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이 글은 오는 11월 5일 (토)부터 경향신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명저 새로 읽기"에 실릴 서평입니다.

신문에는 지면상 다소 축약된 글이 실릴 예정입니다.

새롭게 번역된 책이 또 상당한 오역본이라는 점은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출판사에서 좀더 책임감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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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가?

 

자크 랑시에르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지난 2008년 방한할 때까지 국내에 랑시에르를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하지만 방한과 함께 [무지한 스승],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출간된 이후 불과 2년여만에 10여권의 저작이 소개되고 문학계에서는 그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왜 랑시에르가 이렇게 주목받을까? 그것은 철학, 문학, 정치, 역사, 영화 등을 가로지르는 그의 독창적인 글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사유가 깊이 있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성찰이 집약된 책이 [불화]라면,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는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가 우선 문제 삼는 것은 최근 저명한 프랑스 지식인들(장-클로드 밀네르, 베니-레비 등)이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이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무정부주의의 과잉(자유와 권리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무리들의 방종)과 무제한적인 소비(재화, 향락 등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려는 성향)라는 이중의 과잉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곧 민주주의가 문명의 중심에 내재하는 원죄 내지 도착(倒錯)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공산주의의 몰락 이전에는 전체주의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대중적 개인주의”로서의 민주주의 자체가 문제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증오는 사실은 평등한 집단인 인민에 대한 공포이자 그들이 구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의 표현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정치사상의 지속적인 공리 중 하나는 대중에게는 통치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체(政體), 곧 독재나 전체주의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정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사실은 “과두제적인 통치에 대한 본성적 충동”, 곧 “인민을 몰아내고 정치를 몰아내려는 충동”(169쪽-번역은 수정)의 발현이며, 인민 없는 통치, 곧 정치 없는 통치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민주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아니면 오히려 민주주의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까?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개인의 권리 보호, 사유재산 보장, 법치, 주기적인 선거, 권력 분립 등으로 꼽는다. 중요한 기준들이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는 현재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흔히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고 말하는 서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 소수의 금융 권력이 거대한 부를 독점하고, 인종주의 테러와 이민자 추방, 정치권의 부패와 비리 같은 현상들이 나타날까?

따라서 랑시에르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곧 “우리의 “민주주의들”이 겪고 있는 악은 무엇보다 소수 지배자들의 게걸스러운 탐욕과 연결된 악”(156쪽)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에서 살고 있지 않”고 오히려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다. 그럼에도 과두제 국가에 민주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통치자들이 선량하거나 뛰어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민이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기 때문이다. 대의제가 과두제 권력의 단순한 도구에서 벗어난 것 역시 인민이 행위를 통해 실질적 대표성이 관철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현실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권리다.”(158쪽) 민주주의란 자신과 타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행위 자체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같은 출판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심각한 오역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출판사 스스로 수거ㆍ폐기한 바 있다. 그럼 새로 번역된 이 책은 사정이 훨씬 좋아졌을까? 평자의 생각으로는, 지난 번 오역본보다는 상태가 다소 좋지만 학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번역이다. 이런저런 다수의 오역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뿐더러, “이중구속”을 뜻하는 “double bind”를 같은 페이지에서 한번은 “이중적인 모습”으로, 한번은 “이중적 연계”(74쪽)라고 번역하거나,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를 “프랭크 갈브레이스”(60쪽)로, 울리히 벡을 “율리츠 벡”(193쪽)으로 표기하는 등의 사례도 보인다. 이는 역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출판사 편집부의 기본 소양에서 비롯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역자보다 편집부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제대로 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읽기 위해서는 세 번째 번역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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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초에 나올 [정치체에 대한 권리] 역자 후기를 올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고 또 번역도 즐겁게 했던 책인데, 

독자 여러분에게도 행복한 독서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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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수구 세력이 반역을 독점하게 만들지 말자



여기 우리가 펴내는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저작 중에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가령 그의 주요 저작들 중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Etienne Balibar &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 진태원 옮긴, 그린비, 2012 에정]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맹목점으로 남아 있던 인종, 국민의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재조명한 저작으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확고한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의 공포}(1997)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를 중심으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를 해체하고, 폭력, 경계/국경, 인종주의, 보편성 등의 문제를 통해 현대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문제작으로 1990년대 프랑스 철학계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한 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은 출간되고 나서 곧바로 영어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유럽 연합과 관련된 논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반면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이런 저작들에 비하면 덜 알려져 있을뿐더러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로도 별로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면 굳이 서양의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소개되지 않은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간할 필요가 있을까? 어떻게 보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역자가 이 책을 완역하여 출간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실천가, 활동가로서 발리바르의 면모를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 세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장-뤽 낭시, 피에르 마슈레 등) 중에서는 국내에 가장 일찍 소개되고 또 가장 많이 읽힌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작들은 대개 아주 높은 수준의 이론적 논의를 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발리바르가 어떤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그의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게 되었는지, 그의 추상적인 논의 속에는 어떤 정세적ㆍ실천적 경험들이 녹아 있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이 책은 90년대 이후 발리바르 사상의 주요 요소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참여와 분석을 통해 형성되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서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시민불복종에 대하여」와 「우리가 “미등록 체류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라는 두 편의 글은 분량은 매우 짧지만 매우 강렬하고 생생하게 활동가 발리바르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이 두 편의 글에서 발리바르는 이른바 “불법체류자” 내지 미등록 체류자를 실정법의 관점에서 무조건적인 단속이나 추방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들까지도 처벌의 대상으로 만드는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왜 프랑스 시민들이 시민불복종 운동에 나서야 하는지, 매우 감동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와 더불어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에서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듯이 1980년대 이후 프랑스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이 세력을 점차 확장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국민전선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왜 정치의 재발명이 필수적인지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발리바르는 이러한 정세적ㆍ실천적 경험을 기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현대 세계가 직면한 근본적인 정치적ㆍ윤리적 쟁점을 개념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집약해서 말한다면 시민불복종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 또는 정치체의 토대를 구성하는지 이론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체의 토대로서 시민불복종이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종과 일탈, 불법 행동을 조장하려는 무책임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나 최근 몇몇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종말론적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불복종은 계급투쟁이나 혁명 같은 본질적인 개념에 비하면 얼마간 사소한 도덕적 저항이거나 심지어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질서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의 시도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법치국가의 원칙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수호하려는 입장에서 본다면, 여타의 불법 행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시민불복종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일 뿐 어떤 의미에서도 그 토대로 간주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발리바르의 관점은 양쪽 모두에게 비난받기 좋은 입장일 것이다.

발리바르의 이러한 관점이 어떤 이론적 기초에서 비롯했고 또 얼마나 다면적인 구조적ㆍ정세적 분석들을 전제하는지 여기서 길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이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발리바르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구체적이고 평이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교양 대중들 스스로 이 책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나 종말론적 정치철학의 관점 및 그 반대편의 관점들에 비해 발리바르의 입장이 지닌 강점과 의의에 대해서도 굳이 상세하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이런 문제는 별도의 자리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은 간략히 지적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시민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사고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한편으로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constitution of citizenship으로 개념화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으며[이 점에 관해서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에 수록된 「역자 해제」 중 특히 455쪽 이하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이 근대 정치체(곧 국민사회국가[발리바르가 사용하는 ‘국민사회국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앞의 책에 수록된 「용어해설」을 참조])의 핵심을 이룬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치체를 시민권 헌정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정치체가 자연적(혈통과 같은)이거나 초월적인 기초(종교와 같은)를 갖지 않으며 오직 시민들 자신의 호혜적인 상호 구성 활동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근대 정치체는,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혁명에서 보듯이 봉건적인 예속 관계를 철폐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시민들 자신의 봉기적 행위에 근거하여 성립했다. 따라서 이렇게 성립한 헌정 질서는 시민들의 봉기를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고 있으며, 헌법을 비롯한 법률 문헌 안에 그 흔적을 기록해두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시민불복종을 정치체의 토대로 개념화하려는 발리바르의 관점은 무책임하게 방종과 불법행위를 조장하려는 발상이라기보다는 저항권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의 정당성을 새롭게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저러한 정부의 정책이 헌정의 정신을 위반하거나 그것을 위태롭게 할 때 헌정 자체의 이름으로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행위는 정치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헌정의 토대에 입각하여 헌정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며, 시민성을 재발명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오류나 과오 또는 무책임한 방종으로 판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시민불복종의 주체들은 이러한 위험의 책임을 스스로 감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통치자들의 부당한 정책이나 그릇된 실정법에 저항하려는 자세야말로 능동적 시민성의 핵심을 이루며, 따라서 헌정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관점이다.

다른 한편 이 책에서 문제가 되는 시민불복종 행위가 프랑스 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압제에 대항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 곧 프랑스 시민들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행위라는 점이 또한 중요하다.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 국적과 인종 등에 상관없이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모든 개인의 보편적 인권에 기반을 둔 고귀한 인도주의적 행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시민불복종 행위는 타자에 대한 억압이 근대 정치체의 모순(시민권=국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러한 행위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모순이 타자들의 인권 및 시민권만이 아니라 프랑스 시민들 자신의 인권과 시민권 역시 제약하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근대 정치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좀더 민주주의적인 새로운 시민권 헌정을 구성하려는 시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이래로 발리바르가 자신의 저작들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처럼, 이러한 새로운 시민권 헌정은 더 이상 국민국가의 질서 위에서만 구성될 수는 없다. 시민권을 국적nationality 내지 국민됨nationhood의 틀로 한정하려는 근대 국민국가에 고유한 정치 논리는 이미 처음부터 시민권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그 토대와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세계화가 본격화되고 이주가 일반화하면서 국민사회국가의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한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주권의 약화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외국인을 배척하려는 수구적 국민주의 및 인종주의가 유럽 전역에서 확산되고, 유럽의 아파르트헤이트(더 나아가 범세계적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이 세워지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방인들(특히 무슬림들 및 아프리카인들)이 물질적ㆍ상징적 폭력의 대상으로 내몰리는 것은 국민사회국가의 모순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최근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인종주의적 테러 사건은 유럽의 그 어느 나라도 이러한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프랑스 시민의 타자들에 대한 억압에 맞서 전개된 1996-97년의 시민불복종 운동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관(貫)국민적transnatinal 민주주의 운동, 관국민적 시민성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국민적이라는 것은, 국민국가의 종언이나 소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국민과 외국인/이방인의 차이를 완전히 철폐하거나 국경의 무조건적인 개방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 정치의 구조적 조건으로 가정돼 있는 국경/경계의 제도가 단지 대외적인 지리적 경계를 중심으로 우리와 타자를 구별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정치체 내부에서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삶의 질서를 제약하고 심지어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국가적인 국적이 시민성을 가두고 조건 지을 것인가 아니면 규정되어야 할 한도 내에서 시민성이 국적을 넘어서 그것을 상대화할 것인가 여부다. 어디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 시민성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조건들 속에서 새로운 시민권 제도가 우리로 하여금 모순적인 두 가지 요구, 곧 차이에 대한 권리라는 요구와 차이로부터 차이화할 권리라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인가?”(101-102쪽)

그렇다면 발리바르가 말하는 관국민적 민주주의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근대적 정치체로서 국민사회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능동적 시민성의 차원을 복원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능동적 시민성은 국민적인 것의 틀 속에서는 실체화된 단일한 인민주권과 논리적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관국민적 민주주의는 이러한 실체화된 인민주권을 다양체로서의 우리(237쪽)로 탈-구축해야 하며, 시민들의 공동체를 “운명공동체”로, 곧 “공동체 없는 공동체, 미리 존재하는 공동체적 실체 없는 공동체, 주권의 초월성 없는 공동체”(240쪽)로 재건설해야 하는 과제를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제는 단지 국가적인 수준만이 아니라 지역적 수준, 초국가적 내지 국제적인 수준에서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과제다. 역자는 이러한 발리바르의 통찰이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서나 그러한 현상들이 표출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사고하는 데서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

이 책에서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덧붙인 「용어해설」에서 설명해놓았기 때문에 이 책에는 별도의 「용어해설」을 수록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유럽의 시민들?}과 몇 가지 달라진 번역어들이 있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해 간략히 해명해두겠다.

먼저 civilité의 경우 이전에는 발음만 옮겨서 ‘시빌리테’라고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의 의미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민다움}, 진태원 옮김, 난장, 근간 참조], 여기서는 이러한 번역어를 택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밝혀보겠다. 우선 발리바르는 시빌리테 개념을 citoyenneté 개념, 곧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말 번역에서도 이러한 긴밀한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가 이러한 상호 연관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곧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는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시빌리테 개념이 시민(곧 정치적 주체)의 본성 및 그 법적, 제도적 틀을 뜻하는 시민성/시민권 개념과 관련하여, 시민의 정치 윤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말에서 ‘~답다’나 ‘~다움’은 본질이나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당위나 책임 같은 윤리적ㆍ규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다움은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맞짝을 이루면서 후자가 지닌 윤리적 함의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영어의 시빌리티civility나 프랑스어의 시빌리테라는 말은 철학적인 개념이기 이전에 일상어로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도 시빌리테라는 용어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용법과 어떻게 차이를 두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빌리티 내지 시빌리테의 번역은 일차적으로 이 용어들의 일상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기존에 사용된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시민다움이라는 말이 좀더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citoyenneté 개념의 경우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는 줄곧 ‘시민권’으로 번역했는데, 이러한 번역은 citoyenneté에 담긴 이중적 함의, 곧 정치적 활동의 주체로서 시민을 뜻하는 주체적 함의와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적 함의를 온전히 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경우에 따라 ‘시민성’과 ‘시민권’이라는 번역어를 함께 사용했다.

또한 nation, nationalisme, ethnicité에 대한 번역에서도 이전과 다소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서는 nation은 대부분 ‘국민’으로 옮겼고 nationalisme은 대개 ‘민족주의’로, 그리고 ethnicité는 ‘종족성’이나 ‘종족체’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좀더 숙고해본 결과 좀더 정확하고 일관성 있는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nationalisme은 ‘국민주의’로, ethnicité는 ‘민족성’이나 ‘민족체’로, 그리고 ethnique는 ‘민족적’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사실 nation을 ‘국민’이라고 번역하면서 nationalisme은 단순히 ‘민족주의’로 번역하거나 또는 ethnicité를 ‘종족성’이나 ‘종족체’로 옮기는 것은 용어들의 통일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 일관성이라는 점에서도 적절치 않다.

다만 대개 ‘종족적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ethnonationalisme의 경우는 ‘민족적 국민주의’를 뜻하기 때문에 줄여서 ‘민족주의’로 번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표방하는 “프랑스인들의 프랑스” 같은 노선이 이러한 의미의 ‘민족주의’를 잘 드러내준다. 또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 민족’의 신화에 기반을 둔 우리나라의 통상적인 ‘민족주의’ 관념 역시 이러한 의미의 민족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역자가 보기에는 nationalism을 단순히 ‘민족주의’로 이해하기보다는 ‘국민주의’와 ‘민족주의’로 분류해서 이해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현상들을 좀더 다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부연하지 않겠지만[이 문제에 대한 역자의 관점은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호, 2011년 가을호. 참고로 이 글은 국사학자들 및 서양사학자들과의 토론 및 논쟁을 위해 집필한 글인데, 후속 논쟁을 통해 nation, nationalism, ethnicity 등에 관한 쟁점들이 좀더 분명히 해명될 것으로 기대한다], 발리바르 정치철학의 독창성을 더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서나 현대 정치(철학)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나 nation, nationalisme, ethnicité, racisme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이 책에서는 이전에 ‘동일성’이라고 번역했던 identité라는 단어를 대부분 ‘정체성’이라고 옮겼다. ‘동일성’이라는 번역어가 identité에 함축된 어원적 의미라든가 이 단어가 지닌 다양한 함의를 표현하기에 더 적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비롯한 발리바르의 저작에서 이 단어가 주로 ‘정체성’이라는 의미(국민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개인적 정체성 등)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의 일상 어법을 고려할 때 ‘동일성’보다는 ‘정체성’이라는 번역어가 발리바르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새로 채택한 번역어들이 과연 이전의 번역어들보다 더 나은 것인지, 그리고 발리바르의 사상을 이해하고 현실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 더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을지 역자로서는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 만큼 역자로서는 이 용어들을 무조건 고집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지금까지 역자 나름대로의 공부와 성찰을 통해 이러한 번역어의 채택이 최선이었다고 믿을 뿐이다. 앞으로 혹시 좀더 좋은 제안이 제시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


***


이전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의 현대정치철학 세미나 동료들과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다. 오랫동안 이 책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면서 역자의 잘못된 생각이나 번역을 바로 잡아주고 여러 가지 좋은 제안을 해준 동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미안하게도 늘 번역자 명단에 나 한 사람의 이름을 올리게 되지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번역이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독자들에게도 그들의 공로가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역자가 재직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사업단의 아낌없는 세미나 지원 및 출판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주변에서 각종 행정적인 잡무와 형식적인 전시성 사업 계획들로 인해 연구자들의 연구 능력이 저하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개인적 관심사를 존중하고 격려해주는 민연 HK사업단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역자는 늘 편안하게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민연 HK사업단과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에 이어 두 번째로 발리바르의 책을 후마니타스에서 펴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큰 기쁨이고 영광이지만, 게으른 역자를 만난 후마니타스 여러분들께는 큰 고통의 시간이 아니었을지 걱정스럽고 죄송하다. 오랫동안 원고를 묵묵히 기다려준 안중철 편집장님과 최미정 선생님을 비롯한 편집부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 분들에게 다소나마 보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1년 9월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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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2011-10-01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태원 선생님, 그 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먼저 번역본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civilite 번역어 관련해서, 예전에는 "시민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개인적으로(서관모 선생님은 잘 모르겠습니다) "시민공존"을 사용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책은 잘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almas 2011-10-0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원 형 오랜만입니다. '시민공존'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택하셨군요. ㅎㅎ 흥미롭네요.

balmas 님에게 2011-10-0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역"은 봉건적인 용어입니다. 흔히 쓰는 "대권"과 마찬가지입니다.

