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총서 10권으로 인도의 서발턴 이론가 빠르타 짯떼르지의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가 나왔습니다.

 

짯떼르지는 포스트식민주의나 서발턴 역사학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너무 잘 알려진 학자고,

 

국내에도 이미 그의 논문 몇 편이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로는 이 책이 첫번째로 번역된 책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첫번째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의 사상의 토대를 제시한 이 책이 나오게 돼서

 

총서의 기획자로서 매우 기쁩니다.

 

앞으로 이 책은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짯떼르지의 책이 출간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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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4-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냥 '차터지'라 해도 상관 없을 걸요. 이광수 님은 인도인들이 그런 식으로 발음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내가 알기로는 인도에서도 그런 식으로 발음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고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언제 나옵니까?

쾅! 2013-04-12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민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면 "국민주의"라고 번역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여튼 엿장수 마음대로라니까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스피노자 [에티카] 강의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올해 1년 동안 [에티카] 전체를 수강생들과 함께 통독해볼 생각인데,

 

이번 1학기에는 우선 가장 난해하다고 하는 [에티카] 1부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안연구공동체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paideia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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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연구공동체 스피노자 에티카 강의 계획서

 

 

 

I. 강의 목표

 

이 강의에서는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를 강독할 계획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 인문학자, 문학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그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책이다. 특히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고, 알튀세르,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같은 철학자들이 스피노자 철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면서 스피노자는 현대 철학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비의적(秘意的)인 언어와 난해한 내용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이 현대 사상에서 널리 논의되고 있음에도, 󰡔에티카󰡕를 비롯한 스피노자 저작을 실제로 읽고 논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처음 접근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우리가 그 해석의 통로를 찾아낸다면 우리에게 깊은 통찰과 의미를 전달해주는 책이다. 특히 ‘윤리학’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의 질서와 문제들에 관해 생생한 실존적인 가르침을 전해준다. 따라서 󰡔에티카󰡕를 통독해보는 것은, 철학의 깊은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나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문제들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도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는 1년의 기한을 두고 󰡔에티카󰡕를 완독해보려고 한다. 2013년 봄학기에서는 우선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개관을 거친 다음, 󰡔에티카󰡕 1부를 읽어볼 생각이다.

 

 

II. 교재 및 참고문헌

 

1. 교재

 

Benedictus de Spinoza. Ethica, in Spinoza Opera, vol. II, Carl Winter Verlag, 1925.

         . Ethics, trans. Edwin Curley, Penguin Books, 2005.

         .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수강생들을 위해 국역본을 중심으로 강의할 계획이지만,

될 수 있는 한 Edwin Curley의 번역본을 함께 참조하도록 권합니다.

 

2. 참고문헌

 

진태원. 󰡔스피노자 또는 관계론의 철학󰡕, 도서출판 길, 2013(예정).

Allison, Henry E. Benedict de Spinoza: An Introduction, Yale University Press, 1987.

Gueroult, Martial. Spinoza, vol. 1, Le Dieu, Aubier, 1968.

        . Spinoza, vol. 2, L'âme, Aubier, 1974.

Lloyd, Genevieve. Routledge Philosophy Guide Book to Spinoza and the Ethics, Routledge, 1996.

마슈레, 피에르.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

        . Introduction à l'Ethique de Spinoza, vol. 1, PUF, 1999.

Matheron, Alexandre. Études sur spinoza et les philosophes de l'âge classique, ENS-LSH Éditions, 2011.

Nadler, Steven. 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III. 강의 일정

 

 

* 2013년 1학기 일정

 

(이 일정은 사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3월 6일 (수) 스피노자 철학 개관

 

 

3월 13일 스피노자의 정치철학 개관

 

 

3월 20일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현대적 해석

 

 

3월 27일 󰡔에티카󰡕 강독 ― 1부 정의들

 

 

4월 3일 󰡔에티카󰡕 강독 ― 1부 공리들

 

 

4월 10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 ~ 정리 7

 

 

4월 17일 󰡔에티카󰡕 강독 ― 정리 8 ~ 정리 10

 

 

4월 24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1 ~ 정리 14

 

 

5월 1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5 ~ 정리 17

 

 

5월 8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8 ~ 정리 27

 

 

5월 15일 󰡔에티카󰡕 강독 ― 정리 28 ~ 정리 32

 

 

5월 22일 󰡔에티카󰡕 강독 ― 정리 33 ~ 정리 36

 

