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에 관한 글을 올린 김에 예전에 발표한 글을 한 편 더 올립니다. 2006년 [문학과사회] 가을호 (통권 75호)에 실린 글입니다.
양창렬 선생, 최원 선생, 푸코의 글 한 편과 함께 "생명권력"에 관한 특집으로 묶인 글입니다.
이 글 역시 [문학과사회] 지면에 실린 판본과 다소 다를 수 있으니, 인용이나 토론을 원하는 분들은
[문학과사회]에 실린 판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생명 정치의 탄생: 푸코와 생명 권력의 문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정치적인 것, 곧 생물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 육체적인 것이다.”[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vol. III, Gallimard, 1994, p. 36.]
1. 머리말
[이하 푸코의 저작은 다음과 같은 약어로 표기할 것이다.
Dits et écrits vol. III → DE III
Histoire de la sexualité I, La Volonté de savoir, Gallimard, 1976;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 나남, 1990 → HS I
Technologies of the Self, ed. Luther H. Martin et al.,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88; 자기의 테크놀로지, 이희원 옮김, 동문선, 1997 → TS
Les anormaux: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4-1975), Gallimard/Seuil, 1999; 박정자 옮김, 비정상인들, 동문선, 2001 → AN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Gallimard/Seuil, 1997;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8 → IFDS
주체의 해석학: 1981-1982년 강의록L'Herméneutique du sujet: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Gallimard/Seui, 2001 → HdS
정신의학적 권력Le pouvoir psychiatr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1973-74), ed. Jacques Lagrange, Seuil/Gallimard, 2003. → PP
안전, 영토, 인구: 1977-1978년 강의록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Gallimard/Seuil, 2004 → STP
생명 정치의 탄생: 1978-1979년 강의록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Gallimard/Seuil, 2004 → NB
그리고 외국어 원문의 인용에서 국역본이 있을 경우 원문 쪽수를 먼저 쓴 다음 해당 국역본의 쪽수를 표시해두겠다. 하지만 번역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별다른 지적 없이 자유롭게 수정했다.]
철학자 또는 이론가로서 푸코의 탁월함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예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 문제들 속에서 우리가 푸코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 스타일, 글쓰기의 스타일이자 사고의 스타일이면서 동시에 윤리의 스타일이기도 한 그 독특한 스타일, 따라서 푸코의 고유한 실존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일정한 틀에 따라, 익숙해진 모형에 따라 비판하거나 찬양하는 순간 푸코는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혀 다른 문제, 전혀 상이한 분석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러한 비판이나 찬양에서 빠져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가 “다르게 사고하기”를 철학의 주요 과제로 제시했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푸코의 사고의 방식이자 존재의 방식, 곧 푸코가 실행했던 독특한 주체화의 기술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나의 작업들 각자는 나 자신의 전기의 일부입니다.” TS, p. 11.]
다르게 사고하고 다르게 존재함으로써 바로 그 자신으로서 실존하는 푸코의 실존의 미학, 자기 통치의 기술은 권력에 대한, 정치에 대한 분석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가 보기에 생명 권력 또는 생명 정치라는 개념[푸코는 생명 권력과 생명 정치를 명시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다. 이러한 혼용에서 어떤 사람들은 푸코의 생명 권력론의 한계를 보기도 하며(예컨대 J. Rancière, “Biopolitique ou politique?”, Multitudes no. 1, 2000 참조), 몇몇 주석가들은 이 두 개념을 좀더 정확히 구별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Maurizio Lazzarato, “Du biopouvoir à la biopolitique”, Multitudes no. 1, 2000; Judith Revel, “La naissance littéraire de la biopolitique”, in Philippe Artières ed., Michel Foucault, la littérature et les arts, Kimé, 2004 참조.]은 푸코의 독창성, 철학의 본질을 다르게 사고하기로 규정하는 그의 관점의 진면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개념 중 하나다. 생명 정치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 출현했으며, 또한 사람들이 좀더 엄밀한 분석과 발전을 기대하던 곳에서 갑작스럽게 중단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푸코 자신에 의해 더 이상 이론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이 개념 또는 문제설정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의 한 분야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토론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호모 사케르 연작(連作)에서 생명정치 개념을 서양 정치 구조의 핵심으로 제시한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나 제국에서 권력의 새로운 지배구조와 그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생명 권력과 생명 정치 개념을 통해 해명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물론이거니와 사회학이나 정치학의 여러 분야에서, 그리고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한 과학기술론적 고찰에서도 이 개념은 주요한 이론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저자 자신도 예견하지 못한 효과와 변용들을 낳을 수 있는지 여부를 개념적 독창성을 평가하는 한 가지 기준으로 볼 수 있다면, 생명 정치는 푸코의 사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개념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검토해보려는 것은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이 푸코의 작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으며, 푸코의 사상, 특히 그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 이 개념이 왜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푸코가 제시하는 생명 정치 개념의 의미가 무엇이며(2절), 이 개념이 70년대 후반 푸코 사상의 위기의 맥락에서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3절). 그 다음 생명 권력 개념과 규율 권력 개념의 차이는 무엇이며, 이러한 차이가 푸코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룰 것이다(4절). 요컨대 생명정치의 이론적 중요성은, 이미 완성되어 적용되기만 하면 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점에, 곧 새로운 상황과 문제들을 분석함으로써 정정되고 변용되고 확산되는 그것의 능력에 있다는 것이 우리가 이 글에서 소묘해보려는 주요 논점이다.
