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수요일부터 대안연구공동체(http://www.paideia21.org/)에서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재발명"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대학 바깥에서 연속 강의를 하는 것은 오랜만인데,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강의 계획서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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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강의 주제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재발명

 

II. 강의 목표

 

이 강의에서는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들인 에티엔 발리바르와 자크 랑시에르의 논의를 중심으로 하여 민주주의의 정치철학을 다뤄보려고 한다. 민주주의는 오늘날 보편적인 정치의 이상이 되었다. 극소수를 제외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치체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실현과 강화를 자신들의 근본 목표 중 하나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민주주의는 심각한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공공 영역이 축소되고 저항 세력의 존립 기반이 잠식되는 가운데, 퇴행적이고 보수적인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더욱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재고찰은 정치철학이 떠맡아야 할 핵심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와 랑시에르는 1960년대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함께 󰡔“자본”을 읽자󰡕에 공동 저자로 참여한 이래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켜온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이 두 사람의 철학적 지향이나 이론적 방법론, 주요 개념들 및 테제들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민주주의에 관한 독창적인 이론을 통해 현존하는 민주주의를 새롭게 고찰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우회할 수 없는 준거가 되고 있다.

 

이번 강의에서는 두 사람의 주요 저작을 살펴보면서 현존하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그것의 역사적ㆍ이론적 뿌리는 어떤 것인지 검토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발리바르와 랑시에르가 각각 제시하는 해법은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평가해보는 것도 이번 강의의 주요 목표 중 하나다.

 

 

III. 강의 일정

 

제 1주 강의 소개: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와 재발명

 

 

제 2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 개의 테제

 

참고 자료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 개의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Dix thèses sur la politique”, in Aux bords du politique, Gallimard, 1998; “Ten Theses on Politics”, Theory & Event, vol. 5, no. 3, 2001]

 

제 3주 민주주의의 기원

 

참고 자료 자크 랑시에르, 󰡔불화󰡕 「서론」 및 1장 「정치의 시작」,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근간; La mésentente, Galilée, 1995; Disagreement,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제 4주 치안 대 민주주의

 

참고 자료 󰡔불화󰡕 2장 「잘못: 정치와 치안」.

 

 

제 5주 민주주의의 합리성은 어떤 것인가?

 

참고 자료 󰡔불화󰡕 3장 「불화의 이유」.

 

 

제 6주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의 포섭: 아르케 정치, 유사 정치, 메타 정치

 

참고 자료 󰡔불화󰡕 4장 「아르케정치에서 메타정치로」.

 

 

제 7주 합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인가?

 

참고 자료 󰡔불화󰡕 5장 「민주주의냐 합의냐」.

 

 

제 8주 정치적 허무주의를 넘어서

 

참고 자료 󰡔불화󰡕 6장 「허무주의 시대의 정치」

 

 

제 9주 과두제로서 현대 민주주의

 

참고 자료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허경 옮김, 인간사랑, 2011 [La haine de la démocratie, Fabrique, 2005; Hatred of Democracy, Verso, 2007]

 

 

제 10주 정치의 세 가지 개념: 해방, 변혁, 시민다움

 

참고자료

발리바르,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인륜」,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제 11주 현대 민주주의의 기초: 󰡔인권선언󰡕

 

참고 자료

발리바르,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윤소영 옮김, 공감, 2003. [ É. Balibar, “‘Droits de l'homme’ et ‘droits de citoyen’: la dialectique moderne de l'égalité et la liberté”, in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Rights of Man’ and ‘Rights of the Citizen’: The Modern Dialectic of Equality and Freedom”, in Masses, Classes and Ideas, Routledge, 1994.

 

 

제 12주 현실적 보편, 허구적 보편, 이상적 보편

 

참고 자료

발리바르, 「보편성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 b.

 

 

제 13주 국민사회국가의 의의와 한계

 

참고 자료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인가 아파르트헤이트인가?」, 「공동체 없는 시민권?」,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발리바르,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제 14주 인민주권의 새로운 모색

 

참고 자료

발리바르,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 󰡔정치체에 대한 권리󰡕.

 

 

제 15주 극단적 폭력과 시민다움

 

참고 자료

발리바르,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난장, 2012.

 

 

제 16주 세계화, 시민권, 민주주의

 

참고 자료

발리바르, 8장, 「미완의 시민권을 향하여」, 9장, 「“유럽에는 아무런 국가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

발리바르, 「유럽적 시민권이란 가능한가?」, 󰡔정치체에 대한 권리󰡕.

