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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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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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네이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저런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필자가 니라 유발-데이비스였다. 특히 네이션과 여성의 문제라는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참에 그녀의 대표작 중 한 권이 번역ㆍ출간되었길래, 냉큼 이 달의 서평 대상 도서로 골라잡았다.


이 책의 기본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80년대 이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도입으로 이론상으로도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입장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고찰하는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이션에 관해 페미니즘적인 접근법을 도입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네이션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의 소산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공통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서구의 여성과 이슬람 여성, 아프리카의 여성, 아시아의 여성은 억압의 방식과 차별 및 배제의 경험에서 각각 다르다. 따라서 자매애라는 추상적 연대의 몸짓은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현실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또한 네이션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에게 중요한 문제다. 네이션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상적인 준거다. 그런데 여성은 네이션의 생물학적 재생산의 임무를 할당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 어머니 아일랜드, 어머니 인도”(88쪽)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추방과 살해, 모욕과 배제 같은 각종 폭력이 가해진다.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덮어두려고 하거나 위안부 박물관 건립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시선은 어찌 보면 네이션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이션과 젠더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횡단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횡단성의 정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233쪽)와 구별되는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포함한다. 우선 횡단성의 정치는 자기 중심의 상실을 가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연대나 통합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나 약소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연대의 근거가 사라질뿐더러 연대 자체가 무비판적인 동질화로 변질되기 쉽다. 연대가 진정한 연대이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이들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 삶의 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서로 상이하고 독특한 이들 사이의 ‘옮기기’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횡단성의 정치는 연대하는 이들과 일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양립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이 240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만만치 않았다. 이는 이 책이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책이 비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 투쟁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려움은 늘 추상적으로만 사고하는 필자와 같은 한국의 남성 철학도의 한계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에게 구체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 호된 죽비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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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 건너편 서가를 살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서가에 둔 걸까? 러시아 문학이나 뭐 그런 쪽에?


사서는 컴퓨터로 검색했다. 우리 둘 다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친밀하고, 숲 속 나무 사이를 홀로 산책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자유 주변을 맴도는 특별한 시간으로 가득했다.


사서가 고개를 들고 말한다. 두 권 소장 중인데, 안타깝게도 모두 대출됐네요. 예약해 드릴까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에 책 세 권을 들고 있는 다른 할머니 - 나보다 나이가 적다 - 쪽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책을 드는 방식은 특별해서, 다른 어떤 물건을 들 때와도 다르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라 마치 잠이 든 어떤 것처럼 든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 때 같은 방식으로 드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인구 육 만 명 정도의 파리 교외 지역에 있는 공공도서관이다. 그 중 사천 명 정도가 도서관 회원으로 책을 (한 번에 네 권까지) 빌릴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 참고서적을 보러 온다. 교외 지역의 아기나 어린이 숫자를 고려하면, 지역 주민 열 명 중 한 명은 도서관 회원으로 등록을 해서 종종 책을 빌려가 집에서 읽는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누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일까? 아닐 것 같다. 둘 다 그 책을 처음 읽는 걸까? 아니면 둘 중 한 명은 나처럼, 이전에 읽었지만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었던 걸까?


순간 이상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 두 독자들 중 한 명과 내가 마주친다면 - 일요일에 열리는 장터에서, 지하철역에서 나오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빵을 사면서 - 우리는 서로 조금은 의아하다고 느낄 어떤 눈짓을 주고받지 않을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감동을 받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좀 더 특이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마치 누군가 읽은 이야기의 혈류가 그 누군가가 살아온 이야기의 혈류와 만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계속 되어갈 어떤 모습에 보태진다.


복잡할 것도 갈등도 없는 가족관계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그 이야기들이, 생물학적 조상과는 다른, 우리의 공통조상이 된다.


파리 교외의 누군가, 아마도 오늘 밤 의자에 앉아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을 그 누군가는, 이미, 이런 의미에서, 먼, 먼 사촌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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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전문 번역가인 후배와 함께 존 버거의 최근작인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이라는 책을 함께 번역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원제는 Bento's Sketchbook인데, 알다시피 Bento는 스피노자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번역이 다 끝나고 이제 교정을 보고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존 버거가 워낙 뛰어난 소설가, 산문가여서 재미도 있거니와,

사람과 세상을 보는 존 버거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도 여전해서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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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지구적인 폭정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총통도, 스탈린도, 코르테즈도 없다. 오늘날 폭정의 작동은 대륙마다 다르고, 양식은 해당 지역의 역사에 따라 변형되지만, 전체적인 패턴은 동일하다, 순환하는 패턴.


가난한 자와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의 구분은 하나의 심연이다. 전통적인 제약이나 권고는 모두 산산조각 나버렸다. 소비주의는 모든 질문하는 행위를 소비해버린다. 과거는 쓸모없는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자아를,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적을 정하고, 찾아내기 시작했다. 적은 - 종교적, 혹은 민족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뭐든 - 항상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순환적 패턴은 사악한 것이 된다.


이 체계는 경제적으로는 부를 생산하면서, 가난을 더 많이, 집 없는 가족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가난한 자들의 무리를 배제하고, 결과적으로는 제거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경제적인 순환이 오늘날 인간의 상상력을 무력화해버리는, 잔인함에 대한 능력을 키운다.



현장에 가서, 지켜보고, 조사하고, 기록하고, 수정하고, 최종 글을 완성한다, 글이 출간되고, 널리 읽힌다 - 어느 정도가 ‘널리’이고 어느 정도가 ‘좁게’인지는 절대 알 수 없지만 - 문제 작가가 되고, 협박을 받고, 또한 지지도 받고, 수 백 만 명의 남자, 여자, 아이들에 대해 쓰고, 누군가를 경멸했다고 욕을 먹고, 계속 써나가고, 더 거대하지만 피할 수도 있는 비극으로 이어질 힘 있는 자들의 다른 계획들을 까발리고, 기록하고, 대륙들을 오가고, 명백한 절망을 목격하고, 쉬지 않고 책을 내고, 반복해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매달 쉬지 않고 싸우고, 그 달들이 모여 몇 해가 된다. 아룬다티 당신을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가 경고하고 맞서 싸우는 대상은 검증도, 반성도 없이 계속 된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계속 된다. 마치 묵인된, 깨지지 않는 침묵 속에서처럼 계속 된다. 거기에 대해 그 누구라도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것처럼 계속 된다. 그래서 자문한다. 말이 중요한 걸까? 이런 대답이 분명히 돌아왔을 것이다. 여기서 말은 손이 묶인 죄수를 강물에 던져 넣기 전 주머니에 채워주는 돌멩이 같은 거라는.


분석해 보자. 깊이 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 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 치고, 글을 쓰는 것)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零)으로 떨어지는 것, 강요된 침묵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있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 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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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2-03-05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첫문장 부터 마음에 들더니...결국 끝까지.^^ 감사합니다.아...그리고 푸코 세미나 참관기도 잘 읽었습니다. 우연히 서점에서 사카이 다카시의 <통치성과 자유>가 눈에 들어와서 가방에 넣어왔는데..ㅎㅎ 이 주제에 어떤 애정이 느껴지며 왠지 엮일 것 같은 생각이..푸코의 강의록 이외에 다른 추천 책들 생각나실 때 언급해주세요.ㅎㅎ 봄이네요.대학가는 풀잎처럼 파릇 파릇한 새내기들로 흥청거리겠군요..곧 입에 풀칠하기 위해 파리해지겠지만.

balmas 2012-03-13 14:29   좋아요 0 | URL
드팀전 님/ 흥미롭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푸코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네요. 아마 푸코 강의록이 좀더 번역되면 국내에서도 훨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푸코의 맑스]라는 책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푸코와 이탈리아 기자의 대담집인데, 재미있는 책이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그린비 블로그에 가시면 아주 상세한 푸코 연표와 통치성에 관한 외국 학자들의 글이 몇 편 번역돼 있으니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바벨의도서관 2012-03-0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룬다티 로이는 여자이므로 그가 아니라 그'녀'라고 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

balmas 2012-03-09 00:25   좋아요 0 | URL
예 그러고보니까 그렇군요. 최종 교정 볼 때 바꾸도록 하죠.
 

