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7월 27일 (화)
제 2622 호
발행처 : 인권운동사랑방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신고하세요?

법무부 캠페인 벌여…이주노동자단체, "감시와 편견 조장, 인권침해" 반발

법무부가 미등록이주노동자 단속 방안으로 '국민 신고'를 독려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 이주노동자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와 차별이 우려된다.

지난 19일부터 노동부, 중소기업협의회, 경찰 등 관련기관을 동원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 '신고'를 홍보하고 나선 법무부는 신문, 방송은 물론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도 '국민 여러분의 관심'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노동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이 공동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 적발 신고에 '적극적인 지지'를 부탁한다는 대국민 담화문 발표까지 했다. 법무부는 "내달 17일부터 시행될 고용허가제 정착을 위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무부의 미등록이주노동자 '색출 작전'은 이주노동자 인권침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관련단체의 지적이다.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양혜우 대표는 "지금과 같은 단속추방으로는 16만 명에 이르는 미등록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고용허가제를 앞둔 시점에서 정부가 무엇이든 안 할 수 없으니까 이처럼 비합리적이고 반인권적인 대책을 내놓는 것"이라며 질타했다. 양 대표는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신고의 대상으로 삼는 정부의 방침이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상적인 감시와 편견을 부추길 것"이라고 염려했다.

특히 법무부는 미등록이주노동자를 직접 단속하는 방식에서 이들을 고용한 기업주를 단속하는 방향으로 전환, 기업주의 신고를 강화하는 한편 이주노동자의 취업기회를 원천봉쇄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속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주노동자의 증가와 함께 이들을 사회의 음지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에 아시아의친구들, 부산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등으로 구성된 '이주노동자인권연대'는 23일 성명을 내고 "미등록이주노동자의 합법화를 통해 숙련된 이주노동자 고용을 원하는 다수 고용주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방침이며, 단속추방의 두려움 속에 이주노동자들이 죽음을 택하는 안타까운 일들의 반복을 불러 올 것"이라고 단속 중단을 촉구했다.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7만9천명 정도의 신규인력 유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합법화된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 이동금지 등의 독소조항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가 되는 상황에서 신규 이주노동자 역시 정부의 단속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양혜우 대표는 단속·추방과 같은 실효성도 없는 정책 끝에 '대 국민 신고' 홍보까지 나서는 정부의 반인권적이고 단기적 대응을 비난하며 "현재 국내 거주하는 16만 명의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합법화하는 방안을 찾는 것인 우선 과제"라고 주장했다.
[고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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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2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무부가 자신의 정책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지요.
전향적으로 미등록이주노동자를 합법화할 의지는 없고, 단속의 실효는 없고, 정책대로라면
새로 8만명 가까운 이주노동자를 유입해야 하고 ... 어쩌자는 건지, 원 ...

릴케 현상 2004-07-2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회사 주변에 밥먹으러 가는 길에만 매일 네댓명 만나는데-_-

MANN 2004-07-3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국민 인권침해 캠페인을 벌이는 정부라니... -_-

balmas 2004-07-3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 인권은 추상적 이념이기 전에 정치적 쟁점이지.
 

오늘자 한겨레 기사입니다
아 벌써부터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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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폐인’생긴다‥하루 17시간씩 일주일
[한겨레 2004-07-25 17:58]
[한겨레] 교육방송 ‘1회 국제 다큐페스티벌’
출품작 종일방송

텔레비전에서 하루평균 17시간씩 1주일간 다큐멘터리만 방영한다면 그것도 케이블 등 유료방송의 다큐전문채널이 아니라 지상파에서 시도한다면 무모하지 않다면,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은가 교육방송이 8월30일부터 9월5일까지 1주일간 기존편성을 아예 무시하고 ‘다큐방송’으로 끝장보기를 선언했다. 교육방송은 이 기간중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캔 번스(미국) 베르너 헤어조그(독일) 등 세계적으로 유명감독 작품 등 국내외 30여개국 130여편의 다큐멘터리가 참가하는 ‘제1회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출품작 대부분을 방송한다는 것이다. 교육방송쪽은 아침 7시30분~10시30분 어린이 시간대를 제외하고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 너머까지 일주일간 최대 7200분 다큐방송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교육방송은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다른 지상파 방송사에도 출품작을 방송하기 위해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8월 30일~9월 5일 30여국 130작품 출품‥
지상파로는 세계적 유례없어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등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축제가 여럿 있지만 지상파 방송사가 행사를 주최하고 참가작을 일주일간이나 대대적으로 방송하는 다큐멘터리축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고석만 교육방송 사장은 밝혔다. 그렇다면 교육방송은 왜 정규방송을 포기하면서까지 영화에 비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다큐멘터리에 목을 매는가 고 사장은 이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북방한계선 문제, 김선일씨 피살사건의 실체 등 오늘날 한국사회는 어느때보다 진실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사실속에 진실을 찾는 작업인 다큐멘터리 정신은 커뮤니케션이 필요한 한국사회에서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방송은 오락일변도 아닌가 교육방송은 이번 행사를 통해 우리의 방송 풍토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싶다. 다큐멘터리는 공영성의 상징이자 실체라면 교육방송은 공영성의 향도 노릇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행사는 ‘변혁하는 아시아’란 주제 아래 다큐단체로부터 추천받아 참신성과 혁신성이 돋보이는 12편을 선정해 경쟁부분에 올려 대상(1만5천달러 수상) 최우수상 2편(각 1만달러) 등 수상작을 가릴 예정이다.

