것(Es)이 이러한 보내줌들 자체의 알려짐과 더불어 스스로 [드러내기를] 삼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삼감(An sich Halten)은 그리스어로는 에포케입니다.”(Heidegger 1976, 39쪽) 하지만 하이데거에게는 스스로 보내면서 삼가는 익명의 존재, 또는 그것(Es)에게 그러한 역사를 결정하는 몫이 부여돼 있다는 점에서 행동의 여지, 실천의 여지가 매우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의 가능성이 신비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다.

 

반대로 이 문제에 관해 데리다와 벤야민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점에 있는 것 같다. 벤야민은 초월론적인 것의 역사를 개시할 수 있는 정지와 중단 또는 비정립(Entsetzung)의 계기를 강조하는 반면,[따라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나오는 ‘비정립’ 개념과 「역사의 개념에 나오는」 중단으로서의 ‘지금-시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한 좀 더 면밀한 고찰은 벤야민의 정치철학의 함의를 살피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 중 하나다.] 그러한 정지와 비정립이 최악의 것으로 귀결될 수 있는, 또는 적어도 일시적인 중단 이후 다시 법 질서에 고유한 동요의 순환으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 같다. 반대로 데리다는 그러한 최악의 것으로 귀결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차이적 오염의 논리나 되풀이 (불)가능성의 법칙에 주목하는 반면, 그러한 되풀이 (불)가능성이 변형적인 되풀이로, 차이와 이질성을 산출할 수 있는 근거, 적어도 그 계기에 대해서는 소홀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데리다가 장래를 열어두는 것, 사건이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함축된 최악의 것, 도착성, 잔혹성을 막기 위해 보존의 필요성, 전유 및 동일성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서로 환원 불가능한 두 가지 법칙 사이의 타협의 숙명을 주장한다면, 그러한 타협은 차악의 것을 영속적으로 보존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위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곧 그러한 타협을 통해 생산되는 차이, 변형, 이질성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차이, 변형, 이질성이라는 것, 더욱이 이전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요컨대 초월론적인 것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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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3-08-27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이 많은 주제입니다. 서론에 해당하는 좌파 메시아주의의 사변성 문제가 먼저 눈에 띄어서 보게 되는데....프린트해서 봐야겠어요. 그리 늙지도 않았는데...컴퓨터로 긴 글을 보면 눈이 부셔서. ㅎㅎㅎ 늘 좋은 글써주시고 또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balmas 2013-08-28 02:02   좋아요 0 | URL
드팀전 님 안녕하세요? 관심이 많으시다니 더 반갑습니다.^^ 사실 글을 화면으로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쾅! 2013-09-02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보기에는 결국에는 유럽중심주의적 목적론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데리다나 발리바르 나아가 발마스 님이 그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과연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탈구축이라는 번역어는 이미 다른 사람이 먼저 쓴 것인데 마치 발마스 님이 최초로 쓴 것처럼 얘기하고 계신다. 미리 쓴 사람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이상하다.

문자기록이나 대체보충이라고 번역할 필요 없다. 기록이나 보충이면 충분하다.

기록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녹음기를 떠올리는 사람이 이 사회에 넘쳐 나고 있는가?
보충이라는 말에 이미 대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둘 다 군더더기 표현이다.

쾅! 2013-09-02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째 위의 거론된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어째 알튀세르에서 멀어지는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튀세르는 유물론자를 자기가 탄 기차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관념론자는 그 반대라고 했다.

또는 역사는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고도 했다.

또 동시에 복수의 역사를 사유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은 유럽의 철학자들만 검토하면서 과연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인이 모두 유럽중심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유럽 바깥의 철학자들을 과연 검토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유럽 철학 전공하면 유럽 애들만 얘기해야 하는 건지 그것도 의문이다.


balmas 2013-09-04 14:52   좋아요 0 | URL
ㅎㅎ 제 글은 쾅!님이 제일 열심히 읽어주시는 듯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일일이 답글을 달지는 못하는데, 쾅!님 댓글 보는 재미가 있네요.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인문논총] 37집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지난 6월 8일 동 연구원 주최로 열린 콜로퀴엄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이 글에 관해 토론하거나 인용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인문논총]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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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I. 서론

II. 아렌트와 인권의 역설

III. 희생자들의 권리로서 인권: 랑시에르의 비판

IV.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발리바르의 아렌트 해석

V.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I. 서론

 

이 글에서 우리는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도발적인 주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이 글의 제목은 명백한 용어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무정부주의가 국가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면, 시민성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국가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사고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주제는 처음부터 그다지 의미 있는 논점을 제기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굳이 이처럼 도발적인 제목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같이 현재 서구 인문학계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고 국내에도 널리 소개되어 있는 현대 유럽 철학자들 및 이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바깥의 정치’[바깥의 정치’는 프랑스의 철학자 브뤼노 카르젠티(Bruno Karsenti)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에 나타난 푸코의 정치적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으로, 필자는 이 표현을 원용하여 현대 유럽 철학자들 및 이론가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의 정치적 지향을 ‘바깥의 정치’로 개념화한 바 있다.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철학논집󰡕 29집, 2012 참조.]의 합리적 핵심을 바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바깥의 정치를 주장하는 이론가들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유사파시즘적인 정치체로 환원하고, 이에 따라 그러한 정치체를 내적으로 개조하려는 문제를 도외시하고, 더 나아가 예속적 주체화에서 해방적 주체화로의 이행이라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제기는 현재 자유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가 단순한 정세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인 위기이며, 그 핵심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들이 자신들의 토대를 이루는 민중 내지 인민의 봉기적 역량을 잠식하는 데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귀기울여볼 만한 논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바깥의 정치론은 봉기적 역량에 근거를 둔 정치체는 어떻게 가능한가(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적 인민의 봉기적 역량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점에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상론하겠다.

 

둘째, 우리의 생각에 이는 한나 아렌트의 현대적 유산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을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제기한 근대 정치의 핵심적인 아포리아 중 하나는 인권의 역설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근대 정치의 토대에 있는 기본적인 원리인데, 이것이 풀기 어려운 역설에 빠져 있다면, 그것에 기반을 둔 근대 민주주의 정치 역시 역설적인 결과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민주주의 정치가 현재 직면한 위기에 대한 해법 중 하나는 이러한 인권의 역설에 대한 면밀한 고찰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쟁점 중 하나는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평가하는 매우 상반된 방식의 함의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 정치철학, 특히 그녀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에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해낸다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더욱이 이는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해 유사한 관점을 지닌 두 사람이 아렌트에 대하여 거의 상반된 해석을 제시하는가라는 문제는 꽤 흥미 있는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발리바르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110호, 2013년 여름호 참조.]

 

셋째, 아렌트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민주주의에 본래적인 무정부성 및 그것에 기반을 둔 시민성의 가능성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나 무정부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정부성에 기반을 둔 시민성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또한 그것이 현재 민주주의 정치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해 무언가 의미 있는 전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이 글에서 제기해보려는 쟁점이다.