교수신문에 실린 푸코 심포지엄 참관기를 올려놓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참관기'라기보다는 '소개'라고 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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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4732

 

 

젊은 연구자들은 ‘오래된 푸코’에게서 무엇을 보았나 학술대회 참관기_ ‘푸코 이후의 정치와 철학’ 심포지엄


 

2012년 02월 27일 (월) 17:55:51 진태원 고려대 HK연구교수·철학 editor@kyosu.net

 

푸코는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지적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한국사회성격논쟁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중심 과제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의 복원이었다면, 1980년대 말 사회주의의 몰락은 이러한 희망을 순식간에 무너뜨려버렸다. 그 이후 곧바로 한국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같은 각종 포스트 담론의 열기에 휩싸이게 됐으며, 그 중심에는 날카로운 눈매의 민머리 철학자 미셸 푸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 같은 책들은 대학 신입생 필독 도서목록에 올랐고, 담론, 광기, 에피스테메, 규율권력, 파놉티콘 같은 그의 용어들은 순식간에 지적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푸코는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 연이어 권력을 잡으면서 자라난 민주화에 대한 자신감과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로 표출된 대중들의 애국주의적 자부심을 충족시키기에는 규율권력이나 파놉티콘 같은 개념들은 너무 딱딱했다. 그 대신 들뢰즈가 새로운 사상의 총아로 등장했고 노마디즘, 리좀, 탈주가 지적 유행어가 됐다.


2000년대 후반 다시 상황은 급변했다.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민주주의가 시대의 화두가 됐다. 들뢰즈를 대신해 랑시에르, 바디우, 아감벤, 지젝 같은 정치철학자들이 새로 호명됐고, 신자유주의를 규탄하는 와중에 ‘88만원 세대’와 ‘복지국가’가 새로운 논쟁의 키워드로 부각됐다.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출간에 쏠린 관심

 

이런 상황에서 왜 새삼 푸코 심포지엄이 필요할까. 오늘날 푸코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서울 종로의 정독도서관을 가득 메운 연인원 400여명의 청중들 가운데에는 이런 질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푸코가 한국에 소개된 지 20여년이 지났다. 과연 이 ‘오래된 푸코’에게서 어떤 ‘새로운 푸코’를 읽어낼 수 있을까.  

 

사진제공: 그린비

 

 

이번 심포지엄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푸코가 국내에 본격 소개된 지 약 20여 년 동안 광범위한 청중을 상대로 한 푸코 학술 행사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푸코가 한국 학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외국 사상가 중 한 명이고, 그의 주요 저서들이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상황은 여러 모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목적은, 푸코 사상을 전체적으로 재조명해보고, 그것이 우리 시대를 분석하고 실천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목적은 최근 푸코 르네상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과 관련돼 있다. 푸코는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에 취임한 뒤, 안식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청중을 상대로 강의를 했다. 생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 강의는, 1997년부터 강의록들이 유고집으로 출간되면서 연구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특히 얼마 전 국내에 번역된 『안전, 영토, 인구』와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근간)은 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다루고 있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틀 동안 열린 학술대회 첫날에는 네 명의 연구자가 푸코 사상의 다양한 면모들을 조명했다. 역사학자 고원은 푸코와 아날학파 지적 연관성을 추적하면서 역사학자로서 푸코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특히 그는 페르낭 브로델이 푸코의 지적ㆍ인간적 후원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간명하게 보여주었다.


반면 도시계획을 전공하는 임동근은 푸코의 장치(dispositif) 개념이 프랑스 사회과학계에서 어떤 효과를 산출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푸코가 권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장치 개념은 그에 따르면 우발성과 이질성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푸코 계보학의 물질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그는 이것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들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청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치학자 홍태영은 푸코의 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지닌 정치철학적 함의를 따졌다. 자유주의 강의 이후 198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푸코는 주체화 양식에 대한 강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따라서 푸코식의 정치가 어떤 것일지 살펴보는 일은 후세 연구자들의 몫이 됐다. 홍태영은 푸코의 강의록에서 인구와 구별되는 인민 개념이 한 차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피통치자의 정치’, ‘국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사회학자 서동진은 ‘푸코와 사회적인 것’이라는 발표에서 푸코에서 정치경제학의 지위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그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의 대비를 통해 푸코의 내재적 유물론의 한계를 밝혔다. 곧 푸코는 정치경제학을 일종의 아 프리오리로 간주함으로써 反경제주의로 나아간 반면, 마르크스는 ‘노동력 상품’이라는 독특한 상품에 근거해 정치경제학 비판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양자 중에서 더 효과적인 것은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자유주의 비판이다.


둘째 날에는 프랑스철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 푸코 철학의 여러 측면을 살폈다. 허경은 푸코 철학이 우리의 근대를 설명하는 데 어떤 의의가 있는지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푸코의 지적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독해하면서 푸코의 철학적 관심은 서양 근대성의 한계를 살피는 데 있음을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근대성이란 무엇이었는가, 근대성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라는 비판적 질문을 낳는다.


심재원은 푸코 사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집약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푸코의 철학을 관계론적 유명론으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관점이 네트워크로 구성된 세력관계로 권력을 규정하는 그의 권력론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후기 강의록에서 나타나는 견유주의에 대한 분석은 푸코가 파레지아(parrhesia, 진실을 말하기)와 실존 양식의 결합을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푸코, ‘파레지아’와 실존양식 결합 추구

 

진태원은 ‘푸코와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푸코가 민주주의를 다르게 사고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는 특히 동시대의 ‘바깥의 정치’의 사상가들(바디우, 랑시에르, 지젝, 아감벤 등)과 푸코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푸코 강의록의 번역자이기도 한 심세광은 푸코가 1983~84년 강의록에서 다루는 파레지아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그는 흔히 파격적인 기행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는 견유주의자들의 삶의 양식은 스캔들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려는 파레시아의 실천의 표현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신자유주의적 예속화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차례의 심포지엄으로 새로운 푸코의 도래를 단언하는 것은 성급할 것이다. 하지만 뜨거운 청중의 열기와 진지한 분석과 실천적 관심이 결합된 발표들을 접하고 나니 이 날의 푸코는 이미 더 이상 예전의 푸코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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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diony 2012-03-0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으로 인사드리네요. 늦었지만 심포지엄 기획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양일 오후 발표만 들을 수 있어서 좀 아쉬었습니다.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면 꼭 사보고 열심히 곱씹어 봐야 겠습니다. 언제쯤이면 단행본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아... 그리고 혹시 지금 선생님께서 몸 담고 계신 학교 이메일을 사용하고 계신가요?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몇가지 꼭 여쭙고 싶은게 있어서 그 쪽 메일을 통해 보냈는데 확인을 못하시는것 같더라구요.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다음에 좋은 곳에서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블로그에 종종 흔적 남기겠습니다. 건강하세요.

balmas 2012-03-01 23:56   좋아요 0 | URL
예, 책은 올해 10월쯤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메일 확인했습니다. 곧 답장 드릴게요.