"국사학자"라? 그냥 역사학자라고 부르시면 안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라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발마스 님이 선택한 번역어보다 배제한 번역어들이 더 마음에 드는 군요. 그렇다면 사실은 발마스 님은 민족문화연구원이 아니라 국민문화연구원에 계신 거군요. 저와 발마스님은 discord가 아니라 disagreement한 관계인 듯 합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대등한 관계가 아니긴 하지요.

모든 대학교수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지요. 대학교수라는 거 자체가 이미 어떤 종류의 권력과 지위를 지닌 거니까요.

그런데 "자본을 읽자"는 언제 나오나요?

balmas 2011-10-0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반역'이라는 표현이 좀 껄끄럽긴 하죠. 근데 불어의 revolte나 영어의 revolt 역시 "봉건적인" 용어법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사학자를 역사학자로 부를 수 있다면 저도 좋겠는데요.^^; 새로 제안한 용어들이 맘에 안드신다니 유감이네요. ㅎㅎ [자본을 읽자]는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내년 말까지는 내고 싶습니다. :)

menwchen 2011-10-1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안녕하세요 ^^*
드디어 오늘 알라딘과 교보에 떳네요. 아직은 출간예정도서로 되어 있네요.
몇일 사이에 배송되겠죠...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9월 내에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올 [정치체에 대한 권리] "서문"을 올립니다.  

발리바르가 쓴 여러 책의 "서문"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나고 인상적인 "서문" 중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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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에 관한 권리를 갖다/~에 속할 권리가 있다”avoir droit de cité라는 이 표현은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특히 사상들이나 문제들에 적용된다. 지난 수년간 이런저런 잡지나 학술지 또는 공동 저작에 발표됐거나 미발표된 논문들 및 발표문들을 묶으면서[나는 처음에 여기 실린 글들을 수록해 준 출판사들 및 간행물의 편집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학술지 󰡔리뉴󰡕(Lignes)를 편집하는 미셸 쉬르야(Michel Surya), 다니엘 도블(Daniel Dobbels) 및 프란시스 마르망드(Francis Marmande)에게 감사하고 싶은데, 그들은 지속적인 역경의 와중에서도 󰡔리뉴󰡕의 필수 불가결한 기획을 고수해 오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시민성/시민권[[옮긴이] 지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의 번역에서는 ‘citoyenneté’를 일괄적으로 ‘시민권’으로 옮겼는데, 이러한 번역은 ‘citoyenneté’에 담긴 이중적 함의, 곧 정치적 활동의 주체로서 시민의 본성을 뜻하는 주체적 함의와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적 함의를 온전히 살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이 점을 감안하여 이 책에서는 경우에 따라 ‘citoyenneté’를 ‘시민성’과 ‘시민권’으로 구별하여 옮기거나 ‘시민성/시민권’같이 병기하여 옮기기로 하겠다.]의 생생한 문제들에 대해 프랑스에서 논의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주도록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민권이라는 주제는 이미 가장 많이 다룬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교육이 문제이든 아니면 기업이나 공공서비스가 문제이든 또는 공직 선출자의 책임 및 정치적 도의 내지 사회운동이나 문화의 역할이 문제이든 간에 “시민적” 및 “시민”이라는 관형어가 결부되지 않고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대꾸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내 논점을 좀 더 정확히 해두기로 하자. 내 목표는 다면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때로는 형태를 가늠키조차 어려운 이런 토론 속에 대개 그것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일군의 문제들 ⎯ 이는 이 문제들이 너무 “형이상학적”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특수하”거나 평범하다고 간주되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 을 도입하는 것이며, 또한 이런 문제들이 서로 소통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가 염두에 둔 문제들은, 집합적 복종의 토대들이라는 문제 또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원칙들을 적용하는 문제이며, 또한 거기에는 국민국가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라는 문제 내지 세계 및 도시의 갈등을 인류학 및 조형예술의 현대적 발전과 접합하는 문제들도 포함된다.

나의 논변과 탐구의 핵심에는 경계/국경 제도가 놓여 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더[나는 이미 경계/국경이라는 문제를 󰡔민주주의의 경계들󰡕(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및 󰡔대중들의 공포󰡕(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서관모・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에서 다룬 바 있다.] 경계/국경 제도는 단지 심원하게 기능이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제도를 구현하는 관행들 및 표상들 ⎯ 영토의 한정에서부터 내국인과 외국인의 (“자연적”이거나 “강요된”) 분리에까지 이르는 ⎯ 은 상호 양립 불가능한,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다수의 시민권의 정치들의 시금석을 이룬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시도해 볼 생각이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국경 제도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비록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가 존속 가능한 시민권, 그리고 모든 이들이 영위할 수 있는 시민권을 설립하고자 한다면 필수 불가결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나는 국경 제도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검토해 볼 것이며, 또한 이런 민주화를 정의하고 작동시키기 위해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검토해 볼 것이다.

따라서 시민성/시민권에 관한 문제들을 검토하면서 나는 결코 이런 문제들을 프랑스에 고유한 역사적 제도들 및 조건들에 대한 성찰과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유럽 국민들 전체에 공통적인 문제들이나 지중해의 양쪽 연안 국가들에 공통적인 문제들(특히 프랑스 인민과 알제리 인민의 운명이 함축하는 문제들), 그리고 세계화 과정 ⎯ 이 과정에는 아메리카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데, 비록 이런 그림자를 미국의 제국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 속에서 문화의 생성이라는 문제들(무엇보다도 “다문화주의”의 등장이라는 문제)과도 분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이 문제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문명들의 중첩과 옛것과 새로운 것, 친숙한 것과 낯선 것lointain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지리와 역사의 “삼중적인 지점들” 중 하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Les frontières de l'Europe”, La Crainte des masses, op. cit.; “유럽의 경계들”, 󰡔대중들의 공포󰡕, 앞의 책.] 현재의 세계에서 이 지점들보다 더 민감한 지점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분석의 관점 및 넓은 의미에서의 투사적인 활동의 관점에서, 이 다중적이고 유동적인 경계 다름 아닌 프랑스 자신위에 나 자신 및 또한 독자들을 위치시키고 싶었다. 나는 이런 작업에서 이 책을 이루는 텍스트들의 대화 상대방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 텍스트들 대부분은 나의 지인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반향하고 있다. 제10회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의 프랑스 및 독일 예술감독들이나, 국제철학학교에서 열린 “알제리, 프랑스, 교차된 시선”Algérie, France, regards croisés이라는 제목의 콜로퀴엄을 조직했던 파리와 오랑Oran[[옮긴이] 오랑은 알제리의 도시 명칭이다.]의 내 동료들이 바로 그들인데, 나는 그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청들은 오늘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런 요청들은 우리가 매번 지역주의와 국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 아무튼 바로 이런 요청들로부터 우리는 “프랑스식” 시민성의 가장 훌륭한 유산인 정치적 보편주의를 확장하고 재작동시켜야 할 필요성을 이끌어 낸다.

프랑스와 유럽에서의 인권의 정치가 문제이든 아니면 식민화의 흔적들 및 그 흔적들이 불러내는 능동적 “기억”이 문제이든, 또는 “세계화”라고 불리는 것 속에서 국경과 국적의 문제 및 동일성들과 문화의 생성이 문제이든 간에, 이 문제들은 단순하게 이론적인 관계에 따라 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떤 추상적 공식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는데, 이 문제들이 결국에는 한 개념이 지닌 상이한 측면들을 밝혀 주는 데 기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이 문제들의 접합을 지령하는 것은 어떤 정세가 지닌 강제력들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정세는 육면체의 공간[[옮긴이] “육면체의 공간”은 프랑스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프랑스의 지리적인 모습이 육면체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을 훨씬 넘어서지만, 현재의 조건 및 프랑스의 전통은 이런 정세에 대해 아주 특수한 모습을 부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격을 띠고 있는 위기에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데, 국민전선의 발흥은 이런 위기의 가장 명백한 증상을 이룬다. 내가 샤토발롱Châteauvallon[[옮긴이] 샤토발롱은 프랑스의 툴롱(Toulon) 시에 있는 문화공연센터의 명칭이다. 샤토발롱에서 발표한 발리바르의 글은 이 책 6장에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과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국민 우선”이라는 문제 ⎯ 이는 국민전선의 중심 구호들 중 하나이며, 국민전선이 지닌 파시즘적인 성격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구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 에 관해 큰 목소리로 고찰하면서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국민전선에 강박 들려 있지 않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화급한 문제들을 정식화하는 데서 국민전선이 불러 주는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두가 다 기억하는 말을 원용하여, 국민전선은 “좋은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말해 두자. 하지만 국민전선의 영향력은 진정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국민전선의 영향력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하는 위협은 구조적 원인들에서 유래한다. 이런 위협은 잔혹하게도, 만약 우리가 집합적으로 정치를 재발명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아주 험난한 저항의 길밖에 없는, 그런 조건들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점에 관하여 부단히 참여와 성찰을 호소하는 것이 비관론이나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될 수는 없다.

확신하거니와 이런 위기에 대한 이해는 일방적인 문제 설정의 틀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이해는 일의적인 용어법을 통해서는 표현될 수 없으며,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말했던 것처럼 “다중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그리고 예술의 자원들 및 역사, 사회학, 정치철학의 자원들 등이 이런 다중 언어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지시적 범주가 필수적인데, 이 범주는 시민성/시민권의 실천들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실추를 거듭해 온 제도적 복합체, 더구나 이런 실천들이 함축하는 현재의 긴장을 격발시키고 있는 그런 제도적 복합체가 지닌 상이한 측면들을 포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범주다.

내가 제안하려는 지시적 범주는 국민(적이고) 사회(적인) 국가État national (et) social라는 범주인데, 나는 이 표현의 도발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범주는 우리를 경제 신학적인 이념성들의 천상天上(“섭리국가”[[옮긴이] 우리가 “섭리국가”라고 옮긴 “l'État-providence”는 영어식으로 표현하면 “welfare state”, 곧 복지국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단어 뜻 그대로 이해하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통치되는 국가”를 의미한다. 이런 명칭의 기원은 1891년 교황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노동헌장을 통해 당대 자본주의국가들에서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상태를 고발하면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 및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는 국가를 제시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에서 발리바르가 “l'État-providence”를 “경제 신학적인 이념성들의 천상”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에서 역사적 전환들이 이루어지는 지상으로 데려가며, 계급투쟁 및 사회운동을 유토피아로 투사하거나 역으로 악마화하지 않으면서도, 점차 국가로 통합된 계급투쟁 및 사회운동이 미친 세속적 효과를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계약적 질서”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위기 및 그것이 낳은 사회적・정치적 “소속 박탈”désaffiliation의 효과들의 뿌리에 관한 연구들 가운데 이론의 여지없이 가장 탁월한 연구[R. Castel, 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 : Une chronique du salariat, Fayard, 1995.]에서 로베르 카스텔Robert Castel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어도 한 차례는 이 범주를 사용하고 있지만, 또한 동시에 이 범주가 지닌 통제 불가능한 함의들을 경계하고 있다. 반대로 나는 논의를 일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범주가 지닌 모든 함의(가장 우려할 만한 함의들까지 포함해)를 열어 놓기 위해 이 범주의 사용을 옹호한다.

지난 50여 년 동안 산업 발달을 이룩했고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는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사회들(프랑스와 같은)이 경험했던 상대적인 사회적 평형 상태가 파시즘과 친화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이 범주를 사용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다.[[옮긴이] 발리바르 말의 의미는,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이 나치스, 곧 ‘국가사회주의’(독일어로는 Nationalsozialismus, 불어로는 socialisme national)을 연상시킬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전자의 사회들에도 불평등과 배제가 존재하고 도덕화하고 정상화하려는 강제들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점차 국민주의의 틀 속에서 사회적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또한 이와 상관적으로 사회정책을 수단으로 하여 다양한 동일성들, 국민적 공화주의의 다원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점차 소멸시켰던 경제적이거나 기타 다른 변화들에 대해 이 사회들이 취약했던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 사실 [사회적 갈등의 조절과 다양한 동일성들의 통합 사이의] 이런 “선순환”은 사회적 투쟁의 동역학의 산물로서, 이는 코포라티즘이라고 비난받아 왔지만, 또한 그런 사회적 투쟁은 특히 능동적 시민성을 산출하기도 했다. 이런 선순환이 중단되자마자, 위기의 상황에서 선순환이 표상해 왔던 파시즘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 역시 더는 사고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상위의 수준에서” (예컨대 “사회적” 유럽의 수준에서) 이런 선순환의 재구성을 다소간 의례적으로 예고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이를 회복해야 하며 ⎯ 처음 보기에는 아무리 그럴듯하지 않다 하더라도 ⎯ 모든 수준에서(지역적・국민적・관국민적) 민주주의적 실천들과 개혁, 반역, 혁명의 수렴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국민사회국가의 역사적 형상을 넘어서, 개인적 지위로서의 시민권과 집합적 해방으로서의 시민성의 변증법을 또 다른 틀 속에서 재개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일반적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한 번의 계기에 저술된 것은 아니지만, 같은 특집호에 수록된 여러 편의 글들처럼 읽을 수 있다. 이 텍스트들이 서로 모순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내가 보기에 본질적인 점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나는 이런 모순들을 감추고 싶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정세가 지닌 불확실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정정은 지적 작업을 제시하는 일의 일부를 이룬다. 지적 작업을 제시하는 일은 독백을 고집하는 연구를 소개하는 일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 만남과 호명, 현실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한 일에서 유래한 작업은 그 흔적을 담고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새로운 대결을 향해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

나는 일정한 상황들 속에서 “시민 불복종”에 대한 발의를 요구하는 원칙들을 검토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미등록 체류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공개적인 환기를 통해서 이 책을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국가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및 그 내용이나 입안 조건들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법률들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시민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가의 사멸”을 요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를 정초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이 함축하는 개인주의는 정치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불복종에 대한 이런 필수적인 준거가 없이는, 그리고 심지어 이처럼 불복종에 의지함으로써 생겨나는 위험을 주기적으로 감수하지 않고서는 시민성과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외국인의 프랑스 입국 조건을 훨씬 더 까다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 “드브레” 법안에 맞서 1997년 2월 벌어진 집합적인 반항 운동 시기에 발표됐고 이 책에 수록된 글에서 내가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시민 불복종은 그것이 필수적인 것이 되는 경우에는 제도에 맞선 개인적 양심의 항거를 표현하지 않으며, 사적인 도덕적 측면과 공적인 삶의 측면 사이의 치유 불가능한 분리를 표현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상징적 토대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 행동이다. 사실 국가의 상징적 토대는 국가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이런 토대는 초월적 권위에게 돌려지던가 아니면 사회에 내재적인 “구성 권력”에서 비롯해야 한다. 하지만 정당성이 기성 질서로부터 분리되자마자 두 경우에서는 갈등과 폭력의 위험, 이율배반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에 대한 복종의 조건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봉기의 행위 또는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불복종 행위가 오류나 과오 또는 범죄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결정하는 판단은 규칙 없고 모델도 없는 항상 독특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런 불복종 행위를 보편적으로 이론화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불복종 행위의 상황들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상황들은 공적인 장소에 “미등록” 이민자들의 처지(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자)를 드러내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상황들은, 인정받는 인간 및 시민의 지위를 요구하는 이민자들의 입장과, 본질적으로 이들에게 합법적인 체류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선택 및 자신의 행정적인 모순들, 그리고 자신의 역사적 유산이 낳은 결과들을 떠맡기를 거부한(그리고 여전히 많은 부분 거부하고 있는) 국가의 완고한 태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개적인 갈등에서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가담하도록(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가담하게) 만든 것은,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것과는 반대로 지식인의 참여가 지닌 메시아적인 모습에 대한 향수나 이제는 상실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망상적인 대체물의 추구 때문이 아니다. 국민전선이 조장하고 고무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에 맞서 외국인들을 그 자체로 사랑하자는 대칭적인 명제를 무책임하게 대립시키려는 시도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이동권 및 생존권의 중요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입국 및 체류에 대한 치안상의 제한에 대한 이런 권리들의 우선성이 국적 그 자체의 원칙을 정당하게 활용하기 위한 시금석이 되리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치체에 대한 권리로부터 가장 완강하게 배제되고 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제도적 쇄신 및 발명(이를 통해 오늘부터 시작해서 미래의 시민성이 짜여 나갈 것이다)이라는 대책을 강구하도록 강제하는 이들의 개인성을 현시하지 않고서는 또는 적어도 환기시키지 않고서는,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질문을 그것이 지닌 상호 의존적인 차원들 전체와 함께 검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미래의 시민성은, 상징적 준거들(자유, 인간들 사이의 평등, 연대)의 질서에서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리들에서도, 무국민적이거나 반국민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관국민적일 것이다. 이런 시민권은 추상적이게도 반국가적이지는 않을 것이며, “주권적인” 국민국가의 전능함이라는 신화의 정정과 더불어 시민권의 설립 장소의 확대, 따라서 인간 활동의 공공성publicité 영역의 주목할 만한 증대를 전제할 것이다. 미래의 시민성은 결국 국가가 수행하는 문명화/국가 자신에 대한 문명화la civilisation de l'État(이 표현의 이중적 의미에서)를 경유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단지 관습과 덕목, 또 법률만이 아니라 이상들과 연대들, 집합적인 반역이나 봉기, 그리고 시빌리테와 안전 및, 폭력과 대항 폭력의 발전에 맞선 저항의 실천들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습속의 문명화”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과제는 아니지만, 커다란 상상력을 요구하는 과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치적 기예의 상반된 측면들을 실천적으로 묶어 내는 능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

지금 세기말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상상의 힘을 해방시키면서도 유토피아와 결별하는 일이다. 이런 테제는 확신하건대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내지 정치 사이의 불모의 대립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집단주의적인 것이든 개인주의적인 것이든 간에 유토피아는 현실주의와 비현실성이라는 양자택일 속에 상상력을 가두는 반면, 현실주의는 근원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며,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인 것, 심지어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역사 속의 어떤 현실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지구화”globalisation 내지 “세계화”mondialisation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과정[나 자신은 “세계의 세계화”라는 표현, 곧 세계의 “총체성”이라는 형상의 실질적인(virtuelle)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이 책에 수록된 “세계 문화?” 참조.]과 함께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토대들 자체가 근원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을 확인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역으로 제도들의 변화라는 질문 및 제도가 불가피하게 포함하는 허구의 몫(집합적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한 단어들과 권리들, 새로운 기법들의 발명,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접합하는 가치들의 변화)이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는 진정한 철학적 딜레마가 존재한다.

