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민족문화연구]에 실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최근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적잖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국민국가론에 관해 비판적으로 다룬 글입니다. 원래는 비판적인 고찰을 담은 1부와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2부로 이루어진 글인데, 이번 발표한 글에서는 1부만 수록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2부는 따로 발표할 생각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인용하거나 비판적인 논의를 하실 분들은 12월 말에 인터넷으로 발행될
[민족문화연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민족문화연구]는 아래 사이트로 가시면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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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09년 5월 1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단 제62차 월요모임에서 처음 발표된 이 글은 원래의 발표문의 제1부에 해당하는 글이며, 민족문화연구에 투고하기 위해 상당한 수정과 첨삭을 거쳤다. 국민국가에 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는 제2부는 독립된 논문으로 추후 발표될 것이다. 월요모임 발표 당시 여러 가지 좋은 논평을 해준 동료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세 명의 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꼼꼼하고 건설적인 논평 덕분에 보잘 것 없는 논문을 훨씬 더 말끔하게 정리하고 보완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 분들의 모든 지적을 수용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시야와 능력의 한계 때문이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에게 있음을 밝혀둔다.]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외의 몇몇 필자들이 국민국가라는 주제에 관해 보여주는 이론적ㆍ정치적 문제점에 대해 몇 가지 비판적 질문들을 던져 보고,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제안해보려고 한다. 내가 염두에 둔 필자들은 임지현, 권혁범, 김철, 니시카와 나가오 내지 사카이 나오키 같은 학자들이다.[이하에서 호칭은 모두 생략한다.] 이들은 이론적으로 의미 있는 문제제기와 실천적인 지향으로 인해 국내에서 상당한 공감과 더불어 이론적 영향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작업에 대해 한편으로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적지 않은 불편함과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공감하는 이유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국내의 뿌리 깊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그것이 정치적ㆍ문화적ㆍ일상적인 측면에서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에 대해 면밀한 비판과 더불어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진보 세력에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지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비판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가 그들의 작업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민족주의 및 그것과 긴밀하게 결부된 군사독재와 보수주의에 대한 이들의 비판적 성찰이, 결국에는 국민 자체, 국민 국가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기각과 부정을 낳기 때문이다. 뒤에서 좀더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들은 처음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특히 민족주의의 부정적인 측면들(종족적ㆍ배타적ㆍ획일적ㆍ가부장적 측면들)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다가 그것을 넘어서 민족 내지 국민과 더불어 국민국가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그것은 이들이 단순히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근대 정치의 병리적 측면들 전체가 국민과 국민국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맞아 근대의 지배적인 정치형태로서 국민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든가 국민국가가 종언을 맞이했다는 명제는 이제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물론 이것은 그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 및 국민국가의 진보적 성격을 비가역적인 역사적 성취로 간주하는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국민 내지 국민국가를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맞게 개조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며,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전면적으로 기각하는 것은 오히려 근대의 정치적 성취를 훼손하거나 상실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는 저작으로는 Rogers Brubaker, “The Manichean Myth: Rethinking the Distinction Between 'Civic' and 'Ethnic' Nationalism”, in Hanspeter Kriesi et al., ed., Nation and National Identity: The European Experience in Perspective (Chur: Rügger, 1999); “In the Name of the Nation: Reflections on Nationalism and Patriotism”, Citizenship Studies 8-2, 2004; Dominique Schnapper, Qu'est-ce que la citoyenneté? (Paris: Gallimard, 2000); La Communauté des citoyens (Paris: Gallimard, 2003) 등을 참조. 필자는 이들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이들의 입장이 자칫 국민이나 국민국가를 초역사적인 정치적 준거(또는 규범적 모델)로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쉬나페는 ‘국민nation’이라는 모델은 포기할 수 없는 보편적 규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좋은 논의로는 Étienne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Paris: La Découverte, 2001) 4장 및 Droit de cité (Paris: PUF, 2002) 9장 참조.] 따라서 국민이나 국민국가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이들의 논의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국민이나 국민국가라는 개념들이 어떤 점에서 비판을 받거나 거부되어야 하며, 또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대안은 어떤 것인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일이다. 내가 이들의 작업에 거리감이나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들의 논의가 그 선명한 주장만큼 충실한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때로는 자가당착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자가당착이라는 강한 표현을 쓴 이유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및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독재 권력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것들에 대한 좀더 민주주의적이고 윤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려는 이들의 실천적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판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논거들 자체가 오히려 그러한 실천적 문제의식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이 제기하는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들은 근대 국민국가가 드러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를 가능케 했던 이념적ㆍ제도적ㆍ운동적인 기반들에 대한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국민국가를 억압과 배제의 동질적인 권력 메커니즘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국민은 오직 복종과 예속만 수행할 뿐인 철저하게 수동적인 또는 (이들 중 몇몇 사람들이 자발적인 예속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예속적인 주체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복합성과 양가성을 드러내는 좋은 관점이 아닐뿐더러, 그것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노력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처럼 국민국가를 획일화된 국가, 전체주의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민국가에 대해 전면적인 예속이냐 아니면 전면적인 거부냐 하는 이분법적 인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민국가를 내재적으로 비판ㆍ개조할 수 있는 길, 또는 국민국가의 내재적 전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며, 의도와 달리 국민국가를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닌 악마적인 권력체로, 빅브라더의 공간으로 신화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필자들의 국민국가 비판에 대해 검토해보고 그러한 비판들에 대한 한 가지 대안을 모색해보려는 시도다. 이를 위해 우리는 2절에서 먼저 이 글이 비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필자들의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추출해볼 것이다. 그 다음 3절에서는 이들의 논의를 네 가지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것이다. 마지막 4절에서는 이들의 작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이론적 전제들을 제시해볼 것이다. 이 글은 주로 문헌 해석과 비평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것은 이 글이 제한된 지면에서 다수의 필자들을 다루고 있고 또 그들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논점을 될 수 있는 한 상세히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이러한 방법이 얼마간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글은 학제적인 관점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겨냥하고 있지 대안적인 국민국가론을 제시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겠다. 그동안 이들의 작업이 국내의 인문사회과학계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비판적인 작업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국민국가가 왜 문제인가?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의 문제의식
내가 이 글에서 비판적으로 다뤄보려는 필자들은 한국과 일본의 비판적 지식인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전공분야와 학문적ㆍ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소의 견해 차이는 보여주지만, 공통적인 출발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팽배해 있는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 식민지와 제국의 관계에 있었고, 그에 따라 상이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거쳐 왔음에도 공통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탈냉전 이후 세계화가 전개되는 정세에서도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문제의식이다. 더욱이 이러한 민족주의적 지향은 탈냉전 이후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전략과 결부되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한국과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긴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람들의 화해와 평화로운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에 있다는 지극히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나 가상적인 허위의식, 따라서 지적인 깨우침을 통해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는 민족 내지 국민의 존재 그 자체를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이데올로기 체계이며, 따라서 국민국가가 존속하는 한 민족주의는 사라질 수 없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자신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억압과 배제의 속성을 유지하고 확장해가며, 역으로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제도들을 통해 끊임없이 개인들을 국민들로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거부 및 그것에 대한 대안의 모색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이 글에서 다룰 필자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및 동유럽의 민족 문제에 관한 전문 연구자에서 출발해서 연구 영역을 점차 확장해온 임지현이 최근 몇몇 글과 저서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이러한 국민국가 비판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라는 저서에서는 민족주의를 “고정 불변의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임지현 1999, 7면)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이 글에서 주로 다루는 필자들의 경우 인용의 편의를 위해 각각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하고, 본문 중에 면수만 표기하기로 하겠다.
