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총서 11권이 새로 나왔습니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저 유명한 논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비롯해서

 

그의 논문에 대한 여러 비평가, 동료들의 논평을 담은 책입니다. 스피박의 논문은 현대 인문학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널리 논의되는 글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글이 상당히 난해하고 까다로워서

 

국내에서는 이름만 널리 알려진 채 별로 논의되거나 응용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책에는 1988년 처음 발표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초판본과

 

1999년 [포스트식민이성비판]에 수록되면서 수정된 판본이 모두 실려 있고,

 

논평가들의 글에 대한 스피박의 답변도 실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및 스피박 이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문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이 책을 계기로 스피박의 이 글이 좀더 활발하게 읽히고 토론되고 응용되고 더 나아가

 

변용되고 전화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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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마스님 2013-06-01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발마스님 미남~~~~

쾅! 2013-06-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욕심을 내자면 <헤게모니 없는 支配>까지 飜譯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냥 英語로 읽을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시민성의 개념과 그 경계들>

- 2013학년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봄 학술대회


2013년 6월 8일에 개최할 예정인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의 학술대회 주제는 ‘시민성의 개념과 그 경계들’입니다.

2012년에 이어 2013년에도 ‘시민성’에 대한 주제를 계속해서 탐색해 나갈 예정입니다.

근대 세계는 시민성의 모색과 재구성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 질문과 그 정의를 만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과정에서 제도화된 시민권의 확립과 법적 장치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제도와 질서 이면에 면면히 흐르는 시민성의 역동들일 것입니다.

본 학술대회에서는 근대적 시민성의 발현과 변형되는 지점을 살펴봄으로써 ‘시민성’의 개념에 대한 미래적 전망을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시민성과 시민권이 국가적, 법적 제약과 규정 속에서 재구성되는 양상과 새롭게 모색되어야 하는 ‘시민성’의 개념을 대안적으로 찾아볼 생각입니다.


◎ 일시 : 2013년 6월 8일(토) 오후 1시

◎ 장소 : 서강대학교 정하상관 610호



◎ 세부 일정

13:00 - 13:30 개회사
최기영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장)



사회자 : 박숙자

13:30 - 14:20 시민성 - 국가, 민족, 가족을 넘어서
발표자 : 김동춘 (성공회대), 토론자 : 정진아 (건국대)

14:20 - 15:10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발표자 : 진태원 (고려대), 토론자 : 김정한 (고려대)


15:10 - 15:30 휴식


15:30 - 16:20 민주주의와 성차 : 차이와 평들을 다시 상상하기
발표자 : 이명호 (경희대), 토론자 : 박미선 (한신대)

16:20 - 17:10홍수와 잠수 혹은 강변엔 누가 사는가; 정동의 과잉됨과 시민성의 공간
발표자 : 권명아 (동아대) 토론자 : 김경수 (서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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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하나 공지하겠습니다. 6월 8일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주최하는 "시민성의 개념과 그 경계들"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입니다. 저도 발표를 하나 맡게 됐는데, 제 발표는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아렌트, 랑시에르, 발리바르"

 

입니다. 제 발표문의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정부주의적 시민성? 아렌트, 랑시에르, 발리바르

 

이 글에서 우리는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도발적인 주제를 다뤄보려고 한다.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이라는 발표문의 제목은 명백한 용어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무정부주의가 국가에 대한 부정을 뜻한다면, 시민성은 국가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사고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식의 주제는 처음부터 그다지 의미 있는 논점을 제기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굳이 이처럼 도발적인 제목을 선택해서 발표를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는 현대 유럽정치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바깥의 정치의 합리적 핵심을 바로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생각에 이는 한나 아렌트의 현대적 유산이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유산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쟁점 중 하나는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평가하는 매우 상반된 방식의 함의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랑시에르는 아렌트 정치철학에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해낸다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더욱이 이는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이다.

 

셋째, 아렌트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민주주의에 본래적인 무정부성 및 그것에 기반을 둔 시민성의 가능성이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나 무정부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정부성에 기반을 둔 시민성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또한 그것이 현재 민주주의 정치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해 무언가 의미 있는 전언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이 발표에서 제기해보려는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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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6-0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차피 하버마스나 국내의 최장집 교수 및 백낙청 교수 같은 이들에게 기대한 적도 없었다.

굳이 내 생각을 드러내자면 이렇다.

국가 없는 사회는 가능하다.

국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 자체가 이 사회가 사람들에게 세뇌해 온 생각이다.

국가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시각, 국가 없이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이 왜 불가능한가?

統一 국가가 아니라 아예 人口 數에 맞춰서 2800 個의 작은 크기의 국가들로 쪼개어 버린다는 想像,

국회의원을 제비로 뽑는다는 상상,

국가가 없는 사회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왜 불가능하며 그것이 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국가없는 사회도, 아니면 국가형태, 그것도 아니면 민주주의조차도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국가없는 민주주의 사회라는 게 그렇게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인가?


쾅! 2013-06-07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無國家가 바로 無政府라는 생각도 일종의 세뇌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가?

시민사회와 시민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민주주의는 정말로 불가능한가?

아마 이렇게 생각하면 저 토론에 끼워주지도 않겠지.

전두환을 비판하면서 시공사 책을 읽고 시공사 책을 추천하는 민주주의자들의 세상에서는 말이다.
 
육화, 살의 철학 뉴아카이브 총서 8
미셸 앙리 지음, 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국내에는 다소 생소한 미셸 앙리라는 현상학자의 저서에 관한 서평입니다.

 

이 글 역시 아직 교정이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토론은

 

[자음과 모음] 여름호에 실린 글을 대상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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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셸 앙리(1922~2002)는 프랑스 현상학의 최후의 대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독일의 에드문트 후설에서 시작되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막스 셸러 등을 통해 활력을 얻은 ‘현상학 운동’은,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탈형이상학적 사유󰡕), 그 이후 오히려 프랑스에서 독창적인 계승자를 얻게 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적 현상학,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현상학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적인 현상학 운동의 모습들이라면, 미셸 앙리는 프랑스 현상학이 여전히 창조적 쇄신의 능력을 잃지 않았음을 입증해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앙리의 저작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들었으며, 독일이나 미국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앙리의 저작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고, 앙리에 관한 연구서나 논문집도 여러 권 나와 있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다소 늦기는 했지만, 󰡔물질 현상학󰡕과 󰡔육화, 살의 철학󰡕의 번역을 계기로 국내에도 이 독창적인 현상학자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평의 대상이 된 이 책은 앙리의 저작 중 말년에 속하는 책이다. 󰡔현시의 본질󰡕(1963)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독자적인 사상의 기틀을 마련한 앙리는 󰡔신체의 철학과 현상학󰡕(1965), 󰡔물질 현상학󰡕(1990) 같은 현상학적인 저작 이외에도, 󰡔마르크스󰡕(1976)나 󰡔정신분석의 계보학󰡕(1985), 󰡔내가 진리다: 기독 철학을 위하여󰡕(1996) 같은 저서를 통해 고유한 의미의 현상학적인 철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철학, 정신분석 및 기독교 신학의 영역까지 자신의 사유를 확장해갔다. 따라서 󰡔육화, 살의 철학󰡕은 국내의 독자들이 앙리의 원숙한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2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상학의 전복”이라는 제목이 붙은 1부에서는 살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밝히고 있다. 2부인 “살의 현상학”에서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근대 과학을 개시한 갈릴레이적 환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신체(corps)와 구별되는 살(chair)의 개념에서 찾고 있다. 마지막 3부인 “육화의 현상학-기독교적 의미의 구원”에서는 살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구원 개념에 대하여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육화’라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이루는 육화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살이라는 앙리의 현상학적 개념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또한 근본적으로 현상학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제시하는 대담한 철학적 도전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현상학을 통해 현상학을 넘어서기. 둘째, 육화라는 기독교 신비의 핵심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심오한 철학적 통찰로 이해하기.