내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잠시 우리가 마르크스와 푸코에게 물려받은 정식들(두 사람의 철학의 양립 불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결국 이 정식들 사이의 수렴은 그만큼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을 원용해 보겠다.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아주 일찍부터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진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간의 거짓된 양자택일로 인해 은폐되었으며, 주지하는 바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한다(노벨 경제학상의 과학적 자본주의가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적 자본주의의 대립물이 아니듯이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귀결이며, 실증주의적 언어로 변환된 결과물이다.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비판의 의미는 과학 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과학의 기능은 전혀 다른 것, 정확히 말하면 인식이다) 실천 쪽에서, 그리고 혁명적 실천관 쪽에서 찾아야 한다. “세계를 변혁하기”,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진화에 대해 대안을 마련하기, 그리하여 세계의 진화에 대한 대안이 세계의 모순들 및 세계의 투쟁들 속에, 지배적인 경향들이 점점 더 광범위한 인간 대중들이 견뎌 낼 수 없는 강제들을 부과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실현할 수 없게 되는 그런 불가능성 속에, 따라서 이런 강제들이 야기하는 저항들 속에 객관적으로 기입되게 만들기.

푸코의 경우에는(그에게 저항의 사상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유토피아에 대해 대중의 변혁 운동이 아니라 그가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 것을 대립시켰으며, 그것의 실제적인 다양한 변이 형태들을 기술하고 분류하고자 했다. 헤테로토피아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의 가장자리 위치해 있지만, 역으로 사회에 대해 작용을 가하며, 사회가 크고 작은 차원의 차이들을 조절하는 데서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배제의 장소들 또는 그와 반대로 실험과 정상화 및 일탈의 장소들, 매음굴, 식민지, 극장, 감옥, 박물관, 정원 …… 요컨대 우리는 어떤 제도가 과연 헤테로토피아적인 차원을 갖고 있지 않을지, 그리고 과연 그런 차원 없이 존속할 수 있을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성의 모순 및 그것이 지닌 화해 불가능한 갈등들이 아니라, 모든 정상화에 대해 반항적이고, 모든 규칙보다 더 복잡하거나 이질적인 특징을 지닌 사회적 행위들의 이질성이 강조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또한 마르크스와 푸코가 각자 나름대로 정치의 본질적인 한 차원을 탐구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좋은데, 이런 차원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주체성이 이런 장의 절대적 “타자”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내밀하고 필연적인 차이로서, 그것의 불가피한 유동성 내지 “역사성”의 보완물로서 등장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제 현대 세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비판이 제기하는 문제들로 되돌아가 보자. 좀 더 빨리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나는 세계화는 유토피아의 고전적인 거대 형상들에 조종을 울렸다고 말해 볼 생각인데, 이는 특히 이런 형상들이, 법치국가Rechtstaat 및 권력국가Machtstaat의 현실들에 대해 ⎯ 마치 그것들의 이면裏面을 이룬다는 듯이 ⎯ 상상적 보충물이자 명예의 표현으로 작용했던 “세계시민주의”의 지평 속에 기입되어 있었던 한에서 그렇다. “세계시민주의”는 이상 도시Città ideale의 조화로운 꿈을 세계 전체로 확대한 것으로 근대의 모든 진보 사상의 지평이 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지구 전체의 지배, 교환 및 지적 소통, 분업의 유일한 공간 내부에서 인간 종의 통합이 인종적이거나 국민적인 적대들의 해소와 더불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태의 불평등 및 인간에 의한 인간의 압제의 제거와 일치하게 되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두 진영” 사이의 단순화된 적대의 종언에 의해, “남”과 “북”의 주민들의 점증하는 상호 침투에 의해, 새로운 국제 질서 및 그 인도주의적 보충물의 피비린내 나는 실패에 의해, 요컨대 사람들이 세계화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미몽에서 깨어난 우리의 눈앞에서 완전히 산산조각난 채 끝나 버린 것이 바로 이런 유토피아적 전망이다. 사실 동일한 세계 내부에서, 동일한 경제적 규제에 종속되고 동일한 환경 문제들에 직면한 가운데, 동일한 관측 위성들의 감시 아래 놓인 채로 마침내 실현된 인간 종의 통일성은 시민적civique / civile 공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홉스가 자연 상태로 묘사한 바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과 더 닮았다. 더욱이 통신의 “가상 세계”는 계속해서, 스펙터클로 전환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들의 불행(보스니아나 르완다 또는 알제리에서 볼 수 있듯이)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고, 이제는 결정적으로 폐지된 것으로 믿었던 “우등 인간”과 “열등 인간”(심지어 “일회용 인간”)의 분할을 재창조하고 있다.

따라서 더는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유토피아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들이 정말이지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이제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 만들어 낸 표현을 따르면)가 되었다. 󰡔지나간 미래󰡕, 한철 옮김, 문학동네, 1998 참조.] 이 때문에 아마도 유토피아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퇴락된 형태들로서만 지적으로 살아남게 될 것이다. 기술 관료적 프로그램이나 메시아적인 예언 같은 것들 …….

나로서는 결코, 상상은 이제 정치에서 아무런 자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정치는 불가피한 것을 관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불가피한 것의 가장자리들을 정돈하거나 인간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대한 상상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상상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나는 이런 상상력을 집합적・실천적 차원 및 법적・상징적 차원을 아우르는 제도적인 창조의 장 속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령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다루겠다) 민주주의 그 자체의 탁월한 반민주주의적 조건을 이루는 국경 제도의 민주화를 기획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허구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허구란, 경험 그 자체로부터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며, 인식과 행동이 서로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된 것, 그리고 구성/헌정을 산출하는 봉기(및 현존하는 헌정들의 변혁)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개인적 책임이자 집단들 사이의 소통의 도식으로서의 정치를 재발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경험을 통해 허구의 장소들을 발견하는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 현실은 우리에게 그런 장소들 중 몇 가지를 (하지만 제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가리켜 준다. 가령 “국민” 내에서 외국인들의 지위 또는 국민들과 외국인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표상/재현/대표 같은 것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차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이런 폐지는 문명을 형성하는 차이들의 종언이 될 뿐만 아니라, 환대라는 본질적인 통념의 의미를 박탈시킬 것이다), 차별의 기능에서 상호성의 기능으로, 그리고 이로부터 세계적인 연대와 갈등의 공간을 지역적으로 개방하는 기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한 사례에 불과하고 또 이것을 노동 분야에서 또는 문화적 동일성과 종교 분야에서 제기되는 다른 쟁점들과 분리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가 지난 10여 년 또는 20여 년간 헤쳐 온 여정을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을 잘 고려한다면 이것은 허무주의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1997년 10월 30일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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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비평] 가을호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재작년에 발표된 [국민이라는 괴물?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 51호, 2009의 후속편 성격의 글입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므로, 이 글에 대한 토론이나 비평을 원하는 분들은 [역사비평] 가을호에 수록된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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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1. 이 글은 2011년 4월 1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제148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됐고, 그 뒤 7월 7일 제1회 역사비평 토론회에서 발표된 바 있다. 두 발표회 참석자들의 유익한 문제제기 덕분에 글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참석자 분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그럼에도 이 글에 여전히 담겨 있을 난점이나 문제점은 온전히 필자의 책임임을 밝혀둔다.]
 

I. 들어가는 말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을 쓰게 된 몇 가지 동기를 밝혀두겠다. 우선 나는 그동안 서양어인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또는 내이션 스테이트[2. 이 글이 부분적으로는 nation과 nationalism, ethnicity, ethnie 등과 같은 서양 개념들의 번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이 개념들은 발음만 옮겨서 표기하도록 하겠다.]가 때로는 민족이나 민족주의, 민족국가로 또 때로는 국민이나 (드물긴 하지만) 국민주의, 국민국가 등으로 특별한 원칙 없이 번역되거나 아니면 그냥 발음에 따라 표기되는 경향을 꽤 불편하게 생각해왔다. 이것은 대개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등이 갖는 원래의 다의성을 근거로 하여 정당화되곤 한다. 더욱이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 등의 번역을 선호하는 이들이나 19세기 말 네이션이 처음 소개된 이후[3. 이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권보드래, 「근대 초기 ‘민족’ 개념의 변화」, [민족문학사연구] 33, 2007 및 박찬승, 「한국에서의 ‘민족’ 개념의 형성」, [개념과 소통] 창간호, 2008을 참조.] 일제 시대 및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이 용어가 사용된 용법을 근거로 하여 우리말의 ‘민족’ 개념이 갖는 특수성(심지어 세계사적인)을 강조하는 이들은 때로는 민족을 국민의 상위 개념(더 포괄적이거나 규범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의미에서)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경향이 우리말의 국민과 민족을 네이션 개념에 대한 서로 경쟁하는 번역어로 간주하거나 또는 동일한 지시체를 지칭하는 두 개의 상이하고 때로는 배타적인 용어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 이러한 혼용(더 나아가 ‘혼동’)은 이해할 만한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기는 하지만[4.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흔히 말하듯이 매우 유례가 드문 ‘단일한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적 현실에서 어느 정도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래에 이르기까지 서양(특히 영미권)에서도 ethnicity나 ethnic group 같은 용어가 부재한 가운데 nation이 ethnicity나 ethnie를 포괄하는 뜻으로 꽤 다의적으로 사용되어온 데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한 연구에 따르면 ethnicity가 [옥스포드 영어사전]에 처음 등재된 것은 1972년이며, 영어권에서 이 용어는 1953년 사회학자 데이비드 라이스먼(David Riesman)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Thomas Erikson, Ethnicity and Nationalism, Pluto Press, 2002(2nd Edition), p. 4 참조], 이제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부정확하고 현실에 대한 설명력도 떨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근대 네이션은 우리말의 용법을 고려해보건대 ‘민족’이라는 말로 번역되거나 표현되기는 어려우며, 우리말의 ‘민족’은 서양어의 에스니시티나 에스니(ethnie)에 더 가까운 말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근대적 의미의 네이션에 적합한 우리말 표현은 ‘국민’이다. 단 이것은 민족과 국민을 동일한 실체가 아니라 서로 상이한 지시체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보통 다소 형식적인 법적 의미로 이해되는 국민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 글을 쓰게 된 두 번째 동기는 지난 2008년에 전개된 촛불시위의 경험이다. 이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는 시위대들이 즐겨 부르던 “헌법 제1조”라는 짧은 노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조문을 되풀이하는 이 노래는 아마도 주권자로서 또는 제헌권력으로서 국민(또는 ‘인민’)의 위상과 의미가 대중들에게 자각적으로 인식되고 그들의 정치적 기억 속에 기입되게(또는 재기입되게) 된 최초의 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에도 ‘국민’은 ‘민족’과 더불어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 모두에 의해) 정치적으로 자주 호명되었지만, 대중들이 자기 자신을 단순히 피통치자나 수동적인 복종의 대상이 아니라 헌정의 주체로서 자각적으로 호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필자는 이러한 정치적 사건을 이론적으로 좀더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에 대한, 곧 근대 네이션에 대한 심층적인 정치적ㆍ존재론적 고찰이 이루어져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글의 또 다른 저술 동기와 연결된다. 나는 지난 20여 년 간 국내에서 이른바 ‘포스트주의’ 내지 ‘포스트 담론’이라 불리는 사조에 속하는 철학자들과 이론가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왔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 소개된 포스트 담론이 지난 20여 년 동안 국내 학계에서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포스트 담론은 넓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것과 꽤 생산적인 갈등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던 데 반해[5.이 점을 특히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는 로버트 영,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백색신화], 김용규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8을 각각 참조. 다만 두 번째 책은 (까다로운 내용 때문이지만) 번역에 다소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국내의 포스트 담론은 지난 1980년대 인문사회과학의 화두였던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는 담론으로 기능했으며, 자의든 타의든 간에 여러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주제들을 약화시키거나 때로는 배제하는 데 기여해왔기 때문이다.[6.이 문제에 관한 필자의 관점은 「진태원과의 대담: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현재적 과제」, 김항ㆍ이혜령 엮음, [인터뷰 한국 인문학 지각변동], 그린비, 2011 참조.]


이런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는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자생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민족사’의 구성이 20세기 후반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중심적 화두 중 하나였다면, 포스트 담론의 대두 이후 ‘민족’이나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에 관한 논의도 ‘위기’나 ‘종말’, ‘소멸’이라는 관념과 결부되어 줄곧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다양한 포스트 담론을 원용하는 이들에 의해 괴물로 치부되기도 하고 국민들에게 노예적인 삶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내지 파시즘의 대명사로 낙인찍히기도 했다.[7. 이 문제에 관해서는 진태원, 「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 51호, 2009 참조.] ‘포스트 담론’으로 포함시키기에는 너무 조야한 논변과, 자신들이 비판하는 이들 못지않은 극단적인 이분법과 환원주의로 점철된 (말하자면 ‘민족=국민=근대=전체주의’ 식의) 이런 식의 논의가, 하지만 국내에서는 또한 대표적인 포스트 담론으로 통용되는 현실에 대한 불편함과 곤혹스러움이 이 글을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가 즐겨 말했듯이, 해체 또는 탈구축(필자는 이것이 데콩스트뤽시옹(déconstruction)이라는 프랑스어의 좀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믿는다)은 이런저런 철학자의 작업이기 이전에, 현실 내지 사태 자체가 스스로 수행하는 작용이다. 현실은 항상—범박하게 말하자면—철학자가 작업하기 이전에 스스로 탈구축되고 재구축된다. 따라서 철학자나 이론가가 수행하는 탈구축은—역시 범박하게 말하자면—2차적인 탈구축이다. 현실 내지 사태가 스스로 탈구축되는 것은 그것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모순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주의나 마르크스주의적 종말론에 의거하는 이들이 믿었던 (또 이른바 ‘금융위기’를 계기로 고무되어 다시 한 번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모순은 전면적으로 지양되지도 않거니와 반드시 행복한 귀결을 낳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인 사태를 구성하는 복합적 모순은 스스로 탈구축되면서 더 강화되기도 하고 전위(轉位)되면서 새로운 모순들을 산출하기도 한다. 2차적 탈구축이 좀더 복잡하고 다면적인, 그리고 미묘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는 네이션(또는 네이션들의 체계)이 근대를 대표하는 구축물이라고 생각한다. 또 네이션이 오늘날 거대한 전환의 시기에, 탈구축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의 네이션이 수행하는 탈구축은 단순히 네이션의 종말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정치체로의 선형적인 대체를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네이션(또는 네이션들의 체계)의 운동을 규정했던 복합적인 모순의 심화이고 새로운 전위일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네이션들의 체계가 수행하는 탈구축의 운동에 대응하는 2차적 탈구축을 위한 과제는 ‘민족’이나 ‘민족주의’(또는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들을 단순히 저주하고 청산하려는 것일 수도 없다. 그러한 탈구축은 무엇보다 네이션의 운동을 규정해온 모순의 성격을 밝히고 그러한 모순의 운동을 굴절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만약 탈근대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탈구축의 작용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II. 네이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1. 네이션을 ‘민족’으로 번역하는 경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우선 네이션의 번역 문제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최근의 한 연구는 국내에서 네이션이 적어도 해방 이후에는 줄곧 ‘민족’이라는 말로 번역돼온 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민족’이란 단어는 ‘nation’의 번역어이다. 20세기 한국사에서 ‘민족’이란 단어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식민지와 분단의 현실은 ‘민족의 독립’, ‘민족의 통일’을 20세기 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만들었다. nation은 본래 ‘국민’이라는 말로로 번역되었고, 따라서 ‘국민’이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로 인한 국권의 상실은 한국인들의 ‘국민’될 자격을 박탈하였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불완전한 국가의 성립은 한국인들에게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국민’이라는 단어보다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8. 박찬승, [민족, 민족주의], 소화, 2010, 21쪽.] 그리고 그는 이후 별다른 정당화의 논거 없이 네이션을 민족이라는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고, 전근대 시기의 ‘민족’에 대해서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서 그가 찾아낸 ‘족류’(族類)라는 용어가 적합할 것 같다고 제안하고 있다.[9. 박찬승, 같은 책, 50쪽 이하 참조.]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따른 이유[10. 한국사 연구자들은 간혹 개념 내지 용어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이라는 말이 네이션에 대한 타당한 번역어라고 옹호하면서도 그러한 역사성을 과거의 역사성으로 한정한다. 다시 말해 역사라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그에 따라 변화된 역사적 현실을 지칭하는 용어도 새롭게 바뀔 수밖에 없다는 점, 곧 용어의 역사성은 현재 및 미래의 역사성도 함축한다는 점을 다소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많은 민족 관련 연구자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적 맥락을 매우 중시하면서도 1990년대 이후의 상황을 새로운 시대적 상황으로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박명규, 「네이션과 민족」, [동방학지] 제 147권, 2009, 32쪽 주 7).] 이외에도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을 ‘민족’이나 ‘민족주의’로 번역해야 하는 논리적인 논거를 제시하는 필자들도 적지 않다. 가령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저자로서는 만일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면 ‘네이션’에 함유되어 있는 종족의 문화적 측면(민족)은 소거되고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국민)이라는 측면만이 부각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모든 ‘네이션’에는 종족의 문화적 논리와 시민의 정치적 논리가 공히 존재한다. ‘민족’이란 번역어도 ‘국민’에 깃들인 정치적ㆍ계약적인 성격이 약하기는 하지만 혈연적ㆍ문화적 공동체를 함의하는 ‘종족’(ethnicity)이란 말이 따로 있으므로 ‘민족’은 ‘종족’과 ‘국민’의 중간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11. 장문석, [민족주의 길들이기], 지식의풍경, 2006, 10쪽.]

