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 도서출판 난장에서 나올 에티엔 발리바르의 [폭력과 시민다움-반폭력의 정치란 무엇인가?] "옮긴이 후기"를 올립니다. 원래는 "옮긴이 후기" 대신 "비평" 형식으로 폭력에 관한 꽤 긴 글을 실으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이번에는 그냥 짧은 "옮긴이 후기"만 썼습니다.
조만간 기회가 되는 대로 원래 싣고 싶었던 글을 발표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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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시민다움-옮긴이 후기
이 책은 프랑스의 맑스주의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문 두 편을 번역한 것이다. 첫 번째 논문은 볼프강 프리츠 하우크가 편집한 맑스주의 역사적•비판적 사전 에 수록된 게발트 (2001)이며, 두 번째 논문은 (2003년 파리 가톨릭대학교의 콜로퀴엄에서 발표한 것으로) 알프레도 고메즈-뮬러가 편집한 윤리학과 인간학 사이에서 인간의 문제 에 수록된 폭력과 시민다움 (2003)이다.[Wolfgang Fritz Haug, hrsg., Historisch-Kritisches Wöterbuch des Marxismus, Bd.5: Gegenöfentlichkeit bis Hegemonoalapparat, Hamburg: Argument Verlag, 2001; Alfredo Gomez-Muller, dir., La question de l’humain entre l’éhique et l’anthropologie, Paris: L’Harmattan, 2004.]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폭력론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이 논문들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고 중요하지만, 맑스주의 이론사를 폭력의 관점에서 재고찰하고 (극단적) 폭력에 관한 동시대 논의의 철학적•정치적 쟁점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국내의 논의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논문들은 발리바르의 최근 저작에 재수록됐다(이 책은 내년 중에 도서출판 그린비에서 역자의 번역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Étienne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Welleck Library Lectures et autres essais de philosophie politique, Paris: Galilée, 2010. 「폭력과 정치: 몇 가지 질문들」(1992)에서부터 「전쟁과 정치: 클라우제비츠적인 변주」(2006)에 이르기까지 지난 15년 동안 발리바르가 폭력에 관해 썼던 논문들을 묶은 이 책의 핵심은 1부인 웰렉도서관 강의이다. 지난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어바인 캠퍼스에서 행한 이 강의는 토머스 홉스와 G. W. F. 헤겔에서부터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크 라캉, 미셸 푸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등의 저작을 검토하며 폭력의 목적론을 의미하는 ‘전향’(conversion) 개념, 극단적 폭력과 잔혹, 시민다움의 전략에 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리바르의 폭력론을 집약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 책에는 (특히 파시즘의 동시대적 부활이라는 정세와 관련해) 칼 슈미트의 홉스 독해에 담긴 현대적 의의와 한계를 다루는 논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마하트마 간디를 비교ㆍ검토하는 논문 등도 포함되어 있다. 이 중 프랑스의 스리지에서 열린 데리다 관련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폭력과 정치」는 이미 국역된 바 있다. 윤소영 옮김,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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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라는 문제는 자명한 문제이거나 무기력한 문제가 되기 쉽다. 폭력의 문제가 자명한 문제인 이유는, 폭력을 비판하거나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간주되는 이유는, 폭력이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문명 원칙인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폭력의 문제가 무기력한 문제로 간주되는 이유는, 폭력이라는 것에 대해 딱히 대응할 만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폭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널리 의지하는 것은 법과 공권력이다. 그런데 만약 법과 공권력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곧 법과 공권력 자체가 지배를 위한 수단이거나 인권 및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또 다른 폭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20세기 초에 이미 막스 베버가 국가란 “적법한 (또는 적법하다고 간주되는) 폭력Gewalt이라는 수단에 기반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라고 규정했거니와, 독일의 비평가ㆍ철학자였던 발터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또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1990)[발터 벤야민,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각각 불법적인 폭력 대 정당한 공권력이라는 구도가 지닌 허구성을 날카롭게 드러낸 바 있다.[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폭력의 쉬볼렛: 벤야민, 데리다, 발리바르」, [세계의 문학] 135호, 2010년 참조.] 따라서 공권력 역시 불법적인(또는 불법적이라고 간주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폭력이라면, 폭력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또 하나의 폭력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폭력의 문제는 비폭력의 자명함과 대항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 사이에서 순환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문제를 현대 정치의 핵심 쟁점으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엉뚱한 발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에 따르면 폭력의 문제,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개념 자체의 개조”[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p. 42.]를 요구하는 문제다. 역으로 말하자면, 발리바르의 폭력론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개념적 독창성 및 이론적 적합성을 측정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실제로 역자가 보기에 폭력에 관한 발리바르의 사유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의 핵심을 이룬다.