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에 썼던 글을 하나 올립니다. [모색] 2호에 실린 글인데, 1960년대 이후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의 동향을 개괄하는 글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있을 테고, 과거에 공적 지면에 발표한 글을 다시 올리는 것도 쑥스럽고 해서 좀 뭣하긴 하지만, 앞으로 제가 발표할 몇몇 글들에 대한 <서론>의 명목으로 올립니다.  [모색] 2호가 품절된 것 같으니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들한테 얼마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각주와 관련하여 약간의 정보를 추가하고 용어와 관련하여 약간 수정한 것 이외에는 원래 [모색] 2호에 발표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용과 관련하여, 특히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관계에 대하여 한 가지 자기비판을 해야 할 게 있는데, 이는 앞으로 독립적인 논문의 주제로 다룰 생각이어서 첨삭 없이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스피노자의 현재성: 하나의 소개



스피노자의 '현재성'

  이 글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 글은 스피노자의 현재성의 이유들을 '논증'하거나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그저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의 몇 가지 측면들을 보여주려고 할 뿐이다. 이는 매우 간단한 이유, 즉 그럴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확인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에도 한 편의 논문은 너무 제한적이다. 이는 필자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의례적인 수사법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스피노자의 현재성'이라는 제목이 우리에게 낯설고, 따라서 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설명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무엇보다 국내에서는 스피노자가 아직까지 너무 낯선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서양철학이 도입된지 5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서양철학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국내에는 신뢰할 만한 스피노자 저서의 번역서가 거의 없는 데다 학위논문이 거의 배출되지 않고 있고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논문이나 저서도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히 제한된 지면 내에 외국에서의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설득력있게 소개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기껏해야 또하나의 최신 외제이론을 수입한다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현재성을 소개하고 확인해야 할 필요성, 또는 더 나아가 필연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철학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종언과 (탈)근대성의 이중적인 이론적 정세에서 좌파적인 이론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적어도 외국의 경우에는 쉽게 확인될 수 있는 사실로, 가령 알튀세르나 발리바르, 들뢰즈 같은 현대 프랑스의 주요 철학자들이나 안토니오 네그리(및 마이클 하트) 같은 이론가들은 스피노자에 관한 중요한 저작들을 산출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특히 프랑스나 이탈리아, 또는 미국의 여러 이론가들의 작업에서 스피노자는 300여년 전에 활동한 과거의 철학자가 아니라, 현재의 이론적 정세를 파악하고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준거로 현존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스피노자는 서양철학사의 위대한 한 철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좌파의 현재 및 장래를 위해 마땅히 소개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적어도 한번 제기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국내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소개의 범위를 제한할 수 있는 비교적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내에서 최근 형성되고 있는 스피노자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들뢰즈 또는 네그리 같은 철학자들의 작업에 대한 관심과 연속선상에 있는데[이는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소개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서들이 바로 이들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명백하게 확인될 수 있다. 루이 알튀세르, 서관모·백승욱 옮김, {철학과 맑스주의}(새길, 1995); 에티엔 발리바르, [반오웰-대중의 공포], 루이 알튀세르 외, 김민석 옮김, {마키아벨리의 고독}(새길, 1991)(이 글의 국역본은 오역의 한 표본이다),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윤소영,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안토니오 네그리, 윤수종 옮김, {야만적 별종}(새길, 1996)(이 역시 번역에 문제가 많다);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스피노자의 철학}(민음사, 1999); 마이클 하트, 이성민·서창현 옮김, {들뢰즈의 철학사상}(갈무리, 1996)(이 책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 참조. ], 실제로 이들의 작업은 스피노자의 현재성이라는 문제설정의 중심 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대상을 이들의 스피노자 연구의 주요 측면들을 소개하는 데 한정한다 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국내에 스피노자를 소개하는 데 더 적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스피노자의 기원