E. Balibar, “Antinomies of Citizenship”, Journal of Romance Studies, vol. 10, no. 2, 2010; “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IV. 수강자 참고 사항

 

* 수강자에게 특별한 요구 사항은 없으며, 강의 참고 자료 중 랑시에르의 {불화}는 강사가 번역한 초역 원고가 제공될 것입니다. 그리고 발리바르의 경우에는 16주 참고 자료인 「시민권의 이율배반」[“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초역 원고가 제공될 것입니다.

 

두 원고 모두 아직 교열이 끝나지 않은 초역 원고이기 때문에, 공적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합니다. 그리고 두 원고 모두 나중에 각각 도서출판 길과 그린비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될 예정이기 때문에, 상업적인 용도로 활용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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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2-10-24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툭하면 고대 그리스 또는 아테네가 민주주의 정치를 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아테네 민주주의는 재산이 있는 자들의 민주주의였을 뿐이다. 즉 유산자들의 민주주의 또는 귀족들의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하루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은 의회나 광장 같은 곳에 나갈 시간조차 없었다.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든데 어찌 그런 곳에 나갈 수 있었겠는가?

애완동물한테 값비싼 음식이나 먹이고 노예들을 거느리고 부려먹는 귀족들이나 유산자들이 남아도는 시간에 유유히 의회나 광장 같은 곳에 나가 이른바 "민주주의"를 몸소 시행하셨던 것이다.

그 귀족들이나 유산자들은 대부분 노예들을 부려먹는 남성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페리클레스 시대에 오늘날의 표현대로 하자면 의회에 나와서 의정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제도들 만들려 했던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돈을 줘서 민주주의 정치를 가능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페리클레스 시대에도 노예와 여성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제도마저 귀족들이나 유산자들에게 깨져 버렸다.

그런 게 민주주의인가? 그런 걸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령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이 발마스 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을까?

발마스 님, 랑시에르 또는 발리바르가 이 문제의 대안을 제공할 수 있을까?

대안은 그만 두고 분석이나 진단을 통해 이 사회를 이해할 수나 있으면 좋겠다.
 

[한겨레 21]에 "지제크 현상, 삐딱하게 보기"라는 기사가 실렸네요.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397.html

 

 

기자가 얼마전에 발표한 [푸코와 민주주의]라는 제 논문의 일부도 인용을 했군요.

 

해당 논문을 참고하길 원하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보세요.

 

http://blog.aladin.co.kr/balmas/5637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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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편네 2012-07-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철학)는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카르센티의 용어를 빌려 지제크식 급진주의를 ‘바깥의 정치’라 이름 붙인다. “나름의 방식으로 해방의 정치를 추구하지만, 그 가능성을 제도적인 정치의 외부에서 찾는다”는 이유에서다. 바깥의 정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상(인민의 지배)을 실현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서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 지점에 근거해 체제 극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정치다. 문제는 바깥의 정치에는 역사에 대한 경험적 분석이 없다는 점이다. 진 교수는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겠다고 하지만, 지제크에겐 마르크스가 수행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정밀한 해부나 국가와 통치 유형에 대한 분석이 없다.” 지제크가 ‘역사적 분석’을 ‘역사철학적 비평’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얘기다.

여편네 2012-07-1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금 다른 얘기지만 한겨레 신문도 따지고 보면 우파적인 신문이며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아주 도움을 주는 이데올로기들 만들어내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깥이 없다는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이미 안에 갇혀 있는 거죠. 다만 경험적 분석이라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는 군요. 마르크스는 이론적 분석을 한 게 아닌가요? 제도 정치만 정치라는 뉘앙스도 좀 있는 듯 하구요.

balmas 2012-07-16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신문도 따지고 보면 우파적인 신문이며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아주 도움을 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제가 한겨레 신문이 좌파적인 신문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제가 바깥이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제 글에 "경험적 분석"이라는 단어가 있나요?
제 글에 제도 정치만 정치라는 뉘앙스가 어디 있나요?

