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제가 진행하는 정치철학 세미나도 곁들여 안내합니다.  

정치철학 세미나는 2009년 봄부터 시작했고, 지금까지 에티엔 발리바르와 랑시에르의 저작들을  

공부했습니다. 2010년 겨울/봄 세미나에서는 다음과 같은 저작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2010년 1월-4월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근간).   

2010년 4월-6월  

에티엔 발리바르, {폭력과 시빌리테},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난장 (근간). 

 

1월부터 6월까지는 제가 번역해서 출간할 예정인 이 두 책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두 권 모두 제가 번역한 원고를 읽을 예정이며, 두 책과 관련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의 다른 논문 및  

인터뷰를 함께 공부할 계획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세미나에는 참여 자격 제한이 없습니다.  

단 외국어를 잘하시는 분은 특히 환영합니다.^^

1월-6월까지 진행될 정치철학 세미나는 격주 금요일 7시에 새움 세미나실에서 있습니다.  

세미나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2번 이상 결석할 경우 더 이상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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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9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ㅁㄴㄴ 2010-01-18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세미나는 언제 시작하는건가요? 자세한 공지가 없는것 같아서;

balmas 2010-01-18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미나는 1월 22일, 그러니까 이번 주 금요일 7시에 새움 세미나실에서 있고 이번에 다룰 책은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입니다.^^

2010-01-18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0-01-20 15:44   좋아요 0 | URL
예 그날 뵙겠습니다. :)

2010-01-19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10-01-20 15:44   좋아요 0 | URL
이번 주부터 오세요.^^ [감성의 분할] 읽고 오시면 됩니다. :)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의 겨울강좌 및 세미나가 시작돼서 안내합니다. 새움의 강좌와 세미나는 모두 무료이니까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좀더 자세한 사항 및 연락처는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1536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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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대중강좌 및 세미나

 


 

세상엔 공짜는 없다? 새움은 공짜다!

알찬 공부, 따뜻한 사람들, 안락한 공간!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는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대중강좌>


1.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일정: 1월 12일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1강(1월 12일)


유럽중심주의의 세계사 서술 비판 I


강철구(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 저자)


2강(1월 19일)


유럽중심주의의 세계사 서술 비판 II


강철구(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 저자)


3강(1월 26일)


유럽중심주의의 세계사 서술 비판 III


강철구(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 저자)


4강(2월 2일)


한국진보진영의 유럽 편향에 대해


민경우(통일뉴스 전문기자)


5강(2월 9일)


맑스주의 안의 유럽중심적 경향들


한형식(새움 회원)


6강(2월 16일)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넘어서-유럽중심주의와 역사학


염운옥(동경대 역사학 박사, 인종주의 전공)




 

2. 녹색 성장, 환경적(的)인가? 환경의 적(敵)인가?

일정/문의: 1월 6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9시, 김민정(019-372-3025)

 



1강

(1월 6일)


MB식 녹색 성장은 친환경적인가?

4대강 사업의 정체는 무엇일까?


김민정(비정규직 사회학 강사)

김종남(환경운동연합 총장)


2강

(1월 13일)


기후 온난화에 맞선 우리의 대응 방안은?

핵 발전소는 기후 온난화의 대안인가?


김종환(연세대지구환경연구소 연구원)

이헌석(에너지정의행동 간사)


3강

(1월 20일)


노동조합운동과 환경운동의 만남

에너지 전환과 녹색 일자리 창출


이호동(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대표)

한재각(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4강

(1월 27일)


마르크스적 대안 모색

다양한 공동체적 대안에 대한 비판적 평가


황정규(해방연대)

권오범(새움 회원)




 

3. 맑스로 보는 경제, 맑스로 읽는 경제학

일시: 1월 14일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강사: 김정주(새움 회원, 경제학 박사)

 




1강(1월 14일) 노동과 가치형성

2강(1월 21일) 이윤의 원천과 잉여가치 생산

3강(1월 28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정성


4강(2월 4일) 이윤율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대두

5강(2월 11일) 세계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의 파산

6강(2월 18일) 한국경제의 마르크스 비율 분석과 새로운 대안의 모색

 

 




 

<세미나>


 

1. 근대 동북아시아의 이데올로기와 그 물질적 조건들

 

일본, 한국, 중국 등 근대 동북아시아에서의 지배/저항 이데올로기들의 성격과 역학, 그리고 그것이 근거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들에 대해 공부해 나간다. 이 세미나는 단지 훈고학적인 동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바로 지금(후기 근대 또는 현대) 여기(동북아시아 또는 한국)의 정치와 현실을 인식하고 변혁하기 위한 비판이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일시: 1월 11일(월)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간사: 이지원(새움 회원_010-9553-8252)



 

2. 자본론 세미나: 자본론 2권

 

일시: 1월 13일(수) 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간사: 유승민(새움 회원_011-9975-1392)



 

3. 가치, 노동, 화폐_맑스 경제학의 관점에서

 

자본론 1권에 등장하는 가치와 화폐 그리고 노동과정에 대한 맑스 이후의 여러 논의들을 15주동안

함께 공부합니다.

 

일정: 1월 5일(화) 예비모임(오후 2시 30분), 12일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30분

 

간사: 박종식(새움 회원, 노동 사회학 전공), 유승민(새움 회원, 경제학 전공_011-9975-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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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부터 그린비출판사에서 '프리즘 총서'라는 제목의 총서를 하나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작년 초부터 나와서   

한 1년 간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올해 초부터 이제 책을 내게 됐습니다. 총서의 기획과 운영은 예전부터 해보려고 하던 

일이었는데, 그린비 출판사의 후의와 배려 덕분에 올해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안팎으로 엄혹한 상황이어서 더 부담스럽고

어깨가 무거운데, 멀리 내다보고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낌없는 조언과 질책,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프리즘 총서를 소개하기 위해 써본 것인데, 다소 거창한 것 같아서 좀 쑥스럽긴 하지만, 총서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좀더 논의를 다듬고 발전시켜보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프리즘 총서"에  

대한 일종의 소개문으로 얼마간 쓸모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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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총서를 시작하며

 

 

총서에 대하여

 

총서는 국내의 독자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사실은 매우 낯선 어떤 것이다. 국내 출판계에는 지금까지 다수의 총서들이 존재해왔고 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름은 “총서”(叢書)나 “신서”(新書) 아니면 “문고”나 “시리즈” 등과 같이 제각각 불려 왔지만,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들에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총서를 선보였다. 가령 창비의 “창비신서”나 민음사의 “이데아 총서” 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는 “현대의 지성”, “우리 시대의 고전” 같은 것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또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에서 조금 더 작은 규모로, 하지만 좀더 전문적인 주제를 중심으로 펴내는 총서들도 존재한다. 1990년대 초에 솔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입장” 총서는 당시에 국내에 막 소개되고 있던 알튀세르와 데리다, 들뢰즈, 세르 등의 저작을 소개하고 루카치, 벤야민, 아도르노 및 국내 비평가들의 저작을 함께 출간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또 문학동네에서는 “모더니티 총서”라는 표제 아래 조르주 바타유,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라인하르트 코젤렉 등과 같은 현대의 주요 사상가들의 저작을 펴내기도 했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후마니타스에서 내는 “폴리테이아 총서”, 경성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경성대 문화총서” 등이 있다. 이 두 총서는 뚜렷한 주제를 중심으로 국내외의 주요 저작들을 지속적으로 펴냄으로써 총서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국내에는 엄밀한 의미의 총서가 존재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고, 또 그것이 출판 활동의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되지도 못한 것 같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총서란, 주로 인문사회과학계의 지식인들이 해당 학문 분야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담론들을 생산하거나 소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학풍 내지 학문적인 흐름을 형성해나가는 지적 중심을 가리킨다.

 

프랑스에서 총서의 위상

 

국내와 달리 외국, 특히 학술 선진국이라고 할 만한 구미의 여러 국가에서 이런 의미의 총서는 출판 및 학술 활동의 기본적인 토대이자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는 가히 총서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할 만큼 총서 형식이 출판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존재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들은 거의 대부분, 프랑스어로는 “콜렉숑”(collection)이라고 불리는 총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학문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동료들 및 후학들과 더불어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을 개척했다.

예컨대 구조주의의 전성 시대에 루이 알튀세르는 프랑수아 마스페로(François Maspéro) 출판사에서 “이론”(théorie) 총서를 중심으로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도미니크 르쿠르, 미셸 페쇠 같은 제자들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의 개조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또한 자크 데리다는 동료들인 장-뤽 낭시, 필립 라쿠-라바르트, 사라 코프만과 함께 처음에는 플라마리옹(Flammarion) 출판사에서, 나중에는 갈릴레(Galilée) 출판사에서 유명한 “효과 속의 철학”(la philosophie en effet)이라는 총서를 해체론의 본산으로 삼아서 활동했다. 폴 리쾨르 역시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철학의 질서”(L'ordre philosophique)라는 총서를 만들어 수많은 외국 철학자들 및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출간한 바 있다. “철학의 질서”는 현재는 알랭 바디우가 바르바라 카생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미뉘(Minuit) 출판사에서 “공통감”(sens commun)이라는 총서를 맡아서 자신의 저작들을 비롯하여 프랑스 국내외의 철학, 사회과학, 언어학, 예술론 분야의 걸작들을 출간하고 소개했다.

프랑스의 총서들은 이처럼 세계적인 학자들만이 운영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학계에서 나름의 학문적 위치를 인정받는 학자들은 너나없이 모두 한두 개의 총서를 맡고 있으며, 심지어 5-6개의 총서를 담당하는 연구자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총서를 맡은 학자들의 학문적인 역량에 따라 어떤 총서들은 프랑스 지식계를 대표하는 학문 활동의 거점으로 인정받는다. 가령 저명한 헤겔 연구자이자 프랑스 강단철학계의 거목이었던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가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창설했고 현재는 프랑스 데카르트 연구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이 맡고 있는 “에피메테우스”(Epimethée) 총서는 프랑스 철학사 연구에서 가장 권위 있는 총서로 인정받고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쥘 뷔유맹의 [대수의 철학], 장-프랑수아 쿠르틴의 [수아레즈와 형이상학의 체계], 장-뤽 마리옹의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프리즘],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의 [스피노자. 경험과 영원] 등과 같은 20세기 후반 프랑스 강단 철학 연구의 걸작들이 이 총서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 총서에서 책을 출간하는 것은 그만큼 학문적인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프랑수아즈 발리바르 등이 1982년에 프랑스대학출판부에서 창설한 “철학들”(Philosophies)이라는 총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스피노자와 정치], [클라우제비츠와 전쟁], [뒤르켐과 자살]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의 한 가지 주제를 다루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이 총서에서 내는 책들은 문고본 판형으로 권당 120여쪽(최근에는 160여쪽으로 증면되었다) 분량의 작은 책들이지만, 총서에 참여하는 저자들이 프랑스 철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가령 에티엔 발리바르, 피에르 마슈레,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프랑수아즈 다스튀르 등) 및 유망한 신진 학자들이기 때문에, 책들이 하나 같이 우수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 총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밖에도 인문학계에는 수없이 많은 총서들이 존재하며, 갈리마르나 쇠이유, 프랑스대학출판부 등과 같은 대형 출판사에는 각각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총서들이 존재한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내는 수십 개의 총서들 중에는 유명한 “사상 총서”(Bibliothèque des idées)가 있으며, 이 총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갈리마르 출판사의 인문학 출판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1949),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1966), 알렉상드르 쿠아레의 [뉴턴 연구](1968), 레지스 드브레의 [이미지의 삶과 죽음](1992) 등이 이 총서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따라서 프랑스 학계 및 출판계의 흐름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권위 있고 신망 받는 총서들에서 어떤 책들이 나오고 있는지, 저명한 학자들이 새로 시작한 총서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누가 어떤 총서들을 맡아서 어떤 책들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프랑스 학계나 인문사회과학 출판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 학계에서 총서의 역할

 

프랑스처럼 철저하게 총서 체제로 운영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는 영미권 출판계에서도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총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지난 1970년대 이후 미국 인문학계에 “비평 이론”(critical theory) 내지 “이론”(theory)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형성되는 데서 총서가 수행한 역할이다.

