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언론에 기분좋은 사진과 함께 흐뭇한 소식이 보도되어 


이 사진을 소개하면서 올해 새해 인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지난 해 보도된 것처럼, 올해부터 국회 '청소 근로자들'이 국회 정식직원으로 고용되면서 


오늘 국회 사무총장과 직원들이 상견례를 하는 모습입니다. 


http://v.media.daum.net/v/20170102115019381



어찌 보면 흔한 신년 시무식 행사 사진일 수도 있는데, 이 사진을 보면 뜻밖의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얼마나 심각한 갑질에 시달려 왔고 또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지 


반증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의 말도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너무 늦게 국회직원으로 모셨다앞으로 잘 모시겠다."



새해는 아무쪼록 "을의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원년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 모두 새해 건강하시고 뜻깊은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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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17-01-0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새해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balmas 2017-01-02 14:42   좋아요 0 | URL
울보님, 오랜만이시네요.^^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따님과 더불어 행복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
 

오랜만에 페이퍼를 씁니다. 


벌써 1년이 다 저물어가는데, 올 연말은 그래도 뜻깊은 사건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고, 


앞으로도 이 사건이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 1월 6일부터 엑스플렉스에서 스피노자 [에티카]를 1년 동안 통독하는 강의를 하게 되어 


여기에 공지해둡니다. 작년 말에 약 2년 8개월 동안 진행된 [에티카] 강의를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끝낸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던 강의여서 다시 장기 강의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한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에티카]를 통독해봤으면 좋겠다는 분들의 요청으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강의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신촌에 있는 엑스플렉스 출판사에서 강의를 진행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안내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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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서양철학사에서도 매우 난해하기로 손꼽히는 책입니다. 기하학적인 증명 방법에 따라 아주 엄밀하면서도 간명하게 논증을 전개하고 있어서 오랫동안 스피노자를 연구해온 스피노자 전문가들조차 통달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운 책이 바로 스피노자의 『에티카』이지요. 따라서 『에티카』을 읽어보겠다고 시작했다가 1부, 또는 조금 더 나은 경우는 2부의 여러 정리들 속에서 방향을 잃고 좌절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에티카』 1부 또는 2부의 정리들은, 도대체 왜 스피노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과연 증명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러한 정리들과 증명들이 보여주는 논점이 무엇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끝없는 의문의 늪 속에 빠뜨리기 일쑤이고요.

이번 강의는 『에티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에티카』는 한 줄 한 줄 같이 읽어볼 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며, 실로 그처럼 읽을 때 이 책이 갖는 매력과 깊이, 또한 그 풍부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1년 정도의 기간 동안 지속될 이번 『에티카』 강독에서는 1부에서 5부까지 각 부마다 8주 정도의 기간을 할애하여 독해할 계획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에티카』를 꽤 밀도 있게 읽어보기에는 적당한 시간이지 않을까요?

KakaoTalk_20160822_150504615 커리큘럼

‣ 이번 강의는『에티카』강독 총 5부 중 1부에 대한 독해입니다.

1강. 스피노자의 생애와 저작, 『에티카』에 대한 소개

2강. 1부 정의들과 공리들

3강. 1부 정리 1 ~ 정리 8

4강. 1부 정리 9 ~ 정리 11

5강. 1부 정리 12 ~ 정리 15

6강. 1부 정리 16 ~ 정리 23

7강. 1부 정리 24 ~ 정리 32

8강. 1부 정리 33 ~ 정리 36 + 1부 「부록」

9강. 1부 「부록」

※ 유의사항
1. 강사가 직접 번역한 스피노자의 『에티카』 번역본을 바탕으로 강의가 진행됩니다.
2. 『에티카』의 외국어 판본을 참고하기를 원하는 수강생들은 에드윈 컬리(Edwin Curley)가 번역한 영역본을 권해드립니다. 번역이 좋고 책값이 싸며, 국내 인터넷 서점(알라딘, 교보문고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Benedict Spinoza, Ethics, trans., Edwin Curley, Penguin Books, 2005).
3. 이번 강의에서는 미국의 스피노자 연구자인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그린비, 2013)가 주요 보조 교재로 사용됩니다. 스티븐 내들러의 이 책은 『에티카』를 독학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충실한 입문서로, 스피노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수강기간 : 2017.1.6 ~ 2017.3.10 (총 9회, 금요일 저녁 7:30~10:00)
※1월 27일은 설날 연휴로 휴강입니다.
수강료에 교재비(15,000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총 5부용)


수강신청 및 기타 안내 사항은 아래 엑스플렉스 출판사 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xplex.org:49408/products/xplex-lecture/spinoza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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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인사 2017-01-02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2016년에도 변함없이 많은 지적 자극 주셔서
뭐랄까, 스스로 좀 더 내적으로 단단해진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에는 더욱 알찬 성과 이루시길 바랍니다.
책을 쓰시는 중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 책을 꼭 서가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건강하시고, 더욱 학문적으로 알찬 성과 거두시길 바랍니다^^

balmas 2017-01-02 13: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새로운 통찰과 각성을 얻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격려의 말씀도 고맙습니다. 책이 마무리되는 대로 서재에도 알리겠습니다.

많은 조언과 질책도 부탁드립니다. :)

김병준 2017-01-0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존경하는 진태원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저도 강의 꼭 듣고 싶은데, 시간 맞추기가 어렵네요. 흑.
일단 혼자서로도 읽겠습니다.^^;;

balmas 2017-01-09 16:07   좋아요 1 | URL
병준 씨,

답장이 늦었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사업에서도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ㅎㅎ 예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찾아오세요. :)

ㅎㅎ 2017-01-07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의를 못들을거 같아서 교재만 구하고 싶은데 그게 가능할까요?
 
복지의 배신
송제숙 지음, 추선영 옮김 / 이후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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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올리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실린 촌평입니다. 이 글에 대한 논평이나 토론 역시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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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2003년 일리노이주립대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해서 2009년 듀크대출판부에서 영어로 출판한 저작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책의 주제는 1997IMF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겪게 된 변화를 ‘()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는 관점 아래 서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복지의 배신이라는 책 제목은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1997IMF외환위기가 한국사회에 대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사상 유례없는 대량 해고와 사회경제적 혼란을 초래한 국가적비극이었다.”(28) 둘째, 그런데 IMF위기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99712월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이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을 누르고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김대중 대통령이 IMF외환위기를 진보적인 정책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IMF 및 국제금융세력의 압력과 조언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의해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김대중정권은 역사상 전례없이 이루어진 대량 해고를 합법화하고, ‘정보사회생산적 복지의 기치 아래 대한민국을 더 유연하고 자본 친화적인 탈개발국가로 이행”(62)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김대중정권을 통해 한국 최초의 보편적 복지국가”(6) 또는 대한민국에 최초로 성립된 복지국가”(256)가 등장했지만, 그것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인 국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이다. “민주화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정이 자본주의 시장의 확장과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을 정당화시킨 과정”(83)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착근시킨 주체에 민주화투쟁의 주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중심에는 과거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사람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자유주의적 사회 통치의 대리인으로 변모했다는 분명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32) 그리고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지식인들의 딜레마는 단지 한국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자유주의적 사회에 적용”(52)되는 것이다.