질문하시는 건 좋은데, 일단 누구에게 하는 질문인지 좀 분명히 하시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좀 읽고 질문을 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병준 2012-07-2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태원이형, 안녕하세요.. 정말 한참 전 과천연구실에 나갔던 김병준입니다. 기억도 잘 안나시죠? ^^;
말씀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이메일 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감사합니다.

balmas 2012-07-21 22:57   좋아요 0 | URL
병준씨 오랜만입니다.^^ 그럼 기억하죠. 벌써 20년 가까이 됐네요.^^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습니다. 제 메일주소는 jspinoza@empal.com이니까
연락주세요. 반갑습니다. :)

김병준 2012-07-22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 감사합니다. 이메일 드렸어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지난 6월 15일에 있었던 "탈근대, 탈민족, 탈식민: 포스트 담론 20년의 성찰" 심포지엄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6분 발표자들의 발표 내용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해봤는데

발표자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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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담론 수용 20년: 쟁점과 성찰

 

 

6월 15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회의실에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 사업단 내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 기획연구팀 주최로 “탈근대, 탈민족, 탈식민: 포스트담론 20년의 성찰”에 관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번 심포지엄은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포스트 담론의 공과를 따져보고, 포스트 담론의 장래를 가늠해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그 뒤에 전개된 노동자대투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한적이나마 일정하게 성취되었지만, 1989~90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질적으로 몰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좌파 이론과 사상이 위기를 겪고 퇴조했다. 그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포스트 담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현대 문명과 현존 사회 질서를 포괄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주요 준거틀로 기능했으며,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국문학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하지만 포스트 담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비평과 토론은 사실상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그 수용 초기에 나타난 바 있는 포스트 담론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과 자못 심각했던 논쟁을 상기해볼 때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지식계는 외양으로는 포스트 담론에 관해 다양한 거부의 몸짓을 취했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지난 20여 년 동안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서서히 포스트 담론이 스며들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굳이 ‘포스트’라는 명칭을 붙일 필요가 없는 자연스런 과정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포스트 담론이 갖춘 지적인 힘의 효과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활발한 논쟁과 토론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포스트 담론이 수용된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지난 2007년 이후 전 세계가 금융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지금이야말로 포스트 담론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시점일 것이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6명의 발표자가 나서 포스트 담론이 기여한 바와 그것이 지닌 문제점을 검토했다. 먼저 총론격인 「포스트 담론의 유령들」에서 진태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포스트 담론을 애도의 담론으로 규정했다. 포스트 담론은 한편으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을 애도하고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담론으로서 국내에 도입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 담론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동시에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벌어진 새로운 종류의 갈등과 투쟁의 현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따라서 포스트 담론은 경제주의, 노동자 계급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새로운 종류의 갈등과 투쟁을 적절히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에는 포스트 담론이 미국에서 생산되고 어느날 갑자기 수입되기 시작한 담론이었으며 우리 자신의 문제설정에서 생겨난 담론이 아니었다는 사정도 작용했다. 이로 인해 쇄신의 기회를 놓친 마르크스주의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게토화되었고, 포스트 담론은 실천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진 교수는 이러한 이중적인 무력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문화’와 ‘경제’의 접합을 사고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 작업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보편들 사이의 관계, 해방적 주체화 과정의 모색, 복수의 정치 개념 등과 같은 포스트 담론의 이론적 기여를 적극 살리면서, “파당적인 독서 양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치학자인 김정한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는 1990년대 초 국내에 도입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담론의 애매성에 관해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에르네스트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제창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원래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프랑스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을 결합하여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인종차별운동 등과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들 간의 연대를 모색하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 자체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투쟁과 저항을 추구하는 이론이었다. 반면 국내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고 주로 개혁 자유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거로 기능했다. 특히 이병천 교수가 주도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수용은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는 기능을 했을 뿐, 마르크스주의를 쇄신하는 데 기여하지도 못했고, 데리다, 라캉과 같은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의 급진성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했다. 따라서 김 교수의 결론에 따르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강점과 난점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이 지닌 난점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새로운 결합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계원조형예술대 서동진 교수는 한국 사회과학에서 포스트 담론의 수용 과정을 분석하는 대신, 포스트 사회과학이라는 일반적인 문제를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과학은 19세기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 이후 출현한 ‘사회적인 것’의 문제(재해, 실업, 주거, 양육 등)를 다루기 위해 자유주의 질서 내부에서 형성된 학문들을 통칭하는 명칭이었다. 사회과학은 자본주의 질서의 성립과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는 정치경제학 및 초기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발전했지만, 이러한 비판은 자유주의 질서 내에서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포스트 사회과학은 본질주의 비판이라는 명목으로 ‘사회’라는 실체화된 대상에서 벗어날 것을 제창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구호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포스트 사회과학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포스트 사회과학은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의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은 정치경제학이 전제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었다. 따라서 포스트 사회과학이 제창한 사회라는 가상에 대한 비판을 전유하면서 이것을 마르크스주의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과 결합시키는 것이 오늘날 중요한 사유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사를 전공하는 민족문화연구원 정병욱 HK교수는 1990년대 이후 식민지 근대에 관한 자신의 연구 경험에 입각하여 1980년대의 민중사학과 2000년대에 제기된 새로운 민중사에 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민중사는 과거의 민중사학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추상성과 일면성, 경직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전히 민중의 일상적 삶에 기반을 둔 역사학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구 민중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양 개론서를 제외한다면 민중사라는 이름에 걸맞은 빼어난 연구 업적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정 교수는 민중사나 새로운 민중사 같이 민중이라는 별개의 범주를 설정하는 역사학보다는 개인의 구체적 삶에 초점을 맞춘 역사 연구를 수행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개인들의 삶을 일상적 연대와 사건적 연대의 이중적 시각에 따라 분석할 때 개인과 민중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오히려 구체적인 민중의 삶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문학평론가인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전개과정은 탈정치화와 탈리얼리즘의 이중적인 과정이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초에 전개된 김영현 논쟁은 노동자 당파성에서 엿보이는 관념적 도식주의에서 벗어나 섬세한 내면까지 담아낼 수 있는 리얼리즘 문학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논의과정에서는 리얼리즘 대신 내면성이라는 표현만이 강조되어 이인화, 신경숙 등을 거치면서 리얼리즘 자체가 폐기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리얼리즘의 폐기는 현실의 증발을 동반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1990년대의 문학은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의 내면주의,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의 문화적 급진주의, {문학동네}로 대표되는 상업주의 문학의 등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990년대는 문학의 종언이 이루어졌던 시기인 셈이다. 이 교수는 현재의 한국문학 역시 이러한 1990년대의 우울한 유산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현재는 문학적 재현과 정치적 대의 모두가 시장의 임금노예인 시대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서발턴 연구에 천착해온 안준범 서강대 사학과 강사는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대표 저작들로 받아들여진 조앤 스콧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과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 {책략가의 여행}을 꼼꼼하고 세련되게 분석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한 국내 학계의 인식에 맹점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책들은 통념과 달리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과학적 역사 서술과 문학적 역사 서술의 경계를 무너뜨려 역사학을 상상력의 학문으로 만들려고 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들은 각각 엄밀한 고증에 입각해 있으며, 기존의 역사학적 재현 양식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특이한 역사적 사례, 특이한 개인들의 재구성을 추구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이 추구했던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보다는 루이 알튀세르나 자크 랑시에르 같이 흔히 구조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 이론가들의 문제의식에 더 가깝다. 따라서 새로운 역사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존 역사학과 다른 새로운 비평적 읽기의 방식이며, 이러한 방식만이 새로운 사료 비판 양식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 안 교수의 주장이다.

