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이방인”
     
민영순 전시회 'Xen-이주, 노동과 정체성'

 김윤은미 기자
 2004-08-15 19:48:47



벽에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붙여져 있다. “세계 인구 35명 중 하나는 이주민이다”, “다른 선진 산업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이주노동자들을 3D업종에 신축성 있는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방 한가운데 설치된 프로젝터가 돌아가면서 파란색 빛을 벽에 쏜다. “4년 이상 한국에 거주하고도 신고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은 2003년 말까지 강제로 한국을 떠나도록 압박 받아왔으며, 이것은 마치 쓰고 나면 버리는 일회용 컵과 같은, 혹은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설명하는 압축적인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이 작업은 13일부터 9월 18일까지 쌈지스페이스에서 열리는 민영순의 전시 'Xen-이주, 노동과 정체성'으로, 2층 프로젝트 갤러리에 설치되어 있다.

‘이방인’으로 주변에 위치한 이들

전시 제목 ‘xen-’은 '손님,' '외국인,' '이방인,' '침입자'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그리스어 어근으로, 동양 종교철학 선 사상(禪) Zen과 동음이의어이기도 하다. 작가 민영순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방인(xen-)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명상(zen)하도록 유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민영순의 전시처럼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의 정체성을 다룬 전시는 흔치 않은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라는 다중 정체성을 지녔기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지난 4월 추방된 이주노동자 단체의 리더 네팔인 사마 타파부터 군포에서 노동하는 방글라데시인들, 직장에서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파키스탄인 등 30여명을 인터뷰해서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3층 메인 갤러리에 설치된 ‘현장/직업’ 작업에서 관련 인터뷰들을 볼 수 있다.

1층에 설치된 ‘3D 출구: 절망적인(Desperate), 일회용(Disposable), 추방된(Deported)’는 “사마 타파는 2004년 2월 15일 강제 연행된 후 추방되었다”라고 작가가 직접 기록한 작은 종이를 멀리서 카메라가 확대시켜 보여주는 작업이다. 관객들은 카메라를 통하지 않고서는 종이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작가는 이 같은 간접적인 전시를 통해 한국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회단체들을 통해서만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주변적인 위치를 비유한다.

노동자들의 해외 이주는 서구 선진국가에서 유래된 것인데, 한국 역시 이주노동자들을 3D 업종의 ‘신축성 있는 자원’으로 활용해 왔다.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수의 3D 직종을 마다 않는, 값싼 이주노동자의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을 떨어뜨리는 타자들로 인식될 뿐, 경제성장에 기여한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불법 체류 노동자가 증가한 것도 합법적인 체류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 4위 이산국가’ 한국의 정체성

이주노동자 문제는 한국 내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주는 각 개인의 정체성, 국가/민족의 정체성과도 관련 깊은 주제다. 해방되기 전인 1940년대에도 한국인구의 총 1/5이 모국을 떠나 살았으며, 한국은 현재 6백만 인구가 160여 개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다고 추정되는 세계 제 4위 이산국가다.

민영순은 자기 회의적인 사회일수록 미래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이주민들이 사회 기준 틀에 변화를 가지고 오리라는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반면 정체성이 강하고 균형 있는 사회라면, 이주민에 의해 사회가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3층에 전시된 ‘우리에게 이방인Strangers to ourselves’는 국가, 민족, 이주, 정체성, 타자 문제와 관련된 여러 서적들이 물에 흘러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책이 흘러가듯 속에 담긴 아이디어들도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와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이주하며, 그 이주가 사회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수용해야만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에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 www.ildaro.com
* '일다'에 게재된 모든 저작물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옮기거나 표절해선 안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김택근 편집국 부국장 wtkim@kyunghyang.com〉

청와대 앞 단식 40일째. 지율스님은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다.
스님은 1인 시위라기보다는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눈은 맑고 표정은 밝았다.
그 맑고 밝음이 더 아팠다. 스님의 메마른 손을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천성산, 예쁘고 깊은 산. 원효가 그 품에서 용맹정진했고 남쪽의 소금강이라 불린 산.
그 산의 생명붙이들에게 너희들만은 꼭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도롱뇽을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서류의 인간에 대한 권리요구’라는 호기심으로 쳐다봤다.

스님은 ‘천성산에 도롱뇽이 없다’는 학자의 증언은 역사가 꼭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소송은 6개월 만에 기각되었다. 지금은 다시 항고심이 진행 중이다.


