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의 배신
송제숙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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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린 촌평입니다. 이 글에 대한 논평이나 토론 역시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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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2003년 일리노이주립대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해서 2009년 듀크대출판부에서 영어로 출판한 저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의 주제는 1997IMF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겪게 된 변화를 ‘()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는 관점 아래 서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복지의 배신이라는 책 제목은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1997IMF외환위기가 한국사회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사상 유례없는 대량 해고와 사회경제적 혼란을 초래한 국가적비극이었다.”(28) 둘째, 그런데 IMF위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99712월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이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을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김대중 대통령이 IMF외환위기를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IMF 및 국제금융세력의 압력과 조언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의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김대중정권은 역사상 전례없이 이루어진 대량 해고를 합법화하고, ‘정보사회생산적 복지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을 더 유연하고 자본 친화적인 탈개발국가로 이행”(62)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김대중정권을 통해 한국 최초의 보편적 복지국가”(6) 또는 대한민국에 최초로 성립된 복지국가”(256)가 등장했지만, 그것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민주화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정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장과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을 정당화시킨 과정”(83)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착근시킨 주체에 민주화투쟁의 주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에는 과거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자유주의적 사회 통치의 대리인으로 변모했다는 분명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32) 그리고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지식인들의 딜레마는 단지 한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자유주의적 사회에 적용”(52)되는 것이다.


저자는 1998~2001년까지 약 29개월 동안 진행한 현장조사에 입각하여 이러한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특히 노숙인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를 구체적인 소재로 삼아 자신의 기본적인 주장을 입증하려고 한다. 노숙인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자활 가능한 일시적 노숙자와 장기적 노숙자를 선별하여 전자만을 집중 지원한 것을 문제 삼으며(2), 또한 여성 노숙자의 존재 자체를 집요하게 부인하는 정책 담당자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남성중심적·가부장제적 복지정책의 편견을 지적한다(4). 또한 5장에서는 “‘자기 관리가 가능한주체 및 자기의 기업화가 가능한주체로서의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적 통치를 분석한다.


이 책이 번역되기 전부터 이 책의 평판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읽고 상당히 실망감을 느꼈다. 우선 김대중 정권의 개혁 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오히려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주장이다.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점은 이 책의 이러한 거시적인 이론적 주장이 설득력있는 자료나 구체적 논거를 통해 충실히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분석은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단조롭고 단편적이다. 우선 노숙자와 청년 실업자에 대한 대책이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을 대표할 수 있는 사례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노숙자를 자활 가능한 노숙자와 그렇지 못한 노숙자로 구별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 노숙자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다는 것은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이 상당히 미흡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저자의 분석 중에 좀더 설득력이 있고 구체성을 띠고 있는 것은 청년실업에 관한 논의이다. 저자는 서울시 청년실업대책위원회에 고용된 모니터링 팀 소속 젊은이들의 경험에 입각하여 신지식인닷컴기업’, ‘정보사회에 관한 담론이 청년실업 및 그 대책에 관한 정책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내준다.


이 책에서 제일 실망스러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푸꼬(M. Foucault)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꽤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역설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저자 자신이 내가 한국 당시의 사회 통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주요 프레임의 하나인 푸꼬의 통치성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좀더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18)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이해하는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푸꼬 작업에 입각했다고 자처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과연 무엇인지 의아했다. 과연 푸꼬에 대한 직접적인 독서경험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저자의 푸꼬에 대한 인식이 매우 허술해보였다.


가령 저자는 푸꼬의 통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책은 푸꼬의 이론에 의거해 ...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국가 행정제도로서의 정부의 개념과 달리, ‘통치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주체 형성을 통해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자유주의적 정치권력의 작동방식을 ‘government’ 또는 ‘governing’으로 명명한다.”(34) 이 인용문에서 놀라운 점은 통치에 관한 정의가 별로 푸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령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주체 형성을 하지 않고 인구 관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저자의 통치에 대한 정의는 너무 막연하고 허술하다. 푸꼬 자신은 통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163)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푸꼬적인 통치 개념에 입각하여 신자유주의를 분석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민주화 세력이었던 김대중정권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집행자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이든 신자유주의이든 자본주의 통치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푸꼬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맑스주의적인 관점이며, 더욱이 꽤나 고전적인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교조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이다. 반면 푸꼬는 고전 자유주의가 자연적 소여로서의 교환에 근거를 둔 반면 신자유주의는 인위적 관계로서의 경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 등에 이르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부문을 경제적 관계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모든 개인이 기업가, 자기 자신의 기업가”([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319)로 간주되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푸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푸꼬와 상당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점이다.


다음 대목을 보자. “신자유주의 국가가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 권력기구로 작동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 정규직이 줄어들고 노동시장이 더욱 불안정해진 후기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에서는 국가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이 생명권력적 복리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136)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국가는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국가이며, 그것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은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고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을 도모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라면, 그것에 반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저자가 푸꼬의 생명권력 개념이나 통치 개념, 또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가령 생명권력=신자유주의적 통치 같은 도식적 규정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면의 한계상 더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 책은 훨씬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 독자들에게 얼마간 쓸모 있는 참고 도서가 될 수 있겠지만, 푸코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관해서도,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는 데도 한국의 연구자들은 저자에게 배울 만한 바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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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2016-12-25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리 크리스마스 , 선생님!

올 한 해도 좋은 글로 강연으로
제게 많은 생각거리와 고민거리를 던져수셨네요.
지면으로나마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더욱 좋은 성과 거두시길 바랍니다!

balmas 2016-12-28 19: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님.

댓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감사! 2016-12-28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철학 강의를 듣는 학생입니다.
선생님이 강의 하신 스피노자 강의 화일을 오늘 복사해왔습니다.
선생님의 노고가 담긴 결과물인데 무료로 쓸려니 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나마 감사의 인사드리고자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6-12-28 19: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공부하시는 데 강의 파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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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릴 촌평입니다. 글과 관련하여 논평하거나 토론하고자 하는 분들은 [창작과비평]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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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최근 국내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역되는 외국 사상가 중 하나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저작([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은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번역 탓에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이 출간된 후 최근 사오년간 가속이 붙어 올해에만 네권의 책이 번역되었다. 이 중 이번에 서평 대상으로 고른 책은 버틀러가 그리스의 문화이론가인 아테나 아타나시오우(Athena Athanasiou)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국내에 소개된 버틀러 책들 가운데는 가장 최신의 저작(영어판은 2013년 출간)이고 정치적인 것에서의 수행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버틀러의 사상에 관한 대중적인 해설용 대담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주요 사상가들과의 대담집이 보통 그렇듯이, 질문자가 사상가의 사상에 관하여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사상가가 그의 저작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점들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타나시오우라는 생소한 학자는 이 책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 중 하나였으며, 이 책의 화두를 이끄는 사람이 버틀러가 아니라 바로 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능동적인 대화 주체였다. 그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박탈이라는 개념을 대담의 화두로 제안하면서, 이 개념에 입각하여 어떻게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인종주의, 극단적 폭력 등과 같은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버틀러의 저작,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윤리정치적인 저술에 기반을 두면서 동시에 그 저술에 담긴 이론적 개념들을 신자유주의탈식민주의성소수자정치적 저항 등과 같은 쟁점들에 관하여 폭넓고 자유롭게 변주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독창적인 논의들은 특히 포스트 담론에 입각한 정치철학 및 윤리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자극을 준다.


이 글에서는 총 21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대담집을 이끌어가는 몇 가지 주요 개념, 곧 박탈(dispossession), 관계성, 취약성, 감응성(affectivity), 수행성 등에 주목하고 싶다.


옮긴이(김응산)가 박탈이라고 번역한 ‘dispossession’이라는 단어는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자들이 이 단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양가적인 의미 때문이다. 첫째, ‘dispossession’은 말 그대로 박탈을 가리킨다. 곧 이 단어는 우리가 장소와 생계, 주거지, 음식, 보호 등을 빼앗길 수 있는 존재라는 점, 따라서 이를 우리에게서 박탈할 권리와 힘을 지닌 권력에게 우리가 종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 하지만 이 단어는 또한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원초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공통으로 전제된 소유적 개인주의의 원리와는 달리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은 우리 각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며,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쾌락과 고통을 어떤 지속된 사회계 혹은 지속적인 환경에 빚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상 23)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타자와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실은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아 내지 개인 주체의 원초적인 타자 의존성이라는 의미로 인해 ‘dispossession’이아주 문제적인 개념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만약 이 개념의 뜻이 첫번째 측면으로 국한된다면, 비판적인 이론과 정치의 목표는 꽤 단순해진다. 부당하게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각각의 개인 및 집단 들에게 그들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소유와 권리를 회복시켜주거나 부여해줌으로써, 개인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의 질서를 확립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 내지 개인들이 원초적인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그 본질 및 정체성에서, 그리고 삶의 과정 자체에서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들이라면, 자유주의를 넘어선 이론적 분석과 실천적 해법이 요구된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난상토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가적인 측면을 드러내기에 과연 박탈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박탈이라는 번역어는 오히려 첫번째 측면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가? 첫번째 측면에서는 부당한 법적정치적물리적인 탈취, 몰수라는 뜻이 핵심인 반면, 두번째 측면에서는 자율적인 자아 내지 개인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자기소유(self-possession 내지 self-ownership)가 타자와의 원초적 관계에 의해 사후에 성립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러한 원초적 관계를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두번째 측면에서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전제인 소유 및 자기소유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윤리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실 탈소유로 옮기는 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자의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에, ‘탈소유라는 번역어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따라서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가 무엇인지는 열려 있는 문제이며, 말 그대로 개념적 번역과 이론적 ()창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dispossession’의 문제는 감응성’, ‘affectivity’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원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관계적인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affectivity’ 및 ‘affect’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용어들을 일관되게 감응성감응이라는 용어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정동성, 정동, 심지어 정동하다’(능동태인 affect의 번역이다), ‘정동되다’(수동태인 affected의 번역이다) 같은 괴상한 신조어들을 남용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번역보다는 훨씬 사려 깊은 태도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감응보다는 정서라는 개념에 기반을 둔 번역이 이 책의 논의를 이해시키는 데도 더 낫고, 미국 문화이론계의 논의를 우리 식으로 전유하고 변용하는 데도 더 낫다.


우리가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느낄 때 여기에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타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거나 즐거워하며, 타자의 기쁨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한다. 더욱이 스피노자(B. Spinoza)의 정서 모방(affectuum imitatio)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항상 이미 타자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내지 정서는 항상 신체적인 작용을 수반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낄 때 신체적인 역량 내지 에너지도 증가하며, 우리가 고통이나 자괴감을 겪을 때 우리의 신체도 무기력해진다. 우리의 분노는 동시에 강렬한 신체적인 반응을 촉발하며, 흐뭇한 마음은 신체적인 이완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affect affectivity가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다음 번역문을 보자. “이와 같은 반응의 성향은 우리를 경첩에서 어긋난(out of joint)” 상태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로부터 이탈하도록, 곧 자기 정신줄을 놓도록(beside ourselves)” 만드는 다양한 감응, 곧 분노와 절망, 욕망, 격분, 희망 등의 감정 속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123) 내가 볼 때 여기에서 감응대신 정서라는 번역어를 쓴다면, 논의의 내용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논의의 요점은 분노, 절망, 욕망, 격분 같은 정서들이 강렬한 신체적 반응을 촉발하면서 우리의 평정한 상태를 깨뜨리고 우리를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out of joint’‘beside ourselves’ 같은 표현이 함축하는 바이다. “공감과 친절함, 연대는 물론이고 긴장, 괴로움 혹은 갈등과 같은 강렬하고도 정치적인 감응적 요소들을 통해(286) 같은 대목도 정서적 요소들이라는 번역이 이해를 더 쉽게 해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affectaffectivity가 정서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체적 변화의 차원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정서적 변용()’이나 그냥 변용()’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83~85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심급이라는 용어는 원문 “instance”의 번역인데, 이 경우에도 사례내지 경우로 옮기는 편이 낫다. 전체적으로 꽤 공을 들인 꼼꼼한 번역인데, 이처럼 몇 가지 용어 선택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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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설솔술 2016-11-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엇습니다.^^ 번역자는 유민석이 아닌 김응산씨네요.

balmas 2016-11-27 16: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살설솔술님.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사실 괄호 부분은 편집부에서 교정 과정 중에 추가한 것인데, 제가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정정 안내를 하도록 편집부에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질문 있어요 2017-01-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강추하신 <박탈>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용어가 익숙치 않다보니 읽어도 명확히 이해를 못하네요.
그래서 용어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괜챦으시죠?
‘현전의 형이상학‘과 ‘자기 현전‘이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될까요?