 

II. 아렌트와 인권의 역설

 

한나 아렌트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체주의의 기원󰡕 9장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기에 인권의 이념이 직면했던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인권은 양도할/소외될(inalienable) 수 없다고 추정되지만, 주권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항상—심지어 인권에 기초한 헌법을 보유한 국가에서조차—인권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Harcourt, 1973,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파주: 한길사, 2006, 528쪽. 번역에 관해 한 마디 지적해두자면, 한글 번역본은 전체적으로 원문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비교적 무난한 번역이지만, 원문의 논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는 꽤 지장을 준다. 이는 특히 번역자들이 (몇몇 오역 이외에도) nation, nationalism, nationality, tribal nationalsm, minority, people 등과 같은 주요 개념들을 일관성 없이, 또한 피상적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논의를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에 대한 참조가 꼭 필요하다. 이하 번역본의 인용문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지만, 수정 사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았음을 밝혀둔다.]로 집약되는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난민들과 무국적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렌트는 1914년 8월 4일 이후, 곧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유럽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서술하기는 현재에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이 “이제까지 어떤 전쟁도 하지 못한 일, 즉 유럽의 국제 외교 관계를 복구 불가능한 정도로 파괴시켰”고,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수많은 중간 계급의 몰락을 낳았으며, 대규모의 “집단 이주”[인용문은 모두 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489쪽의 것이다.]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67; 󰡔전체주의의 기원󰡕, 489~90쪽.]

 

이 때문에 아렌트는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가 전간기(戰間期)에 사실로 드러났고, 이런 점에서 버크의 논리가 “아이러니컬하고 신랄한 형태”[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9; 󰡔전체주의의 기원󰡕, 537쪽.]로 확인되었다고 지적한다. 곧 버크는 인권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 “자신의 권리는 인권이라기보다 “영국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지적했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적을 상실한 소수 민족들과 망명자들, 이주민들이 겪은 사태는 그의 지적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의 권리 상실은 어떤 경우에든 인권의 상실을 수반했다. 최근의 사례인 이스라엘 국가가 입증하듯이, 인권의 회복은 국민적 권리의 확립이나 회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권 개념은 인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인권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다른 자질과 특수한 관계들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마주치는 순간, 인권 개념은 파괴되었”[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9; 󰡔전체주의의 기원󰡕, 537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이 어떤 나라의 국민이나 시민이든 간에,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로 인해 지니게 되고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따라서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임에도, 실제로는 어떤 개인이 이러한 인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특정한 나라의 시민 내지 국민의 자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독립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것을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국가의 성원이 지닌) 시민의 권리에 의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 또는 “인권의 아포리아”.[아렌트는 영어판 9장 2절의 제목을 “The Perplexities of the Rights of Man”으로 붙이고 있으며, 국역자는 이를 “인권의 난제들”이라고 옮기고 있다. 필자가 이를 “인권의 아포리아”라고 표현한 이유는, 아렌트 자신이 감수한 󰡔전체주의의 기원󰡕 독어판(Elemente und Ursprünge Totaler Herrschaft, Frankfurt am Main: Europäischer Verlagsanstalt, 1955)에서는 “die Aporen der Menschenrechte”라는 제목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당혹감’이나 ‘곤란’을 뜻하는 perplexity라는 단어보다는 아포리아나 역설이라는 말이 아렌트의 논점을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Christoph Menke, “The “Aporias of Human Rights” and the “One Human Right”: Regarding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Argument”, Social Research, vol. 74, no. 3, 2007 참조.]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제기하려는 문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인권의 박탈은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의 박탈을 뜻한다는 점이다. “인권의 근본적인 박탈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 행위로 만드는 그런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6; 󰡔전체주의의 기원󰡕, 532쪽.] 둘째, 이러한 인권의 역설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에 고유한 세상,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장소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구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정치적 삶의 공간은 초월적(가령 신과 같은)이거나 자연적인(가령 민족과 같은)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우발적인 토대, 따라서 토대 아닌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 그러므로 인권의 역설이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것은, 인권에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정치 상황이 출현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권리들을 가질 수 있는 권리(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특별한 권리의 상실이 아니라 어떤 권리이든 기꺼이 보장해주고 보장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상실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닥친 재난이었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근본 자질과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른바 말하는 인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단지 정치 조직의 상실만이 그를 인류로부터 추방한 것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7; 󰡔전체주의의 기원󰡕, 534쪽.]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한 번도 인권의 항목 가운데 언급된 적이 없는 권리”이며, 이것은 “18세기의 범주에서는 표현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권리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직접 생겨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7; 󰡔전체주의의 기원󰡕, 534쪽.]

 

아렌트는 인권의 역사를 두 가지 단계를 경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18세기 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역사적 권리는 자연권에 의해 대체되었고 ‘자연’은 역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이처럼 인권을 역사 대신 자연에 기초 지음으로써, 각각의 민족이나 국민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권리를 통해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거나 불변적인 것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지배 계급이나 특권 계급의 권리를 비판하고, 인간이 인간이라는 자연적 사실 자체를 통해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이제 역사만이 아니라 자연도 인간에게 낯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의 인간이 역사로부터 해방되었듯이 20세기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8; 󰡔전체주의의 기원󰡕, 535쪽.] 따라서 이제는 인류 자신이 과거에 자연이나 역사가 수행했던 역할을 떠맡게 되었는데, 이는 곧 “권리들을 가질 권리 또는 인류에 속할 수 있는 모든 개인의 권리가 인류 자체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8; 󰡔전체주의의 기원󰡕, 536쪽. ]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것이 과연 가능할지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국제 관계가 여전히 주권 국가들 간의 상호 협정과 조약에 입각한 국제법에 따라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세계 정부’의 건설 역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법이 될 수 없는데, 그러한 세계 정부라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면 이상주의적 경향을 가진 조직이 촉구한 버전과는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까”[H. Arendt, Ibid.; 같은 곳.] 짐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의 많은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박탈 경험에 입각하여 인권의 역설을 제기하고, 인권 속에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새로운 범주가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범주에 걸맞은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의 아포리아 및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이후 아렌트 연구의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정치철학, 특히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문제는 서양 학계에서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들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 개념에 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우선 이 개념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존재한다.[특히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참조. 그의 주장의 핵심은 인권을 이론적으로 근거 지으려는 시도는 불가능하거나(왜냐하면 이는 신학적 권위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무익하다(왜냐하면 인권을 정당화하려는 이론적 시도보다 과거에 벌어난 대학살이나 공포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인권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인권을 “의문의 여지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기보다는 인권을 정치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p. 83).] 앞서 말했듯이 한나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로 파악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제창된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을 “실용적으로 건전한”[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299; 󰡔전체주의의 기원 1󰡕, 537쪽.]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버크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국민국가에 소속될 권리만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이면서 강력한 국민국가에 소속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된다. 더 나아가 국제정치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인권을 유린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국가나 집단에 맞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함축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권은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존하게 되며 권리는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나 시혜를 의미하게 되는데,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을 훨씬 더 가중시키며, 인권이라는 개념을 무력화(無力化)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James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102, no. 4, 2008 참조. 이 글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적 해석과 칸트주의적 해석에 대한 비판은, 한두 가지 이견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인그램의 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뒤에서 좀더 논의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인그램은 랑시에르의 아렌트 해석이 지닌 난점을 충분히 검토하고 있지 않다.]