 

자신의 도전을 정당화하고 완수하기 위해 앙리는 우선 신체와 살의 구별에서 논의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신체가 “길가의 돌멩이” 같은 우주의 타성적 물체 등을 가리킨다면, 살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13쪽)를 뜻한다.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13~14쪽)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별은 매우 현상학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현상학을 전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적인 이유는, 이러한 구별이 신체에 대한 살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앙리의 구별은 후설 이래로 다른 현상학자들이 전제하듯이 초월론적인 것으로서의 주관에 근거하여 객관적 질서, 과학적 질서의 가능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앙리에게 이러한 주관의 핵심은 의식이나 현존재, 심지어 무의식이나 신체도 아니고 “살”이다. 이러한 살의 개념은 “철학자들에 의해 전혀 성찰되지도 않은 마르크스의 한 진술에 의하면 사유는 삶의 양태”(175쪽)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앙리가 시도하는 현상학적 전복 또는 전회에 의하면 “더 이상 우리에게 살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사유가 아니며 반대로 사유가 자기에 접근하는 것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느끼고 견디는 것을, 그리고 결국 사유가 매번 자기인 바의 것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삶, 즉 cogitatio의 자기-계시이다.”(174쪽)

 

이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앙리는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구별에 입각한 후설과 하이데거 현상학의 한계를 비판한다. 두 사람의 한계는 나타남을 “세계의 나타남”으로, 곧 탈-자(ek-stase)의 가시화의 순수 지평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라 나타남과 나타나는 것 사이의 무관심한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하여 앙리는 후설이나 하이데거가 묻지 않은 “인상 그 자체의 나타남”(96쪽), 즉 “인상의 기원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러한 기원을 “고통의 자기-촉발(auto-affection)”(116쪽)에서 찾는다. 이러한 ‘고통을 느낌’은 후설의 이른바 ‘수동적 종합’에 선행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바로 “삶의 자기 안에의 도래”가 성립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은 자기와의 차이남이 없이 자기를 느끼고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본래적이고 순수한 “정감성(affectivité)”(121쪽)으로서의 이러한 자기를 느끼고 견딤에서 “절대적인 삶의 자기-증여 과정”(182쪽)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학의 전복은 두번째 도전으로서 육화의 계시에 대한 재해석과 연결된다. 이러한 재해석은 사도 요한의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는 진술 및 “말씀이 살이 되었다”(16쪽)는 진술의 수수께끼에서 출발하여, “신의 인간-됨, 말씀의 살-됨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누군가는 가능하며 최소한 생각될 수 있는가?”(34쪽)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색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앙리는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의 가상들이 부딪히게 되는 한계로서 “절대적인 무-능”, “모든 힘보다 오래된, 그것에 내재하는 무-능에 대한 결정적인 직관”(327쪽)에서 출발하여 진정한 자유를 “정념적인/수난적인 소여”(345쪽)로서의 살의 경험에서 발견한다. 이때 “창조는 더 이상 자기 밖에 외적인, 분리된 실존의 이름으로, 그 자체 자율적인 것으로 향유하는 한 실체(entité)의 정립을 의미하지 않는다.”(345쪽) 오히려 창조는 “절대적인 삶의 자기-생성 안에서, 그것의 그치지 않는 도래 안에서만 자기에 도래하는 것의 생성을 의미한다.”(346쪽) 이렇게 “창조의 개념을 생성의 개념으로 대체”(426쪽)하면서 앙리는 삶에 대한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수동성을 의미하는, 따라서 모든 초월성이 배제된 수동성을 뜻하는 “초월론적 정감성”(427쪽)을 “우리의 초월론적인 탄생, [신의-인용자 추가] 자식으로서 우리의 조건”(428쪽)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앙리에 따르면 “모든 초월론적인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이 삶의 자기-계시를 가리키는 것”(482쪽)이 바로 말씀의 육화이다.

 

3

 

앙리의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책은 500쪽이라는 책의 분량이 적게 느껴질 만큼 아주 조밀하고 응축된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무언가 우리 삶의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독자들이 받게 된다면, 그것은 (프랑스 현상학 특유의 강점이지만) 앙리가 욕망과 사랑, 불안, 고통, 부조리에 대한 감정 같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앙리의 치밀하고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자는, 번역서 옆에 놓아둔 불어 원서를 거의 들춰보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꼼꼼하면서도 유려한 우리말로 잘 번역이 되어 있다. 역자의 값진 노고 덕분에 독자들은 프랑스식 현상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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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 여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아직 교정이 다 끝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은

 

[실천문학] 여름호에 실릴 판본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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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1.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와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1942~)는 아주 기묘한 관계를 지닌 프랑스 철학자들이다. 두 사람 사이의 기묘한 관계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두 사람이 공통의 지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랑시에르와 발리바르는 모두 파리 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녔다. 더욱이 두 사람은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세미나에 참여했으며,[알튀세르는 1960년대 초에 고등사범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청년 마르크스Le jeune Marx”(1961-1962), “구조주의의 기원들Les origines du structuralisme”(1962-1963), “라캉과 정신분석Lacan et la psychanalyse”(1963-1964). François Matheron, “Présentation”, in Louis Althusser,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deux conférences(1963~1964), Livre de Poche, 1995 참조. 󰡔자본󰡕에 관한 세미나는 1964~65년에 열렸으며, 여기에는 발리바르, 랑시에르,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 외에 이브 뒤루Yves Duroux, 로베르 리나르Robert Linhart가 참여했다.] 이 세미나의 발제문들을 바탕으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Louis Althusser et al., Lire le Capital, François Maspero, 1965(PUF, 19963). 이 책에는 알튀세르, 랑시에르, 발리바르, 마슈레 이외에 세미나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로제 에스타블레Roger Establet가 공저자로 참여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는 긴밀한 지적 연대와 교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두 사람 사이에는 지적 연대는 고사하고 뚜렷한 지적 교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크 랑시에르가 󰡔자본을 읽자󰡕에 공저자로 참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알튀세르와 거리를 두고, 몇 년 후에는 󰡔알튀세르의 교훈󰡕[J. Rancière, La leçon d'Althusser, Gallilamrd, 1974. 이 책은 작년에 새로운 「서문」과 함께 재출간되었다. La leçon d'Althusser, Éditions La Fabrique, 2012.]을 출간하면서 이른바 알튀세르에 대한 ‘부친 살해’를 감행하고 알튀세르 및 알튀세르의 제자ㆍ동료들과 지적으로 완전히 절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의 랑시에르 저작에서 비난을 위해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알튀세르나 그의 제자들, 가령 발리바르나 마슈레, 또는 미셸 페쇠Michel Pêcheux나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등의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반면 발리바르는—발리바르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계속해서 알튀세르의 “가장 말 잘 듣는 제자”로 남아 있었으며,[하지만 이는 발리바르가 알튀세르 사상의 모든 점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발리바르는 이미 1978년 알튀세르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쟁을 제기하지만, 이는 알튀세르의 죽음으로 인해 문제제기로 남게 된다. E. Balibar, “État, parti, transition”, Dialectique, vol. 27, 1979. 이러한 미완의 논쟁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정세 및 이론적 지형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이 글의 의의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은 최원인데,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논쟁에 대한 그의 평가 방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최원, 「역자 해제: 이론의 전화, 정치의 전화—알튀세르에게서 발리바르로」,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이는 앞으로 검토해볼 만한 쟁점이다.] 알튀세르가 사망한 이후에도 알튀세르의 지적 유산의 계승자로 널리 인정받을 만큼, 자신의 사상 형성에서 알튀세르에게 지고 있는 빚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이 점은 무엇보다도 알튀세르의 가장 대표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가 1996년 재출간될 때 발리바르가 두 책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을 통해 단적으로 입증된다. E. Balibar, “Présentation pour l'édition 1996”, in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Présentation”, in Lire le Capital, op. cit. 또한 발리바르는 유명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1970) 논문의 원래 출처이며 유고작으로 출간된 󰡔재생산에 대하여󰡕 2판에도 「서문」을 쓴 바 있다. E. Balibar, “Althusser et les "Appareils idéologiques d’État"”, in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UF, 2011(19951). 1995년 초판을 번역한 국역본에는 당연히 이 「서문」이 빠져 있다. 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그렇다면 처음의 가정과는 반대로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사이에는 공공연한 적대 관계가 존재할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뜻밖에도 긴밀한 이론적 친화성이 존재한다. 특히 랑시에르가 󰡔불화󰡕(1995)를 발표한 이후, 발리바르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불화󰡕를 비롯한 랑시에르의 저작(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을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으며, 랑시에르 민주주의론의 통찰력과 독창성을 긍정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친화성은 절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며, 따라서 몇 가지 갈등적인 쟁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러한 쟁점들은 현재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를 이해하고 그에 관한 해법을 모색하는 데 매우 긴요한 것이다. 이 글에서 간략하게나마 민주주의에 대한 재정의를 둘러싼 두 사람의 친화성과 갈등이라는 문제를 살펴보겠다.

