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랑시에르의 [불화] 국역본에 수록될 용어해설 몇 개를 올립니다.

 

오늘은 우선 책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불화"라는 개념에 대한 용어해설을 올립니다.

 

[불화] 번역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분들이 많을텐데 출간이 늦어져서 죄송하네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곧 책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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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mésentente)

 

 

불화는 이 책의 제목이면서 랑시에르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가 ‘불화’라고 옮긴 메장탕트라는 프랑스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듣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프랑스어에서 ‘앙탕드르’(entendre)라는 동사는 ‘듣다’와 ‘이해하다’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으며, 명사형인 ‘앙탕트’(entente) 역시 ‘듣기’와 ‘이해하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명사의 부정형인 메장탕트는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메장탕트는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부간의 갈등’을 말할 때 ‘la mésentente entre belle-mère et belle-fille’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의 갈등’을 말할 때도 ‘la mésentente entre salarié et employeur’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메장탕트라는 프랑스어를 다른 나라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하다.

 

왜 랑시에르는 자신의 주저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이 단어를 자신의 정치철학의 근간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은 랑시에르의 정치철학, 특히 그의 주저인 󰡔불화󰡕에 대한 전체적인 재구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몇 가지 핵심 논점만 간추려본다면 다음과 같이 답변해볼 수 있다.

 

불화의 정의

 

우선 랑시에르는 불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되는 일정한 언어 상황으로 규정한다. “대화자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 불화는 희다고 말하는 사람과 검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희다고 말하는 사람과 희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하지만 같은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또는 상대방이 흼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다.”(본서, 쪽)

쉬운 예를 들자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누구나 사용하고 누구나 원용하는, 말 그대로 보편적인 단어 내지 이념이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가 되었다고 해서 이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조선일보가 이해하는, 정규직 노동자가 이해하는, 이주노동자가 이해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같은 말임에도 이해하는 방식, 태도, 내용이 다른 것이다.

불화에 대한 이러한 정의로부터 불화와 다른 몇 가지 언어 상황과의 차이점이 도출된다. 우선 불화는 몰인식(méconnaissance)이 아니다. 몰인식이라는 개념은 대화의 상대방 중 한 편이나 양편 모두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단순히 한 편이나 양편 모두 무지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 경우 몰인식은 보충적인 지식을 통해 쉽게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몰인식은 구조적인 미망(illusion) 때문에 생겨날 수도 있다. 가령 알튀세르는 이러한 구조적 미망을 표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표상/재현/상연하는’(se représentent)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다.”(L.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UF, 1995, p. 297; 루이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109쪽. 번역은 수정)

 

이 정의에서 현실적인 실존조건이란 계급적 조건을 뜻한다.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에서 모든 인간,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인간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떤 계급에 속한 사람은 어떤 계급의 성원으로 나타나지 않고(재벌, 노동자, 농민, 지식인 ...)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나타난다. 곧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 성원으로서 x는 추상적인 개인 x로서, 계급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러한 조건에 앞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개인으로서 상상적으로 표상/재현/상연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은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환상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는 법적 체계를 통해 모든 사람을 법적 주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도적 차원에서 그렇게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사회에서 각 개인은 계급이라는 존재조건에 따라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계급적 조건에 선행하는 추상적인 개인 x로 나타나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제도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상상성은 개인들이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대해 구조적 몰인식을 지닌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구조적 몰인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몰인식보다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불화의 의미에 더 가깝지만, 그래도 역시 불화와는 의미가 다르다. 뒤에서 좀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랑시에르의 불화 개념에는 이러한 구조적 몰인식을 문제 삼기 및 그것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불화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오해는 단어나 개념이 지닌 불명료함이나 애매성 때문에 생겨난다. 따라서 논리 실증주의 이래 분석철학의 한 흐름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철학의 과제는 언어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불화는 단어의 뜻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령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불화의 단어라면, 그것이 내포하는 갈등은 그 뜻을 분명하게 정의함으로써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둘러싼 불화가 그 단어를 발화하는 주체들의 자격 및 그들 사이의 관계를 갈등의 쟁점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불화의 구조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불화의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는 “내 말 알아들었어?”(Vous m'avez compris?)라는 일상적인 문장을 예로 들어 불화의 구조를 제시한다. 이 문장은 겉보기에는 의문문 같지만, 사실은 다음과 같은 단언을 가리킨다. “너희들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고, 이해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 더욱이 때로는 다음과 같은 의미도 함축한다. “너희들은 알아들을 만한 능력도 없어. 그러니까 고분고분히 복종해.”

 

따라서 이 문장에 담긴 ‘이해하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상이한 뜻을 담고 있다. 하나는 어떤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명령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대화의 당사자들이 동등한 이해의 능력을 공유하고 있고 서로 대화를 나눌 만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는 대화의 상대방이 서로 불평등한 지위에 있으며, 이러한 불평등은 대화의 양 편이 동등한 이해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대화의 당사자들 사이에 인간학적 위계, 정치적 위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문장에 대해 그렇다면 대화의 상대방은 어떻게 답변할까? 다수의 방식이 가능하다. 랑시에르는 우선 다음과 같이 일차적인 수준의 답변을 제시한다. ““우리는 당신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당신을 이해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우리는 당신 명령을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과 함께 동일한 이해의 권력/힘을 나눠 갖고 있습니다.””(본서, 쪽)

 

그런데 이러한 일차 수준의 답변은 아직 불명료한 상태로 남아 있다. 랑시에르는 이차 수준의 답변을 통해 이러한 불명료성을 좀더 명료하게 만든다. 이 경우 답변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우리는 당신이 “내 말 알아들었어?”라고 말할 때 당신이 말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내 말 알아들었어?”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너희들은 나를 이해할 필요가 없어. 너희들은 나를 이해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 등등”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본서, 쪽)

 

이차 수준의 답변은 일차 수준의 답변에서 ‘당신 명령을 이해하기’로 표현된 것을 좀더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그것은 “내 말 알아들었어?”라는 문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 문장이 명령의 문장이라는 것, 따라서 문장을 발화하는 사람과 문장을 수신하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을 함축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임을 말해준다. 곧 문장의 발화자가 가정한 것과 달리 문장의 수신자는 이해 능력에서 불평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발화자의 숨은 의도까지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차 수준의 답변, 이차 수준의 이해는 명료하게 제시된 것일까? 랑시에르는 여기에도 여전히 두 가지 상이한 이해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언어를 부과하기 위해 소통의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명령의 언어를 공통의 언어로 설정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언어와 소통의 모든 보편자란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 권력의 관용어들만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관용어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본서, 쪽) 이러한 이해 방식은 이해의 문제, 인식의 문제를 권력 관계로 파악하는 관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모든 이성은 강자의 이성이고, 모든 합리성은 권력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이성이나 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 말 알아들었어?”라는 문장을 발화하는 상대방에 대한 최선의 답변은 그것과 구별되고 그것에 대립할 수 있는 독자적인 권력의 관용어를 구성하는 일이다.