참가가 확정된 해외 유명 다큐멘터리스트로는 <화씨 911>의 마이클 무어보다 더 존경을 받는 미국의 캔 버스를 비롯해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이자 1972년 <아귀레, 신의 분노>로 전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베르너 헤어조그,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으로 국내에서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란의 국민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이다. 교육방송은 애초 <화씨 911>을 개막작으로 하기로 하고 마이클 무어와 협상에 들어갔으나 지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몸값이 10배 이상 올라 결국 초청을 포기했다고 한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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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상호군축 대화 제안할때

최근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제각기 정치적 입장이 다른 그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언제일지도 모를 장래에까지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아무튼 나는 북한이 이젠 1950년처럼 장기침략전을 펼 수 있는 처지가 못된다고 말했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미군 재배치와 감축 계획들에서 보듯 미국 국방부 역시 이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북한의 위협이 감소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한국에 주둔하고 싶어할까?

미 국방정보국(DIA)과 국가안보국(NSA)이 한국에 있는 비밀 전자감시시설을 이용한 대중국 첩보행위를 계속하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대만을 둘러싸고 중국과 전쟁을 벌일 경우 주한 공군과 육군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 한국의 이익이 엇갈리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한국은 갈수록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이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며 따라서 주한미군 존재가 장기적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좀더 일반적인 반응은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고, 1997년 아이엠에프 사태에서 보듯 국제금융기관들로부터 경제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 종식이 한국인들을 불안하게 하는 진짜 숨겨진 이유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얘기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미군 주둔과 한-미동맹이 한국에 주고 있는 막대한 경제적 보조금 효과다. 이 보조금은 한국이 조기 통일로 가는 과감한 선택을 미룰 수 있게 만들고, 따라서 일반예산과 군사예산 어느 쪽에 더 우선권을 둘지를 선택하는 것도 머뭇거리게 만든다. 미군 주둔은 주한미군이 없었더라면 한국이 현재 유지하고 있는 대규모 국방비 지출을 위해 들어갔을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이 국방비 지출을 늘려 주한미군이 제공해주고 있는 현 수준의 안보를 유지할지, 아니면 북한과 상호 군축 협상을 통해 화해와 통일을 달성하는 쪽을 택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보조금이 없다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 제공해온 재래식 국방전력을 대체하는 데만 현 국방예산을 2~3배 늘려야 한다.

미국은 매년 평균 20억달러에 이르는 주한미군 주둔에 따르는 직접 비용 외에도, 한국 방위와 관련된 동아시아와 서부 태평양 배치 미군전력 유지비용으로 매년 400억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 한국이 미국이 제공하는 경제적 쿠션을 당연한 걸로 생각하는 한, 한국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마련된 궁극적인 통일 전단계로서의 (낮은 차원의) 연방국으로 갈지 여부를 굳이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국방비의 상당 부분은 거대한 군산복합체로 간다. 약 80개의 방위산업 계약자들이 150여곳의 공장에서 약 350가지 종류의 군사 장비를 생산하고 있다. 군 수뇌부와 손잡은 이 강력한 이익집단은 군사비 지출을 늘리도록 지속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주한미군을 줄일 수 있는 자주국방력에 대해 너무 막연히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을 이롭게 하고 있다.