“비평 이론”이나 “이론”은 미국 인문학계에서 대륙 철학, 특히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그것을 원용하는 다양한 인문학 작업들(문학, 역사학, 여성 이론, 정치학, 인류학, 유럽 철학 등)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최근에는 정치철학과 사회철학 연구에서 대륙 철학 내지 포스트구조주의적 이론을 원용하는 작업들을 “정치 이론”(political theory)이라는 명칭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론”은 주로 영문학과나 불문학과, 독문학과, 비교문학과 같은 문학부들, 그리고 인문학부 같은 데서 많이 하며, 유럽,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들이 소속되어 강의나 강연, 연구활동을 하는 곳도 이런 곳이다. 예컨대 데리다나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캘리포니아 대학(어바인)의 불문학 및 로만스어 학부 소속이었고, 우리가 볼 때에는 철학자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미국의 학자들(프레드릭 제임슨, 주디스 버틀러, 로돌프 가쉐 등)도 소속은 이처럼 문학부 쪽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이론>이라는 분야는 대개 196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프랑스 철학 및 인문학의 수용, 특히 1966년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유명한 구조주의 학술회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회의에는 데리다와 라캉, 롤랑 바르트, 르네 지라르, 장-피에르 베르낭 같이 이후에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과 문화계를 대표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으며, 이 회의 이후 미국에 본격적으로 구조주의 및 프랑스 철학과 이론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국의 철학계는 분석철학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철학과에서는 이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여지가 없었고, 대신 이 사람들은 불문학과나 비교문학과 등으로 초빙이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 철학자들 및 다른 유럽의 철학자들이 문학부 소속으로 활동하게 된 건 얼마간 우발적인 제도적 환경 때문이었는데, 이게 놀랍게도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게 된다. 미국의 문학 이론계는 1950년대까지 신비평이라는 흐름이 지배적이었으며, 1960년대 이후로 소수의 이론가들이 이 흐름을 대체할 새로운 비평이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여기에 공명한 게 바로 구조주의였다. 구조주의는 신비평의 이론적 엄격함 못지않은 엄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신비평처럼 문학 자체의 영역에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회 및 문화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문학계에서 구조주의는 점차 확산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구조주의 자체는 원래 철학에서 처음 시작된 게 아니라 인류학이나 기호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및 과학사 같은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이나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이 각 영역의 문제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지고 확산된 지적 흐름이었다. 그래서 구조주의는 워낙 그 성격 자체가 학제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고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서 좁은 의미의 문학 분야를 넘어서 인문사회과학 영역 전체에 걸친 논의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들 분야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해 주었다.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이처럼 인문학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학술지들이 창간되는데, [크리티컬 인콰이어리](Critical Inquiry)나 [다이아크리틱스](Diacritics) 등과 같은 학술지들이 대표적이다. 이 학술지들은 구조주의를 비롯한 프랑스 철학만이 아니라, 기호학과 문학이론, 인류학, 사회학,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영화이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같은 다양한 분야의 논의들을 소개하고 토론하기 위한 장을 제공해 주었다. 이 학술지들의 대표적인 필자들이 바로 데리다, 폴 드 만, 푸코, 리오타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학술지들이 큰 성공을 거두고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비슷한 성격의 학술지들이 여럿 창간되기 시작하고 “이론”의 영향력이 더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출현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총서의 역할이다. 이론의 형성 및 확산에서 특히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은 19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약 15년간 미네소타 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했던 “문학의 이론과 역사”(Theories and History of Literature)라는 총서다. 비교문학자인 블라드 고드지히(Wlad Godzich)와 독문학자 요헨 슐테 자세(Jochen Schulte-Sasse)가 편집 책임을 맡았던 이 총서는 주로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철학자, 문학이론가, 비평가들의 책을 100여 권 가까이 번역ㆍ소개함으로써 미국 인문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대표적인 책들로는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조건』, 『쟁론』, 들뢰즈/가타리의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모리스 블랑쇼의 『무한한 대화』, 만프레트 프랑크의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의 『언어와 죽음』, 미하일 바흐친의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 등이 있다.

존 힐리스 밀러 같은 대표적인 비평이론가가 평가하듯이 “‘문학의 이론과 역사’ 총서는 10여년 이상 동안 중요한 이론 저서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미국의 지적인 삶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The Theory and History of Literature series has done an immense service to American intellectual life for more than a decade in making available important books in theory.” 그 결과 <이론>이라는 분야는 단순히 문학이론이나 문학비평의 한 조류가 아니라 새로운 학문으로 평가받는 결과를 낳았으며, 데리다 같은 사람은 “이론”의 등장을 20세기 후반의 가장 주목할 만한 학문적 사건으로 꼽은 바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이 총서가 중단된 다음에는 스탠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지금도 출간 중에 있는 “자오선”(Meridian) 총서나 “현재의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같은 총서가 비슷한 역할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총서에서는 데리다, 레비나스, 블랑쇼, 장-뤽 낭시, 베르나르 스티글레, 조르조 아감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등과 같은 현대 사상의 거장들의 저작을 다수 번역ㆍ소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권의 중견 이론가 및 신예 학자들의 저작들을 출간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이러한 총서들은 외국의 사상들을 독자적으로 변용하고 재창조하는 데서 중요한 기여를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미국 인문사회과학계의 대표적인 총서 중 하나인 “독일 사회사상 연구”(Studies in German Social Thought)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철학자인 토머스 매카시(Thomas McCarthy)의 책임 아래 MIT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고 있는 이 총서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하버마스의 이론을 미국에 체계적으로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총서에서 출간된 하버마스의 저작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현대성에 대한 철학적 담론], [탈형이상학적 사유], [사실성과 타당성] 등 20여권에 이르며, 80년대 중반 이후에 출간된 거의 모든 하버마스의 저작들이 이 총서에서 출간되었다. 그밖에도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같은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사상가들 및 악셀 호네트를 필두로 한 3세대 학자들의 저작도 체계적으로 소개된 바 있다. 따라서 “독일 사회사상 연구” 총서가 없었다면 오늘날 영미권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및 하버마스의 사상이 자신의 영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명한 좌파 학술 출판사인 버소(Verso) 출판사의 경우에도 다수의 총서를 운영하고 있다. 가령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맡고 있는 “프로네시스”(Phronesis) 총서에서는 두 사람의 저작들만이 아니라 정치철학 및 사회이론에 관한 빼어난 저서들을 여러 권 펴내고 있으며, 마이크 데비이스가 편집을 맡은 “헤이마켓” 총서에서는 주로 문화정치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50여권에 이르는 저작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밖에도 시카고 대학 출판부나 뉴욕대학 출판부 같은 대형 대학 출판부들을 비롯해서 영미권의 대형 출판사들에서도 여러 가지 총서들을 운영하고 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총서의 의미

 

구미 학술계에서 총서가 지니는 이러한 위상을 감안해봤을 때, 총서가 학술 활동 및 출판 활동에서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총서의 일차적 의미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와 출판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출판”은 “publishing”이라는 원어가 가리키듯이 좁은 의미의 상업적 활동을 넘어서 사회 전체에 대해 지식과 정보의 내용을 생산ㆍ유통하고 그것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아왔으며, 또 마땅히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더욱이 전자통신기술 및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의 “publishing”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자 매체 및 활자 인쇄의 영역을 넘어 각종 전자 매체를 사용하는 영역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게다가 웹사이트와 블로그 등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publishing”은 과거와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엄격한 구별과 위계를 더 이상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출판이 지니는 의미는 훨씬 더 막중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는 모두 급격히 변화하는 여건 속에서 “publishing”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1990년대 초에 일부 지식인들이 전자출판이 열어놓을 새로운 미래에 대해 자못 기술결정론적인 낙관론을 펼친 적이 있으나, 새롭게 확장되고 변화된 출판 공간에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과제를 어떻게 심화하고 전진시킬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이 수행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는 신자유주의적인 학술 영역 재편 속에서 점점 비판적 사고를 위한 입지를 잃어갔고, 인문사회과학 출판계 역시 지적 시장의 개방과 학습 교재 및 실용서적 중심의 출판 흐름 속에서 대중적인 저술들의 출판에서 자신의 활로를 찾아왔다. 하지만 대중성 일변도의 출판만으로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대중적인 교양서들의 출판만으로는 독자들의 지적 욕구들을 얼마간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지적 활동을 수행하는 교양 대중을 형성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의 형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오늘날 “publishing”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가 공통으로 직면한 과제 중 하나는 한국 사회 공론장의 강화와 교양 대중의 확장이라는 선순환 구조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학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뜻있는 출판인들의 선의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계는 대학의 좁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오직 등재지 논문 쓰기에 매달리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사유의 과제를 감당해야 하고, 출판계는 “publishing”이라는 개념이 본래 함축하는 “공론 형성”이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양자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총서 체제의 구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총서 체제가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총서 체제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좀더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긍정적인 경쟁 관계를 도모하는 장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총서 체제가 갖는 두 번째 의의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한국 지식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이전보다 공론장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학술계, 특히 인문사회과학계가 이른바 “학진 체제”로 재편되고 등재학술지 중심의 학술지원정책이 정착되면서, 과거 한국 사회의 공론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공론 학술지의 기능이 약화되고 그 대신 각종 전공 분야의 학술지를 내는 분과학회를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은 점점 더 협소한 전공 분야로 축소되고 파편화되어갔다. 등재학술지 중심의 지원정책이 학술 평가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개별 논문의 수준을 향상시킨 것은 긍정적인 기여라고 볼 수 있으나, 그 대가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기능이 약화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87년 이래 한국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의 시기로 접어든 이후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또는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확장과 내실화가 필수적이었지만, 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고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의 방향에 따라 재편되면서 사회적 공공성과 더불어 공론장 역시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물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성과 공론장의 기능 약화를 피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특별히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를 탓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고, 남미를 비롯한 주변부 국가들에서도 대안적인 세계화를 위한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비하면, 한국의 경우 개별적인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비판적인 지적 흐름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이 인문사회과학 스스로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얼마나 연결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비로소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협소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비판적인 논의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이론적 입장을 선도하거나 공유하는 지식인들이 총서를 조직하여 작업한다면 좀더 효율적인 이론의 생산과 유통 및 대중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며 또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나 미국 등의 사례에서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문제는 국내의 지적ㆍ물질적ㆍ제도적 조건 속에서 이러한 모범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독자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 총서 형식은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광범위한 교양 대중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질적ㆍ양적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고등교육 졸업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교양 대중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했다. 그리고 교양 대중의 증가는 인문학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이어져서 대학 바깥에서 다수의 인문학 연구 공간이 생겨나고 대중 교양 강좌들이 개설되었다. 또한 출판에서도 대중적인 인문학 저술의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처럼 두드러진 교양 대중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학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대학 바깥의 사설 기관들에게 일임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목소리는 바로 대학 영역 안에서의 인문학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목소리 속에 대학 바깥에 존재하는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의 문제에 관한 관심과 고민은 그다지 많이 담겨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인문학 수요가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반기고 있지만, 그러한 수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교양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출판계는 대중 교양서와 인문서 출간으로 “공론 형성”의 기능을 대신해왔다.

