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출간될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 4호 머리말을 올립니다.
지난 1, 2, 3호와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도 유익한 글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호응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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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 4호를 내며
영국의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2011)라는 책에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던 신자유주의가 왜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서 활개를 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이론가, 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국내의 한 일간신문은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와 AIG가 파산을 하자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라는 커다란 제목을 단 기사를 낸 적이 있고, 그 뒤 다른 신문 및 언론 매체에서도 연이어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관한 보도를 한 바 있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제 드디어 신자유주의가 무너지는구나 하는 기대를 품었고, 신자유주의 이후 경제의 방향이 어떤 것이 될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제법 여러 가지 논의가 오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신자유주의는 전혀 사라지지 않고,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몰렸던 각종 금융사들은 오히려 위기 이전보다 더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좀비 신자유주의’라고 할 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콜린 크라우치 자신은 신자유주의가 위기를 통해 더욱 번성하게 된 이유를 오늘날에는 경제 및 더 나아가 정치까지도 거대 기업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시장 대 국가라는 (신자유주의 자신이 애호하는) 이원적인 구도를 통해서는 신자유주의의 성격 및 위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시장-거대 기업-국가(-시민사회)라는 삼원적 또는 사원적 구도를 통해 문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거대 기업의 활동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그 자신이 거대 기업 중심의 가버넌스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저런 분석 및 결론에 대하여 반드시 찬성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사실 그는 문제를 분석하는 데 훨씬 더 능숙하고 빼어난 학자다), 크라우치의 책은 마땅히 사라졌어야 함에도 여전히 좀비처럼 살아 움직이는 신자유주의의 생존의 비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서두에 크라우치의 책에 대해 길게 언급한 이유는,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 4호에 실린 여러 글들, 특히 세계 경제에 관한 특집에 수록된 글들 역시 ‘이상하게 죽지 않는 신자유주의’의 여러 측면을 분석하고 있고, 또 그것이 낳는 경제ㆍ정치ㆍ사회적 위기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내지 진보적인 학술지라면 이는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소멸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작동함으로써 생겨나는 문제점은, 실업률 및 삶의 불안정의 증가 같은 경제적ㆍ물질적 측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상적인’(또는 효율적인) 경제의 메커니즘으로, 더 나아가 정치와 문화 및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규준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18대 대선에서 반(反)신자유주의라는 쟁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대선에서 야권의 패배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일일 수 있다. 이제 정권이 어느 당파로 넘어가든 신자유주의는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경제적 논리이자 정치, 사회ㆍ문화적 기조로 정상화되고 있다는 사실의 징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세에서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이 무언가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이 학술지가 왜 신자유주의가 정상적인 경제 및 삶의 양식이 아니라, 아주 기형적이고 불평등한, 따라서 지극히 반(反)민주주의적인 사조이자 정책이고 삶의 규범인지 보여주는 좋은 분석과 논의, 증거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상황을 놓고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논의가 얼마간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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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호는, 이전 호들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분석과 유익한 정보,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글들을 풍성히 담고 있다. 4호에서는 우선 두 개의 특집을 마련했다. 첫 번째는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2007년 이후 아직까지 좀처럼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계 경제에 관한 특집이고, 두 번째는 현대 진보 사상의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는 칼 슈미트에 관한 논쟁이다.