2. 생명 권력의 의미
생명 권력 또는 생명 정치 개념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이 개념이 일차적으로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푸코라기보다는 오히려 조르지오 아감벤의 작업 때문이다. 아감벤은 1995년 출간된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1976) 마지막 장에서 언급된 푸코의 개념을 독창적으로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푸코에 맞서) 활용하여 생명 권력은 서구의 정치 구조 속에 항상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G. Agamben, 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Einaudi, 1995;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참조. 호모 사케르에 대한 소개로는 김태환, 「예외성의 철학: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통치 권력과 벌거숭이 삶」, 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를 참조하고, 아감벤과 푸코의 생명 권력론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번 호에 수록된 양창렬의 글을 참조하라.] 호모 사케르가 세계적인 화제작이 되면서 아감벤의 테제만이 아니라 생명 권력에 대한 푸코의 언급이 새삼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뒤 1997년 프랑스에서 푸코의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가 출간되고 이 강의에서 생명 정치에 관한 푸코의 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생명 권력 개념은 후기 푸코 사상의 주요 원천 중 하나로 각광받게 되었다.
생전에 발표된 저작에서 이 개념은 매우 드물게 쓰였으며,[이 개념은 1974년 브라질에서 강연했던 「사회 의료의 탄생」이라는 글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글은 1977년 포르투갈어로 번역, 발표되었지만, 1994년 말과 글Dits et écris에 수록되어 출간되기 전까지는 푸코 연구자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1976) 마지막 장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되었다. 여기서 푸코는 생명 권력을 “주권자le souverain” [국역본에서는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le souverain”을 모두 “군주”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푸코 권력 이론의 중요한 개념적 구별을 충실히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푸코는 근대 권력의 유형을 주권적 권력과 규율 권력, 생명 권력으로 구별하고 있다. 감시와 처벌에서는 주권적-법적 권력에서 규율 권력으로의 이행을 분석하는 것이 주요 주제였다면, 성의 역사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두 가지 권력 유형과의 차이점을 해명하면서 생명 권력 또는 통치성의 메커니즘과 기술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권력 유형은 연대기적인 순서를 뜻하지는 않는다. “La gouvernementalité”, in DE III; 「통치성」, 정일준 편역,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1994 참조.]의 생살여탈권과 대비하면서 규정하고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주권자의 권한은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죽게 만들거나faire mourir 살게 내버려두는laisser vivre”(HS I, p. 178/146쪽―강조는 푸코)[이하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는 한 모든 강조는 원문의 것이다.] 권한으로 규정될 수 있다. 곧 주권의 관점에서 생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며, 문제는 이러한 자연적인 생명을 가진 신민들을 죽음에 대한 위협을 통해 복종시키는 것이다. 또는 고전적인 사회계약론에 의거한다면(푸코는 홉스를 원용한다),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이행하게 만드는 근본 동기는 자연상태에 만연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있기 때문에, 주권자는 사회계약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연 속에서 지니고 있던 삶과 죽음의 권리를 모두 넘겨받게 된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생살여탈권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성이다. 곧 주권자, 군주가 신민들에 대해 보유하고 있는 권리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권리, 살게 해주는 권리가 아니라 죽음의 권리, 죽게 만들 수 있는 권리이며, 이는 칼로 상징된다. 이 때문에 주권적 권력은 “징수의 수단, 갈취의 메커니즘, 부의 일부를 전유할 권리, 피지배자들로부터 생산물, 재산, 용역, 노동, 피를 강제로 빼앗을” 수 있는 권한으로 표현된다.
반면 푸코가 제시하는 생명 권력은 “살게 만들거나faire vivre 죽음 속으로 쫒아내는rejeter dans la mort”(HS I, p. 181/148쪽) 또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IFDS, p. 214/279쪽) 권한으로 표현된다. 이는 주권자의 권한을 나타내는 표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심오한 변화를 시사한다. 우선 주권자의 권한에서는 “살기vivre”가 “내버려두기”의 대상인 데 반해 생명 권력에서는 “만들기”의 대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삶이 내버려두기의 대상이라는 것은 주권 권력에서 삶, 생명은 자연적인 것으로, 권력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주어진 것으로, 권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미리 전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의 위세, 권력의 크기는 자연적으로 실존하는 생명체,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목숨을 제거하는 것, 죽이는 것으로 표현되며, 이 때문에 주권 권력은 죽임의 권력이다. 반면 생명 권력에서 삶, 생명이 만들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이 권력에게 삶, 생명은 더 이상 주어진 것, 자연적인 것, 따라서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삶, 생명이야말로 권력이 관여하고 조절하고 증대시키고 확산시켜야 할 일차적인 대상이 된다.
다른 한편 주권 권력에게 “죽기”는 “만들기”의 대상인 반면, 생명 권력에서는 “내버려두기” 또는 “쫒아내기”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내버려두기”란 더 이상 권력이 죽음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 주권 권력과 같이 죽음을 통해 자신의 권력의 위세를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죽음은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으로 떨어지고, 권력은 죽음이 아니라 사망률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권력의 경계 바깥에 놓여 있는 것, 방치되는 것, 또는 쫒겨나는 것이 된다.