도그마 2012-04-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가 "리얼리티(Reality)애 대한 상상(想像)"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사는 누구도 그 "리얼리티"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런데 선거만 되면 프랑스든 한국이든 그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집단들에게 다양한 명칭으로 "주체로서" 호명(呼名)됩니다.주체로 호명된 그들은 선거날 스스로를 "주체"라고 생각하며 투표합니다.
그럼 "주체들"이 투표한 선거가 끝난 다음에 세상이 바뀌나요?
조금 바뀔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지배집단이 만들어낸 지배질서가 공고화해지는 효과를 낳게 됩니다. 선거라는 것은 결국에는 지배집단이 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主體-效果)왜냐하면 이 세상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선거로 어떻게 그것을 바꾸겠습니까?
그럼 어떤 방법이 있는가? 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알튀세르를 이해해도 문제가 없을까요? 푸코의 문제의식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비판하는 것도 가능하죠. 푸코와 들뢰즈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주체"가 가능하다고 봤지만 알튀세르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이데올로기 안에 있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그들을 비판한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도그마를 경계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balmas 2012-04-11 04:05   좋아요 0 | URL
전체적으로 무엇을 질문하려는 의도인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가 생각보다 좀더 미묘합니다. 도그마님이 정리하신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전적인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ㅎㅎ

사실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변화했다고 볼 수 있고, 그 이론 내부에 얼마간 애매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알튀세르는 리얼리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그 리얼리티를 넒은 의미의 '경제', 곧 생산양식이라고 생각했고, 맑스주의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고 봤죠. 도그마님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도그마님이 이미 포스트맑스주의적 관점을 은연중에 전제하기 때문일 겁니다. 적어도 알튀세르 자신은 맑스주의자로서 리얼리티는 계급투쟁, 특히 생산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리얼리티를 직접 인식하지 않고 상상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정의하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 또는 이렇게도 정의합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다."

여기서 핵심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현실적인 실존 조건이란 계급적 조건을 말합니다. 곧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에서 모든 인간,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떤 계급에 속한 사람은 어떤 계급의 성원으로 나타나지 않고(재벌, 노동자, 농민, 지식인 ...)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나타납니다. 곧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 성원으로서 x는 추상적인 개인 x로서, 계급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러한 조건에 앞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개인으로서 상상적으로 표상/재현/상연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은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환상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은 아닌데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는 법적 체계를 통해 모든 사람을 법적 주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도적 차원에서 그렇게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실 사회에서 각 개인은 계급이라는 현실적인 존재조건에 따라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계급적 조건에 선행하는 추상적인 개인 x로 나타나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제도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거죠.

알튀세르가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든 사례를 보면, 노동자와 자본가는 계급적으로 상이하고 또 불평등하지만, 법적인 관계에서 보면 동등한 개인, 동등한 법적 주체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고용 계약을 맺는 거죠.

3) 이렇게 본다면,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게 '경제'를 '리얼리티'로 간주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리얼리티에 대한 '표상'이나 '상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리얼리티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고전 맑스주의와 상당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펴내는 [철학논집] 28집(2012. 2.)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이 다 완료된 글이 아니니까 혹시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출판된 판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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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자동장치란 무엇인가? 데카르트, 스피노자, 들뢰즈

 

 

 

I. 서론: 데카르트와 함께,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바루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1632-1677)의 철학은 데카르트와의 대결의 소산이라고 범박하게 말할 수 있다면, 정신이론에 대해서는 더욱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동시대의 많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데카르트가 이룩한 사상적인 변혁을 받아들이고 지지하면서 동시에 그가 남겨둔 미완의 과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썼다. 이 미완의 과제들 중에는 데카르트 철학의 모순에 대한 해결이라는 과제도 포함돼 있었는데, 그것은 특히 정신과 신체의 관계라는 문제로 집약된다.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증명하고 있듯이, 비물질적인 것이며 항상 하나인 사유하는 실체로서의 정신과, 공간 속에서 연장하며 부분들로 분할될 수 있는 물질적 실체인 신체는 서로 상이한 것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작용도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일상 경험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 자신이 인정하듯이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관념은 “각각의 사람들이 철학함 없이도 항상 자기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각각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기 자신이 “하나의 신체와 하나의 사고를 함께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인격체”(엘리자베스에게 보내는 1643년 6월 28일자 편지」)라고 경험한다.[AT III 694. 엘리자베스와의 서신교환은 정신과 신체의 연합 및 정념론에 관한 데카르트의 중심적인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핵심 텍스트들이다. 이 서신교환의 의의에 관해서는 특히 Tallon-Hugon 2002, pp. 89-112 참조.] 더욱이 데카르트는 [성찰]의 마지막 「여섯 번째 성찰」에서도 인간이 이러한 의미의 연합체라는 것을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이 나에게 아주 분명히 가르쳐주는 바는, 내가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 즉 고통을 느낄 때 상태가 좋지 않으며, 허기나 갈증을 느낄 때는 음식과 물을 필요로 하는 신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속에 어떤 진리가 있음을 의심할 수가 없다.

나아가 자연은 고통, 허기, 갈증 등과 같은 감각을 통해 선원이 배 안에 있는 것처럼 내가 내 신체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conjunctum) 있고, 거의 혼합되어(quasi permixtum) 있어서 신체와 일체(unum)를 이루고 있음도 가르쳐 주고 있다.(AT VII 112; Descartes 1996b, 112쪽)

 

하지만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일상 경험과의 충돌을 피할 수는 있다고 해도 [성찰] 자체의 논의만으로는 어떻게 전혀 상이한 질서에 속하는 정신과 신체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고, 더욱이 “거의 혼합되어 있어서 신체와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1643년 이후 엘리자베스와의 서신교환의 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이러한 난점이다.


데카르트는 이 서신교환에서 이른바 “기초 관념들”(notions primitives)에 관한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난점에 답변하려고 시도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초 관념들은 우리의 모든 인식의 근거를 이루는 원천과 같은 것으로, 모든 학문은 이 관념들을 잘 구분하고 이것들을 각각의 영역에 잘 적용하는 데서 성립한다. 데카르트는 세 가지 기초 관념을 제시한다. 먼저 사유가 있는데, 이는 영혼과 신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를 기반으로 해서 형이상학이 확실하고 안전한 토대를 갖는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다. 그 다음 연장은 모든 물체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자연학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구성된다. 데카르트가 제시하는 마지막 기초 관념은 인간, 곧 “영혼과 신체의 연합(union)”으로서 인간이라는 관념이다. 사유라는 첫 번째 기초 관념이 감각과 상상에서 분리된 순수 지성의 활동을 필요로 하고, 연장이라는 두 번째 기초 관념은 상상의 도움을 받는 지성의 활동을 요구한다면, 세 번째 기초 관념은 자신의 명석함을 감각으로부터 도출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세 번째 기초 관념은 대상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 아니라, 실천학, 곧 우리에게 유용하고 해로운 것을 식별함으로써 우리 존재를 잘 보존하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엘리자베스에게 보내는 1643년 5월 21일자 편지, AT III, p. 665 참조. 또한 6월 28일 편지, AT III, pp. 692-694도 참조.] 따라서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에 함축된 이원론적 관점이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과 빚을 수밖에 없는 갈등을, 문제의 차원을 전환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한 셈이다.


스피노자의 정신 이론은 데카르트가 남겨 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독자적인 답변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특히 데카르트의 해법, 곧 정신과 신체의 상호 작용이라는 해법을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답변을 모색한다. 이 글은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그것을 내재적으로 비판ㆍ극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리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정신 이론, 곧 정신적 자동장치 이론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2절에서는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 비판의 논점을 살펴볼 것이며, 3절에서는 스피노자 존재론의 특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어떻게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비판이 그의 존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고찰해볼 것이다. 그리고 4절에서는 스피노자의 정신적 자동장치 이론은 정신을 “신체의 관념”으로 정의하는 데서 따라 나온다는 점을 해명할 것이다. 여기서 도출되는 핵심 논점이 정신과 신체가 능동-수동의 관계에서 비례적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인데, 이는 평행론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현대 스피노자 연구자들 중에서 평행론을 가장 정교하게 이론화한 사람들은 프랑스 철학자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다. 따라서 5절에서는 들뢰즈의 평행론 모델을 분석하면서 이것이 스피노자의 정신 이론을 설명하는 데 적합한 모델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것이다.

