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님, 지난 번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이 좋은지 질문했던 적이 있죠?

원래는 서점에서 읽어볼까 했는데, 마침 가까운 서점이 이전 공사 중이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문해서 오늘 책을 받아서 조금 읽어봤습니다.

읽어봤더니 역시 예상대로 번역이 아주 형편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더군요. 김웅권 씨의 번역이 대개 그렇습니다. 자기가 전공하지 않은 분야의 책들을 주로 번역하고, 그것도 너무 많은 책을 번역하다 보니까, 사실 수준 높은 좋은 번역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겠죠.

 

{재생산에 대하여} 번역의 사례를 몇 가지 본다면, 이 책의 번역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저곳 몇 군데를 읽어봤는데, 대동소이한 수준에 비슷한 문제점들이 나타납니다.

우선 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볼까요? 41쪽 첫 문장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철학이 무엇인지 자연발생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자연발생적으로”는 “spontanément”의 번역인데, 이 단어라면 “자생적으로”라고 옮기는 게 좋겠죠. “자연발생적으로”와 “자생적으로”는 뉘앙스의 차이가 상당히 크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야 그리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겠죠.

그 다음 43쪽까지는 별로 문제가 없는 번역입니다. 그런데 43쪽에서 좀 문제가 나타납니다. 우선 두 번째 문단에 괄호 안에 든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린다”거나 죽음이 갑자기 닥칠 때,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은 배우는 일이다”―플라톤―에서 보듯이 말이다)” 이 문장은 정확히 보면 비문이고 원문의 내용도 약간 부정확하게 옮기고 있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on attend que ça se tasse” ou que la mort survienne : “philosopher c'est apprendre à mourir”―Platon―)”

제가 옮긴다면 이렇게 옮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태가 잘 해결되길 기다린다.” 또는 죽음이 닥치기를 기다린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말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세 번째 문단 번역에서도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동일화는 비판적인 가치를 지니는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본의와는 달리 그런 것처럼, 사실상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Il n'est pas possible de dire que cette identité contienne, en fait, et comme malgré elle, une idée de la philosophie qui possède une valeur critique.”

제가 볼 때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하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철학=체념이라는] 이러한 동일성이, 사실상 그리고 그 자신에 거슬러, 비판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에 대한 어떤 관념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 문장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철학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에서 엿볼 수 있는 철학 = 체념이라는 표상이, 비판적인 가치를 지닌 철학관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 = 체념이라는 관념과, 비판적인 철학관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44쪽에도 잘못된 번역이 나옵니다.

“현재로선 중요한 것은 민중의 표현에서 문제되고 있는 상식의 철학과 본래 의미의 대문자 철학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후자의 철학은 (플라톤 ...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 등과 마르크스, 레닌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구상된’ 철학이다. 그것은 대중에 보급될 수도 있고 보급되지 않을(a)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보급될(b) 수 있다.”

이 밑줄친 문장을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장의 불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qui peut ou non se diffuser(A), ou plutôt être diffusée(B) dans les masses populaires.”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후자의 철학은 (...) 철학자들이 ‘가다듬은’ 철학으로, 인민 대중 속에 확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a') 수 있다. 또는 오히려 [지식인에 의해] 보급될(b') 수 있다.”

(a), (b)와 (a'), (b')의 차이는 김웅권 씨는 원문의 “se diffuser”(A)와 “être difusée”(B)를 똑같이 “보급될”로 번역한 것에 비해, 제 번역은 (A)는 “확산되다”로 번역했고 (B)는 “[지식인에 의해] 보급되다”로 번역한 것에 있죠. 