 

2. 랑시에르와 안-아르케an-arkhe로서의 민주주의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사이의 이론적 친화성은 무엇보다 두 사람이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재정의를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 있다. 좌파 이론가라면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 이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철학자들, 특히 일군의 좌파적인 유럽 철학자들의 이론적 지향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독특한 이론적 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랭 바디우나 슬라보예 지젝, 또는 조르조 아감벤이나 안토니오 네그리 같이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론가들은 이를 테면 바깥의 정치라는 공통의 이론적ㆍ정치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이 점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진태원, 「푸코와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 신자유주의, 대항품행」, 󰡔철학논집󰡕,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편, 29집, 2012 참조.] 곧 이들은 민주주의를 개조하거나 새롭게 재정의하기보다는 민주주의 자체를 거부하고 (또는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에서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거부로 나아가고) 그것에 대한 대안(가령 공산주의 같은)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 유럽철학의 맥락에서 본다면, 민주주의를 좌파적 관점에서 새롭게 정의하려는 노력은 차별적인 한 가지 입장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보면 이들의 작업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샹탈 무페의 작업과 좀더 가까운 지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재정의와 이른바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토론은 흥미로운 쟁점 중 하나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은 한편으로 정치와 치안police의 구별(및 대립)에, 다른 한편으로 치안 질서의 중심에 존재하는 잘못tort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이나 영역은 사실은 엄밀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규정한다. 곧 그에 따르면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J. Rancière, 같은 책, p. 51.]가 곧 치안이다. 그리고 치안의 본질은 공권력이나 법 체계 같은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짜임configuration du sensible이다.

 

치안은 무엇보다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신체들이 그것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만든다. 이 질서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질서로서, 어떤 활동은 가시적인 것으로 다른 활동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어떤 말은 담론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말은 소음에 속하는 것으로 알아듣게 만든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노동의 장소를, 공적 영역이라 불리는 것에 고유한 보기 및 말하기 양식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사적 영역으로 만든 것이 치안의 법이다.[J. Rancière, 같은 책, p. 52.]

 

이러한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랑시에르는 푸코에게 충실하면서도 그와 다르다. 그가 푸코에 충실한 이유는 일종의 예속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을 국가의 공권력이나 법 등과 같은 공적 영역 내지 상부구조에서 찾지 않고, 신체들의 질서 및 그것들을 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가 규율권력을 법이나 제도의 기저에 존재하는 미시적 하부구조로 간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Gallimard, 1975;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나남, 1994 참조.] 더 나아가 푸코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Pierre Dardot &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La Découverte, 2009, p. 5.]을 규정하는 새로운 삶의 규범인 것과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도 치안은 우리의 “행위 양식들과 존재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푸코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 따라 치안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그가 치안을 정치와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치안이라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데, 이러한 짜임에서는 부분들 및 부분들의 몫 또는 몫의 부재가 그 짜임에서 아무런 자리도 갖지 못한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단절은 부분들과 몫들, 몫들의 부재가 정의되는 공간을 다시 짜는 일련의 행위들에 의해 명시된다. 정치적 활동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보일 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이다.[J. Rancière, La mésentente, pp. 52~3.]

 

랑시에르는 정치를 치안을 규정하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 것이며,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치안과 정치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J. Rancière, 같은 책, p. 55.]에 따라 작동한다. 푸코에게는 랑시에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치안과 정치를 전혀 상이한 논리가 지배하는 두 가지 활동으로 보는 관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푸코에게 정치가 부재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정치와 치안은 어떤 점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잘못tort”이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 개념을 리오타르에게서 빌려오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재규정한다. 리오타르에게 tort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과 같이 합리적인 담론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절대적인 잘못이나 피해를 뜻한다. 이것은 피해를 가한 쪽과 피해를 당한 쪽 양자가 서로 합의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평가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일체의 토론이나 손해 배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치적 행위의 범위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Jean-François Lyotard, Le différend, Paris: Minuit, 1984 참조.] 반면 랑시에르는 이것을 정치에 구성적인 잘못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의 기초를 뒤집기 위한 목표를 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 정치철학은 시초 이래로 아르케arkhe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의 질서를 모색했다. 그리스어로 “시초”와 더불어 “원인”이나 “근거”를 뜻하는 아르케는 정치 공동체가 어떤 합당한 근거나 원리에 따라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 공동체의 아르케를 추구한 것은 두 가지 대립항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나는 공동체가 단순한 산술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솔론 이전의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작동하던 이러한 산술의 원리에 따르면 공동체는 더 많은 부를 지닌 사람이 적은 부를 지닌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 채무를 지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것은 정치 공동체를 질서 짓기 위한 원리로 적절치 않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를 기초 짓고 있는 안-아르케, 곧 아르케 없음, 원리 없음의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an-arkhe는 아나키anarchy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구두수선공이나 대장장이가 성벽 쌓는 일이나 배 만드는 일에 대해 전문가들과 똑같은 권리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잘못된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기하학적 비율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돌아갈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고자 했다. 이것에 따르면 부유한 이들은 부에 따른 합당한 몫을 받고, 유덕한 귀족들은 그들의 고귀한 혈통과 유덕함에 따른 몫을 받으며, 재산도 혈통도 지니고 있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자유 시민이라는 몫을 지닌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설정하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논리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치철학”은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르케의 질서, 곧 기하학적인 몫의 분배 질서는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본성적인 정치 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추첨제야말로 민주주의에 가장 적합한 제도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La Fabrique, 2005 참조. 또한 랑시에르와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하지만 역사적인 사료 검토와 경험적인 논증에서는 훨씬 더 정교하게 추첨제와 민주주의의 긴밀한 연관성을 고찰하고 있는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2004도 참조할 수 있다. 아울러 국내의 연구로는 이지문,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이담북스, 2012도 참조.]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며,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그러한 자격이 부여된다. 따라서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아무런 자격이나 능력도 없이 아무나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아르케 질서에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일이다.[랑시에르가 사용하는 tort 개념을 “잘못”이라고 번역하는 것에 대해 양창렬은 사신 교환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이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그리스어 blabe라는 단어에서 비롯한 것인데, 이 단어의 그리스어 용법에는 “해로움”이나 “손해”라는 뜻만 있을 뿐 “잘못”이라는 뜻은 없다는 것이다. 이 논평은 매우 의미 있고 유익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tort 개념을 “잘못”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불어의 tort나 우리말의 “잘못”이라는 단어는 dommage나 “손해”보다 좀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도덕적 잘못이나 합리성의 부재(가령 불어로 “tu a tort”는 “네가 틀렸어”를 뜻한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손해”나 “피해” 같은 의미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dommage보다는 tort가, “(손)해”보다는 “잘못”이, “부정의”를 뜻하는 adikia라는 그리스어 단어와 blabe 사이의 연관성을 표현하기에 좀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 생각에 랑시에르가 그리스어의 blabe에 좀더 가까운 불어 단어인 dommage보다 tort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계속 사용한 것은 이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반면 랑시에르에 따르면 아르케의 원리야말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데모스demos, 곧 인민을 몫 없는 이들로 배제함으로써 정치, 곧 민주주의에게 “잘못”을 가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케의 질서와 민주주의, 또는 치안과 정치는 “잘못”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해 있는 셈이다.

 

3. 발리바르와 평등자유명제

 

랑시에르가 민주주의를 재정의하기 위해서 서양 정치철학을 정초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그들과 그리스 민주주의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과 달리, 발리바르는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텍스트인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하 󰡔권리선언󰡕으로 약칭하겠다)에서 출발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되던 1989년 발표한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이라는 글[“Droits de l'homme et droits du citoyen: la dialectique moderne de l'égalité et de la liberté”, in Les frontière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윤소영 옮김,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참조.] 또는 그 글의 원본에 해당하는 「평등자유명제」라는 글[“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진태원 옮김, 󰡔평등자유명제󰡕, 그린비, 근간. 앞의 글은 이 글의 축약본에 해당하는데, 발리바르는 2010년에 출간된 저작에 이 글과 같은 󰡔평등자유명제󰡕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 글을 다시 수록했다. 발리바르에게 이 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에서 어떤 의미에서 󰡔권리선언󰡕이 근대 민주주의를 정초하는 텍스트인지, 그리고 그것의 새로움과 중요성은 어디에 있는지 논의하고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권리선언󰡕의 독창성 및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1) 인간=시민

 

첫째, 󰡔권리선언󰡕은 원래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과 달리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차이, 따라서 인간과 시민 사이의 본래적인 차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시민의 완전한 동일성을 선언하고 있다. “󰡔권리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사이에 현실적으로 내용상의 어떤 괴리도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즉 그 둘은 정확히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시민 사이에도 어떤 괴리도 어떤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데, 적어도 그들이 그들의 권리—그들이 지닌 권리들의 본성과 외연—에 의해 실천적으로 ‘정의되는’ 한(그런데 이것이 바로 󰡔권리선언󰡕의 목적이다) 그렇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66;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17쪽. 강조는 발리바르의 것이고 번역은 약간 수정했다. 이하 별다른 언급이 없는 한 강조 표시는 모두 원저자의 것임을 밝혀 둔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부연이 필요하다.