 

5월 29일 󰡔에티카󰡕 강독 ―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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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3-03-0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ㅡ, 너무 재밌겠어요. 1년간의 에티카라니. 중간부터 들어도 괜찮은가요.

balmas 2013-03-04 16:50   좋아요 0 | URL
예 괜찮습니다.^^

쾅! 2013-03-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예 라틴어본을 중심으로 강의하는 것은 어떨까요? 오히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스피노자가 라틴어의 달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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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의 천사-멘붕의 정치학, 유령들, 메시아주의

 

 

역사의 천사

 

발터 벤야민의 철학적 유언이라 불리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또는 「역사철학테제」라 불리기도 한다) 중 9번째 테제는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인 「새로운 천사」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339쪽)

 

이제 클레의 그림은 벤야민의 테제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그 그림을 보면 벤야민을 떠올리게 되고, 벤야민을 생각하면 또 그 그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나는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이견을 지니고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정세를 겪으면서 그의 테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라고 불리는 폭풍 앞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파국을 막아보려고 하는 역사의 천사, 하지만 그럴수록 발 앞에 쉼 없이 잔해가 쌓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역사의 천사를 생각하게 된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반동 세력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8번째 테제. 앞의 책, 337쪽)이라고 말한다. 곧 파시즘의 적이 파시즘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싸움을 벌이는 한, 언제나 승리자는 파시즘, 반동 세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성격이 무엇인지, 거기에서 승리와 패배를 규정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숙고하려는 사람이라면 한번 곱씹어볼 만한 테제다.

 

 

어떤 멘붕

 

‘멘붕’이라는 용어는 이제 은어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공용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이 말이 일간신문에까지 종종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알다시피 ‘멘탈 붕괴’의 줄임말인 멘붕은 어떤 놀라운 일을 겪었거나 심하게 좌절감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넘어 멘붕이 사회적 공용어가 되게 해준 계기는 아마도 지난 18대 대선이었을 것이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음에도, 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부터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대선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내가 이런저런 사석에서 만나본 사람들도 대개 이번 선거에서는 야권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물론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늘 앞서 나갔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숨은 야권표가 10%는 될 것이며, 주로 집전화로 이루어지는 여론조사는 핸드폰 사용자인 젊은이들이 빠져서 신빙성이 없다고, 야당 후보는 늘 바람을 통해 막판에 뒤집기 마련이라고, SNS 상에서는 게임도 되지 않는 상태라고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더욱이 선거 당일날 투표율은 이미 오전부터 최근 선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게 나타났다. 투표율이 높을수록 야당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선거의 공식인 만큼 이러한 예상은 점점 현실화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다 알다시피 이런 낙관적인 기대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근소한 표 차이로 여당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지상파 방송 3사의 합동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일차적인 실망감이 터져 나왔으나, 그래도 출구조사는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우니 끝까지 결과를 지켜보자는 의견들이 SNS와 인터넷 댓글에 속출했다. 하지만 그러한 초조한 인내심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거일이 지나가기 전 여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이라는 자막이 지상파 방송에 떴고, 그것으로 결과는 끝이었다.

 

‘멘붕’의 고통을 호소하는 트위터와 댓글이 순식간에 온라인을 뒤덮었다. 그리고 놀라운 결속력으로 여당 후보를 지지하고, 결국 당선시킨 50~60대 여당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의 말들이,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저조했던 20대 젊은이들에 대한 비아냥과 불평의 글들이 넘쳐 났다. 야권 후보를 지지하고 그가 당선되기를 목놓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나긴,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필자가 1987년 겨울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탔던 지하철 풍경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놀랍게도 지하철은 적막 그 자체였다. 역의 이름을 알리는 안내방송 말고는 열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초췌하고 피곤한 눈길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거나 선 채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웃음소리도 불평 소리도 사소한 다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집단적 좌절감이 어떤 것인지 그날의 적막한 고요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대선에서 사람들이 겪었다고 하는 ‘멘붕’은, 야박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이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거의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주변의 지인들이 선거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낙관에 들떴을 때도 냉담한 기분이었고, 참담한 결과에 고통스러워할 때도 담담한 기분이었다. 이번 선거의 승리와 패배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승리했느냐 패배했느냐보다는 어떤 승리이고 어떤 패배인가가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그렇다.

