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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정치, ‘박근혜 카드’는 없다
     
민주주의와 여성정치세력화, 따로 가지 않아

조이여울 기자
2004-03-29 05:51:03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난파선’의 선장 자리에 여성을 앉히고 있다. 그리고 몇몇 언론은 그것을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관시키려 하고 있다. 심지어는 박근혜의 당대표 선출을 두고 여성운동계에 ‘환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한다.

당연히 여성운동계는 비판적이다. 민주화 운동과 함께 해 온 여성운동이 아닌가. 그 역사가 있는데 어떻게 유신독재라는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지 않은 박근혜를 여성의 ‘대표’로 인정할 수 있으며, 그의 당 대표 선출을 환영할 수 있겠는가.

‘박정희의 후광’이 그를 키웠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후광’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정계에선 한나라당이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려면 박정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그 이미지와 맞물리는 박근혜를 활용해야 한다는 이른바 ‘박근혜 역할론’이 제기됐었다.

2001년 박근혜 대표가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 당시 이회창 총재와 갈등을 빚었던 내용은 다름아닌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 당시 박근혜 부총재는 이회창 총재에게 “지난해 의원연찬회가 열렸을 때 아버지 기념관을 둘러보라고 건의했는데 李총재는 보지 않고 갔다. 동작동 국립현충원 참배 때 단 한차례도 아버지 묘소를 찾지 않았고, 5.16 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중앙일보 보도)며 “선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입장을 밝히라”고 다그쳤다. 박근혜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2002년 당시 한국미래연합 대표였던 박근혜씨는 6.13 지방선거 정당연설회에서 “피눈물 흘리면서 배고픔을 해결한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고 아버지가 이룬 경제부흥을 내가 직접 정치를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생각이 들어 정치를 시작했다”(오마이뉴스 보도)고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박정희의 정치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다름아닌 박 대표의 홈페이지다. 홈페이지엔 그가 ‘걸어온 길’이 단계별로 나와있다. 첫째가 ‘대통령의 딸’, 둘째가 ‘22세의 퍼스트 레이디’, 셋째가 ‘10.26 이후’ 그리고 마지막이 ‘국회의원 박근혜’로 되어 있다. 박 대표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면서도 ‘박정희 기념관’ 설립에 앞장 선 장본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박근혜의 이중전략에 말려든 언론

한나라당은 박근혜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기존 한나라당 지지세력의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한국정치의 가장 큰 병폐라 할 수 있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것임은 물론이다.

연일 보도되고 있는 ‘박정희 향수’ 열풍도 빼놓을 수 없다. 박근혜 대표가 가는 곳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까지 등장하고, 박 전 대통령 내외를 떠올리면서 눈물까지 흘리는 시민들도 있다. 박근혜 대표가 23일 열린 한나라당 당대표 후보 연설에서 “여러분이 아시듯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사람”(조선일보 보도)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감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는 이렇듯 ‘아버지의 후광’과 ‘어머니의 이미지’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한편으론 ‘박근혜는 박근혜’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이중전략에 가장 잘 발맞추어주고 있는 것이 언론이다. 각 방송사와 신문들은 ‘박근혜 카드’가 먹힌다며 한나라당의 전략을 홍보해주느라 여념이 없다.

또한 박정희 향수에 젖어 환호하는 시민들을 아무런 논평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의 상징적인 인물이건만, ‘탄핵’과 ‘촛불시위’에 대해 보도할 때는 ‘민주주의’를 그토록 원하는 것처럼 보였던 언론들조차 박정희 향수가 갖는 문제점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여성정치’가 우습나

이 와중에 가장 우려되는 일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박근혜씨가 한나라당 대표로 확정되자 언론은 앞다투어 ‘여성정치 시대’가 열렸다 하더니, 여성운동계의 차가운 반응에 약간 주춤한 분위기다. 다만 재작년 대선 이후 ‘정당 불문 여성 지지’ 입장을 보이고 있는 여성신문은 “핑크 리더 시대”가 열렸다며 박 대표를 띄워줬고, 여성문제에 관해 별 관점이 없는 오마이뉴스는 ‘박근혜가 홍사덕보다 백배는 낫지 않아요?’라는 다분히 선정적인 기사를 실었다.