  먼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외국, 특히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의 현황을 간단하게 개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는 이론의 여지 없이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는 연구의 질적·양적 측면 모두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으며, 특히 스피노자 원전의 새로운 판본이 프랑스 대학 출판사(PUF)에서 라틴어-불어대역본으로 출간중에 있다는 사실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지금까지 스피노자 원전의 대표적 판본으로 사용되어온 칼 게파르트본(Carl Gebhardt, Spinoza Opera 4 vol., Carl Winter, 1925)을 대체할 새로운 판본은 총 8권으로 기획되었으며, 제 3권인 {신학정치론}이 1999년에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texte  tablie par Fokke Akkerman, trad. Pierre-Francois Moreau & Jacqueline Lagree, PUF, 1999.  {정치론}은 근간이 예고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스피노자 연구의 중심지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국내에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프랑스 제도권 철학은 전통적으로 유럽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철학사 연구를 중시하는 곳이고, 이런 전통 덕분에 프랑스 제도권 철학은 위대한 철학사가를 다수 배출해왔다. 중세철학 연구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에티엔 질송Etienne Gilson이나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의 초석을 마련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 또는 페르디낭 알퀴에Ferdinand Alquie 나 앙리 구이에Henri Gouhier 같은 사람들은 프랑스 철학사 연구를 대표할 만한 대가들이며, 이들의 작업 이외에도 프랑스 제도권 철학은 특히 소위 '고전주의 철학'이라 불리는 근대 합리론 분야에서 현재까지 많은 업적을 배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통에도 불구하고 60년대까지 프랑스에서 스피노자에 관한 연구는 극히 드물었다[이에 관해서는 특히 마트롱의 증언을 참조할 수 있다. Pierre-Fran ois Moreau & Laurent Bove, "A propos de Spinoza: Entretien avec Alexandre Matheron", Multitudes n 3, 2000. 이 대담은 이외에도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지적·정치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런 불모 상태에서 벗어나 프랑스에서, 또는 세계 전체에서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 전통이 세워진 것은 바로 1968-69년 2년 동안이었다. 바로 이 2년 동안 마르샬 게루의 {윤리학} 1부에 대한 기념비적 주석서[Martial Gueroult, Spinoza vol.1 Dieu(Ethique, 1), Aubier, 1968; Spinoza vol.2 Ame(Ethique, 2), Aubier, 1974. 원래 3권으로 기획된 게루의 {윤리학} 주석작업은 게루의 죽음으로 2권까지만 출간되었다.]와 더불어 들뢰즈와 마트롱의 스피노자 연구가 출간되었고[G. Deleuze, Spinoza et le probleme de l'expression, Minuit, 1969; A. Matheron, Individu et communaute chez Spinoza, Minuit, 1969(nouvelle  ed. 1988).], 이 저작들은 스피노자 연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5월에 발생한 학생-노동자의 반역으로 프랑스 사회가 격동에 휩싸여 있던 바로 그 때,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의 신기원이 확립되었고, 새로운 스피노자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스피노자 연구에서 '에피고넨의 시대'의 시작을 알린 이 연구들을 기점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스피노자 연구는 다른 어떤 철학자에 대한 연구에 견줘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풍요로운 성과를 낳고 있다[프랑스에서 산출된 주요 스피노자 연구 목록은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 말미에 첨부된 [참고문헌]을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역자 해제]도 참조]. 
   68년 5월의 반역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차치하더라도[68년 5월의 반역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논의로는 68년 5월 반역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Esprit Createur n 1, 2001을 참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대중운동 중 하나인 68년 5월 운동을 배경으로 해서 현대적인 스피노자 연구가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이는 특히 우리가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철학자들에게 그러하다.
   우선 정확한 인과관계야 어찌 됐든 이 반역운동이 '현대 프랑스 철학'[편의상 단수로 사용했지만, 이는 항상 복수로 읽혀야 할 표현이다. 하나의 단일한 철학, 특히 하나의 민족철학(독일철학, 프랑스 철학, 한국철학 ...)이 존재할 수 있으며, 또 존재해야 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극히 위험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도 큰 장애가 된다. (현대) 프랑스 철학은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그 자체 내에 극히 다양한 역사와 노선, 갈등과 경쟁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관한 특히 유익한 논의로는 Pierre Macherey, "Y-a-t-il une philosophie fran aise?", in idem,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9 참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때까지 프랑스 철학은 현상학적 실존주의에 대한 구조주의적 비판이라는 주요 전선 내부에서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언어학적·인류학적 구조주의에 대한 철학적 구조주의의 비판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65년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을 읽자}의 출간과 66년 푸코의 {말과 사물}, 라캉의 {에크리}의 출간은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68년 반역은 여기에 새로운 분화, 새로운 내부투쟁을 도입했으며, 데리다, 들뢰즈, 리요타르 등 소위 탈구조주의적인 철학이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간 자의적인 이런 식의 분류보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더 중요한 것은 68년 반역이 철학에 제기한 문제들이다. 68년 반역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두 가지 질문을 축으로 하고 있다. 첫째, 대중의 반역이 왜 혁명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는가? 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1972)의 주도적 질문을 빌려오면, 왜 대중은 스스로 지배되기를 원하는가? 이에 답변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유명한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논문을 썼고, 푸코는 70년대 내내 서양의 근대 주체의 계보학에 관한 연구에 매달렸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반오이디푸스}를 써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 결과 해방의 담지자로 간주되었던 주체가 실은 지배체계 재생산의 핵심장치라는 점이 드러났다.
  둘째, 대중은 이처럼 우둔하고 자신의 착취자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지만, 또한 대중은 때로는 반역할 줄도 안다. 어떻게 대중이 반역하는 일이 가능한가? 좀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구조에 사건이 도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는 지속가능한 것인가, 또는 지속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좀더 복잡하고 좀더 어려운, 그리고 아마도 현대 프랑스 철학의 유산을 집약적으로 표현해줄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이는 주체 없이 변혁을 사고해야 할 필연성은 무엇이고, 이를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지배, 혁명, 주체, 대중, 지식, 구조, 관계, 타자, 차이 등)이 어떻게 개조되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들은 스피노자 철학 또는 현대적인 스피노자 전유와 관련하여 크게 네 가지 문제로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구조주의 이후 현대 프랑스 철학과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적 문제설정인 이론적 반인간주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철학적 필요성은 어디에서 비롯하고, 왜 스피노자 철학이 이를 위해 필수적인 준거점이 되는가? 둘째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존재론적 기초와 관련된 문제이다.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기초짓고 있는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이 문제설정은 주체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철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이로부터 세 번째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반인간주의적 존재론 내에서 도출될 수 있는 인간학의 형식은 어떤 것이고, 이것이 어떻게 비주체적인 능동성을 가능하게 하는가? 네 번째 문제는 대중의 정치라는 쟁점이다. 정치에서 대중의 문제설정의 의의는 무엇이고, 이는 근대적인 해방의 정치를 어떻게 전위시키는가?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 이론적 반인간주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국내에서 비교적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지만, 정확한 이론적 쟁점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설정이 함축하고 있는 이론적 쟁점을 가장 분명하게 지적한 사람은 발리바르이다. 그에 따르면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철학적 구조주의의 중심적 문제설정으로, "라캉, 후기 푸코, 또는 알튀세르 등 어떤 위대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도 ... 주체를 실격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그 반대로 고전 철학에 의해 기초의 위치에 장착된 이러한 맹목적인 노력을 해명하고자, 즉 구성하는 기능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주체를 이행"[발리바르,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이론, 1993), 213-214쪽(강조는 발리바르).]시키고자 했다. 이런 해명에 따르면 결국 철학적 구조주의에 고유한 문제설정으로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는 철학적 근대성의 원리로서 (초월론적-구성적) 주체가 모든 인식과 활동의 가능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타율적 조건 위에서 성립한 파생적 존재라는 통찰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고유한 이론적 과제로 삼고 있다[이는 또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각각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추구했던 과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설정은 20세기의 역사적 경험, 즉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가 근대성에 제기한 충격적인 질문은 주체의 자기지배라는 문제이다. 주체는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적 근대성에 의해 인식과 행동의 궁극적인 원리로 설정되었으며, 계몽주의에서부터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주체는 억압과 착취, 불의와 수탈의 역사로부터 자기자신(곧 인류 전체)을 해방시킬 존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역사의 주체(루카치) 또는 해방의 주체라는 관념이 가상적이라는 점, 또는 적어도 자기 내부에 근원적 도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잔혹하게 입증했다. 