미국의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는 2009년 다소 회복하는 듯했지만, 2010년 이후 불길이 유럽으로 넘어가면서 그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세계 경제 문제에는 모두 6편의 글이 실려 있다. 우선 유럽 금융위기의 진앙지 중 하나인 스페인 문제를 다루는 「스페인 모델」에서 필자들은 스페인 경제의 독특한 성격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경제 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10여 년 동안 스페인은 7백만 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했고 경제 성장률은 4퍼센트에 이르고 가계의 명목적 부는 세 배로 증가하는 등 새로운 경제 성장 모델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2008년 스페인판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건설 기업들이 도산하고 저축은행이 파산하고 실업률은 20퍼센트로 치솟고 가계 부채가 급증하는 등 거품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스페인 경제의 허약한 실상이 드러나게 된다. 더욱이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공화주의 정치를 표방했던 사파테로의 사회당 정권이 금융 헤게모니 블록의 요구를 고스란히 수용하고 노동 계급을 비롯한 인민대중을 실업과 부채 상황으로 몰아넣으면서 대중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결국 사파테로 정권이 몰락하고 보수 정권이 들어섰지만, 유럽의 헤게모니 국가들 및 스페인 정권의 대응 방안을 고려해볼 때 스페인 경제의 위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필자들은 결론을 대신하여 금융위기 사태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해법을 요구하는 시위대 중 한 사람의 절절한 호소문을 싣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벌어진 세계적 경쟁」에서 피터 놀란과 진장은 중국에 초점을 맞추면서 거대 기업들 간의 세계적인 경쟁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지난 30년 간의 세계 경제는 선진국의 거대 기업들이 해외투자를 확대하여 전 세계적인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과점 경쟁을 벌여온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발전도상국 기업들은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선진국 거대 기업들의 장기 성장 전망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를 기회로 중국의 기업들이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프라의 발전 및 기술 혁신 같은 험난한 장기적인 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슈트렉은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여러 위기」에서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을 간명하게 개관하고 있다. 그는 글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갈등이라는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흔히 영광의 30년이라고 지칭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북미와 유럽에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번영을 구가한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며, 오히려 그 이후 표출된 일련의 위기들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한 위기는 양립 불가능한 두 가지 분배 원리, 곧 사회적 권리와 한계 생산성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위치를 바꾸면서 계속될 뿐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2008년 이후 확산된 금융위기 역시 과거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벌어졌던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 이제 지구적 금융 투자가들과 주권 국민 국가 사이의 줄다리기로 변모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슈트렉은 현재 민주주의 국가들은 지구적인 투자자 과점체들의 이익을 위해 빚을 받아내는 추심업체가 되어 버렸다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길거리 폭동과 대중의 반란이 시장 권력이 없는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정치적 표현 양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러한 대중의 반란이 더 늘어나 상황을 역전시키는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상하이 모델?」에서 조엘 앤드리어스는 저명한 중국의 경제학자 황야셩의 저서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에 대한 서평의 형식으로 중국 경제의 현황과 문제점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황야셩은 도시 지역의 거대 기업에 유리한 국가 주도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을 중국 경제의 문제점으로 꼽으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가 정신이 좀더 활발하게 발휘될 수 있도록 사적 기업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 체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인 독트린에 포퓰리즘을 결합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앤드리어스는 방대한 1차 자료에 대한 검토에 기반을 둔 황야셩 연구의 독창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주장은 중국 경제의 전개과정 및 현황의 주요 특징들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황야셩의 주장과 달리 중국에서 도시와 농촌 및 계급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부정부패가 증가하는 것은 부패한 관료들이 해외 자본을 비롯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과 작은 경쟁자들을 마음대로 짓밟도록 내버려둔 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제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둔 황야셩의 해법은 오히려 중국 경제의 문제점을 훨씬 더 심화시키리라는 것이 앤드리어스의 결론이다.
「임금 없는 삶」에서 마이클 데닝은 경제 위기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주요 산물 중 하나인 배제된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데닝의 목표는 임금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 임금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독자적인 범주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임금 없는 삶은 언제나 결핍, 배제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는데, 이는 사실은 임노동의 정상성, 임금에 대한 물신숭배의 이면이다. 따라서 그는 산업예비군이나 룸펜프롤레타리아 같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개념들의 한계를 넘어서 임금 없는 삶에 대한 독자적인 계보학을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임노동의 정상성에 기초를 둔 복지국가 내지 사회국가에서 어떻게 실업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게 되었는지 추적하고 있으며, 비서구사회에 대한 연구에서 출현한 비공식부문이라는 개념의 적합성을 검토하고 있다. 데닝의 연구는 오늘날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특징짓고 있는 임금 없는 삶을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다.
