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겨레]에 지난 금요일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있었던 "탈근대, 탈민족, 탈식민: 포스트담론 20년의 성찰" 심포지엄에

 

관한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538171.html

 

이번 심포지엄을 기획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크게 기사로 다뤄준 것은 고맙기 짝이 없는데,

 

기사의 제목과 내용이 이번 심포지엄의 발표문들과 거리가 있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작성돼서

 

실망스럽고 당혹스럽습니다.

 

기사의 제목이 "'포스트 담론' 20년, 신자유주의 키웠다"는 것인데,

 

이건 이번 심포지엄의 전체 논지와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앞으로 발표문을 묶은 책이 나오면 알겠지만,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분들 중 누구도

 

이렇게 단순하고 경직된 주장을 제시한 분은 없었습니다.

 

발표문들의 내용이 다소 복잡하고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번 기사는 정말 상당히 실망스럽네요.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lldefy 2012-06-19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겨레 최원형입니다. 심포지엄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저의 책임이 큽니다. 기사 내용이 충분치 못하다보니 저런 제목이 달리게 됐습니다. 모처럼 많은 분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의미있는 자리였는데... 책임을 통감합니다.

balmas 2012-06-19 11:39   좋아요 0 | URL
최 기자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잘못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여러 모로 관심을 가져주셨는데 결과가 이렇게 돼서 안타깝긴 합니다만, 이미 이렇게 된 일이니 앞으로는 좀더 주의하기로 하고 없었던 일로 넘기기로 하시죠.

강병호 2012-06-23 09: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최원형 기자는 이렇게 사과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제목이 좀 선정적이긴 하지만 경항신문 기사와 비교해보아도 사과할 만한 기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최자는 항상 자신의 바람이 있는 법이다. 기자가 그 바람을 꼭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기자에게 더 필요한 것은 줏대, 인터뷰 대상자, 기사의 대상자, 크게 말해서 뉴스의 원천이 되는 사람과의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의식으로서의 줏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쉬운 사과는 뉴스 제공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표출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최원형 기자의 이렇세 손쉬운 사과가 실망스럽다.

alldefy 2012-06-24 09: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강병호님/제 경솔한 댓글이 이런 오해를 만들어낼 줄은 몰랐네요.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뉴스 제공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표출'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처음 여기에 댓글을 달게 된 것은 '자책'의 마음에서 더 크게 비롯된 것 같습니다. 이런 학술행사에 대한 소개 기사의 경우 이를 주최한 학자들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일차적인데, 진 선생님이 블로그에 글을 남기시기 전부터 스스로도 충실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댓글을 달게 된 것입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직업의식으로서의 줏대는 무척 중요한 것이고, 이를 강조해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balmas 2012-06-2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꾸 신문기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적절치는 않지만, 문제제기가 있어서 한 마디 더 첨언하겠습니다. 최원형 기자의 사과는 형식상으로는 제 글에 대한, 또 행사기획자인 저와 기획연구팀에 대한 사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좀더 충실히 소개하지 못한 최 기자 자신의 글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 기자가 워낙 책임감이 강하고 성품이 선량하다보니까, 신문 기사에 대해 불평하는 제 글에 대해 사과형식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그건 좀더 완성된 기사문을 쓰지 못한 자책의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 기자의 잘못이 있다면, 그런 안타까움과 자책을 너무 솔직하게(또는 경솔하게(?)) 제 글에 대한 사과 형식의 댓글로 표현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뉴스 정보원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의 표출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건 이 경우에는 적절치 않은 의혹이라고 봅니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최 기자가 그런 성품을 지닌 사람도 아니니까요. 사실 국내 신문들이 이런 류의 학술 기사에도 큰 사진 싣는 것을 선호하다보니까 실제로 내용 기사의 여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기사를 위한 지면이 좀더 많았다면, 이 기사는 발표들의 내용에 좀더 충실한 기사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학자가 신문기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볼 수도 있겠죠. 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세심하고 정교하게 쓴 논문들이 대폭 축소되고 요약되고 때로는 왜곡되어 실리기도 하는 신문 기사가 못마땅하게 보이기 마련이지만, 신문기사는 어떻게든 한정된 지면 내에 해당 사건이나 주제에 관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런 류의 축소나 생략, 과감한 강조는 피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기획자의 입장에서 좋은 글들을 발표해주신 선생님들의 논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으로 글을 썼는데, 사실 그런 안타까움은 그냥 개인적인 소회로 남겨두는 게 적절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최 기자가 제 글에 댓글을 달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으니까요. 또 실제로 심포지엄 자료집이 나중에 책으로 출간이 되면 실제로 발표된 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충분히 전달이 될 테니까, 발표문들의 논지가 잘못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기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글이나 최 기자의 댓글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최 기자의 댓글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언급해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내는 [민족문화연구] 56집 (2012년 6월 30일 간) 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작년 11월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글을 수정, 보완한 글입니다.

 

작년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6편의 글과 4분의 추가 필자들의 글, 그리고 최장집 교수의 답변을 수록한

 

단행본은 올 하반기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 글에 관해 공적인 매체에서 토론하거나 인용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민족문화연구]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두 방향

 

[이 글은 2011년 11월 19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사업단 내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 기획연구팀이 개최한 제1차 심포지엄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2011년 12월 19일 민족문화연구원 제 178차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된 바 있다. 두 차례의 발표에서 좋은 논평을 해주신 참석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이 글에 관해 흥미로운 비평을 제기해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은 필자의 발리바르 해석 및 이 글의 구성 자체에 관하여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다양한 비평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관점이 필자와 다르고 여러 쟁점 및 문제제기 방식 자체에 대해서도 그와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 그의 비평에 대해 하나하나 답변하기보다는 앞으로 다른 지면에서 본격적으로 논쟁을 전개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 글에서는 그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을 수록하지 않았다. 앞으로 토론의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1. 서론

 

이 글은 최장집 교수[이하 편의상 일체의 존칭이나 호칭은 생략하겠다.]의 민주주의론을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의 이론과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최장집과 발리바르를 비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여러 모로 낯선 일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것은 최장집이 주로 민주주의의 운영과 발전에서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정치학자로 간주되는 데 비해, 발리바르는 대의제 민주주의 바깥의 계급투쟁에 초점을 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필자가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따옴표를 친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따옴표는, (데리다가 종종 그렇게 따옴표를 사용한 바 있듯이) 이 두 가지 용어의 의미에 대해 적극적인 재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임시로 이 용어들을 두 이론가에 대해 사용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존재하며, 또한 이러한 공통점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상당한 차이점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두 사람의 이론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를 재고찰하는 데에도 몇 가지 의미 있는 준거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두 사람의 이론을 비교해보려는 이유다.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진행될 것이다. 우선 2절에서는 서로 상이한 지적 전통 및 정치적 입장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 두 이론가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크게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다음 3절에서는 이러한 공통점 속에서 나타나는 두 사람 이론의 중요한 차이점을 부각시켜볼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다섯 가지 쟁점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러한 비교 고찰의 함의에 대해 간단한 논평을 제시해볼 것이다.