저자는 1998~2001년까지 약 29개월 동안 진행한 현장조사에 입각하여 이러한 과정을 분석한다. 그는 특히 노숙인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를 구체적인 소재로 삼아 자신의 기본적인 주장을 입증하려고 한다. 노숙인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는 자활 가능한 일시적 노숙자와 장기적 노숙자를 선별하여 전자만을 집중 지원한 것을 문제 삼으며(2), 또한 여성 노숙자의 존재 자체를 집요하게 부인하는 정책 담당자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남성중심적·가부장제적 복지정책의 편견을 지적한다(4). 또한 5장에서는 “‘자기 관리가 가능한주체 및 자기의 기업화가 가능한주체로서의 청년실업자들에 대한 사회적 통치를 분석한다.


이 책이 번역되기 전부터 이 책의 평판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지만, 막상 책을 읽고 상당히 실망감을 느꼈다. 우선 김대중 정권의 개혁 정책이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오히려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주장이다.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점은 이 책의 이러한 거시적인 이론적 주장이 설득력있는 자료나 구체적 논거를 통해 충실히 뒷받침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분석은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인 전환을 입증하기에는 너무 단조롭고 단편적이다. 우선 노숙자와 청년 실업자에 대한 대책이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을 대표할 수 있는 사례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노숙자를 자활 가능한 노숙자와 그렇지 못한 노숙자로 구별했다는 것, 그리고 여성 노숙자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했다는 것은 김대중정권의 복지정책이 상당히 미흡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저자의 분석 중에 좀더 설득력이 있고 구체성을 띠고 있는 것은 청년실업에 관한 논의이다. 저자는 서울시 청년실업대책위원회에 고용된 모니터링 팀 소속 젊은이들의 경험에 입각하여 신지식인닷컴기업’, ‘정보사회에 관한 담론이 청년실업 및 그 대책에 관한 정책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드러내준다.


이 책에서 제일 실망스러운 것은, 역설적이게도 푸꼬(M. Foucault)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꽤 피상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역설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저자 자신이 내가 한국 당시의 사회 통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채택한 주요 프레임의 하나인 푸꼬의 통치성 개념이, 한국사회에서 좀더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18)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이해하는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푸꼬 작업에 입각했다고 자처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과연 무엇인지 의아했다. 과연 푸꼬에 대한 직접적인 독서경험이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저자의 푸꼬에 대한 인식이 매우 허술해보였다.


가령 저자는 푸꼬의 통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책은 푸꼬의 이론에 의거해 ...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국가 행정제도로서의 정부의 개념과 달리, ‘통치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주체 형성을 통해 인구 전체를 관리하는 자유주의적 정치권력의 작동방식을 ‘government’ 또는 ‘governing’으로 명명한다.”(34) 이 인용문에서 놀라운 점은 통치에 관한 정의가 별로 푸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령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주체 형성을 하지 않고 인구 관리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저자의 통치에 대한 정의는 너무 막연하고 허술하다. 푸꼬 자신은 통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구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정치경제학을 주된 지식의 형태로 삼으며, 안전장치를 주된 기술적 도구로 이용하는 지극히 복잡하지만 아주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케 해주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1, 163)


또한 저자는 이 책에서 푸꼬적인 통치 개념에 입각하여 신자유주의를 분석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유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자유주의 민주화 세력이었던 김대중정권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집행자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이든 신자유주의이든 자본주의 통치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푸꼬적인 관점이라기보다는 맑스주의적인 관점이며, 더욱이 꽤나 고전적인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교조적인 맑스주의적 관점이다. 반면 푸꼬는 고전 자유주의가 자연적 소여로서의 교환에 근거를 둔 반면 신자유주의는 인위적 관계로서의 경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결혼과 범죄, 아이 양육 등에 이르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부문을 경제적 관계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에서 모든 개인이 기업가, 자기 자신의 기업가”([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2, 319)로 간주되는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푸꼬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푸꼬와 상당히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점이다.


다음 대목을 보자. “신자유주의 국가가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 권력기구로 작동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 정규직이 줄어들고 노동시장이 더욱 불안정해진 후기 자본주의 정치경제 체제에서는 국가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이 생명권력적 복리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136)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국가는 잉여 인구를 비롯한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는국가이며, 그것의 잉여 인구 관리 방식은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의 형태를 더 확연히 띠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국민의 안전과 복리를 증진하고 생명권력적 복지 증진을 도모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라면, 그것에 반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엉뚱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저자가 푸꼬의 생명권력 개념이나 통치 개념, 또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가령 생명권력=신자유주의적 통치 같은 도식적 규정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면의 한계상 더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 책은 훨씬 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는 외국 독자들에게 얼마간 쓸모 있는 참고 도서가 될 수 있겠지만, 푸코에 대한 인식과 활용에 관해서도,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역사적 경험을 분석하는 데도 한국의 연구자들은 저자에게 배울 만한 바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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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2016-12-25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리 크리스마스 , 선생님!

올 한 해도 좋은 글로 강연으로
제게 많은 생각거리와 고민거리를 던져수셨네요.
지면으로나마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더욱 좋은 성과 거두시길 바랍니다!

balmas 2016-12-28 19: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메리 크리스마스님.

댓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감사! 2016-12-28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철학 강의를 듣는 학생입니다.
선생님이 강의 하신 스피노자 강의 화일을 오늘 복사해왔습니다.
선생님의 노고가 담긴 결과물인데 무료로 쓸려니 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이렇게나마 감사의 인사드리고자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almas 2016-12-28 19: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공부하시는 데 강의 파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박탈 -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지음, 김응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실릴 촌평입니다. 글과 관련하여 논평하거나 토론하고자 하는 분들은 [창작과비평]에 실린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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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최근 국내에서 가장 왕성하게 번역되는 외국 사상가 중 하나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저작([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인간사랑 2003)은 결코 좋게 평가할 수 없는 번역 탓에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대표작으로 꼽히는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이 출간된 후 최근 사오년간 가속이 붙어 올해에만 네권의 책이 번역되었다. 이 중 이번에 서평 대상으로 고른 책은 버틀러가 그리스의 문화이론가인 아테나 아타나시오우(Athena Athanasiou)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국내에 소개된 버틀러 책들 가운데는 가장 최신의 저작(영어판은 2013년 출간)이고 정치적인 것에서의 수행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처음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는 버틀러의 사상에 관한 대중적인 해설용 대담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주요 사상가들과의 대담집이 보통 그렇듯이, 질문자가 사상가의 사상에 관하여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사상가가 그의 저작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점들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는 방식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역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타나시오우라는 생소한 학자는 이 책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 중 하나였으며, 이 책의 화두를 이끄는 사람이 버틀러가 아니라 바로 그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능동적인 대화 주체였다. 그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박탈이라는 개념을 대담의 화두로 제안하면서, 이 개념에 입각하여 어떻게 페미니즘, 신자유주의, 인종주의, 극단적 폭력 등과 같은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을지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버틀러의 저작, 특히 2000년대 이후의 윤리정치적인 저술에 기반을 두면서 동시에 그 저술에 담긴 이론적 개념들을 신자유주의탈식민주의성소수자정치적 저항 등과 같은 쟁점들에 관하여 폭넓고 자유롭게 변주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고 독창적인 논의들은 특히 포스트 담론에 입각한 정치철학 및 윤리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자극을 준다.


이 글에서는 총 21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대담집을 이끌어가는 몇 가지 주요 개념, 곧 박탈(dispossession), 관계성, 취약성, 감응성(affectivity), 수행성 등에 주목하고 싶다.