 

II.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비판

 

스피노자가 15년의 시간을 들여 집필한 필생의 대작 [윤리학]은 매우 건조하고 난해한 문체로 악명이 높은 책이다. 이 책에는 철학자를 비롯해서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오직 정제된 논증과 익명적인 적수들에 대한 비판만이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드문 예외가 존재하는데,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서문」과 5부 「서문」에서 데카르트의 이름을 두 차례에 걸쳐 거명하면서 그의 정신 이론을 비판한다. 스피노자의 비판은 세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데카르트의 심신관계론은 연장 속성과 사유 속성의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자신의 철학의 근본 원리를 망각하고, 상이한 본성을 지닌 두 가지 실재, 곧 정신과 실체의 상호작용을 긍정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스피노자는 특히 데카르트가 두뇌 안에 있는 “송과선”(glandulae pineali)이라는 가상의 장소를 설정하여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스콜라철학이 가정하고 있는 “일체의 은밀한 성질보다 더 은밀한(omni occulta qualitate occultiorem)”(E V prf.; G II 279) 시도라고 부르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이하에서 스피노자 저작은 다음과 같은 약어로 표시하겠다. 스피노자 전집은 G라는 약칭 아래 권 수는 로마자로, 페이지 수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각각의 저작 및 [윤리학]의 정의와 공리, 정리, 증명, 주석 등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시한다.

[지성개선론]: TIE, [소론]: KV,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PPD, [윤리학]: E

정의: D, 공리: A, 정리: P, 증명: d, 따름정리: c, 주석: s, 보조정리: L, 서문: prf.

E II P29s → [윤리학] 2부 정리 29의 주석

KV II, 17, §5 → [소론] 2부 17장 5절]


둘째,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라는 관점은 정신과 신체의 진정한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재로서,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서 인식”되며, “실재들의 연관과 질서는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는 간에 하나”(E III P2s; G II 141)인데 비해,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를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두 가지 실체로 간주하고 있어서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상이한 실체들이 어떻게 연합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 연합이라는 세 가지 기초 관념 이론을 통해 이러한 난점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에게 이는 체계상의 모순에 대한 임기응변식의 해결책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데카르트의 계승자들은 이러한 모순을 데카르트보다 더 일관되게 해결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예컨대 말브랑슈 같은 경우는 기회원인론을 통해 신체만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과감하게 탈실재화하고, 연합 개념을 신과 정신의 연합, 정신과 신체의 연합으로 이중화함으로써 데카르트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2004 참조.]


셋째, 또한 이러한 관점은 정서들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상호작용의 관점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놓이게 된다. 곧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는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반비례하기 때문에, 신체가 수동적일 때 정신이 능동적이며 신체가 수동적일 때 정신이 능동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정서들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존하며 우리는 정서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다(absolute imperare)고 믿고”(E V prf.; G II 279) 있는 데서 비롯하는 생각이다. 곧 이러한 관점은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정신의 권능(potestas)[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potentia)과 “권능”(potestas)의 구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양자의 개념이 지니는 의미와 이러한 구분의 의의에 대해서는 balibar 2005의 「용어해설」에 수록된 “역량-권능” 항목을 참조하라.]에만 달려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다른 많은 것들은 정신의 결단(mentis decreto)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E III P2s; G II 142) 하지만 이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주장한 것처럼 “자신의 행동은 의식하지만(suarum actionum sunt conscii)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하기(causarum a quibus determinantur ignari)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고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상에서 유래한다. 곧 정신이 내리는 결단이나 신체의 행동이나 모두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 또는 그 인간적 표현인 욕망에서 생겨나지만, 가상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를 정신에 고유한 권능 내지 의지의 권능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신랄한 표현에 따르면,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고 술주정뱅이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유 의지로 지껄인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정서의 고유한 역량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정서가 우리의 존재의 보존과 윤리적 실천에 대해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역으로, 스피노자의 정신이론은 이 세 가지 비판에 전제돼 있는 스피노자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정신-신체 이원론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정신과 신체라는 이질적인 두 존재자가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실체가 아닌지, 곧 어떻게 서로 이질적인 양자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지 설명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통일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의 고유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데카르트가 이질적인 두 개의 실체가 어떻게 서로에 대해 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풀기 어려운 난문에 직면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그의 철학의 혁신에서 생겨난 결과다. 데카르트는 (갈릴레이와 더불어) 인간의 신체를 비롯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기하학적인 원리에 따라 설명하는 것을 새로운 자연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그는 물질의 본성을 연장(延長)(길이, 넓이, 깊이)으로 규정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학이 전제하던 물체들이 지닌 힘을 ‘은밀한 성질’이라고 하여 제거한다. 이렇게 해서 물질 또는 자연 전체는 (창조주의 도움이 없이) 그 자체로는 작용할 수 없는 불활성의 존재자가 되며, 자연 안의 각각의 사물들(신체를 비롯한 물체들)은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연적 사물들에게는 외부 물체의 작용에 따라 움직이는 피동적 작용의 가능성만 남게 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이러한 불활성의 자연적 사물의 지위에서 구해내어 그에게 자유의 여지를 남겨 주려고 했으며, 이것이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이 점을 아주 명쾌하게 보여준 사람은 페르디낭 알퀴에(Ferdiand Alquié)다. Alquié 1996 참조]


반대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정신과 신체를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개의 실체로 보지 않고 처음부터 인간을 통일체로 파악하면서 정신과 신체를 이러한 통일체의 두 가지 표현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스피노자가 정신을 신체의 형상으로 보는 중세철학의 관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그는 갈릴레이, 데카르트와 더불어 자연을 기하학적인 관점에 따라 설명하려는 근대 과학의 기획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신체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 따라서 정신도 자연적 사물과 동일한 인과 관계에 따라 규정되며, 동일한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 스피노자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가 사후에 출간된 초기 저작 [지성개선론]에서 정신을 “정신적 자동장치”(automa spirituale)로 규정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을 뿐이지만, 많은 스피노자 주석가들은 이 개념이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정신 이론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Macherey 2010 및 Levy 2000 참조.] 그런데 정신이 정신적 자동장치, 곧 일종의 기계와 같다면, 그러한 정신을 과연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그 경우 정신이 과연 참된 인식을 획득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을까?


셋째, 데카르트는 인간 신체가 자연 사물들 및 기계와 마찬가지로 관성적 인과관계에 따라 작용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정신을 신체와 전혀 상이한 존재론적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마련해주려고 했다. 따라서 정신의 자율성은 자연적 인과관계, 곧 신체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증대하게 된다. 신체의 능동성과 정신의 수동성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식의 상호작용 이론을 거부한다면,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은 가운데 인간의 자유 또는 자율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기계론적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자연 속에서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지 않고서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와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 사이에 반비례적인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인간 및 정신의 자율성을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III. 스피노자의 존재론: 존재론적 동일성과 속성들의 실재적 구별

 

우선 스피노자의 존재론에서 시작해보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ㆍ인간학적 통일성이라는 관점을 택한다. 이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절대적인 통일체이며(E I D6), 이러한 실체의 역량을 표현하는 각각의 양태들 역시 하나의 통일체라는 것, 그리고 이 양태들은 연장과 사유라는 속성들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하는 물체로 때로는 사유하는 실재로 표현된다는 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처럼 자연을 하나의 통일체로, 또 인간을 비롯한 각각의 개체들 역시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 원리는 [윤리학] 2부 정리 7에서 제시된다.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Ordo & connexio idearum idem est, ac ordo & connexio rerum.”]