새해부터 귀챦게 해드려, 지송합니다^^

balmas 2017-01-02 19: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질문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현전>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사실 <현존>이라는 번역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용어들은 어쨌든

모두 하이데거 철학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알라딘 서재의 다음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1583071
 

이번 겨울호 [황해문화]에 게재될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을 처음 구상한 것이 작년 초였고, 그 사이에 이곳저곳에서


여러 차례 발표하고 논평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의 1년 6개월만에 완성된 글을 지면에 싣는 셈입니다. 


이 글에 관해 논평이나 토론을 하실 분들은 [황해문화] 지면에 게재된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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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오늘날 이 사회에서 누가 나를 필요로 하겠는가?”

리처드 세네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I. 머리말: 행복 담론, 불행한 사회

 

이 글에서 내가 제기해보려는 질문은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필자의 구상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89, 2015년 겨울호 참조. 또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웹진 민연󰡕에서 20155월 이후 계속 진행 중인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연속 기고도 참조. http://rikszine.korea.ac.kr/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왜 행복의 정치학에는 내가 불행의 현상학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 필요한가, 불행의 현상학을 전제하지 않는 행복의 정치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00년대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행복, 웰빙, 힐링, 긍정심리학 등과 같은 용어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나 조건을 개선하고 치유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웰빙 식품, 웰빙 가구, 힐링 토크, 힐링 요법 같은 표현들에서 알 수 있듯이 상품 판매를 위한 광고 효과로 활용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널리 판매되고 있다. 실로 오늘날 행복은 계산 가능하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향상시킬 수 있는 실체로 [윌리엄 데이비스, 󰡔행복산업󰡕, 황성원 옮김, 동녘, 2015, 9.]간주되고 있으며, 생명 자본과 정보통신 자본에 입각해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스트레스와 비참함, 질병을 물리치고 그 자리를 안락함과 행복, 건강으로 대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주요 기업에서는 최고 행복 경영자”(chief happiness officer)를 채용하고 전문적인 행복 컨설팅이 새로운 사업거리로 등장하고 있으며, 심리학, 신경생리학, 뇌과학, 의학, 경제학의 학제 연구 또는 초학제 연구에 입각한 행복경제학이 최신 융합 학문 분야로 각광을 받고 있다.[행복 경제학에 대한 소개로는 리처드 레이어드, 󰡔행복의 함정󰡕, 정은아 옮김, 북하이브, 2011 및 이정전, 󰡔우리는 행복한가󰡕, 한길사, 2008 참조.]


또한 박근혜 정부 역시 2012년 대선 캠페인 단계에서부터 국민 행복을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지향으로 내세운 바 있다. 박근혜 캠프의 명칭 자체가 국민행복추진위원회였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세계 각 국 정부가 행복을 정책의 주요 의제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유럽 및 북미 주요 국가들의 행복 정책의 현황과 방향에 대해서는 데릭 보크, 󰡔행복국가를 정치하라󰡕, 추홍희 옮김, 지안, 2011 참조.] 사실 매년 국가별 행복도에 관한 세계적인 기관들의 발표는 국제 뉴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가령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매년 국가행복지수(Better Life Index)를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5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삶의 만족도’(life satisfaction)에서는 29위로, ‘젠더 불평등에서는 36위로, 사회적 불평등에서는 29개 국 중 25위로 나타나, 전 분야에 걸쳐 최하위권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OECD 통계 결과 및 그에 대한 평가로는, http://www.oecdbetterlifeindex.org/topics/life-satisfaction/ 참조.] 또한 유엔이 발표한 “2015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58개국 중 47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지난 2013년의 41위보다 6위 하락해 2013년 조사에서는 일본을 앞섰으나 2015년 행복순위는 5.987점으로 46위를 차지한 일본에 뒤처진 결과라고 한다.[󰡔연합뉴스󰡕 2015424일 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4/24/0200000000AKR20150424061051009.HTML]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이처럼 기업과 각종 언론 매체, 일상적 담론 및 국가 정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행복과 웰빙, 힐링 담론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이 과연 더 행복해졌고 또 행복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각종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OECD 국가 중에서 최장 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비정규직 비율 역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매일 장기간의 노동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빈부 격차는 계속 증대하고 있고, OECD 회원국 중 최고의 자살율을 보이고 있으며,[2015년까지 한국은 11년 연속 OECD 자살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OECD가 발표한 건강통계 2015에 따르면, 2012년 기준 한국은 29.1%(10만명 당 29.1)의 자살율을 기록해서, OECD 평균치인 12.0%의 두 배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30/0200000000AKR20150830038000033.HTML]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헬조선’, ‘망한민국’, ‘흙수저같이, 한국에 대한 혐오담론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이러한 혐오담론에 대한 다면적인 고찰은 󰡔황해문화󰡕 2016년 봄호에 수록된 특집을 참조.] 이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널리 확산된, 웰빙, 힐링, 행복에 관한 담론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바로 그런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더 행복에 관한 담론이 필요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책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행복에 관한 담론이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 상황의 필요성만으로 행복에 관한 담론의 정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 곧 신자유주의적인 통치성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이 증대하는 사회에서 행복에 관한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논의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관한 수많은 담론과 현실적인 상황과의 괴리가 생겨나는 이유에 관해 따져볼 필요가 있다.

 

II. 불행한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포스트모던 행복감의 성격

 

얼마 전 국내에 소개된 일본 사회학자의 저서와 최근 수행된 한국 심리학자들의 작업이 이를 살펴보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 두 개의 연구는 각각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 젊은이들의 행복관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화두에 얼마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내가 보기에는 신자유주의적인 또는 포스트모던 행복감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좀 더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라는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1985년생)의 책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연숙 옮김, 민음사, 2014. 일본어 원서는 2011년에 출간되었다.]저자는 󰡔뉴욕타임스󰡕 도쿄 지부장이 2010년 저자에게 던진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간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 도쿄 지부장이 불행한 상황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러 가지 객관적 지표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오랜 기간 지속되는 장기 불황,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사회보장비용의 증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최악의 재정 적자, 경직된 기업 조직으로 인한 취업난과 불안정 노동(프리터, 임시직)의 증가 등이 2010년대 초반 일본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특징짓는 몇 가지 핵심적인 지표였다. 단적으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놀라운 경제 성장 및 종신고용을 핵심으로 하는 일본 특유의 기업 문화, 탄탄한 사회복지 정책 덕분에 젊은이들이 취직 걱정 없이 안정된 인생을 설계하는 게 가능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 이후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20여년 넘게 장기적인 불황이 지속된 데다가 출산율 저하 및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젊은이들의 객관적인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80년만 해도 7.5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했다. 그런데 2000년에는 4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2008년에는 3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게 됐다. 그럼에도 현역 세대 대비 고령자의 비율은 쉴 새 없이 상승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2023년에는 2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게 될 것이다.[후루이치 노리토시, 같은 책, 276.]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젊은이들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저자는 몇 가지 지표를 제시한다. 일본 내각부가 2010년에 실시한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70.5%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만족도는 30대는 65.2%였고, 40대는 58.3%, 50대는 53.3%로 나타난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또한 이것은 과거의 20대가 느낀 행복감에 비해서도 더 높은 수치다. 1960년대 후반 20대의 만족도는 60% 정도였고, 1970년대는 50%였던 데 비해, 경제 불황에 접어든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계속 70%의 만족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27쪽]


그렇다면 일본 젊은이들은 이런 악화된 객관적 상황에서 왜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저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시한다.

 

일본에는 매일매일 생활을 다채롭게 해 주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 갖춰져 있다. 그다지 돈이 많지 않아도 우리는 자기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예컨대 유니클로(UNIQLO)나 자라(ZARA)에서 기본 패션 아이템을 구입해서 입고, 에이치앤드엠(H&M)에서는 유행 아이템을 사서 포인트를 준 다음, 맥도날드에서 런치세트와 커피로 식사하면서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세 시간 정도 나눈다. 집에서는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를 이용해 친구와 채팅을 즐기고 종종 화상 통화도 한다. 가구는 니토리나 이케아에서 구매한다. 밤에는 친구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며 반주를 즐긴다. 그리 돈을 들이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다.[같은 책, 26-27쪽]

 

저자는 이처럼 객관적으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만족감을 추구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컨서머토리’(consummatory)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어울려 여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생활 방식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미리 더 행복한 미래를 상정해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주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같은 책, 136쪽]


저자에 따르면,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기 충족적인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행복의 조건에는 “‘경제적인 문제인정의 문제’”[같은 책, 290. 번역본에는 승인의 문제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정의 문제로 바꾸었다.] 두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6장의 한 절의 제목을 빈곤은 미래의 문제, 인정은 현재의 문제로 붙이고 있다. 이러한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직접 대면하고 있는 문제는 빈곤의 문제보다는 인정의 문제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대다수 젊은이에게 미래의 문제인 경제적인 빈곤과 달리, 인정과 관련된 문제는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는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빈곤보다 현재의 외로움이 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295~96쪽]


빈곤이 미래의 문제라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빈곤은 현재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현재 좋은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선술집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30만엔에서 40만엔 정도의 월수입을 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18세부터 34세의 미혼인 젊은이들 가운데 남성의 약 70%, 여성의 약 80%가 부모와 함께 살고있기 때문에, 빈곤은 직접적인 체감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들에게 빈곤은 “20년 내지 30년 후부터는 부모 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문제[같은 책, 293쪽]에 직면하게 될 때 구체적으로 닥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빈곤은 미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현재 직면한 인정의 문제는 연인과의 교제 문제이며, 좀 더 넓게 본다면 친교의 문제인데, SNS가 일반화된 현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인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트위터에 재미있는 글이나 사진 또는 동영상을 올릴 경우 곧바로 리트윗되고 팔로워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인정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리실익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가 증가하면서,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것들이 분산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보장해주고, 이러한 상호 인정 덕분에 젊은이들은 굳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경제적인 불만, 막연한 미래가 주는 불안도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같은 책, 300~01쪽]


저자는 자신이 인터뷰한 일본 젊은이들의 이러한 행복관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그는 오히려 있는 것을 그대로 소개한다는 태도, 곧 이것이 실제 일본 젊은이들이 행복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자신도 역시 이 부류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컨서머토리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한편으로 본다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즐길 거리와 행복의 요소들을 찾아보려는 적극적인 태도로 간주될 수 있다. 영국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식으로 그날그날의 즐길 거리에 탐닉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개인들의 행복 추구 경향을 점증하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 그들의 근시안적인 사고, 장기적인 인생 계획에 대한 무관심, 그들의 진부하고 이기적인 욕망, 삶을 일회성 행동으로 잘게 쪼개어 각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고 최후의 한 방울까지 짜내어 즐기려는”[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홍지수 옮김, 봄아필, 2013, 68.] 태도로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미래를 안식처나 약속의 땅이 아니라 위협으로 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보이는 합리적인 반응[같은 책, 69쪽. 강조는 바우만]이라고 반박한다. 복지국가에서 누리던 안정된 삶의 질서가 해체되고 안보에 대한 불안이 조장되고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신자유주의적 체제 아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기적인 미래 설계에 입각한 생활 방식이 불가능해진 만큼, 그들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나름대로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일본 젊은이들의 태도는 약 40여 년 전에 미국의 문화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쉬가 지적한 바 있는 탈정치적 태도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측면에서도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신적인 자기계발이 중요하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된다. 감정을 잘 표현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발레나 밸리댄스 강좌를 듣고, 동양의 지혜에 심취하고, 조깅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고, ‘쾌락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 자체로는 해로울 것이 없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에서 이탈하게 만든다.[Christopher Lasch, Culture of Narcissism, Warner Books, 1979, pp. 29~30.]