강명관,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사, 2007 ⇒ 강명관 2007.
권혁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삼인, 2004 ⇒ 권혁범 2004.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 한국문학의 기억과 망각, 삼인, 2005 ⇒ 김철 2005.
니시카와 나가오, 국민이라는 괴물, 윤대석 옮김, 소명출판, 2001 ⇒ 니시카와 나가오 2001.
사카이 나오키ㆍ임지현, 오만과 편견, 휴머니스트, 2003 ⇒ 사카이 나오키ㆍ임지현 2003.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 임지현 1999.
임지현, 「‘전지구적 근대성’과 민족주의」, 역사문제연구 제 4호, 2000 ⇒ 임지현 2000.
임지현, 「다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창작과 비평, 117호, 2002년 가을호 ⇒ 임지현 2002.
임지현, 「'대중독재'의 지형도 그리기」, 임지현ㆍ김용우 편, 대중독재 1: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 휴머니스트, 2005 ⇒ 임지현 2005a.
임지현, 「대중독재테제」, 임지현ㆍ김용우 편, 대중독재 2: 정치 종교와 헤게모니, 휴머니스트, 2005 ⇒ 임지현 2005b.] 이는 “궁극적으로 민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의가 인종적인 것 혹은 종족적인 것으로부터 공공적인 것 혹은 시민적인 것으로, 영어 식으로 표현한다면 ‘ethnic nationalism’에서 ‘civic nationalism’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믿는다”(같은 책, 8면)는 저자의 입장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입장을 좀더 부연 설명한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을 추동했던 시민적 민족주의 혹은 식민지의 저항 민족주의가 지녔던 혁명적 역동성을 견지하면서, 권력과 같이 짜여진 텍스트로부터 민족주의를 구출해 내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민족주의는 더 이상 체제를 옹호하는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건설을 기약하는 반역의 이데올로기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같은 책, 같은 곳)
그의 입장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보수성 및 특히 진보 운동 진영에 내재하는 보수성에 대한 성찰을 거쳐(임지현 1999, 339면 이하) 인민주권론에 대한 (슈미트식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임지현 2002), 결국 오만과 편견부터는 민족주의는 물론이거니와 국민국가 자체에 대한 전면적 기각이라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 책의 한 대목은 그의 문제의식을 선명히 보여준다. “저는 요즘 나치즘이나 파시즘, 혹은 스탈린주의 등을 ‘대중독재’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데요. ‘대중독재’가 갖는 뚜렷한 특징은 국민국가적 근대성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잘 짜인 행정기구, 지방의 개별 촌락 단위까지 침투한 동원의 메커니즘,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장치들을 통해, 대중의 일상적 사고와 생활에 관철되는 지배 헤게모니는 국민국가의 완성도와 정비례하는 것이 아닐까요? (...) 대중의 국민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실상 영국ㆍ미국식의 ‘대중민주주의’와 독일ㆍ이탈리아식의 ‘대중독재’는 그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에 의존하는 국가적 동원체제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국민국가의 근대 권력이 낳은 쌍생아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38-39면―강조는 인용자)[이하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인용문의 강조 표시는 모두 인용자가 한 것이다.]
한문학 전공자인 강명관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의 기본 속성을 “순수성과 우월성”으로 규정한 뒤, “다른 컨텍스트를 무시한 [채―인용자 추가] 오로지 민족의 우월성이란 코드로만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것, 이것이 민족주의의 최대 모순”(강명관 2007, 46면)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국민국가 내지 민족국가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한다. “개인은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민족주의에 의해 한국인으로 제작된 것이다. 모든 국가의 개인은, 태어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국가 권력에 의해 국민으로 제작된다. 민족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동일성을 구성한다. (...) 국가는 이처럼 다양한 기구와 장치를 통해 민족-국민을 제작한다. 민족-국민은 이런 기구의 작동 속에 놓여 있다. 개인의 동의 여부는 물어보지 않는다. 나에게 의견을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아도 태어나는 그 순간 이후 민족-국민으로 제작될 뿐이다.”(같은 책, 46-7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도 그는 동일한 논지를 펴고 있다.[강명관, 「‘내재적 발전론’ 비판 …“국문학사는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근대’ 찾기였다」, 교수신문 2007년 10월 1일 참조.]
국문학자인 김철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질서정연한 통사적(統辭的)-통사적(通史的) 서사”(김철 2005, 9면)야말로 좌우 갈등을 넘어서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핵심 메커니즘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에게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 매우 절실한 비판적 과제인데,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고 광주의 살륙자들[원문 그대로―인용자]과 싸웠던 이른바 진보적 민중주의”(같은 책, 12면) 역시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이러한 “국민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이념의 테두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그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던 두 가지 경험을 환기한다. 하나는 시청 앞에 운집한 수십만의 군중과 그들이 내뿜는 열기와 함성에 대한 경험으로, 그는 이 광경에서 “수십만 군중이 하나의 ‘덩어리’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으며, “총칼로 무장한 직접적이고도 물리적인 폭력이 횡행하던 시대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다.”(같은 책, 11면) 또 하나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중 한 사람(유홍준)이 붉은 악마의 응원에 대해 썼던 한 신문 칼럼의 충격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개인주의자들이어서 건강하고 성실한 공동체 의식을 발견하기 어렵고, 전쟁이라도 나면 전쟁터로 뛰어갈 젊은이가 몇이나 될까 걱정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붉은 악마’는 그들의 핏속에서 여전히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적 인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논지의 이 칼럼은 그로 하여금 “‘핏속에 흐르는 민족과 국가라는 유전자’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진보주의자들의 권력 쟁취가 전리품을 놓고 다투는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하지 않을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인가”(같은 책, 11-12면) 회의하게 만든다.