 

반면 두 번째 방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두 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우리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려 한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명령하는 이들과 복종하는 이들 사이에서 세계를 나누기 위해 이렇게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와 당신]에게 공통적인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비록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당신이 공통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본서, 쪽)

 

민주주의적 인민의 이해 방식이고, 또한 랑시에르 자신의 이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번째 이해 방식은, 첫 번째 방식과 달리 보편자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으며, 대화의 두 당사자 사이에 공동의 세계, 공동의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공동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보편자의 존재자를 전제한다고 해서, 랑시에르가 하버마스처럼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하버마스 식의 합리성 모델은 이미 동등한 대화의 상대방이 구성되어 있고, 이들 사이에 합리적인 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은 랑시에르가 문제 삼으려고 하는 불화의 문제를 회피한다. 왜냐하면 랑시에르가 말하는 불화는 똑같은 단어를 말하는 두 대화 상대방이 서로가 말하는 그 단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불가능성은, 두 상대방이 동등한 대화 상대방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갈등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불화의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불화의 사례

 

랑시에르는 󰡔불화󰡕를 비롯한 정치철학 저작들에서 불화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사례들이다.

 

첫 번째 사례는 기원전 470여년 무렵에 일어난 고대 로마 평민들의 반란 사건이다. 고대 전승을 통해 희미하게 전해지는 이 사건을, 랑시에르는 19세기 프랑스 사상가였던 피에르-시몽 발랑슈(Pierre-Simon Ballanche)가 재구성한 이야기를 통해 불화의 사례로 복원한다. 외부의 적들과 전쟁을 벌이던 로마의 평민들은 자신들의 개혁 요구를 귀족들이 거부하자, 전쟁을 중단하고 로마 바깥에 있던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올라간다. 외부의 적들이 침입하는 것을 두려워한 귀족들은 협상 대표자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를 파견하여 평민들과 협상을 벌인다. 아그리파는 평민들에게 위장에 관한 유명한 우화를 들려준다. 자신들은 힘들게 일하는데 편하게 놀고 먹는 위(胃)를 골탕먹이기 위해 사지(四肢)가 힘을 합쳐 태업을 벌이지만, 위에 음식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신들이 전혀 힘을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사지는 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는 요지의 이 우화를 통해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평민들은 로마로 복귀한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발랑슈가 가상으로 구성한 원로원들 사이의 대화에 주목한다. 이 대화에서 원로원들은 아그리파가 우화를 통해 평민들을 설득하려 했다는 사실에 큰 노여움을 표시한다. “어찌 메네니우스가 “그들도 우리처럼 말을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입이 얼어붙기라도 했는가, 눈이 멀었는가, 아니면 귀가 먹었는가? 또는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 그는 어찌해서 그들에게, 그들은 덧없는 소리이고 일종의 울음소리이며 지능의 명시적 표현이 아니라 욕구의 기호에 불과한, 일시적인 말을 가졌을 뿐이라고 답변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은 과거에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하게 될 영원한 말을 갖고 있지 못하노라고.” (본서, 쪽)

 

원로원의 귀족들이 보기에 평민들은 진정한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말할 능력도 지니고 있지 못한 존재이며, 그들의 말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울음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아그리파가 우화를 통해 평민들을 설득하려 했다는 것은, 평민들 역시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들과 동등하게 이성과 이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귀족들에게는 어불성설과 다름없는 것이다.

 

반면 평민들은 단순히 무력 투쟁을 통해 귀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협상 대표인 아그리파와의 대화를 통해 귀족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 그러한 입장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이 귀족들과 동등한 이해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로마라는 정치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임을 입증한 것이다. “요컨대 발랑슈의 언어에 따르면, 그들은 전에는 ‘유한한 생명체’(mortels)에 불과했지만 이제 ‘인간’이 되었다. 곧 단어들을 통해 집합적인 운명에 참여하는 존재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약속을 하고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 된 것이다.”(본서, 쪽)

 

두 번째 사례는 19세기 공장주들에 맞서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에 관한 사례다. 평민들을 똑같은 인간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고대 로마의 귀족들과 달리 19세기의 공장주들은 프롤레타리아를 말하는 존재자들로 인정하며, 인간들로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말한다는 사실 그들이 노동한다는 사실 사이에 무언가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공통 언어를 함께 나누어 갖는 말하는 존재자와, 일정한 일을 실행하는, 곧 공장에 고용돼 있거나 제조업자의 계산을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를 통합할 수 있는, 두 개의 동일성 사이의 중간항을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임금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가 받는 몫이 공동체 전체의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공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보지 못했다.”(본서, 쪽)

 

따라서 19세기 노동자들의 파업은, 노동자들이 공장주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지닌 말하는 존재자들, 곧 동등한 인간이며, 공장에서의 노동에 관한 일은 이러한 인간들의 공동의 문제, 공적인 논의사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쟁점으로 삼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성적인 말하는 존재자들인 한에서 파업을 벌이는 것이며, 노동을 중단하게 만드는 행위는 소음이나 취약한 상황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이 아니라 로고스를 표현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양반들은 우리를 경멸적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정부 당국에 우리를 박해하도록 청원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폭동을 일으킨다고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깜둥이라도 된단 말인가? 폭동이라니! 우리는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우리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없애기 위해, 우리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뭉쳤는데, 폭동이라니! 사실 폭동이라는 이 단어에는 무언가 파렴치한 것이 존재한다. 이 단어는 우리가 내린 결정을 정당화해줄 뿐이다.”(본서, 쪽)

 