 

발리바르의 인간=시민이라는 정식은, 흔히 주장되는 것과 달리 󰡔권리선언󰡕이 근대 자연권 사상(특히 존 로크 및 장-자크 루소)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연권 사상과의 단절을 표현한다는 보충적인 정식을 함축하고 있다. 곧 근대 자연권 사상이 인간이 지닌 본성,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권리들에 기반하여 정치체 및 정치적 성원으로서 시민의 권리를 근거 지으려고 한 반면, 󰡔권리선언󰡕은 “정치질서의, 사회의 상류에 그 심층적 기초 또는 외재적 보증으로서 어떤 ‘인간 본성’도 설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은 “개인적 또는 집합적 인간을 정치사회의 구성원과 동일화한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p. 66~7;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18쪽.] 이것은 곧 인간의 권리 또는 인권은 그 자체가 정치적 권리이며, “정치에 대한 인간의 권리”[É. Balibar, 같은 곳. 이 부분은 발리바르 글의 2010년 판본에 있는 것으로, 1992년 출판본을 대본으로 한 국역본에는 빠져 있다.]를 함축하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어떤 자연적인 본성에 기초 짓는 대신, 󰡔권리선언󰡕은 인간들이 지닌 권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보증하는 권리이며, 따라서 그러한 권리에는 인간들 사이의 호혜성과 상호 보증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려고 하는 세력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투쟁의 필연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시민이라는 명제는 고대의 정치적 관점과 달리 평등을 자유의 한계 속에 위치시키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평등은 자유를 지닌 시민들, 자유로운 성인 남성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평등은 자유의 결과이며 자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고대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아니고 따라서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 곧 노예나 여자, 아이에 대한 배제에 근거를 둔 배제의 민주주의라는 뜻이다. 반대로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의 마르크스처럼, 󰡔권리선언󰡕에서 인간과 시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인) 제도적 분리에 대한 표현을 발견하고, 따라서 공적 영역에서 주장되는 시민의 평등을 사적 영역 내지 경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착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은폐로 이해하는 것 역시 󰡔권리선언󰡕의 논점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마르크스의 이러한 독법을 메타정치(곧 정치를, 그것 바깥에 있는 어떤 진리나 현실의 가상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정치철학)의 선구적인 표현으로 지적한 바 있는데,[J. Rancière, La mésentente, 4장 참조.] 발리바르 역시 이러한 독법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시민을 󰡔권리선언󰡕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이해할 경우, 󰡔권리선언󰡕에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사적 인간과 공적 시민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처음부터 정치적 인간, 곧 시민이기 때문이다.

 

2) 평등=자유

 

여기에서 우리는 발리바르의 두 번째 논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발리바르는 󰡔인권선언󰡕의 또 다른 핵심을 평등과 자유 사이의 완전한 동일성, 곧 평등=자유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과 자유의 동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평등자유égaliberté”라는 신조어(영어로 하면 equaliberty)를 만들어낸다. 평등=자유의 동일성은 인간=시민의 동일성을 근거 짓는 것이며, 그것이 지닌 철학적ㆍ정치적 함의를 온전히 드러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평등=자유라는 등식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인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불인정의 철학적 근거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찾는다. 곧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각각 독립적인 이데아 또는 본질을 지닌 실체로 이해한 연후에, 이 두 가지 상이한 실체가 어떻게 공통의 본질을 지닐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 경우 공통의 본질은 인간이거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다시 인간과 시민을 구분하고 분리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다른 한편 조금 더 실천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동일성에 ‘경험적 내용’, 실증적 ‘지시 대상’을 부여할 수 있으려면, 어떤 자유어떤 평등이 동일한지, 또는 오히려 어떤 한계들 내지 조건들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 동일한지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0;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1쪽.]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첫째, 평등=자유 명제가 표현하는 것은 각자 상이한 본질을 지닌 두 가지 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양자가 현존하거나 부재하는 상황들이 필연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 곧 “자유의 (사실상의) 역사적 조건들은 평등의 (사실상의) 역사적 조건들과 정확히 같은 것”[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0;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1~2쪽. ]이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평등=자유 명제가 표현하는 것은, 평등이 반박되고 부정당하는 역사적 상황은 자유가 반박되고 부정되는 역사적 상황과 정확히 같다는 사실, “평등을 억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서—즉 폐지하지 않으면서—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는 조건들의 사례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1;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2쪽.]라는 사실이다.

 

만약 이렇게 평등과 자유가 각각 동일한 억압과 제한의 역사적 조건 속에 놓여 있다면, 중요한 것은 개인적 자유와 집단적 자유,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을 구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과 자유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어떤 것인지 묻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적 자유의 집단화에 필요한 평등의 정도, 그리고 개인들의 집단적 평등에 필요한 자유의 정도가 질문되어야 하는데, 그 대답은 두 가지 경우 모두 동일하다. 즉 주어진 조건들에서 최대치라는 것이다.”[같은 곳.] 예컨대 자유가 평등이 아니라면, 곧 자유가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성립하는 자유라면, 그때 자유는 우월성이나 특권의 표현(강자의 자유, 귀족의 자유 등)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신보다 우월한 어떤 힘이나 세력에 복종할 수 있는 자유(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신분적 예속으로부터, 생산수단으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평등과 분리되어 실제로는 전혀 자유가 아닌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평등과 결합되고, 그것과 동일화되어야 한다. 역으로 평등은 “모든 예속과 지배에 대한 근본적 부정의 일반 형식으로, 곧 자유 그 자체의 자유화/해방libération으로 사고되어야 한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이 대목 역시 국역본에는 빠져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명제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시민의 동일성의 의의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의 긍정”[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쪽.]에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인간=시민 명제의 핵심이 정치적 권리에 대한 정의에 있다면, 󰡔권리선언󰡕은 인간을 시민으로, 인권을 시민권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권리선언󰡕이 개인의 자율성, 개인적 권리의 영역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다 정치로 환원하며, 따라서 공포정치 및 전체주의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나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식의 수정주의적ㆍ반(反)전체주의론적 비판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사실 발리바르의 이 글은 무엇보다도 퓌레와 고셰의 수정주의적 해석에 대한 (비(非)자코뱅적) 반론의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반대로 우리가 인간=시민 명제의 핵심을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 파악한다면, 인간=시민 명제는 인간을 시민으로 환원하거나 자유를 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나 개인적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란, 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불변적인 자연적 사실에 기초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쪽. 이 부분은 2010년 판본에는 빠져 있다.]이라는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앞에서 제기된 두 번째 질문, 곧 “어떤 한계들 내지 조건들 속에서 자유와 평등이 동일한지”에 대한 답변이 나온다. 발리바르는 󰡔권리선언󰡕에 담긴 인간=시민 및 평등=자유 명제는 “부정적 보편성, 곧 절대적 비규정성”[