따라서 김철은 “한국 근대성의 핵심을 반제ㆍ반봉건의 ‘주체적 저항사’로 보는 것”(같은 책, 23면)을 한국 근대사 및 근대문학사의 기본 구도로 파악하면서, 이러한 관점의 한계를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결여에서 찾는다. 다시 말하면 제국주의와 독재에 대한 저항이 지닌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로 인해 “그 저항이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근대 국가의 유례없는 전체주의적ㆍ국가주의적 폭력성”(24면)이 은폐된다는 점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의 민족ㆍ민중주의적 역사 인식에 담겨 있는 이분법적이고 평면적인 시각, 곧 저항/협력, 아/비아, 민족/반민족, 정통/비정통이 선명하게 대립하는 시각을 넘어서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인식론적 모드를 통해 한국에서의 모더니티를 해명”(25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식민지 이래 지금까지 한반도 주민의 근대적 삶을 지배해온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메커니즘은 바로 그 강력한 파시즘적 국가주의 그 자체였다.”(26면)
정치학자인 권혁범의 저작은 다소 거친 논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국민국가 비판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책에 담긴 그의 국민국가 비판은 크게 세 가지 논점으로 집약된다(권혁범 2004). 첫째,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이다. 권혁범 역시 김철과 마찬가지로 그가 학생 시기를 보냈던 유신 독재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키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의 집단적인 거리 응원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에 대한 불편함을 지적하면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획일적인 국가주의,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군사 독재에서 벗어난 지금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국익’과 ‘민족’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문제가 단순히 정치적 독재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둘째,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국민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제 ‘국민’이라는 집단 주술에서 벗어날 때가 아닌가 묻는다.”(권혁범 2004, 10면) 왜 국민이 집단주술인가? 그것은 “일단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국민’ 의식이 자리 잡을 때 거기서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개인의 삶과 자유가 피어나긴 어려워”(같은 책, 7면)지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우선 ‘국민’이라는 표현은 “국가의 일부로서의 강제성, 국가가 부과하는 정체성과 의무를 정당화하면서 사회 속의 개인을 조직화된 집단의 부속물로서 자동적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 속에는 이미 국가라는 선험적 실체가 규정하는 집단 동질적 주체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하는 순간 “이미 복잡한 개별적 차이, 자유, 인권, 다양성은 한 걸음 뒤로 밀려나기 쉽다. 국민주의는 국가를 삶의 주체로 각인시키며 일정한 규범을 모든 개인에게 강제한다.”(같은 책, 8면) 따라서 다양한 개인들의 욕구와 권리, 인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부터 탈퇴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본성상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기계이기 때문에 인권 보장 및 개인의 해방은 국가에서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국민이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는, 국민이 속하는 국가 자체가 억압적이고 배타적인 기계이기 때문이다(210면).
따라서 “‘나쁜 국민국가’를 ‘좋은 국민국가’로, ‘문제 있는 국민’을 ‘진정한 국민’으로” 만드는 것, “분단이나 독재가 ‘정상적인 주권 국민국가’를 방해해 왔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방향으로 나가”(10면)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이제 한국사회에서 ‘국민’이 아니라 주민, 시민, 혹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국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사회나 국제적 문제를 모색하고 해결하는”(같은 곳)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근대화는 성공적으로 이룩했지만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개인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며, “새로운 개인들의 출현 속에서 사회적 의미와 관계망은 재구성될 것이고 그와 함께 탈근대의 전망이 손에 잡힐 것”(190-91면)이다.
3. 국민이라는 괴물? 국민국가 비판의 논점과 그 난점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각자 상이한 분과학문에서 상이한 측면에 초점을 맞춰 이루어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1) 예속과 배제의 체계로서 국민국가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은 우선 근대 이후의 국민국가를 예속과 배제의 체계로 간주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국민국가에 대한 이러한 성격 규정을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권혁범이다. 그는 국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공재의 창출과 배분을 주도하는 강제 권력으로 기능하면서 법적ㆍ제도적 일관성을 위해 ‘국민’을 하나의 획일적 기준에 정렬시키고, 독점적 폭력의 위협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정한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다.”(권혁범 2004, 32-3면) 과연 국가라는 것이 이처럼 강제 권력이고, 독점적 폭력의 위협을 통해 복종을 강제하는 외생적 메커니즘이며, “수많은 개개인의 특성과 사정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기계”일까? 그것은 너무 환원적인 이해 방식이 아닐까? 다소 과도하다 싶은 이러한 규정은, 개인들 및 시민사회에 대한 상관적인 규정을 통해 완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국가의 민주화 역사에서 국민국가의 형성과 팽창은 시민사회에 의한 끊임없는 견제와 확장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 사회 계약의 주체가 없는 거대한 통치 기구로서의 국가의 존재는 그 자체가 반인간적ㆍ반개인적이다.”(같은 책, 33면) 따라서 권혁범은 국민국가라는 지배의 장치, 단순한 기계에 대립하거나 그와 맞서는 시민사회 및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을 전제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만약 개인들 및 시민사회가 국가의 바깥에 있는 것이고 국가와 맞서는 것이라면, 왜 처음부터 개인들은 국가를 형성했을까? 국가는 단순히 개인들을 예속시키고 강제하고 획일화하는 기계 장치임에도, 왜 굳이 사회계약이라는 번거롭고 모험적인 절차를 거쳐서 국가를 구성했을까? 하지만 권혁범 자신이 언급하듯이 근대 국가는 “민주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곧 근대 국가에는 인권을 비롯한 기본권의 확립과 시민권의 확장이 역사적으로 기입되어 있다. 어떻게 예속과 강제, 획일화의 기계로서 근대 국가, 국민국가 속에 민주화의 역사가 기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할까? 그는 “시민사회에 의한 끊임없는 견제와 확장”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 말하면 국가 바깥에 위치한 개인들 및 시민사회가 예속과 강제의 장치로서 국가를 견제한 덕분에 국가는 민주화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굳이 국가를 유지할 필요 없이, 아예 국가에서 벗어나면 어떨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권혁범은 모호한 입장을 보여준다. 그는 한편으로 서구적 근대 국가 자체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서구적 근대 국가의 모습이나 근대적인 정체성을 최종적이고 이상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폭력, 차별, 억압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58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위험도 경계한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화가 그 대신 탈국민국가적ㆍ친자본적 소비 주체를 ‘개인’으로서 재생산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중심부의 이익 재생산에 유리한 ‘서구적’ 주체를 전세계에 확산시킨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같은 책, 58-9면)
여기에서 권혁범은 지구화가 보여주는 또 다른 가능성에 기대는 편을 택한다. “지구화는 단순히 자본 간 혹은 자본-노동 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를 융합함으로써 비국민국가적ㆍ다중적 정체성을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문화에 대한 노출과 경험을 통해 다양한 타자를 실제적으로 인지함으로써 ‘차이들의 공존’을 모색할 수 있는 실천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다. 국제 노동력 이동을 통해 ‘국민’과 ‘민족’의 실제적 공간 재배치가 일어나고 운송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가치들 사이의 경쟁이 확대되면서 다중적인 국가 횡단적ㆍ탈민족적 주체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체들 속에서 ‘우리’는 ‘국민’ 혹은 ‘민족’이 아니라 ‘여성’, ‘동성애자’, ‘생태주의자’, ‘아시아인’, ‘탈국적 코리안’, ‘주변부 노동자’ 혹은 ‘개인’ 등으로 다르게 혹은 중층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를 넘어서 공동체가 생산해 내는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 아닌 좀 더 근원적이고 개성적인 ‘나’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그때 질문은 “우리는 누구인가?”에서 “나는 누구인가?”로 바뀌어도 좋을 것이다.”(같은 책, 59면)