국내에는 네이션과 내셔널리즘 또는 네이션 스테이트에 관한 논의는 많아도 이 용어들의 번역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대략 관례에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 장문석은 자신의 번역 이유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논거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는 경우

하지만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자는 제안도 국내에서 이미 몇 차례 제시된 바 있다. 특히 서양사학자인 최갑수의 제안이 주목할 만한데, 그는 일련의 논문들에서 이런 주장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는 199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네이션이라는 서양 개념은 우리말의 ‘민족’과 ‘국민’ 두 가지로 옮길 수 있으며, 오히려 후자의 의미를 더 강하게 띠고 있음을 지적한다.[12. 최갑수, 「서구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족주의」, 한국사연구회 편, [근대 국민국가와 민족문제], 지식산업사, 1995, 15쪽.] 더 나아가 “그것이 우리말에서 주로 ‘민족’으로 옮겨지고 있음은 우리가 드물게도 ‘종족적으로’(ethnically) 매우 동질적이며 진정한 의미의 국민을 아직 이룩해내지 못한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13. 같은 책, 같은 쪽. 더 나아가 최갑수는 “‘종족적으로’”라는 말에 각주를 달아, 이러한 번역은 영어의 ‘ethnic group’을 ‘종족’으로 표현하는 기존 국어사전의 용례에 따른 것이지만, “원래 혈통적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는 ‘종족’이 과연 ‘ethnic group’의 적절한 번역어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인종’은 더욱 부적절하다. 차라리 ‘민족’이 어떨는지. 즉 ‘nation’을 ‘국민’으로, ‘ethnic group’은 ‘민족’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감히 제언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좀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몇 년 뒤에 발표한 다른 글들에서는 좀 더 나아가 네이션 이외에 내셔널리즘이라는 개념 역시 단일한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구별해서 이해하고 번역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가령 1999년의 「프랑스 혁명과 ‘국민’의 탄생」 첫 번째 각주에서 그는 (프랑스에 한정된 것이기는 하지만) 네이션은 ‘국민’으로, 내셔널리즘은 ‘국민주의’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이희승 선생의 [국어대사전](민중서관, 1975)에 따르면, 민족이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임”이며 국민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을 뜻한다. 전자를 문화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nation’이 이 두 의미를 포괄함이 명백하나, 그 근대적 용례를 확립시킨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적어도 187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정치적 개념인 ‘국민’이 단연 우세했다. ... 따라서 본고에서 ‘nation’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국민’으로, ‘nationalism’ 역시 ‘국민주의’로 옮길 것이다. 하지만 예컨대 독일의 민족주의와 같이 프랑스의 ‘국제주의적’ 헤게모니에 대한 국민적 반발로 나타났던 경우는 ‘국민주의’보다는 ‘민족주의’로 옮기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14. 한국 서양사학회 편, [서양에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까치글방, 1999, 107쪽. 이러한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는 김인중, 「민족주의의 개념」, [프랑스사 연구] 제 22집, 2010, 309쪽 참조.]

그 뒤 2003년에는 더 나아가 ‘에스닉 그룹’(ethnic group)의 번역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언어, 역사, 신화, 관습, 그리고 아마도 종교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삶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는 인민”을 말하는 ‘ethnic group’은 어떻게 옮겨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민족’으로 옮겨야 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내셔널리즘’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도 nation/ethnic group의 구분법을 Nation/Volk로 유지했던 것이다."[15. 최갑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특성」, [서양사 연구] 제 31집, 2002, 2-3쪽.]

내가 최갑수의 견해를 인용한 것은 대체로 그의 논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고 또 그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해명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밖에 주목할 만한 것은 상당수의 인류학자들이 네이션을 ‘국민’으로, 그리고 에스니시티나 에스닉 그룹은 각각 ‘민족성’이나 ‘민족’ 등으로 옮기자고 제안한다는 점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견해가 주목할 만하다. “ethnic group, ethnicity는 원래 미국의 다문화, 다민족사회의 맥락에서 소수민족들의 존속이나 부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한 국가 내에 존재하는 민족집단 및 그것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nation의 번역어로 쓰이는—인용자] 민족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하여 ethnic group(ethnicity)이 종족(종족성) ... 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ethnic group, ethnicity라는 용어가 이제 한 국가 내의 주류 민족 집단(예를 들어 중국의 한족)뿐만 아니라, 국가의 범역을 넘어선 민족현상의 설명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수민족’으로 번역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민족에 관한 광범위한 현상들이 ‘민족’이라는 일상화된 실천적 용어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 현상을 감안할 때, ‘종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어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실제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ethnic group, ethnicity를 별도의 용어로 번역하기보다 전자는 민족집단, 소수민족, 민족단위로, 후자는 민족성, 민족 정체성, 민족 특질, 민족관계, 민족현상 등으로 맥락에 따라 개념화되어 서술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16. 유명기, 「민족과 국민 사이에서: 한국 체류 조선족들의 정체성 인식에 관하여」, [한국문화인류학] 35권 1호, 2002, 75-76쪽. 또한 이광규, [신민족주의의 세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2장 및 이 책에 대한 서평인 이정덕, 「서구적 개념어의 번역에서 오는 혼란」, [한국문화인류학] 41권 1호 참조. 시안 존스, 이준정ㆍ한건수 옮김, [민족주의와 고고학], 사회평론, 2008, 11쪽에 나오는 번역 용어에 관한 설명도 참조하라. 이 책의 원제는 Siân Jones, The Archeology of Ethnicity, Routledge, 1997이다.]

인류학자들이 이처럼 에스닉 그룹이나 에스니시티에 관한 번역에 민감한 이유는 원래 서양에서 이 개념들이 생성되고 또 최근에 널리 논의되는 분야가 인류학 분야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17. 서양 사회과학에서 이 개념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시안 존스, 󰡔민족주의와 고고학󰡕, 2장-4장을 참조.] 반면 한국에서는 그동안 소수민족 문제나 다민족 문제가 그다지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분과학문에서는 이 개념들의 용법이나 번역 문제에 대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앞의 인류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에스니시티나 에스니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는 네이션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돼 있으며, 에스니시티나 에스니라는 개념들을 고려해야 민족과 국민, 민족주의와 국민주의 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좀더 깊어지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3. 네이션을 ‘민족’으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반론: 네이션과 에스니

다시 앞의 논의로 돌아가자면, 장문석은 앞서 인용했던 것처럼 네이션이 종족과 국민 사이의 중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몇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 번째 반론은, 과연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가 종족과 국민 사이의 중간적인 의미를 표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앞서 인용한 국어사전에 따르면 우리말의 민족은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집단.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분류한 것임”을 뜻한다. 이러한 정의는 실제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잘 전달해준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당연히, 한국의 역사와 전통, 한국어,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양식, 한국인에게 고유하다고 여기는 심리적ㆍ정서적 습관을 떠올리며, 한국어를 잘 구사하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잘 알고 있고 한국의 의식주 생활에 익숙한 사람, 더욱이 검은 머리를 하고 약간 광대뼈가 나온 사람을 그러한 민족의 성원으로 떠올리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프랑스 출신으로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한국에서 20여년을 살아오면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해서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이다 도시라는 방송인을 한민족의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더욱이 대개의 경우 그는 한국어를 잘 하는 신기한 외국인으로 비쳐질 뿐 한국인으로 여겨지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은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음에도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섭섭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어법이 이런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네이션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을까?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장문석이 ‘종족’이라고 번역하는 에스니시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에스니’(ethnie)[18. 에스니라는 단어는 영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프랑스어 단어다. 영어에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ethnicity나 ethnic group 같은 단어들이나 ethnic이라는 형용사만 존재했을 뿐 단일한 명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아래에서 논의되는 앤서니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ethnie라는 프랑스어를 수입하여, 그것을 에스닉 공동체의 한 유형을 가리키는 명사로 사용한 바 있다. 이러한 용법이 학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이 단어는 최근 서구학계에서 공용 학술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여기서 새로운 쟁점이 나타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네이션과 에스니에 관한 최근 서양학계의 정의를 검토해보기로 하자. 네이션과 에스니에 관해 비교적 체계적인 정의를 제시한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내셔널리즘에 관한 권위자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앤서니 스미스(Anthony D. Smith)다. 이른바 ‘민족상징론’(ethno-culturalism)의 주창자로 분류되는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 네이션 및 내셔널리즘에 관한 원초론(primodialism)적 입장과 다른 한편으로 에른스트 겔너, 에릭 홉스봄 또는 베네딕트 앤더슨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근대론(modernism)적 입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전근대적 에스니와 근대적인 네이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하여 국내 학계에서도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앞서 우리가 거론했던 장문석이나 김인중 역시 그의 입장과 저작에 상당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전근대적 에스니와 구별되는 근대 네이션은 대략 다섯 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데,[19. Anthony D. Smith, Nations and Nationalism in a Global Era, Polity Press, 1995, pp. 54-56; 앤서니 스미스, 강철구 옮김, 󰡔국제화시대의 민족과 민족주의󰡕, 명경, 1996, 75-76쪽 참조.] 이러한 특징을 종합하여 그는 근대 네이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유된 신화와 기억, 대중적 공공 문화, 특정한 고토(故土, homeland), 경제적 단일성,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이름 붙여진 인간 집단.”[20. A. D. Smith, Ibid., pp. 56-57; 앤서니 스미스, 같은 책, 76쪽.] 또는 최근에 출간된 책에서는 “고토를 점유하고 있고 공통의 신화와 공유된 역사, 공통의 공공 문화와 단일한 경제, 모든 성원을 위한 공통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이름을 지닌 인간 공동체”[21. A. D. Smith, Nationalism: Theory, Ideology, History, Polity Press, 2001, p. 13.]로 네이션을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니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고토와 연결돼 있고 선조와 관련된 공통의 신화, 공유된 기억,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공유된 문화 및 (적어도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연대의 수단을 소유한 이름을 지닌 인간 공동체.” [22. A. D. Smith, Ibid..]

이 두 가지 정의는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지만(고토와 연결됨, 공통의 신화, 공유된 문화), 뚜렷한 차이점도 지닌다. 하나는 네이션의 경우 고토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 에스니는 고토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자의 경우 현재 고토에서 살아가는 집단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고토와 떨어져서 살아가는 이주 집단들이나 망명 집단들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이션의 경우 공유된 역사를 가지는 반면 에스니는 공유된 기억만을 가지는데, 이것은 에스니가 서로 분산된 영토에서 흩어져 살아가지만 같은 혈통과 신화 및 문화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을 포괄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네이션의 경우 단일한 경제와 공통의 공공 문화, 모든 성원을 위한 공통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데 반해 에스니는 이러한 것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네이션은 문화적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정치적ㆍ법적 공동체인 반면, 에스니는 문화적 공동체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말은 네이션보다는 오히려 에스니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에스니시티나 에스니 또는 에스닉 그룹 같은 용어는 앞의 인류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이, 우리말에서 비교적 생소한 ‘종족성’이나 ‘종족’, ‘종족 집단’ 같은 번역어로 옮기기보다는 내용상으로도 더 적절하고 일상어로도 친숙한 ‘민족’ 관련 어휘들로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더욱이 에스니시티나 에스니를 ‘종족성’이나 ‘종족’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일부 인류학자들이 하듯이 ‘소수민족’ 등으로 번역하는 것은 최근 서양학계에서 이 개념이 이룩한 이론적 진전을 몰이해하게 될 소지도 있다. 앞서 논의한 앤서니 스미스의 이론적 업적 가운데 하나는 에스니시티나 에스닉 그룹의 용법에 담긴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나 의고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에스니라는 개념을 근대 네이션의 기원 및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이다.[23. 이 점에 대해서는 Eric Kaufmann & Oliver Zimmer, “‘Dominant Ethnicity’ and the 'Ethnic-Civic' Dichotomy in the Work of A. D. Smith”, Nations and Nationalism, vol. 10, nos. 1-2, 2004 및 Andreas Wimmer, “Dominant Ethnicity and Dominant Nationhood”, in Eric Kaufmann ed., Rethinking Ethnicity: Majority Groups and Dominant Minorities, Routledge, 2004를 참조.] 그의 작업 이전까지 서양 학계 및 서구 사회에서 에스니시티나 에스닉 그룹이라는 말은 타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가령 영국이라면 파키스탄이나 인도 출신의 이주자들, 프랑스라면 북아프리카나 아랍 출신의 이주자들 또는 미국이라면 중국이나 일본, 한국의 이민자들이 이 단어의 지시체들이었다. 하지만 앤서니 스미스가 모든 근대 네이션은 에스니라는 역사적ㆍ문화적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또한 대개의 네이션에는 다수의 에스니가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한 이후, 에스니시티는 더 이상 타자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한정되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영국의 경우 인도인이나 파키스탄인과 다른 본토 영국인들(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및 심지어 잉글랜드인 등)도 일정한 문화적ㆍ역사적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에스니이고, 중국의 경우 티벳족이나 만주족 또는 조선족만이 아니라 한족 역시 하나의 에스니이며, 한국의 경우라면 한국인 역시 하나의 에스니인 셈이다. 따라서 문제는 더 이상 본토인 대 이방인(또는 소수민족)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국민 내에 존재하는 다수의 에스니들 사이의 구별(그 중 어떤 에스니는 다수이자 문화적ㆍ정치적으로 지배적일 수 있고 어떤 에스니들은 소수적일 수 있는)이며, 그것과 네이션 사이의 관계다.

셋째, 민족이나 민족주의, 종족성 같은 용어를 택하는 이들 역시 이른바 ‘종족적 민족주의’가 지닌 폐해를 지적하며 될 수 있는 한 그것을 억제하고 관리하면서 이른바 ‘시민적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앞에서 인용했던 장문석을 비롯해 많은 필자들이 이런 관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종족적 민족’ 대 ‘시민적 민족’이라는 이분법이 지닌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이분법을 고수하게 되며, 더 나아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시민적 민족’이나 ‘시민적 민족주의’ 자체가 함축하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른바 ‘시민적 민족’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프랑스나 미국이나 호주 같이 이민자들에 기반을 두는 나라에서 오늘날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배타적 시민권의 문제를 제대로 고려할 수 없게 된다.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시민권은 사회적 폐쇄의 지극히 막강한 도구다. 그것은 (국경이 없고 배타적 시민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전쟁과 내부 갈등, 기근, 일자리 부족이나 환경오염 등을 피해 도피하고 싶어 하는 또는 자녀들이 좀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해주고 싶어 하는 거대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번영을 누리면서 평화를 구하는 나라들을 보호한다. 시민권에 대한 접근은 도처에서 제한돼 있으며, 그것이 원칙상 민족성(ethnicity)과 무관하게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된 이들, 심지어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됨으로써 시민권에 지원할 가능성마저 배제 당한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러한 “시민적” 배제 양식은 비범하게 강력한 것이다. 전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아마도, 삶의 기회를 형성하고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대대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데서 이른바 민족성에 기반을 둔 어떤 식의 배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비가시적으로 남아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24. Rogers Brubaker, “The Manichean Myth: Rethinking the Distinction between “Civic” and “Ethnic” Nationalism”, in Hanspeter Kriesi et al. eds., Nation and National Identity, Ruëger Verlag, 1999, pp. 64-65. 또한 Bernard Yack, “The Myth of the Civic Nation”, in Ronald Beiner ed., Theorizing Nationalism,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1999도 참조.]