 

이러한 태도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더욱 촉진하게 되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점점 더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든다. 현재의 삶의 질서와 다른 대안적 질서를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것을 사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지 더 막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가능한 사회 변혁이나 개혁 대신 개인들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치료법에 몰두하고, 그것을 통해 바깥 세상에서 얻기 힘든 자기만의 행복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자기계발’, ‘건강에 좋은 음식’, ‘동양의 지혜’, ‘밸리댄스 강좌’, ‘조깅’,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 ‘감정을 다스리기같이 래쉬가 열거하는 이 모든 것이야말로 최근 웰빙, 힐링, 긍정심리학에서 행복을 얻는 비법으로 소개되는 그것들이 아닌가?


다른 한편 최근 발표된 부산 지역 심리학자들의 공동 연구는 또 다른 측면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담고 있다.[유나영 외 5인 공저, 한국인의 행복 개념 탐색 연구-한국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5(20155).] 이 연구는 부산 지역 대학생 238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수행된 것으로, 미국인과 한국인의 행복 개념의 차이를 비교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조사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정서적 안녕감과 심리적 안녕감, 사회적 안녕감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바탕으로 행복감을 측정했는데,[행복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세 가지 측면으로 구별한 것은 1984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 디너(Ed Diener)“Subjective Well-Being”, Psychological Bulletin 95, 1984에서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는 이름 아래 정서적 측면에서 행복에 대한 조작적 개념화를 시도한 이래, C. D. Ryff의 연구(“Happiness is Everything, or is it? Explorations on the Meaning of Psychological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7, 1989) C. L. M. Keyes의 연구(“Social Well-Being”, Social Psychology Quarterly, 61, 1998)를 거쳐 심리학계에서 표준화되고 있는 행복 개념에 입각한 것이다. 심리학적 행복 개념의 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권석만, 󰡔긍정심리학: 행복의 과학적 탐구󰡕, 학지사, 2008 참조.] 우선 정서적 요인에서는 두 나라 사람들 간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심리적 안녕감에서는 두 가지 차이점이 나타났다. 하나는 한국인들의 심리적 안녕감을 구성하는 하위 요인들이 미국인들에게 비해 수적으로 적다는 것(자기계발/긍정적 인생관)이며, 두 번째는 타인과의 긍정적 관계를 심리적 안녕감의 하위 요인 중 하나로 간주하는 미국인들에 비해 한국인들은 이것을 심리적 안녕감과 독립적인 요인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가족을 불특정 타인의 범주로 생각하기보다는 타인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생각하는”[유나영 외, 앞의 글, 213.]데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은 이타심을 행복의 요인으로 더욱 강조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곧 미국인들은 개인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높을수록 행복감을 느끼는 반면, 한국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사회가 인정해줄수록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가문, 학벌, 직장 등)을 사회가 인정해줄수록, 그리고 사회 정치 문화적 환경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일수록[같은 글, 218쪽]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미국의 조사에서는 독립적인 척도 중 하나로 간주되지 않았던 사회경제적 요인들(경제력, 종교, 외모, 건강, 여가)이 한국인에게는 중요한 행복의 구성요인으로 인식된다는 것”[같은 글, 213쪽]이다. 이 연구의 연구자들은, 앞서 이루어진 다른 연구들과 관련하여,[특히 이지선김민영서은국, 한국인의 행복과 복: 유사점과 차이점,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18, 한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회, 2004 참조.] 이러한 차이점은 한국인들의 행복 개념에는 복()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인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특히 연구자들에 따르면 설문조사 결과 17%의 참가자들이 행복한 사람보다는 복 받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복이란, 개인에게 외재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유한 집안, 잘생긴 외모, 탁월한 선천적 능력 등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적어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행복은 주체적인 노력이나 태도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조건이나 운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통계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2014년 경향신문이 한국개발연구원(KDI)󰡔노동시장 신호와 선별에 기반한 입시체제의 분석과 평가󰡕(2013.5. 김영철·김희삼 연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성공 및 출세 요인으로 학벌과 연줄을 꼽은 학부모의 비율이 201048.1%에 이르렀다. 이는 200633.8%, 200839.5%에서 급증한 결과로,[“‘학벌사회수치로 입증됐다”, 󰡔경향신문󰡕 201413.] 점점 더 많은 학부모가 한국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나 기회 균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결과다. 또한 통계청이 13세 이상 39백명을 대상으로 한 <2015년 사회조사결과>에 따르면, “평생 노력을 하면 본인 세대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21.8%만이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2009년 처음 조사가 이루어질 당시 35.7%였던 답변 비율에 비해 15% 가량이 하락한 수치이다.[국민 10명 중 2명만 계층상승 가능’”, 󰡔한겨레󰡕 20151126.]


몇 년 전에 출간된 행복의 역사서에 따르면,[대린 맥마흔, 󰡔행복의 역사󰡕(2006), 윤인숙 옮김, 살림, 2008 참조. 또한 좀더 간략하지만 역시 흥미롭고 유익한 미셸 포쉐, 󰡔행복의 역사󰡕(2007), 조재룡 옮김, 열린터, 2007도 참조.]오늘날 논의되는 행복은 근대 이후에, 17~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근대 이전의 행복이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넘는 재능이나 운, 미덕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인간성의 완성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데 비해, 근대 이후 행복은 소수의 특권적이거나 훌륭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은 실로 인간이 불행한 곳에서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대린 맥마흔, 󰡔행복의 역사󰡕, 31~32.]곧 그들은 행복을 누려야 마땅한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는 것은 정부의 형태나 법 제도, 신념, 사회적 관습 및 삶의 조건 등의 문제점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경우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 사람들의 행복추구권이 자명한 진실로 간주된 것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부유한 집안, 잘생긴 외모, 탁월한 선천적 능력 등과 같이 외재적으로 주어지는 운으로서의 복을 행복의 핵심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행복을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다.

 

III. 소실점으로서의 행복

 

회고해본다면 오늘날 때로는 과학의 이름으로, 때로는 국가 정책의 이름으로, 또 때로는 대중적 담론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행복론은 크게 세 가지 역사적 계기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스털린 역설이라고 알려진 경제학적 발견이 존재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1974년 발표한 한 논문에서 그 당시까지 주류경제학에서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어 온 경제성장=행복의 증대라는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Richard Esterlin, “Does Economic Growth Improve the Human Lot? Some Empirical Evidence”, in Nations and Households in Economic Growth: Essays in Honor of Moses Abramovitz, eds., P. David and M. Reder, Academic Press, 1974.]이 글에서 이스털린은 1946~1970년 사이에 19개국을 대상으로 진행된 행복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국가 내에서는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사이에 소득과 행복 사이에 정()의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국가간 비교에서는 소득 수준이 높은 국가의 국민이 소득 수준이 낮은 국가의 국민보다 평균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시계열적인 분석을 해보면 한 국가 내에서도 소득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 이상 소득이 오른다고 해도 반드시 행복감이 더 상승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이스털린 자신은 이스털린 역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국가 내부 및 국가들 사이에서 어떤 일정한 시간적 지점에서 행복은 소득과 함께 직접 변화하지만, 시간이 경과되면 행복은 국가의 소득이 증대해도 증가하지 않는다.” Richard Esterlin et al., “The happiness-income paradox revisited,”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7(52), 2010, p. 22463.]이스털린은 그 후 비판가들과의 여러 논쟁을 거쳐[이스털린 역설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소개는 문진영, 이스털린 역설에 대한 연구: 만족점의 존재 여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학󰡕, vol. 64, no. 1, 2012 및 김균, 이스털린 역설과 관계재, 󰡔사회경제평론󰡕 42, 2013 참조. 또한 장덕진,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황해문화󰡕 2016년 여름호 참조.] 2010년에는 더 확장된 연구 대상, 곧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동유럽 국가들 및 발전도상국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 이 경우에도 역시 이스털린 역설이 존재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Richard Esterlin et al., “The happiness-income paradox revisited,”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p. cit..]이스털린의 연구는 그 이후 경제성장과 국가의 행복도의 상관관계에 관한 국내적 및 국제적 연구에서, 또한 이른바 행복경제학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그 다음 긍정심리학의 부상을 들 수 있다. 긍정심리학의 부상은 크게 두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미국 일리노이대 심리학과 교수인 에드 디너Ed Diener1984년 발표한 논문에서 행복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토대로 행복에 대한 조작적 정의를 제시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이 논문에서 그는 주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행복에 대해 과학적인 정의를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는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행복은 주관적인 것으로 개인의 경험에 놓인 것[Ed Diener, “Subjective Well-Being”, op. cit., p. 543.]이다. 비록 안락함, 건강, 덕 또는 부유함 같은 것이 주관적 행복[그는 자신이 정의하는 과학적 의미의 행복을 SWB, Subjective Well-Being의 약자로 표현한다.]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 안녕감(SWB)의 내재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다.”[Ibid.] 둘째, 주관적 안녕감은 부정적 척도의 부재만이 아니라 긍정적 척도를 포함하고 있다. 셋째, 주관적 안녕감의 측정은 한 개인의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포괄적 평가[bid., p. 544]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주관적 안녕으로서의 행복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는 긍정적 정서와 부정적 정서로 이루어진 정서적 요인으로, 행복감, 즐거움, 만족감, 자존감, 고양감, 환희감 등과 같은 긍정적 정서를 자주 경험하면서 슬픔, 우울함, 불안, 분노 등을 덜 경험할수록 주관적 안녕감의 수준이 높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인지적 요인으로 주로 삶의 만족도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설정한 기준과 비교하여 삶의 상태를 평가하는 의식적이고 인지적인 판단을 가리킨다. 곧 개인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비춰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이후 정서적 요인과 인지적 요인을 평가하는 척도들이 개발되고, 리프Ryff나 키이스Keyes 등에 의해 새로 심리적 안녕감과 사회적 안녕감이라는 요인이 추가되면서 오늘날 표준화된 심리학적 행복 개념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긍정심리학에는 이와 결합되어 있지만, 긍정심리학의 약간 다른 흐름도 존재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 미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처음 긍정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제안할 때(1998) 목표로 내세운 것은, 그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심리적 병리나 질병 중심의 심리학에서 벗어나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의 잠재력이나 자아의 목표 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심리학을 구성해보자는 것이었다.[좀 더 자세한 논의는 마틴 셀리그만, 󰡔긍정심리학󰡕, 김인자 옮김, 도서출판 물푸레, 2006 2장 및 권석만, 󰡔긍정심리학󰡕, 앞의 책 참조.]에드 디너와 같이 주관적 안녕을 중시하는 관점이 쾌락주의적-공리주의적 입장에 가깝다면, 이 후자의 입장은 자기실현적-목적론적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곧 이들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잠재적 능력과 긍정적 성품, 덕성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간주한다. 가령 셀리그만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행복 공식을 제안한다. “H=S+C+V” 여기에서 H영속적인 행복의 수준을 가리키고 S이미 설정된 행복의 범위’, C환경’, 그리고 V덕목을 가리킨다.[마틴 셀리그만, 󰡔긍정심리학󰡕, 85쪽 이하.]