불어에서는 수동 표현을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동사 앞에 “se”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être 동사(영어의 be 동사에 해당) + 과거분사를 쓰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A)에서는 se +diffuser라는 형태로 (B)에서는 être 동사 +과거분사라는 형태로 수동 표현이 두 번 쓰이고 있죠. 따라서 이 두 가지 수동 표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해명하는 게 이 문장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될 텐데, 김웅권 씨는 그냥 (A)와 (B)를 똑같이 “보급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장 자체나 맥락만을 봐서는 (A)와 (B)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다만 추측해본다면, 양자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알튀세르가 (A)에서 “se diffuser”라고 말할 때, 이 때의 “diffuser”는 “누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널리 퍼뜨린다, 보급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생적으로, 자연히 퍼져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A)는 “철학자가 가다듬은 철학이 인민 대중 속에 자생적으로, 자연히 확산되거나 확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죠. 곧 이미 대중의 자생적인 표상 속에서 철학자들이 가다듬은 철학의 맹아 같은 게 담겨 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바로 뒤에서 “또는 오히려”라는 말을 덧붙인 뒤에 이번에는 (B), 곧 “être difusée”라는 표현으로 (A)를 대체하죠. 이것이 무얼 뜻할까요? 제가 보기에 이는 (A)와 달리 철학자가 가다듬은 철학은 대중들의 생각 속에 자생적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입을 통해, 보급을 통해서 비로소 퍼지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A)보다는 (B)가 사태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는 오히려”라는 접속사를 덧붙인 다음에 (A) 대신 (B)라는 표현을 대체한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이는 이 문장 바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을 듯합니다.

김웅권 씨의 번역을 먼저 보기로 하죠.

“오늘날 우리가 폭넓은 대중의 민중적 표상에서 철학적 요소들을 만날 때 이러한 보급 속에서 그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의 결합을 통해 대중에 ‘주입된’(레닌ㆍ마오쩌둥) 본래 의미의 대문자 철학적 요소들에 대한 민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Quand on rencontre aujourd'hui des éléments philosophiques dans la représentation populaire des larges masses, il faut en tenir compte dans cette diffusion, faute de quoi on peut prendre pour la conscience populaire spontanée des éléments philosophiques au sens fort qui ont été "inculqués"(Lénine, Mao) aux masses par l'union de la théorie marxste et du Mouvement ouvrier.

김웅권 씨의 번역은 별로 나쁜 번역은 아닌데, 다만 약간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밑줄 친 부분을 이렇게 바꿔보면 알튀세르의 논점이 좀더 분명히 드러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의 결합을 통해 대중들에 ‘주입된’(레닌ㆍ마오) 강한 의미의 대문자 철학적 요소들을 민중의 자연발생적 의식으로 오해할 수 있다.”

또 이런 식으로 번역해야 (A)와 (B)의 차이도 좀더 분명히 드러날 수 있습니다. 김웅권 씨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번역이긴 하지만, 좀 미묘한 논의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이처럼 오역을 범하거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좀더 뒤로 가서 125쪽 [국가와 국가장치] 부분을 좀 볼까요? 사소하긴 한데, 첫줄에 약간의 오역이 있네요.

“즉 국가는 {공산당 선언}과 {브뤼메르 18일}에서부터 (그리고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그 이후의 모든 고전 텍스트들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억압 장치로 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괄호 속의 내용은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고전 텍스트, 무엇보다도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텍스트들 및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로 번역해야죠.

126쪽에서는 1절 제목 번역에 약간 문제가 있네요.

“1. 묘사적 이론에서 단순하게 이론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 제목의 원문은 “1. De la théorie descriptive à la théorie tout court”입니다. 여기서 “tout court”라는 표현은 “단순하게”라는 뜻보다는 “자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다시 말해 이 제목이 말하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묘사적(또는 기술적) 이론에서 국가에 대한 과학적 이론으로>라는 뜻입니다. “la théorie tout court”는 과학적 이론으로서 이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죠. 

또 중간쯤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건축물의 은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것들이 그 대상에 대한 이해들이거나 묘사적 표상들이라고 말할 때, ...”

여기서 밑줄친 부분의 원문은 “des conceptions, ou représentations descriptives de leur objet ...”입니다. 따라서 이는 “자신들의 대상에 대한 묘사적 관념이나 표상들”로 고치는 게 옳겠죠.


