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balmas님의 "푸코 심포지엄 참관기-교수신문"

전체적으로 무엇을 질문하려는 의도인지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가 생각보다 좀더 미묘합니다. 도그마님이 정리하신 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전적인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ㅎㅎ

 

사실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알튀세르의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변화했다고 볼 수 있고, 그 이론 내부에 얼마간 애매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1) 알튀세르는 리얼리티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그 리얼리티를 넒은 의미의 '경제', 곧 생산양식이라고 생각했고, 맑스주의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고 봤죠. 도그마님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도 도그마님이 이미 포스트맑스주의적 관점을 은연중에 전제하기 때문일 겁니다. 적어도 알튀세르 자신은 맑스주의자로서 리얼리티는 계급투쟁, 특히 생산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리얼리티를 직접 인식하지 않고 상상계를 통해서 인식하게 됩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정의하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 또는 이렇게도 정의합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 것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다."

 

여기서 핵심 논점은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상/재현/상연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현실적인 실존 조건이란 계급적 조건을 말합니다. 곧 자본주의를 비롯한 계급사회에서 모든 인간, 개인은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하지 추상적인 개인이나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 속에서 어떤 계급에 속한 사람은 어떤 계급의 성원으로 나타나지 않고(재벌, 노동자, 농민, 지식인 ...) 인간으로서, 개인으로서 나타납니다. 곧 이데올로기 속에서 계급 성원으로서 x는 추상적인 개인 x로서, 계급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그러한 조건에 앞서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개인으로서 상상적으로 표상/재현/상연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은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전혀 환상적이거나 공상적인 것은 아닌데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는 법적 체계를 통해 모든 사람을 법적 주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주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제도적 차원에서 그렇게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실 사회에서 각 개인은 계급이라는 현실적인 존재조건에 따라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계급적 조건에 선행하는 추상적인 개인 x로 나타나며, 또한 이데올로기적 제도 속에서 그렇게 규정되어 있는 거죠.

 

알튀세르가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든 사례를 보면, 노동자와 자본가는 계급적으로 상이하고 또 불평등하지만, 법적인 관계에서 보면 동등한 개인, 동등한 법적 주체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고용 계약을 맺는 거죠.

 

3) 이렇게 본다면,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게 '경제'를 '리얼리티'로 간주하면서도,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리얼리티에 대한 '표상'이나 '상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리얼리티 자체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사고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이런 의미에서 알튀세르는 고전 맑스주의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고전 맑스주의와 상당히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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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마 2012-04-13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알튀세르를 왜곡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조심스럽게 얘기할 필요는 있지만 그게 바로 알튀세르의 머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아닐까요? (알튀세르가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의는 아닐지라도)

계급의 한 성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리얼리티"라면 다른 것들, 예를 들어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한도 끝도 없다!) 이것들은 "리얼리티"인지 아닌지 궁금하군요. 그건 리얼리티를 계급으로 환원한 것 아닌가요?

가장 궁금한 것은 알튀세르는 어떻게 그것이 "리얼리티"인지를 알았는가? 하는 겁니다.

덧붙이자면 "민족"이나 "국민"만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로 표현된 이상) "계급"이라는 것도 모호한 것입니다.

좀 더 고백하자면 저는 "리얼리티"가 언어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리얼리티"는 언어 바깥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비로소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보는 거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겠죠.

어쨌든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포스트맑스주의를 섞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정의를 왜곡한 게 되겠군요.)

그렇다고 해도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 는 주장을 철회할 필요는 없겠죠?


balmas 2012-04-14 01:46   좋아요 0 | URL
ㅎㅎ 예 맞습니다. 그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아마 알튀세르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알튀세르의 경우에는 더 역설적일 수 있을 텐데요, 다른 누구보다도 비경제적인 것(곧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강조하고 그것이 역사와 정치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사람이 알튀세르였으니 그렇겠죠. 다만 알튀세르(를 포함한 고전 맑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왜 경제만 리얼리티냐,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등(하도 끝도 없다)도 모두 리얼리티 아니냐'라고 반문할 경우, 다시 말해 리얼리티의 복수성, 다수성을 무한정하게 확장할 경우, 인식론적 비규정성에, 따라서 정치적 무력화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러웠겠죠. 사실 도그마님이 질문한 것처럼, 젠더,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등이 다 리얼리티라면, 따라서 경제와 똑같은 인식론적, 정치적 비중을 지니게 된다면, 거기에 더 이상 정치가 존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더욱이 어떤 포스트맑스주의자도 아마 지역, 종교, 신분, 연령, 에스니시티 같은 것을 '경제'와 대등한 리얼리티라고 하지는 않겠죠.