생각하면 울음이 나온다. 매일 산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스님은 내원사의 비구니로 산의 가르침을 받던 천성산의 딸이었다. 그러나 길이 뚫리면 길가 700m 안쪽의 생명붙이들이 겨울잠을 자지 못한다고 해서 절을 뛰쳐나왔다. 이제는 천성산 온갖 생명붙이들의 어미가 되었다.
하지만 저 천성산을 저승으로 가져가야 할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어-


함께 흐느끼던 비구니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시민단체들도 은근히 그만하면 됐다고 한다. 다들 떠나갔다. 청와대 사람들도 조계종단과 시민단체와 얘기가 잘되었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러나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기에 적당히 하라는 것인가.
스님은 고속철 터널구간공사를 중단하고 천성산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하라며 세번째 단식에 들었다. 산에 구멍을 뚫으면 산에서 물이 빠져나가고, 그러면 계곡이 마르고, 그러면 강물이 마르고, 그러면 심성(心性)이 마른다는 것을 다 안다. 그러면서도 산을 파괴하는 것은 천성산을 뚫는 6조원의 돈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천성산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고향의 정기를 끊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되지 않겠다던 대통령 후보 노무현, 도지사 김혁규, 장관, 시장 그리고 지난해 단식기도 때 대통령의 뜻을 믿어달라며 손을 잡아주던 수석비서관 문재인. 그들은 왜 말이 없는가.


스님은 정부가 ‘지율 하나 정도는 죽어도 좋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했다. 일순 햇살이 뒤집히는 듯했다. 등골이 서늘했다. 이제 청와대에서 답을 얻기는 틀린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스님은 육신을 버리러 왔단 말인가. 절망을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작금의 청와대의 침묵은 정녕 무엇인가.

지율스님이 딱 한가지 믿는 게 있다. 도롱뇽의 친구들이 늘어나 1백만 소송인단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권력도, 금력도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천성산을 뚫으면 22분 빨리 간다고 한다. 그러나 22분이 늦더라도 예쁘게 보존된 천성산을 가리키며 전설 하나를 이야기해주는 훗날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저 산을 지키기 위해 이름없는 비구니가 어느날 온 몸을 던졌단다. 그때는 개발논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릴 때였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내놓은 거야. 그 용기와 정성이 온 나라에 녹색 공명을 일으켰지. 푸른 울림이 퍼져나갔다는 얘기다. 그리고 저 예쁜 산을 지켰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현명한 일인지 모른단다. 산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거든.”

우리 모두의 무관심으로 정녕 지율을 죽일 작정인가? 지율을 향한 저 거대한 폭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상은 모든 곳이 천성산인데 지율은 혼자이다.

-세상 모든곳이 천성산-

지율스님의 소망은 천성산 내원사의 바느질꾼이 되는 것이다. 그의 바느질 솜씨는 빼어나다. 스님들 옷을 뒤에서 짓는 일, 그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길 빈다. 지금 지율스님의 단식기도는 온갖 생명붙이들을 품고 있는, 천성산의 옷을 짓고 있는 것이다. 지율스님의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기도해 본다

 

환경문제는 그렇다 치고 무관심때문에 스님 한 분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드무비 2004-08-21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balmas 2004-08-2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좀더 널리 알리면 좋겠습니다.
 


 

 
 
논문 쪼개내기 관행, 이대로 좋은가
'자기표절'을 규율할 객관적 합의 필요하다

2004년 08월 21일   최철규 기자 

논문 하나로 학술지 게재와 교수임용 그리고 연구과제 지원까지 풀코스로 우려먹는 관행이 학계의 무관심속에 방치되고 있다. 중복게재와 쪼개내기로 나타나는 이러한 관행들은 결국 ‘자기표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 거론되는 논문의 질적 하향화와 연구지원비 낭비 현상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표절이나 논문 쪼개내기가 교수업적 평가 제도의 강화와 학술지원 제도의 확산과 맞물린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지적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학계에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단어 하나로 쌓는 업적

자기표절의 유형은 다양하다. 동일한 논문을 제목과 목차만 약간 수정하여 여러 학회지에 투고하는 ‘기본형’부터, 동일한 이론틀과 방법론에 사례의 다양성만 첨가하는 ‘복제형’도 있다. 지역 연구의 경우 사례비교를 통한 일반화를 명목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 수만큼 논문을 쓸 수도 있다. 특히 이공계에서 흔한 경우인데, 해외 저널에 게재한 외국어 논문을 그대로 번역해서 국내 저널에 게재하는 것도 자기표절 시비에 걸릴 수 있다.
논문 쪼개내기의 경우 지난 학기 지방의 모 대학 사학과 교수임용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이 전형적인 예다. 한 지원자가 실적으로 제출한 총 11편의 논문 중 최소 8편이 제목이나 목차의 단어만 다를 뿐 표, 지도, 사료 등의 기초 자료뿐만 아니라 구성과 인용, 전개에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장이나 절별로 쪼개낸 것이라는 것. 중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박사 학위 논문에서 ‘1910년대’와 ‘1920년대’라는 표현이 단지 ‘청말’, ‘민초’라는 용어로 변경되는 식으로 새로운 업적이 만들어졌다니 할말을 잃는다. 현재 이 교수는 임용이 된 상태인데,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편법을 부추기는 업적 평가 시스템