 

유령들의 싸움

 

이번 대통령 선거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들의 싸움이었다. 여당 후보로 육화된 박정희의 유령과 야당 쪽에서 불러내려고 애쓴 노무현이라는 유령이 싸움을 벌인 선거였다. 노무현이라는 유령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일까, 아니면 박정희의 유령의 위력이 여전히 거대했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망령의 위험을 경고하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대표하는 노무현의 유령은 경제발전을 대표하는 박정희의 망령을 당해내지 못했다.

 

사실 노무현은 경제발전이라는 망령과 맞서 싸우기에는 상당히 허약한 유령이다. 그가 5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수행했던 통치는 그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유령으로 불러올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대단히 민주주의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권력 분립을 위해, 지방 자치를 위해, 남북 관계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노동자들의 표현의 자유에는 재갈을 물렸고, 재벌의 권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고, 황우석을 위해 피디수첩을 공격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는가와 별개로, 그는 민주화의 유령,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대통령이었다.

 

반대로 박정희는, ‘진보’ 역사학자들 및 언론 매체의 지속적인 비판과 축귀(逐鬼)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유령이라는 점이, 그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왜 박정희의 유령이 그토록 강력한 것일까? 이미 사망한지 3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왜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박정희 집권 당시에 이룩된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경제가 어렵고 사람들의 삶이 팍팍할수록, 돈벌이가 잘 되고 취직 걱정이 없고 나날이 살림살이가 좋아져 간다고 느끼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진다. 5년 전 이명박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도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면서 경제 대통령을 내세웠던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바람은 과연 ‘그들’만의 문제였을까? 그들과 대립하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우리들’은 과연 ‘그들’과 다른 바람, 다른 향수를 갖고 있었을까? ‘그들’과 ‘우리들’을 가르는 경계선은, 경제 발전 대 민주화가 아니라, 사실은 경제 발전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아니, 동일한 경제 발전에 대한 욕망을, 한 쪽은 좀더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반면, 다른 한 편은 ‘민주화’라는 어색한 수사법으로 애써 둘러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적 메시아주의

 

사실 노무현이 박정희의 유령에 맞서기에는 불안하고 역부족인 유령이라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노무현도, 문재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안철수라는 새로운 메시아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노무현이 생각지도 않게 2002년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또 절대적으로 불리하리라던 여론조사를 뒤집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올랐던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누군가가 다시 한 번, 극적으로 자신들의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링에 올라보기도 전에 밀려났고, 어쩌면 그것으로 18대 대선이라는 유령들의 싸움은 이미 결정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안철수에게서, 또는 그 뒤에는 마지못해 문재인에게 기대했던 희망과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것,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 발전의 기적을 순조롭게 지속해가되 거기에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들이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대했던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복지국가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초를 잠식하며 시장(또는 자본)의 명령에 순종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하고 있는 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란 사실은 사회의 약자들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한 복지국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복지국가일까? 그리고 그러한 복지국가는 박정희의 유령을 내세운 이들도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선거 결과에 멘붕을 했던 이들은 무엇 때문에 멘붕을 한 것일까? 그리고 멘붕을 한 이들은 어떤 계급의 사람들일까?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여러 노동자가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불과 며칠 사이에 연이어 자살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선거 결과를 기다렸을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기대했던 그 메시아는, 과연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가치가 있는 메시아였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진보가 있을까 질문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거 직전 한겨레 신문이 좌파 메시아주의의 아이콘 중 한 사람인 알랭 바디우를 동원해 야당 후보를 지원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통해 고통스럽게 말했듯이, 적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서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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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마다 2013-03-10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볼때마다 마음에 걸렸는데 포스트 제목이 "멘붕의 정치학"이 아닌 "벤붕의 정치학"입니다. 수정 완료하시면 이 댓글은 지우겠습니다.

balmas 2013-03-10 21:42   좋아요 0 | URL
하하 지적 감사합니다. 저는 여태 그런 줄 몰랐네요.^^

쾅! 2013-03-2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거 자체가 민주주의가 상관 없다고 보는 제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글입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는 "광란(狂亂)의 댄스"로 보는 제 入場에서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일단 제 입장은 제쳐 두고 발마스 님께서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의미" 있다고 주장하셨던 걸로 여전히 기억하는데 이 글을 읽어 보니 묘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투표를 독려하면서, 몇 살까지 젊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35나 33 아니면 29라 해도 다 이의 제기가 있을 겁니다. 제 기준으로는 18살까지가 젊은이고 그 이상은 늙은이입니다! 1980년대에 투표권이 있었던 사람은 "화석" 같은 사람들이죠. 엄밀하게 따지면 박정희가 죽은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전 그 기간을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의 정신 상태가 이상했던 기간을 늘려서 뭐 하겠습니까? 그것도 2년이나!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이명박은 6년이나 7년 동안 대통령이었던 거지요.)