따라서 에스닉 내셔널리즘보다 시빅 내셔널리즘이 더 개방적이고 더 진보적이라고 보는 견해는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시민권이나 정치적 신조에 기반을 두는 시빅 내셔널리즘은 공통의 문화나 공통의 혈통에 기반을 두는 에스닉 내셔널리즘과 “다른 식으로”[25. R. Brubaker, Ibid., p. 65.] 개방적이거나 배타적이라고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할 것이다.

III. 국민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처럼 시빅 내셔널리즘이 좀더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보는 생각은, 사실은 네이션과 내셔널리즘(및 에스니시티)에 관한 논의에서 국민이라는 용어 자체가 실제로는 공백으로 남겨지거나 논외로 취급되는 것과 논리적으로 연결돼 있는 문제다. 사실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해 논의하고 또 이 개념들에 대해 상이한 번역어를 제안하는 필자들 중에서 국민이라는 말의 의미를 천착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국민이라는 단어는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한 국가를 구성하는 성원들, 또는 한 국가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또는 앞서 인용한 [국어사전]에 따른다면 국민이란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이다. 따라서 국민은 새삼스럽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대상이 될 만한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네이션을 국민으로 번역하자고 제안한 이상, 그리고 국민은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성원"을 가리키기 때문에 네이션의 번역어로 부적합하다는 반론이 이미 제기된 이상, 이러한 번역의 정당화를 위해서도 한번 국민의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이다.

1. 보편적 모순체로서의 국민

따라서 국민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피해야 할 함정은 그것의 의미가 지닌 자명성의 외관이다. 이러한 자명성은 무엇보다 국민을 법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서 생겨난다. 곧 국민을 “동일한 통치권 밑에 결합되어 국가를 조직한 인민”으로 정의하거나 아니면 좀더 간단하게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경우 국민이라는 용어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것이 될뿐더러 너무나 형식적이어서 아무런 개념적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된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 속한 시민은 이러한 의미의 국민이 아닌가? 또한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이런 의미의 국민이 아닌가?


따라서 네이션으로서의 국민에 대해 좀더 적절한, 그리고 좀더 근본적인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국민의 정치적 존재론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 내셔널리즘에 관한 빼어난 저작을 남긴 한 사회학자의 지적은 우리 논의의 실마리로 삼을 만하다.

"주권이 인민 안에 있다는 것과 인민의 여러 계층 간의 근본적인 평등을 인정한다는 것, 그것은 근대적 국민 관념의 본질을 이루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기본 신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국민됨(nationality)에 대한 인식과 함께 태어났다. 민주주의와 국민됨은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결로부터 떼어놓으면 양자 모두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내셔널리즘은 민주주의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취했던 형태였고, 나비가 누에고치 속에 들어 있듯이 국민 개념 속에 들어 있었다. 원래 내셔널리즘은 민주주의로서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의 발달조건이 존속된 곳에서 양자 사이의 동일성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이 다른 조건 속으로 확산되고 국민 개념에서 강조점이 주권자라는 성격에서 인민의 단일성으로 옮겨가면서 그것과 민주주의의 원리 사이의 본래의 등가관계는 상실되었다. 이것의 함의 중 하나는 (마땅히 강조될 만한 것인데) 민주주의는 수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국민에게는 내재해 있는 성향일 수 있지만, 다른 국민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며, 그래서 후자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거나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은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주권인민이라는 본래의 (원칙적으로 비-배타적인(non-particularistic)) 국민 개념의 등장은, 명확하게 ‘인민’의 상징적 지위상승과 정치 엘리트로서의 인민의 새로운 정의를 시사하는 해당 주민의 성격 전환, 다시 말해 구조적 조건의 깊은 변화가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했다. 그 이후의 배타적 국민 개념의 등장은 그와 같은 전환을 반드시 겪지는 않았던 조건에 본래의 국민 개념이 적용된 결과였다."[26. Liah Greenfeld, Nationalism: Five Roads to Modernity,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p. 10. 강조는 원문.]

이 인용문의 논점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는, (16세기 영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본래의 국민 개념의 본질은 인민주권과 인민 내부의 평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것, 따라서 본래의 내셔널리즘은 민주주의로서 발달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민주주의는 어떤 국민에게는 내재적 성향이지만 다른 국민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어서 정체성의 변화를 동반할 경우에만 수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 배타적 국민 개념의 등장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조건에 본래의 국민 개념이 적용된 결과라는 점이다.


내가 그린필드와 견해를 같이 하는 것은 본래의 국민 개념이 자신의 본질로서 민주주의의 원리를 포함한다는 점이며, 견해를 달리 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 논점이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 견해를 따른다면, 본래적인 국민(곧 민주주의를 내재적 성향으로 지닌 국민)과 비본래적인 국민이 존재하며, 내셔널리즘이 지닌 배타성은 이 후자의 국민에 고유한 것이라는 견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브루베이커가 지적했듯이 이른바 본래적 국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의 국가들에게 고유한 배제적 성향이라는 문제를 제대로 고려하기 어렵게 만든다.[27. 이것은 그린필드의 논의가 다소 형식적인 역사적 유형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국민이 지닌 민주주의적 성격과 그것의 배타적 성격을 상이한 국민들(및 문명)에게 각각 지정될 수 있는 상호 분리된 성격으로 보거나 상호 외재적인 성격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근대 국민의 모순적인 본질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왜 이른바 시빅 내셔널리즘의 본향이라고 할 만한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이 배타주의적인 성향을 띠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왜 근대 국민 형태가 위기에 처하게 됐는지, 또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가능한 방향은 어떤 것인지 적절히 파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점을 가장 명쾌하고 깊이 있게 보여준 사람은 에티엔 발리바르다. 그는 지난 20여년의 작업을 통해 국민국가의 역사를 관통하는 모순적인 경향을 분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가능한 경로들을 모색해왔다. 발리바르의 논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르(Dominique Schnapper)와의 논쟁을 검토해보는 것이 좋다.


도미니크 쉬나페르는 프랑스의 신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사회학자로서 국민국가의 위기 시대를 맞아 공화주의적 전통 위에서 국민 개념을 옹호하려고 시도한다.[28. 특히 Dominique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Gallimard, 2003(19941); Qu'est-ce que l'intégration?, Gallimard, 2007 참조.] 그녀에 따르면 “시민들의 공동체”로 이해된 국민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삶에 대한 개인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의미에서의 시민권의 본질적인 토대이며 또한 세계화 시대에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녀의 핵심 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근대적 의미의 국민은 특수한 신분이나 위계, 민족적(ethnique)ㆍ문화적 차이에 기초하지 않고 “개인들의 존엄성을 ... 그들이 지닌 보편적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연계한다”[29. D.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p. 106.]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정치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이다. 둘째, 따라서 국민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덜 배타적이며 덜 폐쇄적이다. 국민이라는 정치공동체가 모종의 배타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서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배타성은 배척이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별”(discrimination)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곧 모든 정체성이 불가피하게 타자들과의 차이를 통해 정의되듯이 국민 역시 자신의 타자로서 외국인을 통해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국민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민족적이거나 문화적ㆍ언어적 실체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나 ‘헌정 애국주의’에 근거를 둔 하버마스식의 포스트 국민 정치체보다 국민이야말로 여전히 현실적이면서도 민주주의적인 정치공동체의 기초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0. 네이션에 대한 쉬나페르의 관점은 프랑스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었지만, 동시에 프랑스 안팎에서 상당한 비판을 초래했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다문화적이고 다민족화된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관점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프랑스 바깥에서는 프랑스에 고유한 네이션 개념, 곧 정치적 네이션 개념을 과도하게 보편화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발리바르는 국민국가가 보편주의적인 정치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국민국가가 배타성이나 배제성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배제적이라는 점, 따라서 정치 공동체의 보편적 형태가 지닌 모순을 첨예한 형태로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점에서 국민국가는 보편적이면서 배제적인가? 발리바르는 외연적(동화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를 해명한다.


외연적 보편주의(universalisme extensif)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것은 국민국가와 식민화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이다. 곧 유럽 국민국가들의 형성과 패권 경쟁은 식민지 경쟁으로 이어졌는데, 식민화에 나선 각각의 국민국가들은 이를 보편성의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식민화는 단순한 약탈이나 침략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선교의 사명 내지 인류 전체의 문명화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수행되었으며, 더욱이 내면화된 신념에 따라 수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식민화를 통해 비유럽의 피식민지 인구들은 지배자들의 국적에는 포함되었지만, 식민지 본국의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는 못한다. 따라서 같은 국적을 지닌 시민들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비(非)시민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하나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또 다른 보편주의, 곧 내포적 보편주의(universalisme intensif)를 통해 좀더 첨예한 형태를 띠게 된다. 내포적 보편주의는 “인권선언”에서 구현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그것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인간=시민 명제, 곧 인간은 무매개적으로 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31. E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평등자유명제], 진태원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내포적 보편주의가 함축하는 모순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면, 또는 적어도 그럴 권리를 지니고 있다면,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이 누리는 평등과 자유는 그가 어떤 정치체(대부분 국민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는다. “시민권의 배제 ... 는 인간성 또는 인간 규범 바깥으로의 배제와 달리 해석되고 정당화될 수 없다.”[32.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131쪽. 강조는 발리바르.]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만, 역으로 이러한 권리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곧 특정한 정치체, 특정한 국민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제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니고, 따라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들을 누리지 못하는 한에서는 실제로는(잠재적으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무수히 생겨난 국적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모순을 실제로 체험하고 구현했음을 보여준 바 있다.[33.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이러한 모순은, 보편적인 시민권의 체계로서 근대 국민국가는 항상 그것과 맞짝을 이루는 배제의 체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그리고 20세기 이후 국민국가가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로 전환됨으로써 이러한 모순은 한층 더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미 국민국가 체계에서 시민권이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커다란 특권(권리들에 더하여 누릴 수 있는 자격이자 심지어 신분)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라는 자신의 본래 의미와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국민사회국가에서는 사회권이 기본권으로 포함됨으로써 시민권을 누리는 본래적 의미의 시민들과 그것에서 배제된 비시민들(소수자들 및 이주 노동자들) 사이의 차별은 훨씬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정부는 이러한 차별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더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의 수요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미등록(불법)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수입 제한과 고용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불법) 수입과 고용은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들을 합법화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비용과 법적ㆍ행정적 문제점 때문에 각 국가들은 이들을 계속 불법적인 상태에 놓아두려고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들의 노동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불법 행위를 조장하고 그것을 구실로 하여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고 사회적 치안을 강화하려는 국가의 기만적인 이중적 행태가 전개된다.

정리하자면, 근대적 의미의 국민은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내포적 보편성과 외연적 보편성을 갖는 정치적 공동체다. 하지만 국민의 이러한 보편성은 배타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보편성 때문에 또한 그것에 고유한 배타성 내지 배제를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국민이 함축하는 배타성은 특수한 종류의 국민(가령 동유럽이나 비유럽 지역의)에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국민 자체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국민적 인간: 일상적 국민주의와 국민적 정체성

근대 국민 개념에 고유한 이러한 모순은 내셔널리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한다. 내셔널리즘은 매우 병리적이거나 퇴행적인, 또는 적어도 후진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곤 한다(국내에서도 몇 년 전에 벌어진 이른바 ‘디워 논쟁’ 당시 진중권 등의 논객에게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견해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영국의 사회심리학자 마이클 빌리그는 [일상적 국민주의]라는 저서에서 그 당시까지 내셔널리즘에 관한 논의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국민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러한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34. Michael Billig, Banal Nationalism, Sage, 1995.]

그의 출발점은 내셔널리즘을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나 극우파 정치”[35. M. Billig, Ibid., p. 5.]와 결부시키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내셔널리즘을 ‘우리’가 아닌 ‘그들’의 문제로, 곧 아직 국민국가의 형성을 달성하지 못한(또는 서구와 같은 수준의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한) 제3세계 내지 주변부 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퇴행적이고 후진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 이미 이러한 과정을 완수하여 잘 제도화된 국민국가를 구성한 서구인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뜻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과 같은 나라들은 “계속 실존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이 나라들은 국민들로서, 그리고 그 나라의 시민들은 국민 성원들로서 재생산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재생산의 필요성이 “너무 익숙하고, 너무 연속적”[36. M. Billig, Ibid., p. 6.]이어서 이러한 재생산을 위해 국민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가 “일상적 국민주의”라고 부른 것은 이처럼 “서구의 확립된 국민들이 재생산될 수 있게 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관습”[37. M. Billig, Ibid., p. 7.]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상적 국민주의라는 개념은 국민주의를 무언가 비정상적이고, 어떤 격변이나 사건이 도래했을 때 일어나는 열광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통념을 넘어서, 국민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재생산되기 위해 꼭 필요한 상징적ㆍ관습적 관행들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주의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일상적 국민주의는 사실은 국민적 인간의 형성과 재생산이라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국민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발리바르에게서 빌려온 것인데, 이것은 국민국가의 핵심 목표가 “다른 모든 정체성을 압도하는 ‘국민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고, 국민적 소속이 다른 모든 소속과 일치하고 그것들을 통합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일”[38.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55쪽.]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근대 국민국가 내에서 각 개인들은 (자유주의에서 상정하는 것처럼) 국민에 대한 소속 이전에 또는 그러한 소속과 무관하게 자신의 독자적인 개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얻게 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각 집단들 및 개인들은 자신들을 이러저러한 집단의 구성원이자 이러저러한 개인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곧 그들은 국민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고 국민으로서의 자본가이고 국민으로서의 선생이고 학생이고 가정주부이고 범죄자 등등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모든 국민 국가(프랑스나 미국 같은 ‘이민자 국가’를 포함하는)는 정의상 국민주의적이며, 또한 그 국민 국가의 성원들은 자신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국민주의적이다.


이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한다.[39.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Verso, 2006(3rd Edition), pp. 5-6;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 윤형숙 옮김, 나남, 2002, 21쪽 참조.] 여기서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은 가상이나 환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민이 자연적인 공동체(곧 혈통에서 유래하거나 에스니시티를 기반으로 하는)가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진 “특수한 종류의 문화적 인공물(cultural artefacts)”[40. B. Anderson, Ibid., p. 6; 베네딕트 앤더슨, 같은 책, 21-22쪽.]임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인공물로서의 국민은 인쇄 매체들 덕분에 가능해진 근대에 고유한 시간, 곧 ‘공허하고 동질적인 시간’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41. B. Anderson, Ibid., p. 35; 베네딕트 앤더슨, 같은 책, 56-57쪽 참조.]


하지만 일상적 국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앤더슨의 정의가 지닌 약점은 그것이 국민적 정체성 형성 및 재생산의 문제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42. 나중의 저술에서 이 점이 다소 보완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불충분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B. Anderson, “Nationalism, Identity, and the Logic of Seriality”, in The Spectre of Comparisons, Verso, 1998 참조.] 반면에 발리바르는 앤더슨과 거의 같은 의미에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이 개념을 국민적 인간의 형성과 재생산 문제와 결부시킨다.

"결정적인 논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국민은 어떤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인가? 또는 오히려, 국민이 설립하는 공동체 형태는 어떤 점에서 다른 역사적 공동체들과 종별적으로 구별되는가? 전통적으로 이 통념과 결부돼 왔던 반정립들과는 곧바로 거리를 두겠다. 우선 ‘현실적’ 공동체와 ‘상상적’ 공동체라는 반정립으로부터 거리를 두겠다. 제도들의 기능 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다시 말해 이 공동체들은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이야기의 짜임 속에 투사하는 것에,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에, 기억도 할 수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이러한 전통들이 근래의 상황 속에서 제작되고 주입된 경우에도)에 의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정한 조건들 속에서는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 공동체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43. É. Balibar & I.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88, p. 126; 에티엔 발리바르, 「민족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6호, 1992, 117-118쪽―번역은 수정.]