이러한 괴리를 넘어서 교양 대중과 좀더 의미 있는 지적 소통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총서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대학이 지닌 인문사회과학 역량을 좀더 효과적으로 교양 대중에게 제시하는 일이면서 출판사가 지닌 공론 형성의 기능을 좀더 충실히 수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교양 대중은 단지 지식의 객체, 교양 지식의 소비자인 것만은 아니다. 스피노자와 그람시 또는 랑시에르가 각각 강조했듯이 인간은 사고하며 대중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은 대학의 연구자들이 대학 바깥의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일방적인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담론이 사회의 좀더 넓은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대중들이 지닌 집단적인 창발적 능력이 새로운 지적 담론과 상상력을 고무하는 상호 구성적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총서 체제가 이러한 관계 방식을 고무하기 위한 유용한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리즘 총서의 지향

 

프리즘 총서는 총서가 수행할 수 있고 또 수행해야 하는 이러한 역할에 대한 자각에 더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학계 및 출판계의 동향에 대한 비판적 반성 위에서 출발한다. 프리즘 총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신자유주의라는 “유일사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단일한 백색의 빛을 뿜어대는 그 유일사상을 분해하고 그 빛에 감춰진 다양한 사고 및 실천의 잠재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가 전개되기 시작한 이후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정책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시장 원리의 확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국가 구조 및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전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총체적인 지배 원리로 군림해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이나 고발, 심지어 저주의 목소리는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론과 정책 및 제도적 실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서유럽에서는 좌파 정당들마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를 대부분 수용하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여기에 대한 반발로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나 단체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급진적인 반(反)자본주의적 전망을 제시하지만, 입장의 선명함에 비해 설득력 있는 분석과 논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이며 총체적인 지배 원리로 군림해왔다고 해서 그것이 단일한 중심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은 항상 다양하며 긍정적으로 작동하며, 그것이 총체적인 지배 효과를 산출한다고 해도 그것은 다양한 층위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구축되고 재구축되고 변화하고 수렴하면서 작동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단일한 권력, 단일한 지배 원리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유일한 중심이나 단일한 메커니즘으로 환원하지 않고서도 그것이 발휘하는 총체적인 지배효과를 분석하고 해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오늘날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근본 과제라고 믿는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구체적이고 다면적인 분석이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가 산출하는 총체적인 지배 효과에는 사회 구조의 재편성과 더불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익 추구자로서의 개인, 유일한 조직 원리로서의 시장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관철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과거 역사 및 미래의 전망에 대한 획일화도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근대성의 형성 과정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고 현재의 사회적 지평을 넘어서기 위한 풍부한 정치적 상상력의 개발도 요구된다. 또한 근대 문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던 제국주의/반제국주의, 식민화/반식민주의의 첨예한 대립이 남긴 유산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지양하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은 그 자체로 철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심미적 감수성의 도야를 요구하는 일이다.

이처럼 역사와 사회,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에 기초하여 신자유주의의 총체적인 지배 효과들을 해체하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을 사고하고 모색하는 것이 프리즘 총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길이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난 1990년대 말 이후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상가들에 대한 물신숭배 경향이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거대한 변혁의 사상과 조직 체계가 와해된 이후 그 빈 자리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을 비롯하여 각종 현대 사상가들 및 이론가들의 이름들로 채워져 왔다.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가타리, 보드리야르, 하버마스, 호네트, 라클라우/무페, 지젝, 네그리, 아감벤, 랑시에르, 고진 등과 같은 현대 이론의 스타들의 이름과 그들의 주요 개념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나 패션 브랜드처럼 회자되어 왔고 또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사상이 한국 사회의 문제들과 현상들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 얼마나 기여해왔는지, 새로운 사유와 문제의식을 개발하고 고무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다. 그들의 숱한 저작들은 값비싼 로얄티를 물어가며 끊임없이 번역ㆍ출판되고(하지만 많은 경우 심각한 오역의 문제점을 내포한 가운데) 팔려왔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읽히고 응용되고 비판받고 변용되어 왔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오히려 그 사상가들은, 그들의 저작들은, 마치 조금 갖고 놀면 싫증나는 장난감처럼, 한 계절 입고 나면 금방 촌스러워 보이는 패션 상품처럼 그렇게 판매와 구매의 좁은 회로 안에서만 유통되었던 것은 아닌가?

프리즘 총서가 지향하는 또 다른 목표 중 하나는 이러한 불모의 사상가 물신숭배에서 벗어나 문제를 개발하고 분석을 고무하고 행동을 촉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프리즘 총서는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명망 높은 사상가들의 저작보다는 역사와 사회에 관한, 우리 시대의 핵심 쟁점들에 관한 깊은 성찰과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저작들을 발굴하고 소개할 것이다. 하나의 위대한 사상, 위대한 텍스트는 항상 자신이 속한 컨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깊은 숙고의 결과로 생겨나며, 그러한 천착 덕분에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좁은 컨텍스트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에서 반향을 미치고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촉발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상에 고유한 소비와 전유의 방식은 이름을 소비하고 숭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컨텍스트 속으로 그것을 끌어들이고 그 속에서 그것의 적합성과 효용성을 시험해보는 데 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개념, 새로운 문제들은 그러한 시험 과정 속에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즘 총서의 구성

 

프리즘 총서는 7개의 프리즘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프리즘은 전체 프리즘의 지향을 구현하면서도 고유한 분야에서 제 각각 독특한 색채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사상, 신자유주의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이 프리즘에서는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사상, 유일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의 해체를 추구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유일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단일한 이데올로기와 조직,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한 신자유주의가 절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지위를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런 내적 모순이나 간극, 공백을 포함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를 좀더 면밀하고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자유주의를 비난하고 저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것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위력과 정치ㆍ경제ㆍ문화적 뿌리들을 드러내는 것은 세심하면서도 끈기 있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의 프리즘”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보여주는 저작들을 계속 출간할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를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적 합리성의 구성 과정으로 이해하는 크리스티앙 라발ㆍ피에르 다르도의 [새로운 세계 이성]과 세계화 시대에 출현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분석하는 메리 칼도어의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 등이 그 사례들이다.

탈-근대성의 프리즘 근대 세계를 형성한 여러 갈래의 길을 보여주기, 또 다른 장래의 가능성들을 열어놓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논쟁의 의미는,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근대성의 종언에 대한 선언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 방식들 사이의 갈등에 있다. 만약 근대성의 종언과 탈근대성의 도래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근대성(들)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탈-근대성의 프리즘”은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성(들)을 읽는 새로운 방식, 근대성을 형성하고 근대의 출구로 이끄는 다양한 길들의 가능성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교조적인 근대의 정통으로 복귀하지 않으면서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독단에 맞서서 탈-근대의 새로운 전망들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탈-근대성의 프리즘의 목표다. 이를 위해 탈-근대성의 프리즘에서는 주로 근대성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저작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가 재출간될 것이며, 사회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 시민권의 형성 및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한 로베르 카스텔의 대작 [사회 문제의 변모], 제라르 누아리엘의 [국가, 국민, 이민], 정신분석의 사회 문화사에 관한 탁월한 저작인 엘리 자레츠키의 [영혼의 비밀] 등이 우선 소개될 것이다.

생명권력의 프리즘 생명 그 자체를 좌우하게 된 권력의 지도를 그리기

생명에 대한 인식과 기술, 권력의 발전은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전은 두 가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 속에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틀을 가두는 경향이 있다. 그 한쪽 편에 기술 유토피아가 섣부른 열광을 자극한다면, 다른 쪽 편에는 생명의 종말에 관한 묵시록적 경고가 맹목적인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미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의 일부가 된, 생명에 대한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권력의 메커니즘과 그것에 내재한 위험과 잠재력을 경험적이면서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생명권력의 프리즘”이 추구하는 바다. 이를 위해 생명권력의 프리즘은 생명 그 자체는 처음부터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인공적인 것이었으며, 권력은 지배이면서 자유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생명권력의 프리즘을 통해 출간될 저작으로는, 영미권 통치성 학파의 대표자인 니컬러스 로즈의 [생명 그 자체의 정치]와, 인류학적인 현장 조사와 마르크스주의 잉여가치론 및 포스트구조주의의 독창적인 결합을 통해 생명권력 분석의 새 지평을 제시한 카우시크 선더 라한의 [생명자본] 등이 있다.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 또 다른 사회를 상상하는 정치적 사유의 모험에 참여하기

정치적 사유는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좁은 틈새에 갇혀 왔으며, 국내에서는 여전히 이 두 가지 대립항들 사이에서 질식된 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 정치이론의 발전을 감안해보면 이것은 크나큰 지체이고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은 오늘날 외국에서 논의되는 가장 빼어나고 독창적인 정치적 사유의 면모들을 소개함으로써 한국에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민주주의, 인민주권, 시민권, 대표, 입헌주의, 인민주의(populism), 인권, 노동, 혁명 같이 매우 익숙해 보이는 개념들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곧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들을 모색해보기로 하자. 정치적인 것의 프리즘에서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클로드 르포르의 고전, [정치적인 것에 관한 시론], 시민권 및 공동체에 관한 독창적인 저작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시민권 이론], 포퓰리즘에 관한 혁신적인 저서인 벤자민 아르디티의 [자유주의 가장자리의 정치] 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예술의 프리즘 세계와 불화하는 감각의 움직임들을 탐색하기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종종 들리는 매혹적인 구호는, 사실은 오늘날 예술은 신(新)귀족들의 재테크 수단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자본 축적 회로의 말단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포섭되었다는 사실의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한 철학자의 표현대로 하면 정치는 감각의 질서의 문제이고 감각의 질서가 함축하는 세계와의 불화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예술이라면, 예술은 자본과 권력에 대한 포섭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포섭의 사실 덕분에 처음부터 정치적인 저항의 출발점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또한 다른 철학자의 표현을 빌릴 경우 예술은 탁월한 시빌리테(civilité)의 도구라면, 예술은 저항의 또 다른 방식을 실천하기 위한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프리즘”은 그러한 실천들을 모색하기 위한 장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예술의 프리즘에서는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새 번역본과 장-뤽 낭시/필립 라쿠-라바르트의 [문학적 절대], W.J.T. 미첼의 [그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외에 미술과 영화, 물질 문화 및 미학 일반에 관한 저작들이 출간될 것이다.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 명사로 정형화된 철학이 아닌, 동사로서의 철학적인 것을 실천하기

오늘날 철학은 다시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이 어떤 미래(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던 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철학의 형태와 실천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새로운 전환기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철학사란 철학이 자신의 영역들을 하나하나씩 상실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재규정해온 역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아마도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는 아무런 영역도 남지 않은 철학의 활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철학은 자신보다 더 철학적인 탈-분과학문들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포스트 철학의 시대로의 진입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장래를 기약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급진적인 유명론을 추구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이미 유명무실해진 자신의 영토를 고수하려는 헛된 노력 대신,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 유령화된 철학의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의 방식일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의 이론적 내기다. 철학적인 것의 프리즘에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저작들로는 루이 알튀세르 등이 공동 저술한 [‘자본’을 읽자] 완역본과, 서양 유일신교의 역사를 혁신적으로 재조명하는 얀 아스만의 문제작 [이집트인 모세],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 베르나르 스티글레의 [기술과 시간], 헤이든 화이트의 [형식의 내용. 서사 담론과 역사적 재현] 등이 있다. 

탈식민주의의 프리즘 제국과 식민의 상처를 가로질러 새로운 세계 문명들의 가능성을 꿈꾸기

어떤 시각에서 본다면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세계사는 탈식민주의 운동들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대성의 역사가 동시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 경쟁과 그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였다면, 지난 반 세기 동안의 세계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탈-근대성의 시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탈식민주의는 아마도 인류 문명의 새로운 전환의 다른 명칭일 것이다. 그러한 전환이 평화와 공존의 장래를 가져다줄지 아니면 또 다른 갈등과 폭력의 장래를 가져다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따라서 필연적인 전개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동안 국내에서 탈식민주의는 미국에서 출세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로 치부되거나 ‘근대성=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등식의 이론적 정당화의 토대 정도로 기능해왔다. “탈식민주의의 프리즘”은 탈식민주의가 본래 지니고 있는 광범위한 이론적ㆍ실천적 질문들을 소개하고,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 그 질문들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총서에서는 서발턴 연구의 대표작 중 하나인 디페쉬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의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 Europe) 및 라틴 아메리카 해방 철학의 대가인 엔리케 두셀의 [정치에 관한 20개의 테제] 이외에 탈식민주의의 역사와 주요 쟁점을 다루는 저작들이 소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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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10-01-0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프리즘 총서의 지향" 절의 3번째 문단의 3번째 줄 "지배 이데올로"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balmas 2010-01-07 17:17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truth 2010-01-06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로운 책들이 많네요. 특히 생명권력 프리즘과 신자유주의 프리즘 쪽. 라한의 경우는 국내강연을 듣지 못하고 강연문만 읽어서 아쉬웠는데, 번역본을 벌써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기대됩니다.

balmas 2010-01-07 17:18   좋아요 0 | URL
관심 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에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전출처 : ksammy님의 "ksammy님이 작성하신 방명록입니다."