 

2.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

 

1) 민주주의의 민주화: 민주주의에 대한 역동적 관점

 

최장집과 발리바르의 첫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이 각자 사용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최장집은 자신의 저서 중 한 권의 제목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바 있으며,[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서울: 후마니타스, 2007).] 발리바르는 2008년의 한 논문에서 처음 이 표현을 사용한 이후,[E. Balibar,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 20, no. 4, 2008.] 최근 저작에서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현재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

 

이 표현은, 두 사람 모두 민주주의를 정태적이고 형식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장집의 표현을 빌리면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결과로 성립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형식적 틀이 갖춰진 이후에도 여전히 민주화의 과정을 수행해가야 한다. 그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주지하다시피 이것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서울: 후마니타스, 2010)(초판은 2002).]나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표현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것을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와의 일회적인 단절을 통해 완성되거나 정착될 수 있는 형식적 틀이 아니라, 부단한 개선과 보완의 노력을 요구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일차적으로 스피노자의 정치학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5) 참조. 이에 대한 평주로는 진태원,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시와 반시󰡕 71호, 2010을 참조.] 스피노자의 마지막 저서인 󰡔정치론󰡕(1677)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피노자의 사망으로 인해 민주정을 다루는 11장 서두에서 논의가 중단된 채 미완성 상태로 남겨져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가 염두에 둔 민주주의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이 문제에 관한 발리바르의 입장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급진적인 것이다. 그는 스피노자가 민주정에 관한 논의를 완결 짓지 못한 것은 단지 그의 이른 죽음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la crainte des masses)[이처럼 이중적으로 이해되는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 관한 발리바르의 유명한 논문 제목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탈구축(deconstruction) 작업이 집약돼 있는 그의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반오웰: 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앞의 책;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철학󰡕, 서관모ㆍ최원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07). 이런 의미에서 ‘대중들의 공포/대중들에 대한 공포’라는 개념은 스피노자 정치학을 해석하는 발리바르의 관점을 가장 간명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에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재독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로 요약될 수 있는 스피노자의 대중에 대한 불신(따라서 스피노자의 보수주의적 경향)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스피노자는 ‘대중들의 역량’(potentia multitudinis)을 민주정만이 아니라 군주정과 귀족정을 포함하는 모든 정치체의 토대로 간주했으며, 이것은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모든 정체, 모든 국가의 기초로 간주했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민주주의는 보수주의 전통이 주장하는 중우정치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점과 다르지만, 근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과도 다르다. 게다가 이는 루소나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하는 인민민주주의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 전자의 두 관점이 대중의 근원적인 정치적 무능력과 통제 불가능성을 가정하고 있는 데 반해, 후자는 대중의 혁명적 역량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전자처럼 대중 그 자체는 정치체제에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보수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후자처럼 대중은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근원적인 역량이라는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스피노자의 역설적인 민주주의론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계약론에서 유래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법적 관점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닌다. 곧 민주주의를 하나의 통치 유형이나 정체로만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핵심을 법적 제도의 틀 안에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둘째,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봉기와 구성, (잠정적) 해체와 재구성을 거듭하는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주의적인 영감에서 비롯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민주주의의 봉기적 기원

 

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지만, 최장집에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봉기적 기원을 갖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전제정이나 권위주의에 맞선 투쟁을 통해 확립될 수 있었으며,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권위주의의 잔재와의 싸움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음 인용문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그것의 발생 과정에 있어 전복적 성격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민주화 이전의 전제정이나 권위주의 체제에서 종속적 지위에 있던 인민 또는 그 일부가 지배권력에 맞서 저항하고 도전함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이다. (...)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는 구체제의 통치자들이 아래로부터 도전하는 세력의 힘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기존의 권력을 포기하거나 양보한 결과로써 나타난다. 이 점에서 민주화는 지배세력과 도전세력 간 집단적 힘의 충돌이라는 정치적 갈등의 산물이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 역시 이러한 특징을 명료하게 보여주었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 (서울: 돌베개, 2009), 23-24면.]

 

다른 한편 발리바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봉기에서 발원했다고 이해한다. 하나는 그가 프랑스혁명 및 미국혁명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은 1980년대 초까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탈구축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당시까지 시민권이나 민주주의, 대표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문제를 핵심적인 탐구 주제로 삼는다.[80년대 초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에 관한 발리바르의 작업은 다음 책에 대부분 수록돼 있다. E. Balibar,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Paris: Éditions la Découverte, 1992).] 이러한 작업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에서 벌어진 논쟁의 와중에 발표된 「평등자유 명제」라는 글이다.[평등자유’라는 표현은 발리바르의 신조어인 égaliberté의 번역어다. 발리바르는 보통 서로 독립적인 가치로 이해되는 평등과 자유가 분리될 수 없으며, 양자는 서로의 조건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발리바르의 이 글은 다소 축약되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E. Balibar, “Droits de l'homme et droits du citoyen. La dialectique moderne de l'égalité et de la liberté”, in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op. cit.. 하지만 최근 이 글을 원래 내용대로 재출간하면서 발리바르는 이 글의 원래 제목을 다시 살렸을 뿐만 아니라 책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참조.] 이 글에서 그는 근대 정치의 핵심에는 봉기의 선언문으로서 「인권선언」이 기입되어 있으며, 이것의 핵심은 인간과 시민이 동일한 정치적 ‘주체’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평등과 자유는 서로 분리된 가치가 아니며 각자가 서로를 조건 짓는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프랑스만이 아니라 현대 민주주의 헌정 일반 속에는 「인권선언」을 통해 표현된 봉기의 흔적이 기입돼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최근 여러 저작에서는 1997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이주자 추방에 반대하는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한 경험에 근거하여 정치체의 토대는 시민불복종의 가능성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이론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곧 이러저러한 정부의 정책이 헌정의 정신을 위반하거나 그것을 위태롭게 할 때 헌정 자체의 이름으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헌정의 토대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며, 시민성을 재발명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오류나 과오 또는 무책임한 방종으로 판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시민불복종의 주체들은 이러한 위험의 책임을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통치자들의 부당한 정책이나 그릇된 실정법에 저항하려는 자세야말로 능동적 시민성의 핵심을 이루며, 헌정의 토대를 이룬다고 본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시민불복종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봉기(insurrection)[발리바르는 봉기라는 표현을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 그것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대규모의 시위일 수도 있고 고전적인 혁명적 봉기일 수도 있지만,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청원 운동 등도 역시 넓은 의미의 봉기에 포함될 수 있다. 발리바르는 최근 프랑스의 사례로 이주자 추방에 반대하는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2005년 방리유 항쟁, 2008년에 전개된 최초고용계약법안(CPE)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 등을 제시하고 있다. E. Balibar,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Vacarme, no. 51, 2010 참조.]는 단지 근대 정치체의 기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정치체의 기초 자체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3) 대의 민주주의의 중요성

 

2)의 경우와는 반대로, 상당수의 발리바르 독자가 간과하거나 또는 오해하는 것이지만, 발리바르에게 제도정치 또는 대의정치는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민주주의는 단지 직접 민주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를 포함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1), 240면 이하 참조. ] 더욱이 대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직접 민주주의보다 열등한 형태의 민주주의이거나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경우에 한해 차선책으로 실행되는 방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된다. 이것은 대표(representation)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인민 내지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을 약화시키거나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곧 ‘대표’는 인민을 실체화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면서 동시에 지배 권력이 억압하는 사회적 갈등들이 대표되도록 해줌으로써 인민의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준다.

 

발리바르가 이처럼 대의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가 정치에서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1993년 국가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제출한 업적 소개문 「무한한 모순」[이 글은 지금까지 영어 번역본만 발표돼 있다. E.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Yale French Studies, no. 81, 1995.]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지상주의(libetarianism) 전통이 공유하는 “이론적 무정부주의”(theoretical anarchism)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의 자율성과 국가의 권위 사이에는 길항 관계가 존재한다는 본래의 무정부주의적 관점이든, 아니면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 사회에서 국가는 계급 지배의 도구일 뿐이며 비계급 사회에서 국가는 소멸될 것이라고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든 간에, 이론적 무정부주의는 민주주의 내지 진정한 정치와 국가적인 정치 사이에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발견한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은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무력할 뿐만 아니라, 대중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양면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왜냐하면 개인들, 특히 권력을 가장 덜 갖고 있고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개인들은 국가를 두려워하지만, 국가의 소멸이나 해체는 훨씬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 전통과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점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정말 톡톡히 대가를 치러 왔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93면. 또한 다음과 같은 언급도 참조. “왜냐하면 국가의 부재—실제로는 국가의 파괴—는 사회의 생산력이나 창조적 능력의 “해방”을 가져오기는커녕 사회적 정체성과 개인성의 일반적 위기만을 낳을 뿐이며, 이는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정체성과 개인성의 권위주의적이거나 독재적인 재구성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E. Balibar,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p. 15.] 따라서 발리바르의 간명한 표현을 인용한다면, “모든 국가가 반드시 민주주의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정의상 비국가는 민주화될 수가 없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97면.]