[뉴레프트리뷰]의 중심 논객 중 한 사람인 로빈 블랙번은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성격을 간결하게 진단하면서,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여러 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과잉설비와 수요 부족, 무정부적인 신용 창출에서 비롯한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IMF와 미국 및 유럽의 각 정부가 제시하는 긴축재정과 구조조정 해법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의 해법은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확대하고 저소득 채무자들의 과잉 부채를 해결하고 지구적인 재균형을 확립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더 나아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은행 및 신용 시스템을 확립하고 사회적 삶의 주요 영역들을 탈상품화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해법은 세계를 움직이는 국가들 및 지배 계급의 관심사와 배치되는 것이지만, 세계 경제의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왼쪽으로 난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블랙번의 글은 구체적이면서 실행 가능한 여러 가지 해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내에서도 참조할 만한 점이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두 번째 특집인 칼 슈미트 논쟁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논쟁의 중요한 특징은 대개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나 [정치신학], 또는 [헌법이론] 등을 초점으로 삼고 있는 슈미트에 관한 다른 논의와 달리 슈미트 말년의 대작인 [대지의 노모스]를 논쟁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슈미트의 사상을 국제정치 및 국제정치경제의 관점에서 재고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영국의 정치적 유물론의 주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베노 테슈케는 독일의 슈미트 연구자 라인하르트 메링의 지적 평전 [칼 슈미트: 성공과 몰락]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슈미트 사상의 전개 과정 및 그 이론의 한계를 치밀하고 날카롭게 탐구하고 있다. 테슈케에 따르면 칼 슈미트의 사상은 결정주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구체적 질서의 사유라는 핵심적인 이론적 전제에 기반을 둔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나치즘에 대한 그의 관여는 이러한 사상적 통일성에서 비롯한 것이지, 메링이 말하듯 우연적인 일탈의 결과가 아니었다. 또한 그의 후기 대작 [대지의 노모스] 역시 구체적 질서의 사유에 기반을 두고 나치 독일의 광역정치를 영미적인 국제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당화하기 위해 집필된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슈미트를 좌파적인 관점에서 활용하려는 사람들은 우선 나치즘에 대한 슈미트의 관여가 그의 사상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이러한 정치적 부산물을 어떻게 그의 사상과 분리시킬 수 있는지 먼저 해명해야 한다. 더욱이 슈미트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독일 및 미국의 보수주의 정치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슈미트를 중립적으로 수용한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테슈케의 관점이다.
테슈케의 글에 대하여 고팔 발라크리시난은 테슈케가 슈미트 사상의 독창성과 복잡성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슈미트에 관한 또 다른 평전인 [적: 슈미트의 지적 초상]의 저자이기도 한 발리크리시난은 슈미트를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면, 그의 저작은 그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좀더 명료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반면 테슈케는 슈미트 사상의 변증법적 측면을 무시한 채 그를 일관된 파시스트 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마르 시기 슈미트의 저술에는 국민(Nation)과 인민(또는 민족, Volk)에 대한 뚜렷한 구별이 나타나 있고, 구유럽의 붕괴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해법에 대한 모색이 담겨 있다. 따라서 바이마르 시기의 저술과 나치 시기의 저술을 한데 뭉뚱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더욱이 [영토와 해양], [대지의 노모스] 같은 슈미트의 저술은 어떻게 구체제가 19세기의 국민국가 세계 그리고 영국 중심의 세계시장 식민주의로 변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권력들 및 권력의 새로운 차원들이 등장하면서 그 한계에 다다랐는지 분석하고 있으며, 이는 테슈케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분석과 상응 관계에 있는 작업이다. 따라서 발라크리시난에 따르면 슈미트를 파시스트 이론가로 비난하기보다는 그에게서 과거와 현재의 국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비판적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반론에 답하면서 테슈케는 「지정학의 물신」에서 다시 한 번 슈미트 사상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의 사상과 정치적 유물론에 기반을 둔 자신의 이론적 작업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테슈케에 따르면 발라크리시난의 반론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슈미트의 준(準)신화적인 정치학 및 국제관계론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전제들과 억지로 결합시키려는 시도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는 슈미트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기 어렵게 만들뿐더러,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지정학의 역사를 다시 사고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테슈케의 반론에 대하여 아직까지 발라크리시난이 답변을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두 사람의 슈미트 논쟁은 영미 진보 학계에서의 슈미트 수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슈미트 사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논쟁이다.