이러한 의미에서의 ‘상상’은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공상이나 환상 또는 착각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을 인공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적 공동체로서 국민 공동체의 생산 및 재생산의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발리바르는 그것을 상상적인 것으로서 인민의 생산과 재생산에서 찾는다. 이것은 인민이 자신들을 국민으로서 (재)인지하고, 인민을 구성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바로 이러한 국민에 대한 소속을 매개로 하여 자신들의 개인적 정체성을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리고 국민 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동질성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동질성의 기원 및 주체에 대한 보충적인 상상계를 수반한다. 이는 우리나라 같이 이른바 ‘단일 민족’의 경우에는 더욱 더 사실이다. 여기서 허구적 민족체(ethnicité fictive)(또는 의제적(擬制的) 민족체)라는 또 다른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은 국민이 오래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고 연속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온 역사적 실체 또는 심지어 (유일한) 역사적 주체라는 국민주의에 고유한 상상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상상적’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허구적’이라는 개념이 가상적이라거나 가짜 또는 단순히 공상적이라는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적 효과라는 의미, 곧 제작”[44. É. Balibar & I. Wallerstein, Ibid., p. 130; 같은 글, 121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 때문에,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의제적 민족체’라는 번역어가 일리가 있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허구적 민족체는 실존하는 어떤 국민이 오래된 민족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가령 골족의 후손, 단군의 자손 등), 그 국민은 동일한 기원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세대를 거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해온 유구한 역사적 실체(또는 오히려 주체)로서의 민족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이러한 허구적 민족성은 국민 국가 내의 집단들(사회 계급이나 이러저러한 에스니들) 및 개인들이 자신들은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의 차이를 초월한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같은 국민이라고 여기게 해주는 상상적 토대의 구실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상이나 인식이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가상적인 의식에 머물지 않으며, 교육 제도나 가족 제도 같은 사회적 제도를 통해 체계적으로 훈육되고 각종 의례나 절차, 관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재생산된다. 따라서 국민주의는 그것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이러한 허구적 민족성을 더 강하게 반영하기 마련이며, 상상적인 역사적 실체로서의 ‘민족’을 자신의 기초로 삼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이 제기될지도 모른다. 왜 여기에서 민족주의 대신 국민주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로 이해할 경우 내셔널리즘을 국민국가의 유기적 이데올로기, 또는 국민국가의 고유한 상상계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말의 민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 민족주의라는 말은 서구인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비서구사회, 특히 덜 민주주의적이고 덜 발전되고 덜 개화된 국가에 고유한 퇴행적 이데올로기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서구의 이른바 선진국들에 고유한 내셔널리즘, 곧 빌리그가 일상적 국민주의라고 부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자연적인 관행으로 간주될 것이다. 반면 국민주의라는 번역어는 내셔널리즘을 유기적인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 내지 상상계로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둘째,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라면, 이것은 상상계 없는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상상계 또는 이데올로기를 그 자체로 비난하거나 그것을 초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문제는 상상계 내지 이데올로기를 좀더 복합적인 체계로 인식하고 그것들 내의 차이를 식별하는 일이다. 이는 내셔널리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흔히 내셔널리즘을 단일한 이데올로기나 상상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내셔널리즘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이데올로기다. 가령 프랑스의 예를 든다면, 쉬나페르 등이 대표하는 신공화주의적 국민주의와 극우파 국민전선의 민족주의(“프랑스인의 프랑스”)는 모두 내셔널리즘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양자가 똑같은 의미나 가치를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가 국민 개념에 내재한 모순에 둔감하긴 해도 민주주의적 시민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반면, 후자는 배타적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V. 결론을 대신하여

요컨대 우리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용도폐기할 때가 되었고 대신 ‘국민’이라는 개념이 그것을 대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45. 필자는 7월 7일 역사비평 토론회에서 상당수의 참석자들이 필자의 주장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는 다수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일제 시대 및 독재 시대 이래로 민족=‘저항적, 비판적인 것’, 국민=‘순응적, 관제적인 것’이라는 구별법을 일종의 (절대적인?) 규범적 가치로 간주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표로 보인다. 이러한 규범성은 이른바 뉴라이트 쪽에서 8ㆍ15를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개칭하자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발로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필자의 주장은 민족과 국민은 동일한 지시체에 대한 서로 경쟁하는 개념들이 아니라 각각 상이한 지시체를 가진 개념들이라는 것이며,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현재의 논의에서 나타나는 혼란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적 네이션보다는 시민적 네이션이, 민족주의보다는 국민주의가 그 자체로 더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근대 국민에는 민족적 요소와 시민적 요소가 공히 존재하며, 또 국민주의는 그것이 국민주의인 한 모종의 배타성을 띠기 마련이다. 보편적인 정치체로서 근대 국민에 함축된 이러한 배타성이야말로 근대 국가의 전개 과정을 규정한 핵심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결론을 대신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 국민이 여전히 지배적인 정치 공동체로 존재하는 한에서 국민국가의 모순을 영위하기 위한 실용적 해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국민이라는 모순적인 복합체는 그것을 괴물이나 노예적인 것으로 저주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분간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종류의 국민 공동체보다는 다른 종류의 국민 공동체, 한 종류의 국민주의보다는 다른 종류의 국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판단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근대 국민의 이상, 곧 민주주의적 시민성의 이상에 더 근접한 것인가 여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특정한 국민을 모델로 하여 그것을 뒤쫒는 것(가령 독일 대신 프랑스, 에스닉 네이션 대신 시빅 네이션)과는 다른 종류의 과제다.

둘째, 하지만 근대 국민이 역사적 위기에 봉착한 만큼 이러한 실용적 해법은 충분할 수 없고,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해법은 민족이나 국민과 다른 또 다른 상상적 공동체(이 경우에도 여전히 공동체라는 말을 쓸 수 있다면)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요구할 것이며, 앞서 말한 실용적 해법은 이러한 새로운 상상적 공동체에 대한 모색에 기반을 두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새로운 상상적 공동체의 사례를 하나 언급해두고 싶다. 우리가 본문에서 여러 차례 논의한 바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 헤르만 판 휜스테렌(Herman van Gunsteren)을 따라[46. Herman van Gunsteren, A Theory of Citizenship, Westview Press, 1998; [시민권 이론], 장진범 옮김, 그린비, 근간 참조.]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는 이름의 새로운 상상적 공동체를 제시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운명 공동체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47.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248쪽.]를 가리킨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48. 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책, 258-59쪽.] 한다.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에서는 가령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 모든 사람은, 그가 한민족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또 그가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이 물려받은 정체성의 특권(가령 한국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은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출신의 이주노동자에 비하면 엄청난 특권이 아닐 수 없다)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할 수 없으며, 같은 운명을 공유하는 이들, 곧 같은 지리적 공간, 같은 정치체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동등한 시민의 자격으로 새로운 시민적 정체성을 재발명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운명공동체는 이 용어의 통상적인 용법[49. 가령 2006년 4월 27일자 북한 [로동신문] 사설은 남한의 다문화주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민족을 운명공동체로 정의한 바 있다. “민족은 력사적으로 형성된 민족성원들의 사회생활단위이고 운명공동체이며 ... 단일성은 세상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민족의 영원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위한 투쟁에서 필수적인 단합의 정신적 원천[이다].” 박명규, 「네이션과 민족」, 앞의 글, 54쪽에서 재인용.]과는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형성될 남ㆍ북한 공동체를 우리가 말한 의미에서 운명공동체로 지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에스니라는 의미에서) ‘민족’이라는 배타적 틀로 묶이지 않는, 또 묶이지 않아야 할 운명공동체일 것이다.


너무 공상적인 공동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그 어떤 현실적인 정치체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 국민의 이상 속에는 이미 이러한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약속이 기입되어 있다.[50.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에 수록된 여러 글 참조.] 따라서 그러한 약속이 도래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날 국민국가의 위기에 직면한 민주주의자들이 상상해봐야 할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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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바보 2011-08-2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날에 하신 얘기들 중에 누군가 脫構築이 더 적절하지 않냐고 선생님께 질문했던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한마디 하시는 군요. 뭐 일본에서는 이미 쓰고 있었던 번역어지요. 저도 이게 더 나은 듯 합니다.

예상대로 선생님이 언젠가는 "국민주의"라고 부르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그렇게 부르시는 군요.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회를 엿보시는 건지 아니면 논거를 준비하시는 건지?

그런데 "서양인들이 보기에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이해될 수 있다"는 얘기는 뭐하러 하셨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하느냐 안 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지식은 바보 2011-08-29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버트 영의 책 이야기도 언급하셨으니 조금 얘기해 보자면 술탄-갈리에프나 마리아떼기 또는 셍고르 또는 범아프리카주의가 nation(나시옹)을 언급할 때 그 nation은 흔히 말하는 nation-state를 당연한 전제로 하면서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nationalism에 근거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죠. 설사 그런 요소가 있더라도 최소한 그것만으로 한정되지 않아요. 발마스 님이 말씀하시는 "國民"으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부적절합니다.

19세기 유럽의 식민주의 또는 메트로폴리스 정부의 對식민지 정책인 제국주의가 "민족적 억압"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물론 지금은 민족적 억압의 형태는 아니고 훨씬 복잡하다) 한국의 위대한 지식인들이 이른바 "제3세계"라 부르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는 nation이나 nationalism을 "國民"이나 "國民主義"로만 이해했던 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발마스 님이 마련해야 할 듯 합니다. 물론 짜증나는 나라 또는 국가 한국은 제외하고 그렇다는 거죠.


지식인은 바보 2011-08-29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급하신 최갑수 씨는 인도의 라나지트 구하에 대해 학을 떼시는 또는 알레르기를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라나지트 구하에 대해 아주 적대적인 분이죠.

최갑수 씨가 보기에는 프랑스에 "국민"이 우세하다고 발마스 선생님이 좋아하실 이야기를 하셨군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에 프랑스 부르주아들이 쓰던 nation은 제가 보기에는 "민족"입니다. 19세기에 들어서 근대국가가 뚜렷해지면서 그런 식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생긴 거 뿐이죠. 1830년 알제리 침공으로 본격화된 프랑스 제국주의가 생산한 "문명화 담론"(빅토르 위고가 아주 좋아한) 같은 것을 보면 저는 최갑수 씨나 발마스 님에게 순순히 동의할 수가 없네요.

서발턴은 더 바보 2011-08-2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 시민사회와 민족-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는 서로 결합했습니다. 따라서 시민운동이든 시민단체든 시민이 들어가는 것들은 결코 국가나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죠. 그것은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식민주의도 넘어설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모두 모던 안에 있는 겁니다.

발마스 선생님의 논의는 결국에는 유럽중심주의의 시선 안에 있다고 봅니다.

balmas 2011-08-30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지식인은 바보님 댓글에 대해 딱히 드릴 말씀은 없지만, 한 가지는 좀 확인해봐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서양인들이 보기에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문에서 쓴 적이 있나요? 저는 이런 말은 전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

국민주의 2015-04-2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현재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을 연구하고 있어서, 글쓴이의 주제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nation을 민족으로 번역하게 된 것은, 일본이 nation을 민족이라고 번역한 것을 그대로 받아드렸기 때문입니다. 근데, 현재 일본은 더 이상 nation을 `민족` 그리고 nationalism을 `민족주의`로 번역하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은 그대로 쓰지만, nation은 대개 `국민`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내셔널리즘도 `국민주의`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죠. 전후, nationalism의 번역어 `민족주의`는 오역이었다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비판으로 시작해서 nation에 대한 용어 논쟁이 있었죠. 이런 번역어 논란은 거의 60년 전에 이루어져서, 빠르게 용어에 대한 논쟁이 정리되었고, 지금은 `국민`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고 , `민족주의`라는 번역어는 내셔널리즘과 별개의 단어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와 중국(타이완을 포함해서)에서는 아직 nation과 nationalism을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아직도 쓰고 있는데, 이건 아마도 국가차원에서 민족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 용어를 고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 부분은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요. 다만, 요근래 민족이라는 용어는 다시 논의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비록 이 글은 4년 전 글이지만, 앞으로도 이와 같이 nation에 대한 적절한 용어 논의가 있었으면 합니다.

balmas 2015-04-28 00:2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논의에 관한 좋은 정보를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일본에서 내셔널리즘, 국민주의 등에 관한 논쟁사를 역사비평에 한번 기고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제 글에 관해 몇 분 선생님께서 이미 [역사비평] 지면에 글을 기고하신 적이 있는데, 일본의 논쟁사를 소개한다면, 이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 글과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쓰셔도 좋습니다.^^ 저도 작년에 다른 선생님들의 논평에 대한 답변을 겸해서 이 문제에 관해 한번 더 글을 써볼 생각이었는데, 한겨레 연재로 인해 시간이 너무 쫒기다보니 미처 글을 싣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다뤄보고 싶은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국민주의 2015-05-03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코멘트에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역사학 관련자가 아니고 정치학 전공자(게다가 아직 학위 과정 중입니다.)라 말씀하신 잡지에 글을 기재하기엔 제 역사적 내공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저 또한 이에 관련된 글을 써보고 싶긴 합니다. 사실 제가 직접 쓰는 것보다, 일본에서의 논쟁사를 번역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지만요.ㅎ

일본 학계(내셔널리즘을 주로 연구하는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등에서)도, 본문에서 언급하신 국내 인류학자들의 번역처럼, 민족을 ethnicity의 번역어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단순 nationalism이 아니라 `Ethnic nationalism`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nationalism에 관련된 연구를 주고 받을 때, 근본 용어부터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한국 관련 서적 중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보면 일일이 보통 nationalism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Ethnic nationalism`을 말하는 건지 항상 확인합니다. 영어 병기가 있으면 문제가 없으나, 없을 땐 참 난감하더군요/ 참고로, 국민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 영어 병기도 대부분 함께 쓰는데, 민족주의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 영어 병기를 잘 표시하지 않더군요. 모든 용어에 영어 병기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번역 용어에 논란이 있는 건 원어도 함께 적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에... 물론 당사자들은 논란이 되는 용어가 아니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한 번 더 다루어주신다면 후학 세대들에게 굉장히 유의미한 일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 또한 기회가 된다면, 그 논의에 동참하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된 글이긴 하지만, 에티엔 발리바르의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작년 5월에 발표된 짧은 글을 보충하는 글인데,  

유럽의 위기에 대한 발리바르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글입니다.  

아마 이전에 나온 유럽에 관한 책[Europe Constitution Frontière, Editions du Passant, 2005 ]의 증보판에 수록될 예정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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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ranseuropeennes.eu/en/articles/227/Reflections_on_the_Current_European_Crisis

 

Transeuropéennes: Translating in the Mediterranean Area

 

Reflections on the Current European Crisis

 

Etienne BALIBAR

 

28 July 2010

 

On the 21st May I circulated a series of theses on the situation created in Europe by the start, more than six months ago, of what it is agreed can be called the “Greek financial crisis”.1 The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The crisis began well before the announcement by the Greek Treasury of difficulties (at a minimum with the bursting of the American real estate bubble and the banking failures that it brought about). Fuelled by the existence of enormous insolvencies, it was not be ended by the budgetary and austerity measures, imposed in Greece first and then in other countries, either. It was thus bound to develop, affecting the relations between States, nations and European peoples very profoundly.

 

2. The demonstrations by the Greek population protesting against cuts in salaries and the elimination of social services, affecting civil servants, workers pensioners, are essentially justified, because these measures do not target those principally responsible for the crisis (whether financial speculators or those who profited from corruption) and constitute a denial of democracy by the way in which they were decided on.

 

3. In a general way the policy of “saving the Euro” currently being implemented by governments and the European commission – not without some major internal tensions, arbitrated by the most powerful nation – rests on a mystification and a dissimulation. It makes a policy oriented by the interests of certain classes and certain nations pass for the “technical” expression of the general interest. It dissimulates the social costs and stakes of the recession that it will bring about, but also the problems that it would be necessary to confront once one wanted effectively to put to work a politics of European solidarity.

 

4. In the current phase of globalization, whose conflictual character is dramatically revealed by the crisis, the fate of European nations is determined by the place that they occupy in a long term, double economic process: the generalization of competition between territories (which evidently doesn’t stop at the borders of the EU) and the displacement to the old “periphery” of centres of production and of accumulation of capital, which tends to diminish the importance of [secondarise] Europe, despite the massive population and resources that it represents. The question is posed of knowing if we will submit to this passively, or if we will be able to oppose it with original, collective political strategies.

 

5. But Europe as a political project is caught today in an almost insoluble contradiction: between the demand for strengthened institutional solidarity – that is to say, a federalism, the modalities of which are [yet] to be invented, but which alone would give consistency to the “economic government” called for from diverse parts, and the absence of any real democratic participation in its current institutions and in its political life, prey [as it is] to bureaucratization, “spectacularisation” and demoralization. There is no chance of federalism seeing the light of day without democracy2. That is why I have taken the risk of talking about the necessity of a “European populism” – a provocative expression since what is developing in Europe today as nationalist populisms. The question which poses itself is that of knowing in which direction popular reactions to the aggravation of the crisis will orient themselves: will they contribute to sketching some ways out of the crisis or, on the contrary, bury us in it irremediably?

 

6. To finish – adding to this pessimism – I have noted the political disappearance in Europe of what is called “the left”. Attempting nevertheless to sketch out an alternative to the decline of viewpoints that the constitution of Europe at least nominally opened up, I have called on the intellectuals of our countries hailing from or identifying with the left, beyond their divisions into “revolutionary” and “reformist”, to move from the simple critique of neo-liberalism to the search for an anti-crisis strategy via an international debate.

 

To open the discussion I would like this evening to re-affirm these positions, which – it seems to me – are not invalidated by the developments of the last few weeks. But I would like also to try to explain the difficulties they raise, by returning to three points: democracy and populism, economics and politics, the centre and periphery of the European continent.

 

Democracy and Populism

 

I am conscious of the formidable equivocations that using the term “populism” entails. But these equivocations belong to the very nature of the political “thing”, which cannot avoid the risk [of equivocating] once it leaves the realm of abstraction so as to take into consideration the real forces at the heart of a determinate conjuncture. And on the other hand they designate the very point on which a democratic politics must make its efforts at mobilization, organization and clarification bear. It is not only a matter of constructing (or reconstructing) the popular force that is lacking today, but - in the middle of a terribly hazardous historical passage – of giving ourselves (and giving it) the moral, institutional, theoretical means of resisting the drifting that it can entail, by trying to learn the lessons of an often tragic past. Other participants in the debate – the outline of which is starting to appear – have insisted on the necessity of a “citizens” initiative in counterpoint and counterweight to government actions: they have referred to a sense of citizenship [civisme] rather than to populism3. Elsewhere, I have myself pleaded the case for an extension of the category and demands of the citizenry on the transnational – and, notably, European – scale. I’m not renouncing that at all but I do believe that, even if one extends it beyond its traditional signification, this notion is not enough to prefigure the force that we have need of here.