 

4)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으로서 갈등

 

최장집과 발리바르의 또 다른 공통점은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공히 갈등을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중 하나로 간주한다. 더욱이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이 점에서 미국의 철학자인 앨버트 허쉬만에게 적어도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철학자 앨버트 허쉬만의 충격적인 표현을 따른다면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갈등의 꾸준한 섭취”다. 물론 이는 이러한 갈등성 자체가 집합적으로 제어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61면. “갈등의 꾸준한 섭취”(steady diet of conflict)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Albert O. Hirschman, A Propensity to Self-Subvers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p. 243 참조.]

최장집은 자유주의의 기반 위에서 갈등이 사회의 근본적인 특징 중 하나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듯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 구성의 자율적인 단위라면, 서로 동등하게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이해관계나 의견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의 본질적 과제 중 하나는 이처럼 상호 충돌하는 개인들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

 

갈등의 문제에서 최장집이 좀더 주목하는 것은 사회의 힘센 이익 집단이 정치를 독점하는 경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립셋과 로칸의 사회균열 이론, 허쉬만의 갈등 이론 및 샤츠슈나이더의 정당론을 동원하고 있다. 그는 허쉬만을 따라 갈등을 두 종류로 구별한다.[Albert O. Hirschman, “Social Conflicts as Pillars of Democratic Market Societies”, in Ibid..] 나눌 수 없는 갈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갖느냐 못 갖느냐의 이분법적 대립을 둘러싼 것으로, 인종ㆍ언어ㆍ종교 등의 문화적 차이를 따라 발생한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38면.] 반면 나눌 수 있는 갈등은 서로 다른 계급, 부문, 지역이 사회적 생산물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은 전자와 달리 협상 가능한 것이다. 최장집은 한국 사회의 갈등 역시 이러한 범주를 통해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고 본다. 곧 나눌 수 있는 갈등으로 분류되는 것은 사회경제적 자원의 분배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계급ㆍ계층ㆍ부문 간의 이익 갈등이고, 나눌 수 없는 갈등에 속하는 것은 민족 문제, 즉 대북ㆍ통일 정책과 한미 관계를 둘러싼 이념적ㆍ이데올로기적 갈등이다.

 

그가 이러한 두 가지 갈등의 구분을 도입하는 것은, 나눌 수 있는 갈등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는 긍정적 효과를 갖는 반면, 나눌 수 없는 갈등은 극한적인 대립과 분열을 야기함으로써 타협과 협상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지난 날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를 온존ㆍ지속시키면서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둘러싼 차이, 즉 나눌 수 있는 갈등을 둘러싼 좌우 스펙트럼 상의 정치세력화와 그에 바탕한 경쟁을 억압한다는 점”[최장집, 같은 책, 40면.]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다. 진보적 정치 세력이 운동론의 관점에서 나눌 수 없는 갈등에 집착할 경우 오히려 현실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지워 버리거나 억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제 이러한 갈등보다는 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통해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소외되거나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샤츠슈나이더는 힘센 이익 집단들이 정치를 독점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범한 시민 대중의 이익을 사회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당제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공적 권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이다.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사람들, 즉 힘의 균형이 변할 때까지 더욱 더 많은 사람을 갈등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약자이다.”[E.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ㆍ박수형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08), 89면.] 따라서 이익집단이나 운동과 달리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정당이야말로 사회의 계급적ㆍ계층적 차이를 완화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조직적 대안이라는 것이 샤츠슈나이더 및 최장집의 생각이다.

 

발리바르 역시 지배적인 세력 관계가 억압하는 갈등, 곧 사회적 약자들이나 배제된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중 하나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적 대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의견과 당파의 다원성을 보증하고 활성화하는 것(이것은 물론 본질적입니다만)만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대표하는 것이며, 모종의 세력관계가 강제하는 “억압”으로부터 이러한 갈등을 빼어내서 공동선 내지 공동의 정의를 위해 활용할 수 있게끔 그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갈등이 부인되어서는 안 되며 논변과 매개(“의사소통 행위”) 바깥에 놓여서도 안 되는데, 비록 이러한 갈등이 처음에는 대부분 적법한 이해관계들을 인정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설정된 틀을 격렬하게 벗어나기 마련이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241면. 강조는 발리바르.]

 

이러한 발리바르의 관점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탈구축의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곧 그것은 한편으로 계급투쟁을 정치를 규정하는 최종 심급으로 간주하는 관점에 대한 해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하거나 청산하려는 경향에 맞서 계급투쟁을 정치의 주요한 규정 요인 중 하나로 개조하려는 재구성의 시도를 나타낸다. 발리바르의 관점이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체를 함축한다는 것은 그가 조르주 라보(Georges Lavau)의 충격적인 테제를 수용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프랑스 정치학자인 라보는 1981년 프랑스 공산당이 프랑스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분석하는 󰡔공산당은 무엇에 봉사하는가?󰡕라는 저작을 출간한 바 있다.[Georges Laveau, A quoi sert le Parti communiste francais? (Paris: Fayard, 1981). 이 저작에 대한 논평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138면 이하 참조.]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 준거하고 있는 (라보는 공산당의 역할을 ‘호민관 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프랑스 공산당은 계급투쟁과 적대, 혁명 같은 분열의 수사법을 내세우지만, 그것이 실제로 목표로 삼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공산당 및 그것과 연루된 사람들의 현실적인 이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은 제도를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이 하나의 제도”[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책, 139면.]라고 할 수 있다.

 

발리바르 역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 기초하여 ‘갈등적 민주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이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E. Balibar, L'Europe, l'Amérique, la guerre (Paris: La Découverte, 2003), pp. 125 이하; “Philosophy and the Frontiers of the Political: A biographical-theoretical interview with Etienne Balibar”, Iris, vol. II, no. 3, 2010, p. 60 이하 참조.] 이 개념의 한 가지 요점은 국민국가가 내부의 계급투쟁과 전쟁 같은 대외적 갈등을 통해서 분열되거나 해체되지 않고 재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 특히 노동 계급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회적 권리를 확대하고 사회적 시민권 개념을 창안한 덕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계급투쟁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자본주의 국가를 해체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여기서 말하는 ‘강화’는 민주주의가 강화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체계 통합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다른 한편으로, 복지국가 또는 발리바르 자신의 고유한 개념을 사용한다면 ‘국민사회국가’(national-social state)[이 개념에 관해서는 특히 에티엔 발리바르,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정치체에 대한 권리󰡕 참조.] 내에 여전히 계급투쟁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적대’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하고 있으며, 또 존속해야 함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계급투쟁이나 적대란 단순히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대칭적인 두 계급의 대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대칭적인 목표를 갖는 두 집단 내지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프롤레타리아의 목표는 자본가 계급과 달리 새로운 형태의 계급 지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급 지배를 철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그 이전에 마키아벨리가 귀족 및 부자들은 지배를 욕망하는 데 반해, 가난한 이들은 지배받지 않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던 것에서도 이러한 비대칭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갈등적 민주정’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민사회국가라는 역사적 타협체가 이룩한 시민권 헌정의 제도적 성과(민주주의의 확대)를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이러한 성과는 적대에 기반을 둔 끊임없는 투쟁 없이는 이룩될 수 없고, 또 유지되거나 좀더 진전될 수 없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갈등적 민주정이라는 개념은 “민주주의란 합의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점을 표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E. Balibar, “Philosophy and the Frontiers of the Political: A biographical-theoretical interview with Etienne Balibar”, Iris, p. 62. 발리바르는 이를 또한 해방의 이중구속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방투쟁 또는 해방운동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제도들로부터 자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E. Balibar & S. Mezzadra, “Borders, Citizenship, War, Class: A Discussion with Étienne Balibar and Sandro Mezzadra”, New Formations, no. 58, 2007, p. 27.]