개인의 양심이 기대야 할 최후의 보루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업적평가 시스템과 관련된 다양한 제도가 학자들의 양심을 위협하고 있다는 교수들의 지적을 간과할 수 없다. 상명대 김영미 교수는 “교수나 대학별 업적 평가 시스템이 연구를 독려하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지나치게 양적으로 흐르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특히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평가 제도가 지나치게 양적인 경쟁위주라고 덧붙인다.
신소재공학을 전공하는 지방대의 이 모 교수는 획일적 업적 평가 시스템과 다양한 지방 이공대 육성 사업이 결합해서 자기표절을 부추기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원생 절대 감소를 겪고 있는 지방 이공대의 실정상 각종 사업을 수행하며 연구논문을 작성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표절이 교내 업적 평가에서 좋은 평점을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 또한 연간 업적 평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다년간 프로젝트 이외에도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유혹에 흔들릴 위험이 있다.
해외저널과 국내저널에 평점 차이를 두는 평가 방식이 ‘속 빈 강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SCI 급의 외국 저널을 선호하고 국내지의 경우 학진 등재지나 등재후보지만 공인하다보니 기타 국내 저널에는 실릴 논문이 없다. 학회 편집인의 입장에서는 해외에 낸 논문이라도 약간만 수정해서 국내 저널에 게재하는 것으로 타협하기 쉽다고 손진훈 충남대 교수는 지적한다.

‘전문성’에만 의존하는 주먹구구식 관리 체제

다른 한편, 학회의 주먹구구식 심사 체계가 자기표절이 기생할 토양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한국 NGO학회에는 작년에 게재되었던 논문이 약간만 수정돼 재제출되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편집간사에 의해 우연히 적발돼 게재 불가 판정을 내렸지만, 중복게재 등을 엄격히 걸러내는 체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다른 학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감성과학회나 한국행정학회를 비롯한 많은 학회들이 논문의 독창성을 요구하고 타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게재가 불가하다는 방침을 투고 규정에 못 박고 있지만, 문제는 이런 규정을 관철시킬 기초 체계가 없다는 것. 게재 신청자의 업적 리스트가 완벽하게 DB화 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검색할 수 있는 유용한 툴도 없다. 결국 심사위원의 개인 역량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분야가 좁을 경우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이 막강한 통제력을 발휘하지만, 대단위 학회인 경우 심사할 논문의 양과 촉박한 심사 시간에 의해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시스템 개혁과 비판문화 함께 가야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작 자기표절을 판단할 객관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과학재단의 한 관계자는 주어진 하나의 테마에 여러 개의 실험 단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각 단계별 연구결과를 독립적으로 발표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히 건수 중심이 아니라, 연구 특성을 감안하여 상황을 봐야 한다는 얘기다.
황성우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단순히 원문을 게재하지 않는 이상 “크게 서론-본론-결론으로 나뉜 박사 논문을 쪼개서 발표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학계의 전반적인 관행이기보다는 무모하고 비양심적인 소수의 일이라는 것이 이들의 공통 시각이다.
그러나 주명철 한국교원대 교수는 인문학 분야 해외 박사들의 논문 쪼개내기 관행이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다. 그는 이런 관행이 연구지원비의 낭비며, 장기적으로 학계에 새로운 경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지적 불능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생의학 분야 저널의 투고 요령을 관리하는 인터내셔널 커미티 오브 메디컬 저널 에디터스(ICMJE: International Committee of Medical Journal Editors)의 경우 일차출간과 이차출간 편집인들의 공동 승인, 다른 독자층 겨냥, 일차출간에 대한 명시 등의 여러 요건을 정해 중복게재의 허용 범위를 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중복게재를 판별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표절을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 관행을 근절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인 셈이다.
학자들의 업적 리스트의 엄격한 DB화와 업적 평가 시스템에 대한 재점검 등 굵직한 과제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현저한 자기표절 사례를 실명으로 비판할 수 있는 문화적 여건의 조성이 필요하다. 내 식구 감싸기 식 온정이 만연한 한국 지식 사회에서 자기표절에 대한 공론화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최철규 기자 hisfuf@kyosu.net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인 2004-08-21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표절... 정말 심각한 문제이지요.
그 책이 그 책인 선생님들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balmas 2004-08-21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의 평가 체계는 참 문제가 많죠. 좀더 정교한 평가 체계를 구축해야 할 텐데 ...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느끼고 있으니까 조만한 해결 방안이 나오리라고 기대합니다.