“각 지역별 쟁점”에서는 2011년 전 세계를 뒤흔든 아랍의 민주화 혁명을 비롯해서,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 베를루스코니주의에 대한 분석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먼저 페리 앤더슨은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이집트, 바레인, 예멘, 리비아, 오만, 요르단, 시리아 등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간 아랍의 민주화 혁명을 조감하고 있다. 특유의 박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는 아랍의 민주화 혁명을 1810~1825년의 라틴 아메리카 독립전쟁, 1848~49년의 유럽 혁명, 1989~91년에 걸친 소비에트 진영의 몰락과 유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혁명이 발발한 원인을 소득 양극화, 청년 대량 실업, 급격한 물가 상승, 주택 부족 사태 등과 같이 아랍 세계의 저변에 깔려 있는 깊은 사회적 위기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날카롭게 아랍 혁명 속에 존재하는 균열과 부재에 주목한다. 아랍 혁명이 독재 정권 퇴진이라는 자유화의 목표는 달성했지만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 사회적 평등의 목표를 계속 밀고나갈 수 있을지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제국주의적인 지배가 가장 심각한 지역에서 모처럼 일어난 반란에서 반제국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집트 출신의 사회학자 하젬 칸딜과의 인터뷰는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의 원인과 전개과정, 결과 및 향후 전망에 대해 상세하게 해명해주고 있다. 칸딜에 따르면 한 청년의 우발적 죽음에 대한 항의를 계기로 발발한 이집트 혁명은 지배 계급의 가혹한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 및 빈곤의 심화, 높은 세금에 대한 불만 같은 다중적 요인들이 결합되어 폭발한 것이다. 이집트의 대중들은 3주 동안의 봉기로 30년에 걸친 무바라크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감격을 맛보았다. 하지만 칸딜은 오랜 독재와 억압 때문에 뛰어난 지도자들이 제거되고 혁명 운동 세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과연 혁명이 온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최근 ‘파라오법’이라 불리는 새 헌법이 통과됨으로써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봄과 겨울의 대결」에서 마이크 데이비스는 2011년 세계를 휩쓴 격변에 대해 놀라움을 나타내면서 그것이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의 위기 및 그 변화 가능성을 진단하고 있다. 그는 특히 유례없이 높은 실업률로 고통 받고 있는 청년들과 저임금 속에서 장기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의 노동 계급이 잠재적인 변혁의 엔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2011년 3월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태는 그 사안의 심각성에 비하면 뉴레프트리뷰에서 그리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듯해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알렉산더 콕번의 간명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글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콕번은 후쿠시마 사태를 계기로 우리 주위에 있는 원자력 발전 시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환기하고 있다. 미국의 수많은 발전소들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만큼이나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원자력 관계자들은 오히려 후쿠시마 사태가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입증해주었다는 궤변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핵 개발은 언제나 민중에게 전쟁을 선포해왔음을 일깨우면서 탈핵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파올로 플로레스 다르카이스의 「베를루스코니주의의 해부」는 재치 있는 풍자와 조롱을 통해 베를루스코니 치하의 이탈리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는 야당 해산과 노조 파괴 및 언론 자유의 탄압, 암살과 상호 감시 체계의 구축이 자행되었던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과 외형상으로는 크게 다르다. 복수 정당과 복수 노조, 복수 언론이 존재하고 대학의 자율성 및 법치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언론 장악과 교육과 문화의 독립성 축소, 법치의 무력화 및 심지어 헌법의 무력화 시도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저자는 베를루스코니주의는 오히려 파시즘의 포스트모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사상ㆍ예술” 꼭지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소련의 작가였던 안드레이 플로토노프의 짧은 글 「사회주의 최초의 비극에 대하여」는 1930년대 사회주의 소련의 현실을 비관적인 시각에서 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글이 반(反)사회주의적인 관점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과학기술에 저항하는 자연의 저항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변증법적인 해결책은 없으며, 파시즘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서도 비극적 상황은 지속된다는 그의 관점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불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힐러리 로즈와 스티븐 로즈는 「다윈 그리고 그 후」에서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및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에서 진화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자연선택의 논리를 사회과학 및 인간사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이는 “자연선택의 작동을 둘러싸고 생물학자들이 벌이는 논쟁에 대한 무지와 과학 지식의 사회학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과학과 사회의 공생산’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다윈의 진화론을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비판을 수행한다. 이들은 유전학과 자연선택의 논리를 결합한 신다윈주의는 철저하게 환원론적인 입장을 채택하여 발생을 무시하고 유기체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한정하면서 그 차이가 유전자 안에 암호로 들어 있다고 전제한다고 비판한다. 