수다 형식으로 풀어가는 ‘여성정치 시대’에 대한 오마이뉴스 포럼에서 참석자들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했다. 정치인 박근혜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 반드시 청산해야만 하는 ‘독재와 권위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성찰하지 않은 채 말이다. 포럼에 참여한 여성들의 ‘외모’부터 언급하면서 시작된 오마이뉴스 기사는 정운현 편집국장의 “남자체면이 오늘 말이 아니네요”라는 가부장적 멘트로 끝을 맺고 있다. 진정 민주주의와 여성, 역사와 여성, 국민과 여성은 별개인 듯이 보인다.

“남성들이 죽을 쑨 판을 이젠 여성에게 맡겨야 한다”는 이미지 효과를 일면 얻는다 해서, 정치인 박근혜를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결시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이 유신독재라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해와 역사의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단 말인가.

‘박정희 향수’가 탄핵정국보다 더 위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당 대표로서의 업무 첫날 성당과 교회와 절을 방문해 ‘반성의 기도’와 ‘참회의 108배’를 올렸고, 이를 ‘과거와의 단절’이라 선전했다. 그것이 얼마나 얄팍한 정치 쇼인지 아는가. 한나라당의 ‘차떼기’에 대해서는 속죄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면서, 자신의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해선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중죄도 속죄하지 않고, 아버지와의 단절을 선언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던 언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박정희 정권은 그저 ‘보수’가 아니었다. 지금의 보수야당의 횡포는 박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에 비할 바 못 된다. 지금이야말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고 판단해야 할 때가 아닌가. 고작 절을 108번 했는지, 3000번 했는지 논하고 있을 때인가.

아니, 적어도 ‘박정희 향수’에 대해선 문제 제기해야 하지 않는가. 보수 언론의 꾸준한 노력으로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의 아버지’라는 칭호와 이미지를 얻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정경 유착과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 불신의 구도는 다 박정희 권위주의 정치의 산물이 아닌가.

영화 <실미도>를 보고 분노했던 국민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30년 전 실미도에서 벌어진 “이데올로기 시대 한반도 역사의 씻을 수 없는 오욕”이라는 이 사건이 바로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 탄핵정국에 들어서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며 외친 것은 ‘민주주의 수호’ 아니었나? 대대적인 촛불시위는 역사가 되돌아가선 안 된다는, 과거 권위주의 정치 청산을 염원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박정희 향수에 젖을 수 있단 말인가. 박정희의 후광으로 거대야당 대표자리까지 오르게 된 정치인 박근혜에 대해 ‘참신’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줄 수 있단 말인가.

여성운동이 민주화 운동과 궤를 같이 했듯이, 여성정치세력화 역시 민주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민주주의는 시간이 흐른다고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의 청산만큼 중요한 것은 유신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고, 그 과정에서 탄압 받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독재라는 극단의 ‘가부장’ 정치를 해온 ‘아버지’의 유산으로 거대야당의 대표가 된 정치인 박근혜를 ‘여성정치’, ‘여성정치세력화’와 연관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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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신문]에서 퍼왔습니다. 시의적절하고 좋은 지적을 담고 있는 기사입니다. [교수신문]의 존재 이유 중 하나를 잘 보여주는 기사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일부 출판사들과 재야, 대중적 지식인들, 언론매체들 사이에 맺어져 있는 유착관계를 적절하게 제어하고 교정하지 않는다면, 한국 지식사회는 더 큰 수렁에 빠져들 것입니다.