 

이른바 ‘평행론’(parallelism) 명제라고 불리는 이 명제는 아주 간단하게 보이지만 사실 여러 가지 논점을 함축하고 있다. 스피노자 자신이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바 있는 평행론이라는 명칭이 과연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그의 심신이론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것인지 여부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이 명제의 존재론적ㆍ인식론적ㆍ인간학적 함의를 해명해보자.


2부 정리 7은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연의 인과적인 동일성을 표현한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의 6에서 신을 “절대적 존재자, 곧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로 규정한다. 속성들 각자가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은 속성들 각자가 자율적이라는 것(스피노자의 전문적인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유(類)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성들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속성들은 서로 동등하다. 곧 속성들 중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가령 사유 속성은 연장 속성에 비해 우월하지 않으며, 연장 속성도 사유 속성에 비해 우월하지 않다. 그리하여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정신을 비롯한 관념들)도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신체를 비롯한 물체들)에 비해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인간은 이것들 중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만 인식할 수 있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스피노자가 말하듯 신 또는 실체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성이란 모든 것을 포괄함을 뜻한다. 곧 신 또는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것은 실체가 각자 무한한, 곧 각자 다른 것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체의 절대성은 실체의 절대적 동일성을 함축한다(E I P11).[이 문제에 관한 빼어난 주석으로는 Gueroult I, p. 177 이하 참조.]


그러나 이때 스피노자가 말하는 실체나 신을 하나의 개체, 더 나아가 인격적 개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또는 신은 자연 전체이지 이러저러한 개별적 존재자가 아니다. 그리고 실체를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은 각자 자율적인 인과 연관 내지 질서이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은 무한하게 많은 것들을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생산해내는 인과관계들 전체와 다르지 않다(E I P16). 따라서 2부 정리 7이 의미하는 바는 자연을 구성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은 동일한 하나의 연관 내지 질서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자연을 연장의 속성 아래 인식하든 아니면 사유 속성 아래 인식하든, 또는 그 어떤 속성 아래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발견한다.”(E II P7s)[마슈레는 [윤리학] 2부에 관한 주석서에서 2부 정리 7에 나오는 “idem est”, 곧 “같은 것이다”라는 문구의 의미에 대한 빼어난 논의를 통해 이 점을 명쾌하게 밝혀준 바 있다. Macherey 1997, p. 71 이하 참조.] 이 점은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도 다시 긍정된다. “자연이 이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아니면 저 속성 아래서 인식되든 간에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은 하나다.”(E III P2s)


2부 정리 7의 또 다른 논점은 속성들 사이의 실재적 구별이라는 논점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의 인과적 질서와 연관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유와 연장 같은 속성들이 각자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고 따라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한에서, 사유와 연장은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곧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호 제약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런 인과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 관계는 오직 각각의 속성 내부에서 전개될 뿐이다. 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은 다른 관념과 인과 관계를 맺으며, 연장 속성에 속하는 물체 내지 신체는 다른 물체 내지 신체와 인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정신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신체 사이에도 아무런 인과 관계 내지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는 정신이 사고하도록 규정할 수 없고, 정신은 신체가 운동하거나 정지하도록 또는 그 이외에 (만약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규정할 수 없다.”(E III P2)


하지만 정신과 신체 사이에 아무런 인과 관계나 상호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신과 신체가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은 아니다. 실체가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을 통해 동일하게 표현되듯이, 그리고 동일한 실재들의 질서 또는 연관이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표현되듯이, 인간이라는 통일체 역시 때로는 정신을 통해, 그리고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된다.


정신과 신체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함의하는 것 중 하나는, [윤리학] 2부 정리 7의 주석이 말하듯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원인들의 연쇄”를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의 인과 연쇄는 근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한다. 관성이란 모든 존재자는 외부 원인의 작용이 없는 한 무한정한 시간 동안 동일하게 지속하려는 경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순수한 수동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존재자의 상태와 작용의 변화는 외부 원인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수동성의 원리처럼 보이는 관성 원리 및 그것의 표현인 코나투스(conatus) 개념 자신의 인간학과 윤리학의 토대로 삼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스피노자는 코나투스와 그 인간학적 표현으로서 욕망을 정의하기 이전에 [윤리학] 3부 정리 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실재도 외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파괴될 수 없다.” 정리 4의 증명이 말하듯이 이것은 “그 자체로 자명한” 원리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코나투스와 결부되면, 코나투스는 순수한 수동성을 표현하는 대신 실정적인 내적 본질을 표현하는 개념이 된다. 스피노자가 정리 4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실재의 자기 파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실재는 다른 존재자에 의해, 다른 원인에 의해서만 파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으로 이것은 모든 실재는 그 자체로만 본다면, 파괴되지 않고 무한정하게 존속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실재가 자신의 고유한 내적 성향, 내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다.[이 점에 관해서는 Macherey 2010, 275쪽 이하 참조.]


그러므로 모든 실재는 외부 원인의 작용을 받지 않는 한 무한정한 시간 동안 동일하게 지속하려는 경향을 지닌다는 것은 순전한 수동성 내지 피동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처럼 동일하게 지속하려는 경향은 그러한 존재자가 다른 원인에 의해 간섭받기 이전에 자기 스스로 고유하게 수행하는 노력이며, 이러한 독자적인 활동은 곧 능동성의 최소의 표현이자 다른 독자적인 행위들을 위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의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체계 속에 존재하고 항상 이미 다른 실재들에 의존하여 존립하는 유한한 실재들은 이러한 코나투스를 통해 내적인 존재와 행위의 근거를 얻게 된다.


인간의 본질이 코나투스 내지 욕망이고, 인간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는 정신과 신체는 이러한 본질을 각각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에 따라 동일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면, 신체가 다른 신체나 물체들과의 인과 관계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처럼, 정신 역시 다른 정신들 내지 관념들과의 인과 연쇄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한다. 스피노자가 정신적 자동장치라는 다소 충격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인간 정신이 순전히 피동적이거나 타동적인 기계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정신 역시 신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주재하는 인과 관계 속에서 작용하며, 그러한 인과 관계의 규칙들을 잘 따를 경우에만 인간은 참된 인식, 또는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빌리면) 적합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음을 뜻한다.

 

IV. 정신적 자동장치: 스피노자의 정신

 