 

The dominant discourse – as Ernesto Laclau in particular has insisted – stigmatizes the notion of “populism” because of its visceral fear of the masses and of their intervention in the political field, supposing it to disorder the play of constitutional rules and of putting democracy itself in peril.4 And even more profoundly, it is because of the menace that this notion, in the eyes of the privileged, casts over things, making the adoption and putting to work of anti-popular politics more difficult. What is called “populism” in dominant discourse, based on examples of demagogy and dictatorship (they aren’t lacking), is thus in reality this supplement of democracy (in relation to its elitist and restrictive definitions) or even this excess, made up of participation, protests, demands, of spontaneous or organized mass movements, without which democracy is only a hollow word or even a mystification. It is the crystallization, in an active and passionate visible figure, of the demos or the plethos (“multitude”, “majority”) of which democracy wishes itself the expression. Not in order to destroy representative or parliamentary institutions, the division of powers, the safeguarding of individual rights, but so as to re-establish the equilibrium of social forces and the conditions for an egalitarian distribution of power, by compensating for the power exercised at the heart of state and society by wealth and economic power, worldly and professional relations, expertise and university solidarities, the quasi-hereditary monopoly of public functions (what Bourdieu call the “State nobility”), international networks and support5. These last weeks we have seen what effects the crying absence of such participation and such a counter-weight produces: no-one has been able truly to contest the policies proposed, accepted or imposed by governments and international and communitarian organisms. The effect of such policies is to transfer the burden of debt generated by the anarchy of the markets or the imprudent (if it isn’t corrupt) management of public finances onto populations. This “democratic deficit” – to employ the current euphemism – manifested itself first in Greece, in the phase of bargaining between the Papandreou government and the institutions it called to its rescue. It manifested itself once again when a certain number of European governments, including France, Spain, Germany, the UK, decided to implement policies of social and budgetary austerity, which evidently have nothing to do with the commitments for which they had been elected (in particular with regard to the struggle against poverty and unemployment). No-one will deny that the conjunctures of unforeseen crises impose changes in political orientation. But one cannot consider as “democratic” the fact of putting the population – that is to say, the interested parties – practically out of the loop when it is a matter of determining the extent and the objectives of these changes. What holds at the national scale holds, a fortiori, at the supranational, “communitarian” scale, where one clearly sees that the truly constraining decisions are taken. For want of a European-wide debate amongst the population, of movements of opinion organized across borders, in short, of European democracy, the only things that play are the illusory oppositions and relations of force between governments, who are more or less dependent on transnational capitalist powers, and the prisoners of electorates, whose prejudices they try to use, instead of fostering their participation.

 

One touches here on a congenital flaw in the European Union, which is doubtless not the only cause of the degeneration of democratic life at the heart of each nation, but which it does nothing to correct. Governments utilize the institutions of the community when it is in their interests, particularly when making political choices appear as “technical” imperatives, but they short-circuit them when something like a transnational public sphere the procedures of which they alone would not be in control of, threatens to emerge. Also it has never been a question of having the plans for financial support or the orientation monetary and budgetary policies to come examined or discussed in the parliament in Strasbourg, which thus falls below the level of a consultative body! But this “hatred” or “fear” of democracy is extraordinarily self-destructive. In the long term it will cost dearly, in terms of the delegitimation of politics and of governmental and representative institutions themselves, whether that be at a national or European lev el, the fates of which here are indissociable. That is why in a certain fashion it belongs to the peoples of the European nations, the components of a virtual “European people” to give life back to the democracy without which there is no legitimate government or durable institutions, and firstly by expressing vigourously their rejection of politics founded on the continuation of privileges and even on their reinforcing by means of the crisis.6 That is what I wanted to say in speaking of the necessity of a “European populism”. It is not the contrary of the sense of citizenship, it is its other face in a determinate conjuncture.

 

For all that, I make no secret of the fact that the “populism” with which we are dealing today – the populism that develops most quickly in Europe – is not at all this peaceful insurrection of the citizens of different countries that we need in order to revitalize democracy and impose its demands on those who fear it and use any means to put obstacles in its way. On the one hand it is an aggressively xenophobic, nationalistic or regionalistic populism (which could become murderous if the social situation deteriorates further), which is directed against the “allogens” (immigrants, coming from Asia, the South of the Mediterranean in particular, gypsies, possibly even Jews). But it is also directed against other Europeans (North against South, West against East, neighbour against neighbour, including in the heart of the same nations – as in Italy), the manifestations of which one sees from one end of the continent to the other. On the other hand, it is what Giacomo Marramao, thinking of the situation in his country under the Berlusconi government, calls a “media populism”, the mass media manipulation techniques of which are like a soft fascism, that is reconstituted in different historical and cultural conditions.7 It is totally illusory to think that one can oppose simple moral preaching, a hymn to the virtues of the State and to liberalism, to these more or less interconnected, reactionary populisms, which translate the demoralization of the working and middle classes, the cynicism of the ruling castes, and the absence of any post-national perspectives able to stand up to globalization and the regression of social movements. That would cover over the perpetuation of inequalities and the crushing domination of the interests of private property and finance. A popular remobilization, the motor of which, initially, can only be a protest, is needed. But it is true that such formulae involve a risk: this is why it is essential to associate them with an intransigeant democratic engagement straightaway, and at the same time to open up viewpoints of positive construction, in the economic domain in particular. That is also why the programmes to which the components of such a movement would rally – contrary to what certain theorists think with regard to “populism” (Ernesto Laclau) – cannot be “empty”. On the contrary, it is necessary for them to be substantial, bringing out a veritable convergence of interests and ideas across frontiers and social groups. This leads us directly to a second order of difficulties.

 

Economy and politics

 

If there is one truth that the dominant discourse had endeavoured to dissimulate behind all sorts of more or less new notions (“network society”, “governance”, “management”, “market rationality”, to say nothing of “the end of history”, somewhat discredited today) and which the current crisis brings out into the cold light of day, it is the fact that the whole of the economy is political, but also that all of politics is economics (even if it isn’t only that – which is what my master Althusser called “overdetermination”). This is true not simply for the conditions and consequences but for the processes themselves, and thus for the contradiction that they contain, the relations of force and the alternatives that they impose on us. One may even think that 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the globalization whose laws we are now experiencing, is that this double, economic and political determination immediately extends to all aspects of existence: citizenship, work, culture, social security, everyday life … One mustn’t stick to generalities here, but try to render the stakes perceptible in actuality.

 

I do not want to repeat what is most well-known, in particular concerning the political choices that were made after the crisis started in America, and which we see today that by transferring the cost of private financial speculations onto the public finances and national economies, they have done nothing but multiply the risks. But – to say in a few words what needs lengthy analyses – I would like to bring out three structural lessons relative to the “capitalist” articulation of State and market, and to bring up two specific problems: that of continuity and rupture, that of forces present in the dilemma that presents itself to European nations, and without doubt also to others.

 

First lesson: the “crisis of public finances” is not an accountable phenomenon to which one can attribute an absolute magnitude. In fact, it is relative to the temporary “decisions” of the financial markets, to their rating of the abilities of States to service the interest on their debts, and to the agreed interest rates for the new loans that the debtor nations need to meet their financial commitments. The degree of indebtedness of States, their degree of autonomy or of economic “sovereignty”, fluctuate, then, as a function of the way in which they are permanently “evaluated” by the markets like businesses quoted on the Stock Exchange8. But whoever says markets says a system of exchange and of valorization for which the principal actors (dominant, if not all-powerful) are the big banks and the principal speculative funds. These have become, in a strong sense, political actors, in the sense that they dictate to a whole set of States, and even to central banks, the conditions of their social, economic and monetary policies. This situation has some crucial consequences on the capacity of traditional political bodies (peoples or nations of citizens) to determine their own development. Today perhaps only China - because of the virtually hegemonic position that it is in the process of acquiring in the “world-economy” – escapes from this reversal of relations between the political capacity of States and that of deterritorialised financial actors. But it certainly is not the case for the United States, and that explains many things about the “strategy” of the Obama administration after the shock of 2008.

 

This leads us directly to a second lesson, which has been forcefully underlined, notably by Michel Aglietta9: there is no middle term between the two logics which oppose each other over the “regulation” of operations on the financial markets. It must be noted that these are “markets” in a sense that is very particular and at the limit is in contradiction with the usual signification of the term, which nevertheless continues to guide their presentation by the “orthodox” discourse: competition does not lead to an equilibrium of supply and demand, but to a headlong rush into the capitalization of assets, the value of which grows indefinitely with the extension of credit…until the latter collapses. Either it is the public power that imposes rules of prudence and transparency on speculative operations. Or it is the unlimited demand for liquid capital, able to be transferred to the most profitable short term speculations, which forces a more and more complete deregulation. But it cannot be both at the same time. Here once again one is dealing with a political alternative in the field of the economy (via finance), which is linked to a conflict of sovereignties. But it must be noted – and this observation acquires a crucial signification at the current stage of globalization – that by “public power”, one no longer necessarily understands nation States (or national financial authorities): that depends on their size and their place in the world economy. Of course there are States that “prefer” to make themselves into the instruments of the deregulation of the markets, in order to acquire or to preserve their status as international financial centres, not seeing in that any “giving up [abandon] of sovereignty” (but not accepting for all that its limitation in an enlarged political frame). There is above all this difficulty, which Europe visibly comes up against: that States (even the “rich” ones) are no longer in a position, in isolation, to constitute authorities for the effective regulation of the financial markets, without one knowing, for all that, how to institute politically an authority and public powers at the supra- or trans-state level.

 

A third lesson, which for can be taken from the works of Pierre-Noël Giraud10, is that in the long term there is a fundamental correlation between the way in which social inequalities are distributed between national “territories” or on the inside of these territories (inequalities of income – direct or indirect salaries – and thus – taking into account historical and cultural conditions – inequalities in the level and quality of life), and the policies put to work to increase their competitiveness from the point of view of attracting international capital (by pressure on salary levels – by means of immigration or State-union agreements, or both – and by the lowering of tax levies, which in the long run inevitably threaten social policies and protection). From this perspective, States regain, at least a part of their capacity to determine politically the economic conditions of politics, of which it was said above that it tends to escape from them to the profit of financial actors in the credit game. And one sees clearly that they make use of this capacity to privilege, for example, the defence of a model of social security, or, on the contrary, the adjustment for historical under-development by means of an industrialization turned specifically towards exports. But this only takes place between the two – more or less narrow – limits. On the one hand, one which derives from the fact that in the globalised economy, a mode of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maintained by the State (a “type of capitalism”, as Pierre-Noël Giraud) cannot be chosen at will, by a pure decision independent from what others do (paradoxically, then, at least in the eyes of theorists of the “sovereignty” of the State, this political capacity of inflecting the economy is all the more the real as States are more interdependent, and act in a more concerted fashion). On the other hand, one which derives from the fact that political “choices” about the matter of social inequalities (and at the limit, the exclusion or inclusion of entire populations) are more or less patiently put up with by citizens – in other words, they are exposed to what until recently was called class struggle.

 

It is on the basis of these structural constraints, which are evolving very rapidly today, that – since the start of the crisis - the discussion has given rise to Neo-Keynesian propositions. These propositions haven’t stopped insisting on the fact that it is impossible to reinforce the capacity of States (or coalitions of States, such as Europe) to limit “systemic risks” and increase their power to regulate the financial markets, without at the same time developing on the one hand a new institutional capacity for governing the economy and on the other hand a set of policies for “counter-cyclical” growth (as a consequence, going against viewpoints in favour of the reduction of deficits, deflation and measured depression, by means of which the neo-liberal orthodoxy envisages mopping up the insolvency that has been transferred from the private to the public since the beginning of the crisis). Now it is very difficult, not to say impossible, to conceive either the one or the other without radically calling into question the current regime of economico-political power, which has been displaced largely outside its official legal, administrative and parliamentary loci, referring the most decisive choices to a whole shadow form of governance, of which the role of the IMF in “setting up” of the European plan to “rescue” Greek finances is a good example.11 It is just as difficult if the tendency to the growth in inequalities of wealth, which more or less uniformly characterizes globalization – despite the “catching up” of a whole part of the old “third world” – continues to become more pronounced12. Truth to say, the radicalness of the political changes implied by the putting to work of these conditions is such that one might conclude either that every Neo-Keynesian viewpoint is utopian in the current global framework13, or that such viewpoints have become indiscernible from a rupture with capitalism, or a reactualisation of the “socialist hypothesis” in forms to be invented (in particular, to dismiss the phantom of “socialism in one country” definitively). Although I don’t doubt, for my part, that every political initiative able to make the financialisation of the economy and social life recede needs regulative ideas with a socialist or even communist character, I will not, however, enter into such speculation, which is of no use in the immediate conjuncture. On the other hand, to finish on the point which occupies us, I will say a word on a very closely related question: that of the nature of the forces engaged in a battle over different ways of facing the crisis, forces whose effect will be to resolve or to aggravate the crisis, and which will evidently not benefit the same sectors of society …

 

A moment ago I said that class struggle really does haunt the underpinnings of the new relation between State and market. However, it is extremely doubtful that the forces or camps between which the political battle rages today can be defined as “classes” (as Nicos Poulantzas was still trying to do thirty years ago), or even simple antitheses between a capitalist imperium and a “multitude” or a mass of people which would be its victim, and because of this, would only be expecting an ideological offer or an organizational programme in order to revolt and to beat the power of money (the “Wall Street model”, as Aglietta says). Why are things less simple, and because of this the viewpoints much less certain than such a binary schema – which is profoundly anchored in the imaginary of the left (before passing from that to the many variants of the “third way” for a part of the left) - allows? It is not because of the mystification that the masses are [supposedly] prisoners of (for example: nationalism and religion, however harmful their influence may be), any more than it is because – here or there – forms of State clientelism plunging deep into the social fabric corrupt the civic spirit (even if it would be absurd to deny the reality of this phenomenon). It is, it seems to me, much more decisively, because the multitude or mass is implied in the functioning of financial capitalism, from the point of view of its activities (so, in its stable or precarious employment, its working conditions, etc), its material interests and its survival, to say nothing of its leisure activities and its culture. Nothing would be more false, in this regard, than to represent financial capital, as speculative, “immaterial” and “fictive” as it may be, to oneself as a parasitic or “rentier” capitalism, notions that were invented in the 19th century by an industrialist and productivist ideology from which Marxism has not been exempt. What the subprime crisis has made evident is precisely the fact that the most elementary conditions of life – housing, as it happens – of the whole population and most notably its poorest part (in the United States, but also the United Kingdom etc) depend immediately on the generalization of credit facilities and their capitalization by the banks (which have thus found another way to make the poor pay, the most fundamental recipe for getting rich throughout history).14 Those who the system rejects are, in a certain fashion, even more strongly included (or if one wishes, their exclusion takes the form of an “inclusive exclusion”). And to take an example from immediate current events, when BP, the company responsible for the ecological catastrophe in the Gulf of Mexico is threatened with sanctions by the American government and sees its share price collapse, the pensions funds, which are built in part on the inclusion in their share portfolio of BP shares, which are considered particularly safe and profitable, panic and warn of the repercussions this could have for the pensioners they serve. What conclusions are to be drawn from these facts, which could, along with others, be ranged amongst what Marx called the development of the real subsumption of the workers, and of the population more generally, under the movement of capitalist accumulation?15 In the first place, it seems to me, is this: that there is no exteriority between the interests of capital and those of the population. That doesn’t in the slightest mean that there is no antagonism, contradiction or conflict, but it does mean that antagonisms traverse the way of life, the models of activity and consumption, the interests and thus the forms of consciousness of social groups. Combat is thus not so much between two pre-existing groups (big and small, exploiters and exploited, those who hold power and those who are its victims) as it is between two possible ways of “collectivizing” the interests of individuals which in part concern the same classes, the same nations, the same professions, and which each time implies another mode of government for society. One is tempted to say, in the Gramscian language (taken up again today by Laclau) that the combat is between “historic blocs” and alternative “hegemonies”, which do not only imply that certain interests have priority over the others (thus competition or social security, capitalization of the stock exchange or durable development, imperial power or exchange between cultures…), but also that individuals and social groups “choose” between multiple ways of protecting their interests and ensuring their survival – a choice which is, of course, anything but ideally free, and the modalities of which depend very strongly on the place in which they are situated in a “hierarchised” world. The identity of actors or social forces is thus itself a function – as Marx had sometimes sensed – of the forms of their own “struggle”, which itself unfolds under given material “conditions”.16 This leads us directly to the last question that I would like to evoke, if only very rapidly.