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쪽.]을 특징으로 한다고 지적한다. 이 명제들이 부정적 보편성을 지니는 이유는, 인간=시민, 평등=자유의 동일성이 어떤 실정적인 토대나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공통의 조건 속에서 부정되고 논박된다는 부정적 사실, 또는 둘 중 하나에 대한 억압과 부정은 다른 것에 대한 억압과 부정을 낳는다는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부정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 보편성은 바로 그 명제들이 지닌 절대적 비규정성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절대적 비규정성이란, 우선 이 명제들이 아무런 실정적인 또는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 명제들의 구체적인 내용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조건들에 따라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1789년 󰡔권리선언󰡕에서 인간=시민, 평등=자유 명제가 선언되었음에도, 바로 이 󰡔권리선언󰡕에 기초를 둔 최초의 헌법에서는 시민을 남성으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는 바로 이 󰡔권리선언󰡕에 근거하여, 또한 그것의 모순을 바로잡고 정정하기 위해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ée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을 발표했으며, 아이티의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는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흑인 노예 및 아이티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Sophie Mousset, Olympe de Gouges et les droits de la femme, Pocket, 2007 및 시 엘 아르 제임스, 󰡔블랙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아이티 혁명󰡕, 우태정 옮김, 필맥, 2007 참조.]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권리선언󰡕의 언표의 비규정성은 한편으로 그것을 자신들에 유리한 방향으로 물질화하고 재정의하려는 지배 계급이나 특권 세력의 재전유 시도와,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해방과 자유를 획득하려는 예속 계급, 여성, 식민지 인민 등의 투쟁에 대해 모두 개방되어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비규정적인 이러한 혁명의 언표에 부응하는 물질적 제도가 어떤 것인지 규정하는 일은 역사적인 세력 관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 비규정성의 또 다른 함의는, 바로 이러한 비규정성 때문에 󰡔권리선언󰡕의 언표는 이후의 모든 혁명, 모든 해방 투쟁에서 보편적인 준거로 작동한다는 점이다.[발리바르는 「보편들」에서는 이러한 보편적 준거를 “이상적 보편”이라 부른 바 있다. 「보편들」, 󰡔대중들의 공포󰡕, 서관모ㆍ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 참조.] “평등자유명제에 부합하는 제도들의 구축을 역사적으로 규정하는 조건들과 언표의 과도하고 과장된 보편성 사이에는 영속적인 긴장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없이는 혁명적 정치가 존재하지 않을 진리 효과가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이 언표는 항상 반복되어야 하며, 변화 없이 동일하게 반복되어야 한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3;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4쪽.] 그리고 이후에 각자 다른 역사적 조건들 아래 이루어지는 투쟁들 속에서 이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권리선언󰡕이 지닌 언표 역시 끊임없이 재규정되고,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 자체가 또 다른 보편적 원칙으로 대체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포섭될 것이다.

 

IV. 민주주의의 변증법

 

지금까지 랑시에르와 발리바르가 시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재정의에 대해 간략하게 소묘해봤다. 이러한 소묘에서 드러나듯이, 두 사람의 재정의는 유사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우선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비규정적인 보편성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아르케 없는 정치로, 곧 아무 말하는 존재자와 다른 아무 말하는 존재자 사이의 평등에 기초를 둔 것으로 나타나며, 발리바르에게는 인간=시민과 평등=자유라는 두 개의 등식으로 표현된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인간의 본성 같은 자연적 기초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생산양식 같은 정치 바깥의 사회적 구조에 근거를 둔 것도 아니다(물론 발리바르의 경우는 정치가 생산양식을 비롯한 물질적 구조들의해 규정되며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다른 보편성들과 구별되는 자신의 고유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민주주의적 보편성의 특징은 비규정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비규정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보편성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구체적이고 실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그저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것, 민주주의는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표현할 뿐이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이 나오는데, 이처럼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는 비규정적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완성된 원리나 제도를 지니고 있지 않고 그 특성상 갈등적인 과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신들을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자로 선언하고 그에 따른 권리들을 요구하는 주체들의 투쟁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나타나며, 그러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물질성을 획득하고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19세기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19세기 후반 여성들의 투쟁, 20세기의 이러저러한 국지적인 투쟁들 속에서 민주주의의 보편이 지속적으로 재발명된다고 주장한다.[이 점에 관해서는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의 용법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13(수정 2판) 및 La mésentente, 여러 곳 참조.] 발리바르 역시 여러 차례에 걸쳐 민주주의는 갈등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으며,[특히 󰡔우리, 유럽의 시민들?󰡕 4장과 12장 및 󰡔정치체에 대한 권리󰡕 중 「국민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와 「민주주의적 시민권인가 인민주권인가」 참조.] 최근에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현재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참조. 또한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진태원, 「최장집과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의 민주화의 두 방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편, 󰡔민족문화연구󰡕 56집, 2012 참조.]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은 또한 몇 가지 근본적인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차이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관계라는 문제에서 드러난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말하자면 공동체 없는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가 비규정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우리가 흔히 정치 공동체 내지 정치체라고 부르는 것과 배타적인 대립 관계에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를 치안으로 규정하면서, “치안은 온갖 종류의 재화들(biens)을 공급할 수 있으며, 어떤 치안은 다른 치안보다 무한하게 더 좋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치안의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J. Rancière, La mésentente, p. 54.]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가 “그 본질에서 볼 때, 부분들의 몫 내지 몫의 부재를 정의하는―일반적으로는 암묵적으로 남아 있는―법”[J. Rancière, La mésentente, p. 52.]을 가리키는 치안에 근거를 두는 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고유한 조직, 그것에 고유한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그러한 조직 내지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필자가 알기로 랑시에르는 지금까지 이 질문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사실 랑시에르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의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배타적으로 평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발리바르가 잘 지적한 바 있듯이 평등은 정의상 무제한적인 원리이다. “사실 평등은 제한될 수 없다. 어떤 X들(“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을 때, 평등이라는 술어는 누구에도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술어가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은 사실은 “우월한 이들”, “지배자들”, “특권을 지닌 이들” 등이기 때문이다. 권리의 평등의 향유는 두 명의 개인에서 출발하여 전체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퍼져나갈 수 없다. 이러한 향유는 무매개적으로 개인들의 보편성에 (동어반복적이지만, 이러한 향유와 관련된 X들의 보편성에) 관련되어야 한다.”[É. Balibar,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UF, 2012, p. 58.]

 

바로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에서 인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주체이며,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총합이나 인구 중 노동하는 계급도 아니다. 인민은 인구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관하여 대체 보충적인supplémentaire 부분으로, 이것은 공동체 전체를 셈해지지 않는 이들의 셈과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준다.”[J. Rancière, Aux bords du politique, p. 233~34;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16쪽. 번역은 수정했다. 특히 국역본 번역자인 양창렬은 supplémentaire를 “보충적인”으로 옮겼는데, 필자는 이를 데리다적인 의미에서 “대체 보충적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진태원, 「대체 보충, 자기면역, 기입: 랑시에르와 데리다의 민주주의론」, 2012년 한국프랑스철학회 가을발표회 발표문 참조.] 이러한 정의가 뜻하는 바 중 하나는 만약 어떤 정치체 내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정치체는 정의상 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동체 내에 평등하지 않은 인민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사실상 그 정의 자체 내에 만인의 평등을 함축할 수밖에 없는 인민 그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다시 발리바르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어떤 사회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사회, 곧 비록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 하더라도, 모종의 특수성에 의해, 모종의 배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이러한 사회, 이러한 공동체에서 ““모든 시민들”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도시의 시민들 중 누구는 시민이 아니어야 한다.”[É. Balibar, Citoyen sujet, p. 58.] 또한 “평등은 차이들을 보존하고 있음에도(평등은 가톨릭 신자들이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것, 흑인들이 백인들이라는 것, 여성들이 남성들이라는 것 또는 그 역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차이화될 수는 없다. 차이들은 평등 곁에 있지만, 평등의 실행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같은 책, p. 59.] 따라서 정치 공동체 또는 민주주의적 공동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공동체가 함축하는 배제 및 내적 차이들이라는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만, 랑시에르 식의 민주주의에서는 그것은 반민주주의적이라고 선언될 뿐,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랑시에르가 정치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적 투쟁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랑시에르 민주주의론의 강점 중 하나는 그러한 투쟁을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해방의 삼단논법이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인용자]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89쪽.] 이러한 삼단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따라서 해방의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 랑시에르는 법이라는 것을 사회적 불평등이나 계급적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만으로 치부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맞서 실제의 노동자들은 법에 근거하여 해방 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의 삼단논법이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헌법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법적 제도는 민주주의의 실천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치안을 전면적으로 대립시키고, 정치 공동체 일반을 치안으로 환원하는, 더 나아가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Fabrique, 2005, p. 9.]라고 간주하는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에서 볼 때, 어떻게 헌법이나 그것에 근거한 제도들이 민주주의 투쟁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모든 국가가 과두제 국가이며, 정치는 항상 국가 제도를 조절하는 치안의 논리를 위반하고 그것과 단절하는 데서 성립한다면, 하지만 동시에 정치는 치안과 분리할 수 없게 결부돼 있다면, “그 특성상 드문rare 것”[J. Rancière, La mésentente, p. 188.]인 정치는 일시적인 위반이나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다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발리바르는 이미 「평등자유명제」에서 󰡔권리선언󰡕의 언표, 곧 민주주의적 보편성의 언표는 그것에 고유한 비규정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매개들을 요구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형제애(또는 공동체)와 소유(또는 교류commerce)라는 두 가지 매개 및 그러한 매개들에 내포된 갈등, 곧 공동체를 둘러싼 국민 공동체와 인민 공동체의 대립, 그리고 소유를 둘러싼 자본 소유와 노동 소유의 변증법적 대립이 근대 정치의 공간을 규정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에 은폐되어 있는 또 다른 모순, 곧 지적 차이 및 성적 차이 같은 인간학적 차이들의 문제야말로 탈근대적 정치에 고유한 쟁점임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발리바르에게는 민주주의와 공동체, 또는 봉기와 헌정을 무매개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적합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문제이며, 헌정 질서 속에 어떻게 봉기의 흔적을 기입하고, 그러한 흔적에 입각하여 어떻게 헌정 질서를 개조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가 보기에 헌정은 봉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 봉기는 물질적 제도 속에서 구현되고 관철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 따라서 정치는 단지 제도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 내부로 국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자 사이의 긴장과 갈등, 또는 상호 견인 관계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입각할 경우에 우리는 제도적인 정치를 단순히 유사 파시즘적인 지배의 정치로 환원하는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예속화와 주체화의 내재적 관계를 정치체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사고할 수 있다.