쾅! 2013-03-29 20: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선거 자체가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셨던 걸로 압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발마스 님에게 비판당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발마스 님이 지지하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 자체에는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도대체 이 글은 뭡니까?

발마스 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에 100%에 참여해서 백지투표를 하거나 모두 기권표로 만드는 것밖에 없을 듯 합니다.

선거 자체가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알송달송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셨던 걸로 압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발마스 님에게 비판당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발마스 님이 지지하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 자체에는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도대체 이 글은 뭡니까?

발마스 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에 100%에 참여해서 백지투표를 하거나 모두 기권표로 만드는 것밖에 없을 듯 합니다.





저와 발마스 님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저도 바디우의 종교적 냄새가 풀풀 나는 메시아주의는 별로입니다.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성장 이데올로기나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지요.

벤야민은 한마디로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진보라는 개념 또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벤야민을 끌어 들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저와 발마스 님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저도 바디우의 종교적 냄새가 풀풀 나는 메시아주의는 별로입니다.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성장 이데올로기나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지요.

벤야민은 한마디로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진보라는 개념 또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벤야민을 끌어 들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文明 자체가 이미 야만이라고.

수많은 약자들을 생산해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진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어내고 권력관계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그 개념은 국가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도 그 문명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文明 자체가 이미 야만이라고.

수많은 약자들을 생산해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진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어내고 권력관계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그 개념은 국가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도 그 문명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발마스 님의 비판 자체는 타당하다고 보는데 발마스 님의 선거에 대한 기존의 입장 때문에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여 선거에 참여하라! 하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선거 자체를 잊어라!

이 뜻인가요?

선거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서 지지후보가 있고 선거 독려를 하신 후에, 스스로 선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시네요.

저는 발마스 님에게 비난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발마스 님의 비판 자체는 타당하다고 보는데 발마스 님의 선거에 대한 기존의 입장 때문에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여 선거에 참여하라! 하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선거 자체를 잊어라!

이 뜻인가요?

선거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서 지지후보가 있고 선거 독려를 하신 후에, 스스로 선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시네요.

저는 발마스 님에게 비난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쾅! 2013-03-2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 제비뽑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국민 100%가 참가해서 제비뽑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발마스 님이 말씀하신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누구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으니 민주주의라고 우길 수 있으며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현실은 쉽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멘붕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치는 김에 장관이나 차관도 제비로 뽑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한 문제점은 발마스 님이 제비뽑기로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에 에티카 강의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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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비판과 정치적인 것

 

클로드 르포르-정치적인 것의 발명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Claude Lefort, 1924~2010)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e ou Barbarie)라는 급진 좌파 정치 집단을 이끌다가, 맑스주의에 본래적인 전체주의적 한계를 절감하고 반(反)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애쓴 정치철학자다. 따라서 그는 197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 강령 정책에 맞서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 피에르 노라(Pierre Nora),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등이 주도한 반전체주의적 자유주의 운동의 일원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그의 이론적 지향은 이들과 구별되는 독특성과 급진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민주주의 해석의 독창성은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프랑스어에서 정치를 가리키는 단어는 라 폴리티크(la politique)이며, 르 폴리티크(le politique)는 원래 ‘정치가’를 뜻하는 말이다. 반면 르포르는 경제나 사회 또는 문화와 구별되는 인간 활동의 한 영역을 지칭하는 정치와 구별되는 좀더 근원적인 차원, 곧 어떤 사회를 하나의 사회로 성립하게 해주는 상징적 차원을 가리키는 말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정의한다. 특히 ‘정치적인 것’은 정치적 근대성 및 그것을 창설한 프랑스혁명의 새로움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고안되었다.