 

Centres and peripheries

 

The discourse and institutions of the European Union are formally egalitarian (although the nature of this equality has always been a problem: does it concern European citizens, or the States whose “weight” varies as a function of their economic power, their population?) But what the current crisis has made strongly evident is that in reality it is a matter of a hierarchical structure, where the decision-making powers are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 “club” of founding nations (essentially France and Germany, who sometimes form a coalition, sometimes neutralize each other, while others exercise a more or less effective counter-power and England plays on its double belonging to the European and Atlantic worlds), and where inequalities have a tendency to deepen rather than be reduced. The dynamic of this structure has been profoundly transformed by its enlargement to the old countries of the East freed from the grip of the Soviets. It is being altered once again under our eyes by the developments of the financial crisis: the relations of domination are exacerbated and an acute question is posed of knowing how they might be modified, even transformed into the levers of a reconstruction on a different, more egalitarian basis. This evidently supposes a very profound change in the perception that the “Europeans” have of themselves, of what unites them and what opposes them to one another.

 

The most insistent schema for characterizing this internal hierarchy in Europe, in which symbolic, economic and political factors are combined, is that of the centre and the periphery (or rather peripheries, because it seems evident that despite the proximities and formal analogies Ireland and Greece, or Great Britain and Poland, or Spain and Portugal do not form a homogeneous ensemble). One of the implications of the schema which reoccurs insistently today is that the “peripheral” nations are in some way less intensely, less completely “European” than those of the centre, either because of their political history, or because of their type of economic development, or because of their culture (if not to say their “customs”). Hence the idea – which has just been applied to Greece in a large section of the American, German press and so on – that the peripheries, or at least certain amongst them are less strongly attached to the European construction, and are, for that reason, susceptible of being detached from it (willingly or by force). Related to the question of the “survival” of the Euro, one has thus seen the extrapolation of a kind of theory of the externalization of the costs that certain “failing” countries or those countries that can’t be “assimilated” to the dominant model (the one which would point to the nations of the “centre”) represented.17 Against this representation, I recalled (in a paper given in Thessalonika in 1999) that it in a very constraining sense, one accentuated by the transformations underway in the “political space” that it is precisely the “peripheries” which are “at the centre”, or whose functions and problems become central.18 The current situation is not going to disprove this thesis. But it supposes, precisely, that one adopts a political point of view, in which the present always refers to the totality of its historical factors: not only economic, but also cultural and ideological factors. It is the ensemble of these factors that defines the strategic function of frontiers – as zones of contact rather than simple lines of separation. It is their positioning, as much as the more or less great distance from a “centre” which determines what should be understood by “periphery”. Now, frontiers (national and above all “continental”) have today become the centres of the centres themselves. How, from this point of view, is one not to accord a very particular signification to the fact that shortly after the imposition on the Papandreou government of the draconian plan for budgetary rigour, the acceptance of which brought the “admiration” of the President of the IMF,19 Greece received a visit from the Prime Minister of Turkey? Turkey, a country kept out of the EU by the determination of France and Germany, which is in the process of becoming one of the arbiters of Mediterranean politics? He had come to examine the conditions for reinforced cooperation between the two “traditional enemies” of the Aegean world, implying in particular a reduction in their military spending and thus contributing to their entry into Europe in the 21st century.20

 

It is from this point of view that we can return to what, without a doubt, constitutes the most sensitive point in the debate about the “place” of Greece and other “peripheral” countries (faced with analogous financial difficulties, or whose financial difficulties are accentuated in an analogous fashion by the pressure of the markets): the question of the articulation of interests, institutions and the foreseeable evolution of the European Union and those of the unified monetary zone (sometimes designated using the revealing sobriquet “Euroland”). As this question is – if the crisis lasts and worsens – likely to be transformed into a focus for very sharp tensions and because, on the other hand, it involves no simple solution, it may be useful to discuss it successively from two points of view: that of Greece itself, a “periphery” threatened with externalization, and that of Europe as a more or less shadowy system of domination, the evolution of which depends in particular on the policies decided at its “centre”.

 

From the Greek point of view, pending a deeper discussion, it seems to me that one can say that the “decoupling” of the European political construction and the Eurozone assumes an essential, maybe vital, signification. This idea is paradoxical, perilous because the single currency is the only “marker of sovereignty” that Europe has at its disposal in the world. But in the catastrophe-scenario that certain economists envisage – that of the simple deferral of a “defaulting” by the Greek State, which would finally be precipitated by the recession that austerity may provoke and by the unendurable character of its social consequences, at the same time – it is imaginable – although not necessarily desirable (it’s the whole question of the “lesser evil”, which doesn’t necessarily exist, which precisely creates the obligation to try to change the terms of the problem) – that Greece may be led to leave the Eurozone so as to obtain the restructuring of its debt and to benefit from the advantages of a “competitive devaluation” like Argentina or Sweden. It is evident that in these conditions (which, once again, are “catastrophic” not only for the country but in its snowballing repercussions for other countries), it would be essential that “Europe” and “Eurozone” not be considered as synonymous concepts, and that Greece (or other nations faced with the same dilemma) not find itself “marginalized” or “minorised” at the heart of the European Union (for example, in the form of the suspension of its “voice” in the Council, a “threat” brandished by Germany at countries in deficit, apparently forgetting that that was its own case not so long ago). It would thus become necessary for this distinction between Europe and the Eurozone to become an essential demand for European democrats.

 

If we now move to the point of view of the “system” itself, the point of view which seems to be being sketched out, and which in many ways is just as catastrophic, is that of an increasingly accentuated divergence between the two heads of the famous “Franco-German” couple. It is evidently not reducible to the personal antipathy between Angela Merkel and Nicholas Sarkozy, but rather refers to heterogeneous political cultures which are surfacing again in the experience of the crisis, and to the disequilibria or power which have deepened since the reunification of Germany, the opening of the EU to the ex-socialist countries of the East, and the adoption of different rules faced with the 1997 “norm” concerning budget deficits (the Stability and Growth Pact included in the Treaty of Amsterdam). In a striking article, Habermas recently wondered about the “growing indifference” of German politicians towards the European construction – to put it plainly, their tendency to make the nationalist point of view of the reinforcement of their own power prevail over European interests (which in his eyes are also the long term interests of Germany itself).21 One could say as much about the French, even if they give themselves the fine role of defending “the weakest”, should the occasion arise. Apparently the French government relies today on several of the countries in the Eurozone weakened by the crisis (Spain, Greece, Portugal) so as to advance the idea of a monetary and budgetary policy coordinated by the “Eurogroup” and to take several steps in the direction of European protectionism.22 That, at least, is what its adversaries reproach it for. Inversely, the German government relies on countries that are not part of the Eurozone (Poland, Great Britain, Sweden, Czech Republic) so as to advance the idea of European budgetary control, decoupled from monetary policy and forbidding “financial transfers” between States. North-Eastern versus South-Western Europe? It is to soon to know if the German thesis is a prelude to a reversal of its position in relation to the centrality of the Euro in the construction of Europe. That depends precisely on the result of this “tussle”, even if certain commentators speculate on the interest, for a Germany that is more and more oriented towards an export market essentially constituted by other European countries, of an “exit from the top” of the common currency, symmetrical to an “exit from the bottom that other predict or advise for Greece.23 What is most likely is that despite the advantages that they get from their “condominium” and the degree of interpenetration reached by their economies, the two central powers will enter into a long phase of divergence and chronic conflict (even if they endeavour to mask it with protestations of understanding and to avoid it degenerating as far as a rupture, for which they would both pay a high price). What then becomes of the idea of a “centre” of Europe, even if it is occulted? One may think that the interest of European peoples is to upset this face off, by making other voices heard and by proposing other projects. In this way, one finds the burning question of democracy again, in the form of the equality of nations as well as that of the circulation of alternative hypotheses in a transnational public space, one which is not strictly controlled by governments and their electoral machines.24 Perhaps one should go so far as to call into question the very figure of the “centre” and “periphery”, in other words, the hierarchical structure that finally prevailed in the history of the construction of Europe, although it was a figure that was not inevitably implied by this history. Not so as to overthrow it, term by term, but so as to confer priority on the interdependent development of member countries, the complementarity of their regions and the catching up after internal “inequalities of development”, which is also the condition for a collective guarantee against “systemic risks”, and which would also allow an attack to be made against the phenomena of demagogy or corruption in such and such a country, with some chance of success, instead of these becoming an instrument of blackmail.

 

But there is another reason why this figure ought no longer to be tenable: this is because it dissolves in the context of globalization. What is in the “centre” or the “periphery” in the world is not necessarily so in Europe, and vice versa, while Europe as such finds itself in an unstable equilibrium between the “central” (or dominant) and “peripheral” (or subordinate) regions of the new world-system. The figure of centre and periphery at the heart of Europe touches here on its absolute limits, because it ignores [the fact that] internal relations of force are determined permanently by exchanges and contacts with the exterior. Or, if it doesn’t ignore it, the figure is content to instrumentalise the fact. If there are several divergent “centres”, it is because their strategic relation to the tendencies of globalization is no longer the same. And if there are several types of periphery – if, for example, Polish low wages and Greek low wages do not have the same signification – it is because the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ur, like the “layers” of culture and historical traditions, runs across the European continent, inscribing multiple frontiers in it, that are both mobile and irreducible.

 

This multiplicity of situations and of statuses with regard to power, work and culture may become the damnation of Europe, if it serves to aggravate and exploit inequalities, and ends up by degenerating once again into insoluble antagonisms, as at other moments in its history. It could, on the contrary, become one of the instruments of its vitality and of its communication with the rest of the world if – even through the violent experiences of a crisis – it issues in the invention of an original combination solidarity and diversity. This is why it seems so important to me that we reflect together, as European citizens, on the tests that you are going through and on the means which you have at your disposal to overcome them, but also on what they reveal that concerns us all. It is in order to contribute to this reflection that I came here this evening, on your invitation, which I am touched and feel honoured by. But above all it is so as to learn to better engage in reflection. I have acquired the long-standing conviction that a sort of “right to inspect” the affairs of our neighbours was one of the conditions for European citizenship. But I also know that one can never claim to know better than another what makes for the singularity of his or her historical exper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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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urope: crise et fin?’ published on the website Mediapart (www.mediapart.fr) 24/5/2010; ‘Europe: Final Crisis?’, shortened version published in The Guardian 25/5/2010; ‘Europe: Final Crisis. Some Theses’ published in Theory and Event 13 (June 2010).

 

2. This is the inverse of what certain pro-European editorialists maintain – such as Bernard Guetta in Libération (5/5/2010): ‘The uncertain birth of Europe’: “we are in the process of going from principle to the viewpoint of an economic government (…) This will be so delicate and difficult to implement that the European Union will not succeed. If that was the case, it would be the beginning of its end but (…) if Europe became integrated, instead of disintegrating, then the question of democracy, too indirect today to be complete, would be posed”.

 

3. Cf. for example J.K Galbraith ‘Quelle Europe pour briser les marchés’ in Le monde diplomatique June 2010.

 

4. The examples of what is today called ‘populism’ covers a very broad spectrum, going from European nationalist and neo-fascist movements to the anti-imperialist mobilisations of a Hugo Chavez or of the neo-Peronist Argentinians, who freed themselves from the yoke of the IMF when the peso collapsed, even as far as the attempts attributed to Barack Obama to get support from public opinion to impose regulations on the financial operations of Wall Street. Cf.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London, Verso, 2005) and my account of it,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 ‘Populisme et politique: le retour du contrat’.

 

5. Cf the article by Alain Duhamel in Libération (10/6/2010) ‘L’électorat populaire et l’électorat financier’.

 

6. Vigourously does not mean violently, even if this possibility cannot always be excluded (in any case, it cannot serve as an alibi for preventative repression). But then alternatives are needed: one may ask oneself what parties on “the left” and European unions (or other associations) are waiting for in order to think about demonstrations and campaigns petitioning Brussels and Strasbourg against the plans for austerity, which will devastate the social elements of the “European model”.

 

7. Giacomo Marramao used this formulation in his presentation during the ‘Marx aujourd’hui’ study day run by Groupe NoSoPhi at the Université de Paris I, 4th June 2010.

 

8. Frédéric Lordon correctly remarks on this point that the Greek debt saw itself multiply suddenly because it was “chosen” as the first target in Europe for Stock Exchange speculation on a bailout by Europe and it could be the same tomorrow for Spain or the United Kingdom (‘Crise, la croisée des chemins’

http://blog.mondediplo.net/2010-05-07-Crise-la-croisee-des-chemins).

Joseph Stiglitz makes the same remark in ‘L’austérité mène au désastre’ in Le Monde 22/5/2010.

 

9. Cf. his book La crise. Les voies de sortie (Paris: Michalon, 2010) and his article ‘La longue crise de l’Europe’ in Le Monde 18/6/2010.

 

10. Cf Pierre-Noël Giraud, L’inégalité du monde (Paris: Gallimard, 1996), La mondialisation. Emergences et Fragmentation (Paris: Editions Sciences Humaines, 2008)

 

11. But of which the corruption of the intermediaries of the major public markets, or high income inflation are also an aspect. It will be recalled here that it took the courageous insistence of the Green MEP Daniel Cohn-Bendit to draw attention to the “unsaid” of the plan to restrict public spending imposed on Greece last April: these restrictions would not affect the enormous military spending of the Greek State, from which essentially French and German arms companies profit …

 

12. Cf. Giraud op. cit. See also the results of the investigations published in Libération 14/6/2010, with the commentaries from Daniel Cohen and Gilles Finchelstein.

 

13. This is Toni Negri’s position. See his article in the special issue of Radical Philosophy devoted to Keynes ‘No New Deal is possible’. Radical Philosophy 155 May-June 2009 (‘Return to Keynes?’).

 

14. Cf. Frédéric Lordon: Jusqu’à quand? Pour en finir avec les crises financières (Paris: Raisons d’agir, 2008).

 

15. Karl Marx, Resultate des unmittelbaren Produktionprozesses (Frankfurt am Main: Verlag, 1969). Cf my commentary in Balibar La proposition … op. cit., ‘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p. 42–43.

 

16. I referred to the Gramscian notion of the “historic bloc” and consequently to its development by Ernesto Laclau. But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he schema proposed by Laclau and the one I am trying to put to work here: I share the idea that politics is played out in the confrontation between alternative hegemonies, each of which constructs a “chain of equivalences” between heterogeneous interests and demands, by imposing on them a common form (by making of them a “people”), and by subsuming, in part, the same groups. I believe that this idea is fundamental in the current conjuncture, and that it contains one of the keys for our reflection on the coming developments in the European crisis. On the other hand, I do not at all believe that the condition for the construction of a determinate hegemony (“populism” for example) is the emergence of a nomination that is as empty as possible and which is thereby susceptible of being interpreted in different terms by each social group – something which would leave the “substance” of the basic demands of each group intact, and simply unified by analogy with the others. On the contrary, I believe that political choices divide the interests of each group between contradictory alternatives, and the historically transformative (or conservative) hegemonies have really distinct forms of life and modes of production as their content.

 

17. See the declarations of the European Commissioner Karel de Grucht in the Süddeutsche Zeitung of 6/5/2010: “it is not a matter of criticizing Germany, it is a matter of imitating it by developing the export capacity of every country (“Deutschsland macht, was alle machte sollten”)…There are many variants on this theory, which sometimes go as far as turning it the other way around. Thus part of English public opinion periodically perceives Great Britain as a “detachable periphery”, but in the name of the idea that it naturally belongs to another grouping, or that it is in its interests to privilege this other grouping. And on the other hand, the point at which one passes from the “centre” to the “periphery” is by definition completely floating. In certain extremist scenarios, it is a question of “starting all over again” with the construction of Europe beginning with a highly restricted “core”: the famous “Franco-German couple”, the solidness of which is presented as the “motor of Europe” or a sort of “Mark zone” reconstituted at the heart of the Eurozone itself…”

 

18. Etienne Balibar ‘Aux frontières de l’Europe’ in Nous, citoyens d’Europe? (Paris, La Découverte, 2001) pp. 15-26.

 

19. Declaration reported by Le Monde 4/6/2010

 

20. Cf. Le Monde 15/6/2010: “A ‘New Era’ in Greek-Turkish relations. Turkish Prime Minister Erdogan visits Athens. At the centre of the discussions, the question of defence.” The press used the occasion of the Greek crisis to come back to the circumstances and the conditions of the entry of Greece into the ‘European community’ in 1981, shortly after the end of the dictatorship by the colonels, recalling that it was essentially determined by the will to consolidate democracy on the Southern flank of Europe, but also to reinforce the “common front” of members of NATO in the face of what, at the time, was still perceived as the “Soviet threat” to the European continent. This reminder takes on its full signification when one brings it into relation with the regional function that the normalization and reconciliation of Greco-Turkish relations is in the process of acquiring.

 

21. ‘Deutschlands neue Gleichgültigkeit’ published in Die Zeit 20/6/2010.

 

22. Or of a “communitarian preference” explicitly inscribed in the electoral programme of Sarkozy in 2007.

 

23. Cf the article of J.P. Vesperini in Le Monde 11/6/2010 (‘The least bad solution would without doubt be the German exit’).

 

24. One might think that, at least ideally, the interest of European peoples would be to explore the means for a ‘common currency’ distinct from the ‘single currency’ currently managed as a function of a sole norm of stability that is less and less tenable. Cf. Frédéric Lordon ‘Crise, la croisée des chemins’ op. cit. Let us recall that at the time of the constitution of the European Central Bank, the inclusion amongst its statutes of the objective of full employment beside the objective of struggling against inflation was explicitly refu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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