이 점을 좀더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정신을 ‘신체의 관념’으로 규정하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리학] 2부 정리 13은 신체를 정신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 곧 현행적으로 실존하는 연장의 일정한 양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Objectum ideae, humanam mentem constituentis, est corpus, sive certus extensionis modus actu existens, & nihil aliud.”]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관념과 그 대상의 관계로 제시하는 것은 2부 정리 7이 자연의 통일성을 동일한 하나의 질서와 연관의 두 측면, 곧 형상적 측면과 표상적 측면의 관계로 표현한 데서 직접 따라 나온다. 그러나 이때의 ‘관념’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표상으로서의 관념, 실재를 모사하는 것으로서의 관념이 아니라, 2부 정의 3과 그것에 대한 <해명>에서 정의되는 것처럼 ‘활동’ 내지 ‘능동’으로서의 관념을 의미한다. “나는 관념을, 정신이 사고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해명> 나는 지각이라기보다는 개념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지각이라는 명칭은 정신이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작용을 겪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념은 정신의 활동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신 역시 이러한 관념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기체(基體)를 의미하지 않으며 인식하고 사고하고 정서를 갖는 등의 활동으로서의 관념을 뜻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신체를 정신의 대상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인간 신체의 변용(affectio)의 질서와 연관을 인간 인식의 유일한 직접적 대상, 유일한 소재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은 외부 물체가 신체에 남긴 흔적들을 가리키는 신체의 변용들을 통해서만 외부 물체들을 인식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신체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도 오직 이러한 변용들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2부 정리 19, 2부 정리 23을 참조).[이처럼 인간 신체가 인간 정신의 대상으로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인간 신체 또는 인간 신체의 변용들이 참되거나 적합하게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직접적인 대상은 “변용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상태에서 인간의 인식은 항상 부적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정리 11의 따름정리에서 “부적합하게”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 정신은 실재를 부분적으로, 또는 부적합하게(ex parte, sive inadaequate) 지각한다.”(G II 95) 이 점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Gueroult II, pp. 121 이하; Macherey II, pp. 111-113 참조.] 따라서 역으로 인간 정신은 인간 신체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양자는 관념과 관념의 대상으로서 서로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신체의 관념과 신체, 곧 (2부 정리 13에 의해) 정신과 신체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이며, 우리는 이를 때로는 사유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한다.”(E II P21s) 하지만 이 경우에도 관념과 관념의 대상이라는 표현을, 예컨대 인식하는 개인에게 외재적인 임의의 대상(가령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과 이 대상에 대해 인간이 지니고 있는 관념과 같은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관념은 인간의 정신, 곧 사고하고 인식하고 느끼고 정서를 갖는 등의 정신적 활동을 의미하며, 관념의 대상은 이러한 관념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이 관념에 대해 사고와 인식, 정서 등을 위한 소재를 제공해주는 것인 신체를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로부터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 신체는 우리가 그것을 감각하는 대로 실존한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E II P13c)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의 통일체로,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에 속하는 두 개의 양태들(곧 정신과 신체)의 통일체로 간주하며, 따라서 정신과 신체는 이 통일체의 두 가지 표현이 된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는 통일체는 동일한 인과 질서와 연관이며, 이러한 질서와 연관이 사유 속성 아래서는 정신으로 표현되고 연장 속성 아래서는 신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정신과 신체가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실체들이라는 이유로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연장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신체와 사유 속성에 속하는 양태인 정신을 지닌 인간은 하나의 통일체(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일체)이며, 이러한 동일체는 때로는 연장의 속성에 따라 때로는 사유의 속성에 따라 표현되거나 인식되는 것이다.


심신동일성론의 가장 중요한 인식론적 함의는 경험론적 인식론과 단절한다는 점이다. 이때의 경험론적 인식론이란 로크에서 흄에 이르는 이른바 영국의 경험론 전통에서 볼 수 있는 인식관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의 인식관을 가리킨다. 곧 이러한 경험론은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지적했던 것처럼, 인식은 인식 주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모사에서 출발하여 추상을 통해 보편적 인식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의미한다.

 

안다는 것은 현실 대상으로부터 그 본질을 추상하는 것이며, 주체가 이러한 본질을 소유하는 것이 지식이라 불린다. 이같은 추상 개념이 어떤 특수한 변형태를 띠든 간에 이 개념은 경험론의 종별적인 지표를 이루는 불변적인 구조를 정의한다. 주어진 현실 대상으로부터 그 본질을 추상하는 경험론적 추상은 현실적 추상이며, 이것이 주체가 실재적 본질을 소유하게 해주는 것이다. [...] 현실 대상의 현실적 부분으로 인식된 지식을 현실 대상의 현실적 구조로 투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지식에 대한 경험론적 관점의 종별적인 문제설정을 구성하는 것이다.(Althusser et al. 1996, p. 33―강조는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이러한 경험론적 관점은 심지어 헤겔에서도 발견된다고 본다. “지식에 대한 경험론적 관점[이라는] [...] 이 용어를 나는 광의로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합리론적 경험론과 감각론적 경험론 모두를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심지어 헤겔의 사고 안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Althusser et al. 1996, p. 32(강조는 알튀세르).]

 

넓은 의미의 경험론에서 인식은 현실 대상에서 인식 대상으로 또는 물체에서 관념으로 진행된다고 가정하는 데 비해, 스피노자는 인식은 사유 속성 안에서만, 곧 관념에서 관념으로만 진행한다고 간주한다. 이는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존재론적으로 서로 독립적이며, 따라서 정신과 신체는 서로에 대해 아무런 인과 작용도 하지 않는다고 보는 2부 정리 7 및 그 주석, 그리고 2부 정리 13에서 바로 따라 나오는 논점이다.


2부 정리 13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인간 정신의 대상은 인간의 신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외부 물체들을 직접 인식할 수 없으며 항상 외부 물체들이 인간의 신체에 남긴 변용들, 곧 이미지들을 통해서 외부 물체들에 대해 인식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용의 결과들인 이미지로부터 이미지에 대한 인식인 상상으로 인식의 방향이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관념의 독특한 대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신 안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 존재”([윤리학] 2부 정리 9의 따름정리)하므로, 이미지들 다음에 그에 대한 인식으로서 상상들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들은 그것들이 생겨나는 순간 항상 이미 그것들에 대한 관념인 상상들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곧 이미지는 그것에 대한 관념인 상상 없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식은 항상 이미 관념에서 관념으로 진행하지 결코 물체에서 관념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지성개선론]에서 정신적 자동장치라는 개념으로 정신을 정의했을 때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점이다.

 

우리는 참된 관념은 단순한 관념이거나 단순한 관념들로 합성된 관념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참된 관념은 왜 그리고 어떻게 어떤 것이 존재하거나 생겨나게 되었는지 보여 준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또한 우리는 참된 관념의 표상적 결과들은 정신 안에서 대상의 형상적 본성과 일치하게 진행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이는 고대인들이 말한 것, 곧 참된 인식은 원인에서 결과들로 나아간다는 것과 같은 점이다. 단 내가 아는 한 고대인들은 결코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한 것처럼 정신을 정신적 자동장치처럼 어떤 법칙들에 따라 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TIE 85; G II 32)

 