 

르포르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그것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따라서 그것이 하나의 사회로 성립하게 해주는 상징적 장소를 지니고 있다. 근대 이전에 이러한 상징적 장소는 우주론적 질서나 관습적 의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면, 절대주의 시기에는 현실적인 왕의 신체와 구분되는 영구불멸한 상징적인 신체에 놓여 있었다. 실제의 왕이 죽거나 대체된다 하더라도 이러한 상징적인 왕의 신체, 주권(주권(sovereignty)은 원래 ‘지고한 힘’(suprema potestas)을 뜻한다)의 장소가 보존되는 한, 사회의 통일성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설립된 근대성의 특징은, 이처럼 사회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적 중심의 자리를 비워버렸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왕의 머리 베기’). 혁명을 통해 비워진 이 자리를 둘러싸고 근대의 두 가지 정치 체제인 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가 각자 상이한 해법을 제시한다. 전체주의는 이 자리에 왕을 대신하는 새로운 통일체, 곧 주권적 인민을 위치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상의 인민은 다양하고 분할된 집단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통일성을 부과하기 위해 폭력과 억압을 수반하기 마련이며, 더 나아가 당이나 수령 같은 또 다른 유사 초월적인 통일체로 인민을 대체하게 된다.

 

반면 민주주의는 이 빈 자리를 채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비워둔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양한 행위자들 및 원칙들이 이러한 상징적 통일성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지만, 그 어떤 집단이나 원칙도 이 자리를 영원히 차지할 수는 없다. 특정한 행위자나 집단이 내세우는 원칙은 이러한 빈 자리를 메우는 상상적인 봉합물일 뿐이며, 비어 있는 상징적 중심과 현실적 분할 사이의 괴리를 메울 수 없다. 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르포르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 특징은, 권력의 중심을 비워둠으로써, 어떤 사회가 고안해내는 자기 재현의 통일성과 그것의 현실적인 다양성 사이의 간극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정치적인 것에서 봉기적 시민권으로 

 

이렇게 보면 르포르의 정치철학은 한편으로 꽤나 자유주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상당히 비관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실제로 르포르의 후계자 중에는 마르셀 고셰 같은 자유주의 이론가나 피에르 마낭(Pierre Manent) 같은 보수주의 이론가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는 얼마간 사실이다. 하지만 르포르 이론의 독창성은 자유주의적인 전유로 소진되지 않는다.

 

이 점을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에티엔 발리바르다. 발리바르는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발표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윤소영 엮음,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이라는 글에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선언](1789)의 독창성을 재해석하면서 르포르의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봉기적 시민권 개념으로 정정하고 확장한다.

 

발리바르는 르포르와 마찬가지로 근대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환원하려는 맑스주의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맑스는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한계를 인간과 시민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괴리에서 찾는다. 곧 민주주의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고 있지만, 현실에서 그 인간들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소유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등한 정치적 권리란, 현실적인 사회적ㆍ경제적 모순을 은폐하는 기만이거나 수사법에 불과하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르포르를 좇아 [인권선언]에서 제시된 권리 개념의 새로움을 강조한다. [인권선언]의 권리 개념은 고전적인 자연권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계보학적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가령 에른스트 블로흐). 하지만 고전적인 자연권 이론과 달리 [인권선언]의 권리는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적 인간의 본성’에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성원인 시민에 근거를 둔다. 곧 인간이 지닌 본래적인 권리란 시민들이 서로에게 부여하고 서로 인정해주는 권리를 뜻한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은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존재자가 아니며, 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현실과 가상의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양자는 정확히 동일한 존재자를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이를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

 

또한 발리바르는 근대의 인민 주권은 절대주의 시기의 초월적 주권의 모방물에 불과하다는 마르셀 고셰의 테제를 반박한다. 인민 주권은, 주권자와 신민 사이의 위계적 불평등에 기초를 둔 고전적인 주권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용어모순적인 평등한 주권을 가리킨다. 이는 정치 공동체의 궁극적인 토대란, 자연적인 것도 초월적인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공동의 선언에 있으며, 이러한 권리를 지키고 확장하려는 시민들 자신의 행위에 있음을 뜻한다. 곧 인민주권이란 근대 정치의 최고 원칙으로서 시민들의 평등한 자유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발리바르는 이를 ‘평등자유’(equaliberty)라는 신조어를 통해 표현한다.

 

따라서 르포르가 상징적 통일성과 현실적인 분열 사이의 괴리를 강조할 때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인권선언]에서 표방된 권리가 제도화된 법적 틀을 넘어선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법적ㆍ제도적인 틀을 기초 지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틀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권리의 창조를 촉발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원천을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르포르의 주장을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정정하고 보충한다. 우선 발리바르는 [인권선언]이 혁명적인 선언이고, 봉기적 행위였음을 강조한다. 발리바르가 말하는 봉기(insurrection)는 단순한 반역이나 반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헌정과 단절하고 새로운 헌정을 창조하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모든 헌정은 이러한 봉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로부터 자신을 쇄신할 수 있는 정치적 동력을 얻는다.