글쎄요, [철학과 인문과학]은 내가 지금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프로이트와 라캉]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글과 강의록 사이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발표된 글과 미공개 강의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있겠죠.  

[프로이트와 라캉]에서는 주로 라캉의 업적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왜 인문사회과학,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면, 강의록에서는 라캉의 업적을 중요하게 간주하면서 그것을 동시대의 인문사회과학의 장 속에 위치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그 과정에서 라캉의 한계 내지 애매성도 지적하게 되고, 근대 서양 철학 및 인문사회과학의 맥락에서 그의 이론 작업을 검토하고 있죠. 아마 당시에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사이의 전략적 동맹을 추구하고 있던 알튀세르 입장에서는 라캉의 한계에 대해 공공연히 이야기하기는 좀 껄끄러웠을 겁니다.  

사실 이론적으로 굉장히 조심스러운 문제이기도 하구요. 어쨌든 라캉의 애매성 내지 한계에 대한 분석은 [담론이론에 관한 세 개의 노트]에서는 더 분명해지게 되죠. 따라서 나중에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제기된 라캉에 대한 비판은 이미 초기 작업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알튀세르의 주장은 이전의 글들과 비교해볼 때 두 가지의 차이점을 보여줍니다.  

1) 메타이론적 관점의 변화 [담론들의 이론에 관한 세 개의 노트]에서는 말 그대로 메타이론(과학들의 과학)을 구성하려는 야심이 표현되고 있는 데 반해,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는 이러한 메타이론적 야심이 포기되고, 그 대신 사상으로서의 프로이트주의를 강조하게 되죠. 이제 알튀세르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운동하고 있는 사상, 작용으로서의 과학입니다.  

2)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에 대한 강조 바로 여기에서 또 다른 차이점이 나오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점에 대한 강조입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하나의 완성된 과학을 구성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제안한 이론적 ‘가설들’을 결코 확정적이라고 간주하지 않"은 반면, 라캉은 “무의식의 어떤 과학적 이론 대신에 정신분석학의 어떤 철학을 세상에 내놓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주장은 자신의 초기 작업에 대한 일종의 자기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알튀세르는 메타이론, 과학들의 과학을 추구하기보다는 활동, 작용으로서의 과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관점을 바꾼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또 다른 상동성을 발견합니다. 이 점은 그 다음해에 발표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에서 좀더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죠.  

도움이 좀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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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 님은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중세사회와 관련해서 설명하려는 조르즈 뒤비의
‘세 위계’를 추천할 정도로 알뛰세르를 사랑하는 분이시다. 다만 홉스봄에 대해서만은 포퓰리스트에게 찬
성하는 바이다.

한국의 학계는 홉스봄에 대해서는 진보 내지는 좌파만이 아니라 보수 내지 우파도 칭찬한
다. 좌우를 막론하고 홉스봄을 번역해서 팔아 먹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왜 그는
그렇게 인기가 있을까? 그의 글들을 읽으며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보았다. 홉스봄은 맑
스주의 역사학자이면서 동시에 아카데믹한 역사학자이다. 우파들은 하나의 학문 분과인 역
사학 안에서 아카데믹한 학자로서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는 거고 진보나 좌파는 그것만이 아
니라 홉스봄이 대놓고 떠드는 맑스주의자로서의 발언을 상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홉스봄이 맑스주의자일까?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그냥 전문적인 역사학자. 다만 좀 개방적인 역사학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우에게 사
랑받는 것이다.

홉스봄을 읽다 보면 말로는 안 그런데 글을 보면 역사는 역사학자만이 하는 것이지 일반민
중들은 역사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뿌리깊게 갖고 있는 사람이다.

가령 구술사 또는 일반 민중들이 자신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이런 것을 토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을 굉장히 혐오한다. 역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할 수 있는 거지. 일반 민초들은 그러한 자격이 없다라는 생
각을 뿌리깊게 가진 사람이 홉스봄이다. 과연 맑스주의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위의 포퓰리스트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학문을 할 수 있는 거지. 일반 민초들은
그러한 자격이 없다라는 생각을 뿌리깊게 가진 사람이 발마스 님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
다.

이 사이트에 방문하신 분들 중에 포퓰리스트의 말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민족문화연구]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최근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적잖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국민국가론에 관해 비판적으로 다룬 글입니다. 원래는 비판적인 고찰을 담은 1부와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2부로 이루어진 글인데, 이번 발표한 글에서는 1부만 수록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2부는 따로 발표할 생각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비판적인 논의를 하실 분들은 12월 말에 인터넷으로 발행될  

[민족문화연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민족문화연구]는 아래 사이트로 가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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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9년 5월 1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단 제62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된 이 글은 원래의 발표문의 제1부에 해당하는 글이며, 󰡔민족문화연구󰡕에 투고하기 위해 상당한 수정과 첨삭을 거쳤다. 국민국가에 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는 제2부는 독립된 논문으로 추후 발표될 것이다. 월요모임 발표 당시 여러 가지 좋은 논평을 해준 동료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세 명의 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하고 건설적인 논평 덕분에 보잘 것 없는 논문을 훨씬 더 말끔하게 정리하고 보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 분들의 모든 지적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시야와 능력의 한계 때문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에게 있음을 밝혀둔다.]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외의 몇몇 필자들이 국민국가라는 주제에 관해 보여주는 이론적ㆍ정치적 문제점에 대해 몇 가지 비판적 질문들을 던져 보고,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제안해보려고 한다. 내가 염두에 둔 필자들은 임지현, 권혁범, 김철, 니시카와 나가오 내지 사카이 나오키 같은 학자들이다.[이하에서 호칭은 모두 생략한다.] 이들은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문제제기와 실천적인 지향으로 인해 국내에서 상당한 공감과 더불어 이론적 영향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작업에 대해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적지 않은 불편함과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공감하는 이유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국내의 뿌리 깊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그것이 정치적ㆍ문화적ㆍ일상적인 측면에서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 면밀한 비판과 더불어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진보 세력에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지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비판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가 그들의 작업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민족주의 및 그것과 긴밀하게 결부된 군사독재와 보수주의에 대한 이들의 비판적 성찰이, 결국에는 국민 자체, 국민 국가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기각과 부정을 낳기 때문이다. 뒤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들은 처음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특히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측면들(종족적ㆍ배타적ㆍ획일적ㆍ가부장적 측면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다가 그것을 넘어서 민족 내지 국민과 더불어 국민국가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그것은 이들이 단순히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근대 정치의 병리적 측면들 전체가 국민과 국민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맞아 근대의 지배적인 정치형태로서 국민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든가 국민국가가 종언을 맞이했다는 명제는 이제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물론 이것은 그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 및 국민국가의 진보적 성격을 비가역적인 역사적 성취로 간주하는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국민 내지 국민국가를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맞게 개조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며,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전면적으로 기각하는 것은 오히려 근대의 정치적 성취를 훼손하거나 상실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는 Rogers Brubaker, “The Manichean Myth: Rethinking the Distinction Between 'Civic' and 'Ethnic' Nationalism”, in Hanspeter Kriesi et al., ed., Nation and National Identity: The European Experience in Perspective (Chur: Rügger, 1999); “In the Name of the Nation: Reflections on Nationalism and Patriotism”, Citizenship Studies 8-2, 2004; Dominique Schnapper, Qu'est-ce que la citoyenneté? (Paris: Gallimard, 2000); La Communauté des citoyens (Paris: Gallimard, 2003) 등을 참조. 필자는 이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이들의 입장이 자칫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초역사적인 정치적 준거(또는 규범적 모델)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쉬나페는 ‘국민nation’이라는 모델은 포기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좋은 논의로는 Étienne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aris: La Découverte, 2001) 4장 및 Droit de cité (Paris: PUF, 2002) 9장 참조.] 따라서 국민이나 국민국가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의 논의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국민이나 국민국가라는 개념들이 어떤 점에서 비판을 받거나 거부되어야 하며, 또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대안은 어떤 것인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일이다. 내가 이들의 작업에 거리감이나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들의 논의가 그 선명한 주장만큼 충실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때로는 자가당착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자가당착이라는 강한 표현을 쓴 이유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및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독재 권력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들에 대한 좀더 민주주의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려는 이들의 실천적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판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논거들 자체가 오히려 그러한 실천적 문제의식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이 제기하는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들은 근대 국민국가가 드러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를 가능케 했던 이념적ㆍ제도적ㆍ운동적인 기반들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국민국가를 억압과 배제의 동질적인 권력 메커니즘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국민은 오직 복종과 예속만 수행할 뿐인 철저하게 수동적인 또는 (이들 중 몇몇 사람들이 자발적인 예속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예속적인 주체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복합성과 양가성을 드러내는 좋은 관점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노력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처럼 국민국가를 획일화된 국가, 전체주의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대해 전면적인 예속이냐 아니면 전면적인 거부냐 하는 이분법적 인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민국가를 내재적으로 비판ㆍ개조할 수 있는 길, 또는 국민국가의 내재적 전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의도와 달리 국민국가를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악마적인 권력체로, 빅브라더의 공간으로 신화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필자들의 국민국가 비판에 대해 검토해보고 그러한 비판들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우리는 2절에서 먼저 이 글이 비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필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추출해볼 것이다. 그 다음 3절에서는 이들의 논의를 네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것이다. 마지막 4절에서는 이들의 작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이론적 전제들을 제시해볼 것이다. 이 글은 주로 문헌 해석과 비평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이 글이 제한된 지면에서 다수의 필자들을 다루고 있고 또 그들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논점을 될 수 있는 한 상세히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러한 방법이 얼마간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글은 학제적인 관점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겨냥하고 있지 대안적인 국민국가론을 제시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겠다. 그동안 이들의 작업이 국내의 인문사회과학계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비판적인 작업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국민국가가 왜 문제인가?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의 문제의식

 

내가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다뤄보려는 필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전공분야와 학문적ㆍ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소의 견해 차이는 보여주지만, 공통적인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팽배해 있는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 식민지와 제국의 관계에 있었고, 그에 따라 상이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왔음에도 공통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탈냉전 이후 세계화가 전개되는 정세에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의식이다. 더욱이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탈냉전 이후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전략과 결부되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한국과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람들의 화해와 평화로운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에 있다는 지극히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나 가상적인 허위의식, 따라서 지적인 깨우침을 통해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민족 내지 국민의 존재 그 자체를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이데올로기 체계이며, 따라서 국민국가가 존속하는 한 민족주의는 사라질 수 없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억압과 배제의 속성을 유지하고 확장해가며, 역으로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제도들을 통해 끊임없이 개인들을 국민들로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거부 및 그것에 대한 대안의 모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이 글에서 다룰 필자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및 동유럽의 민족 문제에 관한 전문 연구자에서 출발해서 연구 영역을 점차 확장해온 임지현이 최근 몇몇 글과 저서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이러한 국민국가 비판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저서에서는 민족주의를 “고정 불변의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임지현 1999, 7면)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필자들의 경우 인용의 편의를 위해 각각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하고, 본문 중에 면수만 표기하기로 하겠다.
강명관,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사, 2007 ⇒ 강명관 2007.
권혁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삼인, 2004 ⇒ 권혁범 2004.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 한국문학의 기억과 망각󰡕, 삼인, 2005 ⇒ 김철 2005.
니시카와 나가오, 󰡔국민이라는 괴물󰡕, 윤대석 옮김, 소명출판, 2001 ⇒ 니시카와 나가오 2001.
사카이 나오키ㆍ임지현, 󰡔오만과 편견󰡕, 휴머니스트, 2003 ⇒ 사카이 나오키ㆍ임지현 2003.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 임지현 1999.
임지현, 「‘전지구적 근대성’과 민족주의」, 󰡔역사문제연구󰡕 제 4호, 2000 ⇒ 임지현 2000.
임지현,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창작과 비평󰡕, 117호, 2002년 가을호 ⇒ 임지현 2002.
임지현, 「'대중독재'의 지형도 그리기」, 임지현ㆍ김용우 편, 󰡔대중독재 1: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 휴머니스트, 2005 ⇒ 임지현 2005a.
임지현, 「대중독재테제」, 임지현ㆍ김용우 편, 󰡔대중독재 2: 정치 종교와 헤게모니󰡕, 휴머니스트, 2005 ⇒ 임지현 2005b.]
이는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의가 인종적인 것 혹은 종족적인 것으로부터 공공적인 것 혹은 시민적인 것으로, 영어 식으로 표현한다면 ‘ethnic nationalism’에서 ‘civic nationalism’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믿는다”(같은 책, 8면)는 저자의 입장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좀더 부연 설명한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추동했던 시민적 민족주의 혹은 식민지의 저항 민족주의가 지녔던 혁명적 역동성을 견지하면서,
권력과 같이 짜여진 텍스트로부터 민족주의를 구출해 내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민족주의는 더 이상 체제를 옹호하는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건설을 기약하는 반역의 이데올로기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같은 책, 같은 곳)