 

학문의 통언어적 실천 본격…빈약한 내용 돌파 관건
흐름 : 대중적 글쓰기 붐 어떻게 볼 것인가

2004년 04월 23일   강성민 기자 

학계의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 엘리트주의는 학문을 자율적인 영역으로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고 요긴한 것이었다. 하지만 내부에서 아무리 활발하고 뭔가 대단한 것을 하는 듯한 ‘효과’를 내더라도, 현실의 제도와 삶을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면 그 기득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자율성의 함정’이 인식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이른바 ‘지식의 대중화’가 목소리를 높여온 것은 대략 1990년대 후반부터이고 그것이 일각에서 ‘대세’로 인식되고 움직이면서 하나의 지류를 형성한 것은 2000년 이후다.

‘보편적 청중’ 확보해 학문위기 타파

지식대중화를 말할 때 지배적인 心象으로 떠올리는 것은 ‘대중적 글쓰기’다. 대중적 글쓰기는 어려운 전문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 이 대중적 글쓰기의 순기능은 학계의 전문지식과 대중의 접촉포인트를 대폭 늘려 학문적 성찰성과 깊이있는 지식의 토대 위에 우리의 삶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데 있고, 또한 철학·한문학 등 고사직전에 처한 순수학문의 위상을 되살려낸다는 데 있다.

이런 실용적인 측면 말고도 ‘대중적 글쓰기’가 원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중대한 기능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학문을 하는 목적이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선 근대적 학문이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특수한 보편성’이라는 형용모순에 기초해 있어, 횡단성과 1인2역이 중요시되는 오늘날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분과학문이 자신이 근거한 특수영역을 넘어설 때는 매우 ‘기형적인 것’ 아니면 ‘유아적인 것’이 돼버린다는 것에 대한 자각인 셈인데, 따라서 대상을 궁리하는 일 자체가 ‘보편적인 청중’을 염두에 두고 진행될 때에만 통언어적인 학문이 가능하다는 게 ‘대중적 글쓰기’의 실천개념에 들어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지식 대중화’의 다양한 실천들은 ‘교양서적’의 범람에서 그 존재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일단 양적이고 외형적인 측면에서 학계의 엄숙주의, 전문가주의, 논문 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균형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면 오늘날 지식대중화 현상이 과연 앞에서 언급한 실용적이고 본질적인 역할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호에 가려 보이지 않는 허점과 이데올로기가 많은 것 같고, ‘대중’이라는 마술에 기대는 정도에 따라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생긴다.


지식의 대중화는 지식의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창조적 파괴’를 동반하는 매우 묵직한 과정이다. 그것은 생각하기와 말하기의 관행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고도의 추상화 작업으로 철학성과 깊이를 획득한다면, 반대로 ‘고도의 구상화 작업’으로 그 구체성의 세계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의 대중화에 이런 ‘구상화’가 담보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선 그 작업이 주제나 사유 차원에서 일어나기보다는, 소재나 관점, 글쓰기 차원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미시사’와 ‘생활사’의 열풍이 그 일단을 엿보게 해준다.

‘고도의 구상화’ 없는 글쓰기의 迷夢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을 수용하면서 2년 전부터 본격적인 미시사 적용서들이 선보였는데, 백승종 서강대 교수(한국사)의 ‘그 나라의 역사와 말’(궁리 刊),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돌베개 刊)는 ‘개인’을 통해 역사전체를 새롭게 보려는 획기적인 시도로 주목을 받았지만 곧 비판에 부딪쳤다. 한 개인의 삶과 철학이 시대와 맺는 관련성 및 시대의 지형도를 새롭게 볼만한 요소를 내포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그의 작업은 일정한 의미망을 형성했다. 전자는 이찬갑이라는 평민지식인의 ‘일기’를 따라읽었고, 후자는 사상가인 하서 김인후와의 가상대담을 통해 그의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을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소재와 관점, 글쓰기 방법론이 독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선비의 생활사를 다룬 책은 정창권 고려대 강사(국문학)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刊), 허경진 연세대 교수(국문학)의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푸른역사 刊)등이 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물론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의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刊)이나 고미숙 씨의 ‘열하일기, 그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刊)처럼 각각 5만부, 2만5천부의 판매고를 올린 경우도 없지 않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불황과 관계없이 콘텐츠만 확실하면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사례”라며 치켜올린다. 유재건 그린비 대표도 “과거의 마이너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고, 기존의 메이저들이 차지한 영역을 침투해 새로운 중심을 세울 것이다”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런 확신들은 앞의 책들이 기존에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소재와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신선한 시도”라는 데서 생겨나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글쓰기나 소재나 관점에서 뭔가 새로운 걸 끌어들이는 게 요즘 ‘대중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독자의 ‘인식’을 바꿔놓을 정도의 새로운 역사상이나 철학적 전언은 없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은 것이 아니라, 헌 술을 냉장고에 넣었다가 내놓는 격이라 첫맛은 시원하지만 끝 맛은 더욱 야릇하고 찝찝할 때가 많다.