노동자들의 주장은 공장주들과 로마 귀족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의 논리를 보여준다. 공장주들과 귀족들은 외관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상대방이 자격 있는 대화의 당사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평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이성을 지니고 있고 합리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제시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 못 되기 때문이다. 평민들이나 노동자들의 명령의 대상이며, 그들이 이 명령을 어기는 것은 반역이나 폭력, 폭동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마땅히 진압이나 처벌 같은 응답만이 제시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로마의 평민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대방의 논리, 곧 한편으로 귀족들/공장주들과 다른 한편으로 평민들/노동자들은 전혀 상이한 인간학적 질서에 속해 있는 존재자들이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공통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무력이나 폭력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공통의 세계를 거부하는 귀족들/공장주들의 논리가 부당하고 기만적이라는 점을 논증하고, 이러한 논증을 통해 그러한 공통의 세계를 실현하려고 시도한다.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들이다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세 번째 사례는 프랑스의 68혁명 때 제기된 구호다. 68혁명 초기에 시위대는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들이다”라는 구호를 제기한 바 있다. 이 구호는 두 가지 이유에서 제기되었다. 첫째, 이것은 당시 학생 시위대를 주도하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endit)가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좌파 학생운동 지도자 중 절반 가량이 유대계였으며, 특히 트로츠키 그룹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의 정치국원 12명 중 11명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Paul Berman, A Tale of Two Utopias, W.W. Norton & Company, 1996 참조) 당시 우파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공산당까지 콘-벤디트의 독일 국적을 문제 삼으면서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시빗거리로 만들려고 했다. 둘째, 더 나아가 이 구호는 2차 대전 당시 몰살당한 독일 유대인들에 대한 암묵적 준거도 포함하고 있었다.

 

랑시에르가 이 구호를 불화의 중요한 사례로 간주하는 것은 여기에서도 역시 정치의 가능성으로서 불화의 가능성이 문제가 되며, 특히 이 사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불화의 가능성에 대한 부인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들이다”라는 구호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우선 이 구호의 의의는 공인된 정치의 무대, 곧 기성의 정치 질서를 부당하게 침탈하는 학생운동을 고발하기 위해 학생운동의 적들이 사용한 비난의 수사법을 반대로 사용하여 그것을 정치적 주체화의 양식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이들은, 학생운동이 독일 출신의 아나키스트들 및 부르주아 부모를 둔 무책임한 소수의 학생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려고 했다. 곧 이들은 학생들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하지 않으며, 노동자와 빈민 계급을 대변하는 세력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위를 조기에 무력화하려고 시도하면서 권력자들이 내세운 수사법의 기초에는 정체성의 논리가 존재했다. 프랑스인은 프랑스인이고 독일인은 독일인이며, 노동자 계급 출신의 학생의 이익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학생만이 대변할 수 있고, 부르주아 계급의 부모를 둔 학생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따를 수밖에 없으며, 유대인은 영원히 유대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모두 독일 유대인들이다”라는 구호는 이러한 정체성의 논리를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로 전환시킨다. 랑시에르의 표현에 따르면 정체화(identification)는 본질적으로 치안의 논리인 반면, 주체화(subjectivation)는 해방의 논리, 곧 정치의 논리다. 정체화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들에게 그들에게 고유한 정체성과 몫을 분배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귀족은 귀족이고, 평민은 평민이며, 노동자는 노동자다. 이렇게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부분들 사이에 공통의 몫, 공통의 로고스, 공통의 활동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로마의 원로원 귀족들은 귀족이 평민과 협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19세기 파리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부당한 것으로 비난했다. 반면 주체화 과정이란 “하나의 자기(soi)가 아니라 하나의 자기와 타자 사이의 관계인 하나를 형성하는 것이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140쪽. 강조는 랑시에르가 한 것이며, 번역은 수정했다.)

 

랑시에르는 19세기 프랑스의 급진적인 정치가였던 오귀스트 블랑키가 사용했던 ‘프롤레타리아’라는 명칭을 이러한 주체화 과정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블랑키는 1832년 열린 재판에서 검사가 그의 직업을 묻자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가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고 반박하자,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라고 답변한다. 여기서 검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치안의 논리로서 정체화의 논리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블랑키의 대답은 엉뚱한 대답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의 명칭이 아닐뿐더러, 블랑키 자신이 노동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블랑키는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인 정체성을 지닌 어떤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셈-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쫒긴 자의 이름”이다. 따라서 그것은 “천민들”(parias)이 아니라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이들, 따라서 그 질서의 잠재적인 소멸인 이들(마르크스가 말했던 모든 계급의 소멸인 계급)”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화 과정은 “탈정체화 또는 탈계급화/탈분류화(déclassification) 과정”(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140-41쪽)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화의 제거로서 합의 민주주의

 

하지만 오늘날 합의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이러한 종류의 주체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선 이 구호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구호를 발화했던 사람들은 실제로는 독일인들이 아니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유대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68혁명 이후에는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말하기 위해 자신들 스스로 발언하는 현실적 집단들의 요구만이 정당한 것이라는 점이 받아들여졌다. 이제부터는 누구도, 그가 실제로 그들이 아닌 한, 그가 그들이 될 수 있는 태생적인 자격과 사회적 경험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이거나 흑인, 유대인 또는 여성이라고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됐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6장)(본서, 쪽)

 

더 나아가 이 구호는 오만하고 불경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구호의 발화자들은 자신들이 독일계 유대인들을 대변한다고 자처하고 있지만, 오늘날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직접적으로 인류에 반한 범죄의 피해자의 정체성을 의미하며, 이러한 범죄는 누구도 감히 불경하게 옹호할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체성은 더 이상 정치적 주체화를 위해 사용될 수 없으며, 이러한 주체화를 중단시키는 절대적 피해자의 이름이 되었다. 불화의 주체는 금지의 이름이 되었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6장)(본서, 쪽)

 