 

5) 사회적 시민권의 중요성

 

두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공통점은 사회적 시민권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최장집은 T. H. 마샬의 시민권 3단계론, 곧 시민권은 시민적 권리에서 정치적 권리로, 다시 여기서 사회경제적 권리로 발전해왔다는 이론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적 시민권을 발전시키는 것을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로 꼽고 있다.[특히 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3장 참조.]

 

그가 이렇게 보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사회적 시민권이 한국 민주주의를 작동시키고 발전시키는 기초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최장집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회적 시민권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보편적 권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우선 역사적으로 볼 때 보통 선거권이 서구와 같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건국 과정에서 위로부터 주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이러한 투쟁과정을 통해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정치 조직으로서의 정당을 형성하는 경로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분단 이후 고착화된 냉전 반공주의는 노동과 관련된 담론이나 행동을 모두 친북 좌파(‘빨갱이’)와 관련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후의 정권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시장의 효율성이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지배적인 가치 기준으로 설정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흐름에 맞서 인간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가 바로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점이다. 그는 랄프 다렌도르프를 따라 특히 물질적 급부보다는 절차적 가치로서의 사회적 시민권을 강조한다. 곧 사회적 시민권의 진정한 의미는 복지비와 사회보장의 확대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소외 계층이 정치와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정치적 참여로부터의 소외를 제거하는 권리”[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169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시민권의 보편성은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노동하는 사람들 일반이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능력을 획득하고 부여받는 것을 의미한다.

 

발리바르 역시 현단계 민주주의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시민권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최장집과 의견을 같이 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사회적 시민권의 문제를 국민사회국가의 역사적 위기라는 맥락 및 갈등적 민주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고찰한다는 점에서는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발리바르는 판 휜스테렌과 자신의 차이점을 사회적 시민권이라는 쟁점과 연결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에 해당 대목을 모두 인용해보겠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나의 동료의 명제들에 대해 몇 가지 동의하지 않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나로서는, 시민권의 획득은 집합적 실천만이 아니라 제도적 결정들(...)도 전제한다고 말하겠다. 그리하여 오늘날 국민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아마도 초국민적인(유럽적인) 수준에서도, 이미 획득했거나 전화된 사회권들이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들로 간주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회할 수 없는 대결의 지점이 되었다. 판 휜스테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나는 반대로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사회적 투쟁이 투쟁적인 실천들 및 “능동적 시민권”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이민자의 지위와 관련해 결정적인 질문이며, 따라서 구성 중인 유럽이 아파르트헤이트의 모델을 발전시킬지 아니면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에 맞선 투쟁의 모델을 발전시킬지 여부에 관해서도 결정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또한, 노동과 비노동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고, 정확히 말하면 전자를 시민권에 접근하는 경로로 만드는 “유럽적인 사회적 모델”의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질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는 항상 결정적이었던, 한편으로 “다원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계급투쟁”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지배 사이의 관계라는 질문을 재발견하게 된다. 모든 차이나 다수성에 대해 무매개적으로 집합적인 “조직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며, “갈등의 섭취”가, 착취와 사회문화적 차별, 만성적인 불평등한 역할 배분에 맞선 폭력적이거나 비폭력적인 봉기와 분리될 수 없는 영역들이 존재한다. 갈등을 넘어서는 또는 갈등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것인 한에서의 적대는 항상 집합적 상상 및 타자에 대한 인정을 넘어선다. 또는 오히려 적대는, 모든 사회질서에 의해 발언권을 부정당하고 발언할 수 있는 수단들도 금지당하는 이들에 의한 반항과 반역, “소통의 강제”라는 대가를 치른 경우에만 집합적 상상 및 타자에 대한 인정과 결합될 수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66-67면. 강조는 발리바르.]

 

발리바르가 판 휜스테렌에 맞서 제기하는 쟁점은 정치체 안에는 다원주의적 갈등과 구별되는 화해 불가능한 적대의 문제가 존재하며, 이러한 적대는 집합적 상상과 타자에 대한 인정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따라서 적대를 집합적 상상과 타자에 대한 인정의 차원, 곧 민주주의적 제도의 차원으로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지배 관계에 의해 배제된 이들을 이러한 정치의 장 속에 포함시키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함은 대개 반항과 반역 등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시민권은 이러한 반항과 반역, 봉기의 결과이며 그 흔적의 표현이다.

 

 

3.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

 

이처럼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서로 공약 불가능한 두 가지 입장을 가진 외재적인 이론들 사이의 대립이라기보다는, 기본적인 공통점 속에서 생겨나는 차이점이라는 점에서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화해할 수 없는 적대로 발전하게 될지 아니면 상당한 수렴으로 접근해갈지, 또는 몇 가지 측면에서 계속 거리를 둔 채 머물러 있을지 미리 확정적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두 가지 의미

 

첫 번째 차이점은 우선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최장집에게 이 표현은 말하자면 단계론적인 의미를 갖는다. 곧 권위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일단 확립하는 것이 첫 번째 민주화라면, 두 번째 민주화는 이렇게 정착된 민주주의의 제도적 내실을 다져가는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민주화는 민주주의의 제도적 틀(주로 자유주의적인 틀)을 전제한 가운데, 그 범위 내에서 진행되는 제도화로 이해할 수 있다.[최장집은 한 글에서는 민주주의를 세 단계를 포괄하는 과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은 세 단계로 구성된다. ① 민주주의의 시민사회적 기반이 강화되고 건강하게 발전하여, 정치의 중심조직으로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사회에 폭넓게 기반을 갖게 되는 것 ② 선출된 정부가 대표-책임의 연계에 의해 구속되는 것 ③ 선출된 정부의 정책 효과가 경제적 부와 자원의 분배구조를 향상시켜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강화하고, 정치적 평등의 실현을 제약하는 조건을 최소화하는 것.” 󰡔민주주의의 민주화󰡕, 39-40면.]

 

이렇게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단계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최장집에게 민주주의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의미하며(물론 이것은 국내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주로 수구적인 용법으로 쓰이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것은 초역사적 보편성을 갖는 메타 민주주의적 모형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틀을 강화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을 가리키지,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종류의 민주주의를 설립하거나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구조 자체를 전화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자유 민주주의의 틀을 전제한 가운데 그 속에서 전개되는 민주화인 것이다.

 

반면, 발리바르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범위가 좀더 넓은 표현이다. 우선 발리바르에게 민주화라는 것은 최장집과 같은 의미에서 단계론적인 양상을 띠지는 않는다. 발리바르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그 이후에 확립된 자유주의적인 틀의 강점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것을 일종의 메타 민주주의적 모형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고대 민주주의에서 근대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혁명적인 변화였다면, 앞으로 이것과 비견될 만한 또 다른 혁명적인 민주주의의 변화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는 우리가 지금 그런 시기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 유럽에서의 헌법 논쟁에 대한 성찰」, 󰡔정치체에 대한 권리󰡕 및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에 수록된 여러 글 참조.]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 또는 과정으로서의 민주화라는 표현은 최장집보다 훨씬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틀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것까지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발리바르가 근대 국민사회국가 속에 구현된 민주주의 헌정의 역사적 진보성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지배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최장집은 민주화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면서 발리바르와 같은 식의 민주화론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는다. “민주화는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기존 질서를 유지ㆍ온존하되 정치적인 틀을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화를 통해 정치체제를 바꿀 뿐만 아니라 기존 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 시기 386은 NL-PD라는 혁명적 레토릭이 표현하듯 후자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민주화󰡕, 51면.] 두 번째 민주화의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발리바르와 달리 최장집의 경우는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양면적인 정체로 파악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한 대목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파시즘이나 또는 적어도 약한 파시즘으로 변질되거나 붕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외재적인 가능성으로 한정하고 있다.[최장집은 “민주주의는 일단 수립되고 나면 저절로 작동하고 발전하는가, 아니면 민주주의 체제도 퇴행할 수 있는가. 퇴행한다면 왜 그런가”라는 질문에 대해 원칙적으로 “요즘은 민주주의가 무너져 다른 체제가 됐다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 뒤, 체제가 변화될 수 있는 요인, 곧 민주주의가 붕괴되거나 변형될 수 있는 요인에 대해 지적한다. “민주주의의 붕괴 내지 변형은 권력의 집중,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선동 정치의 출현, 그리고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견제 세력의 약화나 부재 등과 같은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나타난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다른 가치를 압도하면서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게 되고 권력ㆍ자본ㆍ언론이 집중되면서 이들이 상호 결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힘이 사회에서 대중적 힘과 결합하게 될 때, 나아가 이런 조건에서 세계 경제의 위기가 한 나라의 경제를 위기에 빠트릴 때 민주주의는 충분히 위험에 처할 수 있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꼭 이렇게 전면적으로 민주주의가 전복되지 않더라도 위에서 말한 현상들이 어느 정도 약하게 나타나고 대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다면 약한 파시즘적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서울: 후마니타스, 2007), 58면.]