유전자 환원론은 유전자의 분자 성분들이나 유전자가 세포 활동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는 생화학적 과정은 무시한 채 개별 유전자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자생물학, 특히 후생유전학의 발전은 정보가 발생 과정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유전자에 맞춰졌던 초점을 유전자를 품은 세포와 유기체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DNA는 도킨스의 말과 달리 정보를 품은 능동적 복제자이기는커녕 세포와 유기체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한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신다윈주의는 이미 죽었는데 자신이 죽었음을 모르는 좀비 이론이며, 이는 발생과 진화를 통합하는 새로운 이론적 종합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에밀리 비커턴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영화잡지 [카이예 뒤 시네마]의 복잡다단한 여정을 살피고 있다. 1951년 앙드레 바쟁, 에리크 로메르가 창간한 [카이예 뒤 시네마]는 프랑수아 트뤼포, 장-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같은 신세대 평론가들이 1960년대 누벨바그 운동을 제창하고 당대의 구조주의 운동과 결합함으로써 일약 프랑스 아방가르드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 떠올랐다. 1960년대 말~1070년대 초에 이르면 [카이예 뒤 시네마]는 영미를 비롯한 국제 영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세계적인 영화잡지로서 절정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마오주의적 급진주의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1970년대 말 좀더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노선을 택하면서 [카이예]는 주류 문화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초기의 [카이예]를 특징지었던 비평적 예리함은 사라지고 헐리우드 중심의 영화산업을 추종하는 잡지로 바뀌게 되었다. 비커턴에 따르면 [카이예] 자체는 이제 끝이 났지만, 그것이 뿌려놓은 씨앗은 변방의 나라들에서 새로운 영화의 등장 및 다큐멘터리 운동의 전개라는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서평란에는 들뢰즈ㆍ가타리에 관한 프랑수아 도스의 평전을 다루는 피터 오스본의 글과, 지난 10월 1일 타계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마지막 저서에 대한 그레고리 엘리어트의 서평을 수록했다. 좋은 학술지가 대개 그렇듯이 [뉴레프트리뷰] 역시 뛰어난 서평을 많이 싣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두 편의 서평 역시 해당 주제에 관한 폭넓은 식견을 바탕으로 각 저서의 장점과 한계 및 과제까지 빠짐없이 제시해주고 있다.
피터 오스본이 보기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관계는 그동안 너무 들뢰즈를 중심으로 이해되고 평가되어 왔는데, 이는 두 사람의 공동 작업에서 가타리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일일뿐더러 가타리 자신의 사상의 독창성을 고려해볼 때에도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따라서 그의 서평은 왜 가타리가 그들의 공동 작업에서 중요했는가를 밝히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스본의 두 가지 주장은 특히 기억해 둘 만하다. 첫째, 그는 구조주의는 “결코 주체를 제거하는 사유 형식이 아니”라, “주체를 분산시키며 체계적으로 분배하는 사유, 주체의 동일성에 저항하는 사유, ... 비인격적인 개별화나 선-개인적인 특이성을 가지고서 언제나 유목적인 주체를 만드는 사유”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들뢰즈가 가타리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은 구조주의적 주체와 “그것이 ‘치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주의적 실천의 영원한 이전과 맺는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푸코의 강의록 출간을 통해 새삼 번성하고 있는 포스트-푸코주의와 비견될 만한 포스트-들뢰즈-가타리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 이유 중 하나를 그는 가타리의 작업에 대한 망각에서 찾는다. 주목할 만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에릭 홉스봄에 관해 특이한 점 중 하나는 그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음에도 좌파와 우파 학자 모두에게 찬사를 받고, 폭넓은 대중적인 명망과 인기를 누린다는 점이다. 그가 워낙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난 역사가였기 때문일까?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홉스봄 책에 수록된 여러 논문을 개괄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이 책의 제목, 저 유명한 포어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에서 빌려온 제목에 대한 해명이 이 책의 「서문」에 나와 있지 않은 점에 의문을 가진다.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달리 홉스봄은 이제 더 이상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힘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능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홉스봄은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21세기에 예기치 않게 복귀한 마르크스를 대안적인 세계에 대한 예언자보다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비판자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오늘날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는 않지만, 넓은 대중들에게 세계를 변화시키려 했던 과거의 노력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주리라는 것이 서평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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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는 원래 예정되었던 것보다 훨씬 늦게 출간되었다. 한국어판 [뉴레프트리뷰]를 아껴주시는 많은 독자들과 오랜 시간을 들여 좋은 번역을 해주신 역자 분들에게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그 대신 조금 더 좋은 글을 수록하려고 애썼고, 독자들이 좀더 편히 읽을 수 있도록 번역을 가다듬는데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이번 4호가 대선의 충격을 딛고 많은 분들이 한국 사회의 쟁점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호를 거듭해가면서 좀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논의의 장이 되도록 편집위원들 모두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2012년 12월 끝자락에 편집위원들을 대신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