이렇게 되면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는 합의 민주주의 또는 포스트민주주의가 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합의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내지 전체주의 몰락 이후의 민주주의,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혁명 및 운동 이후의 민주주의다(최장집 교수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 및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선언한 바 있다. 이러한 선언은 그 이후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으며, 그것에 공명하듯 민주주의의 승리에 관한 예찬이 도처에서 울려 퍼진 바 있다. 민주주의의 내적 논리에서 보면 이것은 인민의 특정한 모습의 제거에서 생겨난 결과로 간주된다. 곧 루소가 주창한 바 있는 인민주권의 관념이나, 생산 속에서 정치를 지양하는 인민의 인민으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관념을 제거하고, 그 대신 “진정한 정치 계약, 곧 모든 사람이 공존할 수 있고 각각의 사람들이 집단적인 재화를 최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법적ㆍ정치적 형식들에 대해 개인들 및 집단들이 일치를 얻을 수 있는 계약”(본서, 쪽)을 토대로 하는 민주주의가 바로 합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합의 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한 이러한 선언은 기묘한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면, 특히 인민주권에 기반을 둔 이른바 ‘실질 민주주의’에 대한 ‘형식 민주주의’의 우월성이 입증되었다면, 의회 정치의 강화가 나타나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프랑스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특히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들 대부분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의회 대표의 지속적인 약화와 책임을 지지 않는 기관들(전문가, 판사, 위원회 ...)의 정치 권력 확대, 대통령에게만 유보된 영역의 증대 및 지도자 개인에 대한 카리스마적 관점의 증대 같은 현상”(본서, 쪽)이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과거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투사들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성을 비판하던 시기에 의회 민주주의의 제도들은 지금보다 훨씬 잘 기능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는 그들이, 의회 및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가 권력의 단순한 집행부로 기능하는 것을 막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인민의 의사와 이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줄곧 감시하고 투쟁했기 때문이다. 반면 합의 민주주의 또는 형식 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한 선언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 민주주의적 대의 제도의 기능에 대하여 훨씬 무관심하게 되었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합의 민주주의의 역설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불화의 소멸에서 찾는다. 합의 민주주의에서는 부분들이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돼 있고, 부분들의 공동체가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말에 대한 셈은 그들의 언어적 수행과 동일한 것으로 전제돼 있다. 이런 체제 하에서 사고될 수 있는 유일한 갈등, 또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유일한 갈등은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이다. 여기에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모두 잔여 없이 셈해질 수 있고 그들의 이해 갈등은 객관적인 방식으로 공정하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아무런 불화, 아무런 계쟁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합의 민주주의에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각각의 부분에게 객관적인 여건상 기대할 수 있는, 어쨌든 갈등보다는 더 바람직한 최적의 몫을 획득할 수 있는 방식”에 관한 토론과 조정이다.

 

새로운 주체화의 발명

 

그러나 이처럼 불화를 제거하고 주어진 부분들 사이의 이해관계의 조정만을 민주주의의 유일한 쟁점으로 삼으려 한다고 해서 사회적 갈등과 분열,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른바 냉전의 종식 및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의 선언 이후 세계는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국지전과 민족ㆍ종교 분쟁, 테러 등에 시달리고 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특히 배제의 문제로 제기한다. 합의 민주주의는 배제의 문제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선 긋기의 문제로 제기한다. 가령 적법한 국적과 시민권을 가진 내부의 성원과 불법적인 체류자, 이주자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이 후자를 추방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배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내부와 어떤 외부가 서로 결합하게 만드는 나눔(partage)의 양식”(본서, 쪽)이다. 이 테제가 말하려는 것은 두 가지 점이다. 첫째, 이것은 배제가 단순히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내부를 분할하는 문제라는 점을 뜻한다. 랑시에르가 치안(police)이라고 부르는 통상적인 의미의 정치 공동체 내에서는 예전부터 항상 내적인 분할이 존재해 왔다. 귀족과 평민을 분할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분할하고 남성과 여성을 분할하는 경계선이 그것이다. 그런데 합의 민주주의는 치안에 고유한 이러한 분할에 새로운 변형을 가져온다. 이전의 치안의 질서에서는 이러한 분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그것을 통치의 기초로 삼았다. 반면 합의 민주주의에서는 끊임없이 이러한 분할의 흔적을 지우고, 정치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을 동일한 인간, 동일한 권리의 주체이자, 동등한 시장의 성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의 민주주의 하에서는 누구도 더 이상 (적어도 권리상으로는) 다른 사람과 신분, 성별, 피부색, 재산의 유무에 따라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한 가시적인 차별이나 배제를 대신하여 “이러한 “계급 없는” 사회에서 장벽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단순한 학교의 [성적] 등급을 흉내 내는 지위들의 연속체로 대체된다. 배제는 여기에서 더 이상 주체화되지 않지만, 더 이상 포함되지도 않는다. 다만 비가시적이고 주체화될 수 없는 선 너머에 있는 사회의 장 바깥으로 밀려날 뿐이며, 이제부터는 생활보호 대상자들의 무리 중 하나로 셈해지게 된다.”(본서, 쪽)

 

둘째, 또한 랑시에르가 말하려는 것은 오늘날 특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이주 노동자의 문제, 불법 이주자의 문제가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 이러한 내재적 배제 내지 분할이 비가시적인 것이 된 데서 생겨난 결과라는 점이다. 랑시에르는 묻는다. 20여 년 전에 비해 오늘날 외국인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지 않았음에도 왜 오늘날 외국인 문제, 이주자 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된 것일까? 그것은 20여 년 전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그저 또 하나의 노동자들로 간주된 것에 비해 오늘날에는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고 다른 문화와 종교를 지니고 있어서 끊임없이 사회적 유대와 국가적 정체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방인으로서 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화의 주체로서 인민 내지 노동자들의 주체성이 상실되고, 그들이 단순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사회학적인 의미의 인구의 한 사람으로 환원된 결과 생겨난 현상이다. 다시 말해 치안 공동체로서 정치 공동체를 나누는 내적인 분할이 가시화되지 못하고 소멸되어감에 따라 “더 이상 자신을 상징화하지 못하는 어떤 타자성이 현실 속에서 폭력적으로 재출현”하게 된다. 이제 예전의 노동자는 두 쪽으로 나뉜다. 곧 “한편으로는 이민자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학자들이 의미심장하게도 “작은 백인”—이 명칭은 예전에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평범한 식민 본국인들에게 붙여졌던 이름이다—이라는 또 다른 피부색의 명칭을 부여한 새로운 인종주의자가 있다.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시야에서 배제된 분할은 적나라한 타자성이라는 훨씬 더 낡은 형태를 띠고 재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합의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의 발명은 이러한 배제의 양식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발명에 달려 있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생각이다. 이러한 주체화 양식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불법 이주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심을 통해서는 생겨날 수 없다. 68년 5월혁명에서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들이다”라는 구호가 순수한 프랑스인들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의 탁월한 탈동일시/탈정체화를 나타냈던 것처럼, 그것은 일차적으로 피부색이나 종교, 문화, 또는 경제 등의 이유로 타자들을 배제하는 치안 공동체 내부의 성원들이 이러한 배제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정체성과 탈동일시/탈정체화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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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번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는데,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 4호가 출간됐습니다.