파시즘을 통해 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가 파시즘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고, 스탈린주의를 통해 해방의 전위로서 공산당이 노동자 대중의 이름으로 노동자 대중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세기 후반 서방 마르크스주의 및 다른 비판적 사상가들의 이론적 고투는 이 잔혹한 '역사의 이중주'에 의해 드러난 주체의 자기배반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이론적 노력의 절정을 이루는 것―구성적 주체의 복권불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입증했다는 점에서―은 바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작업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 주체의 역설, 해방적 주체의 자기배반의 원인이 실은 주체의 뿌리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주체가 인식과 실천, 세계의 유의미성을 근거짓는 근원적 기초가 아니라, 어떤 비주체적인 익명적 질서, 즉 주체를 주체로 만들어냄으로써, 주체가 스스로를 자율적이고 주권적인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주체를 자신의 재생산 메카니즘에 종속시키는 어떤 질서―푸코에게서는 담론의 질서, 라캉에게서는 상징적인 것, 알튀세르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공통적인 논점은 주체가 순전한 가상이라거나 허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주체적 질서에 대한 주체의 예속주체가 구성적-주권적 주체로서 성립할 수 있는 조건―따라서 또한 동시에 주체가 완결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을 이루며 이런 한에서 주체는 근원적으로 타율적이라는 점에 있다[80년대 이후 주목할 만한 윤리-정치적 저작들을 계속 출간하고 있는 데리다는 철학적 구조주의의 이 문제설정을 자기나름대로 다시 취해 발전시키고 있다. 예컨대 J. Derrida, ""Il faut bien manger" ou le calcul du sujet", Jean-Luc Nancy ed., Cahiers confrontation 20. Apres le sujet qui vient, Hiver 1989 참조].     
  하지만 이는 철학적·정치적 근대성에게는 형용모순 그 자체이며 참을 수 없는 이론적 도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주체를 근원적으로 타율적인 존재, 예속화의 산물로 제시함으로써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은 결국 자율적인 인식과 실천, 곧 해방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들에게는 곧바로 지배에 대한 기능주의적 정당화라거나 규범적 혼란에 빠져있다는 식의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이런 비판들이 무시할 수 없는 실천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류의 비판들은 구성적 주체가 여전히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또는 해방의 문제설정을 규범 내지 타당성Geltung의 문제설정으로 대체[이는 특히 존 롤스 또는 하버마스의 관점이다. 이들에 대한 스피노자-마키아벨리적인 비판으로는 Jacques Bidet, "Eloge du principe de libre difference, ou: De Rawls a Marx, par une remontee infiniment lente, en passant par Machiavel et Spinoza", La Pensee 313, Janvier-Fevrier-Mars, 1998 참조.]하는 위에서만 성립가능한 비판들이다. 따라서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문제설정은 해방의 선험적 불가능성에 대한 비관주의적 고백이라기보다는 해방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 경우 필요한 것은 비주체적인 해방이론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피노자는 철학적·정치적 근대성과는 달리 '자유로운 주체'라는 관념은 가상중의 가상에 불과하고 모든 미신과 예속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으며, 철학적 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가상에서 벗어나 주체의 근원적 타율성을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참된 조건이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관념론 이래 지나치게 신비화되어온―이는 범신론이라는 단어로 집약된다―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스피노자 철학의 현재성의 요소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확인해 보는 게 필수적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출발점, 즉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반인간주의의 성격이 가장 명시적이고 논쟁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곳은 {윤리학} 1부의 [부록]과 {신학정치론}의 [서문]이다. 알튀세르[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이론적 모태는 흔히 생각하듯이 라캉의 이론에 있다기보다는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 있다. 이는 알튀세르와 라캉(주의) 사이의 이론적 쟁점을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한 논점 중 하나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으로는, 진태원, [라깡과 알뛰세르: '또는' 알뛰세르의 유령들 1], 김상환·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창작과 비평사, 2002) 참조.] 또는 들뢰즈 이전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두 텍스트는 스피노자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 내적 동기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이 두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좋은 논의로는 L. Bove, ch. 7 "Pourquoi les hommes combattent-ils pour leur servitude comme s'il s'agissait de leur salut?", in La strategie du conatus. Affirmation et resistance chez Spinoza, Vrin, 1996 참조.]. 먼저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인간의 모든 가상, 모든 편견의 뿌리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든 편견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편견에 의존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사물들이 사람들이 그러듯 어떤 목적에 따라 작용한다고 가정하며, 신 자신이 모든 사물들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Edwin Curley ed. & trans. The Collected Works of Spinoza vol. 1,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p. 439/ Bernard Pautrat trad., Ethique, Seuil, 1999, pp. 80-81.]
  그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론적 편견은 두 가지 인간학적 사실에서 비롯한다. 첫째, 모든 유한한 사물의 현행적 본질이 코나투스, 즉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윤리학} 3부 정리 6, 7)이듯이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3부 정리 9의 주석). 이에 따라 "우리는 어떤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원하거나 욕망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고 의지하고 원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이 어떤 것을 좋다고 판단한다."(같은 곳) 그런데 둘째,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1부 [부록], 강조는 인용자)는다.
  욕망의 대상에 대한 의식과 욕망의 원인에 대한 무지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는 가상과 적합한 인식 사이의 괴리 때문에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행동이 자율적인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가상하게 되며, 자신들의 의지의 지배력을 넘어서는 모든 자연활동 역시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가상하게 된다. 이런 가상은 "자연을 완전히 전도"시킬 뿐 아니라, 자연을 주재하는 초월적 신에 대한 각종 의례와 관습들을 만들어냄으로써 편견을 미신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이런 미신적 관습은 전제군주에 의해 예속화의 근본 지주로 활용된다. "전제정치의 근본적인 신비, 그 지주와 버팀목은, 사람들을 기만의 상태 속에 묶어두고, 종교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 공포를 은폐하여, 사람들이 마치 구원인 양 자기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게 만들고, 한 사람의 영예를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명예인 것처럼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Tractatus Theologico-Politicus/Traite  theologico-politique, pp. 61-63/(영역본), Samuel Shirley trans., E. J. Brill, 1989, p. 51.]에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이렇게 해서 자연의 전도가 실천적으로 완성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본질은 코나투스, 즉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충동인데 반해, 이 경우 인간들은 다른 존재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며, 이를 큰 명예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이런 도착적 행동은 단지 스피노자 철학의 이론적 전제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실천적으로도 중대한 과제를 제기한다. {신학정치론}을 집필하게 된 스피노자의 근원적인 동기, 더 나아가 {윤리학} 후반부 및 {정치론}(1675-1977)의 전개방향을 결정짓게 된 계기는 바로 이러한 반자연적, 반본성적인 도착이 가능하게 된 이유, 그리고 이러한 도착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에 대한 모색이었다.[들뢰즈-가타리의 문제설정의 출발점 역시 바로 이러한 도착의 이유에 대한 질문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정도까지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대중의 무지나 환상을 파시즘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욕망을 해명할 수 있는 설명, 욕망의 관점에서 정식화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라이히(Reich)는 사상가로서 가장 심원한 경지에 도달한다. 대중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G.Deleuze-F.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1972), trans. Robert Hurley et al.,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 29(강조는 들뢰즈-가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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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4-16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지만 선생님 글에서 지나가듯 언급되는 '미발표 원고' 및 이후 작업에 대한 기약은, 너무나 강렬한 유혹입니다(과문해서인지 다른 사람의 글에서는 한번도 이런 '장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 글이랑 '라캉의 재탄생'에서 약속하신 작업은 언제쯤 볼 수 있을지요? 그래도 이제 이런 곳이 있어 가끔 기다림의 심정을 전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관계에 대한 얘기는, 몇 가지 착상만이라도 말씀해 주실 수 없는지요? 번역이나 이미 착수하신 여러 논문들을 감안해 볼 때, 상당히 먼 훗날이나 되야 그 논문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고 하시면 기다리는 수 밖에 없겠지요...
감사합니다.