세 번째 역사적 계기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스티글리츠 보고서다. 지난 20082월 세계경제위기가 일어나기 직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의 제안으로 형성된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조지프 스티글리츠를 위원장으로 하는)가 제출한 스티글리츠 보고서에서 경제 성장과 국가 발전을 측정하기 위한 표준적인 지표로서 GDP 대신 포괄적인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측정 방식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 이래,[Joseph Stiglitz et al., Mismeasuring Our Lives: Why GDP doesn't add up, The New Press, 2010; 아마티아 센, 조지프 스티글리츠, 장 폴 피투시, 󰡔GDP는 틀렸다: ‘국민총행복을 높이는 새로운 지수를 찾아서󰡕, 박형준 옮김, 동녘, 2011 참조.]세계 각 국 정부는 행복의 증대를 국가 정책의 주요 의제로 설정했으며, OECD와 유엔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서도 각 나라별 행복도를 측정하여 매년 그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아울러 이 보고서는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을 비롯한 초학제적인 행복학 연구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주었으며, 행복에 관한 좀 더 폭넓은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령 2011년 이후 OECD가 각 국가의 삶의 질을 측정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지표의 개념적 요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OECD(2011), “How's Life" : Measuring Well-Being”. 여기에서는 우성대, 행복의 정치경제학을 위한 연구: 웰빙과 삶의 질, 그리고 행복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73, 2014, 298쪽에서 재인용.]

 

웰빙

 

삶의 질 물질적 조건

 

건강 상태 소득과 부

-가정 양립

교육과 기술 일자리와 임금

사회적 관계

시민적 참여와 거버넌스 주거

환경의 질

개인적 안전 GDP

주관적 웰빙

 

이러한 개념적 틀은 긍정심리학에서 제안하는 주관적 웰빙, 곧 주관적 안녕감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질적 자원 및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등을 웰빙의 포괄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GDP는 전체적인 웰빙 중에서 물질적 조건에 속하며, 그것도 그 일부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행복에 관한 새로운 학문적 연구에 입각하여 각 나라별 행복 지수를 측정하려는 노력, 그리고 이러한 지수에 따라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긍정적 측면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개발의 노력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이러한 노력이 사회 복지를 확충하고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고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의지에 입각해 있으며, 더 나아가 성장 중심의 발전주의 경제 대신 국민의 행복을 증대시킬 수 있는 대안적 경제 질서를 추구하는 만큼, 더욱이 행복 지수를 측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끊임없이 새로운 지표와 척도를 개발하여 기존 지수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입각하고 있는 만큼, 이것 자체를 거부하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여기에 관해서는 데릭 보크, 󰡔행복국가를 정치하라󰡕, 앞의 책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장덕진, 앞의 글 이외에 이재열, 사회의 질, 경쟁 그리고 행복, 󰡔아시아리뷰󰡕 42, 2015 등 참조.]


하지만 이러한 지표 자체가 물신화되어 마치 그것이 행복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척도인 것처럼 간주되고, 다른 여러 가지 통계 수치들과 마찬가지로 정책과 사회적 여론을 지배하는 근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곧 이 다양한 부류의 행복론들이 은폐하거나 전치(轉置)하는 것, 따라서 이것들이 지닌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은폐 내지 전치야말로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기능이라면)은 마치 행복을 인식하고 평가하기 위한 단일하고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척도에 입각한 행복론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행복의 정치를 부정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는 오늘날(곧 이른바 탈근대 사회에서) 행복의 정치의 조건은 불행의 현상학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구조적 문제점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개인의 해결 과제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 최근의 행복론, 행복 정책, 행복 자본주의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바로 체제 모순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해법[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267. 강조는 울리히 벡.]이 되어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사회 체계가 만들어낸 문제점과 모순들에 대해 개인들 스스로 해법을 찾아내도록 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소비주의라고 불리는 현재 자본주의의 한 가지 특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행복을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나 유덕함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근대적인 행복 개념의 역설 중 하나는 행복이 이처럼 보편적인 권리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불행감이 가중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설은 특히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기인한다. “소비자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이란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들은 공개적으로 전시되는, 만족과 생생한 경험의 기회들 가운데서 선택하느라 바쁘다. ‘행복한 삶은 많은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으로 정의된다.”[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이수영 옮김, 천지인, 2010, 73.따라서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의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및 능력)로 측정되며, 가능한 최대 다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진보 저널리스트인 제레미 시브룩이 지적한 것처럼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과 다른 문화 속에 살지 않는다.”[바우만, 󰡔새로운 빈곤󰡕, 78쪽에서 인용.]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의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하고, 자기 주변 사람들의 생활 수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해도, 매 순간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과 욕망의 대상들이 소개되고, 이것들을 아낌없이 향유하는 능력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달된다. 그리고 이는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결핍감을 끊임없이 조장하게 된다. 바우만이 적절하게 명명하듯이 소비사회의 행복은 남보다 한 발 앞설 것(one-upmanship)을 요구한다.” Zygmunt Bauman, “Happiness in a society of individuals”, Soundings, Spring 2008, vol. 38, p. 26.] 따라서 이는 행복이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권리 개념이 되었지만, 실제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 더 나아가 이러한 능력이나 조건이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점에서 유래하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사회는 갑과 을로 나뉜 사회, 20 : 80, 또는 10 : 90, 심지어 1 : 99로 분할된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며, 근대 이후 행복의 궁극적인 판단자는 행복의 주체인 각각의 개인(또는 인간을 넘어서는 각각의 개체)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행복에 대한 단일한 포괄적인 정의를 제시하기는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만약 행복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려고 하면,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는 끊임없이 확장될 수밖에 없다. 에드 디너는 처음에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정의하면서 여기에서 정서적 요인과 인지적 요인을 제안한 바 있지만, 그 뒤 이러한 요인에 사회적 요인이 추가되었으며,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에서 행복학이 새로운 탐구 주제가 되면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는 점점 더 확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에 대한 점점 확장되는 정의가 제시되면 우리는 각각의 행복의 주체들이 누릴 수 있고 또 마땅히 누려야 하는 행복을 좀 더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뒤에서 이야기할 것처럼, 오늘날 행복의 주체가 점점 더 확장되고 더 나아가 그 주체들이 행복의 척도라고 간주하는 것이 점점 더 다양화되고 이질화되어가고 있는 만큼 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행복의 정치나 행복학은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사람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더 많은 경험적 연구와 설문조사,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만, 행복 그 자체는 점점 더 멀어지는 소실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의 궁극적인 판단자가 행복의 주체 자신이고 따라서 행복이 근원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면, 행복학이나 행복의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행복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이는 물론 아주 중요한 일이다) 행복의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IV. 불행의 현상학을 위하여-몇 가지 가설

 

서두에서 말했듯이 나는 오늘날 행복에 관한 문제에서 철학자 또는 인문학자에게 중요한 과제는 행복 자체에 관한 연구보다는 오히려 일차적으로 불행의 현상학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내가 불행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때 현상학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은, 에드문트 후설이 제안했던 원래의 현상학의 의미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고 포괄적인 사태다. 곧 그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또는 세계 안에 있음’In-der-Welt-sein)와 더불어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은 물론이거니와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역시 지칭할 수 있는 용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 또는 그에 상당하는 존재자의 경험의 조건과 형식 및 양태에 관한 탐구를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불행의 현상학이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들이 불행을 겪는 조건과 형식 및 그 양태들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의 정치를 위해 불행의 현상학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행복(이나 불행)의 주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색다른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늘날 행복의 주체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게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의 주체가 누구일까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넓게 봐서 자유인, 곧 남성 시민일 것이고, 좁게 보면 철학적인 시민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행복의 주체는 좁게 보면 인간일 것이며, 넓게 본다면 동물, 더 나아가 그 바깥의 생명체들까지 포함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권리상 평등하고 자유로운, 따라서 각자 동등한 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을 지니고 있는 주체라는 생각이 인권선언 및 미국 독립선언서 이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서 나오는 귀결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범위가 생물학적 인간의 지평을 넘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 등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 이 범위는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또는 이런저런 종류의 기계들(로봇 ...)이 생명체 못지않은 소중한 개체들로, 따라서 그 행복과 불행을 돌보아야 할 존재자들로 간주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주체의 이러한 확장은 동시에 불행의 주체의 확장이기도 하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적어도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그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명해야 할,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그러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주체들이 그만큼 확장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 이 주체들이 불행을 겪게 되는지, 그것의 구조적인간학적제도적 이유는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이 행복의 철학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행복이나 불행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또는 그 주체들 사이에 선험적인 동일성이 존재하는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불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이렇게 확장된 행복이나 불행의 주체가 서로 환원 불가능한 차이들에 따라 분리된다는 데서 생겨난다. 가령 만성적인 실업 상태에 빠져 있는 빈민 가정과 열렬한 환경운동가, 종교적인 문제로 테러를 당하는 무슬림 신자, 성적인 문제로 폭언과 무시, 따돌림을 당하는 성적 소수자에게 행복과 불행이 동일한 형식과 내용을 지닐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또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수렴하는 경향을 지닌다면, 그것이야말로 해명해봐야 할 중요한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장된 행복(과 불행)의 주체가 존재하지만, 그 주체들 사이에는 더욱 더 수렴 불가능한 이질성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이질성 자체가 불행의 또 다른 요인이 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불행의 현상학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톨스토이가 지적한 것처럼, 행복은 모두 비슷한 데 반해 불행은 각각 다르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불행한 이들에게만 행복이 절실한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들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하고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행복보다는 불행이야말로, 행복의 철학보다는 불행의 현상학이야말로 철학적으로, 인문학적으로 더 흥미로운(또는 더 절실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행복을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불행을 정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우리는 불행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상태에 있도록 강제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곧 불행은 욕망의 좌절, 그것도 직간접적인 강요된 좌절과 거의 등가적인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의 이러한 좌절이 구조적인 성격을 지닐 때 그것은 단순히 불행을 넘어 불의의 문제가 된다. 불행과 불의를 구별하는 이 문턱, 이 경계에 대한 탐색 역시 불행의 현상학의 중요한 화두다.


