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프리즘 총서 신간 소식을 전합니다.

 

프리즘 총서 12권은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의 [헤겔]입니다.

 

이 책은 초판이 출간된 1975년 이래 영어권에서 가장 탁월한 헤겔 연구서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고

 

독일어로도 일찍이 번역된 바 있습니다.

 

찰스 테일러의 헤겔 연구로는 약 20여 년 전에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번역으로

 

[헤겔철학과 현대의 위기](서광사, 1990)

 

라는 책이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지만, 테일러의 헤겔 연구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이

 

프리즘 총서로 출간되어 기획자로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국역본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이 방대한 책이 훌륭한 번역으로 출간된 것은

 

무엇보다 역자인 정대성 선생의 노고 덕분입니다. 평소에 존경하는 선배이자 성실한 철학자인

 

정대성 선생은 독일과 영미의 비판이론의 정수를 소개하기 위해 그동안 애를 많이 써왔는데,

 

이 책의 번역을 통해 그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고 유능한 연구자인지 다시 한번

 

입증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방대한 책을 꼼꼼하게 교정을 보느라 애쓴 그린비 김재훈 씨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국내의 헤겔 연구에 크게 기여하기를 바라고, 테일러의 사상을 좀 더 정확히

 

알리는 데도 일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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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창녀 2014-06-02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거 재간 아닌가요?

W 2014-12-3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가 될지 모르겠는데, 정말로 번역이 `훌륭한` 건가요? 아니면 원서로 500페이지를 넘기는 그 분량에 비추어 봤을 때 그렇다는 건가요? 자잘자잘한 것들은 차치하고, 완전한 오역, 그러니까 정반대로 해석한다거나 아니면 몇몇 구절을 누락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의미에서 `훌륭하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balmas 2014-12-30 13:08   좋아요 0 | URL
예, 그건 전체적으로 좋은 번역이라는 뜻이죠. 혹시 읽다가 번역에 의문이 가는 점이 있으시면, 그린비출판사에 연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저런 대목에서 잘못이 있을 수 있는데, 나중에 2쇄를 낼 때 고칠 수 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겠죠. 프리즘 총서에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저장
 

한겨레 기획연재 "정치적인 것의 사상사" 7번째 원고 올립니다.

 

신문에 실린 원고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신문에서는 "폭력을 정당화한 나치스의 무기는 '욕망의 결속'"이라고 제목을 잡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30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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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누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를 읽는가? 마르쿠제는 주지하다시피 1968년 세계 여러 곳을 휩쓸었던 반역과 저항 운동의 지적 상징이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 마오쩌둥과 더불어 68 혁명의 ‘3M’ 중 하나로 불리며 세계 각국의 청년들에게 반역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한 권인 <일차원적 인간>(1964)은 출간된지 5년 만에 미국에서만 1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하지만 68혁명의 정신적 스승(guru)이라는 이미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상가로서 마르쿠제에게 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가 확산시킨 도구적 합리성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욕망의 해방적 성격을 찬양하고 학생, 빈민, 일용직 노동자 같은 사회의 주변부 집단을 새로운 혁명의 주체로 예찬하는, 68 혁명 시대의 전형적인 무정부주의적 사상가, 히피 철학자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진지한 독서의 대상이 될 만한 철학자다. 파시즘과 서구 자유주의 사회를 연결하는 깊은 연속성에 주목하고,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사상가가 바로 마르쿠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최근 유행하는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은 마르쿠제의 데자뷔라고 할 수도 있다.


  청년 시절 독일 사회민주당 당원으로서 열성적으로 정치 운동에 가담했던 마르쿠제는, 독일 혁명의 실패에 실망하여 정치 활동을 접게 된다. 하지만 1923년 출간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그리고 1927년에 나온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마르쿠제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두 저작을 통해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정치 전략과 전술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존재와 시간>을 읽으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결여되어 있던 인간의 실존적인 삶의 모습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1928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하이데거에게 가서 4년 동안 <헤겔의 존재론과 역사성 이론의 기초>라는 제목의 교수자격논문을 쓴다.