 

2) 배제의 민주주의

 

발리바르가 이렇게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표현을 강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주의 제도(다시 말하면 민주정)가 본질상 매우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에게 민주주의는 급진적인 보편성, 심지어 무한한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제도적 표현으로서 정치체 또는 발리바르식으로 말하면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은 민주주의와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곧 한편으로 시민권 헌정은 자신의 토대로서 민주주의에 근거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의 급진적인 보편성을 온전히 수용할 경우 그 제도적 틀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한해야 한다. 다음 인용문은 민주주의적 제도로서 시민권 헌정과 민주주의가 맺는 이율배반(antinomy) 관계에 대한 발리바르의 논점을 집약적으로 전달해준다.

 

[정치 공동체로서의—필자] 시민권은 주기적인 위기와 긴장을 경유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본래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취약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서양의 경우) 2천년의 역사 동안 시민권 공동체는 도시국가에서 국민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파괴되고 새로운 제도적 틀 속에서 재구성되어 왔으며, 만약 탈국민적(post-nationales) 연방이나 준연방이 현실태로 성립한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민권 헌정으로서 이러한 공동체는 (막스 베버가 잘 파악한 바 있듯이) 그것의 구성적/제헌적 권력(pouvoir constituant)—이것은 평등자유가 실제로 성립하게 만들기 위해 아직 존재하지 않는 권리들의 획득을 목표로 하거나 또는 기존 권리들의 확장을 목표로 하는 보편적인 정치 운동들이 지닌 봉기적 권력이다—을 형성하는 (...) 힘 자체에 의해 위협받고 동요하며, 심지어 탈정당화된다. 이 때문에 나는 서두에서 봉기와 헌정의 차동(差動) 관계(différentiel)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정치에 대한 순수하게 형식적이거나 법적인 표상은 어떤 것이든 간에 결코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역사와 실천의 지반에 옮겨놓을 경우, 이것은 바로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인 특징을 이루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민주주의적 발명들 및 권리의 획득, 좀더 확장되고 좀더 구체적인 [권리에 대한] 관점들에 따라 권리와 의무의 상호성을 재정의하는 것 등은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영원한 시민권 “이념”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명이라는 관념을 민주주의의 보존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권에 대한 모종의 정의를 “보존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민주주의는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민주주의에 고유한 “탈-민주화”(dé-démocratisation)에 저항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평등자유의 원리와 결부된 봉기적 계기는 단지 제도들을 정초할 뿐만 아니라 제도들의 안정성의 적이 되기도 한다.[E. Balibar, “Ouverture: L'antinomie de la cityo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p. 20~21. 강조는 발리바르. 이 논문의 축약된 영어판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바 있다. “Antinomies of citizenship”, Journal of Romance Studies, Summer, 2010, Vol. 10, no. 2.]

 

따라서 발리바르에게 제도로 구현된 모든 민주주의 헌정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고대 민주주의에서 노예가 시민권 헌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점이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보편적 인권과 시민권에 기초를 둔 근대 민주주의 역시 자신의 고유한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배제에는 근대 민주주의 초기의 무산 계급에 대한 배제나 여성에 대한 배제 등이 존재한다.[근대 민주정 초기의 무산 계급 배제의 문제에 관해서는 Pierre Rosanvallon, Le Peuple introuvable : Histoire de la représentation démocratique en France (Paris: Gallimard, 2002)를 참조하고 여성 배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Geneviève Fraisse, Muse de la Raison. Démocratie et exclusion des femmes en France (Paris: Gallimard, 1995)(2nd édition) 참조.]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배제들 이외에 국민국가에 고유한 배제라는 쟁점을 제기한다. 그것을 발리바르는 특히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시민권=국적’ 등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4장 및 󰡔정치체에 대한 권리󰡕, 131면 이하 참조.] 곧 정치적 자격으로서의 시민권을 국적을 소유한 사람들에게만 부여하는 것이 근대 민주주의 헌정, 곧 국민 국가의 본질이며, 이것은 󰡔인권선언󰡕에서 천명된 보편적 인권 및 시민권 원리와 모순을 빚는다. 따라서 근대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화의 과제는 이러한 배제의 메커니즘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반면 최장집에게서는 이러한 급진적인 배제의 문제설정을 찾기 어렵다. 그에게서 민주화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두 번째 민주화 역시 권위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좀더 내실화하는 것을 뜻한다. 최장집이 사회적 약소자나 소수자의 이익을 잘 대표할 수 있느냐 여부를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사회적 약소자나 소수자는 이미 국민적 틀 속에 존재하는 시민, 곧 국민적 시민들이며, 그로부터 배제되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문제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최장집의 문제설정에서는 식민지와 제국주의 사이의 관계, 또는 좀더 최근의 정세를 고려한다면 남면 나라들과 북면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국민국가의 정치경제 및 문화적 관계가 규정되고 제약되는 문제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3) 이데올로기와 주체화

 