 

이전 호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번 호에는 유익하고 통찰력 있는 글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랍니다.

 

이번 호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편집자 서문 5

제1부 특집1 세계경제 문제
1. 스페인 모델 / 이시드로 로페스ㆍ엠마누엘 로드리게스 23
2. 금융 위기 이후 벌어진 세계적 경쟁 / 피터 놀런ㆍ장진 58
3.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여러 위기 / 볼프강 슈트렉 71
4. (서평) 상하이 모델?: 황야셩의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 / 조얼 앤드리어스 105
5. 임금 없는 삶 / 마이클 데닝 132
6. 위기 2.0 / 로빈 블랙번 158

제2부 특집2 카를 슈미트: 마르크스주의를 보완하는 정치학?
7. 결정과 미결정, 카를 슈미트의 정치적ㆍ지적 수용 / 베노 테슈케 203
8. 분리의 지정학, 테슈케의 「결정과 미결정」에 대한 응답 / 고팔 발라크리시난 250
9. 지정학의 물신, 고팔 발라크리시난에 대한 답변 / 베노 테슈케 275

제3부 각 지역의 쟁점들
10. 아랍 세계의 연속 혁명 / 페리 앤더슨 305
11. (대담) 반란의 이집트 / 하젬 칸딜 320
12. 봄과 겨울의 대결 / 마이크 데이비스 370
13. 후쿠시마의 여진 / 알렉산더 콕번 385
14. 베를루스코니주의 해부 / 파올로 플로레스 다르카이스 394

제4부 사상과 예술
15. 사회주의 최초의 비극에 대하여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423
16. 다윈 그리고 그 후 / 힐러리 로즈ㆍ스티븐 로즈 428
17. 아듀! 『카이에 뒤 시네마』, 어느 영화 전문지의 생애 / 에밀리 비커턴 458

제5부 서평
18. 가타뢰즈? / 피터 오스본 501
19. 에릭 홉스봄, 늙은 두더지의 길 / 그레고리 엘리엇 521

출전 532
지은이 소개 535
옮긴이 소개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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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4-1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국의 지적 풍토는 참으로 한심하다.

한국에서는 어처구니 없게도 이른바 "진보적인 맑스주의자"로 간주되는 게 에릭 홉스봄이다.

홉스봄의 글들을 읽어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인간이다.

1. 68년 5월에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벌인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이다!

2. 68년 5월 유럽의 젊은 지식인들이 역사학을 망쳐 놓았다. 이들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이다!

3. 이 당시의 알튀세르가 생산한 이론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이다!

위의 3가지 주장을 하는 홉스봄이 어째서 좌파인가?

맑스주의의 언사를 쓰는 전형적인 "右派"가 바로 에릭 홉스봄이다.

이런 자가 무슨 맑스주의자인가?

쾅! 2013-04-12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좌우파를 막론하고

한국인들이 좋아라 하는 홉스봄은 맑스주의적인 언사를 쓰지만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우파고 전형적인 역사학자이다.

흑인하고 게이들도 무지 무시했다는 것도 추가해 둔다.

일본계 미국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 또는 종착점이 "자본주의"라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좌파인 에릭 홉스봄은 역사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가만 보면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도 따지고 보면 후쿠야마와 다를 바 없다.

쾅! 2013-04-1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홉스봄이 어째서 뉴레프트 리뷰에 실려 있는 건가?

그냥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신경쓰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뉴레프트 리뷰는 홉스봄을 레프트 또는 뉴레프트라고 보는 것인가?

이런 책들 때문에 위대한 한국인들이 홉스봄을 "진보적인 레프트"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발마스 님은 후쿠야마는 꾸짖으면서 어째서 에릭 홉스봄은 다르게 대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한다.


에릭 홉스봄은 맑스주의자의 언사를 쓰는 전형적인 "우파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 필연적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나간다고 본다는 점에서 후쿠야마와 에릭 홉스봄은 똑같은 놈들이다!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은 쌍둥이다!

게이와 흑인들을 무시하는 백인 우파 역사학자가 "뉴레프트 리뷰"에 실려 있다니!


한국이든 어디든 참으로 한심한 지적 풍토다.

이러니 내가 이른바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미남 2013-04-1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쾅/ 역사의 최종 목적지가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후쿠야마나 홉스봄이나 똑같고 그래서 둘 다 우파라고 한다면
역사의 최종 목적지가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 푸코나 레오-스트라우스나 다 좌파라고 봐야하는군요. 아 레오-스트라우스도 좌파였어....

쾅! 2013-05-03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스터 미남에게 드리는 말.

역사의 최종 목적지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우파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좌파로 분류되면서도 그렇게 보는 사람 많죠.

그것과 상관없이 비판한 거죠. 역사에 목적지가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문제라는 것.

즉 홉스봄이 우파이면서 좌파인 척 하는 사람이고, 그런 면에서 후쿠야마라는 우파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전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한 번 적어 두죠.

"나는 홉스봄을 싫어한다.

홉스봄은 알려진 것과 달리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다. 이 사람 글을 보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그는 식민주의자다) 페미니스트들을 아주 경멸하고 게이와 같은 성소수자들을 아주 혐오하고 흑인운동을 무시하는 철저히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는 백인 남성 마르크스주의자가 홉스봄이다.

너무 그런 거는 모르고 우리 학계에서는 이른바 진보 또는 이른바 보수 학자 전부 다 홉스봄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거 같다. 그러니까 말이다.

어쨌든 홉스봄은 그런 사람이다. 책을 면밀히 읽으면 그런 것을 알 수 있고 파악이 되는데 왜들 그렇게 홉스봄이라면 늘 난리들을 부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dd 2013-05-07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홈스봄이 토니 블레어의 아빠라는 농담이 있다지만, 진선생님의 블로그에서 어리광 패악질을 부리는 님의 멘탈보다야 훌륭해보이네요. 홉스봄은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 코스프레를 한 셈이군요.