권혁범의 입장은 그가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긍정하든 긍정하지 않든 간에, 국가 바깥의 원초적 개인들을 가정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또는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지칭했던 원자론적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Charles Taylor, “Atomism”, in Philosophy and the Human Sciences: Philosophical Papers 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이런 관점에서 국가는 최소화될수록 좋은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사라지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는 것은 1991년 냉전해체 이후 2001년 9.11 이전까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분쟁으로 인해 360만 명의 인명이 희생당하고 수천 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했다는 점이다.[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 세계분쟁과 평화운동, 아르케, 2004 참조. ] 이러한 분쟁의 본질적인 특징은 국가 간 분쟁이라기보다는 국가의 해체에 따른 국가권력의 부재 상황에서 주로 발생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이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동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따라서 한 사회의 첨단 엘리트들은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범세계적 노마드로, 세계 시민으로 다중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에게 국가의 해체는 죽음이나 재앙일 수밖에 없다. 이는 비단 현재의 세계화 국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수많은 ‘국가 없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권혁범과 다소 다른 측면에서 사태를 고찰하기는 하지만, 임지현에게서도 유사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그에게도 국민국가는 기본적으로 억압과 배제의 장치이며, 서구의 국민국가든 동구의 국민국가든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의 국민국가든 그것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가령 서유럽이나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보편주의ㆍ인권ㆍ인민주권론에 입각했기 때문에 좋은 내셔널리즘이고, 동유럽이나 주변부의 내셔널리즘은 혈통이나 민족 구성 등 객관적인 것에 기초했기 때문에 배타적인 변종 내셔널리즘이라는, 서구중심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서구의 내셔널리즘이 자유주의 및 인권과 결합된 좋은 내셔널리즘이라는 환상은 이미 반유대주의의 존재 자체에 의해서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 서유럽의 내셔널리즘 역시 보편주의, 인권, 시민의 권리 등을 확장하는 그러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이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전략에 입각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02-03면) 임지현은 “뿐만 아니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국가가 긍정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가 이 책 및 다른 글들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긍정성은 국민국가 및 내셔널리즘의 부정적인 측면에 의해 상쇄되며, 더욱이 그러한 긍정성도 이제 세계화를 맞이하여 역사적으로 시효만료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는 첫 번째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보편주의ㆍ인권ㆍ인민주권론’의 긍정성을 서구 중심주의라는 틀에 따라 미리 기각하고 있다.[사실 ‘좋은 내셔널리즘’과 ‘배타적인 변종 내셔널리즘’을 이분법적으로 설정해놓고 그것을 서구 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수사법이어서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임지현의 대담자인 사카이 나오키가 이러한 임지현의 수사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종종 프랑스 사상의 nation과 독일 사상의 Volk로 대비해서 이야기하지만, 이를 두 가지 국민사조의 차이로 이해하기보다는 근대국가의 국민이 표현되는 쌍이라고 이해할 수는 없을까요? 즉 보편주의적ㆍ인공적인 국민과 특수주의적ㆍ자연적인 민족은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모든 국민국가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12면)]
2) 추상적 권력관
두 번째 문제점은 이들의 국민국가 비판이 추상적 권력 개념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내가 말하는 추상적 권력 개념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러한 관점은 일종의 초월적인 권력의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 명시적으로 권력의 주체라는 표현이 사용되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권력이 어떤 대주체의 의지나 욕망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둘째, 이것은 또한 권력의 동질성을 가정한다. 내가 다루고 있는 필자들 중 누구도 다수의 권력들이 존재한다거나 권력은 자체 내에 애매성이나 양가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권력은, 적어도 근대 이후에는 항상 국민국가의 권력이며, 국민국가의 권력은 그것이 복지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이든, 나치즘이나 파시즘의 국가 권력이든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이든 또는 주변주 탈식민지 국가의 권력이든 항상 동일하고 동질적인 속성으로, 곧 내부적인 타자들이나 소수자들을 억압하여 획일적인 국민으로 만들고, 대외적인 타자들을 배척하고 그들과 패권을 다투는 힘으로 나타난다. 셋째, 권력의 부정성이다. 이들에게 권력은 예속시키고 억압하고 강제하고 배제하는 힘일 뿐, 권력은 긍정적인 힘으로, 적어도 자연적인 생산의 역량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권력의 생산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제작’하거나 개인들 내지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 권력이 지니는 유일한 생산성, 긍정성은 좀더 잘 포획하고 좀더 잘 규율하고 좀더 잘 복종시킬 수 있는, 지배의 기술적 생산성이다.
임지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추상적 권력 개념을 잘 드러내준다. “타자를 복종시키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권력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타자를 복종시키기 위한 매개들이 역사적으로 변할 뿐이다.”(임지현 2002, 186면)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근대 권력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근대 권력의 역사적 특징은 그것이 마치 지배를 욕망하지 않는 듯한 외양을 띤다는 데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사상적 기제는 국가의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권력인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인민주권론이었다.”(같은 글, 같은 곳)
또한 임지현은 사카이 나오키와의 대담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배의 욕망’이나 ‘권력의 욕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비단 유대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독일인 동성연애자나 정신이상자, 선천적 장애인들을 격리시키고 끝내는 처형했던 나치즘의 역사 또한,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 그 경계의 내부에서조차 근대 권력의 욕망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줍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46면)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가 아무런 마찰이나 갈등 없이,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배하지 않는 듯한 외향[원문 그대로―인용자]을 갖추면서 지배를 내면화하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파시즘이라는 것은 근대를 욕망한 권력이 대중민주주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근대를 욕망한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같은 책, 334면) 이러한 권력에 대한 언급들은 국민국가에 대한 전체주의론적 비판이 추상적 권력관을 전제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3) 복종의 숙명을 짊어진 국민: 주체화 없는 예속화
추상적인 권력 개념은 주체화 없는 예속화, 곧 복종의 숙명을 짊어진 국민이라는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아마도 니시카와 나가오일 것이다. 그는 국민국가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 뒤 [그것들은 (1) 명확한 국경의 존재 (2) 국가주권 (3) 국민 개념의 형성과 국민통합 이데올로기의 지배(내셔널리즘) (4) 이러한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 공간을 지배하는 국가장치와 제도 (5) 국제관계다.] “사람은 어떻게 국가로 회수되는가”라는 제목 아래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국가로 포섭되고 예속되는지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국민국가 내에서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역사, 가족과 학교, 과학과 학문, 종교, 텔레비전과 신문 및 각종 정보, 스포츠 등을 통해 국가로 회수될 뿐만 아니라 또한 “생활과 노동의 장을 통해 (...) 질병과 범죄를 통해, 혹은 그러한 것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 국가로 회수”(니시카와 나가오 2002, 306면)된다. 더 나아가 “사람은 반체제운동을 통해 국가로 회수됩니다. 자발적인 반체제운동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 차차 체제화되어 갑니다. 모든 반체제운동은 그것이 국가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삼는 한, 국가권력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즉 또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한 마지막에는 체제화되어 국가로 회수됩니다. (...) 사람은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을 통해서조차 국가로 회수됩니다.”(니시카와 나가오 2001, 307-12면) 그에게는 국민, 또는 국민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은 삶과 존재 그 자체 속에서 이미 국가에 회수되고 있고 또 회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운명은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여성해방운동 같은 인권 운동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덧붙이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국가는 실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인공적 기계이고 그것의 강제력은 압도적이지만, 우리들은 국가로 회수되는 순간에도 반드시 전면적으로 회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같은 책, 314면) 그러나 만약 모든 삶만이 아니라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여성해방운동과 페미니즘을 통해서도 국가로 회수될 수밖에 없다면,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국민국가론 비판이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막연히 탈국민국가의 가능성을 추정하거나 전제하기보다는 그것이 국민국가 내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내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니시카와 나가오의 저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국민화를 주체화 없는 예속화의 과정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전적인 예속과 포섭(‘회수’)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는 사실 불가능한 설명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임지현에게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알튀세르의 호명론을 통해 국민국가는 예속적인 주체들을 호명하고 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알튀세르를 패러디하면, 민족/국민의 담론은 결국 개별화된 시민사회의 성원들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담론화 전략인 것이다. 