이 문제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두 이론가의 상이한 관점과 연결된다. 최장집에게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냉전반공주의, 신자유주의 등을 뜻한다. 이는 그가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을 유발하면서 현실을 인지,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제약하는 기능을 갖는”[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60면.] 것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발리바르는 그의 스승이었던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충실히 수용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론에 혁신적인 변화를 도입한 철학자인데, 이는 그가 한편으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주장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주체 형성을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기능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aris: PUF, 1995);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서울: 동문선, 2007)을 참조.] 곧 알튀세르에 따르면 지배 계급은 착취와 폭력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통해 종속적 주체를 생산함으로써 피지배 계급이 자발적으로 지배에 복종하고 순응하도록 만든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두 가지 핵심 요소를 받아들이되,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정정한다. 첫째, 그는 이데올로기에서 대중들의 존재론적 우위라는 테제를 제시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적어도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서울: 이론, 1993), 183-84면. 강조는 발리바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적인 의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념론적 인식, 곧 이데올로기를 오류나 환상,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왜곡된 관념으로 이해하는 관점과 단절하고 이데올로기의 실재성, 물질성을 긍정한 데 있다. 이것은 정치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데올로기를 지배 계급에 의한 조작과 기만 또는 주입과 강제로 보는 관점과 결별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관념이나 환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왜곡된 관념이나 환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진하고 무지한 대중들이라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이데올로기를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지배 계급의 능력이라는 생각을 전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할 때 품고 있었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물질적인 상상계로, 곧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자연적 조건(생활세계)으로 정의하면서 이러한 두 가지 관념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에서 상상계 범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제3권 1호, 2008 참조.] 이데올로기는 의식적인 관념이나 표상들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개인들과 대중들이 모두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상상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또는 그람시를 원용하자면 헤게모니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186면. 강조는 발리바르.] 그런데 어떤 상상적 경험이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일 수 있는가? “그것은 우선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반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책, 같은 곳. 강조는 발리바르.]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고 그러한 상상계를 자기 나름대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의 지배어는 자유와 평등, 박애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지배어는 사실 지배 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대중들의 혁명적 봉기를 통해 선언되고 또 정치 제도들 속에 기입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자 원리로 천명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은 이를 대표하는 문건 중 하나다. 발리바르가 이데올로기에서 대중들의 존재론적 우위라고 부른 것은, 이러한 지배어들이 혁명의 정신이자 원리로 천명되고 정치 제도들 속에 기입되었다는 사실(「인권 선언」은 프랑스 헌법의 전문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정치적 근대성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원리는 그 자체로는 매우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제도적 매개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지 선언적으로 언표되었을 뿐, 실제적인 제도에서는 최소화될 수도 있다. 예컨대 정치적 선거권이 일정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개인들(이른바 “능동 시민들”)에게만 허가되었다는 점이나 여성들은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권리를 향유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사례가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근대 사회의 어떤 지배 집단도 피지배대중들의 이러한 상상계를 무시하고서는 또는 그러한 상상계를 재구성하고 활용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피지배대중들은 이데올로기에서, 따라서 정치적 상상계 및 제도화에서 (제도적으로는 열등한 위치에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체계적으로 배제될 수도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발리바르는 이러한 원칙을 국민(nation)이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형성과 재생산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 삼는다.[발리바르의 국민 및 국민주의/민족주의에 대한 논의로는 특히 E. Balibar, “La Forme nation: historie et idéologie”, in 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Paris: La Découverte, 1988); 「민족 형태: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제 6호, 1993 및 「국민적 인간: 국민 형태에 대한 인간학적 소묘」, 󰡔우리, 유럽의 시민들?󰡕 참조.] 근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내적인 갈등이나 소요 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통합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을 국민 공동체의 성원으로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리바르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시민은 본질적으로 국민으로서 존재하며, 또 시민이 국민으로 한정되는 만큼 본질적으로 비국민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배제된다. (종속적인) 정치적 주체의 생산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긴밀하게 결부돼 있는 것이다.

 

반대로 최장집은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나 왜곡된 인식으로 규정할 뿐,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종속적 주체 생산 및 재생산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국민국가라는 근대 민주주의의 정치적 틀을 민주주의의 자연적이거나 정상적인 존재 조건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과 결부된 종속적 주체 생산 및 배제의 문제를 하나의 정치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4) 갈등을 넘어선 폭력

 

여기서 더 나아가 폭력의 문제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두 사람은 갈등을 민주주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하지만 최장집이 주로 갈등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는 데 반해, 발리바르는 갈등의 부정적 측면으로서 폭력의 문제를 현재 민주주의 정체들이 직면한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로 파악한다.[발리바르의 폭력론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 및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서울: 난장, 2012) 참조. 이 후자의 책은 다음 불어판 저서의 부분 번역본이며, 이 저서의 완역본은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E.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Wellek Library Lectures et autres essais de philosophie politique (Paris: Galilée, 2010).]

 

발리바르가 염두에 둔 폭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이 아니라 극단적 폭력이다. 그는 특히 “초객체적 폭력”과 “초주체적 폭력”이라는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를 언급한 바 있다. 초객체적 폭력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의 전면적 제거”와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을 의미한다. 초주체적 폭력은 어떠한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 같은 현상들 및 이른바 “민족 청소”나 대량 학살 같은 사건에서 나타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 곧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맹목적이고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을 뜻한다. 이 두 가지 극단적 폭력은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문젯거리들 가운데 하나다. 그 이유는 이러한 폭력이 인간 주체의 실존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자율성의 정치를 뜻하는 “해방”(émancipation)과 구조적 지배의 개조 및 변혁을 의미하는 “변혁”(transformation) 이외에 반(反)폭력을 뜻하는 “시민다움”(civilité)이라는 별개의 정치적 범주가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폭력론은 극단적 폭력의 두 가지 형태가 예외적이거나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화와 더불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진단에 터해 있다. 아울러 그의 폭력론은 이러한 폭력에 맞서기 위해 단순히 혁명적 대항폭력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함축하고 있다. 폭력을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폭력을 하나의 독자적인 문제로 간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의 문제를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정치의 문제는 순수한 힘의 문제가 된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듯이 인간 역사 속에서도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무력 다툼만이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지배 세력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정당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 및 피지배 계급들의 대항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항 폭력은 착취 없고 지배 없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곧 정당한 목적이 수단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은 수단 내지 전술의 문제일 뿐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좌파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관점 속에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몰락으로 이끈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에티엔 발리바르, 「게발트」, 󰡔폭력과 시민다움󰡕 참조.]

 

따라서 그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예방적인 반혁명에 대해 대칭적으로 혁명을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반봉기에 대해서는 봉기를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 바로 이런 논리야말로 20세기를 (...)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척도’조차 초과했던 또는 모든 대항 권력을 파괴했던 사회적 지배 구조들과 권력관계들을 변혁하는 것이지만, 저는 앞의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니 오히려 질문 자체를 전위시키고 복잡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46면.]

 

그 대신 발리바르는 두 가지 정치의 결합을 폭력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해법으로 제시한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 역량의 복원과 확장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의 탈실체화 운동으로서 시민다움의 정치다. 발리바르에게 시민권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근대적 시민권이 내포적으로 보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내포적 보편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에는 초월적(신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인종이나 민족 같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시민들이 서로서로에게 호혜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하고 확장하는 일임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정의상 국적이나 종교, 성별,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정치는 특히 국적 여부에 따라 시민권을 한정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본 경향(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면 시민권=국적 등식)에 맞서 반(反)차별과 반배제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임을 뜻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란 “‘인간적인 것’이 실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시민들의 공동체”[E.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p. 412.]를 실현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다움의 정치란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 곧 이러저러한 실체적 토대 위에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체를 탈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헤르만 판 휜스테렌을 따라 이러한 공동체를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운명 공동체란 보통의 용법과 달리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48면.]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가령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면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책, 258-59면.] 한다. 따라서 운명 공동체는 매우 급진적인 다원적 정치 공동체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구현하는 시민권은 역시 판 휜스테렌의 표현을 빌리면 “미완의 시민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발리바르의 관점에서 보면 최장집의 갈등 이론은 이미 형성된 시민 주체들을 전제할뿐더러, 시민 주체들 사이의 갈등이 정치 제도의 틀 속에서 전개되고 제어될 수 있다는 점을 무비판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정치 제도의 틀을 규정하고 더 나아가 잠식할 수 있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의 쟁점에서 너무 쉽게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5) 정당정치와 운동

 

이는 결국 정당정치와 운동의 관계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정당정치론은 최장집 민주주의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알려져 있다. 그는 운동은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일단 민주화를 통해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 이후에는 더 이상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없으며, 정당을 통해 노동과 진보의 정치세력화를 이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는 민주화 이후 운동이 존속하는 것을 일종의 퇴행적이거나 부정적인 현상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보다 더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민주화 이후 운동의 존속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당제도의 미성숙 내지 실패에 따른 결과라는 점이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84면.]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도 여전히 운동은 긍정적인 기능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민중운동 담론의 민주주의관에 대한 비판이 민중 또는 민중운동, 나아가 운동 일반의 정치적 역할이나 효과와 관련된 것이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도 민주주의를 작동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 운동이 갖는 긍정적인 기능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최장집, 같은 책, 179면.]