옮긴이(김응산)가 박탈이라고 번역한 ‘dispossession’이라는 단어는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저자들이 이 단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닌 양가적인 의미 때문이다. 첫째, ‘dispossession’은 말 그대로 박탈을 가리킨다. 곧 이 단어는 우리가 장소와 생계, 주거지, 음식, 보호 등을 빼앗길 수 있는 존재라는 점, 따라서 이를 우리에게서 박탈할 권리와 힘을 지닌 권력에게 우리가 종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둘째, 하지만 이 단어는 또한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원초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공통으로 전제된 소유적 개인주의의 원리와는 달리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은 우리 각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며,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쾌락과 고통을 어떤 지속된 사회계 혹은 지속적인 환경에 빚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존재(이상 23)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타자와의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실은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자아 내지 개인 주체의 원초적인 타자 의존성이라는 의미로 인해 ‘dispossession’이아주 문제적인 개념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만약 이 개념의 뜻이 첫번째 측면으로 국한된다면, 비판적인 이론과 정치의 목표는 꽤 단순해진다. 부당하게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각각의 개인 및 집단 들에게 그들에게 고유하게 속하는 소유와 권리를 회복시켜주거나 부여해줌으로써, 개인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의 질서를 확립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 내지 개인들이 원초적인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그 본질 및 정체성에서, 그리고 삶의 과정 자체에서 타자에 의존적인 존재들이라면, 자유주의를 넘어선 이론적 분석과 실천적 해법이 요구된다.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한 난상토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가적인 측면을 드러내기에 과연 박탈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박탈이라는 번역어는 오히려 첫번째 측면에 너무 경도된 것이 아닌가? 첫번째 측면에서는 부당한 법적정치적물리적인 탈취, 몰수라는 뜻이 핵심인 반면, 두번째 측면에서는 자율적인 자아 내지 개인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자기소유(self-possession 내지 self-ownership)가 타자와의 원초적 관계에 의해 사후에 성립되는 것이며, 더욱이 이러한 원초적 관계를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두번째 측면에서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전제인 소유 및 자기소유의 논리적 불가능성과 윤리적 폭력성을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사실 탈소유로 옮기는 편이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자의 의미가 약화되기 때문에, ‘탈소유라는 번역어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따라서 ‘dispossessi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가 무엇인지는 열려 있는 문제이며, 말 그대로 개념적 번역과 이론적 ()창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dispossession’의 문제는 감응성’, ‘affectivity’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원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관계적인 존재들이라면, 그러한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affectivity’ 및 ‘affect’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용어들을 일관되게 감응성감응이라는 용어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정동성, 정동, 심지어 정동하다’(능동태인 affect의 번역이다), ‘정동되다’(수동태인 affected의 번역이다) 같은 괴상한 신조어들을 남용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번역보다는 훨씬 사려 깊은 태도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감응보다는 정서라는 개념에 기반을 둔 번역이 이 책의 논의를 이해시키는 데도 더 낫고, 미국 문화이론계의 논의를 우리 식으로 전유하고 변용하는 데도 더 낫다.


우리가 어떤 감정이나 정서를 느낄 때 여기에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타자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분노하거나 즐거워하며, 타자의 기쁨을 시샘하거나 부러워한다. 더욱이 스피노자(B. Spinoza)의 정서 모방(affectuum imitatio)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항상 이미 타자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내지 정서는 항상 신체적인 작용을 수반한다. 우리가 기쁨을 느낄 때 신체적인 역량 내지 에너지도 증가하며, 우리가 고통이나 자괴감을 겪을 때 우리의 신체도 무기력해진다. 우리의 분노는 동시에 강렬한 신체적인 반응을 촉발하며, 흐뭇한 마음은 신체적인 이완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affect affectivity가 뜻하는 바이다.


그런데 다음 번역문을 보자. “이와 같은 반응의 성향은 우리를 경첩에서 어긋난(out of joint)” 상태로, 그리고 우리 스스로로부터 이탈하도록, 곧 자기 정신줄을 놓도록(beside ourselves)” 만드는 다양한 감응, 곧 분노와 절망, 욕망, 격분, 희망 등의 감정 속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123) 내가 볼 때 여기에서 감응대신 정서라는 번역어를 쓴다면, 논의의 내용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논의의 요점은 분노, 절망, 욕망, 격분 같은 정서들이 강렬한 신체적 반응을 촉발하면서 우리의 평정한 상태를 깨뜨리고 우리를 평상시와 다른 모습으로 만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out of joint’‘beside ourselves’ 같은 표현이 함축하는 바이다. “공감과 친절함, 연대는 물론이고 긴장, 괴로움 혹은 갈등과 같은 강렬하고도 정치적인 감응적 요소들을 통해(286) 같은 대목도 정서적 요소들이라는 번역이 이해를 더 쉽게 해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affectaffectivity가 정서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체적 변화의 차원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정서적 변용()’이나 그냥 변용()’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83~85면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심급이라는 용어는 원문 “instance”의 번역인데, 이 경우에도 사례내지 경우로 옮기는 편이 낫다. 전체적으로 꽤 공을 들인 꼼꼼한 번역인데, 이처럼 몇 가지 용어 선택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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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설솔술 2016-11-2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엇습니다.^^ 번역자는 유민석이 아닌 김응산씨네요.

balmas 2016-11-27 16: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살설솔술님.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사실 괄호 부분은 편집부에서 교정 과정 중에 추가한 것인데, 제가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나중에 정정 안내를 하도록 편집부에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질문 있어요 2017-01-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강추하신 <박탈>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용어가 익숙치 않다보니 읽어도 명확히 이해를 못하네요.
그래서 용어 질문 좀 드리고 싶은데, 괜챦으시죠?
‘현전의 형이상학‘과 ‘자기 현전‘이 계속 나오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면 될까요?

새해부터 귀챦게 해드려, 지송합니다^^

balmas 2017-01-02 19: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질문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현전>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사실 <현존>이라는 번역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용어들은 어쨌든

모두 하이데거 철학에서 유래한 것들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 알라딘 서재의 다음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1583071
 

이번 겨울호 [황해문화]에 게재될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이 글을 처음 구상한 것이 작년 초였고, 그 사이에 이곳저곳에서


여러 차례 발표하고 논평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의 1년 6개월만에 완성된 글을 지면에 싣는 셈입니다. 


이 글에 관해 논평이나 토론을 하실 분들은 [황해문화] 지면에 게재된 판본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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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치학, 불행의 현상학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오늘날 이 사회에서 누가 나를 필요로 하겠는가?”

리처드 세네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I. 머리말: 행복 담론, 불행한 사회

 

이 글에서 내가 제기해보려는 질문은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필자의 구상에 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황해문화󰡕 89, 2015년 겨울호 참조. 또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웹진 민연󰡕에서 20155월 이후 계속 진행 중인 을의 민주주의에 관한 연속 기고도 참조. http://rikszine.korea.ac.kr/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왜 행복의 정치학에는 내가 불행의 현상학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 필요한가, 불행의 현상학을 전제하지 않는 행복의 정치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00년대 이래 우리나라에서는 행복, 웰빙, 힐링, 긍정심리학 등과 같은 용어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나 조건을 개선하고 치유한다는 의미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웰빙 식품, 웰빙 가구, 힐링 토크, 힐링 요법 같은 표현들에서 알 수 있듯이 상품 판매를 위한 광고 효과로 활용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널리 판매되고 있다. 실로 오늘날 행복은 계산 가능하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향상시킬 수 있는 실체로 [윌리엄 데이비스, 󰡔행복산업󰡕, 황성원 옮김, 동녘, 2015, 9.]간주되고 있으며, 생명 자본과 정보통신 자본에 입각해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스트레스와 비참함, 질병을 물리치고 그 자리를 안락함과 행복, 건강으로 대체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주요 기업에서는 최고 행복 경영자”(chief happiness officer)를 채용하고 전문적인 행복 컨설팅이 새로운 사업거리로 등장하고 있으며, 심리학, 신경생리학, 뇌과학, 의학, 경제학의 학제 연구 또는 초학제 연구에 입각한 행복경제학이 최신 융합 학문 분야로 각광을 받고 있다.[행복 경제학에 대한 소개로는 리처드 레이어드, 󰡔행복의 함정󰡕, 정은아 옮김, 북하이브, 2011 및 이정전, 󰡔우리는 행복한가󰡕, 한길사, 2008 참조.]