 

칸트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도 존재한다.[Jürgen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8; 위르겐 하버마스, 󰡔이질성의 포용󰡕, 황태연 옮김, 서울: 나남, 1998; Seyla Benhabib, The Rights of Other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세일라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서울: 철학과현실사, 2008,] 전자의 경우와 달리 이러한 해석에서는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제도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적인 것이 된다.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영구평화론󰡕을 비롯한 법철학 저술에서 칸트의 제안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좀더 발전시켜서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세계시민적 정치체 및 정치 제도의 확립 속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려고 한다. 가령 벤하비브가 보기에 칸트 자신 및 아렌트가 국제관계에서 인권의 확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는 이유는 그들이 주권적인 국민국가를 정치의 (자연적인) 토대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 공동체 및 법 제도의 가능성을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해 실질적인 해법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이고 국제적인 법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특히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4장 참조.]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서 이러한 세계정치적 인권 체제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첫 번째 관점과 비슷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구체적인 법적 제도로 실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하버마스의 용어법대로 하면 세계적인, 적어도 국제적인 공론장의 형성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대량 학살로 인해 고통 받는 동료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류의 도덕적 각성을 필요로 한다.[J.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op. cit.]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기에서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법적ㆍ정치적 제도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들의 권력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역시 인권은 그 권리의 당사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이들의 힘에 달려 있는 문제가 된다.[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op. cit. 물론 이러한 인그램의 비판에 대하여, 인권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들 내지 국제관계의 존재가 반드시 인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희생자의 지위로 한정하는가라는 반론을 제기해볼 수 있다. 하버마스와 벤하비브의 주장은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자기 해방, 자기 투쟁의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봉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가능성 자체의 소멸이나 약화를 방지할 수 있는 국제 질서의 조건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III. 희생자들의 권리로서 인권: 랑시에르의 비판

 

따라서 이러한 해석들보다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과 좀더 정면으로 대결하는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실제로 최근에 여러 이론가들이 아렌트의 이론에 관한 새로운 해석 및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제안은 아렌트의 저작들에 대한 좀더 면밀하고 충실한 검토에 입각하고 있을뿐더러, 자유주의적이거나 칸트적인 해석과 달리 인권의 문제를 정치 그 자체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É. Balibar,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보편적인 것들」, 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서울: 도서출판 b, 2007; id.,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0; id.,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New Reflections on Equaliberty”,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월간 사회운동󰡕 2006년 11월호, 통권 69호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24; id.,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 id.,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 id., “On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Constellations, vol. 20, no. 1, 2013; 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s. 2-3, 2004; 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op. cit.; Peg Birmingham,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Bloomington, IN: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1, no. 1, 2011; Justine Lacroix, “Human Rights and Politics, 1980-2012”, Books & Ideas.net, 2012. http://www.booksandideas.net/Human-Rights-and-Politics.html]

 

그 중에서 먼저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랑시에르가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아렌트의 인권 해석에 대하여 제기한 비판이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이전에도 랑시에르는 아렌트 정치철학의 이런저런 측면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적이 있지만,[가령 J. Rancière, “Dix thèse sur la politique”, in Aux bords du politique, Paris: Gallimard, 2002; 「정치에 관한 열 개의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13(수정 재판) 참조.] 아렌트가 제기하는 인권의 역설에 관해 전면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이 글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아감벤이 자신의 이론적 실마리로 삼고 있는 아렌트의 인권 해석에 대한 반박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인권의 정치에 대한 랑시에르 자신의 관점을 제안하고 있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주목하는 것은 현재 국제정치에서 나타나는 인도주의적 인권 개념과 아감벤이 제시하는 종말론적인 정치 사이에 모종의 연관 관계가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은 이론적으로 볼 때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한 인권의 역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인권이야말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한 이후, 전지구적인 자유 시장 경제와 전지구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역사 이후의(posthistorical) 세계”의 명실상부한 이념적 원리, 헌장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민족갈등과 대량 학살, 종교적 근본주의의 분출, 새로운 인종주의 및 외국인 혐오증의 확산, 신자유주의가 산출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의 증가 등으로 인해 세계는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 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인권은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 곧 자신의 집과 땅으로부터 내쫒기고 인종 학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들의 권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인권은 점점 더 희생자들의 권리, 자신들의 이름으로는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주장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권리인 것으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권리는, ‘인도주의적 간섭’에 대한 새로운 권리—궁극적으로는 침략에 대한 권리가 되어버린—라는 이름 아래 국제 권리 체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타인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게 되었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p. 297~98.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인권은 미심쩍은 것이 되었는데, 인권에 대한 이러한 의혹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인권 비판보다는 버크의 인권 비판을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곧 “실제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국민 공동체 자체와 결부되어 있는 권리”이며,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한낱 추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생겨났다. 랑시에르는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 역시 버크의 이러한 인권 비판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인권은 단지 인간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권리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인권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이며, 권리에 대한 조롱에 불과하다.”[J. Rancière, Ibid., p. 299.] 

 

이 대목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권이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한 이들,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권리에 대한 조롱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뒤에서 좀더 논의하겠지만, 랑시에르 자신이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로서의 인권은 해방 투쟁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랑시에르는 이것을 권리에 대한 조롱으로 이해하며, 더 나아가 인권의 역설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야말로 “50년이 지난 이후, ‘인도주의적’ 무대에 나타난 인간의 권리의 새로운 “난점”에 딱 들어맞는”[J. Rancière, Ibid.]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모종의 ‘예외상태’에 대한 아렌트의 개념화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처한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아무런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그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531쪽.] 여기서 랑시에르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아렌트의 말이 “명백히 경멸적인 말투”[

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299.]를 띠고 있다고 이해하는데, 그가 보기에 아렌트의 이 말은 “마치 이 사람들이 심지어 억압당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심지어 억압될 만한 가치도 없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J. Rancière, Ibid.]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와 아감벤 사이의 지적 계보의 근거를 발견하는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에게 이러한 진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근거 짓는 고유한 인간학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볼 수 있듯이 활동의 세 가지 형식, 곧 노동(labor)과 제작(work), 행위(action)의 형식을 구별하면서, 삶의 필요에 관한 작업과 관련된 사적 영역(곧 오이코스(oikos)의 영역)에 속하는 노동 및 제작과 구별되는 행위야말로 본래적인 공적 영역, 곧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H. Arendt, The Human Condition, Introduction by Margaret Canova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2nd Edition); 󰡔인간의 조건󰡕, 서울: 이진우ㆍ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참조. 참고로 국역본은 1958년의 초판본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근대성의 특징 중 하나는 고대 세계에서는 유지되었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무너지고 사적 영역에 속하는 노동이 공적 영역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또한 아렌트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차이점(및 전자의 우월성)을, 전자가 자유의 정초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후자는 “고통의 직접성”에 의해 규정되었고, “전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필요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요구”에 따라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On Revolution, LondonㆍNew York, Penguin Books, 1965, p. 92.] 아렌트는 1848년 이후 공적 영역 속으로 노동운동의 등장은 근대 정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지만, 노동운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일단 노동운동이 사회 속으로 통합이 되고 노동자들이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게 되면, 노동운동은 오히려 공적 영역 및 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게 된다고 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아렌트 인간학의 특징을 생물학적 삶 및 사적 영역의 삶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위대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고유하게 정치적인 삶을 가리키는 비오스(bios) 사이의 엄격한 구별 및 분리에서 찾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감벤의 정치철학, 특히 그의 세계적인 출세작인 󰡔호모 사케르󰡕는 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에 의거하고 있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서울: 새물결, 2008 참조.] “아렌트가 보기에 인권과 근대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삶의 혼동—이는 궁극적으로는 비오스를 순전한 조에로 강등시키는 것을 뜻한다—에 의거한 것이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299.] 따라서 아렌트가 말한 “억압을 넘어선 상태”는 이 두 가지 삶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것의 이론적 귀결이다.[랑시에르의 관점을 따라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는 또 다른 논의에서도 유사한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 Andrew Schaap, “Enacting the Right to Have Rights: Jacques Rancière’s Critique of Hannah Arendt”,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0 no. 1, 2011; Jean-Philippe Deranty & Emmanuel Renault, “Democratic Agon: Striving for Distinction or Struggle against Domination and Injustice?”, in Andrew Schaap ed., Law and Agonistic Politics, Ashgate, 2009 참조. ]