따라서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발생한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주권자의 권한에서 생명 권력으로의 이행, 곧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의 이행에서 푸코는 근대 사회의 성립의 문턱을,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발견한다. 생명 권력이 근대성의 문턱을 이루는 이유는 생명 권력에 이르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자로서 그의 생명 자체를 문제 삼는”(HS I, p. 188/154쪽) 정치 속에서 실존하는 동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정치사상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 곧 인간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명체라는 점에서는 다른 동물들과 동일하지만 다른 동물들과 달리 정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며, 바로 이것이 인간을 특징짓는 종차(種差)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푸코는 18세기 말 등장한 생명 권력에 의해 인간의 생명은 더 이상 정치 바깥에 있는 자연적 영역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조절 대상이 되었으며, 바로 이 점이 근대적 인간의 고유성을 이룬다고 본다.[반면 [호모 사케르] 연작의 기본 테제 중 하나는 단지 근대 사회만이 아니라 서양 고대 사회부터 생명은 항상 정치와 결부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정치는 항상 생명 정치였다는 점이다. 푸코와 아감벤의 생명 정치론에 대한 비교는 양창렬의 글을 참조.]
다른 한편 푸코는 생명 권력을 자본주의 발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한다. 우선 생명 권력은 개인 및 개인의 신체를 유순하면서도 생산력이 뛰어난 존재자로 만들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봉사하게 만든다. 감시와 처벌이 탁월하게 보여주었듯이 이는 특히 규율 기술의 작업인데, 규율 기술은 공장만이 아니라 군대, 학교, 병원 같은 사회의 다양한 제도들 내부에서 다수의 개인들을 대상으로 감시와 훈련, 이용과 처벌이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푸코의 분석은 [자본] 1권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노동일 분석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좀더 확장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규율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대한 분석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Warren Montag, “The Soul is the Prison of the Body: Althusser and Foucault 1970-1975”, Yale French Studies, Fall 1995 참조.] 더 나아가 생명 권력은 단지 개인 및 개인의 신체만이 아니라 종(種)으로서의 인구의 조절을 추구한다. 이것이 좀더 엄밀한 의미에서 생명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 점과 관련하여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성의 역사 1권]은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 곧 전자의 경우 주권 권력과 규율 권력, 생명 권력 사이에는 연대기 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선형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규율 권력은 주권 권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제시된 권력의 메커니즘이며, 역으로 생명 권력은 개인 및 개인의 신체의 규율에 국한된 규율 권력의 한계를 넘어서 종으로서의 인구 전체를 다루기 위한 권력으로 제시된다. 반면 성의 역사 1권에서는 한편으로 주권 권력과 다른 한편으로 규율 권력/생명 권력 사이의 대립 관계가 두드러지며, 규율 권력은 생명 권력의 부분으로 포섭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안전, 영토, 인구에 가면 세 가지 권력 사이의 관계를 연대기적인 관계로 보는 관점이 명시적으로 거부되며, 그 대신 이것들 사이의 관계는 “인구를 일차적인 표적으로 하고 안전장치를 본질적인 메커니즘으로 삼는, 군주권-규율-통치적인 관리의 삼각관계”(STP, p. 111; 정일준 편역, 앞의 책, 44쪽도 참조)로 제시된다. 단 여기서는 생명 권력 대신 통치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출생과 사망의 비율, 재생산의 비율, 그리고 한 인구의 생식력 등의 과정의 총체”(IFDS, p. 216/281쪽)로, 생명 권력은 이러한 인구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대상으로 조절하려고 시도한다. 왜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 이러한 조절이 필요한가? 푸코는 “전염병”과 구별되는 “풍토병endémie”이라는 명칭으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생명 정치를 통해 안정된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지 생식 능력을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률 및 질병에 걸릴 확률도 조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질병은 중세와 근대 초에 유럽을 뒤흔든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아니라 풍토병, 곧 “한 인구 안에서 주로 발생하는 질병”이며, 안정된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질병들의 “형태와 성격, 확장, 지속, 강도”(IFDS, p. 217/281-82쪽) 등을 고찰하고 그에 대비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치료비 부담이나 노동일의 결손이 일어나 생산력이 감소하게 되며, 이는 다시 경제 전체의 활력을 저하시키고 사회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적인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규율 권력을 통해 개인들 및 그들의 신체의 생산력과 순응성을 길러내는 일 못지않게 인구 전체를 조절하는 것 역시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푸코는 18세기 말 이후 공중보건을 주로 담당하는 보건의학이 생겨나고, 보험 및 사회보장제도가 등장한 것, 그리고 도시환경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에서 생명 정치의 구체적인 모습을 발견한다.[18세기 말 이후 서양 사회의 의료화 문제에 관해서는 이번 호에 수록된 「의료의 위기인가 반의료의 위기인가」 참조. 또한 이 글과 더불어 브라질에서 강연한 다른 두 편의 글도 역시 참조하라. “La naissance de la médecine sociale”, “L'incorporation de l'hôpital dans la technologie moderne”, in DE III. 다른 한편 19세기 이후 보험 및 사회보장제도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François Ewald, L'État providence, Grasset, 1986 및 Jacques Donzelot, L'invention du social, Seuil, 1994; 사회보장의 발명 주형일 옮김, 동문선, 2005를 각각 참조.]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생명 권력 개념은 복지국가, 또는 (발리바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국민 사회 국가état national social”의 전개 과정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성의 역사 1권]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점은 18세기 말 등장한 생명 권력이 보여주는 역설이다. 