결론을 내리면, 김웅권 씨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읽을 만한 번역입니다. 단 읽다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거나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나올 텐데, 그건 오역일 가능성이 높지요. 읽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은

 

따로 질문하시면, 제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는 답변해드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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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가 국내에 나왔드라
    from 호빗의 새로운 집 2007-12-28 15:54 
    모르고 있었다가 어떻게 저렇게 알게되서 책을 사려고 했는데, 번역에 대한 평이 그닥 좋지 않아서 한동안 고민했었다. 그래도 평소에 종종 가던 진태원씨 서재에 문의해 진태원씨를 괴롭히(?)는 과정을 거쳐 재생산에 대하여의 번역 상태에 대하여 문의할 수 있었다. 아아. 사야할 책이 또 늘어났구나;;
 
 
류우 2007-12-2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불어를 읽지 못하니, 어떻게 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막힐때마다 발마스님께 도움을 부탁드려야 하겠군요^^;
전반적으로 읽을만 하다고는 하니, 그나마 오역과 비문투성이인 글들 보다는 읽을 수(!) 있겠네요 @_@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

류우 2007-12-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기 위에 트랙백이 저렇게 되는 것이었군요;;
제 블로그에 한번 트랙백이 뭔지 몰라서 실험을 하다가 지웠는데 어떻게 지워야 하는지 몰라서;;
(블로그 초보의 한계군요ㅠ_ㅠ)

게시판을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네요ㅠㅠ죄송(_ _);;;

balmas 2007-12-2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읽다가 어려운 곳이나 잘 이해가 안되는 곳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

ㅎㅎㅎ 괜찮습니다. 트랙백 하나 있으니 더 보기가 좋은데요.
 
 전출처 : findingyeji님의 "cherishyeji님이 작성하신 방명록입니다."

반갑습니다. cherishyeji님. 간단하게 몇 개만 소개시켜 드릴게요. 혹시 좀더 자세한 소개가 필요하거나 구체적인 조언이 필요하시면 더 말씀해주세요. 우선 구조주의의 전반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데는 [구조주의 혁명]이라는 책이 괜찮습니다. 국내의 학자들이 쓴 책인데, 기호학과 인류학,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와 관련해서 구조주의를 소개하고 있으니까 도움이 될 듯합니다. 첨언하자면, 가끔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책은 별로 좋은 책이 아닙니다. 특히 구조주의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문장이 너무 난삽하고 비문에 가까운 것들이 많은 데다가 인용문의 오역도 많아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라는 책도 마찬가지로 별로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구조주의 이래 프랑스 철학의 흐름을 보고 싶으시면, 프랑수아 도스가 쓴 [구조주의의 역사 1-4]가 참조할 만합니다. 이 책은 전형적인 저널리즘 저작(다시 말해 사상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의 역사)이고 번역이 썩 만족스러운 편이 아니라는 한계는 있지만, 약 40여년에 걸친 구조주의의 전개과정을 개괄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밖에 후기 구조주의의 주요 철학자들, 곧 라캉,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에 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웅진출판에서 나온 How to Read 시리즈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 시리즈의 원서는 각 분야의 실력있는 필자들을 모아서 만든 좋은 책들인데, 저는 국역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번역이 잘 돼 있는지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서평들을 보면 읽을 만한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데리다나 라캉,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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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9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7-12-30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ㅎㅎㅎ 그렇군요. {How to Read Lacan} 역자 후기에 그런 내용이 있었군요. 그런데 저는 이 책 번역본을 아직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그 책을 보완할 만한 책이라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책도 괜찮을 것 같네요. 아마 같은 역자가 번역한 것 같은데 ...