 

랑시에르는 이것을 아렌트 정치철학에 고유한 “아르케 정치적 입장”으로 간주한다. 아르케 정치(archi-politique)는 랑시에르가 󰡔불화󰡕의 4장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플라톤이 창설한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Galilée, 1995 참조.] 아르케 정치의 고유한 특징은 정치적 활동을 소수의 집단에게만 할당하고, 데모스 또는 인민은 정치의 영역 밖으로 배제하고 오직 삶의 필요와 관련된 일에만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르케 정치는 정치적 활동을 전담하는 소수 지배 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위한 정치를 뜻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정치적 계급은 아무런 사적 소유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르케 정치의 특징은, 정치적 행위에 걸맞은 자격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따로 있으며, 정치는 이 사람들이 전담하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의 자격과 능력에 적합한 일에 전념해야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이로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농부는 농부답게, 장인은 장인답게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 아르케 정치의 이념인 셈이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관점을 아르케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순수한 정치의 영역과 삶의 필요와 관련된 영역을 구별하고 후자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전자의 영역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렌트의 고유한 관심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순수한 정치 영역을 보존하려는 의지는 궁극적으로 이 영역을 국가 권력과 개인적 삶의 관계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이며, 따라서 아감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를 권력과 같은 것으로, 곧 “점점 더 저항할 수 없는 역사-존재론적 숙명(오직 신만이 우리를 여기에서 구원할 수 있으리라)으로 여겨지는 권력”[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302.]과 같은 것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랑시에르는 이러한 아렌트-아감벤의 계보에 맞서 인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라고 주장한다.[하지만 랑시에르 특유의 환원적이고 단언적인 주장과 반대로, 아감벤의 저작에서 ‘인간적인 것’ 및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논의를 참조. John Lechte and Saul Newman, “Agamben, Arendt and Human Rights : Bearing Witness to the Human”,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 15, no. 4, 2012.] 그는 이를 아렌트가 만들어낸 두 가지 진퇴양난의 딜레마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길의 형태로 제시한다.

 

아렌트는 인권과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을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는 진퇴양난으로 만든다. (1) 시민권은 인권이다. 그러나 인권은 정치화되지 않은 사람의 권리다. 이 권리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결국 무로 귀착된다. (2) 또는 인권은 시민권이다. 이러한 시민권은 이러저러한 헌정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이 권리가 권리를 지닌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뜻하며, 이는 결국 동어반복으로 귀착된다.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이거나 아니면 권리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 공허한 것이거나 아니면 동어반복이라는 것, 그리고 양쪽 다 속임수라는 것. 이것이 아렌트가 조립한 자물쇠다. 이러한 자물쇠는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가정을 일축하는 대가를 치를 경우에만 작동하게 된다. 실로 세 번째 가정이 존재하는데, 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겠다. 인권은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302.]

 

랑시에르가 제시한 세 번째 가정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우선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기록된 권리들”, 곧 성문화된 권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기입들(inscriptions)”[J. Rancière, Ibid.]인 이러한 성문화된 권리들은 개인들이 이러한 권리에 기초하여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사회ㆍ정치적 상황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근거들로 작용한다.[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인권 및 시민권을 단순히 불평등한 경제적 착취 현실을 은폐하는 법적 이데올로기로 치부하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의 마르크스 및 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비판한다. 󰡔불화󰡕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관점을 메타정치(meta-politique)라고 부른다.] 따라서 인권은 그들에게 부여된 성문화된 권리를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는 개인들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인권이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은, 이러한 개인들이 단지 이미 기입되어 있는 권리를 옹호하고 그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입을 바탕으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권리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권리 주체들을 생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와 평등은 한정된 주체들에 속하는 술어들이 아니다. 정치적 술어들은 열린 술어들이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어떤 경우에 누구와 관계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열어놓는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303.]

 

따라서 랑시에르에게서 인간과 시민의 차이, 또는 인권과 시민권의 차이는, 아렌트가 제시하는 진퇴양난에서처럼 공허하든가 동어반복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간격을 폐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치의 공간,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생산의 장을 뜻한다. 정치적 주체들은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실현하고 그러한 권리들에 근거하여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해내는 이들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주체들을 총칭하여 데모스 또는 인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가난한 이들의 권력”이나 “벌거벗은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할 자격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력”[J. Rancière, Ibid., p. 305.]으로 정의한다. 곧 “민주주의는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통치하는 데 필요한 어떤 특별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권력”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불화󰡕를 비롯한 다른 저작에서 민주주의를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IV.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발리바르의 아렌트 해석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더 부연하기로 하고, 이제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대해 제시하는 해석을 살펴보자. 발리바르는 1990년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관해 논의한 바 있는데, 그의 성찰의 핵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권의 역설론이다.[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대한 발리바르의 논의로는 주 22)의 문헌들 참조.]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또는 ‘권리들에 대한 권리’[아렌트의 불어 번역본에서는 right to have rights를 ‘droit aux droits’로 번역하고 있으며, 발리바르도 불어로 글을 쓸 경우에는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이는 말 그대로 하면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뜻한다.])라는 개념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렌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랑시에르가 정치적 공간에서의 만인을 위한 실질적 평등의 척도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의 기원에서부터 ‘몫 없는 이들의 몫’에 대한 인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 다시 말하면 배제―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제이지만 또한 다른 차별의 범주들도 여기에 속합니다―의 과정을 정치체 안으로의 포함 과정으로 전화시킴(이는 정치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킵니다)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재정식화하려고 시도했던 것과 가까운 관점입니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32쪽.]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 프랑스어로 2001년에 출간되었고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가 2004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랑시에르가 자신의 글에서 발리바르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는 해도,[사실 랑시에르는 다른 곳에서도 전혀 발리바르의 작업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글은 발리바르의 이러한 (부당한?) 연결에 대한 반론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역으로 발리바르는 랑시에르의 글이 출판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권의 역설론, 특히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재고찰하면서 자신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드러내고 문제의 쟁점을 심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아렌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권의 정치 및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해석과 비교해볼 때 발리바르의 해석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는 랑시에르의 해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이 개념에 초점을 두고 인권의 역설을 고찰하게 되면, 아렌트 문제제기의 핵심에는 정치 공동체의 무근거성, 아르케 없음이라는 문제, 아르케 없는 정치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음이 드러난다. 셋째, 만약 이것이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의 핵심 쟁점이라면, 그로부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포리아적 성격 또는 이율배반적 성격이라는 문제다.