다른 식으로 말해본다면, 오늘날 행복의 정치를 위해 필요한 것, 따라서 불행의 현상학의 대상을 이루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내적 배제의 문제다. 내가 내적 배제라고 부르는 것은 유럽 학자들, 특히 프랑스 철학자들 및 사회학자들이 과거에 빈곤(poverty)이라고 불리던 것의 개념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새롭게 사용하고 있는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용어와 아울러, 인종이나 민족, 종교, 성적 정체성에 따른 차별과 배제까지도 포함하는 상징적 배제라는 용어를 아우르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의 개념이다.[내적 배제의 문제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앞의 책; Robert Castel, La montée des incertitudes: Travail, protections, statut de l'individu, Seuil, 2009를 각각 참조.] 내적 배제에 대하여 가장 간명한 정의를 제시해준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이다. 그는 내적 배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적 배제의 형식적 특징은, 배제된 이가 진정으로 통합될 수도 없고 실질적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는 점, 심지어 단도직입적으로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릴 수도 없다는 점이다.”[É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221.]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인 배제를 당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경우 이단자들이나 종교적 소수자들이었을 터이고, 또한 여성이나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20세기 초의 흑인 및 20세기 후반~21세기 초의 이주자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내적 배제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적인 사회적 질서의 위계에서 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사람들, 2등 시민, 2등 국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내적인 배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배제는 단순히 빈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개마고원, 2013, 77.]를 뜻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 바깥에 놓이도록 강제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문제는 오늘날 누구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또는 시인 박노해가 말하듯이 “[분쟁 지역에서 고통 받는-인용자] 69억 인구에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다.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신명호, 같은 책, 29쪽에서 재인용.]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행복의 바깥, 행복의 타자로서 내적 배제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체계적으로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사실 경제학자 장하성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저임금노동자 비율이 두 번째로 높고 월 임금이 100만원 이하인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 1874만 명의 3분의 1을 넘는다고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것은 믿기지 않는 숫자다.”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해이북스, 2015, 310.]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를 이끄는 주요 활동가 중 한 사람인 김혜진은 󰡔비정규사회󰡕라는 책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비정규직은 고용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고용 형태로 말미암아 삶이 불안정해지고 희망을 잃은 채 불안에 떨며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 국민이 되고 있다.”[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76~77.]


그렇다면 불행의 현상학이 묻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내적인 배제의 상황에 놓인 을을 위한 행복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앞의 글.] 을이라는 용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시사적인 용어가 되었다. 주로 계약관계에서 당사자 중 한 쪽을 지칭하기 위해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말이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고, 이제 어느덧 하나의 개념의 지위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점이다.


왜 이들이 자신을 을이라고 부를까? 그것은 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갑에 의해 모욕당하고, 착취당하고,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갑과 을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땅콩과자 서비스를 제대로 못한다고 항공기를 회항하고 직원을 모욕 준 재벌이 있는가 하면, 대학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교수와 학생 등을 모욕하는 사학 재벌도 존재한다. 또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상대로 부당한 요구를 가하는 업체들이 존재하고, 하청 업체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원청 업체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비정규직 직원들을 상대로 갑질을 하는 수많은 정규직 직원들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을이 존재한다면, 또한 을의 을, 곧 병()도 존재하고, ()도 존재하고, 그 아래 수많은 더 작은 을들도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불충분하며, 병에 대해서도, 정에 대해서도, 그 아래 수많은 이름 없는 몫 없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을의 불행의 현상학에 대해, 을의 행복의 정치학에 대해, 곧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때의 을이 환유적인 명칭이기 때문이다. 곧 을은 갑과 병 사이에 존재하는 누군가, 병과 정, 그 아래 존재하는 다른 약자들에 대해 또 다른 갑으로 군림하는 누군가를 지칭하기보다는 몫 없는 이들 일반, 내적인 배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어떻게 이 몫 없는 이들의 불행에 대한 현상학을 구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에 근거를 둔 행복의 정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근대적인 행복의 정치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에서 출발했다면, 아마도 탈근대적인 행복의 정치학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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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에 대한 토론이나 인용은 출판된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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몫 없는 이들의 몫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I.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을

 

()이라는 용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시사적인 용어 중 하나가 되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을은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정의된다. 하나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때, 그중 하나의 이름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둘째를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앞의 것은 을이 계약 관계에서 두 상대방 중 하나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갑, , , 정 등에서 을이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을이라는 말은 아주 평범한 말이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을이라는 말은 비정규직 취업자들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대기업의 하청 업체 직원들이나 프랜차이즈 가맹점들, 또는 재벌 기업의 횡포에 피해를 당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을은 약자이고 피해자, 못 가진 자, 주변화된 자, 배제된 자, 또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몫 없는 이들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용어가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라는 점이다. 주로 계약관계에서 당사자 중 한 쪽을 지칭하기 위해 널리 통용되던 말이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고, 이제 어느덧 하나의 개념의 지위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을이라는 말이 이처럼 무거운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두 가지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하나는 최근 영국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기한 인터레그넘’interregnum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지그문트 바우만, 문명, 그 길을 묻다-세계 지성과의 대화 (6) 지그문트 바우만, 󰡔경향신문󰡕 2014324; Zygmunt Bauman, “Times of Interregnum”, Ethics & Global Politics, vol. 5, no. 1, 2012; “Living in Times of Interregnum”, Transcript of the Lecture delivered at the University of Trento, Italy, on October 25, 2013(인터넷 주소 http://wpfdc.org/images/docs/Zygmunt_Bauman_Living_in_Times_of_Interregnum_Transcript_web_I.pdf). ] 두 개의 레그눔regnum 사이의 시대, 곧 하나의 통치 시대와 다른 통치 시대 사이, 하나의 정치체와 다른 정치체 사이, 더 나아가 하나의 문명과 다른 문명의 사이라는 문제.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의 아우성의 표현으로서의 을은 이러한 사이의 문제, 이행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주체에 관한 물음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정치적 주체의 문제는 현대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화두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정치적 주체의 문제가 이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 인터레그넘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돼 있다. 곧 이전의 통치, 이전의 정치체, 이전의 문명에서 정치의 주체로 존재했던 것들이 더 이상 정치적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는 반면, 새로 나타날 정치적 주체는 누구인가, 어떤 정치적 주체가 새로운 통치와 정치체, 문명의 주체가 될 것인가의 문제는 불확실한 채 남겨져 있다. 이 문제에서 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주체의 명칭인가 아니면 적어도 우리에게 그 주체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을은 이제는 사라져가는 과거의 주체의 잔영인가? 이것이 내가 두 번째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이다.


II. 인터레그넘의 시대

 

인터레그넘이라는 개념은 로마법에서 유래하는 용어로, 원래는 최고 권력의 공백 상태 또는 헌정의 중단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령 통치하던 왕이 죽었는데, 아직 새로운 왕이 즉위하기 이전의 상태가 바로 인터레그넘에 해당한다. 이 용어에 대해 좀 더 현대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기는 정확히 말하면,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인터레그넘에서는 극히 다양한 병리적 증상들이 출현하게 된다.”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1: 정치사회편󰡕, 이상훈 옮김, 거름 출판사, 1987, 312-번역은 수정. 국역본에서 인터레그넘공백기라고 번역되어 있다.]그람시는 원래 법학 개념이었던 인터레그넘에 대하여 좀 더 포괄적인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곧 레닌이 혁명적 상황지배자들이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고 피지배자들이 더 이상 지배받으려고 하지 않는상황으로 정의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람시는 그것을 진지전의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곧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조형하는 법적제도적 틀이 더 이상 자신의 효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것을 대체해야 할 새로운 틀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태 또는 여전히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인터레그넘의 시기로 규정한다.


바우만이 그람시의 이 개념을 되살려 말하고자 한 것은 현대 세계가 인터레그넘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세계 질서를 뒤흔들어버렸다. 영토국민(또는 인구)주권이라는, 기존의 정치 질서를 특징짓는 세 가지 요소는 세계화로 인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국가에 기초를 둔 주권은, 세계 시장, 초국민적 자본의 힘으로 인해 반쪽짜리의 권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우만이 간명하게 말하듯이 정치가들은 결정을 내릴 때면, 월요일 주식시장이 재개된 뒤 과연 자신들의 결정이 제대로 실행될 기회를 얻게 될지 아니면 그릇된 결정이었다고 판명이 날지 초조하게 기다린다.”[Z. Bauman, “Living in Times of Interregnum”, op. cit., p. 6.] 따라서 오늘날 각 국 정부는 한편으로 그들을 뽑아준 유권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시장의 압력 역시 받게 된다.


바우만은 권력과 정치의 결별[Z. Bauman, “Times of Interregnum”, op. cit., p. 52.]에서 인터레그넘의 핵심적인 징표를 발견한다. 여기서 권력은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며 정치는 어떤 것을 실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Z. Bauman, “Living in Times of Interregnum”, p. 4.]을 의미한다. 국민국가의 시대에 권력과 정치는 동일한 영토의 한계 내에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작동했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에 권력은 국민국가의 영토를 넘어서 정치에서 자유로운 흐름의 공간으로 증발되어버린 반면, 정치는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라는 지역적인 수준 또는 “‘장소들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 바깥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특히 세계시장 및 자본의 권력)이 오늘날 사회적개인적인 삶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국민국가의 정치적 제도 및 그것이 대표하는 국민 또는 인민의 주권적 힘은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바우만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나는 우리 역시 인터레그넘의 시기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바우만이 살고 있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세계화의 강력한 자장에 속해 있는 만큼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그가 분석한 바와 같은 인터레그넘의 시기에 속해 있지만, 우리는 또한 또 다른 의미의 인터레그넘의 시기를 겪고 있다. 나는 이것이 특히 세월호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지난 4월에 출간된 인문학자들의 세월호에 관한 성찰을 묶은 책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을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 바 있다. [진태원,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폭력, 국가, 주체화, 인문학협동조합 엮음,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현실문화, 2015.]


첫 번째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가장 단단한 현실이라고 믿었던 국가가 사실은 너무나 허망한 어떤 것이라는 점 ...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이었다[같은 책, 145.]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고 늘 자랑하던 자신들의 국가가 사실은 한 사람의 국민의 생명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는 무능한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둘째, 더욱이 이러한 무능력은 단순한 무능력이 아니라 무의지의 표현이라는 점, 곧 국가는 단지 구조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조할 생각이나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같은 책, 146]인다는 점이다. 이는 치안기계로서의 국가가 가장 큰 관심과 공력을 기울이는 것은 더 이상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대중적 분노를 일으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국가는 당연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목숨을 구조하는 것을 일차적인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믿었던 대중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드러낸 이러한 계급적이고 치안기계적인 성격에 분노하고 또한 절망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은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가리키는 환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 좌절감을 가져다 준 것은, 이 사건이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는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두 번째 것은, 세월호 사건이 말하자면 과소주체성(under-subjectivity)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과소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세월호 사건은 객관적 요인보다는 주체적인 요인에 의해, 더 정확히 말하면 주체성의 부재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선원들의 도덕적 책임감의 부재일 수도 있고, 오직 이윤추구만을 위해 다 낡은 배를 무리하게 운항한 해운사의 천박한 경영 방식일 수도 있고, 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하고 방치한 정부 기관의 도덕적 해이일 수도 있고, 눈앞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승객들을 보고도 외면한 해양경찰들의 잘못일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건이 일어난 후 이를 제대로 수습하고 처리하지 못한 중앙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일 수 있으며, 피해를 당한 유가족들을 충분히 위로하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진상조사에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유가족들을 불온한 치안 방해꾼으로 취급한 현 정부의 비인간적인 처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세월호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성의 부재, 주체성의 결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과소주체성의 또 다른 의미, 좀 더 심층적인 의미는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한 이들이 동질적인 이들, 하나의 동일한 주체를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다. 한편으로 본다면 세월호 사건이 이처럼 큰 사건으로 부각된 데에는 대중들의 놀라운 공감과 유대의 능력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난 당시부터 사건의 추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구조를 요청하는 승객들에게 안타까움을 표시하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보내면서 사고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를 비난하면서 해결을 촉구했으며, 또한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사들을 질타했다. 아울러 배가 침몰하고 수색이 장기화되는 과정에서도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서 유지시켜온 것 역시 대중들 자신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후부터 자식들 팔아서 한 몫 챙기려고 한다, 세월호 때문에 장사가 되지 않는다, 국가에 무슨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유공자 행세를 하려 드느냐는 비난들을 일상 속에서 입에서 입으로 옮겼던 이들 역시 대중들이었다. 또는 적어도 그러한 비난들을 묵과하고 용인했으며,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로 덮고 싶어 하는 정권 및 여당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 역시 대중들이었다.