2007-12-30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7-12-31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과 관련된 책을 원하신다면, 오질비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라캉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은 아니지만, 지젝이나 이런 사람들이 라캉을 보는 것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라캉을 소개하는 책이죠. 분량은 적지만, 라캉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가 쓴 글이기는 하지만, {라깡과 알뛰쎄르}라는 글도 한 번 읽어보세요. {라깡의 재탄생}이라는 책에 수록된 글인데, 분량이 좀 많은 편이지만, 얼마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전출처 : 바람구두님의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하면 진보는 저절로 재구성되는가?"

바람구두님이 좋은 논평을 달아주셨는데, 이 논평에 대한 답은 사실 이광일 교수가 직접 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 그렇지만 글을 퍼온 사람으로서 몇 마디 촌평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선 라인홀트 니버가 스피노자를 대놓고 표절하는 게 인상적이네요.(ㅋㅋ "표절"이라는 건 농반진반의 얘기인데, 그가 스피노자의 주장을 거의 문자 그대로 옮겨오고 있어서 한 마디 해봤습니다.) 바람구두님 이야기는, (1) 이광일 교수의 대선평이 니버식의 의미에서 중산층의 편견을 드러내고 있지 않느냐, 그 이유는 (2) 그가 자주파와 단절을 통해 민주노동당이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결국 평등파 또는 PD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3) 또 이 후자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현실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자주파와의 "청산"이 "내부의 권력 투쟁이나 스스로의 반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주장을 통해 쉽사리 진행될리도 없고, 그 과정에는 엄청난 자기부정과 반성이 필요한데 그것이 과연 쉽겠느냐는" 의문 때문인 듯합니다. (4) 더 나아가 "평등파의 노선이 과연 자주파에 비해 더 유연하고, 우위를 차지할 만한 것인가란 의문"도 피력하시는군요. 그런데 우선 이 교수가 "평등파"의 입장을 대변하는지(2)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듯합니다. 물론 자주파와의 단절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그게 그거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읽기로 이 교수의 논점은 민노당 내 자주파가 그동안 범했던 과오나 이번 대선에서의 문제점들을 고려해볼 때, 또 결국 대선에서 참패를 했음에도 그들이 어떤 책임이나 쇄신의 자세를 보여줄지 지극히 의문스럽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민노당이 쇄신되기 위해서는 자주파와의 단절이 어떤 식으로든 모색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데 있는 듯합니다. 이건 당내 투쟁에서 어떤 정파를 지지한다는 것과는 좀 다른 입장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 교수가 (3)의 어려움을 모르겠느냐 하는 것도 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교수의 글은 대선 논평으로는 다른 글들에 비해 좀더 균형감이 있고 여러 측면을 적절히 잘 고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도 정당 바깥의 운동의 문제를 별개로 고려하고 있는 점도 얼마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물론 이 점이 이 글의 주요 논점은 아니긴 합니다만). 따라서 이 교수의 글은 당내의 어떤 특정한 정파를 두둔하거나 하는 것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냐고 추측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봅니다(4). 설사 어떤 정파의 관점을 지지한다고 해도, 이 글 자체는 정세 분석을 위한 토론 자료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바람구두님의 논평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결국 자주파와 어떻게든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냐'(5)고 말이죠. 물론 바람구두님의 생각은 그것과는 거리가 있겠죠. "자주파만의 단절이 아니라 그간의 운동 관성, 진보의 관성과도 결별하는 완전히 새로운 구성은 불가능한 것이냐는 것"(6)이 바람구두님의 논평의 요체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교수가 지적한 것과 바람구두님의 결론(6)을 대비시키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건 니버가 지적한 편향과는 또 다른 편향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대선에서 진보의 참패라는 구체적인 결과에 대한 분석과 그 구체적인 대안에 관해 지적하는 글에 대해 (6)을 또 다른 대안으로 내놓는다면, 그건 결국 (5)같은 불만이나 비판을 초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물론 바람구두님의 의도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결과적으로 바람구두님의 글이 그렇게 읽힐 소지가 여지가 있을 듯합니다. 저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바람구두님과 비슷한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에 이 논평에 공감을 하면서도, 운동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 이런 류의 답답한 고민의 토로가 먹물들의 공리공론으로 비칠까 두렵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문제는 진보적인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제도 정당 내부와 바깥에서 이번 대선의 효과와 교훈을 토론하고 좀더 건설적인 대안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될 텐데요, 그러기 위해서 니버의 말은 숙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이 교수의 글이 니버가 말한 중산층의 편견을 노출하고 있다고 보는 건 좀 과도한 평가인 듯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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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maud 2007-12-27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어지러워요. 하튼 NL이 제대로 된 진보 진영을 펼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건 맞는 이야기죠?