 

모든 민주주의 헌정은 급진적인 보편적 해방의 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정체의 기원에는 이러한 봉기적 운동 내지 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은 필연적으로 유한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어떤 제도 속에서 물질화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모든 제도는 민주주의 운동의 급진적 보편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가 없다. 그 경우 제도 자체가 와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모든 민주주의 헌정은, 그것이 민주주의를 표방함에도 항상 모종의 배제를 낳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봉기의 운동과 헌정의 제도화 사이에는 이율배반적인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É. Balibar, “L'antinomie de la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참조. ]

 

하지만 이러한 이율배반의 관계가 봉기의 정치, 해방의 정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바로 이러한 이율배반 때문에 모든 헌정의 정치는 봉기의 정치를 통해 끊임없이 개조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헌정 제도로 구현된 민주주의 정치는 그것에 내재한 보수성으로 인해, 미국의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의 표현을 빌리자면, 탈-민주화de-democratization의 경향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Wendy Brown, “Neo-liberalism and the End of Liberal Democracy”, Theory & Event, vol. 7, no. 1, 2003.]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 및 초역사성을 옹호하고 이것에 근거해 봉기적 운동의 필요성을 배제하려는 이들(하버마스나 국내의 최장집 교수 및 백낙청 교수 같은 이들)이 때로 보수적인 주장을 제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봉기와 헌정, 운동과 제도 사이의 이율배반이 낳는 탈민주주의적 경향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민주화하려는 노력, 민주주의 헌정을 봉기적인 민주주의 운동에 의해 개조하고 변혁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구체적인 제도적 쇄신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정치체의 역사와 그것에 함축된 배제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보다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이 민주주의와 공동체, 봉기와 헌정, 운동과 제도 사이의 변증법에 관해 좀더 구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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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불화] 번역본에 실릴 또 다른 용어해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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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화(subjectivation)

 

 

랑시에르와 주체화의 문제

 

주체화는 현대 철학 및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개념 중 하나다. 주체화라는 개념은, 단어 자체가 함축하듯이 주체를 자연적으로 주어지거나 불변적인 본질을 갖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개념은 푸코가 그의 후기 저술들에서 처음 고안해냈으며, 그 이후 다양한 이론가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원용되고 변용되고 있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용어상의 혼동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푸코가 이 개념을 처음 제시했을 때 사용한 프랑스어는 ‘쉬브젝티바시옹’(subjectivation)이라는 단어였다. 그 이후 이 신조어가 다른 나라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이한 용어들로 옮겨지면서 꽤 불편한 혼란이 생겨났다. 특히 이 개념은 영어에서 상이한 몇 가지 용어로 옮겨지고 있다. 우선 이 개념은 ‘subjectification’이라는 말로 번역되곤 한다. 이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된 영어 단어 중 푸코의 개념에 가장 근접한 단어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코의 개념은 ‘subjectivization’이라는 말로 옮겨지기도 하는데, 󰡔불화󰡕(La mésentente)의 영역본인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에서 바로 이 용어를 subjectivation의 번역어로 쓰고 있다. 이는 랑시에르 자신이 subjectivation의 가장 적합한 영어 번역어로 이 단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개념은 원래의 프랑스어와 똑같은 철자로 옮겨지기도 한다. 가령 에티엔 발리바르는 직접 영어로 쓴 여러 편의 논문에서 subjectivation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가령 E. Balibar, “Subjection and Subjectivation”, in Joan Copjec ed., Supposing the Subject, Verso, 1994 참조. 따라서 ‘subjectification’과 ‘subjectivization’, ‘subjectivation’은 모두 푸코에서 유래하는 개념을 표현하는 상이한 단어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랑시에르는 주체화라는 개념을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놓고 있는 현대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푸코 사상의 영향 속에서 주체화라는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푸코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에서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푸코가 일차적으로 윤리적 문제설정에 따라 주체화 개념을 고안한 것에 비해 랑시에르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주체화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푸코가 주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통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서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주체화 양식을 계보학적 관점에서 추적한 것에 비해, 랑시에르는 고대 그리스ㆍ로마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평등의 논리 대 치안의 논리라는 대립 노선에 입각하여 주체화 개념을 사고하고 있다. 랑시에르에게 주체화 개념은 치안 논리와의 단절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라는 점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치안, 정치, 잘못

 

랑시에르의 주체화 개념은 한편으로 정치와 치안(police)의 구별(및 대립)에, 다른 한편으로 치안 질서의 중심에 존재하는 잘못(tort)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이나 영역은 사실은 엄밀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규정한다. 곧 그에 따르면 “집단들의 결집과 동의, 권력의 조직, 장소들 및 기능들의 분배, 이러한 분배에 대한 정당화 체계가 이루어지는 과정들 전체”(본서, 쪽)가 곧 치안이다. 그리고 치안의 본질은 공권력이나 법 체계 같은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의 짜임(configuration du sensible)이다.

 

치안은 무엇보다 행위 양식들과 존재 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 사이의 나눔을 정의하는 신체들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신체들이 그것들의 이름에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과제를 부여받도록 만든다. 이 질서는 볼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의 질서로서, 어떤 활동은 가시적인 것으로 다른 활동은 비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어떤 말은 담론에 속하는 것으로, 어떤 말은 소음에 속하는 것으로 알아듣게 만든다. 예컨대 전통적으로 노동의 장소를, 공적 영역이라 불리는 것에 고유한 보기 및 말하기 양식에 의해 규제되지 않는 사적 영역으로 만든 것이 치안의 법이다.(p. 52)(본서, 쪽)

 

이러한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랑시에르는 푸코에게 충실하면서도 그와 다르다. 그가 푸코에 충실한 이유는 일종의 예속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을 국가의 공권력이나 법 등과 같은 공적 영역 내지 상부구조에서 찾지 않고, 신체들의 질서 및 그것들을 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푸코가 규율권력을 법이나 제도를 지탱하고 있는 은밀한 하부구조로 간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다. 더 나아가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Pierre Dardot &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Paris: La Découverte, 2009, p. 5)을 규정하는 새로운 삶의 규범인 것과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도 치안은 우리의 “행위 양식들과 존재양식들 및 말하기 양식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푸코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 따라 치안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그가 치안을 정치와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랑시에르에게 정치란

 

[치안이라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데, 이러한 짜임에서는 부분들 및 부분들의 몫 또는 몫의 부재가 그 짜임에서 아무런 자리도 갖지 못한 어떤 전제, 곧 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전제에 의해 정의된다. 이러한 단절은 부분들과 몫들, 몫들의 부재가 정의되는 공간을 다시 짜는 일련의 행위들에 의해 명시된다. 정치적 활동은 어떤 신체를 그것에 배정된 장소로부터 이동시키거나 그 장소의 용도를 변경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보일 만한 장소를 갖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고,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이다.(본서, 쪽)

 