또한 박근혜 정부 역시 2012년 대선 캠페인 단계에서부터 국민 행복을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지향으로 내세운 바 있다. 박근혜 캠프의 명칭 자체가 국민행복추진위원회였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를 비롯한 세계 각 국 정부가 행복을 정책의 주요 의제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유럽 및 북미 주요 국가들의 행복 정책의 현황과 방향에 대해서는 데릭 보크, 󰡔행복국가를 정치하라󰡕, 추홍희 옮김, 지안, 2011 참조.] 사실 매년 국가별 행복도에 관한 세계적인 기관들의 발표는 국제 뉴스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가령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매년 국가행복지수(Better Life Index)를 발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5OECD 회원국 36개국 가운데 삶의 만족도’(life satisfaction)에서는 29위로, ‘젠더 불평등에서는 36위로, 사회적 불평등에서는 29개 국 중 25위로 나타나, 전 분야에 걸쳐 최하위권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OECD 통계 결과 및 그에 대한 평가로는, http://www.oecdbetterlifeindex.org/topics/life-satisfaction/ 참조.] 또한 유엔이 발표한 “2015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158개국 중 47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지난 2013년의 41위보다 6위 하락해 2013년 조사에서는 일본을 앞섰으나 2015년 행복순위는 5.987점으로 46위를 차지한 일본에 뒤처진 결과라고 한다.[󰡔연합뉴스󰡕 2015424일 기사.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4/24/0200000000AKR20150424061051009.HTML]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이처럼 기업과 각종 언론 매체, 일상적 담론 및 국가 정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이 행복과 웰빙, 힐링 담론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이 과연 더 행복해졌고 또 행복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각종 통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OECD 국가 중에서 최장 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비정규직 비율 역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국민이 매일 장기간의 노동을 감수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빈부 격차는 계속 증대하고 있고, OECD 회원국 중 최고의 자살율을 보이고 있으며,[2015년까지 한국은 11년 연속 OECD 자살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OECD가 발표한 건강통계 2015에 따르면, 2012년 기준 한국은 29.1%(10만명 당 29.1)의 자살율을 기록해서, OECD 평균치인 12.0%의 두 배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30/0200000000AKR20150830038000033.HTML]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헬조선’, ‘망한민국’, ‘흙수저같이, 한국에 대한 혐오담론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이러한 혐오담론에 대한 다면적인 고찰은 󰡔황해문화󰡕 2016년 봄호에 수록된 특집을 참조.] 이는 최근 10여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널리 확산된, 웰빙, 힐링, 행복에 관한 담론들이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바로 그런 만큼 그 어느 때보다 더 행복에 관한 담론이 필요하고, 국민의 행복을 증대시킬 수 있는 정책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행복에 관한 담론이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 상황의 필요성만으로 행복에 관한 담론의 정당성이 입증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 곧 신자유주의적인 통치성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이 어느 때보다 더 심화되고,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이 증대하는 사회에서 행복에 관한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논의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관한 수많은 담론과 현실적인 상황과의 괴리가 생겨나는 이유에 관해 따져볼 필요가 있다.

 

II. 불행한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포스트모던 행복감의 성격

 

얼마 전 국내에 소개된 일본 사회학자의 저서와 최근 수행된 한국 심리학자들의 작업이 이를 살펴보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 두 개의 연구는 각각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 젊은이들의 행복관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화두에 얼마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내가 보기에는 신자유주의적인 또는 포스트모던 행복감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좀 더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라는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1985년생)의 책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연숙 옮김, 민음사, 2014. 일본어 원서는 2011년에 출간되었다.]저자는 󰡔뉴욕타임스󰡕 도쿄 지부장이 2010년 저자에게 던진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간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 도쿄 지부장이 불행한 상황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러 가지 객관적 지표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오랜 기간 지속되는 장기 불황,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사회보장비용의 증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최악의 재정 적자, 경직된 기업 조직으로 인한 취업난과 불안정 노동(프리터, 임시직)의 증가 등이 2010년대 초반 일본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특징짓는 몇 가지 핵심적인 지표였다. 단적으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놀라운 경제 성장 및 종신고용을 핵심으로 하는 일본 특유의 기업 문화, 탄탄한 사회복지 정책 덕분에 젊은이들이 취직 걱정 없이 안정된 인생을 설계하는 게 가능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 이후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20여년 넘게 장기적인 불황이 지속된 데다가 출산율 저하 및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젊은이들의 객관적인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1980년만 해도 7.5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했다. 그런데 2000년에는 4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2008년에는 3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게 됐다. 그럼에도 현역 세대 대비 고령자의 비율은 쉴 새 없이 상승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2023년에는 2명의 현역 세대가 1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게 될 것이다.[후루이치 노리토시, 같은 책, 276.]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젊은이들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 저자는 몇 가지 지표를 제시한다. 일본 내각부가 2010년에 실시한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70.5%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만족도는 30대는 65.2%였고, 40대는 58.3%, 50대는 53.3%로 나타난 다른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또한 이것은 과거의 20대가 느낀 행복감에 비해서도 더 높은 수치다. 1960년대 후반 20대의 만족도는 60% 정도였고, 1970년대는 50%였던 데 비해, 경제 불황에 접어든 1990년대 후반부터는 계속 70%의 만족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27쪽]


그렇다면 일본 젊은이들은 이런 악화된 객관적 상황에서 왜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저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시한다.

 

일본에는 매일매일 생활을 다채롭게 해 주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이 갖춰져 있다. 그다지 돈이 많지 않아도 우리는 자기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예컨대 유니클로(UNIQLO)나 자라(ZARA)에서 기본 패션 아이템을 구입해서 입고, 에이치앤드엠(H&M)에서는 유행 아이템을 사서 포인트를 준 다음, 맥도날드에서 런치세트와 커피로 식사하면서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세 시간 정도 나눈다. 집에서는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를 이용해 친구와 채팅을 즐기고 종종 화상 통화도 한다. 가구는 니토리나 이케아에서 구매한다. 밤에는 친구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며 반주를 즐긴다. 그리 돈을 들이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다.[같은 책, 26-27쪽]

 

저자는 이처럼 객관적으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나름대로의 즐거움과 만족감을 추구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를 컨서머토리’(consummatory)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어울려 여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생활 방식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미리 더 행복한 미래를 상정해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주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같은 책, 136쪽]


저자에 따르면, 일본의 젊은이들이 자기 충족적인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행복의 조건에는 “‘경제적인 문제인정의 문제’”[같은 책, 290. 번역본에는 승인의 문제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정의 문제로 바꾸었다.] 두 가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6장의 한 절의 제목을 빈곤은 미래의 문제, 인정은 현재의 문제로 붙이고 있다. 이러한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현실에서 직접 대면하고 있는 문제는 빈곤의 문제보다는 인정의 문제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대다수 젊은이에게 미래의 문제인 경제적인 빈곤과 달리, 인정과 관련된 문제는 비교적 쉽게 알아볼 수 있는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빈곤보다 현재의 외로움이 더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295~96쪽]