그의 입장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보수성 및 특히 진보 운동 진영에 내재하는 보수성에 대한 성찰을 거쳐(임지현 1999, 339면 이하) 인민주권론에 대한 (슈미트식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임지현 2002), 결국 󰡔오만과 편견󰡕부터는 민족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전면적 기각이라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의 한 대목은 그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보여준다. “저는 요즘 나치즘이나 파시즘, 혹은 스탈린주의 등을 ‘대중독재’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데요. ‘대중독재’가 갖는 뚜렷한 특징은 국민국가적 근대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잘 짜인 행정기구, 지방의 개별 촌락 단위까지 침투한 동원의 메커니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장치들을 통해, 대중의 일상적 사고와 생활에 관철되는 지배 헤게모니는 국민국가의 완성도와 정비례하는 것이 아닐까요? (...) 대중의 국민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영국ㆍ미국식의 ‘대중민주주의’와 독일ㆍ이탈리아식의 ‘대중독재’는 그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에 의존하는 국가적 동원체제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국민국가의 근대 권력이 낳은 쌍생아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38-39면―강조는 인용자)[이하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인용문의 강조 표시는 모두 인용자가 한 것이다.]

한문학 전공자인 강명관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본 속성을 “순수성과 우월성”으로 규정한 뒤, “다른 컨텍스트를 무시한 [채―인용자 추가] 오로지 민족의 우월성이란 코드로만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것, 이것이 민족주의의 최대 모순”(강명관 2007, 46면)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국민국가 내지 민족국가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한다. “개인은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민족주의에 의해 한국인으로 제작된 것이다. 모든 국가의 개인은, 태어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국가 권력에 의해 국민으로 제작된다. 민족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동일성을 구성한다. (...) 국가는 이처럼 다양한 기구와 장치를 통해 민족-국민을 제작한다. 민족-국민은 이런 기구의 작동 속에 놓여 있다. 개인의 동의 여부는 물어보지 않는다. 나에게 의견을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아도 태어나는 그 순간 이후 민족-국민으로 제작될 뿐이다.”(같은 책, 46-7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도 그는 동일한 논지를 펴고 있다.[강명관, 「‘내재적 발전론’ 비판 …“국문학사는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근대’ 찾기였다」, 󰡔교수신문󰡕 2007년 10월 1일 참조.]

국문학자인 김철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질서정연한 통사적(統辭的)-통사적(通史的) 서사”(김철 2005, 9면)야말로 좌우 갈등을 넘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에게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매우 절실한 비판적 과제인데,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고 광주의 살륙자들[원문 그대로―인용자]과 싸웠던 이른바 진보적 민중주의”(같은 책, 12면) 역시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러한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이념의 테두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그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던 두 가지 경험을 환기한다. 하나는 시청 앞에 운집한 수십만의 군중과 그들이 내뿜는 열기와 함성에 대한 경험으로, 그는 이 광경에서 “수십만 군중이 하나의 ‘덩어리’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으며, “총칼로 무장한 직접적이고도 물리적인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다.”(같은 책, 11면) 또 하나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중 한 사람(유홍준)이 붉은 악마의 응원에 대해 썼던 한 신문 칼럼의 충격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개인주의자들이어서 건강하고 성실한 공동체 의식을 발견하기 어렵고, 전쟁이라도 나면 전쟁터로 뛰어갈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걱정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붉은 악마’는 그들의 핏속에서 여전히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적 인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논지의 이 칼럼은 그로 하여금 “‘핏속에 흐르는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자’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진보주의자들의 권력 쟁취가 전리품을 놓고 다투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가”(같은 책, 11-12면) 회의하게 만든다.

따라서 김철은 “한국 근대성의 핵심을 반제ㆍ반봉건의 ‘주체적 저항사’로 보는 것”(같은 책, 23면)을 한국 근대사 및 근대문학사의 기본 구도로 파악하면서, 이러한 관점의 한계를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결여에서 찾는다. 다시 말하면 제국주의와 독재에 대한 저항이 지닌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로 인해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24면)이 은폐된다는 점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의 민족ㆍ민중주의적 역사 인식에 담겨 있는 이분법적이고 평면적인 시각, 곧 저항/협력, 아/비아, 민족/반민족, 정통/비정통이 선명하게 대립하는 시각을 넘어서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모드를 통해 한국에서의 모더니티를 해명”(25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식민지 이래 지금까지 한반도 주민의 근대적 삶을 지배해온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메커니즘은 바로 그 강력한 파시즘적 국가주의 그 자체였다.”(26면)

정치학자인 권혁범의 저작은 다소 거친 논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국민국가 비판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책에 담긴 그의 국민국가 비판은 크게 세 가지 논점으로 집약된다(권혁범 2004). 첫째,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이다. 권혁범 역시 김철과 마찬가지로 그가 학생 시기를 보냈던 유신 독재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의 집단적인 거리 응원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대한 불편함을 지적하면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획일적인 국가주의,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군사 독재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국익’과 ‘민족’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문제가 단순히 정치적 독재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둘째,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민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제 ‘국민’이라는 집단 주술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묻는다.”(권혁범 2004, 10면) 왜 국민이 집단주술인가? 그것은 “일단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 의식이 자리 잡을 때 거기서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의 삶과 자유가 피어나긴 어려워”(같은 책, 7면)지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우선 ‘국민’이라는 표현은 “국가의 일부로서의 강제성, 국가가 부과하는 정체성과 의무를 정당화하면서 사회 속의 개인을 조직화된 집단의 부속물로서 자동적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 속에는 이미 국가라는 선험적 실체가 규정하는 집단 동질적 주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는 순간 “이미 복잡한 개별적 차이, 자유, 인권, 다양성은 한 걸음 뒤로 밀려나기 쉽다. 국민주의는 국가를 삶의 주체로 각인시키며 일정한 규범을 모든 개인에게 강제한다.”(같은 책, 8면) 따라서 다양한 개인들의 욕구와 권리,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부터 탈퇴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본성상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기계이기 때문에 인권 보장 및 개인의 해방은 국가에서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국민이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는, 국민이 속하는 국가 자체가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기계이기 때문이다(210면).

따라서 “‘나쁜 국민국가’를 ‘좋은 국민국가’로, ‘문제 있는 국민’을 ‘진정한 국민’으로” 만드는 것, “분단이나 독재가 ‘정상적인 주권 국민국가’를 방해해 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방향으로 나가”(10면)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이제 한국사회에서 ‘국민’이 아니라 주민, 시민, 혹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사회나 국제적 문제를 모색하고 해결하는”(같은 곳)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근대화는 성공적으로 이룩했지만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개인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며, “새로운 개인들의 출현 속에서 사회적 의미와 관계망은 재구성될 것이고 그와 함께 탈근대의 전망이 손에 잡힐 것”(190-91면)이다.

 

3. 국민이라는 괴물? 국민국가 비판의 논점과 그 난점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각자 상이한 분과학문에서 상이한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1) 예속과 배제의 체계로서 국민국가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우선 근대 이후의 국민국가를 예속과 배제의 체계로 간주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을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권혁범이다. 그는 국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공재의 창출과 배분을 주도하는 강제 권력으로 기능하면서 법적ㆍ제도적 일관성을 위해 ‘국민’을 하나의 획일적 기준에 정렬시키고, 독점적 폭력의 위협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다.”(권혁범 2004, 32-3면) 과연 국가라는 것이 이처럼 강제 권력이고, 독점적 폭력의 위협을 통해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며,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일까? 그것은 너무 환원적인 이해 방식이 아닐까? 다소 과도하다 싶은 이러한 규정은, 개인들 및 시민사회에 대한 상관적인 규정을 통해 완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국가의 민주화 역사에서 국민국가의 형성과 팽창은 시민사회에 의한 끊임없는 견제와 확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 사회 계약의 주체가 없는 거대한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가 반인간적ㆍ반개인적이다.”(같은 책, 33면) 따라서 권혁범은 국민국가라는 지배의 장치, 단순한 기계에 대립하거나 그와 맞서는 시민사회 및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전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 개인들 및 시민사회가 국가의 바깥에 있는 것이고 국가와 맞서는 것이라면, 왜 처음부터 개인들은 국가를 형성했을까? 국가는 단순히 개인들을 예속시키고 강제하고 획일화하는 기계 장치임에도, 왜 굳이 사회계약이라는 번거롭고 모험적인 절차를 거쳐서 국가를 구성했을까? 하지만 권혁범 자신이 언급하듯이 근대 국가는 “민주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곧 근대 국가에는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의 확립과 시민권의 확장이 역사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어떻게 예속과 강제, 획일화의 기계로서 근대 국가, 국민국가 속에 민주화의 역사가 기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할까? 그는 “시민사회에 의한 끊임없는 견제와 확장”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 바깥에 위치한 개인들 및 시민사회가 예속과 강제의 장치로서 국가를 견제한 덕분에 국가는 민주화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국가를 유지할 필요 없이, 아예 국가에서 벗어나면 어떨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권혁범은 모호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한편으로 서구적 근대 국가 자체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서구적 근대 국가의 모습이나 근대적인 정체성을 최종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폭력, 차별, 억압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58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위험도 경계한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화가 그 대신 탈국민국가적ㆍ친자본적 소비 주체를 ‘개인’으로서 재생산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중심부의 이익 재생산에 유리한 ‘서구적’ 주체를 전세계에 확산시킨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같은 책, 58-9면)

여기에서 권혁범은 지구화가 보여주는 또 다른 가능성에 기대는 편을 택한다. “지구화는 단순히 자본 간 혹은 자본-노동 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를 융합함으로써 비국민국가적ㆍ다중적 정체성을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문화에 대한 노출과 경험을 통해 다양한 타자를 실제적으로 인지함으로써 ‘차이들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실천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국제 노동력 이동을 통해 ‘국민’과 ‘민족’의 실제적 공간 재배치가 일어나고 운송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가치들 사이의 경쟁이 확대되면서 다중적인 국가 횡단적ㆍ탈민족적 주체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체들 속에서 ‘우리’는 ‘국민’ 혹은 ‘민족’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 ‘생태주의자’, ‘아시아인’, ‘탈국적 코리안’, ‘주변부 노동자’ 혹은 ‘개인’ 등으로 다르게 혹은 중층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를 넘어서 공동체가 생산해 내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 아닌 좀 더 근원적이고 개성적인 ‘나’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그때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같은 책, 59면)