그 전략의 목표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여 자율적으로 국가의 규칙과 통제에 따르는 국민적 주체를 생산하는 데 있다. (...)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시민사회의 개개인이 민족/국민으로 호명될 때, 그것은 사실상 ‘생활세계의 식민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며 내면화된 규율과 가치를 통해 합의와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는 국가권력의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임지현 2002, 191면) 국민국가의 예속화 메커니즘의 무서움은 그것이 단순히 강제나 억압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국민국가의 권력에 복종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개인이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가 자발적이면 자발적일수록 그는 더욱 더 국민국가의 권력에 속박되며, 국민국가의 권력은 더욱 더 강고해지고 확장된다. 그야말로 악마적인 힘이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호명론에 대한 편향적 이해는 차치한다 하더라도[임지현은 이 대목에서 알튀세르를 원용하여 국민들의 자발적인 복종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는 몇 가지 점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오독이고 그릇된 적용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첫째, 임지현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은 알튀세르의 호명론은 자발적 예속에 대한 설명이나 심지어 정당화가 아니라, 지배자의 관점에서 본, 이데올로기 내부의 관점에서 본 예속의 메커니즘에 대한 기술(記述)이라는 점이다.(이 점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은 진태원,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옮김, 라깡의 재탄생, 창비, 2002 중 391-92면 참조) 둘째,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그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예속의 불가피성 내지 지배의 전일성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부기」에서 이데올로기론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사회적 적대와 갈등의 관점에서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계급들의 관점에서만, 다시 말해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만 하나의 사회구성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들을 설명할 수 있다. (...) 뿐만 아니라 특히 그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우리는 AIE들 내에서 구현되고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L. Althusser,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410면―강조는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복수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을 일방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전달하고 주입하는 장치들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피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투쟁을 벌이는 장소나 쟁점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호명론을 전일적인 지배를 설명하기 위해 활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론적 관점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모든 개개인이 항상 이미 국민국가에 호명되고 포섭되어 있다면,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는 현재 국민국가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국민국가는 완벽한 통제와 예속화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까? 특히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의 주장처럼 “국민국가들은 사태의 진행과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세계화의 힘들에 대해 세계의 운명 속에서 방향을 정하고 모든 종류의 공포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넘겨주었”으며 이제 “개인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누구도, 또는 거의 누구도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또는 그녀에게 중요성을 지닌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누구도 또는 거의 누구도 투표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의 삶의 조건 및 따라서 세계의 조건을 의미 있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Zygmunt Bauman, “Freedom From, In and Through the State: T.H. Marshall's Trinity of Rights Revisited”, Theoria, no. 108, December 2005, p. 17.]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지현의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설명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임지현의 경우 이러한 문제를 “의도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대중독재 2권 말미에 첨부한 「대중독재테제」에서 자신의 논리가 지닌 위험을 경계하면서, 대중독재 패러다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이라면, 대중독재가 반대나 저항을 위한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하고 철저하게 봉합된 정치 기계 혹은 괴물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 동의와 합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명백한 테러 현상을 무시하도록 조장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임지현 2005b, 612면) 그러면서 이러한 오해에 대한 해법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동의 자체의 다양한 층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된다면 그러한 오해도 불식될 것이다. 대중독재에서 발견되는 동의는 내면화된 강제, 강제된 동의, 수동적 동의, 타협적 순응, 무의식적 순응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 또 체제에 포섭된 것처럼 보이는 파시즘의 일상 세계와 동의 구조 속에도 다양한 저항의 지점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같은 글, 612-13면)
임지현의 이러한 언급은 그가 자신의 논리가 낳을 수 있는 부정적인 또는 자가당착적인 효과를 의식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는 점에서는 얼마간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 또는 대중독재론에서 어떻게 “다양한 저항의 지점들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대자들의 비판을 의식해 내 이론은 이런 것도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것을 타당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작업은 자신의 의도의 순수성(곧 국민국가론이나 대중독재론은 반대나 저항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는 데 머물러 있을 뿐, 과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논증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실 “‘대중독재’는 왜곡된 근대화 혹은 전근대의 잔재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기보다는 근대 국가 체제의 성과를 역사적으로 전유한 근대 독재인 것”(같은 글, 601면)이며 “근대의 정치적 주체는 기실 개개인의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 ‘통제되고 유도된 대중화’ 과정의 산물인 것”(같은 글, 602면)이라고 주장한 가운데, 어떻게 다른 식의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임지현 및 기타 다른 논자들이 국민국가론이 지금까지 전제해온 인식론적 틀이나 논리 구조에서는 반대나 저항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면) 지극히 어려울뿐더러, 그러한 틀이나 논리를 전제하는 한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생산적인 설명을 제시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
4) 자본주의의 역사, 국민국가의 역사 부재