balmas 2004-04-1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히 애태우게 해서(^^) 미안합니다. 사실은 내년쯤 들뢰즈에 관한 국내 연구자들의 논문집이 출간될 예정인데, 거기에서 들뢰즈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론을 비교할 생각입니다. 자기비판의 내용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론에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고, 따라서 들뢰즈나 마트롱의 작업을 통해서 이를 보완해야 될 것이라는 점에 관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니까 한편으로는 제가 존재론이라는 분과를 너무 규범적으로 과대평가했다는 생각이 들고, 따라서 알튀세르 작업이 갖는 존재론에 대한 비판적 함축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게 정당한 것인가 하는 자기비판도 있어야 할 듯합니다. 요컨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 해석을 <존재론에 미달하는 것>이라고 볼 게 아니라, <존재론을 초과하는 것> 또는 <존재론을 내파하는 것>으로 보는 게 훨씬 더 정확하고 생산적인 생각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한 것 아닌지 모르겠는데(^^),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평가도 재고해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라캉의 재탄생]에서 언급했던 후속작업은 <꼭>(^^) 할 생각인데, 지난해와 올해 학위논문 때문에 좀 지연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의 유령들-2]는 지젝의 작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될 것이고, 위에서 말한 들뢰즈와 알튀세르의 스피노자론을 비교하는 글은 [알튀세르의 유령들-3]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두 개의 글 이외에 나머지 [알튀세르의 유령들] 연작 논문들은 아직 막연한 생각뿐이어서 무어라고 얘기할 만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역량의 철학자인가?]나 [스피노자와 성서해석의 문제] 같은 글들은 빠르면 상반기 안에 발표할 생각이고, 늦어도 가을 무렵까지는 학술지에 발표할 생각이니까, 기다리는 김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읽어볼 수 있을 겁니다.
하여튼 늘 작업에 관심을 가져 주어서 고맙고, 그 관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좀 미안하기도 합니다. 가끔 와서 좀더 야단도 치고 독려도 해주면 좀더 일이 빨리 진행될지도 모르겠지요. ^^