'선거를 통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은 저로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선거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만 리얼리티가 바뀐다는 뜻인지, 아니면 리얼리티는 바뀔 수 없는 것이다라는 뜻인지도 불분명하구요. 우선 도그마님의 생각을 스스로 좀더 정확히 정리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그마 2012-05-07 13:3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 세계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프랑스나 한국이나) 선거를 통해서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 정의에 좀 더 충실해도 프랑스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모른다고 결론내려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알튀세르의 정의에 충실하다면 "누군가는 리얼리티를 안다"고 되기 때문에 좀 더 복잡해지겠죠.
 
성찰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37
르네 데카르트 외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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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토요일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을 한 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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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웬만한 교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다 다 알고 있는 서양 근대 철학의 아버지다. 또한 ‘코기토 에르고 숨’,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인문학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말이다.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니 전집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그의 주요 저작은 당연히 다 번역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책인 [성찰]이 라틴어 원전에서 직접 번역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또 [성찰]과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성찰에 대한 학자들의 반론과 데카르트의 답변]은 올해 들어서야 마침내 한글로 번역되었다.

 

사실 교양 독자들이라면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홉스, 로크, 버클리,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근대 철학의 대가들의 저작 중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책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전문가들이 신뢰할 수 있게 번역한 책들은 더욱 더 적다. 이는 그만큼 국내 철학계가 아직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상황에서 번역ㆍ출간된 데카르트의 이 저작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책이다.

 

보통 독자들만이 아니라 대개의 철학 전공자들도 잘 모르는 [성찰]의 비밀 아닌 비밀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또한 「옮긴이 해제」에서 잘 소개하고 있듯이 [성찰]은 처음부터 다른 학자들과의 토론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저명한 데카르트 연구자 장-뤽 마리옹의 표현을 빌린다면 [성찰]은 애초부터 ‘답변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성찰]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충분히 음미하기 위해서는 7개의 반박문과 더불어 데카르트의 답변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굳이 이런 배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반박문을 집필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의 면면을 본다면 이 책은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하다. 가령 두 번째 반박문은 데카르트의 후원자이자 당대 유럽 지식계의 소통 창구였던 메르센 신부가 집필했고, 세 번째 반박문은 홉스가 썼으며,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지도자였던 앙투안 아르노는 네 번째 반박문에서 날카롭게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있다. 또 근대 유물론 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피에르 가상디는 가장 긴 다섯 번째 반박문을 썼다.

 

논쟁의 주제들 역시 [성찰]의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신존재증명, 정신과 신체의 연합, 회의의 타당성, 데카르트 관념이론의 성격, 자유의 본성, 사고하는 주체의 정체 등 근대 철학의 주요 쟁점들이 이 반박과 답변에 담겨 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초기 근대 철학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집약돼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근대 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책이다.

 

좀더 상세하고 엄밀한 검토는 전문적인 토론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겠지만, 성글게 읽어본 바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라틴어에 능숙한 데카르트 전공자가 번역해서 원전을 일일이 살피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잘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책의 말미에 역자가 덧붙인 「해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에 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돕고 있다. 그러나 사족처럼 덧붙인다면, 본문에 나오는 전문 용어들이나 논쟁의 배경에 관해 좀더 상세한 역주가 있었더라면, 그리고 책의 구조와 논쟁의 쟁점들에 대한 좀더 폭넓은 해제가 있었더라면, 이 번역은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이 사소한 딴죽이 이 번역의 의의와 역자의 노고를 결코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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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012-04-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에 문예출판사(이현복 역)에서 나온 "성찰"보다 이 책의 번역이 더 좋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혹시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으셨다면 그 책에 대한 발마스 님의 서평이나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balmas 2012-04-11 04:07   좋아요 0 | URL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성찰]이고, 지금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은 이 [성찰]을 둘러싸고 데카르트 비판가들과 데카르트가 주고받은 반박과 답변의 기록이니까 두 책이 서로 다르죠.