 

둘째, 발리바르는 정치와 정치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봉기의 정치헌정(constitution)의 정치의 관계로 재규정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르포르와 달리 봉기를 통해 형성된 헌정의 정치, 제도적인 정치를 가리키게 된다. 이로써 봉기와 헌정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좀더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셋째, 발리바르는 르포르와 달리 ‘정치적인 것’을 위해 사회적인 것, 또는 계급투쟁의 문제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에 의한 노동 계급의 지배(및 인간학적 차이에 근거를 둔 다른 지배)를 정치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간주한다. 정치는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자율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조건들 속에서 정치를 이해할 때에만 정치의 쟁점과 그 주체 또는 주체화의 문제가 좀더 정확히 규정될 수 있다. 르포르는 정치의 자율성과 근대 민주주의의 새로움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지만, 정치를 지배의 문제와 연결하고, 주체화의 쟁점과 관련짓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발리바르의 이론적 독창성(중 일부)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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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이분법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르포르라는 인간은 홉스봄하고 비슷한 인간이 아니었나 싶다.
 
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 철학의 정원 8
문성원 지음 / 그린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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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내는 [코기토]라는 학술지에 수록될 서평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나지 않은 글이니까, 이 글에 대해 논평하거나 토론할 분은

[코기토]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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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

 

 

문성원 교수(이하 필자로 약칭)는 사회철학 전공자나 프랑스철학 전공자에겐 낯익은 이름이다. 루이 알튀세르에 관한 학위논문({철학의 시추}, 백의, 1999)에서 {배제의 배제와 환대}(동녘, 2010)를 거쳐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에 이르기까지, 필자는 줄곧 현대 프랑스 철학과 사회철학이 만나는 자리에서 사고하고 글을 써왔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에 입각한 사회철학이 필자의 주요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필자의 이러한 지향이 좀더 뚜렷이,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레비나스의 철학에 대한 필자의 애정과 관심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성격을 레비나스에 기반을 둔 사회철학의 모색이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이 책은 전체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타자와 책임”이라는 주제 아래 5편의 논문을 싣고 있으며, 로컬리티, 주변, 책임, 이웃, 윤리의 문제에서 타자라는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고 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하고 있다. 2부는 “새로움과 윤리”라는 제목에 따라 4편의 논문을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용서라는 문제와, “잘 있음”을 넘어서는 “있음과 달리”로서의 윤리의 문제, 시간과 새로움이 함축하는 윤리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의 핵심적인 철학적 입장이 표명되고 있는 곳은 바로 2부라고 할 수 있다. 3부는 “표현과 욕망”이라는 표제 아래 이미지, 차이, 욕망과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요 주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마지막 4부에서는 “진리와 정의”라는 제목 아래 좀더 거시적인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4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의 이전 저작들의 문제의식과 좀더 맞닿아 있는 반면에, 1부와 2부에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좀더 최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질서에 대하여 프랑스 철학,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이 어떤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7쪽)를 제공해줄 수 있을까라는 화두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화두와 관련하여 이 책은 들뢰즈(ㆍ가타리)냐 레비나스냐라는 대결 구도를 논의의 줄기로 삼고 있다. 이는 필자가 보기에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해체론적인 사상, 곧 “유동성과 끊임없이 ‘차이지는 차이’가 근본적임을 입증하는 것이 이들의 지향이며, 짐짓 고정되어 보이는 영토와 체계를 부단한 탈영토화의 운동을 통해 흔들어 놓는 것이 이들의 추구하는 바”(103쪽)인 반면, 레비나스는 “변화를 수용하는 열림의 자세와 아울러 그러한 변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109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ㆍ가타리의 사상이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움을 기대하고 희구하는” 사상인 반면(필자에 따르면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역시 “어떤 정해진 해결책이나 정의의 상태가 아니라 약속의 이루어짐에 대한 기다림”(160쪽)이라는 점에서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궁여지책”(161쪽)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나타내는 타자 개념과 더불어 그 새로움의 해악을 막는 윤리라는 기준을 제시해준다는 것이 이러한 대결 구도가 함축하고 있는 논점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질서”(109쪽)는 때로는 주변-중심의 관계로 표현되기도 하고, 의사들의 파업 사태로 인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거래 관계에 지나지 않”는 “호혜성의 문제”(59쪽)로 이해되기도 하고, 다위니즘에 기반을 둔 경쟁 이데올로기로 나타나기도 하며, 나르시시즘적인 욕망(3부 3장)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를 넘어서는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과 윤리 개념은, 필자에 따르면 대단히 포괄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다.