랑시에르는 정치를 치안을 규정하는 감각적 짜임과 “단절”하는 것이며, “오직 소음만 일어났던 곳에서 담론이 들리게 하고, 소음으로만 들렸던 것을 담론으로 알아듣게 만드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치안과 정치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같은 책, p. 55)(본서, 쪽)에 따라 작동한다. 푸코에게는 랑시에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치안과 정치를 전혀 상이한 논리가 지배하는 두 가지 활동이라는 관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푸코에게 정치가 부재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와 치안은 어떤 점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잘못”(tort)이라는 개념(영어로는 wrong으로 번역될 수 있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 개념을 리오타르에게서 빌려오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재규정한다. 리오타르에게 tort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과 같이 합리적인 담론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절대적인 잘못이나 피해를 뜻한다. 이것은 피해를 가한 쪽과 피해를 당한 쪽 양자가 서로 합의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평가 기준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일체의 토론이나 손해 배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치적 행위의 범위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Jean-François Lyotard, Le différend, Paris: Minuit, 1984 참조) 반면 랑시에르는 이것을 정치에 구성적인 잘못으로 파악하는데,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의 기초를 뒤집기 위한 목표를 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 정치철학은 시초 이래로 아르케(arkhe)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의 질서를 모색했다. 그리스어로 “시초”와 더불어 “원인”이나 “근거”를 뜻하는 아르케는 정치 공동체가 어떤 합당한 근거나 원리에 따라 질서를 이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 공동체의 아르케를 추구한 것은 두 가지 대립항을 피하기 위해서다. 하나는 공동체가 단순한 산술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솔론 이전의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작동하던 이러한 산술의 원리에 따르면 공동체는 더 많은 부를 지닌 사람이 적은 부를 지닌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심지어 채무를 지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도 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것은 정치 공동체를 질서 짓기 위한 원리로 적절치 않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를 기초 짓고 있는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음, 원리 없음의 사태를 피하고자 했다(an-arkhe는 아나키(anarchy)의 어원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들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정치적 문제에 관여할 수 있고,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곤 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구두수선공이나 대장장이가 성벽 쌓는 일이나 배 만드는 일에 대해 전문가들과 똑같은 권리로 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무질서하고 잘못된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기하학적 비율에 따라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돌아갈 몫을 정함으로써 공동체의 아르케를 세우고자 했다. 이것에 따르면 부유한 이들은 부에 따른 합당한 몫을 받고, 유덕한 귀족들은 그들의 고귀한 혈통과 유덕함에 따른 몫을 받으며, 재산도 혈통도 지니고 있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자유 시민이라는 몫을 지닌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공동체에 고유한 아르케를 설정하려는 것이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정치철학”을 특징짓는 논리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정치철학”은 민주주의, 곧 정치 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르케의 질서, 곧 기하학적인 몫의 분배 질서는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 허울뿐인 자유 이외에는 아무런 정치의 몫도 남겨두지 않는 것이며, 몫 없는 이들의 배제를 자연적인/본성적인 정치 질서로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추첨제야말로 민주주의에 고유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참조. 또한 랑시에르와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하지만 역사적인 사료 검토와 경험적인 논증에서는 훨씬 더 정교하게 추첨제와 민주주의의 긴밀한 연관성을 고찰하고 있는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곽준혁 옮김, 후마니타스, 2004도 참조할 수 있다. 아울러 국내의 연구로는 이지문,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이담북스, 2012도 참조).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추구하는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며,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지닌 사람에게만 그러한 자격이 부여된다. 따라서 아르케의 원리에 따르면 아무런 자격이나 능력도 없이 아무나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아르케 질서에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일이다. 반면 랑시에르에 따르면 아르케의 원리야말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데모스(demos), 곧 인민을 몫 없는 이들로 배제함으로써 정치, 곧 민주주의에게 “잘못”을 가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이다.

 

주체화

 

따라서 아르케의 질서와 민주주의, 또는 치안과 정치는 “잘못”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해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인민으로서의 데모스가 이러한 잘못을 표현하는 집단이었다면, 근대에는 몫 없는 이들로서의 프롤레타리아나 여성 등이 이러한 의미의 잘못의 계급, 잘못의 집단이라고 본다. 아르케에 근거를 둔 치안은 이러한 잘못의 계급을 배제하는 반면, 정치 또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잘못의 계급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란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하지만 치안 질서 속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이러한 잘못이 잘못으로 드러나고, 몫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몫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동체의 치안적인 구성 속에 주어져 있지 않은 어떤 다자(多者, multiple), 그것을 세는 것은 치안의 논리와 모순되는 것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다자를 생산한다.”(같은 책, p. 60)(본서, 쪽)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는 일차적으로 정체화(identification)의 논리와 대립한다.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자기(soi)가 아니라, 하나의 자기와 타자(autre)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140쪽. 번역은 수정) 이러한 정의는 주체화와 정체화를 세 가지 측면에서 대비하고 있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치안 논리가 고착시키고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랑시에르, 같은 책, 143쪽)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이다. 이것은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단순히 적대적인 타자를 부정하고 배제하고 제압하는 절멸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같은 곳) 데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랑시에르적인 정치적 주체화에서 중요한 쟁점은 이처럼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 어떻게 대화나 합의의 구성과 다른지 보여주는 일이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같은 곳)

 

랑시에르는 1832년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에 대한 재판의 과정을 주체화와 정체화의 대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제시한다.

 

직업을 말하라는 재판장의 요구에 대해 그는 간단히 답변한다. “프롤레타리아.” 이 답변에 대해 재판장은 곧바로 “그건 직업이 아니잖아”라고 반박하지만, 즉각 다음과 같은 피고의 응수를 듣게 된다. “그것은 노동으로 연명하고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3천만 프랑스인들의 직업이오.” 그러자 재판장은 서기에게 이 새로운 ‘직업’을 기록하도록 지시한다. 이 두 개의 응답으로 정치와 치안 사이의 갈등을 집약해볼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모든 것은 직업(profession)이라는 같은 단어의 의미[직업, 고백/선언]를 이중으로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다. 치안의 논리를 구현하는 검사에게 직업은 일자리를 의미한다. 곧 그것은 어떤 신체를 그의 자리 및 그의 기능에 따라 위치시키는 활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직업도 가리키지 않으며, 기껏해야 비참한 육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막연하게 정의된 어떤 처지를 가리키는데, 어떤 측면에서 보든지 이것은 피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혁명적 정치의 관점에서 블랑키는 같은 단어에 상이한 의미를 부여한다. 직업/선언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고백, 선언이다. 다만 이러한 집단은 아주 특수한 본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블랑키가 자신이 속해 있다고 고백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결코 어떤 사회 집단과 동일시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육체 노동자도 노동자 계급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을 셈해지지 않은 이들로 셈하는 선언 자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셈해지지 않은 이들의 계급이다.(La mésentente, p. 63)(본서, 쪽)

 

랑시에르가 블랑키의 재판의 사례에서 정체화와 주체화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정체화란, 각각의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러한 정체성에 걸맞은 행위 양식, 사고 양식, 존재 양식을 할당하는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란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의 하층 계급을 뜻하며, 그런 한에서 블랑키처럼 국민의회 의원의 자식이자 지식인인 사람은 프롤레타리아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치안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명칭 자체는 결코 직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블랑키가 자신의 직업이 “프롤레타리아”라고 고백/선언하고, 그것의 의미를 “노동으로 연명하고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3천만 프랑스인들의 직업”으로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치안의 질서에서 배제된 몫 없는 이들이 지닌 공통의 상황, 또는 어떤 연대성이다. 다시 말해 노동으로 연명하고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은 사회학적으로 그들을 규정하는 이러저러한 차이(곧 정체성에 따른 차이)에 앞서, 치안의 질서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몫 없는 이들로서 배제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정체화의 논리에 따르면 이질적인 개인들이자 집단들이지만, 주체화의 관점에서 보면 동질적인 주체들이며, 자신의 직업을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한 블랑키의 고백/선언에 담겨 있는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주체화는 일차적으로 어떤 권력의 획득이나 법적 권리의 취득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을 셈해지지 않은 이들로 셈하는 선언 자체”(같은 책, p. 62)(본서, 쪽)를 뜻하며, “일련의 언표행위의 사례 및 능력을 생산하는 것”(같은 책, p. 59)(본서, 쪽)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랑시에르는 데카르트의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ego sum, ego existo)를 복수 인칭으로 표현한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실존한다”(nos summus, nos exsitimus)를 정치적 주체화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정식으로 간주한다. 󰡔성찰󰡕에 나오는 데카르트의 이 명제는 잘 알려진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보다 훨씬 더 수행문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명제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명제에서는 생각한다는 사태에서, 그 사태에 함축된 존재한다는 사태로의 추론이나 수행성이 문제가 되고 있는 반면, 전자의 명제에서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언표 행위에 수반되는 수행성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명제에서는 그것을 언표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언표 주체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몫 없는 이들이 공동으로 자신들을 “우리”라고 언표하는 행위 자체는 이미 그들이 이런저런 사회적 정체성의 차이들을 넘어선 공동의 주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표현해준다.