빈곤이 미래의 문제라는 것은, 대부분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빈곤은 현재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현재 좋은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선술집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30만엔에서 40만엔 정도의 월수입을 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18세부터 34세의 미혼인 젊은이들 가운데 남성의 약 70%, 여성의 약 80%가 부모와 함께 살고있기 때문에, 빈곤은 직접적인 체감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들에게 빈곤은 “20년 내지 30년 후부터는 부모 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문제[같은 책, 293쪽]에 직면하게 될 때 구체적으로 닥칠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빈곤은 미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현재 직면한 인정의 문제는 연인과의 교제 문제이며, 좀 더 넓게 본다면 친교의 문제인데, SNS가 일반화된 현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손쉽게 인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트위터에 재미있는 글이나 사진 또는 동영상을 올릴 경우 곧바로 리트윗되고 팔로워 수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인정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실리실익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가 증가하면서,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것들이 분산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보장해주고, 이러한 상호 인정 덕분에 젊은이들은 굳이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경제적인 불만, 막연한 미래가 주는 불안도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같은 책, 300~01쪽]


저자는 자신이 인터뷰한 일본 젊은이들의 이러한 행복관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다. 그는 오히려 있는 것을 그대로 소개한다는 태도, 곧 이것이 실제 일본 젊은이들이 행복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라는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자신도 역시 이 부류에 속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컨서머토리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한편으로 본다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즐길 거리와 행복의 요소들을 찾아보려는 적극적인 태도로 간주될 수 있다. 영국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식으로 그날그날의 즐길 거리에 탐닉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개인들의 행복 추구 경향을 점증하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 그들의 근시안적인 사고, 장기적인 인생 계획에 대한 무관심, 그들의 진부하고 이기적인 욕망, 삶을 일회성 행동으로 잘게 쪼개어 각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는 아무 관심도 갖지 않고 최후의 한 방울까지 짜내어 즐기려는”[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홍지수 옮김, 봄아필, 2013, 68.] 태도로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미래를 안식처나 약속의 땅이 아니라 위협으로 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보이는 합리적인 반응[같은 책, 69쪽. 강조는 바우만]이라고 반박한다. 복지국가에서 누리던 안정된 삶의 질서가 해체되고 안보에 대한 불안이 조장되고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신자유주의적 체제 아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기적인 미래 설계에 입각한 생활 방식이 불가능해진 만큼, 그들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나름대로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일본 젊은이들의 태도는 약 40여 년 전에 미국의 문화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쉬가 지적한 바 있는 탈정치적 태도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중요한 측면에서도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신적인 자기계발이 중요하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된다. 감정을 잘 표현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발레나 밸리댄스 강좌를 듣고, 동양의 지혜에 심취하고, 조깅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고, ‘쾌락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 자체로는 해로울 것이 없지만, 이러한 행동들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에서 이탈하게 만든다.[Christopher Lasch, Culture of Narcissism, Warner Books, 1979, pp. 29~30.]

 

이러한 태도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더욱 촉진하게 되며,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점점 더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든다. 현재의 삶의 질서와 다른 대안적 질서를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것을 사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지 더 막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가능한 사회 변혁이나 개혁 대신 개인들은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자기만의 치료법에 몰두하고, 그것을 통해 바깥 세상에서 얻기 힘든 자기만의 행복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자기계발’, ‘건강에 좋은 음식’, ‘동양의 지혜’, ‘밸리댄스 강좌’, ‘조깅’,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 ‘감정을 다스리기같이 래쉬가 열거하는 이 모든 것이야말로 최근 웰빙, 힐링, 긍정심리학에서 행복을 얻는 비법으로 소개되는 그것들이 아닌가?


다른 한편 최근 발표된 부산 지역 심리학자들의 공동 연구는 또 다른 측면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담고 있다.[유나영 외 5인 공저, 한국인의 행복 개념 탐색 연구-한국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국민족문화󰡕 55(20155).] 이 연구는 부산 지역 대학생 238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수행된 것으로, 미국인과 한국인의 행복 개념의 차이를 비교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조사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정서적 안녕감과 심리적 안녕감, 사회적 안녕감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바탕으로 행복감을 측정했는데,[행복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세 가지 측면으로 구별한 것은 1984년 미국의 심리학자 에드 디너(Ed Diener)“Subjective Well-Being”, Psychological Bulletin 95, 1984에서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는 이름 아래 정서적 측면에서 행복에 대한 조작적 개념화를 시도한 이래, C. D. Ryff의 연구(“Happiness is Everything, or is it? Explorations on the Meaning of Psychological Well-Being”,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57, 1989) C. L. M. Keyes의 연구(“Social Well-Being”, Social Psychology Quarterly, 61, 1998)를 거쳐 심리학계에서 표준화되고 있는 행복 개념에 입각한 것이다. 심리학적 행복 개념의 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권석만, 󰡔긍정심리학: 행복의 과학적 탐구󰡕, 학지사, 2008 참조.] 우선 정서적 요인에서는 두 나라 사람들 간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심리적 안녕감에서는 두 가지 차이점이 나타났다. 하나는 한국인들의 심리적 안녕감을 구성하는 하위 요인들이 미국인들에게 비해 수적으로 적다는 것(자기계발/긍정적 인생관)이며, 두 번째는 타인과의 긍정적 관계를 심리적 안녕감의 하위 요인 중 하나로 간주하는 미국인들에 비해 한국인들은 이것을 심리적 안녕감과 독립적인 요인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가족을 불특정 타인의 범주로 생각하기보다는 타인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된 개념으로 생각하는”[유나영 외, 앞의 글, 213.]데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은 이타심을 행복의 요인으로 더욱 강조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한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곧 미국인들은 개인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높을수록 행복감을 느끼는 반면, 한국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사회가 인정해줄수록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가문, 학벌, 직장 등)을 사회가 인정해줄수록, 그리고 사회 정치 문화적 환경이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일수록[같은 글, 218쪽] 행복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미국의 조사에서는 독립적인 척도 중 하나로 간주되지 않았던 사회경제적 요인들(경제력, 종교, 외모, 건강, 여가)이 한국인에게는 중요한 행복의 구성요인으로 인식된다는 것”[같은 글, 213쪽]이다. 이 연구의 연구자들은, 앞서 이루어진 다른 연구들과 관련하여,[특히 이지선김민영서은국, 한국인의 행복과 복: 유사점과 차이점, 󰡔한국심리학회지: 사회 및 성격󰡕 18, 한국 사회 및 성격심리학회, 2004 참조.] 이러한 차이점은 한국인들의 행복 개념에는 복()이라는 개념이 본질적인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특히 연구자들에 따르면 설문조사 결과 17%의 참가자들이 행복한 사람보다는 복 받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복이란, 개인에게 외재적으로 주어진 조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유한 집안, 잘생긴 외모, 탁월한 선천적 능력 등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적어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행복은 주체적인 노력이나 태도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조건이나 운에 달려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또 다른 통계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2014년 경향신문이 한국개발연구원(KDI)󰡔노동시장 신호와 선별에 기반한 입시체제의 분석과 평가󰡕(2013.5. 김영철·김희삼 연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성공 및 출세 요인으로 학벌과 연줄을 꼽은 학부모의 비율이 201048.1%에 이르렀다. 이는 200633.8%, 200839.5%에서 급증한 결과로,[“‘학벌사회수치로 입증됐다”, 󰡔경향신문󰡕 201413.] 점점 더 많은 학부모가 한국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나 기회 균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결과다. 또한 통계청이 13세 이상 39백명을 대상으로 한 <2015년 사회조사결과>에 따르면, “평생 노력을 하면 본인 세대에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21.8%만이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2009년 처음 조사가 이루어질 당시 35.7%였던 답변 비율에 비해 15% 가량이 하락한 수치이다.[국민 10명 중 2명만 계층상승 가능’”, 󰡔한겨레󰡕 20151126.]