권혁범의 입장은 그가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긍정하든 긍정하지 않든 간에, 국가 바깥의 원초적 개인들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또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지칭했던 원자론적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Charles Taylor, “Atomism”, in Philosophy and the Human Sciences: Philosophical Papers 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이런 관점에서 국가는 최소화될수록 좋은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사라지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는 것은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분쟁으로 인해 360만 명의 인명이 희생당하고 수천 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세계분쟁과 평화운동󰡕, 아르케, 2004 참조. ] 이러한 분쟁의 본질적인 특징은 국가 간 분쟁이라기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 상황에서 주로 발생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첨단 엘리트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범세계적 노마드로, 세계 시민으로 다중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국가의 해체는 죽음이나 재앙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현재의 세계화 국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수많은 ‘국가 없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권혁범과 다소 다른 측면에서 사태를 고찰하기는 하지만, 임지현에게서도 유사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도 국민국가는 기본적으로 억압과 배제의 장치이며, 서구의 국민국가든 동구의 국민국가든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의 국민국가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가령 서유럽이나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보편주의ㆍ인권ㆍ인민주권론에 입각했기 때문에 좋은 내셔널리즘이고, 동유럽이나 주변부의 내셔널리즘은 혈통이나 민족 구성 등 객관적인 것에 기초했기 때문에 배타적인 변종 내셔널리즘이라는, 서구중심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서구의 내셔널리즘이 자유주의 및 인권과 결합된 좋은 내셔널리즘이라는 환상은 이미 반유대주의의 존재 자체에 의해서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 서유럽의 내셔널리즘 역시 보편주의, 인권, 시민의 권리 등을 확장하는 그러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전략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02-03면) 임지현은 “뿐만 아니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국가가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이 책 및 다른 글들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긍정성은 국민국가 및 내셔널리즘의 부정적인 측면에 의해 상쇄되며, 더욱이 그러한 긍정성도 이제 세계화를 맞이하여 역사적으로 시효만료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첫 번째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보편주의ㆍ인권ㆍ인민주권론’의 긍정성을 서구 중심주의라는 틀에 따라 미리 기각하고 있다.[사실 ‘좋은 내셔널리즘’과 ‘배타적인 변종 내셔널리즘’을 이분법적으로 설정해놓고 그것을 서구 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수사법이어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임지현의 대담자인 사카이 나오키가 이러한 임지현의 수사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종종 프랑스 사상의 nation과 독일 사상의 Volk로 대비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를 두 가지 국민사조의 차이로 이해하기보다는 근대국가의 국민이 표현되는 쌍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즉 보편주의적ㆍ인공적인 국민과 특수주의적ㆍ자연적인 민족은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모든 국민국가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12면)]



2) 추상적 권력관

 

두 번째 문제점은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이 추상적 권력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내가 말하는 추상적 권력 개념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러한 관점은 일종의 초월적인 권력의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 명시적으로 권력의 주체라는 표현이 사용되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권력이 어떤 대주체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둘째, 이것은 또한 권력의 동질성을 가정한다. 내가 다루고 있는 필자들 중 누구도 다수의 권력들이 존재한다거나 권력은 자체 내에 애매성이나 양가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권력은, 적어도 근대 이후에는 항상 국민국가의 권력이며, 국민국가의 권력은 그것이 복지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이든,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국가 권력이든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이든 또는 주변주 탈식민지 국가의 권력이든 항상 동일하고 동질적인 속성으로, 곧 내부적인 타자들이나 소수자들을 억압하여 획일적인 국민으로 만들고, 대외적인 타자들을 배척하고 그들과 패권을 다투는 힘으로 나타난다. 셋째, 권력의 부정성이다. 이들에게 권력은 예속시키고 억압하고 강제하고 배제하는 힘일 뿐, 권력은 긍정적인 힘으로, 적어도 자연적인 생산의 역량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권력의 생산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제작’하거나 개인들 내지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 권력이 지니는 유일한 생산성, 긍정성은 좀더 잘 포획하고 좀더 잘 규율하고 좀더 잘 복종시킬 수 있는, 지배의 기술적 생산성이다.

임지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추상적 권력 개념을 잘 드러내준다. “타자를 복종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타자를 복종시키기 위한 매개들이 역사적으로 변할 뿐이다.”(임지현 2002, 186면)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근대 권력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근대 권력의 역사적 특징은 그것이 마치 지배를 욕망하지 않는 듯한 외양을 띤다는 데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사상적 기제는 국가의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권력인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주권론이었다.”(같은 글, 같은 곳)

또한 임지현은 사카이 나오키와의 대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배의 욕망’이나 ‘권력의 욕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비단 유대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독일인 동성연애자나 정신이상자, 선천적 장애인들을 격리시키고 끝내는 처형했던 나치즘의 역사 또한,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 그 경계의 내부에서조차 근대 권력의 욕망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줍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46면)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가 아무런 마찰이나 갈등 없이,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배하지 않는 듯한 외향[원문 그대로―인용자]을 갖추면서 지배를 내면화하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파시즘이라는 것은 근대를 욕망한 권력이 대중민주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욕망한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같은 책, 334면) 이러한 권력에 대한 언급들은 국민국가에 대한 전체주의론적 비판이 추상적 권력관을 전제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3) 복종의 숙명을 짊어진 국민: 주체화 없는 예속화

 

추상적인 권력 개념은 주체화 없는 예속화, 곧 복종의 숙명을 짊어진 국민이라는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마도 니시카와 나가오일 것이다. 그는 국민국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 뒤 [그것들은 (1) 명확한 국경의 존재 (2) 국가주권 (3) 국민 개념의 형성과 국민통합 이데올로기의 지배(내셔널리즘) (4) 이러한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공간을 지배하는 국가장치와 제도 (5) 국제관계다.] “사람은 어떻게 국가로 회수되는가”라는 제목 아래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국가로 포섭되고 예속되는지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국민국가 내에서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역사, 가족과 학교, 과학과 학문, 종교, 텔레비전과 신문 및 각종 정보, 스포츠 등을 통해 국가로 회수될 뿐만 아니라 또한 “생활과 노동의 장을 통해 (...) 질병과 범죄를 통해, 혹은 그러한 것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 국가로 회수”(니시카와 나가오 2002, 306면)된다. 더 나아가 “사람은 반체제운동을 통해 국가로 회수됩니다. 자발적인 반체제운동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 차차 체제화되어 갑니다. 모든 반체제운동은 그것이 국가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삼는 한, 국가권력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즉 또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한 마지막에는 체제화되어 국가로 회수됩니다. (...) 사람은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을 통해서조차 국가로 회수됩니다.”(니시카와 나가오 2001, 307-12면) 그에게는 국민, 또는 국민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은 삶과 존재 그 자체 속에서 이미 국가에 회수되고 있고 또 회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운명은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여성해방운동 같은 인권 운동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국가는 실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인공적 기계이고 그것의 강제력은 압도적이지만, 우리들은 국가로 회수되는 순간에도 반드시 전면적으로 회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같은 책, 314면) 그러나 만약 모든 삶만이 아니라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을 통해서도 국가로 회수될 수밖에 없다면,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국민국가론 비판이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막연히 탈국민국가의 가능성을 추정하거나 전제하기보다는 그것이 국민국가 내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내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니시카와 나가오의 저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국민화를 주체화 없는 예속화의 과정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전적인 예속과 포섭(‘회수’)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사실 불가능한 설명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임지현에게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알튀세르의 호명론을 통해 국민국가는 예속적인 주체들을 호명하고 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알튀세르를 패러디하면, 민족/국민의 담론은 결국 개별화된 시민사회의 성원들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담론화 전략인 것이다. 그 전략의 목표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여 자율적으로 국가의 규칙과 통제에 따르는 국민적 주체를 생산하는 데 있다. (...)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시민사회의 개개인이 민족/국민으로 호명될 때, 그것은 사실상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며 내면화된 규율과 가치를 통해 합의와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국가권력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임지현 2002, 191면) 국민국가의 예속화 메커니즘의 무서움은 그것이 단순히 강제나 억압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국민국가의 권력에 복종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개인이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가 자발적이면 자발적일수록 그는 더욱 더 국민국가의 권력에 속박되며, 국민국가의 권력은 더욱 더 강고해지고 확장된다. 그야말로 악마적인 힘이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호명론에 대한 편향적 이해는 차치한다 하더라도[임지현은 이 대목에서 알튀세르를 원용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점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오독이고 그릇된 적용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첫째, 임지현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은 알튀세르의 호명론은 자발적 예속에 대한 설명이나 심지어 정당화가 아니라, 지배자의 관점에서 본, 이데올로기 내부의 관점에서 본 예속의 메커니즘에 대한 기술(記述)이라는 점이다.(이 점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옮김,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중 391-92면 참조) 둘째,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예속의 불가피성 내지 지배의 전일성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부기」에서 이데올로기론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사회적 적대와 갈등의 관점에서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계급들의 관점에서만, 다시 말해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만 하나의 사회구성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들을 설명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특히 그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우리는 AIE들 내에서 구현되고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L. Althusser,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410면―강조는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복수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을 일방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전달하고 주입하는 장치들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투쟁을 벌이는 장소나 쟁점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호명론을 전일적인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론적 관점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모든 개개인이 항상 이미 국민국가에 호명되고 포섭되어 있다면,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현재 국민국가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국민국가는 완벽한 통제와 예속화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까? 특히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주장처럼 “국민국가들은 사태의 진행과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세계화의 힘들에 대해 세계의 운명 속에서 방향을 정하고 모든 종류의 공포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넘겨주었”으며 이제 “개인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누구도, 또는 거의 누구도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또는 그녀에게 중요성을 지닌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누구도 또는 거의 누구도 투표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삶의 조건 및 따라서 세계의 조건을 의미 있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Zygmunt Bauman, “Freedom From, In and Through the State: T.H. Marshall's Trinity of Rights Revisited”, Theoria, no. 108, December 2005, p. 17.]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지현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설명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임지현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의도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대중독재󰡕 2권 말미에 첨부한 「대중독재테제」에서 자신의 논리가 지닌 위험을 경계하면서, 대중독재 패러다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이라면, 대중독재가 반대나 저항을 위한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봉합된 정치 기계 혹은 괴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 동의와 합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명백한 테러 현상을 무시하도록 조장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임지현 2005b, 612면) 그러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한 해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동의 자체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면 그러한 오해도 불식될 것이다. 대중독재에서 발견되는 동의는 내면화된 강제, 강제된 동의, 수동적 동의, 타협적 순응, 무의식적 순응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또 체제에 포섭된 것처럼 보이는 파시즘의 일상 세계와 동의 구조 속에도 다양한 저항의 지점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같은 글, 612-13면)
임지현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자신의 논리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인 또는 자가당착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는 얼마간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 또는 대중독재론에서 어떻게 “다양한 저항의 지점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대자들의 비판을 의식해 내 이론은 이런 것도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타당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작업은 자신의 의도의 순수성(곧 국민국가론이나 대중독재론은 반대나 저항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는 데 머물러 있을 뿐, 과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논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대중독재’는 왜곡된 근대화 혹은 전근대의 잔재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 국가 체제의 성과를 역사적으로 전유한 근대 독재인 것”(같은 글, 601면)이며 “근대의 정치적 주체는 기실 개개인의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 ‘통제되고 유도된 대중화’ 과정의 산물인 것”(같은 글, 602면)이라고 주장한 가운데, 어떻게 다른 식의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임지현 및 기타 다른 논자들이 국민국가론이 지금까지 전제해온 인식론적 틀이나 논리 구조에서는 반대나 저항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지극히 어려울뿐더러, 그러한 틀이나 논리를 전제하는 한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생산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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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본주의의 역사, 국민국가의 역사 부재

 