 

우선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발리바르는 아렌트의 핵심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권리들의 인간학적 토대라는 관념 및 정치적인 것의 토대로서 ‘인권’의 고전적 교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 중 하나를 전개하면서도 이 권리들 중 몇 가지를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극단적으로 옹호했으며, 이러한 권리들에 대한 무시는 인간적인 것의 잠재적인 또는 현행적인 파괴로 귀착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권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전형적인 인권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일반, 특히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É. Balibar,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op. cit., p. 728. 강조는 발리바르. 이하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인용문의 강조 표시는 원저자의 것임을 일러둔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아렌트의 정리”(Arendt's theorem)라는 수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된다.”[É. Balibar, Ibid., p. 732.]  정리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인권과 관련된 이러한 역설적 사태가 일시적이거나 역사적 우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이다. 아렌트의 정리가 지니는 보편적 함의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정리가 인간의 권리에 함축된 권리라는 것이 개인 주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 말 그대로 양도/소외 불가능한 자연적 성질이 아니라,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서로에게 부여해주고 또한 서로에 대해 보증해주는 자격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 있다. 개인들이 지닌 인권은 이것 이외에는 다른 보증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민의 권리가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는 이유는, 인권이 시민으로서의 권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랑시에르가 주장하듯이, 아렌트가 버크를 옹호하면서 인권은 국민의 권리의 부속물이라는 것, 국민 국가(또는 주권적 권력)에 소속되는 것이 개인들의 역사적 숙명이며, 그러한 공동체 바깥에서는 권리라는 통념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고 개인들은 오직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자연적 성질만을 지닐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아렌트의 논점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첫째, 아렌트가 말하려는 것은 “행위의 상호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공동체의 제도/설립 바깥에는, 인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0.] “완전하게 조직된 인류와 더불어 고향과 정치적 지위의 상실은 인류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4; 󰡔전체주의의 기원󰡕, 533쪽.] 또는 역으로 표현한다면, 인간 존재 그 자체는 개인들이 공동으로 형성된 세계 속에서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권리들과 다르지 않으며, 그 권리들만큼 실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둘째, 인간의 인간성 자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공동의 세계 형성은 특정한 정치 제도나 공동체의 형식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아렌트가 명시적으로 말하듯이 인권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는, 또는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인권의 항목들을 보호하고 성립하게 해줄 수 있는 일차적인 권리로서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윤소영 옮김, 서울: 공감, 2003, 23쪽.]라고 바꿔서 표현하며,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89)의 한 가지 핵심(그가 인간=시민 명제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에서 찾는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권리선언󰡕은 인간을 시민으로, 인권을 시민권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권리선언󰡕이 개인의 자율성, 개인적 권리의 영역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다 정치로 환원하며, 따라서 공포정치 및 전체주의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나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식의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 해석 및 반(反)전체주의론적 비판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인간=시민 명제의 핵심을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 파악한다면, 인간=시민 명제는 인간을 시민으로 환원하거나 자유를 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나 개인적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란, 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불변적인 자연적 사실에 기초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쪽. 이 부분은 2010년 판본에는 빠져 있다.]이라는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이라는 것이 시민적 권리에 선행하지 않으며, 이러저러한 시민적 권리들과 더불어 인권 역시, 서로에 대해 권리를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개인들의 공동의 세계 구성 행위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이거나 본질적인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정치 공동체는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민들의 호혜적인 행위 이외의 다른 기초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아르케 없는 것으로서의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가라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되는데, 그것은 이러한 아르케 없는 공동체로서의 민주주의 공동체에 본래적인 이율배반적인 또는 아포리아적인 성격이라는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한 가지 심원한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리들을 창조하는 동일한 제도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들이 그것들을 통해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함으로써 인간 주체들이 되는 그러한 동일한 제도들은, 그것들이 이 권리들을 파괴할 경우에는, 또는 권리들을 실행하는 데 장애가 될 경우에는 또한 인간적인 것에 대해 위협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1.]

 

아렌트가 국민국가에 고유한 인권의 역설을 통해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인권선언󰡕에 기초를 두고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호혜적인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수립되었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평등과 자유를 제한할뿐더러, 그 성원들 중 일부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소수민족 조약은 평이한 언어로 그때까지 오로지 국민국가의 현 시스템에서만 적용되었던 것들을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단지 한 나라의 국민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고, 같은 민족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법 제도의 완벽한 보호를 누릴 수 있으며,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완전히 동화되지 않거나 자신의 혈통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예외법을 필요로 한다는 것들이 거기 쓰여 있었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501쪽.] 아렌트는 이것이 단순히 국민국가에만 고유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좀더 외연이 넓은 초국민적인 국가 및 일종의 세계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그 국가나 정부는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체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축소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는(곧 배제하려는) 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었던 칼 야스퍼스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안한 ‘세계 연방 국가’ 방안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그 국가는 고도로 강력한 “연방 치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러한 무력은 또 다른 억압과 폭력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Hannah Arendt, “Karl Jaspers: Citizen of the World”, in Men in Dark Times, New York: Harcourt, 1968 참조.]

 

V.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필자가 보기에 아렌트와 랑시에르,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문제는 근대 정치체, 특히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체는 근본적으로 아르케 없는 정치체, 무-정부주의적 정치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정부주의적’이라는 표현은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랑시에르의 통찰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화󰡕에서 그리스어 아르케가 지닌 여러 의미를 활용하면서 민주주의는 아르케 없는(an-arkhe) 것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이래로 서양의 정치철학에게 하나의 스캔들로 간주되었음을 역설한 바 있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op. cit. 참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본다면 아르케라는 말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아르케는 만물의 시원이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둘째, 이러한 시원이나 근원은 또한 원리나 토대, 근거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마지막으로 아르케는 지배나 통치라는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에는 지배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원리 또는 토대가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이를 민주주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양 정치철학이 추구했던 것은,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여, 기하학적 비례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귀족, 부자, 평민)에게 돌아갈 합당한 자격과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사실은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본성적인 정치 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민주주의 또는 정치(랑시에르에게 이 양자는 동의어다)는 아르케의 질서에서 몫을 배제당한,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추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세 사람이 갈라지는 것은 이처럼 민주주의가 본래적으로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체, 아르케 없는 정치체로서의 민주주의적 정치체는 어떤 것인가, 아르케 없는 시민성이란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해서다. 그런데 만약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배제라는 문제가 된다. 아르케는 내부와 외부, 동일성과 비동일성, 자격자와 비자격자, 시민과 비시민(이방인)을 구별하는 원리이며, 아르케에 기반을 둔 모든 정치체는 이러한 구별에 입각한 배제를 통해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민주주의 정치체, 특히 근대 국민국가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점이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가 직면한 화두의 하나로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문제는 아르케 없는 시민성, 배제 없는 시민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집약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인권의 역설에 대한 아렌트의 성찰 및 그것에 대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대조적인 해석은 이 문제가 지닌 여러 가지 함의를 숙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 자신은 이러한 질문을 질문으로 남겨 두었으며, 그것에 대하여 뚜렷한 답변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손쉬운 답변들을 통해 이러한 질문이 지닌 아포리아적인 깊이를 은폐하거나 봉쇄하지 않으면서 그것의 난점을 온전히 드러냈다는 점이야말로 아렌트 사상의 강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아렌트 사상에서 아포리아 논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op. cit. 참조.]