grimaud 2007-12-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조선일보가 조승수 소장과의 인터뷰를 "민주노동당, 친북 세력과 결별해야"라는 기사로 뽑았네요.

balmas 2007-12-28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에 인터뷰가 났군요. 저녁에 MBC 뉴스에서도 기사가 나오던데 ... -_-;;;;;;;;;
 
 전출처 : 바람구두님의 "손문상 화백 - 성탄과 태안"

아, 적절하게 문제제기를 잘 하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 문제는 공론화해서 좀더 천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바람구두님이 좋은 타이밍에 좋은 기획을 하신 듯합니다. 다음호를 한 번 유심히 읽어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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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45654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 '진보' 재구성하자


[이명박시대 전망](9) - 대선 평가를 둘러싼 몇 가지 숙고와 진보운동



이광일(성공회대)  / 2007년12월24일 16시34분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48.7%를 득표하였고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26.2%의 지지율을 얻었다. 진보를 자임한 민주노동당은 3%, 사회당은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의 득표를 기록했다. 이러한 선거결과에 근거하여 권력의 행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다수 언론들과 정치평론가들은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를 전제로 선거 의미에 대한 촌평과 향후 전망을 제출하고 있다. ‘이명박특검법’에 대한 한나라당의 연이은 거부권행사 요구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정 이것이 전부인가. 한나라당의 승리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는 있다. 그저 ‘그들의 말’에 휩쓸릴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압도적 승리’에 가려진 것


첫째, 투표율과 득표율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이번 선거의 전체투표율은 62.9%로 37.1%의 유권자가 투표를 하지 않았다. 대선 중 역대 최저의 투표율이다. 이를 고려해 산술적으로 추산해 보면, 이명박 후보는 전체유권자 가운데 약 30.8% 정도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압도적 지지’에 의한 당선이라는 평가는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전망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오히려 투표하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번 선거에서 정권교체의 열망이 높았던 보수정치세력 지지자들의 결속력은 매우 높았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에 무소속 이회창 후보의 15.1%를 합하면 63.8% 정도가 보수파를 지지하였고 이것은 전체유권자의 40% 정도이다. 투표할 만큼 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추할 때, 기권표에는 항존하는 정치적 무관심층 이외에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의 표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선거 결과가 진즉에 결정되었기에, 혹은 기존 진보정당들의 퇴영적인 모습과 새로운 의제(agenda)가 빈곤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투표와 연결시키지 않은 층이다. 민주노동당 지지자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반한나라당’이라는 방침 아래 열린우리당 후보를 찍었을 것이고 또 다른 적지 않은 부분은 퇴영적인 민노당에 실망하면서 기권했을 것이다. 사회당의 지지율이 당원수에도 훨씬 못 미쳤다는 점을 감안할 때, 거기에도 다수의 기권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지난 선거에서 “그래도 진보정당인데’라며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었던 진보, 급진지향의 대중 가운데 다수가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이 비현실적일까.