이 점은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 따라서 국가 형태의 획일화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대중과 계급의 변증법 사상에 관해 고찰하면서 마르크스 및 그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중요한 한계 중 하나로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를 사고하고 분석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지적한 바 있다.[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2007, 304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는 근원적으로 역사적인 생산양식이다. 곧 그것은 봉건제를 대체하면서 시작한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는 한시적인 생산양식이다.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의 근본적인 한계 중 하나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제도들 및 범주들이 마치 초역사적인 것인 양 간주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역사성은 인식했지만, 곧 그것이 한시적인 생산양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본주의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 따라서 자본-임노동 관계는 자본주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별되는 상이한 형태들 속에서 표현된다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18세기 말의 자본주의와 19세기 말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또 20세기 말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계급투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만 작용한다. 곧 계급투쟁이 자본주의를 파괴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계속 동일하게 그대로 존속한다.”[발리바르, 같은 책, 319면―번역은 약간 수정.]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자들에게 공통적인 문제점 역시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꼽을 수 있다. 이들에게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이래 태동한 국민국가는 계속 국민국가였을 뿐 아무런 내재적인 형태 변화나 구조 변화도 겪지 않는다. 국민국가는 내부의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과 외부의 타자들에 대한 배제라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으로 규정되며, 18세기 말의 국민국가든 20세기 중엽의 국민국가든 아니면 20세기 말~21세기 초의 국민국가든 간에, 그것이 소멸하지 않는 한 국민국가는 늘 억압과 배제의 권력 메커니즘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임지현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 “내부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억압 과정”(임지현ㆍ사카이 나오키 2003, 47면)이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이나 나치즘이 모두 동일한 억압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같은 책, 47-8면 참조) 더 나아가 대개 민주주의의 확대의 징표이자 근거로 간주되는 보통선거권과 여성참정권 획득 역시 그가 보기에는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의 강화를 나타내는 징표일 뿐이다. “보통선거권과 여성참정권 획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여성이 ‘국민’ 속에 편입되었을 때, 국민국가의 지배 헤게모니는 사실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정치적 민주화는 근대 권력의 정당화 또는 합리화 가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국민국가에 포박된 근대 민주주의의 역설이라 하겠다.”(임지현 2002, 191면) 국민국가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 정치적 민주화는 근대 권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따라서 국민국가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그는 ‘대중독재’ 내지 ‘국민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국민국가의 동일한 본성과 토대를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의 핵심 기준은 자발적 동원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35-6면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파시즘이나 나치즘과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파시즘이나 나치즘, 스탈린주의, 군사 독재 같은―옮긴이] ‘대중독재’와 [서유럽의―옮긴이] ‘대중민주주의’는 그 형식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양자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 또는 근대 국민국가의 틀 속에 대중을 포섭한다는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단지 그들이 놓인 역사적 조건의 차이 때문에 달랐을 뿐입니다. (...) 양자는 모두 권력의 지배욕망을 감추고 대중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한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욕망을 만들어내고 유도하는 근대적 기제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186면)
한편 사카이 나오키는 1930년대 이래 근대 국민국가가 전환을 겪었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총력전 체제’라는 명칭을 통해 이러한 전환을 획일화한다. “총력전 체제란 합중국의 뉴딜 정책, 일본의 만주국 건설, 소련에서 시행된 일련의 5개년 계획, 독일의 강제적 균질화 등을 모두 시야에 넣은, 새롭고도 광범위한 사회 편제를 가리킵니다. 총력전체제의 특징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산출한 계급 분리나, 차별받는 주변집단을 국민국가에 최대한 통합시켜, 국가 전체가 그것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자산으로 가장 유효하게 이용하려고 하는 체제라는 점입니다. (...) 이런 제도가 총력전이 끝난 1945년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는데요, 그러다가 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커다란 전환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총력전 체제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독립법인화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신자유주의의 주장이 맹위를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 하지만 총력전 체제의 유제는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국민교육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332-34면)
사카이 나오키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역사, 국민국가의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피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총력전 체제’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이러한 복지 정책 또는 생명정치의 과정은 국민국가에 대한 포섭의 과정이고 각각의 개인들이 국민으로서 국민국가의 규범을 좀더 내면화하고 국민국가에 좀더 강하게 의존하게 되는 과정으로만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총력전 체제’로서의 사회 정책, 생명정치는 천황제 아래의 일본이나 나치즘 체제의 독일, 스탈린 치하의 소련, 루즈벨트 시절의 미국 등을 가릴 것 없이 본질상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관점의 문제 이전에 복잡한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과도한 단순화라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는 관점이 아닐 수 없다.[반면 최근 출간된 한 저서에서 볼프강 쉬벨부시는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미국의 뉴딜 정책의 유사성 및 그것이 20세기에 남긴 유산을 꼼꼼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임지현이나 사카이 나오키와 달리 “공통성의 영역을 찾는 일은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비교하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볼프강 쉬벨부시, 뉴딜, 세 편의 드라마, 차문석 옮김, 지식의풍경, 2009, 40-1면)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악마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1930년대에 이들 양 체제의 대중적 인기는 억압성이 아니라 평등성에 기인했던 바가 더 컸다는 사실”(34면)을 지적한다.]
이들의 관점은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자기 정당화에 대한 비판의 시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은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와 달리,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이나 주변부의 개발도상국가들과 달리, 자신들은 선진화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개인의 인권과 자유, 평등이 구현되어 있는 국가로 자처하곤 한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비판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 역시 대중들의 국민화 및 자발적 동원에 의존해 있고, 그에 기반하여 개인들을 억압하고 또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전체주의 국가들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결국 모든 민주주의는 지배자의 정당화 외피에 불과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참여와 헌신은 결국 지배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견고화한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서유럽 자유주의 국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가상을 비판하고 분쇄하기 위해 굳이 모든 국민국가는 결국 ‘대중독재’, ‘국민독재’일 뿐이라는, 곧 전체주의 국가들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논법이 필요한 것일까? 그러한 극단적이고 얼마간 단순화된 논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서유럽 국가들(및 근대 국민국가 일반)의 내적 모순과 문제점들을 해명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에티엔 발리바르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와 같은 소위 ‘복지국가’ 또는 발리바르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와 파시즘을 동일시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난 50여년 동안 산업적이고 외회정치적이며 포스트식민주의적인 사회들(프랑스 같은)이 경험했던 상대적인 사회적 평형이 파시즘과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한 사회적 평형이 불평등도 배제도 동원과 정상화의 강제도 모면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 É. Balibar, Droit de cité, p. 8.]
4. 국민국가의 내재적 비판을 위하여
결국 국민국가에 대한 이들의 대안은 국가 없는 개인, 국가 없는 사회가 가능하며, 또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권혁범이 국가 바깥에 있는 개인들을 전제하고, “개인의 해방”을 “인간의 보편적 욕구”(권혁범 2004, 190면)라고 주장할 때 이러한 사정이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니시카와 나가오가 사람들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 모든 측면이 국가로 회수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국가는 붕괴되어야 할 것, 뛰어 넘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해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니시카와 나가오 2001, 315면)하다고 말할 때에도 이 점은 명백하다.