 

반면 랑시에르는 아렌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아렌트 사상에 고유한 한계의 징후를 읽어낸다. 그가 보기에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로 제시한 것은 사실은 아렌트 정치철학이 또 하나의 아르케 정치라는 점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며, 따라서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이라고 부른 것은 인권의 정치의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왜곡하는 한 방식에 불과하고, 이런 점에서 아렌트의 정치철학은 깊은 비관주의와 종말론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에 입각하여 종말론적인 호모 사케르의 정치철학을 제시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아렌트가 제기하는 인권의 역설에 대한 해석 및 해법의 제안에서 랑시에르는 매우 독창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독해와 해법은 몇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아렌트에 대한 그의 해석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 질문해볼 수 있다. 랑시에르의 해석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과 아감벤의 종말론적인 정치철학 사이에 본질적인 지적 연관성이 존재하며, 그것은 조에와 비오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삶의 양태의 엄격한 구별에 기초하여 인권 및 정치를 이해하려는 아렌트 사상의 본질주의적인 경향에 근거를 둔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몇몇 주석가들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아감벤이 아렌트 사상에 (부분적으로) 의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감벤과 달리 아렌트 사상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아렌트와 아감벤의 차이점에 관해서는 특히 John Lechte & Saul Newman, “Agamben, Arendt and Human Rights : Bearing Witness to the Human”,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op. cit. 참조.] 또한 랑시에르가 말하듯이 과연 아렌트가 버크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아렌트가 버크의 논리가 “아이러니컬하고 신랄한 형태”로 확인되었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국민국가가 벗어날 수 없는 근대인의 운명이라는 점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치 조직으로서 국민국가의 근본적인 한계가 드러났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둘째, 여기서 더 나아가 인권의 정치에 관한 랑시에르 자신의 해법이 품고 있는 난점에 관해 지적해볼 수 있다. 랑시에르가 아렌트에 맞서 자신의 세 번째 가정을 제시했을 때 전제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정치 공동체(따라서 랑시에르 자신이 ‘치안’(police)이라고 부른 것과 구별되는)가 성립할 수 있으며,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인간의 권리가 성문화된 권리로 기입되어 있고, 이러한 권리는 인권 및 시민권을 위한 투쟁의 효과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이 제기하는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는 인권의 역설을 감당할 만한 정치 공동체,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것이었다.[아렌트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책에서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인권의 역설에 관한 아렌트의 논의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아렌트의 개인적 경험 및 성찰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렌트가 제기하는 유대인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계몽주의가 정치적 권리를 전면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권리’―추상적 인간의 권리―로 이해되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계몽주의에 의해 형성된 ‘해방’은 어떤 이의 유대인성으로부터의 해방(즉 유대인으로서의 유대인의 해방이 아니라 유대인의 자살)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곳에 그토록 많은 저항과 불관용이 존재했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근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즉 유대인 문제에 아렌트가 주의를 기울였을 때, 이 문제는 중심적인 것이 되었다. 그녀는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실패를 나치 전체주의의 발생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리처드 J. 번스타인,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 김선욱 옮김, 서울: 아모르문디, 2008, 44쪽. 강조는 번스타인.]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것을 하나의 문젯거리로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공동체를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권의 역설에 관한 아렌트의 문제제기가 지닌 의의 중 하나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이주자, 이민자, 난민들이 처한 인권의 상황을 50여 년 전에 아렌트가 명철하게 포착해냈다는 점에 있다. 곧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수많은 국적 없는 이들이 직면했던 상황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이 국적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인 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이 50년 전 또는 70년 전의 일시적이고 상황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함의를 지닌 문제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랑시에르 자신이 제안하는 해법은 설득력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해법 자체는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이 현실적인 역설이라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지, 더 나아가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아렌트의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지 반문해볼 수 있다.[따라서 랑시에르가 아렌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지만, 사실 랑시에르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렌트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주 22)에서 제시한 James Ingram 및 Justine Lacroix의 논문을 참조.]

 

이는 결국 랑시에르 정치학이 지닌 근본적인 난점과 연결된다. 랑시에르가 자신의 정치학에서 좀처럼 제기하지 않는 문제는 인권 선언 또는 봉기 일반에 고유한 불안정성이라는 문제, 다시 말하면 (혁명적) 봉기와 그것을 구현하고 실현하려는 민주주의 헌정 사이의 아포리아적인 또는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문제다. 이 문제는 민주주의적 봉기는 자신의 고유한 유한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봉기의 결과를 구현하고 그것에 대해 상대적 영속성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제도를 필요로 하는 반면, 봉기를 구현하기 위해 제도화된 헌정 질서는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봉기를 제한하고 퇴락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사실 사이의 갈등 또는 아포리아라는 형태를 지닌 문제다.

 

사실 이 문제는 이미 몇몇 이론가들이 자신의 정치철학의 고유한 대상으로 제기한 바 있는 문제다. 가령 자크 데리다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한 탈구축적인 독서에서 이를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사이의 아포리아적인 관계, 또는 필연적인 “차이적(差移的) 오염”(différantielle contamination)[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90쪽. 강조는 데리다.]의 관계라고 부른 바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차이적 오염은 “법정초적이거나 법정립적 폭력 자체는 법보존적 폭력을 포함해야만 하며 결코 그것과 단절될 수 없다”[󰡔법의 힘󰡕, 88쪽.]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법 내지 정치체를 새롭게 정초한 폭력은 그것이 정초적 폭력으로 기억되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계속 보존되어야 하며, 따라서 보존적 폭력을 자신의 구조 속에 포함해야 한다. 역으로 법보존적 폭력은 자신이 보존하려는 것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재정초해야 한다. 곧 원래부터 존재하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보존적 폭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보존적 폭력은 정초적 폭력의 계기를 그 자체 내에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두 가지 폭력, 또는 봉기와 헌정은 차이적 오염의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발리바르는 이를 민주주의와 시민권 헌정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문제로 정식화한 바 있다.[É. Balibar, “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한편으로 시민권 헌정은 자신의 토대로서 민주주의에 근거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급진적인 보편성을 온전히 수용할 경우 그 제도적 틀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한해야 한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제도로 구현된 모든 민주주의 헌정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고대 민주주의에서 노예가 시민권 헌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점이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에 기초를 둔 근대 민주주의 역시 자신의 고유한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 근대 민주주의 초기의 무산 계급에 대한 배제나 여성에 대한 배제 또는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배제들 이외에 국민국가에 고유한 배제라는 쟁점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시민성(citoyenneté)=국적(nationalité)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시민권=국적’ 등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4장 및 󰡔정치체에 대한 권리󰡕, 131쪽 이하 참조.] 곧 정치적 자격으로서의 시민성을 국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 헌정, 곧 국민 국가의 본질이며, 이것은 󰡔인권선언󰡕에서 천명된 보편적 인권 및 시민성 원리와 모순을 빚는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화의 과제는 이러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반면 랑시에르에게는 이러한 문제설정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그가 민주주의와 헌정 사이의 관계를 정치와 치안 사이의 배타적인 대립 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앞의 책 참조.] 민주주의와 헌정 사이의 관계가 정치와 치안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대립적 관계로 정의되면,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항상 치안 질서에 대한 위반과 단절, 파열의 행위로 나타나게 되며,[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규정한다.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지배의 논리를 이러한 평등의 효과가 가로지를 때 정치가 존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항상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는 심지어 매우 드물게, 간혹 존재할 뿐이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p. 37.] 다른 한편으로 정치 공동체 내지 헌정(또는 그것을 구조화하는 논리)으로서의 치안은 늘 소수 특권 계급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의 질서, 본성상 과두제적인 지배의 논리로 나타나게 된다. “치안은 온갖 종류의 재화들(biens)을 공급할 수 있으며, 어떤 치안은 다른 치안보다 무한하게 더 좋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치안의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다.”[