문학평론가 김인호 씨는 “펼쳐 보다가 10쪽도 못읽고 덮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라는 개인체험을 전한다. 그는 “예전에는 10만부 판매를 너끈히 기록했을 책들이 요즘은 만부에 그치고 있다는 건 근래 책들이 대동소이한 소재와 문체, 고만고만한 이야기들로만 승부하려는 유행현상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현식 인천대 강사(국문학)도 비슷한 생각이다. “고미숙 씨의 옛날 책들은 지적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었지만, ‘열하일기…’는 그분이 쓴 책인가 싶을 정도로 실망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현재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미시역사서를 둘러싼 출판계의 자화자찬은 ‘비판적 검증’을 겪지 않은 ‘시장판매’에 따른 추후적 해석과 자의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지고 계속 ‘대중적 글쓰기’를 추궁하다 보면 지적 쏠림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사회의 독서가 비평적 잣대를 상실한 주류언론이 조성하는 지적 경향을 좇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수시로 정보를 주고받는 언론과 출판사 그리고 아카데미를 답답해하는 학자들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가 띄운 ‘읽을거리’가 ‘대중적 글쓰기’ 자체로 포장되다보니 본질이 가려지는 것이다.

지식대중화, ‘비판적 중계자’로 거듭나야

‘재야’라는 것의 이데올로기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의, 특히 역사학 분야에서의 재야는 민족주의 사학에 대한 강한 반감을 토양으로 성장해왔다. 이덕일, 이희근, 남경태를 거쳐서 최근의 강명관, 백승종, 김현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의 반열들은 기존 학계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刊)에서 조명되는 송시열은 예학의 선봉장이 아니라 숙청의 칼을 허리에 찬 당파의 냉혹한 우두머리로 조명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기존학계의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이 비판대상자와의 최소한의 담론적 교집합 위에도 서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설령 송시열과 관련된 재야의 지적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담론의 교집합 속에서 반대담론과의 부딪힘과 융합없이, 순전히 바깥에서 담 안쪽을 향해 욕하는 식으로 비판이 이뤄져서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송시열이라는 역사인물의 복합성이라는 주제 자체의 속성을 가지고 따져볼 때도 그렇다. 이런 진정성 획득의 실패는 주제를 다루는 배타성과 편협성에 기초해 있는 것이고 또한 어느 정도의 ‘말초적 대중영합주의’의 산물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에 오면 상황이 더하다. 최근 역사학계의 ‘대중적 쓰기’는 이런 최소한의 비판적 역할마저도 팽개치고 있다. 이는 학계와 독서계를 연결해주는 ‘중간필자’ 지식인이 전반적으로 놓여있는 상황을 점검해보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중계자’의 역할, ‘앵커’가 되지 못하고 쉽게 풀어주는 ‘아나운서’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가장 눈에 걸린다. 견고한 것을 소프트하게 바꾸는 역할로 제한된다는 것은 학계의 역량을 量化시키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맛깔스럽다는 것은 글쓰기의 한 특성으로 국한돼야지, 그것이 책의 전체를 저울질하는 기준으로 적용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쉽다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전문성’의 이데올로기에 비해서는 인간적이지만, 그 부작용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대중적 글쓰기의 한계는 명백하다. 그것은 내용의 상한선을 명백하게 긋고 시작함으로써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행위이다. 쉬워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너무 깊게 들어갈 필요가 없고 예시를 많이 들어서 설명하자는 계율은 마치 허들경기와도 같이 정형화된 힘겨운 몸짓을 생산해낸다.