  하지만 1932년 하이데거의 거부로 이 논문은 통과되지 못한 채 그대로 출간되었다. 마르쿠제는 1년 뒤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하이데거가 나치스 당에 가입하고 프라이부르크대학의 총장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나치스의 검은 그림자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고 마침 역시 미국으로 자리를 옮긴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와 합류한다. 1930년대 이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다른 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쿠제는 어떻게 나치스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대중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탐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탐구가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된 저술은 그가 미국 정보국 요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의 글들이라는 점이다. 이 글들에는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 산업사회의 지배 양식을 분석하는 마르쿠제의 기본 논리가 이미 나타나 있다.


  마르쿠제는 호르크하이머로부터 공동 저술을 제안 받았지만, 그 제안 대신 미국 전략사무국(OSS) 요원으로 근무하는 것을 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꾸려가야 할 책임감 때문이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대신 아도르노와 공동 저작을 집필하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계몽의 변증법>(1943)이다.


  마르쿠제가 전략사무국 요원이 된 또 다른 이유는 그 활동의 주요 부분 중 하나가 나치 독일에 대한 지적ㆍ이데올로기적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나치즘을 무너뜨리고 독일의 해방을 앞당기고 싶어 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나치즘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 무엇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모든 지적 작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즉 진정한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이 현실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대에 도대체 왜 혁명이 와해되거나 타도되었고, 구시대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더욱 악화된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을까?”(<혁명이냐 개혁이냐>)


  “현대 기술의 몇 가지 사회적 함의”(1941)라는 글에서 마르쿠제는 나치스가 건설한 제3제국은 현대의 “테크노크라시의 한 형태”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나치 독일이 서구의 다른 산업 국가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사회, 곧 무력과 폭력, 억압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가 아니라, 고도의 기술적 합리성을 구현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을 뜻한다. 테러리즘과 강압이 나치즘의 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치스의 전체주의적 지배의 핵심에는 기술적 합리성의 양가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국가사회주의는 고도로 합리화되고 기계화된 경제 및 극히 효율적인 생산성이 또한 전체주의적 억압 및 지속적인 물질적 희소성의 이해관계를 위해 작용할 수 있는 방식들에 대한 놀라운 사례 중 하나다.”


  기술적 합리성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인간을 노동의 고역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적인 힘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을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고 즉물적인 이해관계를 추종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개인들이 군중을 이루고, 군중 속의 인간들은 이러한 삶의 양식을 위협하는 적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다. “군중의 일원으로서 인간은 단순한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표준화된 주체가 되었다. 군중 안에서는, 사회가 경쟁적인 자기 이익의 추구에 대하여 부과하는 제약이 효력을 상실하고 이에 따라 공격적인 충동이 쉽게 표출된다.”(“현대 기술의 몇 가지 사회적 함의”) 이러한 충동은 그 사회의 “가장 약한 경쟁자들 및 눈에 띄는 이방인들”, 곧 유대인, 외국인, 국민 내의 소수 집단을 향해 집중된다.


  따라서 기술적 합리성은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것의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독일의 심성”(1942)이라는 글은 이를 국가사회주의의 심성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하나는 즉물성, 효율성과 성공, 기계화와 합리화를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반기독교적인 이교주의, 인종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같은 신화론적 측면이다. 기술적 합리성은 나치스 지배의 핵심을 이루지만, 이것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감정, 욕망, 충동의 결속을 가능하게 하는 신화론적 요소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론적 요소는 단순히 조작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내면화하는 가치의 핵심이며, 이것이 공동체의 통합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고 절멸 전쟁을 추진하게 만드는 심성적 동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나치스 지배의 인간학적 기초는 심성과 욕망에 대한 지배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것의 합리화, 심성과 욕망의 지배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에게만 고유한 것인가? 마르쿠제는 1954년 <이성과 혁명> 재판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의 패배는 전체주의로의 조류를 중지시키지 못했다. 사유의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 영역에서도 자유는 퇴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생활의 안락을 늘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적 기구에 복종”(<일차원적 인간>)하는데, 이는 개인들이 지닌 욕망이 ‘허위 욕망’이기 때문이다. 곧 선진 산업사회에서 개인들은 지배 계급이 만들어낸 욕망을 자신들의 자율적인 욕망이라고 믿고 있으며, 상품의 보편화가 가능하게 만든 평준화된 삶의 양식으로 인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제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같은 티비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같은 자동차를 탄다. 혹시 누군가는 벤츠를 타고 누군가는 경차를 탄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능력의 차이이지 사회적 모순의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경쟁력을 높이는 것, 자기계발에 힘쓰는 것이다.