J. Rancière, La mésentente, p. 54.] 이 경우 사고 불가능해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민주주의적 정치는 어떻게 일회적인 봉기적 행위를 넘어서 지속될 수 있는가? 단절과 위반을 통해 표출된 인민의 봉기적 힘은 어떻게 구조적ㆍ제도적 역량으로 전화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는 어떻게 사건과 행위를 넘어 민주주의적 조직, 민주주의적 정치체로 구성될 수 있는가? 반대로 정치와 치안 사이의 배타적인 대립 논리를 따른다면,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오직 위반과 단절의 사건 내지 행위로 국한되고, 모든 조직, 모든 정치체는 본성상 치안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반대하여 제시하는 해법 역시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랑시에르의 해법은,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기입들”, 곧 성문화된 권리들이 치안 질서 내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해방의 삼단논법”에 관한 그의 탁월한 논의 역시 이러한 기입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앞의 책 참조.] 그렇다면 랑시에르는 한편으로 민주주의적 투쟁을 위해 자유와 평등의 법적ㆍ물질적 기입을 요구하면서도(다시 말해 치안과 구별되는 민주주의적 공동체(또는 적어도 민주주의적 공간)의 가능성을 전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공동체 일반을 치안으로 환원하고,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p. 79]라고 간주하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셈이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최근 이루어진 몇몇 대담에서 정치와 치안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 관계를 완화하거나 정정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가령 랑시에르는 2008년의 인터뷰에서 ‘드문 것으로서의 정치’라는 표현이 바디우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표현을 재고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J. Rancière, Moments politiques: Interventions 1977~2009, Paris: La Fabrique, 2011, p. 181 참조. 또한 2011년에 이루어진 한 인터뷰에서는 정치와 치안의 관계를 재고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급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적 역량의] 증식의 형태를 취할 수 있기 위해, 이미 지금 자신의 형태, 자신의 도구,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Antoine Janvier & Alexis Cukier, “La question politique de l’émancipation: Entretien avec Jacques Rancière”, in Alexis Cukier, Fabien Delmotte & Céecile Lavergne eds., Émancipation, les métamorphoses de la critique sociale, Éditions du Croquant, 2013, p. 159.(꺾쇠 추가는 인용자) 물론 랑시에르의 철학 체계(또는 랑시에르가 자신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 내지 이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반감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에, 논리) 내에서 어떻게 급진 민주주의가 ‘자신의 형태, 자신의 도구, 자신의 공간을 이미 지금 가질 수 있는지’(랑시에르는 흥미롭게도 이를 명령 내지 요구(또는 당위)의 의미를 함축하는 ‘deveoir’ 조동사를 사용해서 “가질 수 있어야 하는”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곧 인터뷰를 통해 이루어진 임기응변식 정정과 이론적 정정은 다른 문제라는 뜻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9장 마지막에서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인간학적ㆍ정치적 쟁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시대의 투쟁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잃어버린 인간, 또 그의 행위와 운명의 일부를 일관된 총체로 구성하는 법적 인격을 잃은 인간에게는 보통 사적 영역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특성이 남겨지고, 공적인 모든 사안에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단순한 실존(mere existence)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 신비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진 이 단순한 실존, 우리의 외모나 우리의 정신적 재능을 포함하는 이 단순한 실존은 단지 우정 및 공감 같은 예상할 수 없는 우연이나 위대하고 계산 불가능한 사랑의 은총에 의해서만 적절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은총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네가 존재하기를 원하노라”(Volo ut sis)라고 말하지만, 이처럼 지고하고 넘어서기 어려운 긍정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이유를 제시할 수는 없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301; 󰡔전체주의의 기원󰡕, 539쪽.]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독창적인 독해에 근거한 사랑의 은총의 문제는 일단 제쳐둔다면,[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독해를 탄생성(natality)의 두 번째 원칙으로서 “주어짐”(givenness)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Peg Birmingham,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3장 참조.] 아렌트가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경험 및 권리 없는 사람들의 재난에 대한 성찰에 입각해서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단순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존재자가 그러한 단순한 실존에 입각하여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고 주장할 수 있는 시민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이 말한 바 있는 호모 사케르 또는 무젤만을 연상케 하는) 이러한 단순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특성 없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식별 가능한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인간, 따라서 익명성과 타자성 또는 독특성(singularity)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타자로서의 타자, 익명적 독특성을 지닌 인간, 따라서 공동의 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에게는 낯설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이 단순한 실존의 인간 존재자에게 걸맞은 시민성은 어떤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문제는 평등의 문제설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단순한 실존으로서 타자는 평등 속에서의 차이를, 평등한 익명성과 다른 비밀로서의 익명성을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의 문제는 데리다가 말한 데모스의 이중적 측면을 어떻게 ‘결합할’(그런데 과연 여기서 이 동사가 적절한 것일까?)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데모스는 모든 ‘주체’에 선행하는, 아무개의 계산 불가능한 독특성입니다. 데모스는 시민이라는 자격 모두를 넘어, 모든 ‘국가’를 넘어, 나아가 모든 ‘인민’ 심지어는 ‘인간’ 생명체로서의 생명체라는 현 상태의 정의를 넘어, 존중할 만한 비밀을 지닌 사회적 탈유대(déliason)입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데모스는 보편성입니다. 합리적 계산의 보편성, 법 앞에서 시민들이 갖는 평등의 보편성, 계약을 통해 또는 계약 없이 이루어진 공동 존재의 사회적 연관 등등입니다.[자크 데리다, 「상징적이고 실재적인 자살」, 지오반나 보라도리,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219~20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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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9-02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나키즘이 굳이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보편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개별적인 또는 구체적인 어떤 "것들"이 있을 뿐이다. 무한한 차이 또는 다양성이 있을 뿐이다.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관념이나 개념이 "보편적"일 뿐이다.

웃기는 것은 그 보편성마저도 유럽중심주의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덧붙여 보편성을 죽어라 강조하는 것은 보편주의로 빠지기 쉽다.

보편주의가 다양한 차이를 억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령 유럽의 기독교가 차이를 억압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안녕하세요 2014-01-19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좀더 외연이 넓은 초국민적인 국가 및 일종의 세계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 그 국가나 정부는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체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축소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는(곧 배제하려는) 경향"과 '그 어떤 정치체이건 그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같은 소리를 다르게 표현할 뿐인 것처럼 들립니다.