몇 년 전에 출간된 행복의 역사서에 따르면,[대린 맥마흔, 󰡔행복의 역사󰡕(2006), 윤인숙 옮김, 살림, 2008 참조. 또한 좀더 간략하지만 역시 흥미롭고 유익한 미셸 포쉐, 󰡔행복의 역사󰡕(2007), 조재룡 옮김, 열린터, 2007도 참조.]오늘날 논의되는 행복은 근대 이후에, 17~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근대 이전의 행복이 평범한 사람들을 뛰어넘는 재능이나 운, 미덕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인간성의 완성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데 비해, 근대 이후 행복은 소수의 특권적이거나 훌륭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은 실로 인간이 불행한 곳에서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대린 맥마흔, 󰡔행복의 역사󰡕, 31~32.]곧 그들은 행복을 누려야 마땅한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는 것은 정부의 형태나 법 제도, 신념, 사회적 관습 및 삶의 조건 등의 문제점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경우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 사람들의 행복추구권이 자명한 진실로 간주된 것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부유한 집안, 잘생긴 외모, 탁월한 선천적 능력 등과 같이 외재적으로 주어지는 운으로서의 복을 행복의 핵심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행복을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볼 수 있다.

 

III. 소실점으로서의 행복

 

회고해본다면 오늘날 때로는 과학의 이름으로, 때로는 국가 정책의 이름으로, 또 때로는 대중적 담론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행복론은 크게 세 가지 역사적 계기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스털린 역설이라고 알려진 경제학적 발견이 존재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1974년 발표한 한 논문에서 그 당시까지 주류경제학에서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어 온 경제성장=행복의 증대라는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Richard Esterlin, “Does Economic Growth Improve the Human Lot? Some Empirical Evidence”, in Nations and Households in Economic Growth: Essays in Honor of Moses Abramovitz, eds., P. David and M. Reder, Academic Press, 1974.]이 글에서 이스털린은 1946~1970년 사이에 19개국을 대상으로 진행된 행복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국가 내에서는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사이에 소득과 행복 사이에 정()의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국가간 비교에서는 소득 수준이 높은 국가의 국민이 소득 수준이 낮은 국가의 국민보다 평균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시계열적인 분석을 해보면 한 국가 내에서도 소득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 이상 소득이 오른다고 해도 반드시 행복감이 더 상승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이스털린 자신은 이스털린 역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국가 내부 및 국가들 사이에서 어떤 일정한 시간적 지점에서 행복은 소득과 함께 직접 변화하지만, 시간이 경과되면 행복은 국가의 소득이 증대해도 증가하지 않는다.” Richard Esterlin et al., “The happiness-income paradox revisited,”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7(52), 2010, p. 22463.]이스털린은 그 후 비판가들과의 여러 논쟁을 거쳐[이스털린 역설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소개는 문진영, 이스털린 역설에 대한 연구: 만족점의 존재 여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복지학󰡕, vol. 64, no. 1, 2012 및 김균, 이스털린 역설과 관계재, 󰡔사회경제평론󰡕 42, 2013 참조. 또한 장덕진,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은가, 󰡔황해문화󰡕 2016년 여름호 참조.] 2010년에는 더 확장된 연구 대상, 곧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동유럽 국가들 및 발전도상국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에서 이 경우에도 역시 이스털린 역설이 존재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Richard Esterlin et al., “The happiness-income paradox revisited,” Proceeding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p. cit..]이스털린의 연구는 그 이후 경제성장과 국가의 행복도의 상관관계에 관한 국내적 및 국제적 연구에서, 또한 이른바 행복경제학연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그 다음 긍정심리학의 부상을 들 수 있다. 긍정심리학의 부상은 크게 두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미국 일리노이대 심리학과 교수인 에드 디너Ed Diener1984년 발표한 논문에서 행복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토대로 행복에 대한 조작적 정의를 제시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이 논문에서 그는 주로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행복에 대해 과학적인 정의를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그에 따르면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는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행복은 주관적인 것으로 개인의 경험에 놓인 것[Ed Diener, “Subjective Well-Being”, op. cit., p. 543.]이다. 비록 안락함, 건강, 덕 또는 부유함 같은 것이 주관적 행복[그는 자신이 정의하는 과학적 의미의 행복을 SWB, Subjective Well-Being의 약자로 표현한다.]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 안녕감(SWB)의 내재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은 아니다.”[Ibid.] 둘째, 주관적 안녕감은 부정적 척도의 부재만이 아니라 긍정적 척도를 포함하고 있다. 셋째, 주관적 안녕감의 측정은 한 개인의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포괄적 평가[bid., p. 544]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주관적 안녕으로서의 행복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는 긍정적 정서와 부정적 정서로 이루어진 정서적 요인으로, 행복감, 즐거움, 만족감, 자존감, 고양감, 환희감 등과 같은 긍정적 정서를 자주 경험하면서 슬픔, 우울함, 불안, 분노 등을 덜 경험할수록 주관적 안녕감의 수준이 높다고 한다. 두 번째는 인지적 요인으로 주로 삶의 만족도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설정한 기준과 비교하여 삶의 상태를 평가하는 의식적이고 인지적인 판단을 가리킨다. 곧 개인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비춰 전체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이후 정서적 요인과 인지적 요인을 평가하는 척도들이 개발되고, 리프Ryff나 키이스Keyes 등에 의해 새로 심리적 안녕감과 사회적 안녕감이라는 요인이 추가되면서 오늘날 표준화된 심리학적 행복 개념이 구성되었다.


하지만 긍정심리학에는 이와 결합되어 있지만, 긍정심리학의 약간 다른 흐름도 존재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이 미국 심리학회 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처음 긍정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제안할 때(1998) 목표로 내세운 것은, 그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심리적 병리나 질병 중심의 심리학에서 벗어나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의 잠재력이나 자아의 목표 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심리학을 구성해보자는 것이었다.[좀 더 자세한 논의는 마틴 셀리그만, 󰡔긍정심리학󰡕, 김인자 옮김, 도서출판 물푸레, 2006 2장 및 권석만, 󰡔긍정심리학󰡕, 앞의 책 참조.]에드 디너와 같이 주관적 안녕을 중시하는 관점이 쾌락주의적-공리주의적 입장에 가깝다면, 이 후자의 입장은 자기실현적-목적론적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곧 이들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잠재적 능력과 긍정적 성품, 덕성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간주한다. 가령 셀리그만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행복 공식을 제안한다. “H=S+C+V” 여기에서 H영속적인 행복의 수준을 가리키고 S이미 설정된 행복의 범위’, C환경’, 그리고 V덕목을 가리킨다.[마틴 셀리그만, 󰡔긍정심리학󰡕, 85쪽 이하.]