aporia 2004-04-18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주말에 컴퓨터를 쓰지 못해 이제서야 감사 인사 올립니다. 오늘 공립도서관에 들른 게 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선생님 답변을 보니 더 애가 타게 생겼습니다. ^^ 철학 논문에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흥미진진한 내용들이네요. 특히 요새 와서 존재론의 문제, 나아가 스피노자에게서 존재론의 문제에 대해 고민이 생겼는데, 선생님의 논문을 보면 길이 보일 것 같습니다. 제가 그 길을 제대로 짚어 갈 수 있느냐 와는 별개로 말이지요...
일단 '스피노자는 역량의 철학자인가?'라는 논문이 기대가 되네요. 저번 번역하신 발리바르 글을 떠올려 볼 때, 이에 관한 논의를 보면 전반적인 상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솔직히 제가 가장 기대하는 글은 선생님의 학위논문입니다. 제가 선생님의 열렬한 독자가 된 것은 선생님 석사학위논문을 읽고나서부터였습니다. 제가 과문하긴 하지만, 아직껏 그렇게 공들인 석사논문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박사논문은 어떨까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군요...
'야단'이나 '독려' 같은 부담스런 말씀을 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명의 독자로서 열렬한 지지와 기대를 보냅니다(마음 말고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그리고 저 말고도 이미 많은 독자들이 있고, 논문들을 발표하실수록 그 숫자가 아주 많아질 거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스피노자와 정치' 책을 출판하시면 아마 어느 정도 양적인 측량이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 꼭 몸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왜 사회주의인가