  마르쿠제가 보기에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도 “생산력에 대한 물신숭배”(<반혁명과 반역>)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기술적 합리성에 지배되고 있는 사회다. 오히려 서독의 노동자들이 폴크스바겐을 탔다면 동독의 노동자들은 품질이 떨어지는 트라반트를 탔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경쟁력이 훨씬 처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더는 마르쿠제가 제안한 해법을 채택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제시한 분석은 여전히, 적어도 좌파 메시아주의 사상만큼은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다시 마르쿠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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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획연재 중 5번째 사상가인 발터 벤야민 또는 발터 베냐민에 관한 원고입니다.

 

신문사에서는 "베냐민에게 법은 정의를 가로막는 근본 장애물"이라고 제목을 뽑았네요.

 

아래 주소로 가시면 글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6284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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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 2014-03-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여기다 쓸 글은 아니지만 알라딘블로그는 처음이라 영 어지럽네요..^^;; 미술사를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지난학기때 그라마톨로지 강의를 하셨던거 같은데 이번학기에는 강의를 안하시나요? 철학아카데미 외에 학교나 외부기관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다면 알려주세요.

balmas 2014-03-21 00: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예 철학아카데미에서 이번 학기에 그라마톨로지를 다 끝낼 생각이었는데, 제가 번역 밀린 것들을 이번 학기에 정리하려고 강의를 한 학기 쉬기로 했습니다. 그라마톨로지는 그래서 여름방학 때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강의하고 있는 곳은 홍대 근처에 대안연구공동체인데, 거기에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고 있습니다.
댓글저장
 

제 12회 장애인인권영화제가 오는 4월 8일에서 4월 10일 사이에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데,

 

아직 장소 대여비를 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한 달 남짓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는데 아직 모금액이 턱없이 부족해서

 

 관계자 분들이 상당히 애가 타시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주소로 가셔서 후원해주시길 바랍니다.

 

 

http://socialfunch.org/sdff420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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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에 참여하는 할머니들의 삶에 관한 구술사 기획이 진행 중입니다.

 

아래 안내문을 보시고 후원을 원하시는 분들은 소셜 펀치 링크로 가셔서 후원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얼마 없네요. 서두르세요~~~

 

 

http://socialfunch.org/halma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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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권운동사랑방 후원인 여러분께 작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작년 12월부터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을 하는 할매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전하자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기록노동자, 작가, 인권활동가, 여성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구술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밀양의 주민들도 저마다의 삶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먹먹함과 한숨, 그리고 때론 눈물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 끝에서 우리는 웃음을 배웠습니다. 희망이 어디 있을까 묻던 우리는 이미 저 스스로 희망인 사람들을 만나버렸습니다. 


두 달간에 걸친 인터뷰 작업을 이제 마무리 중입니다. 어렵게 들은 소중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열여섯 분을 인터뷰 하느라 두 세번씩 밀양에 다녀온 교통비를 충당할 재정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습니다. 모두 프로젝트에 참여한 개인들의 빚으로 남아있답니다. 여러분보다 먼저 소중한 이야기를 들은 기회를 얻었으니 빚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먹고사는 일이 그리 녹녹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빚이 가볍지가 않네요. 