물론 투표율과 득표율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기권표의 성격을 무시한 채, 이번 선거를 한나라당의 ‘압도적 승리’라고 평가하며 향후 정치지형을 점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너무 과잉 평가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이 지니는 한계는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한나라당의 ‘이명박특검 철회요구’가 그것이다. 이러한 압박은 최소한 특검의 행보를 미리 제한하려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이 침묵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더욱 자극하는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보진영의 경우, 최소한 내년 총선의 향배와 대책, 그리고 노무현정권보다 더 강한 신자유주의 공세가 예상되는 지금, 이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이들 가운데 최소 10-15% 정도가 어떤 의제를 매개로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이느냐가 향후 정치지형과 관련하여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보정치세력의 재구성 여부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진보의 덕목이 무엇인가. 현상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념과 실용의 대비’, 현실을 가리는 이데올로기


둘째, 대부분의 언론이 합창하는, 이념이 탈각되고 실용이 압도한 선거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이러한 평가는 보수의 언어로 현실을 가리고자 하는 반지성적인 평가이다. 지금 지구적, 일국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정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 발상에 의해 압도적으로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97년 IMF위기 이후 한국정치의 궤적 또한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번 선거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후보에 대한 20-30대의 지지를 두고 ‘젊은 세대=진보’라는 등식이 깨졌다고 부산을 떨고 그것을 근거로 ‘실용주의’가 승리하였다는 평가가 무반성적으로 제출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사의 기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제고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일부 언론, 시장에 지배받는 여론조사기관과 정치컨설턴트 등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극적 평가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그 근거가 견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실한 것도 아니다. 사실 이들 세대의 거의 다수는 신자유주의 이외에 어떤 이념과 발상, 대안들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어떤 사회관계와 권력관계 위에서 작동하고 있는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집권 대통합민주신당과 야당인 한나라당이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인지 여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다수의 일반 대중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렇기에 이들은 내용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이라는 신자유주의정치세력들의 선동적인 말 한마디와 자신의 미래를 기꺼이 바꾸는 대담함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이들 세대에 “당신은 스스로를 진보적 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보수적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어 그 응답률로 이들의 진보성 여부를 규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또한 젊은 세대의 특성상 이들 가운데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응답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연구자적 입장에서 말하면, 이런 이유로 인해 ‘양적 조사방법’이 아닌 ‘질적 조사방법’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흔히 평가하듯 ‘이념의 탈각’과 ‘실용주의의 부각, 압도’는 서로 대립시켜 비교,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이념, 발상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비대칭적인 현실 때문에 그 안에서 실용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개혁,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언론들조차 비판 없이 추종하는, 즉 새로이 출범할 이명박정권을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정권’ 등으로 묘사하는 평가는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마치 이념과는 관계없는 듯 행세하면서 현실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권력의지에 스스로를 복속시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운명과 활로