이 점은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 따라서 국가 형태의 획일화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대중과 계급의 변증법 사상에 관해 고찰하면서 마르크스 및 그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중요한 한계 중 하나로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를 사고하고 분석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지적한 바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2007, 304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는 근원적으로 역사적인 생산양식이다. 곧 그것은 봉건제를 대체하면서 시작한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인 생산양식이다.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근본적인 한계 중 하나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제도들 및 범주들이 마치 초역사적인 것인 양 간주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성은 인식했지만, 곧 그것이 한시적인 생산양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본주의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 따라서 자본-임노동 관계는 자본주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상이한 형태들 속에서 표현된다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8세기 말의 자본주의와 19세기 말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또 20세기 말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계급투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만 작용한다. 곧 계급투쟁이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계속 동일하게 그대로 존속한다.”[발리바르, 같은 책, 319면―번역은 약간 수정.]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자들에게 공통적인 문제점 역시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에게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이래 태동한 국민국가는 계속 국민국가였을 뿐 아무런 내재적인 형태 변화나 구조 변화도 겪지 않는다. 국민국가는 내부의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과 외부의 타자들에 대한 배제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으로 규정되며, 18세기 말의 국민국가든 20세기 중엽의 국민국가든 아니면 20세기 말~21세기 초의 국민국가든 간에, 그것이 소멸하지 않는 한 국민국가는 늘 억압과 배제의 권력 메커니즘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임지현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 “내부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억압 과정”(임지현ㆍ사카이 나오키 2003, 47면)이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이나 나치즘이 모두 동일한 억압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같은 책, 47-8면 참조) 더 나아가 대개 민주주의의 확대의 징표이자 근거로 간주되는 보통선거권과 여성참정권 획득 역시 그가 보기에는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의 강화를 나타내는 징표일 뿐이다. “보통선거권과 여성참정권 획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여성이 ‘국민’ 속에 편입되었을 때,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는 사실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정치적 민주화는 근대 권력의 정당화 또는 합리화 가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국민국가에 포박된 근대 민주주의의 역설이라 하겠다.”(임지현 2002, 191면) 국민국가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정치적 민주화는 근대 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따라서 국민국가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그는 ‘대중독재’ 내지 ‘국민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국민국가의 동일한 본성과 토대를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의 핵심 기준은 자발적 동원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35-6면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스탈린주의, 군사 독재 같은―옮긴이] ‘대중독재’와 [서유럽의―옮긴이] ‘대중민주주의’는 그 형식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양자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 또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 속에 대중을 포섭한다는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단지 그들이 놓인 역사적 조건의 차이 때문에 달랐을 뿐입니다. (...) 양자는 모두 권력의 지배욕망을 감추고 대중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한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욕망을 만들어내고 유도하는 근대적 기제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86면)

한편 사카이 나오키는 1930년대 이래 근대 국민국가가 전환을 겪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총력전 체제’라는 명칭을 통해 이러한 전환을 획일화한다. “총력전 체제란 합중국의 뉴딜 정책, 일본의 만주국 건설, 소련에서 시행된 일련의 5개년 계획, 독일의 강제적 균질화 등을 모두 시야에 넣은, 새롭고도 광범위한 사회 편제를 가리킵니다. 총력전체제의 특징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산출한 계급 분리나, 차별받는 주변집단을 국민국가에 최대한 통합시켜, 국가 전체가 그것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자산으로 가장 유효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체제라는 점입니다. (...) 이런 제도가 총력전이 끝난 1945년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는데요, 그러다가 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커다란 전환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총력전 체제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독립법인화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신자유주의의 주장이 맹위를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 하지만 총력전 체제의 유제는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국민교육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332-34면)

사카이 나오키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역사,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피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총력전 체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이러한 복지 정책 또는 생명정치의 과정은 국민국가에 대한 포섭의 과정이고 각각의 개인들이 국민으로서 국민국가의 규범을 좀더 내면화하고 국민국가에 좀더 강하게 의존하게 되는 과정으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총력전 체제’로서의 사회 정책, 생명정치는 천황제 아래의 일본이나 나치즘 체제의 독일, 스탈린 치하의 소련, 루즈벨트 시절의 미국 등을 가릴 것 없이 본질상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관점의 문제 이전에 복잡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는 관점이 아닐 수 없다.[반면 최근 출간된 한 저서에서 볼프강 쉬벨부시는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미국의 뉴딜 정책의 유사성 및 그것이 20세기에 남긴 유산을 꼼꼼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임지현이나 사카이 나오키와 달리 “공통성의 영역을 찾는 일은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비교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볼프강 쉬벨부시,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차문석 옮김, 지식의풍경, 2009, 40-1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악마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1930년대에 이들 양 체제의 대중적 인기는 억압성이 아니라 평등성에 기인했던 바가 더 컸다는 사실”(34면)을 지적한다.]

이들의 관점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자기 정당화에 대한 비판의 시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은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와 달리,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이나 주변부의 개발도상국가들과 달리, 자신들은 선진화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개인의 인권과 자유, 평등이 구현되어 있는 국가로 자처하곤 한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비판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 역시 대중들의 국민화 및 자발적 동원에 의존해 있고, 그에 기반하여 개인들을 억압하고 또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전체주의 국가들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결국 모든 민주주의는 지배자의 정당화 외피에 불과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참여와 헌신은 결국 지배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견고화한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서유럽 자유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가상을 비판하고 분쇄하기 위해 굳이 모든 국민국가는 결국 ‘대중독재’, ‘국민독재’일 뿐이라는, 곧 전체주의 국가들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논법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한 극단적이고 얼마간 단순화된 논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서유럽 국가들(및 근대 국민국가 일반)의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해명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에티엔 발리바르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와 같은 소위 ‘복지국가’ 또는 발리바르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산업적이고 외회정치적이며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사회들(프랑스 같은)이 경험했던 상대적인 사회적 평형이 파시즘과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한 사회적 평형이 불평등도 배제도 동원과 정상화의 강제도 모면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 É. Balibar, Droit de cité, p. 8.]

 

4. 국민국가의 내재적 비판을 위하여

 

결국 국민국가에 대한 이들의 대안은 국가 없는 개인, 국가 없는 사회가 가능하며, 또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권혁범이 국가 바깥에 있는 개인들을 전제하고, “개인의 해방”을 “인간의 보편적 욕구”(권혁범 2004, 190면)라고 주장할 때 이러한 사정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니시카와 나가오가 사람들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 모든 측면이 국가로 회수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국가는 붕괴되어야 할 것, 뛰어 넘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해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니시카와 나가오 2001, 315면)하다고 말할 때에도 이 점은 명백하다.

임지현의 경우 이런 관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임지현은 네그리ㆍ하트의 제국론과 다중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소중히 하면서 국민주권의 주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서 네그리ㆍ하트의 ‘탈근대적 공화주의’가 주목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임지현 2002, 191-92면) 그것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한 ‘포스트모던 공화주의’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된 셈입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285면)], 국민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안의 가능성을 피력할 때 그의 관점 역시 권혁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관계도 자기 자신의 오류에 열려 있고 따라서 다른 번역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솔리대러티(solidarity)보다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 더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21세기의 연대 형태는, 일종의 형용모순이겠지만, ‘무정부주의적 연대’가 특정한 해석에 기초한 자기 폐쇄적인 연대를 대체하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요?”(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435면) 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잘 지적한 것처럼[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4장 참조.],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것은 19세기에 생시몽이 제창한 이른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기본 관념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전망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하듯이 “A[국가사회주의―인용자]의 소멸과 더불어 D[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도 쇠퇴했다”면[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8, 19면.], 어떻게 21세기 연대 형태가 ‘무정부주의적 연대’ 또는 ‘어소시에이션’이 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가라타니 고진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그러나 이미 서술한 것처럼 국가사회주의가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도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셔니즘)가 단순히 이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본, 네이션,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소시에이셔니즘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거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사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령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가 부활한다고 해도 자본, 네이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27면) 가라타니 고진 자신이 제안하는 대안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

이들의 작업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국민국가의 역사적ㆍ내생적 한계들을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이론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저항과 대안 모색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 것 같다. 국민국가가 괴물처럼 가공할 만한 지배의 장치, 기계로 묘사되면 될수록, 국민국가가 모든 개인들을 포섭해서 정신만이 아니라 신체에도 지배의 흔적을 새겨 넣고 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강화한다고 간주하면 할수록, 또한 근대의 세계사 전체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의 확산과 강화의 역사로 간주되면 될수록,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악마적인 힘을 가진 국민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지, 어떻게 탈국민국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이 모두 ‘개인의 해방’이나 ‘무정부주의적 연대’, ‘탈국민화, 비국민화’ 같이 막연한 전망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작업은 비판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한 번의 작업에서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으며 대안의 모색은 차후의 작업에서 기대해봐도 좋지 않은가라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및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 이들과 같은 문제설정 위에서 전개되는 한, 오히려 그것에 대한 유효한 이론적ㆍ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점에 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이 글은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은 대상이 된 필자들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특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저항, 소수자와 이주자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 등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글은 이를 테면 동지적인 비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만큼 이들의 작업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과 대안의 모색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 또한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사항들을 지적해보고 싶다.

 

1)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

 

첫째,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자들은 민족주의 및 국민국가를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지배와 예속화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배와 예속화를 강제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임지현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일종의 자발적 예속으로 이해하든 간에(임지현 2005a, 19면), 이러한 관점은 항상 이데올로기를 지배자에 의한 피지배자의 지배와 예속화의 수단 내지 도구로 이해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은 피지배 계급 내지 대중은 존재론적ㆍ인간학적 또는 정치적으로 항상 열등하고 수동적이라는 생각이다.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대중들은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우매하게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술책에 말려들어간다는 식의 가치 판단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피지배 대중들이 자주 반역을 하고 또 어떤 경우들에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 및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한다는 점이다. 인권선언을 통해 인권과 시민권을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초로 확립한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19세기의 노동운동과 20세기의 여성운동이 그랬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인권운동이 그랬다. 지배 세력에 의한 기만과 조작의 시도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대중들의 능동적인 저항과 반역의 시도들(적어도 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자크 데리다는 각자 최근 저작에서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글에서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적어도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83-84면―강조는 발리바르.]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러한 상상계를 자기 나름대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유령성, 곧 이데올로기를 모든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종교 안에는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322-24면 참조.]이라고 부른 것은 이처럼 계시 종교나 이데올로기 일반 안에 존재하는,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인 해방의 열망, 해방의 경험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주장하듯이 이데올로기에서 피지배자 또는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을 택할 경우에만 우리는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의 강고한 지배 구조를 해명한다는 구실 아래 국민국가 전체를 전체주의로 획일화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권력에 대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

 

둘째, 푸코가 강조했듯이 권력을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또는 포획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권력에 대해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특히 임지현은 그가 주창하는 대중독재론의 이론적 전거로 푸코를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음에도(임지현 2005b, 605-06면), 푸코가 여러 차례에 걸쳐 역설한 권력의 긍정성, 생산성, 다양성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권력관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대중독재론이나 국민독재론이 푸코나 알튀세르에 관한 상당히 피상적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짐작케 해준다.

하지만 푸코는 그의 관점과 달리 규율권력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감시와 처벌󰡕(1975) 및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197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97) 같은 저작에서 지속적으로 권력을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며,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다원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을 역설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푸코의 언급은 임지현 식의 권력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니까 개인들을 복종시키고 억압하는 권력이 적용되는, 또 타격을 가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핵이나 최초의 원자, 다수의 불활성 물질 등으로 개인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 권력을 전면적이고 동질적인 지배의 현상으로 간주하지 말 것이다.”[미셸 푸코,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 1997);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8, 48면―번역은 약간 수정.]

푸코가 권력을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권력을 단순히 지배, 그것도 전일적 지배와 동일시하거나 권력에 의해 작동되는 주체화 양식을 철저한 예속화 양식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82년에 쓴 「주체와 권력」이라는 글에서 그 당시까지 전개된 자신의 작업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자신의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예속화(assujettissement 또는 sujétion) 양식과 주체화(subjectivation) 양식의 갈등적인 과정에서 산출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를 변형시켜나가는 주체에 대한 탐구가 자신의 주요한 관심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푸코는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 특히 󰡔감시와 처벌󰡕이나 󰡔비정상인들󰡕에서 근대 규율 권력이 어떻게 개인 주체들을 예속적 주체로 생산해내는지 분석한 반면,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이 도입된 이후 말년의 몇몇 글에서는 예속적 주체들, 규율된 주체들이 생산되는 예속화 양식과 구별되는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우리가 권력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에만, 권력의 기술에 따라 예속적인 주체가 산출되는 것과 동시에 또는 그 이전에, 권력의 작용 속에는 항상 이미 저항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예속적인 주체는 항상 이미 그 예속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사고할 수 있다. 곧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론적인 것이며, “관계로서의 권력은, 고착된 상태의 권력 관계, 곧 지배와 구별되며, 그 자체 안에 항상 저항과 자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론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예속과 지배가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들로 구성”[진태원, 「생명정치의 탄생: 미셸 푸코와 생명권력의 문제」, 󰡔문학과 사회󰡕 제 75집, 2006년 가을호, 235면―강조는 원문.]되는 것이다.