껄껄껄 2013-05-2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쾅!/ㅋㅋㅋ 어디서 페미니즘/동성연애 좀 주워듣고 홉스봄 까네 홉스봄이 어디서 식민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는지 신좌파적인 경향의 사상/운동을 무시했는지 좀 보여주십시오. 책 좀 읽으십시오 어디서 주워들은 잡지식으로 잘난체하지말고...제발요...책 좀 읽읍시다 진짜ㅠ_ㅠ
그리고 진짜 별 것도 아닌 공통점으로 둘다 하나로 묶어버리시네. 좌파학자들이 자주쓰는 관용구죠
A와 B는 겉보기에는 엄청 다르게 보이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A와 B는 같다.
이런 거 지젝같은 사람이 잘 쓰는데 사실 정말 정확한 글쓰기가 못 됩니다.(국내에선 이택광)
세상에 겉보기에 다르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있으면 어떤 측면으로 보면 공통적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되겠어요? 진짜 한심한 학자 흉내내는 헛소리하지말고 도서관에서 책빌려서 진지하게 책 좀 읽으세요
어디서 얻은 잡지식으로 여기저기 잘난체하지말구요.
 

 

 

 

 

 

 

 

 

 

 

 

 

 

 

프리즘 총서 10권으로 인도의 서발턴 이론가 빠르타 짯떼르지의 [민족주의 사상과 식민지 세계]가 나왔습니다.

 

짯떼르지는 포스트식민주의나 서발턴 역사학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너무 잘 알려진 학자고,

 

국내에도 이미 그의 논문 몇 편이 번역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로는 이 책이 첫번째로 번역된 책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첫번째 한국어 번역본으로, 그의 사상의 토대를 제시한 이 책이 나오게 돼서

 

총서의 기획자로서 매우 기쁩니다.

 

앞으로 이 책은 국내 인문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짯떼르지의 책이 출간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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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2013-04-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냥 '차터지'라 해도 상관 없을 걸요. 이광수 님은 인도인들이 그런 식으로 발음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내가 알기로는 인도에서도 그런 식으로 발음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그건 그렇고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언제 나옵니까?

쾅! 2013-04-12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민국가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면 "국민주의"라고 번역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여튼 엿장수 마음대로라니까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스피노자 [에티카] 강의를 하나 하게 됐습니다.

 

올해 1년 동안 [에티카] 전체를 수강생들과 함께 통독해볼 생각인데,

 

이번 1학기에는 우선 가장 난해하다고 하는 [에티카] 1부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대안연구공동체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paideia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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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연구공동체 스피노자 에티카 강의 계획서

 

 

 

I. 강의 목표

 

이 강의에서는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를 강독할 계획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 인문학자, 문학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그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책이다. 특히 지난 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지고, 알튀세르,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같은 철학자들이 스피노자 철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면서 스피노자는 현대 철학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비의적(秘意的)인 언어와 난해한 내용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다. 따라서 스피노자 철학이 현대 사상에서 널리 논의되고 있음에도, 󰡔에티카󰡕를 비롯한 스피노자 저작을 실제로 읽고 논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처음 접근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우리가 그 해석의 통로를 찾아낸다면 우리에게 깊은 통찰과 의미를 전달해주는 책이다. 특히 ‘윤리학’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삶의 질서와 문제들에 관해 생생한 실존적인 가르침을 전해준다. 따라서 󰡔에티카󰡕를 통독해보는 것은, 철학의 깊은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나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문제들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도 한번쯤 시도해볼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는 1년의 기한을 두고 󰡔에티카󰡕를 완독해보려고 한다. 2013년 봄학기에서는 우선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개관을 거친 다음, 󰡔에티카󰡕 1부를 읽어볼 생각이다.

 

 

II. 교재 및 참고문헌

 

1. 교재

 

Benedictus de Spinoza. Ethica, in Spinoza Opera, vol. II, Carl Winter Verlag, 1925.

         . Ethics, trans. Edwin Curley, Penguin Books, 2005.

         .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수강생들을 위해 국역본을 중심으로 강의할 계획이지만,

될 수 있는 한 Edwin Curley의 번역본을 함께 참조하도록 권합니다.

 

2. 참고문헌

 

진태원. 󰡔스피노자 또는 관계론의 철학󰡕, 도서출판 길, 2013(예정).

Allison, Henry E. Benedict de Spinoza: An Introduction, Yale University Press, 1987.

Gueroult, Martial. Spinoza, vol. 1, Le Dieu, Aubier, 1968.

        . Spinoza, vol. 2, L'âme, Aubier, 1974.

Lloyd, Genevieve. Routledge Philosophy Guide Book to Spinoza and the Ethics, Routledge, 1996.

마슈레, 피에르.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

        . Introduction à l'Ethique de Spinoza, vol. 1, PUF, 1999.

Matheron, Alexandre. Études sur spinoza et les philosophes de l'âge classique, ENS-LSH Éditions, 2011.

Nadler, Steven. Spinoza's Ethic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III. 강의 일정

 

 

* 2013년 1학기 일정

 

(이 일정은 사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3월 6일 (수) 스피노자 철학 개관

 

 

3월 13일 스피노자의 정치철학 개관

 

 

3월 20일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현대적 해석

 

 

3월 27일 󰡔에티카󰡕 강독 ― 1부 정의들

 

 

4월 3일 󰡔에티카󰡕 강독 ― 1부 공리들

 

 

4월 10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 ~ 정리 7

 

 

4월 17일 󰡔에티카󰡕 강독 ― 정리 8 ~ 정리 10

 

 

4월 24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1 ~ 정리 14

 

 

5월 1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5 ~ 정리 17

 

 

5월 8일 󰡔에티카󰡕 강독 ― 정리 18 ~ 정리 27

 

 

5월 15일 󰡔에티카󰡕 강독 ― 정리 28 ~ 정리 32

 

 

5월 22일 󰡔에티카󰡕 강독 ― 정리 33 ~ 정리 36

 

 

5월 29일 󰡔에티카󰡕 강독 ―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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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13-03-04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ㅡ, 너무 재밌겠어요. 1년간의 에티카라니. 중간부터 들어도 괜찮은가요.