'왜 사회주의인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미국 좌파잡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1949년 5월)에 쓴 글이다. 매카시즘의 미친바람이 몰아치던 즈음, ‘천재’와 동의어이던(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과학자의 ‘사회주의 선동’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먼슬리 리뷰’는 지금도 창간 특집호를 꾸밀 때면 이 글을 다시 게재한다.

(아래, 리오 휴버먼은 1968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먼슬리 리뷰' 편집자였다. 그의 동료 폴 스위지는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 - 신기섭)

Posted by gyuhang at 2004.04.03 11:3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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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4-04-1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의 글인데도 지금 읽어봐도 새롭네요.

balmas 2004-04-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슈타인이 정말 천재이긴 천재인가 봅니다. 아인슈타인의 글을 읽으면, 우리나라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정말 ...... 입니다(필화를 방지하기 위해 자진삭제-_-;;). 어제 철학과 교수들 90여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는데요, ... 참, ... 그래도 그나마 용기와 양심을 가진 분들입니다. 철학과 교수들, 아니 대학 교수들 중에는, 정말이지, 열우당 지지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열렬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인 대학교수들을 볼 때마다 가끔 <어떻게 저만큼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저런 정치의식을 갖고 있을까>라고 해야 되는지, 아니면 <저런 정치의식을 갖고 저만큼 공부를 하고 점잖게 사는 게 그래도 참 놀랍다>라고 해야 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 후자의 의문은 일부에만 해당됩니다.

궁금이 2014-10-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약 저자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현재 신자유주의 상황 하에서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고 착각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근본을 따지고 뭄는 것이 중요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있음을 알려주셔서~
 

* 4월 12일치 [대학신문]에 실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 관한 주제서평입니다. 번역자들이 저와 가까운 관계에 있고 어떤 식으로든 번역에 영향을 미친 터라 서평의 객관성이 심히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들 및 국내의 들뢰즈주의를 보는 한 가지 시각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국내의 들뢰즈주의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제가 들뢰즈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국내에서 들뢰즈에 관해 출간된 책이나 글들의 수준이 (몇몇 드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스콜라쉽이 의심스러운 수준이어서, 읽기도 힘들 뿐더러 논평하기는 더더욱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심미적 취향 때문에 연구자로서의 책무를 등한시해온 셈인데,  앞으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런저런 지면을 빌려서 좀더 책임 있는 논의를 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대학신문]과 비슷한 서평을 [문학과 사회]로부터도 청탁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두 서평의 분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이 글을 약간 보충해서 [문학과 사회]에도 실을까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적은 분량의 서평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문학과 사회] 서평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 완성되면 같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조주의의 형이상학, 또는 들뢰즈주의의 쉬볼렛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 관하여

 