세 번째 역사적 계기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스티글리츠 보고서다. 지난 20082월 세계경제위기가 일어나기 직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의 제안으로 형성된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의 계측을 위한 위원회’(조지프 스티글리츠를 위원장으로 하는)가 제출한 스티글리츠 보고서에서 경제 성장과 국가 발전을 측정하기 위한 표준적인 지표로서 GDP 대신 포괄적인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측정 방식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 이래,[Joseph Stiglitz et al., Mismeasuring Our Lives: Why GDP doesn't add up, The New Press, 2010; 아마티아 센, 조지프 스티글리츠, 장 폴 피투시, 󰡔GDP는 틀렸다: ‘국민총행복을 높이는 새로운 지수를 찾아서󰡕, 박형준 옮김, 동녘, 2011 참조.]세계 각 국 정부는 행복의 증대를 국가 정책의 주요 의제로 설정했으며, OECD와 유엔을 비롯한 국제 기구에서도 각 나라별 행복도를 측정하여 매년 그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아울러 이 보고서는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을 비롯한 초학제적인 행복학 연구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주었으며, 행복에 관한 좀 더 폭넓은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가령 2011년 이후 OECD가 각 국가의 삶의 질을 측정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지표의 개념적 요소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OECD(2011), “How's Life" : Measuring Well-Being”. 여기에서는 우성대, 행복의 정치경제학을 위한 연구: 웰빙과 삶의 질, 그리고 행복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73, 2014, 298쪽에서 재인용.]

 

웰빙

 

삶의 질 물질적 조건

 

건강 상태 소득과 부

-가정 양립

교육과 기술 일자리와 임금

사회적 관계

시민적 참여와 거버넌스 주거

환경의 질

개인적 안전 GDP

주관적 웰빙

 

이러한 개념적 틀은 긍정심리학에서 제안하는 주관적 웰빙, 곧 주관적 안녕감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질적 자원 및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등을 웰빙의 포괄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GDP는 전체적인 웰빙 중에서 물질적 조건에 속하며, 그것도 그 일부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행복에 관한 새로운 학문적 연구에 입각하여 각 나라별 행복 지수를 측정하려는 노력, 그리고 이러한 지수에 따라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긍정적 측면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개발의 노력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이러한 노력이 사회 복지를 확충하고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고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의지에 입각해 있으며, 더 나아가 성장 중심의 발전주의 경제 대신 국민의 행복을 증대시킬 수 있는 대안적 경제 질서를 추구하는 만큼, 더욱이 행복 지수를 측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끊임없이 새로운 지표와 척도를 개발하여 기존 지수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입각하고 있는 만큼, 이것 자체를 거부하거나 단순한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여기에 관해서는 데릭 보크, 󰡔행복국가를 정치하라󰡕, 앞의 책 참조. 국내의 논의로는 장덕진, 앞의 글 이외에 이재열, 사회의 질, 경쟁 그리고 행복, 󰡔아시아리뷰󰡕 42, 2015 등 참조.]


하지만 이러한 지표 자체가 물신화되어 마치 그것이 행복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척도인 것처럼 간주되고, 다른 여러 가지 통계 수치들과 마찬가지로 정책과 사회적 여론을 지배하는 근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곧 이 다양한 부류의 행복론들이 은폐하거나 전치(轉置)하는 것, 따라서 이것들이 지닌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은폐 내지 전치야말로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기능이라면)은 마치 행복을 인식하고 평가하기 위한 단일하고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척도에 입각한 행복론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행복의 정치를 부정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는 오늘날(곧 이른바 탈근대 사회에서) 행복의 정치의 조건은 불행의 현상학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구조적 문제점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개인의 해결 과제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 최근의 행복론, 행복 정책, 행복 자본주의가 지닌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바로 체제 모순에 대한 전기적(傳記的) 해법[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267. 강조는 울리히 벡.]이 되어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사회 체계가 만들어낸 문제점과 모순들에 대해 개인들 스스로 해법을 찾아내도록 강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소비주의라고 불리는 현재 자본주의의 한 가지 특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행복을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나 유덕함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간주하는 근대적인 행복 개념의 역설 중 하나는 행복이 이처럼 보편적인 권리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불행감이 가중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설은 특히 바우만이 지적하듯이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기인한다. “소비자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이란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들은 공개적으로 전시되는, 만족과 생생한 경험의 기회들 가운데서 선택하느라 바쁘다. ‘행복한 삶은 많은 기회를 거의 또는 전혀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으로 정의된다.”[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이수영 옮김, 천지인, 2010, 73.따라서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행복의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및 능력)로 측정되며, 가능한 최대 다수의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들이 원칙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진보 저널리스트인 제레미 시브룩이 지적한 것처럼 가난한 이들은 부자들과 다른 문화 속에 살지 않는다.”[바우만, 󰡔새로운 빈곤󰡕, 78쪽에서 인용.]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의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하고, 자기 주변 사람들의 생활 수준에 맞춰 살아가려고 해도, 매 순간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과 욕망의 대상들이 소개되고, 이것들을 아낌없이 향유하는 능력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달된다. 그리고 이는 능력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결핍감을 끊임없이 조장하게 된다. 바우만이 적절하게 명명하듯이 소비사회의 행복은 남보다 한 발 앞설 것(one-upmanship)을 요구한다.” Zygmunt Bauman, “Happiness in a society of individuals”, Soundings, Spring 2008, vol. 38, p. 26.] 따라서 이는 행복이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권리 개념이 되었지만, 실제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과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 더 나아가 이러한 능력이나 조건이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점에서 유래하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사회는 갑과 을로 나뉜 사회, 20 : 80, 또는 10 : 90, 심지어 1 : 99로 분할된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며, 근대 이후 행복의 궁극적인 판단자는 행복의 주체인 각각의 개인(또는 인간을 넘어서는 각각의 개체)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행복에 대한 단일한 포괄적인 정의를 제시하기는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만약 행복을 포괄적으로 정의하려고 하면,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는 끊임없이 확장될 수밖에 없다. 에드 디너는 처음에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정의하면서 여기에서 정서적 요인과 인지적 요인을 제안한 바 있지만, 그 뒤 이러한 요인에 사회적 요인이 추가되었으며, 경제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에서 행복학이 새로운 탐구 주제가 되면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는 점점 더 확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행복에 대한 점점 확장되는 정의가 제시되면 우리는 각각의 행복의 주체들이 누릴 수 있고 또 마땅히 누려야 하는 행복을 좀 더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뒤에서 이야기할 것처럼, 오늘날 행복의 주체가 점점 더 확장되고 더 나아가 그 주체들이 행복의 척도라고 간주하는 것이 점점 더 다양화되고 이질화되어가고 있는 만큼 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행복의 정치나 행복학은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사람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더 많은 경험적 연구와 설문조사,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있지만, 행복 그 자체는 점점 더 멀어지는 소실점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의 궁극적인 판단자가 행복의 주체 자신이고 따라서 행복이 근원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면, 행복학이나 행복의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행복을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이는 물론 아주 중요한 일이다) 행복의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IV. 불행의 현상학을 위하여-몇 가지 가설

 