한 편으로 국가가 우리 편, 나의 편이 아니라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절망한 이들, 적어도 그들 중 어떤 이들이 곧바로 이렇게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표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국가가 그들의 편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내가,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내가 그들에 속하는 길이다. 실제로, 곧 경제적으로물질적으로 그들에 속할 수 없다면, 상상적인 방식으로라도 그들에 속할 수 있어야[같은 책, 149] 하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개인적집단적인 경험을 통해 힘 있는 자들, 몫 있는 자들의 편에 속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을 보호받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특히 국가의 보호가 없이는 하루하루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 가장 몫이 없는 이들이야말로 이러한 실존적 진리를 절박하게 체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몫 없는 이들은 또한 가장 과소 주체화된 이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상징적 주체성을 힘 있는 이들과의 상상적 동일시로 대체한 이들[같은 책, 152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세월호가 뜻하는 세 번째 측면이 나온다. 그것은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국가 또는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다시)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같은 책, 153쪽]이다.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것이 검은 구멍, 검은 공백으로서의 국가이고, 그러한 공백을 통해 표현된 것이 과소주체성이라면, 제기되는 문제는 주체성을 상실한 국가, 따라서 계급적인 치안기계로서의 본성()을 갖게 된 국가를 어떻게 (다시) 주체화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터레그넘의 문제라면, 이는 이 문제가 해방 70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위상과 그 장래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본다면 지난 70여년 또는 60여 년 동안 한국인에게 유일한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다. 해방과 전쟁이 남겨놓은 가난 속에서 사람들에게 지상과제는 하루하루의 생존이었으며, 먹고사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유일한 화두였다. 문제는 흔히 말하듯 이제 먹고 살만한처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에게 유일한 화두는 먹고사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그저 끼니를 때우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 달라졌을 뿐, 유일한 개인적국가적 관심사는 먹고사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을 우리가 정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먹고사는 것 이외에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전무한 공동체를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정치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한국이라는 정치 공동체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또는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는 정치공동체라기보다는, 랑시에르가 정의한 의미에서 치안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사용한 치안 개념은 두 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를테면 반()정치적인 정치성이다. 랑시에르가 푸코에게 빌려와서 변형시키고 있는 치안police 개념은 우리가 보통 정치라고 부르는 것,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 61]를 가리킨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이것을 정치가 아닌 치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 전체는 정확히 데모스를 정치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철인정치를 꿈꾸었던 플라톤의 아르케정치archi-politique[이것은 랑시에르가 플라톤주의적 정치철학을 규정하기 위해 󰡔불화󰡕 4장에서 사용한 용어다. 그는 치안의 정치철학을 플라톤의 아르케정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사정치, 마르크스의 메타정치로 구별한다.]에서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유 민주주의 정체에 이르기까지 치안은 데모스를 대신하여(또는 데모스를 배제한 가운데) 통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하나는 치안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뿌리를 둔다는 점이다. 치안은 무엇보다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신체들이 그것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만든다. 이 질서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질서로서, 어떤 활동은 가시적인 것으로 다른 활동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어떤 말은 담론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말은 소음에 속하는 것으로 알아듣게 만든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노동의 장소를, 공적 영역이라 불리는 것에 고유한 보기 및 말하기 양식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사적 영역으로 만든 것이 치안의 법이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63]


그러나 지난 60~70여 년 동안 존속해온 이러한 공동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공동체 또는 공동체의 새로운 가치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구현하는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제도와 운동, 절차들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 만한 주체 내지 행위자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따라서 세월호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의 본성은 지난 70여 년 동안 오직 먹고사는 것 하나만을 유일한 가치로 추구해온 대한민국이라는 이상한 공동체의 역사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호명하는 것이 너희가 욕망하는 나라는 무엇인가, 너희가 원하는 나라는 어떤 것인가[진태원,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 앞의 책, 15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월호를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은, 그 유가족들 스스로 제기하는 이 문제, 곧 대한민국이라는 정치 공동체를 (다시) 구성하는 문제를 우리가 집합적으로 제기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내가 생각하는 인터레그넘의 문제다.

 

III. 어떤 정치적 주체?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왜 의 문제로, ‘을의 민주주의라는 문제로 제기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짧게 말한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인터레그넘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주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 이라는 용어가 이 정치적 주체라는 문제에 관해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그 중에서 특별히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이 용어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과소주체적 현실, 곧 정치적 주체성의 부재에 대하여, 더 나아가 정치적 주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어 용어 내지 개념의 부재에 대하여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을이라는 이 용어가 정치적 주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한국어 용어 내지 개념의 부재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주장에 대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국민이라는 말도 있고, ‘대중이라는 말도 있으며, 또한 1970~80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널리 사용되던 민중이라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에서 정치적 주체성을 표현하는 용어가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선 국어사전에서 이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국어사전에 따르면(여기에서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편찬한 󰡔한국어대사전󰡕을 참조하고 있다) ‘국민한 나라의 통치권 아래에 있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국민은 정치적 주체라기보다는 통치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민은 어떤 정치 공동체에 대한 법적 소속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제1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이는 국민은 주권의 담지자이며, 모든 권력의 주체라는 점을 표현하는 조항이다. 따라서 헌법적인 규정에 따르면 국민은 유일한, 또는 적어도 탁월한 정치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 국민을 이런 의미의 정치적 주체로 규정하고 있는 경우는, 내가 확인한 바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어사전의 용법에 따를 경우 국민은 통치의 대상이거나 법적 소속을 가리키는 용어일 뿐이다.


나는 이것이 국어사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국어사전은 한국어 단어들의 실제 용례를 수집해서 기록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어사전은 국민이라는 용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헌법전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헌법상으로는 국민이 정치적 주체로 규정되어 있지만, 우리는 국민을 정치적 주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난 60여 년의 정치적 경험의 표현이든, 아니면 현재의 사회적 현실의 표현이든 간에, 국민을 실제로 정치적 주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인문사회과학자들인 경우 더욱 더 드물다. ‘국민이라는 노예’, ‘국민이라는 괴물’, ‘국민으로부터의 탈퇴같은 저서들의 제목이 가리키듯,[니시카와 나가오, 󰡔국민이라는 괴물󰡕, 윤대석 옮김, 소명출판사, 2002; 권혁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삼인, 2004; 김철, 󰡔국민이라는 노예󰡕, 삼인, 2005. 이 저작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진태원, 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1, 2009 참조.] 인문사회과학자들, 특히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자들일수록, 국민을 정치적 예속과 피지배의 표현으로 간주하지 정치적 주체의 표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민족이야말로 국민보다 정치적 주체에 더 가까운 용어라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민중이야말로 우리말에서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진정한 용어라고 간주한다. ‘민족의 경우는 차치해두고 여기에서는 민중이라는 용어를 살펴보기로 하자.[민족에 관해서는, 진태원, 어떤 상상의 공동체? 민족, 국민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96, 2011 참조] 역시 국어사전에 따르면 민중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보통 피지배층을 이루는 노동자, 농민 등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의에서도 민중은 정치적 주체를 표현하지 않는다. 민중은 한편으로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따라서 국가와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사회에서 아래쪽에, 피지배층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히 노동자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 또는 국가와 사회의 대다수를 이룬다는 것이 정치적 주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과거 노예제 시절이나 봉건제 시절에도 피지배자들은 국가와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그들이 정치적 주체를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용법에 따를 경우 민중을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학자들의 경우에는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이 경우에도 답변은 부정적이다. 지난 192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민중개념의 계보를 검토하고 있는 글에 따르면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31운동을 거치면서 더 이상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영웅의 존재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그 대신 민중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세영, 민중개념의 계보학, 김경일 외, 󰡔우리 안의 보편성󰡕, 한울, 2013, 303] 또한 1970년대에 들어서 함석헌은 어떠한 정치적사회경제적 제도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은 원초적인 의미의 사람이자 민을 가리키는 용어로 민중 내지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에 이르게 되면, 민중신학, 민중사학, 민중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민중이라는 용어가 점점 더 역사를 이끌고 가는 하나의 주체로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단계에 있어서의 대중[같은 책, 307]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중이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의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변혁주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민중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의 자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이제는 거의 누구도 역사의 주체,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이라는 개념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로 민중이라는 용어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 점점 더 사용되지 않게 되었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최근 들어 민중사학 이후의 민중사라는 의제를 제기하면서 새로운 민중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1980년대의 민중 개념(적어도 민중사학에서 사용된)현실에서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구성해낸 개념’”[역사문제연구소 민중사반, 󰡔민중사를 다시 말한다󰡕, 역사비평사, 2014, 17]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오히려 일상적이고 다성적인 주체로서의 새로운 민중을 재현하는 것을 자신들의 공통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둘째, 더 나아가 192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주체로 설정된 민중의 실제 의미는 저항의 주체라는 점이다. 곧 혁명가나 활동가 또는 학자나 문인들이 호명한 민중은 엄혹한 지배의 현실에 맞서 투쟁하고 저항할 수 있는 집합적 존재로서의 민중이지,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은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민중은 실제의 민중이라기보다는 당위적으로 요청된 민중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저항의 주체와 정치의 주체를 구별한 것은, 저항이 정치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저항 자체에 머물러 있는 주체, 따라서 자신을 구성과 통치의 위치에 놓지 못하는 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의 주체에 미달한다는 점이다. 집합적으로 어떤 정치체를 구성하고 그 정치체를 통치하고 조직하는 위치에 존재하는 것만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주장할 수 있다. 반면 민중은 민중이 나라의 주인 되는’(김남주) 같은 시적 표현들이나 민중민주주의같은 사회과학적 표현들에서는 지속적으로 주체의 명칭으로 호명되었지만,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 민중이 통치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실제로 누구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어에는 놀랍게도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도 대중도 아니며, 국민도 아니다. 북한에서는 인민이라는 용어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나온 󰡔조선말 대사전 증보판󰡕에 따르면 인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나라를 이루고 사회와 력사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주체로 되는 사람들. 혁명의 대상을 제외하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다 포괄된다. 2.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에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자주적으로 살아나가기를 원하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 3. 어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통털어 이르는 말.”[북한 사회과학원, 󰡔조선말 대사전 증보판󰡕, 사회과학출판사, 2006] 이 세 가지 정의 가운데 첫 번째 정의가 바로 정치의 주체로서 인민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사용되는 말 가운데는 이러한 의미의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부재한다.[알다시피 인민이라는 용어는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다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이후 남한에서는 더 이상 공식적인 법적정치적 용어로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김성보,남북국가 수립기 인민과 국민개념의 분화, 󰡔한국사연구󰡕 144, 2009 및 박명규, 󰡔국민인민시민󰡕, 소화, 2014를 참조]