다시 말해 “생명을 과대평가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생명의 기회를 늘리고, 생명에 가해질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거나 또는 그 손실을 보상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생명 권력이 현대의 주요한 권력의 형태를 이루고 있음에도 (또는 오히려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원자폭탄과 같이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권한만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죽이는 주권이 작동”(IFDS, p. 226/ 291쪽)하는 권력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 “어떤 인구를 일반적인 죽음에 직면하게 만드는 권력은 또 다른 주민에게 생존의 유지를 보증하는 권력의 이면”(HS I, p. 180/ 147쪽)이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강의록에서는 이러한 역설을 국가 인종주의 개념을 통해 해명하는 반면,[“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제시된 국가 인종주의에 관해서는 이번 호에 수록된 최원의 글을 참조. 비정상인들에서 푸코는 인종주의,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전개된 네오 인종주의의 뿌리를 정신의학에서 찾고 있다. 사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의 제목은 비정상인들의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 했던 19세기 말 정신의학자들의 주장에서 유래한다.] [성의 역사 1권]에서는 역설의 원인을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다만 생명 권력에 내재한 역설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더 이상 주권이라는 법적 존재가 아니라 주민이라는 생물학적 존재다. 민족 말살이 정말로 근대 권력의 꿈이라면, 그것은 낡은 죽일 권리가 오늘날 재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삶, 인류, 민족, 그리고 대규모적인 인구 현상의 위상에 자리를 잡고 행사되기 때문이다.”(HS I, p. 180/148쪽)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이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 두 개의 텍스트 사이의 차이점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역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푸코의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의 역설은 이 개념이 어디에서도 그 자체로 주제화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의 역사 1권]에서 이 개념은 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성적 장치”의 특수성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등장하고 있다.[“정치적 쟁점으로서 성의 중요성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생명에 근거를 둔 모든 정치적 기술이 전개되는 내내 성은 두 중심축[신체의 규율과 인구의 조절]의 접합점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HS I, p. 191/156쪽.] 그리고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니체의 가설” 아래 국가 인종주의의 전개 과정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 장치로 도입되고 있다. 더 나아가 푸코는 1977-78년 강의록인 안전, 영토, 인구 첫머리에서 그 해의 연구 주제는 “생명 권력”에 대한 탐구라고 말하지만(STP, p. 3), 2월 1일 강의부터는 새로운 주제, 곧 “통치gouvernement”라는 주제가 전면에 등장해서 마지막 강의까지 중심적인 논의 대상이 된다.[특히 2월 1일 강의(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 강의록의 이본(異本))는 1978년 이탈리아어로 번역되고 다시 1979년 영어로 번역된 뒤, 1990년대에 영국의 경제와 사회Economy and Society 그룹을 중심으로 영미 사회과학계에서 통치의 문제설정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Governmentality”, in Graham Burchell et al. eds.,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참조.] 또한 1978-79년 강의록인 생명 정치의 탄생에는 강의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생명 정치가 직접적인 주제로 등장하지 않고, 대신 독일과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에 대한 분석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결국 생명 권력, 생명 정치라는 개념이 푸코의 작업 과정에서 한때 등장했다가 사라진, 또는 다른 주제로 대체된 부차적이고 일시적인 주제라는 것을 뜻할까? 우리가 보기에 생명 정치 개념이 어디에서도 직접적인 논의 주제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개념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의의를 더 두드러지게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생명 정치는 일종의 부재하는 중심으로서 다른 개념들, 다른 분석 영역들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푸코의 위기
이 점을 좀더 정확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푸코의 작업에서 생명 정치 개념이 등장하게 된 맥락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후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의 역사 1권: 앎의 의지가 출간된 1976년 이후의 시기는 푸코 사상의 중요한 전환기, 또는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푸코의 위기의 시기였다. 푸코는 그 자신이 “나의 첫 번째 책”이라고 불렀던 감시와 처벌(1975)을 출간한 뒤, 총 6권으로 된 성의 역사의 출간 계획을 세우면서 먼저 1권인 앎의 의지를 그 다음해에 출간하지만, 그 이후 성의 역사 2권과 3권은 1984년에야 출간된다. 8년이라는 간격은 푸코가 작업한 기간 동안 시간상으로 가장 길 뿐만 아니라 성의 역사 1권과 2ㆍ3권은 다루는 시기에서(1권은 17세기-18세기, 2, 3권은 고대 희랍과 로마로) 그리고 그 주제상으로도(1권은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의 억압 가설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 반면, 2, 3권은 성적 쾌락을 둘러싼 윤리적 실천에 대해 고찰)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푸코 사상의 위기의 시기이자 전환의 시기로 불릴 만하다.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은 푸코가 이 시기에 수행했던 작업들, 그의 사상적 고투와 갈등, 변모 과정을 좀더 정확히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첫머리에서 담담하게, 하지만 명료하게 자신이 직면한 이 위기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그 위기는 무엇보다도 70년대 초, 즉 담론의 질서(및 「니체, 계보학, 역사」) 이래 푸코가 수행해왔던, 이른바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연구가 직면한 위기였다. 푸코가 몇 차례에 걸쳐 지적하듯이 70년대 전반기의 계보학 연구는 근대 자유주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라는 이중의 비판 대상을 겨냥하여 수행되었다. 이 두 가지 사조는 대립적인 경향을 띠고 있지만, 또한 “권력 이론에서 “경제주의””(IFDS, p. 14/31쪽)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공통점으로 지니고 있었다. 곧 자유주의의 경우 권력을 모든 개인이 지닌 소유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양도를 통해 주권이 형성된다고 본다는 점에서, 권력을 소유와 교환, 유통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경제주의적이라면, 마르크스주의는 정치권력의 존재 이유와 형식, 기능의 원칙을 경제 안에서 발견한다는 점에서 역시 경제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이 점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Thomas Lemke, “Foucault, Government, and Critique”, Rethinking Marxism, vol. 14, no. 3, Fall 2002 참조.]