 

이런저런 기회에 필자의 글을 접해온 평자에게 이 책은 필자의 지적인 미덕 몇 가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현실에 기반을 두고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려는 필자의 지속적인 태도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철학자가 한국의 현실에 입각하여 사유하고 성찰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글을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실제로 이렇게 한국이라는 레퍼런스에 뿌리를 두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철학자, 특히 프랑스 철학 전공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철학, 한국의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보다는 그 철학적 고향들인 독일, 미국, 프랑스에 있으며, 그 고향들을 자신들의 레퍼런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들의 삶을 레퍼런스로 삶기에는 그들의 사유가 아직 허약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필자의 일관된 철학적 태도는 매우 드물고 값진 것이라 할 만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은 명확하면서 유려한 글쓰기를 꼽을 수 있다. 이점 역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러저러한 철학적인 주제에 관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필자 자신의 선명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면서 정확히 논의를 전개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글과 같이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철학적인 글은 설렁설렁 되는 대로 쓰이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을 거쳐 숙달된 문체의 힘과 더불어 일관되고 깊은 문제의식이 곁들여 있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젊은 철학도나 인문학도에게 교과서와 같은 모범이 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평자가 이 책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나 불만, 또는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자는 줄곧 불만이나 의문을 품으면서 이 책을 읽었고, 그것은 서평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필자의 논의가 다소 개략적이라는 점이 불만스럽다. 필자는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알튀세르, 바디우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로티, 월저, 롤즈 같은 독일과 영미 철학자들에 관해서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 이들 철학자들 가운데 레비나스에 관해서만 비교적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뿐,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는 개략적인 인용과 논의 이외에는 깊이 있는 분석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필자 자신이 서두에서 지적하듯(8쪽),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개념과 이론을 빌려와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고해보려는 필자의 지적 관심에서 비롯한 결과일 수도 있다. 곧 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딪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론 자체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이 면밀하고 심도 있게 검토되고 설득력 있는 해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물론 아주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썩 훌륭한 결과가 산출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다. “해체와 윤리”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철학적 기반은 레비나스 철학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필자는 레비나스의 철학적ㆍ윤리적 의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레비나스의 철학은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현실 속에서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7쪽) 있으며, 로컬리티의 문제나 분단의 문제(1부 1장)에서도, 의약분업과 관련된 의사 파업의 문제에서도(1부 3장), 경쟁 이데올로기 극복의 과제에서도(1부 4장), 웰빙의 문제(2부 3장)에서도 레비나스는 우리가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철학적ㆍ윤리적 보고로 제시된다. 따라서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적 위력을 그처럼 높게 평가하고 있는 만큼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평자가 보기에 이 책에는 잘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 사상의 이런저런 개념들(타자 내지 타인, 전체, 무한, 향유, 거주 등)에 관한, 역시 잘 알려져 있는 이런저런 내용만 제시되고 있을 뿐, 레비나스에 관한 다른 글이나 저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무언가 새롭거나 독창적인 분석이 제시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평자로서는 레비나스를 그처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필자의 태도가 다소 놀랍다.

 

아마도 필자에게 레비나스 철학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이나 아니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인 준초월론(quasi-transcendentalism)에 비견될 수 있는, 아니 그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초월(론) 철학, 곧 타자에 입각한 초월(론) 철학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그것을 초월론적 주관성에 입각한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호혜성에 기반을 둔 상호주관성의 철학도 넘어서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에 입각해 있고, 타자의 독특성을 존중하는 매우 새로운 초월(론) 철학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필자가 레비나스의 철학이 이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실제로 논증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필자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이며, 그것은 호혜성에 입각한 서양 근대의 철학이나 현재의 삶의 질서를 넘어설 수 있는 지평을 제공해준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나와 타자의 관계는 비대칭적일뿐더러,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무한하”(115쪽)다고 말하고, “레비나스의 독특성과 무한은 ... 초월과 직결”(120쪽)된다고 말하면서도 굳이 레비나스 철학에서 종교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그것은 “윤리적 초월”(120쪽)이라고 역설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리적 초월과 종교적 초월 사이에 그처럼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는가? 유일자인 신과의 관계가 구체적인 이웃들, 이웃에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로 번역된다고 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초월성의 관계가 사라질 수 있을까? 레비나스가 타자와 관련하여 그 닿을 수 없고 넘어설 수 없는 초월성을 강조하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책임,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일상화하고 구체화할수록 그 초월성은 더 강화되는 것이 아닐까?