 

여섯 명의 발표에 뒤이어 창작과비평, 역사비평, 진보평론, 실천문학, 자음과모음, 사회와철학 같이 국내 주요 계간지와 학술지 편집위원들이 토론자로 나서 포스트 담론 20년의 의미와 한계, 과제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전개했다. 특히 토론에서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전개과정을 일방적이고 단순하게 ‘상업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합한가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지난 20여 년의 한국 문학은 고유한 문제를 탐구하는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 담론이 마르크스주의나 진보적인 사회과학 이론과 결합될 수 있는 비판이론으로서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한 차례의 심포지엄을 통해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포스트 담론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겠지만, 이날 심포지엄은 포스트 담론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 무대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포스트 담론이 앞으로 국내의 논의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거부와 무비판적인 찬양의 극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포스트 담론이 기여한 인식과 문화에 대한 비판과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인 기여라고 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결합할 수 있는 방안을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포스트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왔던 각 분과 학문 내에서 좀더 구체적이고 심도 있는 성찰과 모색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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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순 2012-07-02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시 퍼갑니다! ^^

쾅! 2012-09-07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뉴레프트 리뷰와 관련있는 발마스 님에게 한마디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올린다.

우선 홉스봄.

나는 홉스봄을 싫어한다.

홉스봄은 알려진 것과 달리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다. 이 사람 글을 보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그는 식민주의자다)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경멸하고 게이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아주 혐오하고 흑인운동을 무시하는 철저히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백인 남성 마르크스주의자가 홉스봄이다.

너무 그런 거는 모르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른바 진보 또는 이른바 보수 학자 전부 다 홉스봄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쨌든 홉스봄은 그런 사람이다. 책을 면밀히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고 파악이 되는데 왜들 그렇게 홉스봄이라면 늘 난리들을 부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난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닌 거 같다.