이러한 경제주의에 맞서 푸코는 감시와 처벌과 앎의 의지에서 관계론적 권력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에 따라 형벌 제도의 변화 과정이나 성적 장치들의 구성과 변모에 대해 분석했다. 관계론은 크게 세 가지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권력 분석의 방법론에 대한 푸코의 논의로는 특히 감시와 처벌 1부 1장, 성의 역사 4장 2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1월 7일 및 1월 14일 강의 참조.] 첫째, 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관계의 원초적인 대립항(예컨대 신민 대 군주, 개인 대 국가, 노동자 대 자본가 등)에서 출발하지 말고 그 항들을 규정하는 관계로부터 출발할 것. 둘째, 권력 이전에 존재하는 자유로운 또는 자율적인 주체나 자기 자신의 소유자로서 개인을 상정한 가운데 권력을 분석하지 말고, 주체 또는 개인의 구성을 근대 권력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간주할 것.[푸코에게서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지만 여기서 “주체”와 “개인”은 동일한 내포를 갖는 것은 아니다. 에티엔 발리바르를 따라서 말하자면, 주체가 루소-칸트로 이어지는 대륙 철학 전통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시된 개념이라면, 개인은 소유의 문제를 중심으로 영미 정치철학, 특히 (홉스 및) 로크에서 발원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Balibar,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 참조.] 따라서 주체 또는 개인을 원초적인 존재자로 파악하지 말고 예속화 메커니즘의 효과로서 이해할 것. 셋째, 권력을 어떤 중심에서 파생되고 조직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말고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서로 교차하고 준거하고 접근하거나 대립하는, 다양하고 차별적인 힘들의 관계로 파악할 것.
푸코에 따르면 기존의 권력론에 대한 이러한 비판 또는 해체는 두 가지 효과를 낳았다. 그 하나는 포괄적이며 전체적인 이론, 따라서 실제의 투쟁에서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이론(마르크스주의나 정신분석)을 억제하고 비판의 국지성을 살려낸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앎의 회귀”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예속된 앎”의 반항”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예속된 앎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우선 기능적이고 체계적인 전체 안에 들어 있으나 은폐되어 있던 앎을 뜻하며, 박학을 통한 비판 작업만이 이러한 앎들을 드러낼 수 있다. 그 다음 이 앎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앎 또는 비개념적 앎들로 폄하된 일련의 앎들”(IFDS, p. 9/ 24쪽)을 가리킨다. 곧 의학이나 범죄학 등에 비해 주변적인 앎, 정신의학 대상자의 앎이나 환자의 앎, 간호사의 앎 등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중적 성과는 정확히 푸코가 1968년 이후 이른바 고고학에서 계보학으로 방법론적 전회를 하며 추구했던 이론적ㆍ실천적 목표와 부합하는 것이다. 그는 에밀 졸라나 사르트르 등이 대변하는 보편적 지식인, 곧 어떤 보편적 이상이나 가치의 이름 아래 권력의 억압과 폭력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인 투쟁들에 관여하는 지식인은 현대 사회에서 유효한 진리 효과, 정치적 효과를 산출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지식인은 “특수한 지식인intellectuel spécfique”(DE III, p. 111), 곧 특수한 영역에 대한 특수한 전문적인 앎을 기반으로 하여 구체적인 투쟁들에 관여하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인은 더는 억압되고 지배받는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그들을 대신하여 권력에 맞서는 지식인일 수 없으며, 오히려 권력의 그물망에 따라 규격화되고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앎을 깨닫고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이러한 작업이 문제가 되는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불연속성의 그토록 멋진 이론 [...] 을 왜 우리는 더 계속하지 않는 것일까? 왜 나는 정신의학이나 성이론 등에 관한 어떤 소소한 주제를 택하여 그것을 더 발전시키지 않는 걸까?”(IFDS, p. 12/ 28-29쪽) 그것은 그가 처음에 계보학(및 그 이전에 고고학)을 통해 목표로 삼았던 것과는 다른 정세, 다른 상황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 어떤 “세력 관계”가 문제인가? 그것은 바로 계보학을 통해 밝혀내고 풀어내고 유통시킨 요소들, 예속에서 “회귀한 앎들”이 “통합적 담론들에 의해 다시 코드화되고, 다시 식민상태로 떨어질 위험”, 또는 이처럼 되살려낸 단편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손으로 우리식의 통합적 담론을 하나 구축할 위험”이다.