셋째, 기존의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의 향후 위상과 관련된 평가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이 얻은 득표율은 26.2%로 지난해 5.31지방선거의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열린우리당이 얻은 21.2%보다는 높다. 하지만 지자체선거와 달리 이번 선거가 대통령선거라는 점, 투표율이 당시 투표율보다 10% 이상 높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대동소이한 득표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다 이들 세력이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전화한 이후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이 거의 사라진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득표율은 자유주의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득표라 할 수도 있다. 집권을 위해 과거 이들이 3당합당, DJP연합 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이들이 왜 그토록 ‘반한나라당의 단일화’에 목메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들이 다시 살아날 수는 있을까. 곧 다가올 내년 4월의 총선거에서 그것은 가능할까. 다수의 언론과 평론가들은 ‘친노파’와의 단절 실패와 ‘도로 열린당’으로의 회귀 등을 참패의 핵심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른바 ‘노무현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법은 탈노무현이다. 그런데 진정 이들이 탈노무현프레임을 구축할 수 있을까. 애석하지만 이번 선거 과정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왜 불가능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노무현프레임의 핵심이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97년 IMF위기를 계기로 등장한 김대중정권 이후 자유주의정치세력에게 주어진 역할은 신자유주의를 국가사회의 운영원리로 정착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탈노무현프레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김대중정권과 노무현정권을 거치며 심화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제동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이번 대선에서 나타났듯 자유주의정치세력은 그것에 제동을 걸기보다 오히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신자유주의정책에 더욱 더 밀착하는, 따라서 한나라당과 더욱 유사한 정책을 제출하기 일쑤였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이들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차별성을 이른바 ‘평화.개혁세력’이라는 언술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87년 식 ‘민주 대 반민주’의 구호로 한나라당을 반평화, 전쟁수구세력으로 몰았지만, 대중은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DJ가 ‘한나라당의 집권’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역설하며 이들을 돕고자 하였으나 그것 또한 찻잔 속의 미풍도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신대북정책’으로 맞불을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 이유는 이른바 평화.개혁을 상징하는 개성공단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분업체제에 북한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의 문제 아니었던가. 즉 대북정책은 신자유주의체제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하위정책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개혁 담론은 대중에게 주변적, 부차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온한 삶을 사는 대중은 그나마 무엇인가 새로운 가치들을 자기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삶 그 자체에 등이 휘어 고통 받는 대중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들은 그 고통을 강제한 가시적 정치권력을 가장 중요한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반면, 그 고통을 해소시켜주겠다는 선전과 선동에는 강하게 이끌린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의 길’만이 실현가능한 활로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즉 ‘진보적 대안’이 의미 있는 대중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한 상태이라면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명약관화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은 다시 살아남을 수 있는가. 그들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이번 대선과정에서 이미 그들 가운데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커다란 줄기에서 차이가 없는 한나라당, 이회창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야기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자기화하면서 그러한 문제를 완화, 해소하는 방향으로 선명히 이동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길은 이번 대선에서 범여권으로 분류된 창조한국당의 정책 내용과 통할 것이다. 기우에서이지만 어떤 정치세력, 어떤 당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세우는 내용이 중요하다.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대표되는 현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이 두 가지 길을 중심으로 하여 재구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혹시 그들이 진보정치세력과 연대할 가능성은 없는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집권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 그들은 자신들을 개혁주의자, 민주주의자로 포장해 대중에게 소개해 왔다. 어떤 이는 그들이 ‘좌파신자유주의’라고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았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좌파’였고 그것은 단지 개혁,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다. 여전히 다수의 대중은 그것이 신자유주의 개혁,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라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삶에 고통 받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과 번영을 약속하는 신자유주의’를 ‘좌파의 사슬’로부터, 즉 혐오스러운 ‘개혁주의자, 민주주의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현실의 고통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좌파 아닌 자유주의정치세력이 한편으로 좌파를 조롱, 희화화시키면서 다른 한편 그것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노무현정부가 이명박정권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라는 세간의 평가로부터 진보가 끄집어 내야하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정치적 교훈이다. 이런 그들이 어떻게 진보와 연대할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신들의 주장이 옳았고 대중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남북관계를 경색시켜 줄 것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어디 그것도 한나라당 마음대로 되겠는가.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은 그리 간단치 않다.