뉴레프트 번역자들도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다. 아마도 누군가 에릭 홉스봄이 사망하면 십중팔구 이런 점들을 배제하고 추도사나 애도사를 쓸 것이다.

다음으로 최장집. 유럽 기준으로는 우파가 맞다. 그가 우파인지 좌파인지 솔직히 관심 없긴 하다. 한국이라는 동네에서 나는 누가 우파인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누가 좌파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하려는 얘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발리바르와 최장집을 비교하면서 발마스 님이 논의를 전개했다는 건데...

나는 그런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 둘이 "다르다"(차이) 또는 그 둘이 "같다"(공통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없다.

비교를 하면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비교의 기준은 비교되기 전에 이미 비교되어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근대 국민국가(민족-국가), 시민사회, 자본주의를 아주 간단히 얘기하자면

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른 사회를 전망한다면 그 사회는 시민사회가 아니고 국민국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민사회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이고 시민사회는 국민국가에 통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셋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한지도 의문이며(시민사회와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국가라는 것이 굳이 국민국가여야 하는 이유조차 나는 찾을 수 없다.

시민사회의 법적 평등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약을 정당화하는 장치 아닌가?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며 그 시민사회는 국민국가에 통합되어 있다.

(만약 국민국가가 시민의 요구를 부정한다면 시민사회는 그 국가를 깨버려야 되는데 실제로는 그 국민국가를 깨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요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시민사회는 국민국가와 소통 또는 야비하게 말하자면 "내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시민사회와 국민국가도 무너뜨리자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이런 국민국가(민족-국가), 시민사회, 자본주의(자본주의적 인간을 만들어내는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을까?




쾅! 2012-10-04 13:2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에릭 홉스봄 死亡
 
 전출처 : balmas님의 "한겨레 기사 유감"

이렇게 자꾸 신문기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적절치는 않지만, 문제제기가 있어서 한 마디 더 첨언하겠습니다.

 

최원형 기자의 사과는 형식상으로는 제 글에 대한, 또 행사기획자인 저와 기획연구팀에 대한 사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좀더 충실히 소개하지 못한 최 기자 자신의 글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 기자가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성품이 선량하다보니까, 신문 기사에 대해 불평하는 제 글에 대해 사과형식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그건 좀더 완성된 기사문을 쓰지 못한 자책의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 기자의 잘못이 있다면, 그런 안타까움과 자책을 너무 솔직하게 (또는 경솔하게(?)) 제 글에 대한 사과 형식의 댓글로 표현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뉴스 정보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의 표출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이 경우에는 적절치 않은 의혹이라고 봅니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최 기자가 그런 성품을 지닌 사람도 아니니까요.

 

사실 국내 신문들이 이런 류의 학술 기사에도 큰 사진 싣는 것을 선호하다보니까 실제로 내용 기사의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기사를 위한 지면이 좀더 많았다면, 이 기사는 발표들의 내용에 좀더 충실한 기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학자가 신문기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세심하고 정교하게 쓴 논문들이 대폭 축소되고 요약되고 때로는 왜곡되어 실리기도 하는 신문 기사가 못마땅하게 보이기 마련이지만, 신문기사는 어떻게든 한정된 지면 내에 해당 사건이나 주제에 관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런 류의 축소나 생략, 과감한 강조는 피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기획자의 입장에서 좋은 글들을 발표해주신 선생님들의 논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으로 글을 썼는데, 사실 그런 안타까움은 그냥 개인적인 소회로 남겨두는 게 적절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최 기자가 제 글에 댓글을 달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으니까요. 또 실제로 심포지엄 자료집이 나중에 책으로 출간이 되면 실제로 발표된 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전달이 될 테니까, 발표문들의 논지가 잘못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기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글이나 최 기자의 댓글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 기자의 댓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언급해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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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ex replica wa 2013-01-2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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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담론 20년 심포지엄에 관한 경향신문 기사가 실렸네요.

 

비교를 하기는 무엇하지만, 경향신문 기사는 저와 김정한 선생의 발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발표문들 내용에 좀더 충실한 기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실어줘서 기획자로서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번 발표문들을 잘 다듬고 새로운 논의들을 충실하게 보충해서

 

내년에 책으로 출간될 때에는 좀더 뜻깊은 작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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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담론’ 마르크스주의 애도 치중, 신자유주의와의 투쟁 망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91955415&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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