따라서 푸코가 직면한 위기는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던, 일종의 해체 작업이 직면한 위기였다. 규율 권력, 항상 특수한 영역에서 특수한 지식을 통해 특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규율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박식한 앎과 국부적인 기억”을 결합한 계보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이는 이중적으로 불충분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첫째, 특수한 지식인으로서 푸코가 70년대 전반까지 수행한 작업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규율 권력, 규율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는 규율 권력 이외의 또다른 권력의 메커니즘, 곧 생명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규율 권력과 생명 권력은 서로 동질적인 것도 서로 대립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상이한 영역에서 상이한 목표를 위해 상이한 기술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두 가지 권력의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계보학 작업이 좀더 충실하게 수행되기 위해서는 이 두 번째 권력의 유형, 곧 생명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불충분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점은 권력 안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규율 권력이 규격화되고 정상화된 개인들을 제작하여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규율 권력에 대한 저항은 무엇보다 규격화에 대한, 정상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그러나 규격화/정상화에 대한 저항은 충분한 것인가? 우선 규격화/정상화에 대한 저항은 필연적으로 특수한 규율 권력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왜냐하면 규율 권력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개인들, 주체들이란 없으며, 규율 권력을 통해서만 비로소 개인들과 주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격화/정상화에 대한 저항은 규율 권력 내부에서 규율 권력이 개인들, 주체들을 생산하기 위해 설정한 “규준들normes”에서 벗어나는,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고 행위하는 데서 성립한다.[이 점에 관한 좋은 논의로는 Guillaume Le Blanc, La pensée Foucault, Ellipses 2006, 1장을 참조.] 더 나아가 각각의 규율의 영역들에서 고립되어 있는 규율된 주체들, 개인들이 서로 소통하여 규율들의 연관망에 저항하는 “우리”를 형성할 수 있도록 소통의 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이러한 경험들, 이러한 고립된 반역들이 공통의 지식과 상호 조정된 실천으로 전환될 수 있어야 한다.” DE II, p. 176.] 그리고 바로 여기에 특수한 지식인들의 역할이 있다. 특수한 지식인들은 규율 권력 내부에 있는 주체들이 (규율 권력의 지식이 아니라) 규율 권력에 대한 지식을 형성하고,[이 지식은 각각의 주체들이 이미 암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른 영역의 개인 주체들과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한다.[푸코가 주창하여 설립한 “감옥에 관한 정보모임Group d'information sur les prisons”의 창설과 활동은 바로 이러한 특수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모임의 결성 선언문과 활동 내용에 대해서는 DE II, pp. 174 이하 참조.]
하지만 권력이 특수한 개인들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리고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규준에 따라 개인들을 규격화/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집합적이고 익명적인 규준들에 따라 전체 인구를 조절하고 정상화하려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규율 권력에 저항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러한 권력의 작용에 저항할 수 있는가? 아니 그 이전에, 특수한 규율 권력의 영역 안에서 형성된 개인 주체들이 아니라 인구 전체의 차원에서 규격화/정상화의 작용에 저항하는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의 성과들을 포기하지 않고 생명 권력이라는 새로운, 또 다른 유형의 권력의 작용에 맞서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이 70년대 전반기까지 푸코가 수행했던 계보학 작업이 직면한 위기였으며, 생명 권력에 대한 작업은 이러한 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한 모색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규율 권력과 생명 권력의 차이
규율 권력과 생명 권력 개념은 몇 가지 점에서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양자는 권력에 대한 관계론적 관점을 방법론적 기초로 삼아 분석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노선 위에 있다. 또한 두 개념은 이전까지 정치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던 영역을 정치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또 그곳에서 정치 권력의 핵심 메커니즘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규율 권력 개념이 학교, 공장, 병원, 감옥 같은 곳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주요 권력(곧 규율 권력)이 형성되고 정련되어 확산되는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나 생명 권력 개념이 출생율과 사망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에 관한 통계학적 분석에서 19세기 이후 서양 사회를 조절하는 주요 권력의 징표들을 찾는 것에서 이를 잘 살펴볼 수 있다.
반면 양자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차이점들이 존재하며, 이러한 차이점들은 왜 푸코가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 생명 권력에 대한 분석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통치의 문제설정으로 이행하게 되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첫째, 두 가지 권력은 우선 대상에서 차이가 난다. 17세기-18세기에 걸쳐 등장한 규율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삼아, 감시와 훈련, 이용 및 처벌이 가능한 순종적인 신체, 유순한 개인들로 해체하는 권력이라면, 18세기 말에 등장하기 시작한 생명 권력은 개체가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 또는 인구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권력이다.
이러한 대상의 차이는 두 가지 권력의 기술이 추구하는 목표,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동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한 차이에서 유래한다. 규율 권력이 목표로 삼는 것은 정치권력에 순종하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개인들을 “제작해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규율 권력의 목표는 다양한 규율의 기술들을 통해 예속적 주체, 개인들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생명 권력은 더는 개인들 및 그들의 신체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조절과 관리를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들의 규율과 예속이 아니라 인구 전체의 생명의 보존과 증진, 강화가 문제가 되며, 보건 의료의 시행과 사회 보장 제도의 도입, 각종 인구 정책의 도입 등이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행되는 구체적인 권력의 기술이다.