정신적 자동장치 또는 자동기계라는 충격적인 표현 때문에 사람들이 지레 짐작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표현을 사용한 스피노자의 의도는 정신으로부터 능동적인 힘 또는 역량을 배제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의도는 “참된 관념의 표상적 결과들은 정신 안에서 대상의 형상적 본성과 일치하게 진행한다는 점”이나 “어떤 법칙들에 따라 작용하는”과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정신은 정신 안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인과연쇄에 따라 관념에서 관념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이처럼 관념에서 관념으로 인식이 진행된다는 것은 우리가 앞서 말한 것처럼 관념들은 수동적인 상이 아니라 활동, 행위라는 것을 함축한다. 인식이 관념들에서 관념들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식이 관념들 사이의 인과성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물체들 각각이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관념들도 하나의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2부 정리 3의 “해명”에서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관념은 “활동”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2부에서 지속적으로 관념은 “도판 위의 그림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이처럼 관념과 그림을 구분하는 것은 특히 2부 정리 43의 주석과 정리 48의 주석 및 정리 49의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념과 도판 위의 그림을 동일시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관념들은 내 안에 그림들 또는 이미지들로 존재한다.”(AT IX 33)], 따라서 이는 데카르트와의 거리두기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데카르트가 과연 관념을 “도판 위의 그림들”로 환원시켰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데카르트 자신이 [성찰] 라틴어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판단뿐인데, 여기에서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판단에 있어 발견되는 가장 주요하고 흔한 오류는, 내 속에 있는 관념이 내 외부에 있는 실재와 유사하거나 일치한다고 판단할 때 일어난다.”(AT VII 60; 이현복 II, 60쪽) 이런 점에서 보면 데카르트가 관념을 이미지, 그것도 대상과 닮은 이미지들로 환원시켰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론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 유사성 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관념을 도판 위의 그림들로 환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것과 동일한 전제, 곧 관념들은 수동적이라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Gueroult 1953, pp. 185 이하 참조.] 관념을 도판 위의 그림, 그것도 “침묵하는” 그림과 구분하는 것은 관념이 외부 실재에 대한 모상이 아니며, 관념의 본질은 개별 실재와의 유사성에 있지 않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관념을 물체와의 접촉을 통해 우리들에게 형성되는 이미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유사한 이미지도 형성하는 못하는 실재의 관념은 아무런 관념도 아니고 우리들이 의지의 자의에 따라 만들어내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따라서 그들은 관념들을 도판 위의 침묵하는 그림들로 간주한다.”(E II P49s; G II 132) 하지만 이미지들 자체가 이미 외부 물체와 유사성 관계를 맺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념과 이미지를 혼동하고 더 나아가 관념을 외부 실재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중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관념들이 활동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관념이 자신 안에 고유한 긍정과 부정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정신 안에는 관념이 관념인 한에서 포함하는 것 이외의 어떤 의지 작용, 곧 어떤 긍정이나 부정도 존재하지 않는다.”(E II P49)],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지각과 의지 사이의 구분이 성립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네 번째 성찰」에서 볼 수 있듯이, “인식 능력”(facultas cognoscendi)으로서의 지성과 “선택 능력”(facultas eligendi)으로서의 의지를 구분하면서, 전자에게는 관념을 지각하는 역할을, 그리고 후자에게는 지각된 관념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역할을 할당하고 있다.[AT VII 58; 이현복 II, 85-86쪽.] 반면 스피노자는 “지각”이나 “명석한 지식” 같은 데카르트식의 용어법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데카르트와 같은 지성과 의지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실 관념 자체 내에 긍정과 부정의 힘이 포함되어 있다면, 지성 이외에 의지의 판단 능력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초기 저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가령 그는 [지성개선론]에서 지각의 네 가지 양식을 분류하고 난 뒤 “관념들 바깥에는 긍정도 부정도, 어떠한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TIE 34; G II 15)고 명시적으로 못박고 있다.], [윤리학] 2부 정리 49의 주석에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능력으로서의 의지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이러한 지성과 의지의 구분에 대한 비판이 그의 심신이론의 결과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연장의 개념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사유의 본성에 주의하는 사람은 이러한 편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왜냐하면 말과 이미지의 본질은 사유 개념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 신체 운동에 의해서만 형성되기 때문이다.”(E II P49s; G II 132)


더 나아가 스피노자는 지성과 의지의 구분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정신에서 상이한 능력들을 구분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이미 데카르트는 [정신지도규칙]의 첫 번째 규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여 모든 학문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이들[스콜라철학자들]에 따르면 학문들은 그 대상의 상이성에 따라 서로 분리될 수 있고, 그래서 다른 학문을 고찰함이 없이 오직 그 하나만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모든 학문은 인간의 지혜와 다르지 않고, 지혜가 비록 여러 상이한 대상에 적용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AT X 360; 이현복 I, 15-16쪽) 마리옹에 따르면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승되어온 서양의 학문 이론 일반을 변혁하려는 데카르트의 야심적인 기획의 기초를 이루는 발상이다. Marion 1981 참조.], 이러한 학문의 동일성을 정신의 동일성 위에 기초 짓고 있다.[“학문의 통일적 단일성이 기초지어지는 것은 정신의 자기동일성에서이다. 모든 지식은 언제나 자기동일적이고 단일한 정신에 의해 묶인다. 지식은 정신활동의 산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때문이다. 각각의 개별 학문은 이 세계를 반영하는 그림들이되 이 그림들은 하나의 통일된 도화지 위에 그려진다. 이 도화지 자체의 통일성과 그 폭은 의식의 자기동일성 범위 내에 있다.” 김상환 1992, 368쪽.] 다만 데카르트는 여전히 지성과 의지 같은 정신 능력을 구분하고 있고, 지성 안에서도 순수 지성, 상상력, 기억력, 감각 등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이러한 능력들을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가령 올덴부르크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스피노자는 “의지(voluntas)와 이러저러한 의지작용(volitio) 사이에는 하양과 이러저러한 하얀 것들 사이에, 또는 인간성과 이러저러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관계가 존재한다”(G IV 8-9)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의지는 하양 자체와 마찬가지로 실재하지 않는 사고상의 존재자들(ens rationis)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든 의지작용의 기원을 이루는 일종의 원인, 곧 “능력”으로 간주하는 철학자들(특히 이 편지의 맥락에서는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공통적인 오류를 비판하려는 스피노자의 의도를 보여준다.


정신에서 상이한 능력들을 구별하는 대신 스피노자는 정신의 능동과 수동, 신체의 능동과 수동이라는 구별을 인식론 및 윤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로 설정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들보다 동시에 더 많은 방식으로 작용하거나 작용을 겪을 수 있는 소질을 갖고 있을수록, 이 신체의 정신은 다른 정신들보다 실재들을 동시에 더 많이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한 신체의 작용이 자기 자신에게만 더 많이 의존할수록 이 신체와 함께 작용하기 위해 협력하는 신체들이 더 적어지고, 이 신체의 정신은 더 판명한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E II P13s)

 

스피노자의 첫 번째 논점은 물체 내지 신체의 질서와 정신의 질서가 공통적이라는 점이다. 곧 한 신체가 다른 신체들에 비해 “작용”하거나 “작용을 겪을” 수 있는 능력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이 신체의 정신도 실재들을 동시에 더 많이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둘째,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신체의 작용과 다른 신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작용하는 것을 구별하면서 전자의 비율이 증대할수록 정신의 판명한 인식의 역량도 증대한다고 언급한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만 의존하는”이라는 표현은 어떤 한 물체가 다른 물체들과의 관계없이 자기 혼자서만 작용할수록 더 많은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윤리학] 3부 정의 2에서 말하듯 “우리가 적합한 원인인”(cujus adaequata sumus causa) 경우, 곧 우리가 능동적인 경우를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가 능동적일수록 우리의 정신의 인식의 역량도 증대한다.

이는 「자연학 소론」 바로 다음에 나오는 정리 14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인간의 정신은 매우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신체가 더 많은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러한 소질은 더욱 커진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달리 정신에서 의지와 지각 사이에 능동과 수동의 관계를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 자체가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게 되고, 이러한 정신의 수동성 및 능동성은 신체의 수동성 및 능동성과 공통적인 질서에 따라 전개된다. 이는 스피노자에게는 감각과 이성 또는 지성 사이에 대립 내지 반비례 관계가 성립하지 않음을 뜻한다. 감각은 그 자체로 불명료하고 혼동된 사고가 아니며 지성은 그 자체로 명석하고 판명한 사고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정신과 신체를 상반된 것으로, 또는 적어도 서로에 대하여 간섭하고 작용을 주고받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정신의 질서와 연관은 신체의 질서의 연관과 평행하다고, 또는 오히려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데서 생겨나는 결과 중 하나다. 따라서 통합된 인식능력으로서 정신 자체의 역량, 이 역량의 부적합성과 적합성 사이의 경향적 갈등이 문제이지, 정신 안에 존재하는 상이한 능력들 사이의 갈등이나 부조화가 문제는 아니다.

 

V. 능동과 수동의 진정한 함의: 들뢰즈와 평행론

 

스피노자의 심신 이론을 흔히 평행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곤 한다. 이 명칭은 스피노자 자신이 사용한 적이 없으며, 라이프니츠가 고안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심신 이론을 지칭하는 데 적절한 용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용어는 오늘날까지 여러 스피노자 연구자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탁월한 스피노자 연구자이기도 했던 질 들뢰즈는 이 용어를 스피노자의 존재론 및 심신이론을 해명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 활용한 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스피노자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이 각자 동등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실체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이로부터 3중의 평행성을 이끌어낸다(Deleuze 1969, 6장; 또는 Dleuze 1999, 102-109쪽 참조). 먼저 각각의 속성들에 따라 실체에 의해 생산되는 양태들 사이에는 상응 내지 평행성이 존재한다. 예컨대 관념들의 ‘질서’와 관념의 대상들의 ‘질서’ 사이에는 평행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각각의 양태들의 ‘연관’의 평행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연관의 평행성은 속성들의 동등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곧 속성들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하지 않고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각각의 속성을 구성하는 연관의 평행성이 성립한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속성에 따라 생산된 각각의 양태들이 동일한 실재, 동일한 변양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존재의 동일성이 존재한다.