어떤 공통된 기반이 있다는 것과 차이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모순적인 것이 아니며, 만약 '인간의 인간됨'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 부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기원을 갖지 않는다면(이 둘은 제가 강하게 동의하는 명제인데) 존재하는 '차이들' 역시도 앞서 말한 상호적인 의미부여 외의 다른 기원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하신 익명성, 타자성, 독특성과 같은 사항들 역시도 이러한 동일한 상징 체계, 분명히 어떤 특정한 사회의 어떤 의미에 의한 것이며 바로 그 특정한 사회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성으로부터 배제된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시민들의 입장에서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난민 그 자신이 난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난민들 그 스스로는 시민성이 인간성에 선재한다는 식으로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바가 곧 인간됨의 내용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요.) 그렇다면 문제는 포함되었다고 가정된 자들 속에 있는 포함되지 않은 자들에 대해 시민이 갖고 있는 문제인데, 그렇다면 문제는 단지 생물학적으로 인간인 존재를 (시민의 입장에서)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의무감과, 법적/정책적으로는 도저히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우며 심지어는 그것을 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 사이의 괴리,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함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동일한 정치체 안에서 서로 간의 차이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은 바로 그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한다는 것이 결국 그들 자신의 문화적 상징 체계 내에서조차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루어지곤 합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의 차이를 강조하고 그들 사이의 차이와 대립을 '있는 그대로 두고 아무런 정책적인 노력도 하지 말라'는 주장은 부적절하고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게까지 들리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독립 직후, 심지어는 네루 사후까지도 인도에서 국민회의파가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각자의 차이로 인해 심각한 지역적 분쟁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부적절한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민과 시민권을 가진 자 사이의 차이 역시도 절대적인 것이거나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며, 만약 난민들이 차이를 없애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고유하고 특수한 정체성이 정당하며 자신이 그러한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지 '보편적으로 차이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조건으로 인해 내 차이를 상대도 인정해야 하고, 그래서 나도 내 특수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만약 난민들이 어떤 차이를 없애기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시민권을 부여받았다면, 이러한 제안을 하거나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의 활동이 왜 거부되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배타성 역시도 얼마간 바로 그 정치체의 속성으로 현시되고 있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정부 같은 것이 들어서서 차이를 제거하려는 행동, 즉 어떤 특수한 공통성을 부여하려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대체 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요컨대 인간됨의 보편성을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먼저 그 정치체에서 합의가 이루어져있는지, 만약 이루어져 있다면 어느 정도의 수준과 강도에서 합의가 이루어져있고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난민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가 '인권의 보편성'을 단지 가정하는 문제보다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탈유대'가 데리다가 말한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항상 이미 어떤 유대, 어떤 의미부여, 어떤 공적 상징체계가 미리 존재해야만 하지 않나요? 전 이러한 논의가 한 사회 내적인 의미 구조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내지는 주장이라면 그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환영하고, 또 그러한 주장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 내에서, 한 개인의 자격으로 전 '배제 당한 이들'의 권리를 위한 주장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만들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자로서 공적인 합의 형성 이전에 그와 같이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데모스가 곧 사회적 탈유대라는 주장은 순순히 인정하기 어렵네요...

balmas 2014-01-19 21:2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님. 글을 읽고 긴 댓글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을 읽어보니, 아마도 제가 글의 맨 마지막에 인용한 데리다의 글에 기반하여 이 글의 논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안녕하세요 님의 논지가 무엇인지 썩 분명하게 읽히지가 않습니다. 데리다가 말하는 "사회적 탈유대"로서의 데모스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문제제기인지, 또는 이런 데리다의 주장이 자유주의적인 틀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글의 마지막에 데리다 인용문을 제시한 것은, 사실 제가 상반기에 논문으로 발표하려고 준비중인 다른 글, 랑시에르와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비교하는 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 글에서 데리다 인용문의 의미를 조금 더 상세히 해명하고 있는데, 아마 그 글을 보지 못한 안녕하세요 님에게는 마지막에 나오는 데리다 인용문이 다소 뜬금없게 읽힐 수 있었을 듯합니다. 그래서 혹시 안녕하세요 님의 댓글이 데리다 인용문에 관한 문제제기라면, 지금으로서는 조만간 발표될 그 글을 참조하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지난 1학기에 한국외국어대학 철학과 대학원에서 "푸코와 통치성"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1학기 강의에 이어서 2학기에는 "푸코와 신자유주의"라는 주제로 강의를 더 하게 됐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강의계획서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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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학기 외대 철학과 대학원 강의계획서

 

 

I. 강의 주제: 푸코와 신자유주의

 

II. 강의 목표

 

이 강의는 1학기 강의와 연속적으로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고 토론한다. 지난 1학기 강의에서는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5-76), 󰡔안전, 영토, 인구󰡕(1977-78)를 읽었는데, 이번 학기 강의에서는 󰡔생명정치의 탄생󰡕(1978-79) 및 관련 자료들을 함께 다루고자 한다. 󰡔생명정치의 탄생󰡕은 특히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현대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특징을 정확히 파악해내고 있으며, 이 때문에 푸코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연구자들에게 많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강의에서는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분석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위해 지닌 의의 및 한계, 대안이 무엇인지 논의해보고자 한다.

 

III. 강의 일정

 

 

1주. 강의 소개: 푸코와 신자유주의 분석

 

2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2강: 자유주의적 통치술

 

3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3-4강: 자유주의적 통치술

 

4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5-6강: 독일의 신자유주의

 

5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7-8강: 독일과 프랑스의 신자유주의

 

6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9-10강: 미국의 신자유주의

 

7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11-12강: 호모 에코노미쿠스

 

8주. 푸코 통치성 이론과 신자유주의

 

9주. 푸코 신자유주의 분석의 의의

 

10주. 푸코 신자유주의 분석의 쟁점

 

11주. 푸코에 대한 비판 I: 신자유주의자 푸코?

 

12주. 푸코에 대한 비판 II: 이론적 난점

 

13주. 푸코에 대한 비판 III: 방법론적 난점

 

14주 푸코 분석의 확장

 

15주. 통치성 이론과 정치

 

16주. 푸코와 베커

 

 

IV. 참고문헌

 

1. 푸코의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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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타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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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수강자 참고 사항

 

1. 처음 2주는 강사가 수업 전체의 내용을 소개한 뒤 3주차부터는 수강생들의 발제와 토론을 통해 수업을 진행한다.

수강생들은 각자 수업 일정에 따라 발제를 맡고 발표 및 토론 준비를 한다.

수강생들은 3 차례 1쪽짜리 미니 페이퍼를 제출해야 하며, 기말 페이퍼를 제출해야 한다.

 

2. 참고문헌에 대한 자세한 활용 방법은 첫 수업시간에 따로 제시될 것이다.

 

3. 평가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발표와 토론 (30%)

미니 페이퍼 (30%)

기말 페이퍼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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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뉴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54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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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만원 2013-07-24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참에 시공사 책을 추천하거나 선전한 이른바 진보적인 지식인도 압수 수색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발마스 님 아직도 전두환의 시공사에서 나오는 책을 추천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