세 번째 차이점으로는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과 달리 생명 권력에 대한 논의에서는 국가의 활동, 국가의 작용이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감시와 처벌에서 국가는 권력 관계 분석에서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는 권력 관계를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한 주요 장애물로만 인식될 뿐, 독자적인 실재성을 지닌 권력 관계로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서 국가를 분석하기 위한 주요 개념 장치로 제안한 “국가 장치appareil d'état” 개념에 대한 불신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국가장치라는 통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너무 광범위하고 너무 추상적이어서 신체 및 개인들의 행위, 몸짓, 시간에 대해 행사되는 이 직접적이고 미세하며 모세관 같은 권력들을 가리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 장치는 권력의 미시물리학을 해명하지 못한다.”[M. Foucault, PS, p. 17. 또한 “Questions à Michel Foucault sur la géographie”, in DE III도 참조.]
하지만 생명 권력/생명 정치에 대한 분석에서 국가는 권력의 주요 집행자로 등장한다.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3월 17일 강의 첫머리부터 이 점을 명시한다. “19세기의 기본 현상 중 하나는 소위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인 것 같다.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장악하는 것, 생물학의 국유화라고나 할까, 아니면 적어도 생물학의 국유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의 경도 현상이다.”(IFDS, p. 213/277쪽) 또한 푸코가 인종주의를 “국가 인종주의”로 제시하는 데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사실 각각의 개인이나 이러저러한 특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종으로서 인구의 생명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작용이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푸코가 권력 분석에서 중심과 주변, 상부와 하부의 모델, 따라서 소유의 모델을 다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국가라는 집행자를 더 이상 권력의 주체로, 지배의 주체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계보학적 관점에서 국가 개념을 개조하는 것이다.[푸코는 2년 뒤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한 강의에서 이러한 방법론적 논점을 좀더 엄밀히 표현하고 있다. NB, pp. 78 이하 참조.]
그런데 이렇게 되면 푸코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또는 조심스러운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푸코의 입장은 알튀세르의 관점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의학 권력에 관한 강의로부터 불과 2년 뒤에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장치”라는 용어, 심지어 “국가 장치”라는 용어가 긍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제도들은 예컨대 경찰과 같은 장치들에서 볼 수 있듯이 손쉽게 국가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경찰은 국가 장치이며 동시에 규율 장치un appareil de discipline et un appareil d'état다.”(IFDS, p. 223/ 288쪽)
하지만 푸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77-78년 강의록인 안전, 영토, 인구에서는 국가에 대한 분석에서 “통치gouvernement” 또는 “통치성gouvernementalité” 개념을 도입한다. 통치라는 용어는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에서 면면히 이어 내려오는 것이지만,[특히 중세 정치철학에서 근대에 이르는 통치 개념의 역사에 관해서는 Michel Senellart, Les arts de gouverner, Seuil, 1995 참조.]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16세기 반마키아벨리 저술가였던 기욤 드 라 페리에르Guillaume de La Perrière가 도입한 통치 개념이다. 그의 통치 개념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그는 통치를 군주와 신민의 관계에 제한하지 않고, 가족, 수도원, 학교 등과 같은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에 적용되는 다양하고 내재적인 “기예”로 보았다. 둘째, 그는 마키아벨리와 달리 통치의 핵심 문제를 영토의 문제로, 곧 군주가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민들의 복종을 이끌어내는 능력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고, 인구 또는 사람들과 사물들 사이의 복합체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기예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푸코는 18세기 말 이후 서양 사회에 확산된 통치의 기술은 라 페리에르가 제시한 두 가지 개념적인 규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본다.
통치 개념의 도입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이는 생명 권력 개념에 의해 권력 분석의 주요 대상이 된 국가를 계보학의 관점에서 다루기 위한 푸코의 의도를 대변해준다. 사실 푸코가 성의 역사 1권이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제시한 생명 권력이나 생명 정치에 대한 분석은 국가를 주요 집행자로 제시하고, 생명 권력이 작동하는 다양한 영역들을 예시하고 있지만, 국가가 권력의 장치로서 기능하는 구체적인 기술 또는 “기예”에 관해서는 충분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통치 또는 통치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기술을 해명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안전, 영토, 인구 및 생명정치의 탄생의 편집자인 세넬라르가 생명 권력 개념과 통치 개념을 대체의 관계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M. Senellart, “Situation des cours”, in STP, p. 399.] 둘째, 이 개념은 우리가 앞서 지적했던, 생명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생명 권력 개념이 그 이전까지의 푸코의 작업에 대해 제기하는 난점은 그것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규율 권력과 달리 생명 권력은 개인 주체가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구에 대해 작동하며, 그것이 제시하는 규준 역시 집합적이고 익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푸코가 도입한 통치라는 개념은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해준다.