들뢰즈의 해석은 [윤리학] 2부 정리 7이 지닌 복합성을 잘 보여주고, 이것들 사이의 관계를 일관성 있게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그의 해석은 단지 결과들의 차원, 곧 상이한 속성들에 속하는 양태들 사이의 상응 내지 평행성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상응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원인까지 해명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스피노자 철학의 근본 정신을 잘 살려준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3중의 평행성’이라는 제안은 다소 작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3중의 평행성이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질서라는 개념과 연관이라는 개념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 먼저 해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들뢰즈는 “질서”, 곧 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들의 질서”와 연장 속성(및 그 외 다른 속성들)에 속하는 “물체들의 질서” 사이에 성립하는 상응 내지는 평행성은 첫 번째 차원의 평행성으로 간주하는 반면, “연관”의 평행성은 모든 속성들 사이의 동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Deleuze 1969, pp. 94-95 참조. “특히 우리는 질서와 연관을 엄격한 동의어들로 조급하게 간주해서는 안된다.”] 이처럼 질서와 연관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스피노자의 평행성을 라이프니츠식의 평행성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곧 라이프니츠는 선과 점근선 사이의 평행성을 특권화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선 위의 점들과 점근선 위의 점들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은 성립하지만(들뢰즈가 말하는 질서의 평행성), 두 선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스피노자에서 볼 수 있는 연관의 동등성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라이프니츠에서 사유와 물체, 정신과 신체의 지위가 동등하지 않은 반면 스피노자에게는 엄격하게 동등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리가 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질서와 연관을 두 가지 상이한 평행성으로 분리하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스피노자 자신이 2부 정리 7의 주석과 3부 정리 2의 주석에서 ‘질서’와 ‘연관’에 대해 동의성(同意性)을 의미하는 “시베”(sive)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질서와 연관을 구별하는 것은 들뢰즈의 의도와는 달리 자칫 양자 사이에 또 다른 위계 관계를 설정할 우려가 있다.[이는 게루의 해석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점이다. 게루는 질서는 직접적 무한양태의 차원을 표현하고 연관은 매개적 무한양태의 차원을 표현한다고 간주함으로써, 양자 사이에 상이한 존재론적 위계를 부여한다. G I, pp. 352 이하 참조. 사실은 가브리엘 후안Gabriel Huan의 해석에서 유래한 이러한 구분법(Huan 1914, 3장 참조)은 매우 자의적이라는 점(왜냐하면 스피노자의 저작에는 이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어떤 논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연관을 매개적 무한양태의 차원에 한정함으로써, 결국 스피노자의 자연학 및 인과성을 정태적인 기계론적 차원으로 격하시킨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들뢰즈의 해석은 이처럼 질서와 연관을 위계화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양자의 평행성 사이에 상이한 등급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평행성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면, 이는 질서의 차원에서는 동일한 반면 연관의 평행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원인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두 번째 문제점은 들뢰즈가 이 두 가지 평행성 이외에 세 번째 평행성으로서 ‘존재론적 통일성’ 내지 ‘존재의 동일성’을 설정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질서의 상응성, 연관의 동등성만으로는 자연 전체의 통일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양태 수준의 통일성, 예컨대 인간이 정신이라는 사유 속성의 양태와 신체라는 연장 속성의 양태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속성들이 실체의 통일성을 표현하듯이, 양태의 차원에서는 각각의 양태들(예컨대 신체와 정신)이 존재론적 통일체로서 변양(modificatio)(인간의 경우에는 정신과 신체의 통일체로서 인간)을 표현한다고 말한다(Deleuze 1999, 105쪽).


그러나 인간의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처럼 정신과 신체라는 양태 이외에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차원에 속하는 변양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기체의 존재론을 이끌어 들일 위험이 있다. 스피노자 자신은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E II P13c)고 말하고 있을 뿐 이 양자의 통일성을 가리키기 위해 제 3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정신과 신체 이외에 제 3항을 도입하는 것은 사실은 정신과 신체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존재자들 내지는 실재들이어서 원칙적으로는 서로 결합할 수 없으며, 오직 이 제 3항만이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힘 또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변양’은 정신과 신체의 결합과 다르지 않지만, 이것만이 정신과 신체의 통일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정신과 신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의 것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의 관점으로, 스피노자 자신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생각이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평행론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신체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 다른 한편으로 정신의 능동과 수동의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평행성이다. 스피노자가 이러한 의미의 평행성(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속성들의 존재론 동일성 및 유적(類的) 자립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신과 신체가 각각 독자적인 인과 연쇄에 따라 작용하면서도 양자 모두 동일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동일성을 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에서 인간의 본질을 욕망으로 정의한다. “코나투스가 정신과 신체에 함께 관계할 때 욕구(appetitus)라 불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구는 그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인간의 보존을 증진시키는 것들이 따라 나오는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 욕망은 욕구에 대한 의식이 포함된 욕구로 정의될 수 있다.”(E III P9s)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규정됨으로써 정신과 신체는 사유와 연장이라는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임에도 모두 동일한 욕구 내지 욕망을 표현하게 된다.


더 나아가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이성과 욕망, 이성과 정서 사이에도 더 이상 위계 관계나 대립 관계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이성과 욕망을 서로 상반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성이 강하면 욕망이 약해지고 반대로 욕망이 강해지면 이성이 약해진다고 생각하곤 한다. 이렇게 되면 이성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욕망이나 감정을 억제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윤리학] 3부 「서문」이나 5부 「서문」에서 데카르트를 비판하면서 스피노자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적합한 이해가 아닐뿐더러 윤리적인 삶을 위한 바람직한 관점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이성과 정서는 욕망이라는 단일한 인간 본질의 정신적 표현이다. 물론 이성이 인간의 정신 중에서 인지적인 측면을 가리키고 정서는 정서적인 측면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양자가 서로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두 측면은 서로 별개로 존재하는 두 개의 정신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신적인 작용이 표현되는 두 측면 또는 그러한 정신적인 작용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상반되는 것은 이성과 정서가 아니라, 정신의 수동성과 능동성이다. 곧 정신이 수동적인 상태에 있을 때 정신은 인지적인 측면에서 수동적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수동적이며, 반대로 능동적인 상태에 있을 경우에는 인식만이 아니라 정서의 차원에서도 능동적이다. 정신이 부적합한 인식에 빠져 있을 때 정신은 수동적인 정서를 느끼며, 반대로 이성을 통해 적합한 인식을 얻게 될 때 능동적인 정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윤리적 목표는 이성적인 능력을 고양하기 위해 정서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정서 두 측면에서 동등하게 표현되는 수동성의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성에 도달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VI. 맺음말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이룩한 사상적인 변혁을 수용한 가운데, 그가 보기에 데카르트의 맹점 내지 자기모순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신체와 정신의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과연 데카르트의 정신 이론 및 윤리학보다 더 탁월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사람들 각자의 권리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이 근대 초기에 이미 데카르트적인 근대성과 상이한 또 다른 근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데카르트 철학이 이룩한 성과를 부정하거나 훼손하지 않은 가운데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대안적 근대성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가 하는 점은, 흔히 근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탈근대철학으로 불리기도 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들뢰즈조차 이것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으로 방증될 수 있다. 따라서 어쩌면 탈근대성, 곧 근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개조의 향방은 스피노자가 350여 년 전에 제시한 이러한 길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피노자 철학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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