하지만 이것이 마냥 불운한 일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의 이러한 부재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정치적 주체의 성격에 대해 새롭게 고찰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조금 뒤에 살펴볼 정치철학자들의 논의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북한 사전에 나와 있는 인민에 대한 정의는 대문자 인민소문자 인민, 통치의 주체로서의 인민과 소외되고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들로서의 인민 사이의 간격과 괴리를 상상적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사전에 따르면, 북한에는 피지배자로서의 인민, 몫 없는 이들로서의 인민, 을로서의 인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최근 정치적 주체의 문제를 제기한 몇몇 서양철학자들의 작업을 검토해보고 싶다. 내가 살펴보려는 철학자들은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프랑스의 자크 랑시에르, 그리고 작년에 타계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영국 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치적 주체의 문제를 이탈리아어의 포폴로popolo, 불어의 푀플peuple, 영어의 피플people의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이 단어들은 모두 우리말로 하면 대략 인민이나 민중등으로 옮길 수 있을 터인데, 이 말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의 문제가 내가 살펴보려는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따로 번역하지 않고 그냥 음역해서 사용하겠다). 더 나아가 이들은 정치적 주체로서 포폴포, 푀플, 피플의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의 내적 분할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1. 아감벤과 포폴로

 

아감벤은 󰡔목적 없는 수단󰡕이라는 논문 모음집에 수록된 포폴로란 무엇인가?라는 글[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김상운양창렬 옮김, 난장, 2009. 󰡔목적 없는 수단󰡕의 번역자들은 아감벤의 이탈리아어 popolo(영어로는 people)라는 단어를 줄곧 인민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이 번역 대신 원어를 그대로 음역하는 것을 택했다. 왜냐하면 popolo, peuple, pueblo, people 또는 Volk 같은 용어들을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지, 또는 이러한 유럽서양어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어떤 것인지가 이 글의 주요 고찰 대상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에서 서양어, 특히 유럽의 언어적 전통에서 피플’people이라는 말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탈리아어 포폴로popolo, 프랑스어 푀플peuple, 스페인어 푸에블로pueblo 같은 어휘들은 근본적으로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이다. “즉 동일한 하나의 용어가 구성적인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권리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실상 정치로부터 배제된 계급도 가리키는 것이다.”[조르조 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 38강조는 아감벤부연하자면, 포폴로, 푀플, 푸에블로 같은 용어들은 한편으로 총체적이면서 일체화된 정치체로서대문자로 된 포폴로Popolo, 푀플Peuple, 푸에블로Pueblo를 표현한다. 반면 동일한 용어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의 부분적이자 파편화된 다수[같은 책, 40쪽]인 소문자 포폴로, 푀플, 푸에블로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자는 근본적으로 포함적인 반면, 후자는 본질적으로 배제적이다. “한 쪽 극에는 주권과 일체화된 시민들의 완전한 국가가 있고, 다른 쪽 극에는 비참한 자억압받는 자정복당한 자로 구성된 (‘기적의 궁전이나 수용소 같은) 금지구역이 있다.”[같은 책, 같은 곳]


이러한 언어학적 고찰에 기대어 아감벤은 그 자신이 나중에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발전시킨 바 있는 서양의 정치 형이상학의 기본 구조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포폴로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본래의 정치 구조를 규정하는 짝패 범주들을, 즉 벌거벗은 생명([소문자] 포폴로)과 정치적 실존([대문자] 포폴로), 배제와 포함, 조에zoe와 비오스bios를 손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포폴로라는 개념은 그 안에 근본적인 생명정치적 균열을 이미 언제나 담고 있다. 포폴로는 자신이 이미 언제나 포함되어 있는 전체에 속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전체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다.[같은 책, 41-42쪽]

 

그리고 아감벤은 역시 그가 나중에 󰡔호모 사케르󰡕 연작에서 제시한 바 있는 종말론적인 또는 오히려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철학(또는 정치신학)의 논지를 피력하고 있다. 곧 나치의 유대인 학살수용소에서 난민수용소를 거쳐 미국의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배제된 자들인 포폴로를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포폴로를 분할하던 분열을 메워보려는 집요하고도 체계적인 시도에 불과[44쪽. 강조는 아감벤]하다. 특히 오늘날 발전을 통해 빈민 계층을 제거하려는 자본주의적-민주주의적 계획은 자신의 내부에서 배제된 자들로 구성된 인민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3세계의 모든 주민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바꿔놓고 있다.”[45-46쪽] 따라서 이것은 전지구적인 내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적 분열[곧 조에와 비오스의 분열-인용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만이 유일하게 이런 진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며, 지구상의 포폴로와 시민 전체를 분할하는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46쪽]


아감벤의 논의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서양어, 특히 유럽의 로만스 언어 계열에서 정치적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들(포폴로, 푀플, 푸에블로, 또는 어느 정도까지는 영어의 피플)은 본질적인 중의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들은 한편으로 어떤 정치체의 성원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그 중 특정한 일부, 곧 소외되고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중의성은 고대 로마에서부터 지속되어온, 특히 프랑스혁명 이후의 근대성을 근원적으로 특징짓는 생명정치적 이원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가 상징적으로 표현하듯, 배제되고 주변화된 포폴로를 완전히 배제하고 절멸시키려는 기획을 표현한다. 따라서 아감벤의 정치적 기획은 이러한 묵시록적인 절멸의 기획, 전지구적인 내전의 기획에 맞서 벌거벗은 생명을 정치적 주체로 또는 오히려 정치적 탈주체로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랑시에르와 푀플

 

아감벤과 마찬가지로 랑시에르 역시 서양 정치철학의 시초에서부터 정치적 주체는 이중적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하지만 아감벤과 달리 그는 이를 시원적인 생명정치적 분할과 연결시키지 않으며, 메시아주의적인 정치적 기획과 관련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시초부터 유일한 정치적 주체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푀플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랑시에르의 논점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텍스트를 통해 그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랑시에르는 정치에 대한 열 개의 테제5번째 테제에서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푀플peuple(랑시에르 저작의 국역본에서도 역시 이 단어는 모두 인민으로 번역되어 있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테제 5: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푀플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푀플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으로,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Il est la partie supplémentaire par rapport à tout compte des parties de la population, qui permet d'identifier au tout de la communauté le compte des incomptés. [Jacques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Gallimard, 2004, pp. 233~34;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242쪽]

 

5번째 테제를 번역하면서 번역자는 프랑스어 원문의 “la partie supplémentaire”보충이 되는 부분으로 옮겼지만, 나는 이것을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대체보충적인 부분이라고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데리다의 대체보충의 의미에 대해서는 자크 데리다,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에 수록된 용어해설을 참조]


이 테제에서 푀플은 두 가지로 정의되고 있다. 첫째, 푀플은 민주주의의 주체”,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 이러한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푀플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collection des membres de la communauté”이 아니며, 인구를 구성하는 여러 개인들이나 집단들 중에서 노동하는 계급classe laborieuse”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둘째,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푀플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 부분을 뜻한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이러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두 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푀플은 공동체의 부분들 각각에 대한 셈을 대체 보충하는 부분으로, 이러한 대체 보충적인 부분에 의해 공동체 전체는 셈해지지 않은 이들의 셈과 동일시될 수 있다. 푀플에 대한 랑시에르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1)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우선 이 테제는 그리스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한 랑시에르의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기원전 500년 경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 이룩한 민주주의 개혁을 민주주의에 그것의 장소를 부여하는 중대한 개혁[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42]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개혁을 통해 혈연에 기반을 둔 통치 체제와 단절하는 민주주의 정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 개혁의 핵심은 클레이스테네스가 도입한 행정구역 재편에 있다.[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 대한 랑시에르의 평가는 프랑스 고전학자들의 작업에 기대면서도 또한 그들의 논의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장 피에르 베르낭, 고대 그리스의 공간과 정치적 조직,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 박희영 옮김, 아카넷, 2005 참조] 이전까지 아테네는 퓔레phyle’라고 불리는 혈연에 기반을 둔 4개의 부족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것을 해체하고 대신 아테네 시와 그 주변지역, 해안지역, 내륙지역 같이 3개의 구역으로 아테네 국가를 정비하면서 데모스demos라 불리는 촌락공동체가 중심 단위를 이루는 10개의 부족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체제에서 남성들은 18세가 되면 데모스에 등록하여 재산이나 혈연과 무관하게 참정권을 비롯한 시민의 권리와 지위를 평등하게 보장받았다. 따라서 랑시에르에 따르면 요컨대 인민이란 출생의 원칙을 이어가기 위해 부의 원칙을 부여하는 논리를 가로막은 인위적 고안물artifice이다.”[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p. 233;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43] 랑시에르가 푀플에 대하여 제시한 정의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재해석의 결과다.

 

2)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푀플

 

그는 테제 5를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한다. “푀플은, 인구를 이루는 부분들이 공동체에서 몫을 나누어가질 자격에 대한, 그리고 이 자격에 따라 그들에게 돌아올 몫들에 대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다. 푀플은 셈해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셈 또는 몫 없는 이들의 몫, 곧 말하는 이들의 평등이러한 평등이 없이는 불평등 자체도 사고 불가능하다을 기입하는 대체 보충적 존재다.”[Ibid., pp. 234~35; 243-번역은 수정]


이러한 재규정에서 우선 주목할 점은 푀플은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라는 규정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모든 실제의 셈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 곧 각각의 개인과 집단, 계층과 계급들이 그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갖게 되는 몫에 대한 규정을 뜻한다. 이러한 몫은 좁은 의미의 경제적 이익이나 이러저러한 권리만이 아니라 각각의 부분이 지니는 정체성과 성질 및 자격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푀플이 이러한 모든 실제의 셈과 관련해볼 때 추상적인 하나의 대체 보충이라고 말한다. “추상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푀플이라는 속성 내지 자격이 몫의 분배와 관련된 실제의 셈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뜻한다. 곧 푀플이라는 속성 내지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어떤 몫을 더 받거나 덜 받게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푀플이 단지 추상적인자격이나 속성이 아니라 하나의 대체 보충이라는 점이다. 푀플은 공동체에 속하는 각각의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지닌 이러저러한 속성이나 자격, 정체성에 덧붙여진 추가적인 속성 내지 자격이다. 그것은 실제의 셈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분배의 몫을 규정하는 데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정치 공동체인 한에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모든 성원들이 항상 이미 지니고 있는 속성 내지 자격이 바로 푀플이라는 속성이다.