[피로사회]는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만한 게 없습니다.

nom 2012-05-0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성찰]은 데카르트의 대표작이지만, 이 책에는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가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 곧 ‘나는 존재한다, 나는 실존한다’는 명제가 나올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양자 사이에는 꽤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성찰]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론과 답변을 묶은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코기토 에르고 숨’이 아니라‘에고 숨, 에고 에그지스토’가 제시되는 이유에 대한 데카르트의 자신의 언급은 없는 건가요?

balmas 2012-05-01 04:27   좋아요 0 | URL
예 데카르트 자신의 언급은 나오지 않죠. 이 주제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학위논문 주제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cplesas 2012-07-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서야 이름을 걸고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기존 nom이라는 가명의 댓글은 저의 것입니다. 저의 이름을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알라딘 서재로 로그인이 이어진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만큼 이 곳이 낯설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선생님께 데리다의 <입장들>과 <법의 힘>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는, 전남대 철학과 학생 이무영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학부생이었는데, 지금은 석사를 졸업하는 시점에 있어요. 선생님께 질문드린 바로 그 주제로 석사논문을 작성해서 제출하였습니다. 덧붙여 원석영 선생님의 국역본 도움에 힘입은만큼, 오늘 <성찰> 국역본에 서평을 달다가, 선생님의 링크를 보고 다시 여기로 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쯤 꼭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아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군요. 많은 번역서들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립니다. :)

balmas 2012-07-09 11:08   좋아요 0 | URL
무영님 반갑습니다. 벌써 석사졸업을 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제로 논문을 쓰셨네요. 앞으로 공부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종종 들르세요.
 
젠더와 민족 트랜스 소시올로지 11
니라 유발-데이비스 지음, 박혜란 옮김 / 그린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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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자 [경향신문] "명저 새로 읽기" 코너에 실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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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네이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저런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마주치게 되는 필자가 니라 유발-데이비스였다. 특히 네이션과 여성의 문제라는 주제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그녀의 이름을 볼 수가 있었다. 언젠가 읽어봐야지 벼르던 참에 그녀의 대표작 중 한 권이 번역ㆍ출간되었길래, 냉큼 이 달의 서평 대상 도서로 골라잡았다.


이 책의 기본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1980년대 이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는 양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도입으로 이론상으로도 질적인 도약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 출간된 90년대 후반까지 여성의 입장에서 네이션의 문제를 고찰하는 저작은 매우 드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네이션에 관해 페미니즘적인 접근법을 도입한 문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네이션의 문제가 페미니즘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데 중요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인 페미니즘에 대한 반성의 소산이다.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는 공통의 조건을 지니고 있지만, 서구의 여성과 이슬람 여성, 아프리카의 여성, 아시아의 여성은 억압의 방식과 차별 및 배제의 경험에서 각각 다르다. 따라서 자매애라는 추상적 연대의 몸짓은 오히려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 현실을 은폐하기 십상이다.