‘쉽게 쓰기’가 일말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까닭은 글쓰기의 권력이동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은 글쓰기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에게로 이동된 시기다. 이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권위를 갖지 못하는 시대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의 대중적 글쓰기는 일종의 패러다임 변환에 종속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대중의 감수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주류가 되기 위한 선택인데, 이렇게 볼 때 대중적 글쓰기는 글쓰기에 대한 정교한 자기성찰성을 기반으로 해서 생산된 흐름이라기보다는 외재적 환경에 의해 주어진 수동태인 것이다. 이런 대중적 글쓰기에 내재된 수동성에 주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쉽사리 ‘타협적이고 패턴화된 글쓰기’로 정형화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요즘 학계의 인기저자들의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피로감’도 이런 구조적 변수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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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4-2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balmas 2004-04-2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사가 시의적절하고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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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가 이번 주에 동문선에서 출간되었다고 한다.

아직 책을 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지금 심정은 한편으로 기대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불안하다.

이전에 민음사에서 김성도 교수가 번역했던 [그라마톨로지]의 <교훈>이 있었으니, 이번에는 역자가 좀더 정성을 기울여서 번역했을 것이라는, 다소 막연한 기대감(또는 오히려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희망),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한글로 읽어서 시간을 좀 벌 수 있었으면 하는 다소 이기적인(?) 욕구,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데리다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이 책을 한글로 제대로 번역하지 않고서는 국내에 데리다 철학을 정확히 소개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사실에서 따라나오는, 이 책은 제대로 번역되어야 하니 제대로 번역되었어야 하고 따라서 제대로 번역되었을 거라는, 거의 망상에 가까운 추론(?)이

함께 뒤섞여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는 반면,

그 동안 국내의 데리다 번역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이 책 역시 제대로 번역되기는 어려울 거라는, 매우 비관적인 귀납적 추론,

출판사의 명성(?)을 감안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번역자 자신의 개인적 능력과 성실성뿐인데, 과연 이러한 주관적 조건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객관적인 난해성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회의가

이러한 부풀려진 기대감을 여지없이 터뜨려버린다.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건, 구내 서점에 가서 번역의 질을 꼼꼼하게 검토하기 전에는 절대 이 책을 사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불확실한 상품구입에 3만원이 넘는 돈을 도박하듯 걸어볼 수는 없을 뿐더러 잘못된 번역본의 환불 요구 문제로 출판사와 입씨름하기도 싫고,

처치곤란인 책을 찢어버리지도 못하고 좁은 방구석에 쌓아두지도 못하고 모른 척하고 헌책방에 내다 팔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될 처지가 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번역이 잘 되었다면?

아직까지 나는 희망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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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4-2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로 기대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불안하다." Me too...

balmas 2004-04-23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더. 데리다 번역에 대해 칭찬하는 서평을 쓰고 싶다, 정말로.
이번에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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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철학자들 사진입니다. 레비나스의 귀여운(?) 모습하고 리쾨르의 코믹한 안경(^^)이 재미있군요. 수척한 알튀세르의 모습이나 쓸쓸한 사르트르의 사진, 들뢰즈의 검은색 스웨터 등도 인상적입니다.

 



 

 

 

 

 

 

 

 

 

 

장-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

 



 

 

 

 

 

 

 

 

 

 

엠마누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

 



 

 

 

 

 

 

 

 

 

 

루이 알튀세르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장-뤽 낭시

  

 

 

 

 

 

 

 

 

 

 

 

   알랭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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