여러분의 작은 마음을 보태주시길 바랍니다. 할매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책이 하루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늘도 공사를 막기 위해 싸우는 할매들만의 것이 아님을, 송전탑 공사가 하루하루 진행되더라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임을, 할매들이 하루하루 만들고 지키는 한 세계 앞에 송전탑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후원으로 보여주지 않으실래요?  ^-^


밀양 구술사 프로젝트는, 할매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전하자는 작은 마음에서 출발했어요. 이 마음에 동한 사람들이 모여 지금은, 글쓰기와 사진작업, 출판, 옴니버스 영화 제작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결과물이 여러분의 응원으로 곧 여러분을 찾아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멋진 언니들, 어쩔겨~


“우리 큰 애 놓고도 그랬고, 작은 애 놓고도 진작 일어나가 일로 하니까 돌 되기 전에 요기서 요기까지 팔을 못썼습니더. 부어갔고 요래 올리지도 못하고, 감자 그거를 한 개 그거를 못 깎았고, 돈 만 원을 못셌습니더. 남자들은 이래 같이 일해도 나는 애기꺼정 놓고 그마이 빙신이 되었는데도 내가 일을 못하고 한 번씩 누워 있고 하면 내한테 게을러졌다고 하더라고.”(현풍님 인터뷰 중)

 

“자식들 못 먹히고 공부 못 시킨 거. 딱 그거 두 가지가 한이다. … 그래 내가 안 캤나. 너그 쪼그말 적에 고아원에 넣어놓고 어딜 가든 돈 벌어가 보내주고. 고아원에 있었음 학교라도 안 나왔겠나. 그 얘기를 하니까 우리 죽은 아들이 ';엄마, 그런 소리 하지 마소. 공부 하나도 못해도 내 돌 아래 아버지 나가고 이래 키워주니 내 일본 유학한 거보다 더 낫십니데이. 욕 봤십니데이.'; …” (김말해님 인터뷰 내용 중)

 

“논 구백 평 있어요. ‘그거 막내 너희 해라’ 주면 풀신풀씬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기이 막 “아이고, 아버지, 송전탑 세우면 여 안 올랍니더.” (눈물) 그 말이 들어보니 망한 거라, 망하한……“(이종속 님 인터뷰 내용 중)


“송전탑은 계속 올라가고, 헬기는 자주 떠 댕기고, 또 상동 할아버지는 자살하시고, 이런 막 힘든 거는 있는데, 지금 제 생각으로는 뭔가를 내가 꼭 이뤄야지, 이걸 해가지고 꼭 이뤄야지, 이런 거보다는 그냥 내 선택한 이 길을 가봐야 되겠다, 그런 막연한 생각. 그래 사는 거 같에예. …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포기만 안 하면 뭔가가, 이렇게 충실하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뭔가 안 되겠나…”(박은숙님 인터뷰 내용 중)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예 남의 도움 없이는 못삽니더. 꼭 돈 가지고 집에만 들어앉아 사나? 그 돈을 활용을 해야 되는데 돈 쓰는 것도 서로 의지를 해가지고 쓰는 것도 있고, 모을 적에도 그 집이 참 그만큼 노력해가지고 그 만큼 잘 살아야지, 그 마음이 안 큽니껴? … 사람이 다 울력으로 삽니더, 울력으로예.”(조계순님 인터뷰 내용 중)


밀양을 살아내고 있는 열여섯 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http://socialfunch.org/halmaestory 에서 보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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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4-03-0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는 미국 학계의 특정한 일부분이 생산해낸 담론, ‘미국제 담론’을 세계적인 담론으로, 서구 담론 전체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신문에 저렇게 적혀 있더군요. 그러면 <비판적 사유의 유럽화는 세계 학계의 특정한 일부분이 생산해낸 담론, "유럽제 담론"을 세계적인 담론으로, 전지구적인 담론 전체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누군가가 비판한다면 발마스 님은 뭐하고 대답할 지 궁금하군요.

유럽 담론의 영향력 안에서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지?

물론 그들의 메시아주의 같은 것은 저도 좋아하지 않지만 이론적 실천보다는 행위적 실천을 더 중시하는 "실천지상주의"도 전 문제라고 봅니다.

그리고 국가 없는 정치를 왜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는지 납득이 안 갑니다.

<중층 결정, 과잉 결정 또는 다중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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