 

둘째, 랑시에르의 주체화에서 법은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랑시에르가 평등의 삼단논법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이 점이 잘 나타난다. 랑시에르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고용주들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한 주장들을 삼단논법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바 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을 위배하고 있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110쪽).

 

이러한 삼단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따라서 평등의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 랑시에르는 법이라는 것을 사회적 불평등이나 계급적 착취를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만으로 치부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맞서 실제의 노동자들은 법에 근거하여 해방 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대전제와 소전제 간의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법-정치적 문장이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문장이 주장하는 평등은 불평등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 거기에 있을 뿐인 외양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노동자들의 추론이 선택한 길이 아니다. ... 평등을 말하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우선 평등이 그 자체를 표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엔가 평등이 있다. 이것은 말해졌고, 씌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은 바로 거기에 바탕을 둘 수 있으며,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같은 책, 111~112쪽)

 

이 점에서 푸코와 랑시에르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푸코에게 법은 항상 권력이나 통치성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으며, 권력이나 통치성의 실제 작용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은폐하거나 가리는 것으로 제시될 뿐, 그것 자체가 정치나 주체화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반면 랑시에르에게 법은, 적어도 일부분의 경우 정치적 주체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또한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 정치 사상의 중요한 한 가지 긴장, 심지어 더 나아가 모순이 나타난다. 랑시에르는 한편으로 아르케의 논리와 민주주의의 논리, 치안과 민주주의를 확연하게 대립시킨다. 그에게 양자는 결코 화해하거나 섞일 수 없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 논리이자 두 가지 실천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한편으로 이 양자는 항상 결부돼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가 치안의 논리와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를 작동시킨다 해도 정치는 항상 치안과 결부돼 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양자가 결부돼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는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들이나 질문들을 갖고 있지 않다. 정치의 유일한 원리인 평등은 정치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만 본다면 정치적인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정치가 평등에 대해 하는 모든 것은, 평등에 대해 소송 사건들(cas)이라는 형태로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계쟁이라는 형태 아래 치안 질서의 중심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것이다. 어떤 행동의 정치적 성격을 이루는 것은 그것의 대상이나 그러한 행동이 실행되는 장소가 아니라, 오직 그 행동의 형식, 곧 분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의 제도, 계쟁의 제도 속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형식이다. 정치는 도처에서 치안과 마주친다. 이러한 마주침을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La mésentente, p. 55)(본서, 쪽)

 

정치는 치안과 전적으로 이질적인 논리에 따라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정치는 치안과 항상 결부돼 있다. 이것이 수수께끼, 심지어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항상 함께 결부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랑시에르의 주장과 달리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그 이유를 “정치는 자신에게 고유한 대상들이나 질문들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하는 모든 일은 “계쟁이라는 형태 아래 치안 질서의 중심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것 ... 오직 그 행동의 형식, 분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의 제도, 계쟁의 제도 속에 평등의 입증을 기입해 넣는 형식”이다. 이러한 설명에 전제돼 있는 것은, 정치의 논리와 치안의 논리가 마주치는 공통의 장소, 공통의 무대라는 생각이다. 랑시에르는 한때 이러한 공통의 장소를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의 장소는 어떤 것일까? 위의 인용문에서 그 장소는 “치안 질서[에 의해 지배받는 공동체]”나 “분할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공동체의 제도”다. 또는 우리가 흔히 국가라고 부르는 정치 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고유한 대상도 장소도 질문도 갖고 있지 않은 정치는 항상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공동체 제도를 전제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랑시에르의 관점에 따르면 공동체의 몫들의 분배를 규정하는 아르케의 논리, 치안의 논리에 의해 항상 지배받는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랑시에르의 정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적인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치안 공동체, 아르케 공동체가 존재해야만 한다. 정치는 고유한 대상도 장소도 질문도 갖고 있 지 않으며, 오직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또는 역설적인 귀결이 생겨나는 이유는 랑시에르가 정치와 치안을 전면적으로 대립시키고, “모든 국가는 과두제 국가”(J.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Fabrique, 2005, p. 9)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국가가 과두제 국가이며, 정치는 항상 국가 제도를 조절하는 치안의 논리를 위반하고 그것과 단절하는 데서 성립한다면, 하지만 동시에 정치는 치안과 분리할 수 없게 결부돼 있다면, “그 특성상 드문(rare) 것”(La mésentente, p. 188)(본서, 쪽)인 정치는 일시적인 위반이나 스캔들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랑시에르의 저작에는 국가나 정치 공동체에 관한 다른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본 것처럼 평등의 삼단논법에 대한 매우 탁월한 설명과 사례들이 몇몇 제시되어 있다. 이 사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국가나 법을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 도구이자 계급 지배의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달리, 법이나 국가 제도가 어떻게 노동자, 여성 및 기타 소수 집단들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인가를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법이나 국가 제도는 단순한 지배의 장치, 아르케의 논리가 군림하는 장소가 아니라, 평등의 논리가 기입되고 법제화되고 물질적인 힘으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법이나 국가 제도는 지배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해방 운동을 위한 핵심적인 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의 정치사상에서는 한편으로 정치와 치안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표현되는 해방 운동과, 다른 한편으로 평등의 삼단논법에서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는 정치 제도 사이에 뚜렷한 긴장 내지 모순 관계가 성립할 뿐, 양자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의 가능성이 긍정되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 점이 랑시에르와 발리바르(또는 데리다) 정치 사상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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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5-03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누가 주체인가" 그것을 아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주체로 부르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째서 그렇게 부르는가를 따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따라 그들을 그렇게 부르고 서술하는가가 문제인 거죠.

본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죠.

그것도 "이데올로기"에 따라 자기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본질이라고 주장한다는 거죠.


발마스 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생각해 봤는데 발마스 님은 이른바 "이론적인 정부주의 또는 이론적인 국가주의"를 추구하시는 듯 합니다.

단순무식하게 말하자면 "대의제+이른바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을 추구하시는 듯 합니다.

그게 발마스 님이 생각하는 본질로 보입니다.

발마스 님의 이 입장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국가에 대한 심원한 사유가 필요한 듯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자꾸 헤겔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군요.

쾅! 2013-05-03 19:5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미스터 미남에게 드리는 말.

역사의 최종 목적지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우파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좌파로 분류되면서도 그렇게 보는 사람 많죠.

그것과 상관없이 비판한 거죠. 역사에 목적지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것.

그리고 역사에 목적지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관념론이고 유럽중심주의적인 식민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거죠.

그런 소리가 아니라 홉스봄이 우파이면서 좌파인 척 하는 사람이고, 그런 면에서 후쿠야마라는 우파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전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한 번 적어 두죠.

"나는 홉스봄을 싫어한다.

홉스봄은 알려진 것과 달리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다. 이 사람 글을 보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그는 식민주의자다)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경멸하고 게이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매우 혐오하고 흑인운동을 굉장히 무시하는 철저히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백인 남성 마르크스주의자가 홉스봄이다.

너무 그런 거는 모르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른바 진보 또는 이른바 보수 학자 전부 다 홉스봄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쨌든 홉스봄은 그런 사람이다. 책을 면밀히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고 파악이 되는데 왜들 그렇게 홉스봄이라면 늘 난리들을 부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헤겔도 아프리카를 "동물의 왕국"이나 다를 바 없이 무시했지요.

지젝 또는 지제크는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더군요.

철학적인 지식이 보편적인 형태를 취하더라도 그 지식이 생산되는 공간은 보편적일 수 없습니다.

그 지식들의 로케이션을 인식해야 재해석이 가능하고 기존의 유럽 이론들의 자가당착과 모순을 포함해서 이론적 풍부함을 사유하고 비로소 식민주의에서 벗어나는 이론이나 지식의 생산이 가능해진다고 봅니다.


행인 2013-10-0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화 출간이 언제쯤 되나요??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는데 궁금합니다~

balmas 2013-10-04 02:44   좋아요 0 | URL
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올해 안으로는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연말쯤에는 책을 보실 수 있을 듯합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