 

3) 국민국가의 모순들이라는 문제설정

 

셋째,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을 이해하고 또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소한 지적처럼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전개되어 왔으며,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한 분석에서 그러한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인식은 당연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표현으로 말하려는 것은 국민국가의 역사를 내적으로 규정해왔던 모순들이 무엇이고 그러한 모순들의 전개과정에 의해 국민국가의 역사적 형태들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라는 문제다.

내가 본문에서 다룬 필자들은 모두 국민국가를 일방적인 억압과 배제, 예속의 체계로 이해할 뿐, 이를테면 국민국가가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경향과 지배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그것과 반대되는 경향의 모순적인 갈등의 산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들의 비판과 달리 근대 국민국가는 전체주의적 국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국민 모두를 예속시키고 외국인을 비롯한 타자들은 항상 배격하는 억압적이고 패권적인 국가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국민국가들이 그러한 문제점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 혁명의 기본 이념이 담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보여주듯이,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이념들은 역사적으로 헌법을 통해, 각종의 사회적 제도와 장치들을 통해 구현되고 확장되어 왔다. 이를 끊임없이 잠식하고 약화시키는 반경향, 곧 시민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축소하거나 박탈하고 억압적이고 치안적인 장치들을 강화하는 경향도 줄곧 동반되어 왔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반경향들은 국민 국가 속에 구조적으로 기입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유일한 경향은 아니었으며, 그것에 대한 완강하고 지속적인 저항과 투쟁을 모면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저항과 투쟁이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성취된 역사적 성과들이 근대 국민 국가들의 헌정 자체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이 점에 관해서는 Donald Sassoon,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NY: The New Press, 1998) 중 6장 참조. 발리바르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러한 모순적인 역사적 전개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국민국가 대신, 특히 흔히 사용되는 복지국가나 사회국가라는 용어 대신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4장 및 Droit de cité, pp. 105 이하를 각각 참조하라. ]

또한 ‘국민’은 강제적인 억압 권력으로서의, 개인들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포획하고 복종시키는 예속 권력으로서의 국민 국가에 사로잡힌 신민들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국민국가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더욱 더 국가를 벗어난 개인이라는 것은 성립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명관이 말하듯 국민국가가 개인들을 국민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국민국가는(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개인들 자체를 제작한다(이런 표현을 개인들은 자연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인위적 존재자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내가 알기로 ‘제작한다’(fabriquer)는 표현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규율권력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푸코는 정확히 ‘개인들을 국민으로 제작한다’고 하지 않고 “개인을 제작한다”(Michel Foucault,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225면)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만 󰡔감시와 처벌󰡕이 지닌 전복적인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국민국가에 대해 푸코의 표현을 가져다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푸코는 국민국가가 개인을 제작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규율권력이 제작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푸코 자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표현일 수 있다.] 국민 이전에 독립적인 개인들이 존재한다고, 따라서 국가 외부에, 국가와 독립하여 개인들이 일종의 자연 상태 속에서 성립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개연성이 적은 주장이다.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제작되는 것 또는 형성되는 것 이외에 달리 존재하거나 성립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은 철저히 종속적이고 예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권력을 (의지와 욕망을 가진) 초월적인 대주체의 권력으로 가정하는 것이며, 권력의 작용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권력의 메커니즘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목적론적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개인들이 국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는 개인들은 국가를 통해 성립하고 국가를 통해 생존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지그문트 바우만은 T. H. 마샬(Marshall)에 대한 재독해를 통해 이 점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Z. Bauman, “Freedom From, In and Through the State”, op. cit. 참조.] 이를 천부적 자연권으로서의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및 (일종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사람은 바로 한나 아렌트였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복잡다단하고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한나 아렌트는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정세, 특히 유럽에서 파시즘이 출현하던 위기의 시대에 자유주의 나아가 근대 정치-이데올로기 전반이 근본적으로 무력했던 이유를 성찰하면서 시민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아렌트는 특히 이 시기에 발생한 거대한 ‘무국적’(stateless) 난민들의 비참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근대 국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인 인권 이념이 근본적으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근대적 인권 이념에 따르면 실정적이고 특수한 시민권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제도화이며, 이러한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제도에 대해 보편적인 정당성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인권은 시민권보다 더 광범위하고 또 그로부터 독립적이다. 이 때문에 인권은 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아렌트가 볼 때 사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볼 때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었다. 왜냐하면 인권이 시민권을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이 인권을 기초하며, 따라서 국가나 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자연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제시하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반박이며 그것의 전도라고 할 수 있다.[아렌트의 이 개념이 지닌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함의 및 그것이 미친 영향에 대해 여기서는 길게 논의하기 어렵다. 이 개념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저작들을 참조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해석으로는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칸트주의적 해석으로는 Seyla Benhabib,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4, 반폭력의 정치라는 관점에서의 해석으로는 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중 특히 7장, 민주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으로는 Jacques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를 각각 참조.]

따라서 개인들이 국가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자유를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근원적으로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들의 존재 그 자체, 그리고 개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는 역사적으로 가변적이고 탄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의 개인과 18세기의 개인, 또 오늘날의 개인은 동일한 개인이 아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서유럽의 발전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개인들과 아프리카 및 다른 저발전 국가들에서 폭력과 기아, 자연 재해를 겪으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가는 사람들은 똑같은 개인,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서구 중심주의 내지 유럽 중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들의 존재와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만큼 그러한 불평등과 그러한 비동일성은 현재와 장래에 얼마든지 해소되거나 적어도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역사적 한계들을 비판하기 위해 국민국가를 획일적인, 억압적ㆍ배제적 권력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으며, 개인들이 국가 곧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실존한다는 것을 예속의 숙명적 필연성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또 국민국가의 위기를 마침내 절대 악으로부터, 악마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종말론적인 약속의 시간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국민국가가 역사적 존재이고 국민 역시 역사적 존재인 한에서, 국민국가와 국민은 전환 가능하며 그것도 내재적인 방식으로 전환 가능하다. 그러한 전환이 반드시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모색하고 노력할 수는 있다.

결국 국민국가의 성격에 대한 좀더 균형 잡힌 인식을 위해서는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국가를 전일적이고 전능한 예속적ㆍ배제적인 권력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또 그러한 역사를 가능케 하는 국민국가에 고유한 내재적 갈등과 모순들이라는 관점에서 국민국가를 파악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순과 갈등의 역사를 피지배자, 대중, 인민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국민국가의 역사 및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좀더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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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9-12-14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almas님..이런 야심한 시각까지...;;;; 그나저나 나중에 다시 읽어보겠슴다. 지금은 몽롱~

balmas 2009-12-14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 오랜만이시네요.^^; 저는 늘 이맘 때까지 있다가 잔답니다.^^;;

마일드 2009-12-2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거론하신 분들의 주장에 "끝내" 공감할 수 없는 저로서는,
중요한 점들을 잘 지적하셨다고 생각하는데, 댓글로 일일이 밝히긴 곤란하네요.
한 가지 주요하게 말씀 나눠보고 싶은 건, 제 생각에 근대 국민국가 비판자들에게는
개인과 사회와 무리(공동체)라는 세 가지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개인(개체)과 사회는 동일한 것의 양면으로 함께 탄생된 것인데 그것을 마치 대립시키
는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개인이 국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와지자는 발상에는
그런 착오가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가 개인을 획일화된 주체위치로 결정짓고 그 안에 가둬버린 식의 이미지...
개체는 출발점도 아니고 목표도 아닌 거 같아요. 현실 속에서는
다양한 수준에서 구성될 수 있는 무리 뿐이 아닐까요?
프랑스 혁명 등에서 주장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란, 국민국가의 일방적 권력 행사에 대한
대항이 아니라, 다양한 힘들의 대립 속에서 생산된 것이라 보이구요(긍정적인 면이 많은 방식으로
생산된).
권력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도 많이 공감하는데요, 국민국가 비판자들은
개인을 권력의 억압 대상이라고 주로 생각하지만(최대치가 자발적 예속이죠),
푸코도 <감시와 처벌>에서 조금 약하게나마 표현했듯이, 개체는 규율권력의 생산물로서
상시적인 감시의 대상이자 상시적인 감시의 주체입니다.
그것은 억압이기도 하지만 힘을 행사하는 기쁨이기도 하죠.
이렇게 생각한다면 국가로부터 개인이 벗어나려는 기획은 근본적으로는 착오가 아닐까 싶어요.
말씀하신대로 근대권력을 국가 혹은 국가적 방식 속에 실재하는 구체적인 사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로부터의 해방을 자꾸 상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권력의 대상이자 권력의 주체인 존재가 어떻게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어떤 실체로 상정되는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새로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요?
근대국가 비판자들이 상상하는 개인의 자유라는 게, 푸코도 말했듯이,
사회계약론이라는 환상의 결과 이전에 실제로 규율권력이 생산하는 거 아닙니까?
요컨대, 근대국가 비판자들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해방이라고 하는 개체환상
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개체-사회'라는 근대의 발명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의 치열한 삶 속에서
사회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지만,
그중 개체를 따로 떼어내서 근대국가로부터의 해방의 이미지로 만들어버리면 나쁘게 되는 거겠죠?)
계속 건필하시기 바라구요, 개체(혹은 개체환상)와 다양한 수준의 무리(공동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언젠가 표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9-12-22 15:4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문제는 근대 자체라고 봅니다. 그 근대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 근대민족국가에 대해 물고 늘어져야 합니다. 어쩌면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개인 자체의 파괴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죠. 근대를 뭘로 보든 근대 아닌 어떤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시진 않겠죠.

balmas 2009-12-22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감사합니다. 개체와 공동체 문제에 대해서는 조만간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죠.^^

2009-12-2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답을 들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질문이나 던져 봅니다. 어차피 이런 문제를 검토할 바에야 포스트식민주의에서 비판하는 근대민족국가나 민족주의 나아가서 근대와 식민주의의 불가분성에 대한 생각도 밝히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국가 이후인 정도가 아니라 근대 이후를 꿈꾸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저 위에서 거론한 사람들보다 더 과격하지 않습니까? 나아가서 치아파스 봉기와 관련 있는 마르코스 같은 사람은 그렇다면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많은 사람들을 거론하셨지만 좁게 보면 임지현 씨를 주요 타켓으로 삼으신 걸로 보이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임지현 씨 얘기에 관심이 많은지 그거 자체도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임지현 씨 얘기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거든요. 대중독재나 독재대중이나 그게 그거란 말입니다. 보아 하니 독일 일상사를 엉뚱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데 독일 일상사의 문제의식은 임지현 씨가 말하는 그런 것과는 관계 없습니다. 그 독일 일상사 자체도 나름의 문제를 지니고 있구요. 여기서 자세히 얘기하기는 힘들겠죠.

아무래도 이건 한국 사회의 보수화 현상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임지현 씨 얘기를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어쩌면 발마스 님도 포함)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맥락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얘기를 단순하다고 하시는 분이 임지현 씨 얘기는 왜 이렇게 진지하게 다루시나요? 임지현 씨가 더 단순합니다. 아닌가요? 인신공격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임지현 씨 얘기는 신경쓸 필요가 없는 얘기입니다. 별로 배울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포스트식민주의자들의 근대민족국가 비판에 대한 생각도 가능하다면 듣고 싶습니다. 무례하게 들리시겠지만 돌려서 얘기하는 재주가 없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balmas 2009-12-23 04:03   좋아요 0 | URL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하셨는데, 답글은 그냥 간단히 달겠습니다. 사실 뭐 댓글로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겠지요. 첫째, 국민국가나 민족주의에 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논의는 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하셨는데, 그런 논의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마 다른 논문에서 다뤄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논의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임지현 선생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냐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임지현 선생이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봅니다. 물론 논의 방식이나 결론 또는 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점들이 많고, 그래서 이번 글을 썼지만, 아무튼 그의 문제제기는 국민국가에 관한 이야기이든, 권력 일반에 관한 이야기이든, 아니면 전체주의나 폭력론에 관한 논의이든 또는 한국사에 관한 문제이든 간에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논점들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의 논점이나 전제,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욱 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