 

그런데 이러한 언급의 실제 의미는 다른 책에서 좀더 분명히 밝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운동은 이제 무익하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아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운동을 강조하면서 정치와 정당을 부정하는 어떤 이념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 대중 정당은 운동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당이 사회적 요구를 표출하는 기능을 하는 한 운동은 정당의 핵심 구성 요소이다. 실제 정당은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 대표의 축과 사회운동이나 직능 집단을 대표하는 기능 대표의 축을 중요한 하부 기반으로 삼고 있다. 한국에서 운동의 에너지가 정당의 제도화로 전환되는 것, 전환되어야 하는 필요를 강조하고 싶다.”[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31면.] 이것은 최장집이 운동의 긍정성을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정당과 분리된, 또는 어쨌든 정당과 독립적인 운동의 역할이 아니라 정당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고 대표 기능을 높이는 차원에서의 운동의 긍정성임을 잘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운동이 긍정적일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정당의 하부 기반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할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장집이 말하는 운동의 긍정성은, 운동이 정당으로 포섭되는 것을 전제한다고 볼 수 있다.[그는 더 나아가 운동의 지속 가능성을 엘리트 중산층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한 사회에서 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안정적 지위에 있는 중산층 엘리트들이기 쉽다. ... 누구든 운동적 삶을 지속한다면 개인의 삶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운동의 동원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발전시키게 된다.” 최장집 외, 같은 책, 32면.]

 

더욱이 최장집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정당이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가 먼저 입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운동이 정당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당이 운동을 통합할 만한 정치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최장집의 주장은 순환 논증이거나 운동을 포섭하려는 책략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발리바르 역시 민주주의에서 대의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최장집의 주장과 통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그와 달리 운동에 대해 본질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라는 것이 매우 취약하고 불안정한 것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두제로, 곧 소수 엘리트 지배 체계로 흐를 수 있는 소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反)과두제적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단지 제도정치의 틀을 고수하면서 정당정치를 통해 대표의 여지를 확장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는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바깥의 정치[내가 말하는 바깥의 정치란, 현대 정치의 대표적인 모델로 간주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를 이상적 정치체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지배의 체제로 간주하는 입장을 말한다. 따라서 바깥의 정치의 옹호자들은 인민의 권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바깥에 존재하는 진정한 정치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되는 현대적인 바깥의 정치는 상당수의 현대 정치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안토니오 네그리나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나, 조르조 아감벤 또는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 주요 인물들이다. 바깥의 정치에 관한 비판적 토론으로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철학논집󰡕 29집, 2012.]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민주주의 제도는 그 바깥에 존재하는 구조적 요소들(자본, 이데올로기, 폭력 등)에 의해 그 형성과 재생산, 존립이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민주주의 정체에 내재한 본래적인 불안정성 때문이기도 하다. “탈-민주화”는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 정체, 시민권 헌정에 기입돼 있는 본래적인 가능성인 것이다.[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현재 서구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게 된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만 돌리는 것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근대 민주주의 정체에 고유한 내적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E. Balibar, “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egaliberté, pp. 40-41 참조.] 따라서 민주주의 제도를 좀더 민주적인 제도로 만드는 것은 제도 안에서의 민주화의 노력과 동시에 제도 바깥에서의 민주화의 노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정당과 운동, 제도와 투쟁의 두 가지 날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발리바르가 프랑스에서 1993년에 통과된 외국인의 프랑스 출입 및 체류 조건에 관한 “파스콰”(Pasqua) 법과 그것을 보충하는 “드브레”(Debré) 이민 법안(1996년 3월), 특히 외국인을 유숙시키는 모든 사람에 대해 외국인의 입주와 퇴거를 경찰서에 신고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는 법안에 맞서 전개된 시민불복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미등록 체류자의 시민권을 옹호하고 시민불복종 운동을 정치체의 토대로 제시한 것은 이러한 입장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발리바르의 이러한 시각은 특히 다음 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앞의 책.]

 

4. 결론을 대신하여

 

지금까지 본론에서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을 비교ㆍ검토해 보았지만, 두 사람의 이론을 비교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각각 상이한 분과 학문의 연구자이고 속해 있는 지적 전통도 다른 데다가 처해 있는 현실적 조건도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비교라는 통념 자체가 두 가지 비교 대상에 대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가급적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데 비해, 본문에서 드러나다시피 이 글은 이러한 의미의 객관적 비교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물론 필자는 가급적 최장집의 이론적 강점을 균형 있게 제시하려고 했지만, 최장집 본인이나 그의 입장과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에 필자의 비교는 상당히 편파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중립적인 비교를 담고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그것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는 것이 좀더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비교ㆍ고찰을 시도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최장집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 느끼게 되는 양가적 감정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인정하다시피 최장집은 일련의 체계적인 저술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에 관한 보기 드문 이론적 종합을 제시한 사람이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에 관해 사고하려는 사람들에게 그의 작업은 필수적인 참고문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이러한 이론적 작업을 통해 민주주의, 민주화, 자유주의, 정당, 대표, 사회적 시민권 등과 같이 그동안 엄밀한 개념 정의 없이 막연하게 쓰이던 여러 정치학 용어들에 대해 독자적인 개념화를 제시함으로써,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적 논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언론계에서 흔히 평가하듯이 그가 과연 진보적인 이론가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는 분명 수구 우파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며,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이론가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는 권위주의 체제와의 단절을 민주화의 핵심적인 지표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대개의 자유주의적인 학자들과 달리 노동의 불평등이나 사회적 시민권의 취약성을 개혁하는 것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핵심을 정당 민주주의의 제도화에서 찾으면서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려고 하는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진보 정치를 부단히 비판하고 그것과 거리를 두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에는 제도 내적인 정치, 대의 민주주의적인 정치 이외에 다른 여지가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이 지닌 의미 중 하나는 최장집이 부당 전제하는 이분법의 상당 부분을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이것이 내가 비교ㆍ고찰을 수행하는 두 번째 이유다). 곧 최장집은 자신의 작업에서 정당이냐 운동이냐, 대의 민주주의냐 직접 민주주의냐, 시민권이냐 계급투쟁이냐(또는 나눌 수 있는 갈등이냐 나눌 수 없는 갈등이냐), 자유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등과 같은 양자택일적인 선택지를 제시하면서, 전자의 선택지들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사고하기 위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대안인 것처럼 논의 구도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의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계급투쟁이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시민권 제도가 지닌 진보적 함의를 긍정하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의 진보적 가치를 승인하면서도 그것이 국민사회국가라는 근대 정치체의 역사적 한계와 연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은 최장집의 이론에 함축된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가 부당하다는 것, 적어도 이론적으로 상당히 조야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의 작업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현실 정치의 문제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분석과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인 전제들 및 가정들에 대한 엄밀한 탈구축 과정을 경유해야 함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적 비교와 검토, 또는 두 사람의 이론적ㆍ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얼마나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지, 그리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좀더 구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게 될지는 앞으로 이 논쟁의 전개 과정에 따라 상당 부분 규정될 것이다.

 

 

 

참고문헌

 

1.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문헌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서울: 후마니타스, 2007).

        , 󰡔어떤 민주주의인가󰡕 (서울: 후마니타스, 2007).

        , 󰡔민중에서 시민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서울: 돌베개, 2009).

        ,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서울: 후마니타스, 2010)(초판은 2002).

Balibar, Etienne, Spinoza et la politique (Paris: PUF, 1985);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2005).

        ,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Paris: Éditions la Découverte, 1992).

        ,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서울: 이론, 1993).

        , “The Infinite Contradiction”, Yale French Studies, no. 81, 1995.

        ,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철학󰡕, 서관모ㆍ최원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2007).

        , Nous, citoyens d'Europe? (Paris: La Découverte, 2001);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0).

        , Droit de cité (Paris: PUF, 2002);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11).

        , L'Europe, l'Amérique, la guerre (Paris: La Découverte, 2003).

        ,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 20, no. 4, 2008.

        ,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

        , Violence et civilité: Wellek Library Lectures et autres essais de philosophie politique (Paris: Galilée, 2010);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서울: 난장, 2012)(부분 번역).

        ,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Vacarme, no. 51, 2010.

        , “Philosophy and the Frontiers of the Political: A biographical-theoretical interview with Etienne Balibar”, Iris, vol. II, no. 3, 2010.

         & Mezzadra, Sandro, “Borders, Citizenship, War, Class: A Discussion with Étienne Balibar and Sandro Mezzadra”, New Formations, no. 58, 2007.