임지현의 경우 이런 관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임지현은 네그리ㆍ하트의 제국론과 다중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소중히 하면서 국민주권의 주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서 네그리ㆍ하트의 ‘탈근대적 공화주의’가 주목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임지현 2002, 191-92면) 그것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한 ‘포스트모던 공화주의’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된 셈입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285면)], 국민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안의 가능성을 피력할 때 그의 관점 역시 권혁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관계도 자기 자신의 오류에 열려 있고 따라서 다른 번역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관계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솔리대러티(solidarity)보다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 더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21세기의 연대 형태는, 일종의 형용모순이겠지만, ‘무정부주의적 연대’가 특정한 해석에 기초한 자기 폐쇄적인 연대를 대체하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요?”(사카이 나오키 & 임지현 2003, 435면) 하지만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잘 지적한 것처럼[이매뉴얼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강문구 옮김, 당대, 1996, 4장 참조.],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것은 19세기에 생시몽이 제창한 이른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기본 관념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전망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하듯이 “A[국가사회주의―인용자]의 소멸과 더불어 D[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션)]도 쇠퇴했다”면[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8, 19면.], 어떻게 21세기 연대 형태가 ‘무정부주의적 연대’ 또는 ‘어소시에이션’이 될 수 있을지 이해하기 어렵다.[가라타니 고진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그러나 이미 서술한 것처럼 국가사회주의가 쇠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도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어소시에이셔니즘)가 단순히 이념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 자본, 네이션,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소시에이셔니즘은 자본, 네이션, 국가를 거절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충분히 사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가령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와 같은 종류가 부활한다고 해도 자본, 네이션, 국가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27면) 가라타니 고진 자신이 제안하는 대안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이러한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
이들의 작업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국민국가의 역사적ㆍ내생적 한계들을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이론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저항과 대안 모색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 것 같다. 국민국가가 괴물처럼 가공할 만한 지배의 장치, 기계로 묘사되면 될수록, 국민국가가 모든 개인들을 포섭해서 정신만이 아니라 신체에도 지배의 흔적을 새겨 넣고 그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강화한다고 간주하면 할수록, 또한 근대의 세계사 전체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의 확산과 강화의 역사로 간주되면 될수록,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악마적인 힘을 가진 국민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지, 어떻게 탈국민국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이 모두 ‘개인의 해방’이나 ‘무정부주의적 연대’, ‘탈국민화, 비국민화’ 같이 막연한 전망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작업은 비판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한 번의 작업에서 모든 것을 바랄 수는 없으며 대안의 모색은 차후의 작업에서 기대해봐도 좋지 않은가라는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및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 이들과 같은 문제설정 위에서 전개되는 한, 오히려 그것에 대한 유효한 이론적ㆍ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는 점에 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이 글은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을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은 대상이 된 필자들의 문제의식에 상당 부분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특히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저항, 소수자와 이주자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 등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글은 이를 테면 동지적인 비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만큼 이들의 작업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과 대안의 모색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 또한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사항들을 지적해보고 싶다.
1)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위
첫째,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자들은 민족주의 및 국민국가를 넓은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지배와 예속화 메커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지배와 예속화를 강제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임지현이 특히 강조하는 것처럼 일종의 자발적 예속으로 이해하든 간에(임지현 2005a, 19면), 이러한 관점은 항상 이데올로기를 지배자에 의한 피지배자의 지배와 예속화의 수단 내지 도구로 이해한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관점은 피지배 계급 내지 대중은 존재론적ㆍ인간학적 또는 정치적으로 항상 열등하고 수동적이라는 생각이다.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대중들은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우매하게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이나 술책에 말려들어간다는 식의 가치 판단을 이미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피지배 대중들이 자주 반역을 하고 또 어떤 경우들에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 및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룩한다는 점이다. 인권선언을 통해 인권과 시민권을 근대 국가의 이념적 기초로 확립한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19세기의 노동운동과 20세기의 여성운동이 그랬으며, 20세기 후반 미국 및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인권운동이 그랬다. 지배 세력에 의한 기만과 조작의 시도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대중들의 능동적인 저항과 반역의 시도들(적어도 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자크 데리다는 각자 최근 저작에서 이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글에서 “내가 보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이데올로기’의 기능작용 속에서 특권적인 능동적 역할을 피억압자들 또는 피착취자들에게 (적어도 잠재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들을 설명하는 것이다.”[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183-84면―강조는 발리바르.]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지배적인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피지배대중들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러한 상상계를 자기 나름대로 구성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유령성, 곧 이데올로기를 모든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종교 안에는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음을 지적한다. 그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322-24면 참조.]이라고 부른 것은 이처럼 계시 종교나 이데올로기 일반 안에 존재하는,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가능하게 해주는 근원적인 해방의 열망, 해방의 경험의 형식을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이 주장하듯이 이데올로기에서 피지배자 또는 대중의 존재론적 우월성이라는 관점을 택할 경우에만 우리는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의 강고한 지배 구조를 해명한다는 구실 아래 국민국가 전체를 전체주의로 획일화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2) 권력에 대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
둘째, 푸코가 강조했듯이 권력을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또는 포획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글에서 다룬 필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권력에 대해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특히 임지현은 그가 주창하는 대중독재론의 이론적 전거로 푸코를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음에도(임지현 2005b, 605-06면), 푸코가 여러 차례에 걸쳐 역설한 권력의 긍정성, 생산성, 다양성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권력관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대중독재론이나 국민독재론이 푸코나 알튀세르에 관한 상당히 피상적인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짐작케 해준다.
하지만 푸코는 그의 관점과 달리 규율권력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감시와 처벌(1975) 및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1976),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97) 같은 저작에서 지속적으로 권력을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며,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다원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을 역설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푸코의 언급은 임지현 식의 권력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니까 개인들을 복종시키고 억압하는 권력이 적용되는, 또 타격을 가하는, 일종의 기본적인 핵이나 최초의 원자, 다수의 불활성 물질 등으로 개인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 권력을 전면적이고 동질적인 지배의 현상으로 간주하지 말 것이다.”[미셸 푸코,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Paris: Seuil, 1997);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8, 48면―번역은 약간 수정.]
푸코가 권력을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권력을 단순히 지배, 그것도 전일적 지배와 동일시하거나 권력에 의해 작동되는 주체화 양식을 철저한 예속화 양식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82년에 쓴 「주체와 권력」이라는 글에서 그 당시까지 전개된 자신의 작업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자신의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예속화(assujettissement 또는 sujétion) 양식과 주체화(subjectivation) 양식의 갈등적인 과정에서 산출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를 변형시켜나가는 주체에 대한 탐구가 자신의 주요한 관심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푸코는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 특히 감시와 처벌이나 비정상인들에서 근대 규율 권력이 어떻게 개인 주체들을 예속적 주체로 생산해내는지 분석한 반면,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이 도입된 이후 말년의 몇몇 글에서는 예속적 주체들, 규율된 주체들이 생산되는 예속화 양식과 구별되는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우리가 권력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에만, 권력의 기술에 따라 예속적인 주체가 산출되는 것과 동시에 또는 그 이전에, 권력의 작용 속에는 항상 이미 저항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예속적인 주체는 항상 이미 그 예속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사고할 수 있다. 곧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론적인 것이며, “관계로서의 권력은, 고착된 상태의 권력 관계, 곧 지배와 구별되며, 그 자체 안에 항상 저항과 자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론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예속과 지배가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들로 구성”[진태원, 「생명정치의 탄생: 미셸 푸코와 생명권력의 문제」, 문학과 사회 제 75집, 2006년 가을호, 235면―강조는 원문.]되는 것이다.