푸코는 「주체와 권력」이라는 글[이 글은 허버트 드레퓌스와 폴 레비나우의 저서에 부록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Hubert Dreyfus & Paul Rabinow, Michel Foucaul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주체와 권력」, 정일준 편역, 앞의 책.]에서 그때까지 자신의 작업을 세 가지로 구별하고 있다. 첫째는 스스로에게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질문 양식이고(이른바 고고학적 작업), 둘째는 “주체의 대상화”, 곧 미친 자와 정상인 자, 병자와 건강한 자, 범죄자와 착한 소년들을 구별하는 실천에 관한 분석이며, 셋째는 인간이 자신을 주체로 전환시키는 양식에 관한 연구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말하고 있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예속화assujettissement/sujétion 양식과 주체화subjectivation 양식의 갈등적인 과정에서 산출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를 변형시켜나가는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푸코는 규율 권력에 대한 분석, 특히 감시와 처벌이나 비정상인들에서 근대 규율 권력이 어떻게 개인 주체들을 예속적 주체로 생산해내는지 분석한 반면, 생명 권력/생명 정치 개념이 도입된 이후 말년의 몇몇 글에서는 예속적 주체들, 규율된 주체들이 생산되는 예속화 양식과 구별되는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푸코가 제시하는 주체화 양식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코에게서 권력은 관계론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두는 게 좋다. 하지만 권력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앞서 간단히 지적했던 것처럼 반드시 모든 주체가 예속적 주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권력을 관계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권력의 기술에 따라 예속적인 주체가 산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이전에, 권력의 작용 속에는 항상 이미 저항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는 것, 또는 예속적인 주체는 항상 이미 그 예속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계로서의 권력은, 고착된 상태의 권력 관계, 곧 지배와 구별되며, 그 자체 안에 항상 저항과 자유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론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예속과 지배가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저항과 자유 역시 관계들로 구성된다.
다시 앞의 논의로 돌아간다면, 저항의 문제, 규격화/정상화의 작용에 대한 반항의 문제와 관련하여 생명 정치와 통치성의 개념은 두 가지의 상이한,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푸코는 후기에 씌어진 「반역하는 것은 무익한가Inutile de se soulever?」라는 짧은 글에서 생명 정치의 관점에서 “반역” 또는 “봉기”의 가능성을 제기한다.[DE III, pp. 790-94.] 푸코는 “반역”의 의미를 역사적인 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와의 구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가능성 자체로 이해한다. 그런데 푸코에게 이러한 가능성은 바로 “생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떤 한 사람, 한 집단, 소수 집단이나 민족 모두가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그가 부정의하다고 판단하는 권력의 면전에서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운동, 이 운동은 내가 보기에는 제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권력도 이를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 획득되거나 요구된 모든 형태의 자유,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권리는 [...] 분명 여기에 자신의 궁극적인 고정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자연권”보다 더 견고하고 더 가깝다.(DE III, pp. 790-91)
이 구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먼저 푸코는 여기서 권력과 생명, 또는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는 어떤 생명체들을 대비시키고 있다. 전자의 권력이 규격화/정상화하는 권력, 규율 권력이자 생명 권력이라면, 후자의 생명의 운동은 이러한 규격화/정상화에 저항하는 생명체에 고유한 규준성normativité의 표현(캉길렘의 의미에서),[하지만 이는 또한 스피노자, 푸코에게도 공통적이다. P. Macherey, “Pour une histoire naturelle des normes”, in collectif, Michel Foucault philosophe, Seuil, 1988; Guillaume Le Blanc & Pascal Sévérac, “Spinoza et la normativité du conatus”, in Jacqueline Lagrée ed., Spinoza et la norme, PUPC, 2001 참조.] 또는 일종의 생명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생명체의 규준성은 모든 권리의 궁극적인 기반이 된다. 다시 말해 반역 내지 봉기의 운동은 자연권이나 인권 같은 초월적인 규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정상화에 저항하는 생명체에 고유한 규준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생명의 규준성은 항상 역사 속에서 발현되고 역사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건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 초월적이기도 하다. 이는 곧 아무리 강력한 권력일지라도 온전히 제거해버릴 수 없는 저항의 가능성이 항상 이미 생명 속에 내재해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모든 자유와 권리, 따라서 모든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푸코는 권력 관계가 함축하는 자유로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말년의 한 대담에서 “자기 통치” 또는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이는 HdS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타인과 관련된 전략들을 구성하고 정의하고 조직하며 수단화할 수 있는 실천들의 총체”[정일준 편역, 앞의 책, 124쪽.]로서의 자기 통치 또는 자기 관계는 권력의 관계들에서 벗어나 있는 자유로운 개인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권력의 전략적 관계들 속에서, 지배 권력의 기술들과 다른 새로운 자기 구성의 기술을 실행하려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확립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봉기의 근거로서 생명체의 규준성이라는 관념이 푸코가 생각하는 생명 정치의 일단을 표현해준다면, 자기 통치의 개념은 지배적인 관계에 의해 포섭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지배 관계를 구성하지도 않는 일종의 생명 윤리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결합될 수 있을까? 푸코가 말년에 고심했던 핵심적인 문제 중 한 가지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또한 생명 권력에 대한 분석에 머물지 않고, 더욱이 인간의 존엄성,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낡은 기독교적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발전과 생명체의 인공적인 변형 가능성에 대해 금지와 배제의 태도로 일관하는 기존의 생명 윤리의 고답적인 태도[이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도미니크 르쿠르, 인간 복제 논쟁 권순만 옮김, 지식의 풍경, 2005 참조.]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숙고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