  오랫 동안 기다려 왔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가 마침내 번역, 출간되었다. 들뢰즈를 사랑하는 독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철학 전공자들도 크게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들뢰즈의 저서들 중에서도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책들을 원서의 가치에 걸맞는 노력과 정성으로 잘 번역해 냈으니, 더욱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약 30여년 전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운동이 절정을 지나 숨가쁜 갈등과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화를 거듭하고 있을 때, 프레드릭 제임슨은 구조주의 운동을 20세기의 독일 관념론 운동으로 지칭한 적이 있다. 서양 근대철학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룩했던 독일 관념론 운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 운동은 레비-스트로스, 라캉, 캉길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과 같이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수많은 철학자-사상가들이 각 분야에서 하나의 시대를 가름하는 중요한 업적들을 배출했을 뿐아니라, 롤랑 바르트, 알랭 로브그리예, 장-뤽 고다르, 피에르 불레즈 같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들이 철학과 정치를 가로지르며 20세기 후반 문화의 면모를 일신했기 때문이다.
  제임슨의 예견의 정확성 여부는 나중의 철학사가들에게 맡겨 두더라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조주의 운동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역시 구조주의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될 때 그 의의와 중요성이 좀더 정확히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후에 발견된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8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푸코의 다소 과장된 예언(“언젠가 이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을 제외한다면, 풍부한 내용과 비범한 깊이에도 불구하고, 재능있는 한 소장 철학자의 학위논문으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이 책의 중요성과 가치가 발견되고 재발견된 것은 『앙티 오이디푸스』(1972),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천 개의 고원』(1980) 이후의 일이다.
  이처럼 이 책이 사후에야 재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지닌 내용상의 특성 때문이다. 전성기 구조주의 철학들과 비교할 때 이 책은 두 가지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구조주의 운동은 형이상학, 더 나아가 철학 자체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고발, 탄핵의 움직임과 분리될 수 없는 반면, 『차이와 반복』은 20세기에 보기드문 거대한 형이상학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둘째, 다른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 같은 사상가들의 작업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차이와 반복』은 스토아학파에서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매우 낯선 철학적 계보의 끝자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에는 매우 유별난 것으로 간주되었던 『차이와 반복』의 형이상학적 건축, 그 철학적 계보는, 구조주의의 다양한 경향들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운동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서양 철학사의 감춰지고 잊혀진 흐름들을 길어내고 있음이 사후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초월론적 경험론 또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우리에게 낯선 이 철학은 (주체론을 포함하는) 실체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따라서 관계론으로서의 구조주의가 이루는 거대한 저수지들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주름』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주름이라는 표제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접고 펼치고 다시 접는 주름의 운동으로서 라이프니츠 철학은 『차이와 반복』에서 전개되는 내적 차이화의 운동을 간명하게 표현해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성이 어떻게 외부의 운동에 의거하고 그로부터 구성되는지, 따라서 주체성이 어떻게 외부적인 관계들에서 파생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들을 구조주의의 형이상학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들뢰즈주의의 쉬볼렛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다. 앞으로 사람들이 이 책들을 통해 들뢰즈주의의 식별 기준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뢰즈주의자라 부르기 위해서는 이 책들을 제대로 읽고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따라서 이런저런 개념들을 되는 대로 주워섬기며 들뢰즈주의자로 자처해온 이들에게 이 책들은 오히려 큰 도전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들은 사후성의 저작들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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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4-1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 you really think Deleuze is a Strutualist philosopher?... It's just my curiocity.

balmas 2004-04-11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를 구조주의에 집어넣었더니 로쟈님이 좀 당혹스러우신가 봅니다. 글쎄요 ... 들뢰즈를 구조주의의 편입시키는 것은 분명 <일반적인> 분류법은 아니지요. 그런데 제가 들뢰즈를 이렇게 분류한 건 실은 이 <일반적인> 분류법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반적인> 분류법이란 실제로는 1960년대 말 이후 미국 학계에서 정형화된 분류법이고, 구조주의와 탈(post) 구조주의라는 명칭으로 50년대 이후 프랑스 사상의 흐름을 분류하지요. 나름대로 근거도 있고 일리도 있는 분류법이긴 하지만, (1) 이러한 분류법은 구조주의에 대한 협소한 기준을 갖고 있고(언어학/기호학의 모델), (2)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특정한 관점(해체라고 하든, 탈구조주의라고 하든)을 사전에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분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류법을 따를 경우 구조주의 운동의 연속성과 다양성이 제대로 파악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조주의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분류하느냐의 문제는 구조주의 운동의 철학적, 이론적 핵심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데, 저는 어쨌든 기존의 분류법(들)을 개조하고 변형시킬 때에만 50년대 이후 프랑스 사상의 흐름을 좀더 충실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들뢰즈를 구조주의 안에 편입시킨 건 이런 생각의 한 반영이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로쟈 2004-04-1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 see. May I expect another histoy of structalism not by Doss, but by balmas?^^

balmas 2004-04-1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다른 역사는 분명한데, 얼마나 신통한 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구조주의의 역사>야 앞으로 두고두고 새롭게 쓰일 역사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 <탈구조주의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은 셈입니다.
 