 

평자가 보기에 필자가 제시하는 레비나스는 신과의 초월적 관계를 새로운 휴머니즘과 도덕주의로 번역하고 싶어 하는 철학자,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철학자다. 특이한 점은 이웃을 사랑하되, 우선 나 자신과 내 가족을 돌본 뒤에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나 자신 및 내 가족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도 아니라, 나와 내 가족에 앞서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자아에 앞서야 하는 사랑이고, 동일성 중심적인 질서, 호혜적 관계를 넘어서는 무한한 책임의 모습을 띤 사랑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말하자면 테레사 수녀 같은 이에게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또는 “선명한 저항의 장소 또는 적어도 피난의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피난의 장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필자가 레비나스 철학이 신자유주의적 현실에 대한 저항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훨씬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자의 논의와 주장이 때로는 상당히 막연한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논의 자체의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우도 눈에 띈다. 가령 필자는 4장 1절에서 다위니즘을 “반목적론의 가장 대표적이고 강력한 형태”(77쪽)라고 말하면서, 의도적 목적을 내세우지 않고도 유기적 조직과 기능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을 다위니즘의 장점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위니즘이 “살아남음”에 초점을 두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음에 대하여 “사태를 지배하고 제어하는 원리의 자격”(79쪽)을 부여함에 따라, 오늘날 사회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필자가 다위니즘으로 지칭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윈 사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종류의 생물학 이론을 가리키는가? 또는 그 중에서 특정한 일부,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유전자 결정론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다윈 사상에 대한 통속화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가? 필자가 막연하게 다위니즘이라고 지칭하는 것만으로는 과연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경우 필자의 주장은 다윈 사상 전체 및 다윈 사상을 계승하는 여러 생물학의 흐름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윈주의 생물학은 무용한 학문인가? 또는 적어도 다윈주의 생물학 자체는 경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윈주의 생물학은 모두 배격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레비나스 철학은 다윈주의 생물학 전체와 대립하는 철학인가?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지만, 과연 필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들뢰즈ㆍ가타리의 철학이 후기-자본주의의 특징적 면모들과 부합하는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98쪽)거나 “들뢰즈ㆍ가타리의 사회철학은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비역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99쪽)라는 주장, 또는 데리다가 “이전에는 치열하게 비판했던 레비나스의 타자를 ‘환대’하게”(258쪽) 된다는 주장은 상당히 대담한 주장인데도, 필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들뢰즈ㆍ가타리에 관한 주장에 대해서는 주로 지젝이 후원자로 등장하지만, 지젝의 논의가 타당한 근거를 지닌 것인지는 검토되지 않으며, 데리다에 관해서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필자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흔히 ‘2차 문헌’이라고 하는 문헌들에 대한 검토나 논의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레비나스나 들뢰즈ㆍ가타리, 데리다 등에 관한 논의에서 언급되는 ‘2차 문헌’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필자의 주장이 기대한 만큼 충분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을까? 어떤 텍스트는, 특히 그것이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텍스트일수록, 그것이 남긴 흔적들, 또 그 텍스트 자체가 흔적을 이루는 그 이전의 흔적들과 분리될 수 없다. 그 흔적들의 연관망과 분리되면, 그 텍스트는 아주 빈곤한 것이 되거나, 더 나쁜 경우에는 흔히 ‘원전’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초월적인 타자, 찬미와 경배의 대상인 타자가 될 뿐, 분석과 해체, 산종(散種)의 텍스트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가 ‘2차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사실은 그러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노력의 다른 표현들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2차 문헌’에 대한 검토가 적다는 것은, 이 책에서 레비나스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이 아직 충분한 분석과 해체, 산종의 텍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의 이면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다음 번 책에서는 타자(들)에 대한 무한한 책임이 텍스트들의 해체와 산종의 움직임 속에서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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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3-29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리다를 읽기 위해서는 레비나스를 읽을 필요가 있죠.

레비나스를 읽다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그 헛소리에 사로잡혀 있죠.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깨려고 노력해야죠.

그렇다고 해도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또 다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