서두에서 말했듯이 나는 오늘날 행복에 관한 문제에서 철학자 또는 인문학자에게 중요한 과제는 행복 자체에 관한 연구보다는 오히려 일차적으로 불행의 현상학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내가 불행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때 현상학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은, 에드문트 후설이 제안했던 원래의 현상학의 의미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고 포괄적인 사태다. 곧 그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또는 세계 안에 있음’In-der-Welt-sein)와 더불어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은 물론이거니와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역시 지칭할 수 있는 용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 또는 그에 상당하는 존재자의 경험의 조건과 형식 및 양태에 관한 탐구를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불행의 현상학이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주체들이 불행을 겪는 조건과 형식 및 그 양태들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의 정치를 위해 불행의 현상학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오늘날 인간을 비롯한 행복(이나 불행)의 주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색다른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늘날 행복의 주체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게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의 주체가 누구일까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넓게 봐서 자유인, 곧 남성 시민일 것이고, 좁게 보면 철학적인 시민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행복의 주체는 좁게 보면 인간일 것이며, 넓게 본다면 동물, 더 나아가 그 바깥의 생명체들까지 포함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권리상 평등하고 자유로운, 따라서 각자 동등한 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을 지니고 있는 주체라는 생각이 인권선언 및 미국 독립선언서 이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서 나오는 귀결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 범위가 생물학적 인간의 지평을 넘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어떤 이들에게는 내가 키우는 강아지와 고양이 등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 이 범위는 앞으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또는 이런저런 종류의 기계들(로봇 ...)이 생명체 못지않은 소중한 개체들로, 따라서 그 행복과 불행을 돌보아야 할 존재자들로 간주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주체의 이러한 확장은 동시에 불행의 주체의 확장이기도 하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적어도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그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명해야 할, 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그러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주체들이 그만큼 확장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 이 주체들이 불행을 겪게 되는지, 그것의 구조적인간학적제도적 이유는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이 행복의 철학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행복이나 불행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또는 그 주체들 사이에 선험적인 동일성이 존재하는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불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이렇게 확장된 행복이나 불행의 주체가 서로 환원 불가능한 차이들에 따라 분리된다는 데서 생겨난다. 가령 만성적인 실업 상태에 빠져 있는 빈민 가정과 열렬한 환경운동가, 종교적인 문제로 테러를 당하는 무슬림 신자, 성적인 문제로 폭언과 무시, 따돌림을 당하는 성적 소수자에게 행복과 불행이 동일한 형식과 내용을 지닐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또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수렴하는 경향을 지닌다면, 그것이야말로 해명해봐야 할 중요한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확장된 행복(과 불행)의 주체가 존재하지만, 그 주체들 사이에는 더욱 더 수렴 불가능한 이질성이 존재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이질성 자체가 불행의 또 다른 요인이 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따라서 불행의 현상학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톨스토이가 지적한 것처럼, 행복은 모두 비슷한 데 반해 불행은 각각 다르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불행한 이들에게만 행복이 절실한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들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하고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행복보다는 불행이야말로, 행복의 철학보다는 불행의 현상학이야말로 철학적으로, 인문학적으로 더 흥미로운(또는 더 절실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행복을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불행을 정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우리는 불행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거나 원하지 않는 상태에 있도록 강제되는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곧 불행은 욕망의 좌절, 그것도 직간접적인 강요된 좌절과 거의 등가적인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의 이러한 좌절이 구조적인 성격을 지닐 때 그것은 단순히 불행을 넘어 불의의 문제가 된다. 불행과 불의를 구별하는 이 문턱, 이 경계에 대한 탐색 역시 불행의 현상학의 중요한 화두다.


다른 식으로 말해본다면, 오늘날 행복의 정치를 위해 필요한 것, 따라서 불행의 현상학의 대상을 이루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내적 배제의 문제다. 내가 내적 배제라고 부르는 것은 유럽 학자들, 특히 프랑스 철학자들 및 사회학자들이 과거에 빈곤(poverty)이라고 불리던 것의 개념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새롭게 사용하고 있는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용어와 아울러, 인종이나 민족, 종교, 성적 정체성에 따른 차별과 배제까지도 포함하는 상징적 배제라는 용어를 아우르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의 개념이다.[내적 배제의 문제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앞의 책; Robert Castel, La montée des incertitudes: Travail, protections, statut de l'individu, Seuil, 2009를 각각 참조.] 내적 배제에 대하여 가장 간명한 정의를 제시해준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이다. 그는 내적 배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내적 배제의 형식적 특징은, 배제된 이가 진정으로 통합될 수도 없고 실질적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는 점, 심지어 단도직입적으로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릴 수도 없다는 점이다.”[Étienne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221.] 이러한 의미에서 내적인 배제를 당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경우 이단자들이나 종교적 소수자들이었을 터이고, 또한 여성이나 19세기의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20세기 초의 흑인 및 20세기 후반~21세기 초의 이주자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내적 배제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적인 사회적 질서의 위계에서 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 을의 지위에 놓이도록 구조적으로 강제되는 사람들, 2등 시민, 2등 국민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내적인 배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 배제는 단순히 빈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개마고원, 2013, 77.]를 뜻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 바깥에 놓이도록 강제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문제는 오늘날 누구도 굶어죽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또는 시인 박노해가 말하듯이 “[분쟁 지역에서 고통 받는-인용자] 69억 인구에 비춰보면 국내엔 더 이상 가난한 사람이 없다.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신명호, 같은 책, 29쪽에서 재인용.]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행복의 바깥, 행복의 타자로서 내적 배제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체계적으로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사실 경제학자 장하성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저임금노동자 비율이 두 번째로 높고 월 임금이 100만원 이하인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 1874만 명의 3분의 1을 넘는다고 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것은 믿기지 않는 숫자다.”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해이북스, 2015, 310.]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를 이끄는 주요 활동가 중 한 사람인 김혜진은 󰡔비정규사회󰡕라는 책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비정규직은 고용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고용 형태로 말미암아 삶이 불안정해지고 희망을 잃은 채 불안에 떨며 노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노동자들은 권리를 빼앗긴 이등 국민이 되고 있다.”[김혜진, 󰡔비정규사회󰡕, 후마니타스, 2015, 76~77.]


그렇다면 불행의 현상학이 묻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내적인 배제의 상황에 놓인 을을 위한 행복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진태원, 몫 없는 이들의 몫: 을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앞의 글.] 을이라는 용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시사적인 용어가 되었다. 주로 계약관계에서 당사자 중 한 쪽을 지칭하기 위해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던 말이 사회적 약자, 몫 없는 이들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하고, 이제 어느덧 하나의 개념의 지위의 문턱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점이다.


왜 이들이 자신을 을이라고 부를까? 그것은 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갑에 의해 모욕당하고, 착취당하고,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갑과 을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땅콩과자 서비스를 제대로 못한다고 항공기를 회항하고 직원을 모욕 준 재벌이 있는가 하면, 대학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교수와 학생 등을 모욕하는 사학 재벌도 존재한다. 또한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상대로 부당한 요구를 가하는 업체들이 존재하고, 하청 업체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원청 업체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비정규직 직원들을 상대로 갑질을 하는 수많은 정규직 직원들도 존재한다. 더 나아가 을이 존재한다면, 또한 을의 을, 곧 병()도 존재하고, ()도 존재하고, 그 아래 수많은 더 작은 을들도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불충분하며, 병에 대해서도, 정에 대해서도, 그 아래 수많은 이름 없는 몫 없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을의 불행의 현상학에 대해, 을의 행복의 정치학에 대해, 곧 을의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때의 을이 환유적인 명칭이기 때문이다. 곧 을은 갑과 병 사이에 존재하는 누군가, 병과 정, 그 아래 존재하는 다른 약자들에 대해 또 다른 갑으로 군림하는 누군가를 지칭하기보다는 몫 없는 이들 일반, 내적인 배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어떻게 이 몫 없는 이들의 불행에 대한 현상학을 구성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에 근거를 둔 행복의 정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근대적인 행복의 정치학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칙에서 출발했다면, 아마도 탈근대적인 행복의 정치학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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