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아포리아, 또는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들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고한다는 점이다. 폭력이라는 주제는 가령 데리다[특히 자크 데리다, [법의 힘] 및 Voyous, Galilée, 2003 참조. 후자의 책은 국역본이 있지만([불량배들], 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2003) 번역이 좋지 않아 참조하기 어렵다.]나 아감벤[특히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 및 [예외상태], 김항 옮김, 새물결, 2010 참조.] 같은 철학자들의 정치 사상의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폭력의 문제를 해방의 관점에서 사고하지만, 이들은 맑스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반면 발리바르는 「게발트」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글에서도 늘 맑스주의를 몰락하게 만든(따라서 그것이 재개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하는) 아포리아라는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현대 정치철학의 동향에 대해 얼마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맑스주의의 역사(그 쟁점들과 모순들)를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거니와, 폭력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그러한 역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오랜 천착과 더불어 상당한 지적 용기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발리바르 폭력론의 첫 번째 독창성은 폭력의 문제를 맑스주의의 역사적 모순의 핵심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조건들이라는 관점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이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폭력을 대항폭력이나 비폭력의 관점에서 다루지지 않고 반(反)폭력의 문제설정에 따라 사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을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사실은 폭력을 하나의 독자적인 이론적 문제로 간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의 문제를 대항폭력의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 가능한 두 가지 선택지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연주의적 관점으로,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정치의 문제는 순수한 힘의 문제가 된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하듯이 인간 역사 속에서도 두 개(또는 그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무력 다툼만이 존재할 뿐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궁극적인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또는 정당성이나 부당성의 문제를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것은 힘의 크기다). 고전적인 맑스주의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지배 세력의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은 정당하며, 특히 자본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 및 피지배 계급들의 대항 폭력은 언제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대항 폭력은 착취 없고 지배 없는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곧 정당한 목적이 수단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은 수단 내지 전술의 문제일 뿐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당수의 좌파 이론가들이나 활동가들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관점이다. 그런데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관점 속에서 맑스주의를 역사적 몰락으로 이끈 궁극적인 원인 중 하나를 발견한다.
반대로 비폭력의 관점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폭력 그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금기시한다. 비폭력의 입장에서 보면 폭력은 악의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곧 비폭력의 관점은 목적이 정당한 것이든 부당한 것이든 간에 폭력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비폭력의 관점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선악 이분법이라고 할 수 있다.[반대로 악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 내지 인권을 옹호하려는 이러한 비폭력적인 입장에 반대하여 선의 존재론적 우선성에 기반을 둔 윤리학(및 따라서 선에 근거한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알랭 바디우(내지 그와는 다소 다른 관점이기는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입장도 존재할 수 있다. 발리바르는 두 번째 논문 「폭력과 시민다움」에서 이러한 관점의 문제점 역시 비판하고 있다. 이 책, 150쪽 이하 참조.] 하지만 발리바르는 “폭력은 역사의 ‘동력’ 중 하나”이며, “고유한 ‘창조성’”[이 책, 124쪽.]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에, 폭력을 무차별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비폭력의 관점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간디가 주창했던 비폭력 운동의 경우 그것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폭력에 맞선 정치 투쟁의 한 형태를 이룬다는 점에서 시민다움civilité의 한 전략으로서 독자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가령 레닌(또는 마오) 같은 사람이 발전시킨 바 있는 맑스주의 전통 내의 시민다움 전략과 대조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É. Balibar, “Lénine et Ghandi”, in Violence et civilité, 앞의 책 참조. 또한 간디와 마오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는 É. Balibar, “Pour une phéoméologie de la cruauté: Entretien avec Étienne Balibar”, Tracé. Revue de Sciences humaines, no. 19, 2010도 참조.]