또한 네이션은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일반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에게 중요한 문제다. 네이션은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상적인 준거다. 그런데 여성은 네이션의 생물학적 재생산의 임무를 할당받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러시아, 어머니 아일랜드, 어머니 인도”(88쪽)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정체성의 상징이 되기를 강요받는다. 여성이 이 역할을 거부하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추방과 살해, 모욕과 배제 같은 각종 폭력이 가해진다.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덮어두려고 하거나 위안부 박물관 건립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시선은 어찌 보면 네이션 속에서 여성의 위상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네이션과 젠더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현실에 직면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횡단성의 정치를 제안하고 있다. 횡단성의 정치는 “‘동질적인 출발점’을 가정함으로써 포함이 아닌 배제로 끝나는 ‘보편주의’, 그리고 ‘차별적인 출발점’으로 인해 어떤 공통된 이해나 진정한 대화도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는 ‘상대주의’”(233쪽)와 구별되는 정치적 전망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두 가지 논점을 포함한다. 우선 횡단성의 정치는 자기 중심의 상실을 가정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연대나 통합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나 약소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연대의 근거가 사라질뿐더러 연대 자체가 무비판적인 동질화로 변질되기 쉽다. 연대가 진정한 연대이기 위해서는 연대하는 이들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 삶의 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서로 상이하고 독특한 이들 사이의 ‘옮기기’의 방식이 모색되어야 한다. 횡단성의 정치는 연대하는 이들과 일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뿌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양립할 수 있는 목표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본문이 240쪽에 불과한 적은 분량의 책이어서 빨리 읽을 수 있겠거니 짐작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만만치 않았다. 이는 이 책이 고도의 형이상학적 사변으로 이루어진 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책이 비서구 사회의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억압의 사례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다양한 형태의 여성 투쟁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려움은 늘 추상적으로만 사고하는 필자와 같은 한국의 남성 철학도의 한계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자에게 구체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 호된 죽비와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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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 건너편 서가를 살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서가에 둔 걸까? 러시아 문학이나 뭐 그런 쪽에?


사서는 컴퓨터로 검색했다. 우리 둘 다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친밀하고, 숲 속 나무 사이를 홀로 산책하는 사람처럼, 서로의 자유 주변을 맴도는 특별한 시간으로 가득했다.


사서가 고개를 들고 말한다. 두 권 소장 중인데, 안타깝게도 모두 대출됐네요. 예약해 드릴까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사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에 책 세 권을 들고 있는 다른 할머니 - 나보다 나이가 적다 - 쪽을 돌아본다. 사람들이 책을 드는 방식은 특별해서, 다른 어떤 물건을 들 때와도 다르다. 움직이지 않는 물건이 아니라 마치 잠이 든 어떤 것처럼 든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들 때 같은 방식으로 드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인구 육 만 명 정도의 파리 교외 지역에 있는 공공도서관이다. 그 중 사천 명 정도가 도서관 회원으로 책을 (한 번에 네 권까지) 빌릴 수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 참고서적을 보러 온다. 교외 지역의 아기나 어린이 숫자를 고려하면, 지역 주민 열 명 중 한 명은 도서관 회원으로 등록을 해서 종종 책을 빌려가 집에서 읽는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누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일까? 아닐 것 같다. 둘 다 그 책을 처음 읽는 걸까? 아니면 둘 중 한 명은 나처럼, 이전에 읽었지만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었던 걸까?


순간 이상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 두 독자들 중 한 명과 내가 마주친다면 - 일요일에 열리는 장터에서, 지하철역에서 나오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빵을 사면서 - 우리는 서로 조금은 의아하다고 느낄 어떤 눈짓을 주고받지 않을까?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감동을 받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내가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문화적 유산이 아니라 좀 더 특이하고 개인적인 것이다. 마치 누군가 읽은 이야기의 혈류가 그 누군가가 살아온 이야기의 혈류와 만나는 것 같다.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되고 있는, 혹은 앞으로 계속 되어갈 어떤 모습에 보태진다.


복잡할 것도 갈등도 없는 가족관계 안에서, 우리를 만들어낸 그 이야기들이, 생물학적 조상과는 다른, 우리의 공통조상이 된다.


파리 교외의 누군가, 아마도 오늘 밤 의자에 앉아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을 그 누군가는, 이미, 이런 의미에서, 먼, 먼 사촌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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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전문 번역가인 후배와 함께 존 버거의 최근작인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이라는 책을 함께 번역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원제는 Bento's Sketchbook인데, 알다시피 Bento는 스피노자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번역이 다 끝나고 이제 교정을 보고 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존 버거가 워낙 뛰어난 소설가, 산문가여서 재미도 있거니와,

사람과 세상을 보는 존 버거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도 여전해서

아주 재미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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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지구적인 폭정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얼굴이 없다는 점이다. 총통도, 스탈린도, 코르테즈도 없다. 오늘날 폭정의 작동은 대륙마다 다르고, 양식은 해당 지역의 역사에 따라 변형되지만, 전체적인 패턴은 동일하다, 순환하는 패턴.