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tout autre est tout autre

이 문장은 일차적으로 동어반복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 때 이 문장은 "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이 문장은 항상 참이지만 아무런 새로운 지식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또한 (2) "모든 타자는 전혀 다르다"로 읽을 수 있다. 곧 하나하나의 타자들 각각은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것들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1)이라는 외관 내지는 허상 아래 숨겨진 (2)라는 본질, 진리를 말하려는 것일까? 오히려 이 명제의 묘미는 이처럼 두 가지(또는 그 이상)의 상이한 의미들이 결합되었을 때 생기는 효과에 있다. 곧 이 명제는 (1)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동어반복을 말하는 것처럼, 따라서 전통적인 논리학 및 존재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동일율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동일율의 되풀이를 통해 이 동어반복 명제를 (2)에서 드러나듯이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모든 타자들 각자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명제로 바꾸어놓고 있다.
  (3) 하지만 동어반복 내에서 타자론heterologie의 드러남, 파열은 다시 동어반복의 형식으로 바뀐다. 이 때의 동어반복은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곧 신이라는 전혀 다른 자, 인간과 다르고 동물과 다르고 기타 모든 유한하고 무한한 존재와도 다른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전혀 다른 자가 전혀 다른 자이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때문에, 데리다가 본문 2부 마지막에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명에 대해 말하듯 서명은 실패하게 된다. 신이라는 절대적 환유, 절대적 타자성은 그것이 절대적 타자성이다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로서의 타자들과 다르면서도, 늘 이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이들에 앞서 절대적 타자, 절대적 환유의 이름으로 미리 서명했(던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는 동어반복 문장은 전혀 다른 자는 각각의 독특한 타자들과 전혀 다른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전혀 다른 자와 각각의 독특한 타자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문법적·논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따라서 이 문장은 고도의 사변적sp culatif 진리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 사변적 진리를 작동시키는, 또는 이 사변적 진리에 항상 이미 따라다니는 거울반영sp culation의 법칙을 보여준다. 이 거울반영의 법칙은 사변적 진리에 항상 수반되지만 사변적 진리가 포함하지 못하는, 일종의 사변적 진리의 유령일 것이다.
  이 문장은 이런 측면들로 모두 소진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는 이외에도 더 많은 의미, 더 많은 비의미들이 담겨있으며, 그것들을 읽어내고 전개하는 것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이 문장에 관한 데리다 자신의 논의는 Donner la mort, Galil e, 1997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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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난 김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기입inscription

기입 또는 기입하기inscrire라는 개념은 원래 어원(in-scribere)이 말해주듯 (종이나 파피루스, 널빤지 등과 같은) 물질적 매체에 무언가를 '새겨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새겨넣는 행위는 어떤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또는 어떤 것을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친구나 자손, 또는 후세 같은)에게 손상 없이 전달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는 일차적인 어떤 것, 곧 서로 대면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또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직접 수행하는 행위을 보조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 머릿 속에 떠올린 생각이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말, 누구와 한 약속 등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처럼 상식적인(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상식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기입되고 강제되어온 생각이다) 생각을 전도시켜, 기입이나 기록이야말로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또는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고 있는 상호 주관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경험적인 기록과 일종의 유사-초월론적인quasi-transcendental 기록(데리다가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원-기록archi- criture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를 구분한다면 이 주장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데리다가 espacement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잠깐 살펴보자. 이 단어는 원래 인쇄술에서 유래한 용어다. 인쇄술에서 이 용어는 인쇄면에서 여백칸을 어느 정도로 하고 본문의 크기를 얼마로 잡을 것인지 정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간격을 얼마나 두고, 줄 간격은 어떻게 하고 하는 등의 작업을 가리킨다. 이는 학문적인 논의나 심지어 언어 활동에서 매우 부차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글자 크기나 여백, 글자 간격 등의 문제에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생각만큼 그렇게 부차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의 espacement은 우리의 언어 활동 전반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따르는 문법적인 규칙(예컨대 주어와 술어, 목적어의 순서 따위)이나 다양한 어법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를 연결해 주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가 일차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말과 말 사이의 간격두기, 곧 espacement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는 단지 단어와 단어, 말과 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게 아니라, 자음과 모음의 결합, 기표와 기의의 결합 같은 일체의 모든 언어적 관계에서도 성립하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espacement은 관계 맺기, 구분하기로서의 언어 활동에 전제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는 어떤 실정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관계,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이는 이후 구조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inscrption이나  criture, 또는 espacement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지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관계가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지 않지만 차이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데리다가 말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이런 기술적 조건들을 자연적 조건들로 전위시키고 은폐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데리다가 기입이나 기록의 작용이 주체의 자기 관계나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 주관적 관계의 (유사 초월론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그다지 허튼 소리는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분석에서 데리다는 이러한 기록의 문제 설정을 정치의 문제에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 문제에 적용될 때 기록의 문제 설정은 순수한 정초와 순수한 보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준다. 정립이나 정초, 창설은 항상 자체 내에 보존과 재생산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역으로 보존과 재생산은 그 활동 자체 내에 이미 정초와 창설의 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록으로 수록된 [독립 선언들]에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데리다가 본문에서 하이데거를 염두에 두면서 "되풀이 (불)가능성은 순수하고 위대한 정초자, 창시자, 입법가(이러한 정초자들의 숙명적 희생과 관련된 유비적인 도식에 따라 하이데거가 1935년에 말하게 될 의미에서, '위대한' 시인과 사상가, 또는 정치가)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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