진보의 완패와 진보정치세력의 재구성


마지막으로 진보정치세력의 현재, 향후 전망과 관련된 것이다. 민주노동당, 사회당에 대한 피판은 이미 많은 것들이 제기되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비판이 전혀 먹히지 않는 화석화된 정당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에 바라는 것은 최소한 진보정당에 부합되는 행보를 걸으라는 것이다. 굳이 “제도정당은 어쩔 수 없어!”라는 낡은 비판에 기대고 싶지 않다. 또 그 제도의 경계를 넘어서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민주노동당, 혹은 사회당의 몫이라기보다 ‘더 많은 진보, 더 많은 민주주의’를 목표로 제도/비제도의 경계를 헐어야 하는 ‘운동정치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신대북정책 한방에 끝난 완고한 민족주의, 코리아연방, 그리고 말의 성찬뿐인 환경 및 생태문제에 대한 언급,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무지와 감수성 빈곤 등은 그 지지자들, 우호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을 진보정당으로 호명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비정규직노동자의 당’이라고 외쳤지만, 비정규직법의 통과 과정에서 보인 비일관성과 동요 이후 민주노동당의 그러한 외침은 의구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혹시 민주노동당의 정파들이 과거에 뿌렸던 땀과 눈물로 현재 자신들이 진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굳이 ‘87년 체제’의 종말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민주주의와 진보는 과거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그것들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서 있는가를 그 판단의 유일한 준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노동당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다른 한편 사회당은 어떤가. 그 대선후보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선출되었는가. 그것이 내세운 ‘사회적 공화주의’는 또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 그에 대해 대중은 물론 그 당원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 사회에 공화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없다. 문제는 그 ‘사회적’이라는 수식인데, 그것은 결코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사회관계들에 내재한 차별과 배제를 제거하자는 ‘급진민주주의’의 또 다른 정치적 판본으로 독해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당이 환호한 창조한국당의 ‘사람중심 진짜경제’가, 그에 근거한 경제정책들이 ‘사회적 공화주의’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사람중심의 진짜경제’에 대해 보였던 공감과 환호는 자유이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인간일반이 아니라 분열된 역사적 사회관계들이다. 그 안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이며 정치들이다. ‘사람중심의 진짜경제’가 사회당의 급진민주주의와 무언가 상통한다고 생각하며 거기에 환호하였다면, 지금 사회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선거가 끝난 지금, 사회당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잠시 접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회당의 몫이 아니다. 지금 사회당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번 대선과정에서 자신들이 보인 정책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냉철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중은 사회당이 무엇을 하는 정당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당원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0.07%의 지지율이 사회당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 공당으로서의 사회당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반증하는 증거로서는 충분한 수치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대선의 진짜 패배자는 ‘개혁진보세력’이 아니라 진보정치세력이다. 이번 선거의 판세는 63.8% : 26.2%+3%+0.07%가 아니다. 63.8%+26.2% : 3%+0.07%, 즉 90% : 3.07%인 것이다. 여기에 만일 창조한국당을 친신자유주의 정치세력으로 규정할 경우, 그 패배의 골은 더욱 깊다. 범신자유주의세력이 투표자의 96%를 획득한 것이다. 이 초라한 3.07%를 가지고 진보정치세력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좌고우면할 일이 남아 있는가. 진정 대중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버리는 길밖에 없다.


첫째, 그 방법이 어떠하든 민주노동당은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계급적이지도, 급진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완고한 자주파’들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그 재편의 과정에서 사회당 등과 통합할 필요가 있다. 변화를 전제로 한 민노당과 사회당의 강령은 내용상 서로 함께 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제도정당 외부의 계급적, 급진민주주의적인 정치세력들, 혹은 ‘계급좌파’와 ‘비계급좌파’ 또한 이러한 움직임을 외면하지 말고 직간접적으로 개입, 결합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같은 ‘제도정치=개량주의’라는 낡은 혐오는 금물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그 한계는 제도/비제도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자 하는 운동정치들의 과제로 계속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재검토, 철회되어야 한다. 지금 배타적 지지는 오히려 진보정치의 보수화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러한 변화에 기존 진보정당의 대중적 명망성과 영향력을 지닌 리더들이 동참하도록 최대한 요구할 필요는 있지만, 결코 그들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 ‘낡은 틀’에서 비상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인물보다는 바로 그 낡은 틀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이 진보정치세력에게 준 기회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시간은 진보정치세력을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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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고한 자주파'와 단절하면 진보는 저절로 재구성되는가?
    from 바람소리 쓸쓸한, 風簫軒 2007-12-26 13:57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고딩 때부터 주변 친구들과 사투를 벌일 때부터 언제나 반NL전선을 구축해온 사람이고, 이번 대선 과정은 물론 이전 대선 과정에서도 NL친구들이 어떻게 활동을 벌였는지 나름 알고 있고, 그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이 끝난 뒤에는 격분한 나머지 <이제 진보운동은 자주파와 결별할 때다>란 주제로 글을 썼지만 발표는 하지 않고 묻어두고 말았습니다. 평소 자주파의 수령관이나 분단 이후 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