가난한 자와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의 구분은 하나의 심연이다. 전통적인 제약이나 권고는 모두 산산조각 나버렸다. 소비주의는 모든 질문하는 행위를 소비해버린다. 과거는 쓸모없는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자아를,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적을 정하고, 찾아내기 시작했다. 적은 - 종교적, 혹은 민족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뭐든 - 항상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나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순환적 패턴은 사악한 것이 된다.


이 체계는 경제적으로는 부를 생산하면서, 가난을 더 많이, 집 없는 가족을 더 많이 만들어내고,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가난한 자들의 무리를 배제하고, 결과적으로는 제거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경제적인 순환이 오늘날 인간의 상상력을 무력화해버리는, 잔인함에 대한 능력을 키운다.



현장에 가서, 지켜보고, 조사하고, 기록하고, 수정하고, 최종 글을 완성한다, 글이 출간되고, 널리 읽힌다 - 어느 정도가 ‘널리’이고 어느 정도가 ‘좁게’인지는 절대 알 수 없지만 - 문제 작가가 되고, 협박을 받고, 또한 지지도 받고, 수 백 만 명의 남자, 여자, 아이들에 대해 쓰고, 누군가를 경멸했다고 욕을 먹고, 계속 써나가고, 더 거대하지만 피할 수도 있는 비극으로 이어질 힘 있는 자들의 다른 계획들을 까발리고, 기록하고, 대륙들을 오가고, 명백한 절망을 목격하고, 쉬지 않고 책을 내고, 반복해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매달 쉬지 않고 싸우고, 그 달들이 모여 몇 해가 된다. 아룬다티 당신을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가 경고하고 맞서 싸우는 대상은 검증도, 반성도 없이 계속 된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계속 된다. 마치 묵인된, 깨지지 않는 침묵 속에서처럼 계속 된다. 거기에 대해 그 누구라도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것처럼 계속 된다. 그래서 자문한다. 말이 중요한 걸까? 이런 대답이 분명히 돌아왔을 것이다. 여기서 말은 손이 묶인 죄수를 강물에 던져 넣기 전 주머니에 채워주는 돌멩이 같은 거라는.


분석해 보자. 깊이 있는 정치적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 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 치고, 글을 쓰는 것)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零)으로 떨어지는 것, 강요된 침묵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있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 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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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2-03-05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첫문장 부터 마음에 들더니...결국 끝까지.^^ 감사합니다.아...그리고 푸코 세미나 참관기도 잘 읽었습니다. 우연히 서점에서 사카이 다카시의 <통치성과 자유>가 눈에 들어와서 가방에 넣어왔는데..ㅎㅎ 이 주제에 어떤 애정이 느껴지며 왠지 엮일 것 같은 생각이..푸코의 강의록 이외에 다른 추천 책들 생각나실 때 언급해주세요.ㅎㅎ 봄이네요.대학가는 풀잎처럼 파릇 파릇한 새내기들로 흥청거리겠군요..곧 입에 풀칠하기 위해 파리해지겠지만.

balmas 2012-03-13 14:29   좋아요 0 | URL
드팀전 님/ 흥미롭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푸코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네요. 아마 푸코 강의록이 좀더 번역되면 국내에서도 훨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푸코의 맑스]라는 책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푸코와 이탈리아 기자의 대담집인데, 재미있는 책이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고 그린비 블로그에 가시면 아주 상세한 푸코 연표와 통치성에 관한 외국 학자들의 글이 몇 편 번역돼 있으니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바벨의도서관 2012-03-07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룬다티 로이는 여자이므로 그가 아니라 그'녀'라고 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

balmas 2012-03-09 00:25   좋아요 0 | URL
예 그러고보니까 그렇군요. 최종 교정 볼 때 바꾸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