balmas 2013-03-04 16:50   좋아요 0 | URL
예 괜찮습니다.^^

쾅! 2013-03-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예 라틴어본을 중심으로 강의하는 것은 어떨까요? 오히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스피노자가 라틴어의 달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릴 글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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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의 천사-멘붕의 정치학, 유령들, 메시아주의

 

 

역사의 천사

 

발터 벤야민의 철학적 유언이라 불리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또는 「역사철학테제」라 불리기도 한다) 중 9번째 테제는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인 「새로운 천사」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339쪽)

 

이제 클레의 그림은 벤야민의 테제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그 그림을 보면 벤야민을 떠올리게 되고, 벤야민을 생각하면 또 그 그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게 된다. 나는 벤야민의 테제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이견을 지니고 있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정세를 겪으면서 그의 테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라고 불리는 폭풍 앞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파국을 막아보려고 하는 역사의 천사, 하지만 그럴수록 발 앞에 쉼 없이 잔해가 쌓이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역사의 천사를 생각하게 된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반동 세력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적들이 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진보의 이름으로 그 파시즘에 대처하기 때문”(8번째 테제. 앞의 책, 337쪽)이라고 말한다. 곧 파시즘의 적이 파시즘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하여 싸움을 벌이는 한, 언제나 승리자는 파시즘, 반동 세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성격이 무엇인지, 거기에서 승리와 패배를 규정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숙고하려는 사람이라면 한번 곱씹어볼 만한 테제다.

 

 

어떤 멘붕

 

‘멘붕’이라는 용어는 이제 은어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공용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이 말이 일간신문에까지 종종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알다시피 ‘멘탈 붕괴’의 줄임말인 멘붕은 어떤 놀라운 일을 겪었거나 심하게 좌절감을 느낄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넘어 멘붕이 사회적 공용어가 되게 해준 계기는 아마도 지난 18대 대선이었을 것이다.

 

야권의 후보 단일화가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었음에도, 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부터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대선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내가 이런저런 사석에서 만나본 사람들도 대개 이번 선거에서는 야권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물론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늘 앞서 나갔지만,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숨은 야권표가 10%는 될 것이며, 주로 집전화로 이루어지는 여론조사는 핸드폰 사용자인 젊은이들이 빠져서 신빙성이 없다고, 야당 후보는 늘 바람을 통해 막판에 뒤집기 마련이라고, SNS 상에서는 게임도 되지 않는 상태라고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더욱이 선거 당일날 투표율은 이미 오전부터 최근 선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게 나타났다. 투표율이 높을수록 야당 후보에게 유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선거의 공식인 만큼 이러한 예상은 점점 현실화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과는 다 알다시피 이런 낙관적인 기대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근소한 표 차이로 여당 후보가 승리할 것이라는, 지상파 방송 3사의 합동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일차적인 실망감이 터져 나왔으나, 그래도 출구조사는 완전히 신뢰하기 어려우니 끝까지 결과를 지켜보자는 의견들이 SNS와 인터넷 댓글에 속출했다. 하지만 그러한 초조한 인내심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거일이 지나가기 전 여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 확정이라는 자막이 지상파 방송에 떴고, 그것으로 결과는 끝이었다.

 

‘멘붕’의 고통을 호소하는 트위터와 댓글이 순식간에 온라인을 뒤덮었다. 그리고 놀라운 결속력으로 여당 후보를 지지하고, 결국 당선시킨 50~60대 여당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의 말들이,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저조했던 20대 젊은이들에 대한 비아냥과 불평의 글들이 넘쳐 났다. 야권 후보를 지지하고 그가 당선되기를 목놓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기나긴, 악몽 같은 밤이었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필자가 1987년 겨울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탔던 지하철 풍경은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놀랍게도 지하철은 적막 그 자체였다. 역의 이름을 알리는 안내방송 말고는 열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초췌하고 피곤한 눈길의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있거나 선 채로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웃음소리도 불평 소리도 사소한 다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집단적 좌절감이 어떤 것인지 그날의 적막한 고요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대선에서 사람들이 겪었다고 하는 ‘멘붕’은, 야박한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물론 나 자신이 이번 선거를 지켜보면서 거의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주변의 지인들이 선거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낙관에 들떴을 때도 냉담한 기분이었고, 참담한 결과에 고통스러워할 때도 담담한 기분이었다. 이번 선거의 승리와 패배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승리했느냐 패배했느냐보다는 어떤 승리이고 어떤 패배인가가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그렇다.

 

유령들의 싸움

 

이번 대통령 선거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령들의 싸움이었다. 여당 후보로 육화된 박정희의 유령과 야당 쪽에서 불러내려고 애쓴 노무현이라는 유령이 싸움을 벌인 선거였다. 노무현이라는 유령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탓일까, 아니면 박정희의 유령의 위력이 여전히 거대했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유신의 망령의 위험을 경고하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대표하는 노무현의 유령은 경제발전을 대표하는 박정희의 망령을 당해내지 못했다.

 

사실 노무현은 경제발전이라는 망령과 맞서 싸우기에는 상당히 허약한 유령이다. 그가 5년 동안 대통령으로서 수행했던 통치는 그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유령으로 불러올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대단히 민주주의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권력 분립을 위해, 지방 자치를 위해, 남북 관계의 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노동자들의 표현의 자유에는 재갈을 물렸고, 재벌의 권력을 키우는 데 기여했고, 황우석을 위해 피디수첩을 공격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는가와 별개로, 그는 민주화의 유령,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불리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대통령이었다.