MANN 2004-08-2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둥... 이거 진짜 심각한 문제 같은데요.

balmas 2004-08-2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가 크지. 하지만 전혀 해결 불가능하거나 그런 유의 문제는 아니야. 제도를 좀더 합리적으로 개선하면 많이 줄어들 수 있는 일이지.
 

스피노자 [윤리학] 불어본에 관해 질문해온 분이 계셔서 몇 가지 판본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지금도 판매되고 있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스피노자 [윤리학] 불어본에는 5종류가 있습니다. 출간된 순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맨 앞의 이름은 번역자의 이름입니다).

1. Charles Appuhn, Oeuvres de Spinoza vol. 2. L'Ethique, Flammarion. 1953(초판은 1906).

2. A. Guerinot, L'Ethique de Spinoza, Ivrea, 1993(초판은 1930).

3. Rolland Caillois, L'Ethique, Gallimard, 1994(초판은 1954).

4. Bernard Pautrat, L'Ethique, Seuil, 1999(초판은 1988).

5. Robert Misrahi, L'Ethique, PUF, 1990.

이 다섯 가지 판본은 모두 스피노자 전문가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판본들입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장단점들은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1번과 3번, 4번이 문고판이기 때문에 추천할 만합니다. 다만 4번의 경우 불어 번역과 라틴어 원문 대역판이어서 1번과 3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값이 좀 비쌉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온 판본 중에서 제일 번역이 정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라틴어 원문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많이 사용하지요.

2번의 경우는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서 사용한 판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993년에 재출간되었습니다. 유려한 번역문으로 정평이 있는 판본입니다.

5번의 경우는 저명한 스피노자 연구자가 번역한 가장 최근의 번역본인데, 해설이 풍부한 것이 장점입니다. 매우 긴 서문이 있고, 풍부한 역주들이 달려 있습니다. 다만 연구자 개인의 관점이 좀 많이 반영되어 있어서,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들도 좀 있지요.

 

현재 프랑스에서 제일 많이 사용되는 판본은 1번의 아푕판과 4번의 포트라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 두 가지 판본, 특히 포트라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윤리학] 번역본이 준비 중인데, 이 판본은 1999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새로운 스피노자 고증본 전집(PUF에서 간행 중)의 한 권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번역자의 역량으로 볼 때 지금까지 나온 판본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뛰어난 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출간되었으면 좋겠는데, 정확히 언제쯤 나오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릴케 현상 2004-08-2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니까^^ 추천

balmas 2004-08-2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는 계속 정보를 올려야겠군요.^^
 

"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율스님 여동생의 호소문

 

다음은 지율 스님 여동생이 19일 천성산 대책위 홈페이지에 올린 호소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저에게는 언니가 둘이 있습니다. 사실 말이 언니지, 나이 차이가 많은 언니들은 저에게는 엄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 언니는 저를 먹이고 입혀서 키웠고, 다른 한 언니는 제게 산과 강으로 여행을 시켜주며 자연을 보여주고, 어린나이에 이해하기 힘든 문학과 음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 엄마 같은 언니가 지금 50일이 넘는 단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언니가 얼마나 천성산을 사랑하는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피나게 노력하며 싸웠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언니를 보면 애가 타지만 겉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속상해하면 저를 집으로 보내려고 할 것이란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설마 죽게까지야 놔두겠냐고 생각하면서 버티기를 50여일, 속살에는 여름장마에 습기가 차 생긴 피부병과 영양부족으로 검버섯 같은 까만 점들이 수없이 박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걷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뒤에서 뭘 먹고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30일 정도만 단식을 하고 바로 다른 음식을 삼켜보라고. 아마 죽지 않으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3번의 단식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하는 것보다 단식이 끝난 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식이 끝나도 바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여러 잡곡을 푹 끓여서 꼭 짜내고 국물만 먹었습니다. 제철에 나는 채소와 다시마 끓인 국물 정도로 일주일정도는 속을 다스려야 죽이라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긴 단식 중에는 물 종류 이외에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단식을 해본 분이라면 잘 알 것입니다.

언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억지로 등을 떠밀어 집에 오기는 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속상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맡겨놓은 아이들을 데려올 생각도 않고 펑펑 울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울만큼 울면 속이 시원해지는데, 왜 울면 울수록 답답해지는 것일까요? 누구를 원망할까요? 단식을 하는 언니를 원망할까요, 아니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청와대를 원망할까요, 그것도 아니면 하늘을 원망할까요?

제게 언니는 내가 죽으면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니가 꼭 가족장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저는 알았다고 안심을 시켰지만,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이없는 환경영향평가로 산과 계곡을 마구잡이로 훼손시키는 사람은 죄가 없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은 죽음 앞에 서야하는 게 우리의 자연보호 현실이었습니다. 지키는 것 역시도 우리의 몫입니다. 모든 분들이 공이 적고 많음을 따지지 말고 한마음으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