3) 국민국가의 모순들이라는 문제설정
셋째, 국민국가 및 민족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을 이해하고 또 채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사소한 지적처럼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전개되어 왔으며, 따라서 국민국가에 대한 분석에서 그러한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인식은 당연한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표현으로 말하려는 것은 국민국가의 역사를 내적으로 규정해왔던 모순들이 무엇이고 그러한 모순들의 전개과정에 의해 국민국가의 역사적 형태들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라는 문제다.
내가 본문에서 다룬 필자들은 모두 국민국가를 일방적인 억압과 배제, 예속의 체계로 이해할 뿐, 이를테면 국민국가가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경향과 지배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그것과 반대되는 경향의 모순적인 갈등의 산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들의 비판과 달리 근대 국민국가는 전체주의적 국가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국민 모두를 예속시키고 외국인을 비롯한 타자들은 항상 배격하는 억압적이고 패권적인 국가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국민국가들이 그러한 문제점을 드러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 혁명의 기본 이념이 담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보여주듯이,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이념들은 역사적으로 헌법을 통해, 각종의 사회적 제도와 장치들을 통해 구현되고 확장되어 왔다. 이를 끊임없이 잠식하고 약화시키는 반경향, 곧 시민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축소하거나 박탈하고 억압적이고 치안적인 장치들을 강화하는 경향도 줄곧 동반되어 왔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반경향들은 국민 국가 속에 구조적으로 기입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유일한 경향은 아니었으며, 그것에 대한 완강하고 지속적인 저항과 투쟁을 모면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저항과 투쟁이 존재하며, 그것을 통해 성취된 역사적 성과들이 근대 국민 국가들의 헌정 자체 속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이 점에 관해서는 Donald Sassoon,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NY: The New Press, 1998) 중 6장 참조. 발리바르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러한 모순적인 역사적 전개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국민국가 대신, 특히 흔히 사용되는 복지국가나 사회국가라는 용어 대신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4장 및 Droit de cité, pp. 105 이하를 각각 참조하라. ]
또한 ‘국민’은 강제적인 억압 권력으로서의, 개인들 하나하나를 남김없이 포획하고 복종시키는 예속 권력으로서의 국민 국가에 사로잡힌 신민들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개인이라는 범주 자체가 국민국가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더욱 더 국가를 벗어난 개인이라는 것은 성립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강명관이 말하듯 국민국가가 개인들을 국민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적절한 말이 아니다. 국민국가는(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개인들 자체를 제작한다(이런 표현을 개인들은 자연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인위적 존재자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면).[내가 알기로 ‘제작한다’(fabriquer)는 표현은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규율권력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푸코는 정확히 ‘개인들을 국민으로 제작한다’고 하지 않고 “개인을 제작한다”(Michel Foucault,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225면)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만 감시와 처벌이 지닌 전복적인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국민국가에 대해 푸코의 표현을 가져다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푸코는 국민국가가 개인을 제작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규율권력이 제작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푸코 자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표현일 수 있다.] 국민 이전에 독립적인 개인들이 존재한다고, 따라서 국가 외부에, 국가와 독립하여 개인들이 일종의 자연 상태 속에서 성립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개연성이 적은 주장이다.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제작되는 것 또는 형성되는 것 이외에 달리 존재하거나 성립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은 철저히 종속적이고 예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권력을 (의지와 욕망을 가진) 초월적인 대주체의 권력으로 가정하는 것이며, 권력의 작용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권력의 메커니즘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목적론적 메커니즘으로 이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개인들이 국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는 개인들은 국가를 통해 성립하고 국가를 통해 생존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지그문트 바우만은 T. H. 마샬(Marshall)에 대한 재독해를 통해 이 점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Z. Bauman, “Freedom From, In and Through the State”, op. cit. 참조.] 이를 천부적 자연권으로서의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및 (일종의) 전도를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사람은 바로 한나 아렌트였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복잡다단하고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한나 아렌트는 192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정세, 특히 유럽에서 파시즘이 출현하던 위기의 시대에 자유주의 나아가 근대 정치-이데올로기 전반이 근본적으로 무력했던 이유를 성찰하면서 시민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아렌트는 특히 이 시기에 발생한 거대한 ‘무국적’(stateless) 난민들의 비참한 상태를 관찰하면서, 근대 국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인 인권 이념이 근본적으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 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근대적 인권 이념에 따르면 실정적이고 특수한 시민권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제도화이며, 이러한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제도에 대해 보편적인 정당성의 원리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인권은 시민권보다 더 광범위하고 또 그로부터 독립적이다. 이 때문에 인권은 국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아렌트가 볼 때 사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볼 때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었다. 왜냐하면 인권이 시민권을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이 인권을 기초하며, 따라서 국가나 제도가 보장하지 않는 자연적 권리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제시하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반박이며 그것의 전도라고 할 수 있다.[아렌트의 이 개념이 지닌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 함의 및 그것이 미친 영향에 대해 여기서는 길게 논의하기 어렵다. 이 개념에 관한 상이한 해석들로는 특히 다음과 같은 저작들을 참조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해석으로는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칸트주의적 해석으로는 Seyla Benhabib,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4, 반폭력의 정치라는 관점에서의 해석으로는 É. Balibar, Nous, citoyens d'Europe? 중 특히 7장, 민주주의적 관점에서의 비판으로는 Jacques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를 각각 참조.]
따라서 개인들이 국가를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자유를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근원적으로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들의 존재 그 자체, 그리고 개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는 역사적으로 가변적이고 탄력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의 개인과 18세기의 개인, 또 오늘날의 개인은 동일한 개인이 아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서유럽의 발전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개인들과 아프리카 및 다른 저발전 국가들에서 폭력과 기아, 자연 재해를 겪으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가는 사람들은 똑같은 개인,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서구 중심주의 내지 유럽 중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들의 존재와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만큼 그러한 불평등과 그러한 비동일성은 현재와 장래에 얼마든지 해소되거나 적어도 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역사적 한계들을 비판하기 위해 국민국가를 획일적인, 억압적ㆍ배제적 권력으로 간주할 필요도 없으며, 개인들이 국가 곧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성립하고 실존한다는 것을 예속의 숙명적 필연성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또 국민국가의 위기를 마침내 절대 악으로부터, 악마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종말론적인 약속의 시간으로 이해할 필요도 없다. 국민국가가 역사적 존재이고 국민 역시 역사적 존재인 한에서, 국민국가와 국민은 전환 가능하며 그것도 내재적인 방식으로 전환 가능하다. 그러한 전환이 반드시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전개되도록 모색하고 노력할 수는 있다.
결국 국민국가의 성격에 대한 좀더 균형 잡힌 인식을 위해서는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국민국가를 전일적이고 전능한 예속적ㆍ배제적인 권력 메커니즘으로 간주하는 대신에, 국민국가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또 그러한 역사를 가능케 하는 국민국가에 고유한 내재적 갈등과 모순들이라는 관점에서 국민국가를 파악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순과 갈등의 역사를 피지배자, 대중, 인민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국민국가의 역사 및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좀더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