 

반대로 박정희는, ‘진보’ 역사학자들 및 언론 매체의 지속적인 비판과 축귀(逐鬼)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유령이라는 점이, 그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왜 박정희의 유령이 그토록 강력한 것일까? 이미 사망한지 3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왜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론 박정희 집권 당시에 이룩된 경제 성장에 대한 강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경제가 어렵고 사람들의 삶이 팍팍할수록, 돈벌이가 잘 되고 취직 걱정이 없고 나날이 살림살이가 좋아져 간다고 느끼던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절실해진다. 5년 전 이명박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도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면서 경제 대통령을 내세웠던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바람은 과연 ‘그들’만의 문제였을까? 그들과 대립하고, 그들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믿었던 ‘우리들’은 과연 ‘그들’과 다른 바람, 다른 향수를 갖고 있었을까? ‘그들’과 ‘우리들’을 가르는 경계선은, 경제 발전 대 민주화가 아니라, 사실은 경제 발전의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아니, 동일한 경제 발전에 대한 욕망을, 한 쪽은 좀더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던 반면, 다른 한 편은 ‘민주화’라는 어색한 수사법으로 애써 둘러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적 메시아주의

 

사실 노무현이 박정희의 유령에 맞서기에는 불안하고 역부족인 유령이라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해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노무현도, 문재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안철수라는 새로운 메시아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노무현이 생각지도 않게 2002년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또 절대적으로 불리하리라던 여론조사를 뒤집고 극적으로 대통령에 올랐던 것처럼, 이번 대선에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은 누군가가 다시 한 번, 극적으로 자신들의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링에 올라보기도 전에 밀려났고, 어쩌면 그것으로 18대 대선이라는 유령들의 싸움은 이미 결정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안철수에게서, 또는 그 뒤에는 마지못해 문재인에게 기대했던 희망과 꿈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발전이 조화를 이루는 것,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처럼 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 발전의 기적을 순조롭게 지속해가되 거기에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것이, 그들이 새로운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대했던 것이었으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복지국가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알다시피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초를 잠식하며 시장(또는 자본)의 명령에 순종하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하고 있는 한,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란 사실은 사회의 약자들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한 복지국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복지국가일까? 그리고 그러한 복지국가는 박정희의 유령을 내세운 이들도 마찬가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선거 결과에 멘붕을 했던 이들은 무엇 때문에 멘붕을 한 것일까? 그리고 멘붕을 한 이들은 어떤 계급의 사람들일까?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여러 노동자가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 불과 며칠 사이에 연이어 자살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선거 결과를 기다렸을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기대했던 그 메시아는, 과연 목숨을 걸어야 했을 만큼 가치가 있는 메시아였을까라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이룩할 수 있는 정치적 진보가 있을까 질문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선거 직전 한겨레 신문이 좌파 메시아주의의 아이콘 중 한 사람인 알랭 바디우를 동원해 야당 후보를 지원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는 이미지를 통해 고통스럽게 말했듯이, 적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서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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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마다 2013-03-10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볼때마다 마음에 걸렸는데 포스트 제목이 "멘붕의 정치학"이 아닌 "벤붕의 정치학"입니다. 수정 완료하시면 이 댓글은 지우겠습니다.

balmas 2013-03-10 21:42   좋아요 0 | URL
하하 지적 감사합니다. 저는 여태 그런 줄 몰랐네요.^^

쾅! 2013-03-2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거 자체가 민주주의가 상관 없다고 보는 제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글입니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는 "광란(狂亂)의 댄스"로 보는 제 入場에서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일단 제 입장은 제쳐 두고 발마스 님께서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의미" 있다고 주장하셨던 걸로 여전히 기억하는데 이 글을 읽어 보니 묘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투표를 독려하면서, 몇 살까지 젊은이인지는 모르겠지만 35나 33 아니면 29라 해도 다 이의 제기가 있을 겁니다. 제 기준으로는 18살까지가 젊은이고 그 이상은 늙은이입니다! 1980년대에 투표권이 있었던 사람은 "화석" 같은 사람들이죠. 엄밀하게 따지면 박정희가 죽은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전 그 기간을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의 정신 상태가 이상했던 기간을 늘려서 뭐 하겠습니까? 그것도 2년이나! 그런 식으로 계산하면 이명박은 6년이나 7년 동안 대통령이었던 거지요.)





쾅! 2013-03-29 20: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선거 자체가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셨던 걸로 압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발마스 님에게 비판당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발마스 님이 지지하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 자체에는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도대체 이 글은 뭡니까?

발마스 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에 100%에 참여해서 백지투표를 하거나 모두 기권표로 만드는 것밖에 없을 듯 합니다.

선거 자체가 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는 알송달송한 말씀을 하시면서 동시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셨던 걸로 압니다. 저로서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발마스 님에게 비판당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발마스 님이 지지하신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신자유주의적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거 자체에는 참여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도대체 이 글은 뭡니까?

발마스 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거에 100%에 참여해서 백지투표를 하거나 모두 기권표로 만드는 것밖에 없을 듯 합니다.





저와 발마스 님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저도 바디우의 종교적 냄새가 풀풀 나는 메시아주의는 별로입니다.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성장 이데올로기나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지요.

벤야민은 한마디로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진보라는 개념 또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벤야민을 끌어 들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저와 발마스 님의 입장이 다르다고 해도 저도 바디우의 종교적 냄새가 풀풀 나는 메시아주의는 별로입니다.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은 20세기 내내 성장 이데올로기나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혀 있었지요.

벤야민은 한마디로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진보라는 개념 또는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수많은 약자들과 패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벤야민을 끌어 들여 비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文明 자체가 이미 야만이라고.

수많은 약자들을 생산해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진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어내고 권력관계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그 개념은 국가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도 그 문명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文明 자체가 이미 야만이라고.

수많은 약자들을 생산해서 그들을 괴롭히지 않고는 생겨날 수도 없고 하루도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문명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리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이미 "진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어내고 권력관계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그 개념은 국가와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할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발마스 님도 그 문명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발마스 님의 비판 자체는 타당하다고 보는데 발마스 님의 선거에 대한 기존의 입장 때문에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여 선거에 참여하라! 하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선거 자체를 잊어라!

이 뜻인가요?

선거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서 지지후보가 있고 선거 독려를 하신 후에, 스스로 선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시네요.

저는 발마스 님에게 비난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발마스 님의 비판 자체는 타당하다고 보는데 발마스 님의 선거에 대한 기존의 입장 때문에 제가 이 글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여 선거에 참여하라! 하지만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선거 자체를 잊어라!

이 뜻인가요?

선거가 세계를 바꿀 수 없다면서 지지후보가 있고 선거 독려를 하신 후에, 스스로 선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서 선거에 관한 글을 쓰시네요.

저는 발마스 님에게 비난당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쾅! 2013-03-2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차피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 제비뽑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국민 100%가 참가해서 제비뽑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발마스 님이 말씀하신 정치적 변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누구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으니 민주주의라고 우길 수 있으며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현실은 쉽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멘붕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치는 김에 장관이나 차관도 제비로 뽑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유일한 문제점은 발마스 님이 제비뽑기로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에 에티카 강의를 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