         & Wallerstein, Immanuel,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Paris: La Découverte, 1988).

 

 

2. 일반 문헌

 

E. E.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현재호ㆍ박수형 옮김 (서울: 후마니타스, 2008).

진태원,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 상상계라는 쟁점」, 󰡔근대철학󰡕 제3권 1호, 2008.

        ,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시와 반시󰡕 71호, 2010.

        ,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철학논집󰡕 29집, 2012.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aris: PUF, 1995);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서울: 동문선, 2007)

Fraisse, Geneviève, Muse de la Raison. Démocratie et exclusion des femmes en France (Paris: Gallimard, 1995)(2nd édition)

Albert O., Hirschman, A Propensity to Self-Subversi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8).

Georges Laveau, A quoi sert le Parti communiste francais? (Paris: Fayard, 1981).

Pierre Rosanvallon, Le Peuple introuvable: Histoire de la représentation démocratique en France (Paris: Gallimard, 2002).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하순 2012-07-02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퍼갑니다. ^^

... 2012-11-19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뜻깊게 읽고 갑니다! '바깥의 정치'만을 생각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주류(?) 정치학을 읽으면서 굉장한 거부감을 느껴서 매우 곤란해하고 있었는데, 이걸 읽으니 최장집 교수가, 나아가서는 주류 정치학의 논의들이 어떤 식으로 논증되고 비교될 수 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비록 이 글을 쓰신 주된 목적에는 엇나가는 것 같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balmas 2012-11-20 19:04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반갑네요.
 

 

 

 

 

 

 

 

 

 

 

 

 

 

몇 년 전에 영어로 읽었던 프랑수아 퀴세의 "French Theory"가 올해 초 난장출판사에서 번역, 소개되었다.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프랑스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에서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지성사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황당한 오해와 어처구니 없는 중상, 또는 뜬금없는 예찬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번 일독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는 퀴세의 이런저런 주장이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운데,

혹시 나중에 서평의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의 장점과 약점에 대해 좀더 상세하게 논의하기로 하고

오늘은 한 가지 황당한 오독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문제의 대목은 국역본 62쪽에 나오는데, 이 대목은 퀴세가 1966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미국에서의

프랑스 철학의 수용 또는 발명의 시발점이 된 학술대회를 소개하면서 데리다의 발표문의 논지를

요약하는 대목이다. [기록과 차이])(국역본 제목은 [글쓰기와 차이]이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이 책의

제목은 이렇게 번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에 수록된 [인문과학 담론에서 구조, 기호, 유희/작용]이라는 글이

바로 데리다의 발표문인데, 퀴세는 데리다 발표문의 핵심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미국에서는 이 마지막 공식이 곧 정설이 된다. 여기서 데리다는 “단절된 직접성이라는 구조주의의 주제”, 즉 “놀이를 사유하는 데서의 부정적이고, 향수에 젖은, 죄책감의 ... 측면”을 넘어서 그 “유쾌한” 니체적 측면을, “오류도, 진리도, 기원도 없는 기호 세계”에 대한 순수한 긍정으로 나아가라고 요청한다. 데리다는 강령을 읽듯이 이렇게 결론지었다. “해석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 ... 진리를 해독하려는 꿈”을 버리라고, 그보다는 “놀이를 긍정하고 인간과 인간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시급하다고 말이다.”

 

퀴세의 이 주장은 정말 황당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퀴세가 인용한 대목에서 퀴세의 주장처럼

유쾌한 니체적 측면을 옹호하거나 "오류도, 진리도, 기원도 없는 기호 세계"에 대한 순수한 긍정으로 나아가라고 요청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 “해석에 대한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놀이의 영역을 벗어나 ... 진리를 해독하려는 꿈”을 버리라고, 그보다는 “놀이를 긍정하고 인간과 인간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시급하다고 말이다”"라는 주장을 제시한 적도 결코 없다.

 

퀴세의 황당한 발명과 달리 데리다 논문의 마지막은 이렇다.

 

"이 두 가지 해석[레비스트로스적-루소적 해석과 니체적 해석-인용자]이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고 자신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첨예하게 만들어야 함에도, 나로서는 오늘날 선택하기가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선택이라는 범주가 아주 사소해지는 영역 (잠정적으로 계속 역사성의 영역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에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무엇보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의-인용자] 환원 불가능한 차이의 공통의 지반, 그 차연을 사고하려고 시도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L'ecriture et la difference, Seuil, 1967, p. 428. 강조는 데리다.

 

어떻게 퀴세는 데리다의 이 결론을 저렇게 독창적으로 재창조해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고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 근무하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오는 6월 15일 금요일에 "탈근대, 탈식민, 탈민족-포스트담론 20년의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합니다.

 

이 심포지엄은 저와 두 분 선생님이 함께 운영하는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라는 기획연구팀이 기획, 개최하는

심포지엄입니다. 1회 심포지엄은 작년 11월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이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바 있고

이 번이 두번째 심포지엄입니다. (첫번째 심포지엄 발표문들과 추가 논문들은 최장집 교수의 답변과 함께 묶여 올 가을에 책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두번째 심포지엄 발표문들 역시 내년에 책으로 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탈근대, 탈식민, 탈민족―포스트 담론 20년의 성찰

 

 

* 기획 취지

 

한국 지식사회에 포스트 담론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지 20여 년이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 노동자대투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한적이나마 일정하게 성취되고, 1989-90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질적으로 몰락함으로써 맑스주의를 비롯한 좌파 이론과 사상이 위기를 겪고 퇴조한 이후, 포스트 담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현대 문명과 현존 사회 질서를 포괄적으로 성찰하고 비판하는 주요 준거틀로 기능했으며, 지난 20여 년 동안 철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국문학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하지만 포스트 담론에 관한 주목할 만한 비평과 토론은 사실상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그 수용 초기에 나타난 바 있는 포스트 담론에 대한 원색적인 비판과 자못 심각했던 논쟁을 상기해볼 때 역설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지식사회는 외양적으로는 포스트 담론의 수용에 관해 다양한 거부의 몸짓을 취했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지난 20여 년 동안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서서히 포스트 담론이 스며들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굳이 ‘포스트’라는 명칭을 붙일 필요가 없는 자연스런 과정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포스트 담론이 갖춘 지적인 힘의 효과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활발한 논쟁과 토론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스트 담론이 도입된 후 20여 년에 이른 오늘날, 한국 인문사회과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스며들어온 포스트 담론을 총괄적으로 평가하고 성찰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국 지식사회의 전반적인 지형도를 다시 그려보고, 현시점에서 한국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과제를 점검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학술심포지엄은 그동안 한국학 분야의 새로운 논의를 주도했던 포스트 담론의 공과를 따져보고 새로운 연구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서양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과 한국학 연구자들 사이에 상호 소통할 수 있는 기회와 장을 마련함으로써 한국학 연구를 한 단계 도약하도록 하는 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리스 정세에 관한 흥미로운 글 몇 편 퍼옵니다.

 

요즘 통 신문을 못보고 지내는데, 오랜만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리스 정세에 관한 흥미로운 글들이 몇 편 눈에 띄어서 링크해두겠습니다.

 

----------------------------------------------------

 

장석준, [자본에 대한 대중의 역풍이 불다], {레디앙}

http://www.redian.org/archive/2767

 

 

 

오정근, [포퓰리즘 광기에 추락하는 그리스], {매일경제}

http://news.mk.co.kr/v3/view.php?sc=30500002&cm=%EC%98%A4%ED%94%BC%EB%8B%88%EC%96%B8&year=2012&no=318309&relatedcode=&category=

 

(이런 걸 보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나 ...)

 

 

Alex Doherty, Michalis Spourdalakis, "Syriza's Rise"

http://www.newleftproject.org/index.php/site/article_comments/syrizas_rise

 

(그리스 급진 좌파 연합(Syriza)의 성공 요인과 과제에 대한 흥미로운 대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