 

3) 대체하는 보충으로서의 푀플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대체하는보충인가? 이것이 대체하는것은 무엇인가? 랑시에르에 따르면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들, 곧 개인들이나 집단들에게 돌아갈 몫들의 분배를 규정하는 것은 아르케arkhe의 논리다. 그리스어로 시초”, “원리”, “지배등을 뜻하는 아르케라는 말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어떤 공동체 성원들의 속성 내지 자질과 그에 따른 분배의 몫을 규정하는 원리를 뜻한다. 이러한 원리에 따르면 가령 고귀한 혈통 출신의 사람들이 비천한 혈통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자격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더 많은 몫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또 나이가 더 많거나 재산이 많은 이들, 또는 남들보다 더 유덕하거나 더 많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자격을 지니고 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몫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 반대로 다른 개인이나 집단에 비해 자격이 덜한 사람들, 곧 혈통이 비천하고 나이도 적고 재산도 변변찮고, 유덕하지도 못하며 지식도 없는 사람들은 더 적은 몫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셈 자체에서 배제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스의 경우 여성이나 노예, 외국인 등이 그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르케의 논리는 불평등의 논리이자 배제의 논리며, 이러저러한 본성적인/자연적인 자격의 차이에 근거하여 그러한 불평등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다. 󰡔불화󰡕에서 랑시에르가 사용한 용어에 따른다면, 아르케의 논리는 모든 종류의 치안우리가 흔히 정치체 내지 정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을 근거 짓는 논리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참조]


푀플이라는 속성 내지 자격이 대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르케의 논리다. 아르케의 논리에 따르면, 가령 한국 최고의 재벌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과 이태원 전철역 앞에서 노숙하는 사람은 한국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한 성원이기는 하되, 그들이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몫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엄청난 속성과 자격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푀플이라는 원리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자격 및 따라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에 대한 실제의 모든 셈과 무관하게, 그러한 셈에 앞서 한 사람의 푀플, 한 사람의 데모스라는 점에서는 동등하다(데모스라는 말의 또 다른 뜻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두 한남동의 주민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양자는 모두 한 사람의 푀플이며, 그런 한에서 동등한 정치 공동체의 주체로서 존재한다.[그는 다른 곳에서는 이를 대체 가능성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J. Rancière, “Should Democracy Come?”, in Pheng Cheah & Suzanne Guelac eds., Derrida and the Time of the Political, Duke University Press, 2009 참조]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이 두 사람은 정치적 주체로서의 동등한 몫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일정한 속성이나 자격의 부재 때문에 공동체의 몫의 분배 질서에서 배제된 사람들 역시 한 사람의 푀플, 하나의 데모스라는 점에서는 모두 동등하며, 정치적 주체, 민주주의의 주체로서는 모두 동등한 몫을 지니고 있다. “푀플은 셈해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셈 또는 몫 없는 이들의 몫, 곧 말하는 이들의 평등이러한 평등이 없이는 불평등 자체도 사고 불가능하다을 기입하는 대체 보충적 존재다라는 랑시에르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4) 민주주의=몫 없는 이들의 몫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대체 보충적인 부분이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테제 5)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공동체 전체가 셈해지지 않은 이들의 셈과 동일시된다는 것은, 첫째,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치 공동체로, 이러한 공동체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들의 합과 동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부분들의 속성과 자격 및 그에 따른 몫의 분배가 아르케의 논리를 따르며, 아르케의 논리는 자연적인 불평등 질서의 표현이자 정당화를 뜻하는 데 반해, 정치 공동체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을 통해 형성된 인위적 고안물이다.


둘째, 정치 공동체가 인위적 고안물인 이유는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성원들인 데모스 또는 푀플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존재자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성된, 또는 발명된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닌 속성(혈통, , 유덕함, 지식 등)의 차이에 관계없이, 능력이나 자격의 정도와 무관하게 동등한 주체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그러한 평등을 서로에게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공동체의 유일한 토대 아닌 토대로 긍정하는 정치적 주체들의 행위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며, 또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푀플 내지 데모스라는 정치적 주체의 등장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인구 자신을 그 내부에서 분할하는 일이다. 데모스가 등장한 이후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구들은 더 이상 그 이전과 동일한 인구가 아니다. 그 이전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구들이 아르케 논리에 따라 규정되고 몫을 분배받는 존재자들이었다면, 푀플 내지 데모스의 등장 이후의 인구들은 그들의 모든 실제적인 셈에 앞서, 푀플이라는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으로 규정되는 인구들이다. “푀플은 정당한 지배의 논리를 중단시킴으로써 인구를 인구 자신으로부터 탈구시키는 대체 보충이다.”[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p. 234;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42]

 

3. 포퓰리즘과 피플

 

마지막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제창한 인물이자 현대 포퓰리즘 이론을 쇄신한 바 있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피플에 대한 재규정을 살펴보자. 라클라우는 랑시에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사회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전자의 부분은 단순한 한 부분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질서에서 억압되고 배제된 부분이다.


이를 라클라우는 플레브스plebs와 포풀루스populus라는, 로마 시대의 정치적 집단을 지칭하는 두 가지 상이한 명칭을 통해 표현한다. 포풀루스가 어떤 정치 공동체의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따라서 가령 국민 공동체의 합법적인 성원들 전체로서의 인민’)이라면, 플레브스는 포풀루스의 일부분이기는 하되, 기존의 사회 현실과 정치 질서 속에서 제대로 인정받거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집단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러한 집단들은 각자 상이한 이해관계 및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분산되어 있는 플레브스로 계속 머물게 될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서로 접합된다면, 다시 말해 공동의 대의를 통해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곧 포퓰리즘적 주체로 구성된다면, 그들은 분산된 플레브스로 머물지 않고 스스로 전체를 자임하는 부분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포풀루스는 진정한 피플이 아닌 억압적이고 기만적인 피플로 드러나며, 반대로 기존의 사회 질서에서는 부분으로 나타났던 플레브스는 진정으로 보편적인 포풀루스를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주어진 것으로서의 포풀루스(현재 존재하는 대로의 사회적 관계의 총화)는 자기 자신을 허위적 총체성으로, 억압의 원천인 부분성으로 드러내게 된다. 반면 플레브스의 경우 그것의 부분적 요구는 온전하게 충족된 총체성의 지평 속에 기입될 것이며, 진정으로 보편적인 포풀루스를 구성하는 것을 열망할 수 있게 된다. 포풀루스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엄밀하게 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성, 곧 플레브스는 자기 자신을 이상적 총체성으로 인식된 포풀루스와 동일시할 수 있게 된다.[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Verso, 2005, p. 94]


랑시에르와 라클라우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역사비평} 2013년 겨울호 참조]


첫째, 라클라우는 차이의 논리에 따라 분산되어 있는 개인 및 집단들이 피플이라는 정치의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준거로서의 지도자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때의 지도자는 살아 있는 현실적인 인물일 필요는 없으며, 그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고 결합될 수 있다면 족하다. 따라서 실제로 필요한 것은 지도자의 이름이다. 라클라우의 모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페론 대통령이나 중국의 마오쩌뚱,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또는 노무현 대통령 등이 바로 그러한 이름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둘째, 랑시에르는 정치를 곧 주체화subjectivation와 동일시한다. 랑시에르가 주체화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가령 고대 그리스의 데모스라는 정치적 주체의 형성이나 19세기 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 또는 19세기 후반 여성이라는 또 다른 주체의 형성, 20세기 말 이주자라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 등이다. 랑시에르는 주체화를 -정체화dis-identification로 정의한다. 곧 치안이라고 불리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통해 부여된 이런저런 정체성들을 거부하고 그러한 정체성들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주체 형성을 시도하는 것이 바로 주체화이다.


랑시에르는 19세기 프랑스의 급진적인 정치가였던 오귀스트 블랑키가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칭을 이러한 주체화 과정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블랑키는 1832년 열린 재판에서 검사가 그의 직업을 묻자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가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고 반박하자,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라고 답변한다. 여기서 검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치안의 논리로서 정체화의 논리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블랑키의 대답은 엉뚱한 대답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의 명칭이 아닐뿐더러, 블랑키 자신이 노동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블랑키는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인 정체성을 지닌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쫒긴 자의 이름이다. 따라서 그것은 천민들parias”이 아니라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이들, 따라서 그 질서의 잠재적인 소멸인 이들(마르크스가 말했던 모든 계급의 소멸인 계급)”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화 과정을 탈-정체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라클라우가 차이의 논리를 넘어선 피플적인 등가성의 논리를 통해 비로소 급진 민주주의 주체인 피플이 형성된다고 주장할 때, 라클라우의 주장도 랑시에르의 주장과 유사하다. 단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이론 및 헤게모니 이론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투쟁들을 어떻게 접합하고 결속시킬 것인가에 있는 데 반해, 랑시에르는 주체화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투쟁들의 고유성과 이질성을 강조할 뿐,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대를 형성하고 결속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랑시에르가 역사적인 몇몇 사례(고대 그리스의 데모스, 19세기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19세기 후반 여성)를 통해 주체화 과정을 예시하는 반면, 라클라우는 이를 사회운동, 정치운동의 일반 논리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라클라우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포퓰리즘을 통해 형성된 인민을 어떤 근거에서 민주주의적 인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꿔 표현될 수 있다. “만약 좌파 포퓰리즘 내지 진정한 민주주의적 포퓰리즘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 포퓰리즘을 우파 내지 극우파와 구별되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진태원, 포퓰리즘, 민주주의, 민중, {역사비평}, 209]

 

4. 을의 민주주의불가능한 기획?

 

을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은 잘 정리된 개념보다는 하나의 화두에 가까운 말이다. 을이 누구인지, 그들이 실제로 정치적 주체로, 민주주의적 주체로 구성될 수 있을지, 그들이 과연 지금까지 존재해왔던 역사적 대한민국의 공동체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을은 그냥 잠시 사용되었다가 곧 소멸하게 될 유행어인지, 따라서 인터레그넘의 시기를 건너는 새로운 정치의 주체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할지, 그것은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을 을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사회 스스로 을이라는 이 평범한 말을, 심각하고 무거운 말로, 사회의 심층적인 현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을들의 자기 지칭으로서의 을이라는 표현은 을의 민주주의가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첫째, 을이라는 말은 이 사회에는 동료 시민들에게 지배되거나 모욕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다수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춰보면, 이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민주주의적 사회가 아니든가 아니면 적어도 심각하게 민주주의가 왜곡되거나 훼손된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을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 한국 민주주의의 병리성을 표현해주는 개념이다.


둘째, 갑에 의한 이러한 억압과 주변화, 소외에도 불구하고, 을들은 과소 주체적 존재자들로 실존하고 행위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을들은 동등한 을들이 아니라, 을 아래의 병, 병 아래의 정 등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을은 자신이 갑에게 당하는 것 못지않게 병 위에 군림하며, 병은 또 다른 자신의 을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적 주체화의 근본 과제가 을의 연대의 문제라는 것, 더 나아가 갑과 을 사이의 구조화된 위계 관계를 어떻게 평등한 민주주의적 관계로 전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을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곧 을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을을 새로운 지배자, 새로운 갑으로 구성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을의 민주주의라는 화두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을이 지배자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주인이 아닌(따라서 또 다른 하인이나 노예를 전제하는) 주체, 주권자가 아닌(따라서 또 다른 신민(臣民), 백성을 전제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여부다. 그것을 우리가 여전히 주체subject라고(곧 객체를 전제하는 어떤 것) 부를 수 있는지, 다시 말하면 근원적으로 양가적인 주체라는 이 용어[이 점에 관해서는 Etienne Balibar,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1 참조]를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지도 우리가 질문해봐야 할 것 중 하나다.


셋째, 을은 한국 현대사의 증상을 표현해준다. 곧 한국 현대사에서 민은 (간헐적인 봉기의 순간들을 제외한다면) 정치적 주체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 한국어에는 역시 정치적 주체를 지칭하는 용어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터레그넘의 시대에 처하여, 세월호 이후, 해방 70의 시점을 맞이하여 민주주의 자체에 대하여, 민주주의의 주체에 대하여, 정치 공동체에 대하여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고,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연대의 구성에 대해 실험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장래, 도래할 한국 민주주의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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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가 말 그대로 역대급 특종을 했고 오늘 또 다른 특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현 정권의 정치적 생명은 오늘로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야하느냐(박근혜의 성격상 이렇게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아니면 탄핵을 하느냐(그런데 탄핵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이 꼭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1년여의 기간동안 정치적 좀비로서의 삶이 지속되느냐 여부일 텐데, 


어찌 됐든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 깊이 숙고하고 고민해야 할 시점인 듯합니다. 


작년에 우리가 "인터레그넘의 시기"를 살고 있다고 했는데, 


그 인터레그넘의 시기가 정치적으로 강렬하게 전환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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