이러한 관점들과 달리 발리바르는 폭력의 문제를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라는 문제로 다룬다. 이것은 곧 폭력의 문제는 정치라는 일차적인 수준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관련된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차 수준의 쟁점’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 이렇다. 정치(특히 고전적인 의미에서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이든 민중이든 아니면 시민이든 간에,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가 성립하지 않는 한 정치가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보기에 폭력, 특히 그가 극단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폭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를 성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또 그것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감축할 수 있는 실천적 해법을 모색하지 않은 가운데 해방의 정치를 주장하거나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는 공문구에 그치기 십상이다.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는 (알튀세르가 이론화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경유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이라는 훨씬 더 까다로운 문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마지막으로 발리바르 폭력론의 또 다른 특징은 반(反)폭력의 문제를 새로운 시민권 정치의 발명의 문제와 연결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사실 폭력과 대항폭력의 이항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발터 벤야민 이후, 또 한나 아렌트[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저작은 [폭력론On Violence]이라기보다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전체주의의 기원]의 관점에서, 「폭력론」 및 [혁명론],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된 아렌트의 몇몇 보수적인 테제를 탈-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폭력론」, [공화국의 위기],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11 및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참조. 아렌트에 대한 발리바르의 독해로는,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진태원 옮김, [우리, 유럽의 시민들?], 후마니타스, 2010 및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을 각각 참조.]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들뢰즈와 가타리의 폭력론은 [신학정치론] 「서문」에 나오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그 지주와 버팀목은, 사람들을 기만의 상태 속에 묶어두고, 종교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 공포를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질문은 [반(反)오이디푸스]의 화두이자 또한 [천 개의 고원]의 핵심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정도까지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대중의 무지나 환상을 파시즘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욕망을 해명할 수 있는 설명, 욕망의 관점에서 정식화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라이히(Reich)는 사상가로서 가장 심원한 경지에 도달한다. 대중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G. Deleuze/F.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1972), trans. Robert Hurley et al.,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 29(강조는 들뢰즈-가타리).], 자크 데리다[자크 데리다, [법의 힘], 앞의 책 및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2(제 2판), 근간 참조] 이후 현대 폭력론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극복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 정치철학이 역사적 맑스주의의 몰락과 파시즘(또는 ‘전체주의’)의 유령이라는 20세기의 두 가지 정치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마르크스주의가 ‘프롤레타리아’ 운동이자 ‘계급투쟁’ 이론이라는 자신들의 토대 위에서 나치즘과 대결하는 데 무력했으며, 나치즘을 분석하고 나치즘이 위력적인 이유들을 이해하는 데 무능력했”[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188쪽. 강조는 발리바르.]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유산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가지의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해방의 정치가 어떻게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토대 위에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데리다 식으로 표현하면) 상속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맑스주의가 그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무능력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한계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수의 해석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한 그러한 한계를 지양하거나 전위(轉位)시키려는 다수의 실천 전략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독창성은, 거의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반(反)국가적인 관점, 더 나아가 반(反)제도적인 관점을 택하고 있는 데 반해(가령 푸코나 들뢰즈/가타리, 바디우, 랑시에르, 아감벤, 네그리, 지젝 등), 파시즘과의 대결이라는 문제, 더 나아가 극단적 폭력의 퇴치라는 문제를 시민권 제도의 쇄신 내지 재발명의 문제와 결부하여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권 제도야말로 폴리테이아politeia, 곧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본질을 이루며, (정치적) 주체화의 핵심 메커니즘을 구성한다는 발리바르의 깊은 이론적 신념에서 비롯하는 생각이다.
반폭력의 정치가 오늘날 진보 정치의 근본 과제 중 하나를 이룬다면, 그것은 극단적 폭력의 메커니즘이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시민성의 재발명이라는 과제가 반폭력의 정치를 위한 조건을 이룬다면, 그것은 반폭력의 정치는 인민대중들 자신의 과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폭력의 문제는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중핵을 이루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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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난장 출판사의 대표이자 촉망받는 젊은 문화비평가이기도 한 이재원 형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재원 형은 늘 쾌활하게 지켜봐주고 여러 가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엥겔스의 논문 발췌본을 직접 번역하고 번역의 교정에도 많은 힘을 쏟아주었다. 거친 원고가 이렇게나마 한 권의 책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 한다. 또한 발리바르와 랑시에르 저작에 관한 세미나를 하면서 번역 원고를 읽고 귀중한 논평과 조언을 해준 새움 현대정치철학 세미나의 동료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2년 가까이 진행했던 세미나가 그들의 작업에도 얼마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번역을 하고 해제를 쓰는 일은, 한편으로 보람 있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극히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얼마간 좋은 논의거리가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2012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