미군 철수에 대해 한국은 1991년 마련된 남북기본합의에 따른 북한과의 상호군축을 위한 대화 재개 제안으로 대처해야 한다. 91년 합의된 남북공동군사위원회는 핵위기로 한번도 가동되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의 최우선 고려 사안이 돼야 한다. 한국에서 상호군축에 반대하는 군산복합체가 있듯이, 북한에도 노동당 강경파와 결합된 군산복합체가 있다. 평양의 강경파에게 군축은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경제적 문제가 군사 지출을 줄이도록 압박해왔으며 김정일 위원장은 남한이 준비가 되면 상호군축에 참여할 자세가 돼 있다고 지난 4월 (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들었다. 대조적으로 남한은 국민총생산(GNP) 대비 국방비 비중이 매우 적어서 북한만큼 감축 압력이 크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성산업공단 건설을 추진하고 서해 충돌을 피하기 위한 군사회담을 촉진시킨 공로가 있다. 그러나 그는 북-미 양국만의 조약을 일관되게 고수해온 과거 입장을 바꿔 종전과 남북한 및 미국간의 3자 평화조약을 추진할 준비가 돼 있다고 한 (북한의) 역사적인 5월6일 선언을 조속한 대북 관계개선을 위한 새로운 기회로 포착하는 데는 실패했다.

서울은 평양, 워싱턴과의 대화를 병행하면서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는 핵 협상 진전도 가속시킬 것이며 김 위원장을 정상회담장으로 끌어낼 것이다. 그것이 휴전상태의 지속으로 가로막힌 군축회담의 장을 마련해줄 것이라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쓴 평화협정 추진을 겁내는 듯하다. 그는 이 협정이 미국의 한반도 개입 반대 압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우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평화조약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기타 한국전쟁의 잔재를 종식시킨 뒤에도 남아 있을 한-미 상호안보조약에 의해 운용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와 장비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고려해볼 때, 양쪽이 합의한다고 해도 미군 철수를 완료하는 데는 몇년이 걸릴 것이다.

곧 출간 예정인 <한국의 수수께끼>의 저자들인 보수적인 케이토연구소의 테드 갤런 카펜터와 더그 밴도는 4년에 걸친 미군의 일방적인 철수를 주장했다. 그들은 일단 철수 사실이 발표되면 “국방비 증액을 정당화할 만큼 (상황이) 위협적이라고 느끼면서 그런 부담을 기꺼이 감수할지 여부에 대한 결정은 한국민에게 달렸다”고 결론지었다.

셀리그 해리슨/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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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7-27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 어제(월) 책이 입고되었다고 전화가 왔으니까,
이번 주 안에는 서점에도 배포가 되겠죠.
[법의 힘] 출간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분들께는 정말 면목이 없군요. ㅎㅎㅎ (쑥스러운 웃음 ... )

aporia 2004-07-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문지에 전화를 해 보니까 낼모레쯤 서점에 나온다고 하네요. 한 가지 부탁 말씀! 친구한테 이 책을 선물하려 하는데, 혹시 선생님 사인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러면서 저도 해 주시면 더욱 좋구요... 사실 전부터 그런 책을 보면 무척 부러웠는데, 가까이서 저자/역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고 또 별로 사인받고 싶은 사람도 없고 그랬거든요... 물론 제가 아는 분이 지하철에서 만난 정운영 선생처럼, '저는 핑클이 아닙니다'라고 하신다면, 할 수 없겠습니다만... 괜찮으시다 그러면 담에 책 두권 들고 찾아갈께요. 부디 허락해 주시길!

balmas 2004-07-27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사인해주는 게 뭐 힘들다구.
1000권을 할 것도 아닌데 ...
정운영 선생은 자기가 핑클보다 더 인기있다고 생각했나 보죠, 뭐 ... ㅋㅋㅋ(농담입니다)
 

나의 커밍아웃 이야기
     
로맨티스트 소람

 황보신 기자
 2004-07-18 21:18:17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는 인터뷰 요청에 그녀는 흔쾌히 응해 주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소람님의 아파트를 찾았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담배 피워도 되는지 묻는다. 담배를 피우면 이야기를 더 잘 한다면서. 그녀는 담배 한 개피를 태우면서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최초로 커밍아웃한 것은 언제였나요?

“대학 때라고 봐야 될 것 같거든요. 제가 89학번이니까 그때만 해도 동성애자 모임이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자대학을 다녔는데 주변에 동성애자들이 굉장히 눈에 많이 보였어요. (중략) 대학교 4학년 때 총학생회 선거에 많이 관여하면서 알게 된 친한 후배가 있어요. 그 후배가 저한테 동성애자 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더라구요. (중략) 성사되지는 않았어요.”

“사회 생활하면서 제 자신이 갑갑해서 살 수가 없더라구요.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여기저기서 했었는데 그 속에서 굉장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확실한 이성애자이지만 인간으로서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어요. 직장동료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집안 식구들이 다 눈치를 채죠. 하지만 알면서 모른 척 했죠.”

-집엔 커밍아웃을 언제 하셨어요?

“사실은 저는 집안에서는 ‘아웃팅’이 먼저였다고 생각을 해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학번 선배를 한 4년 정도 만났었어요. 그 선배가 저한테 보냈던 편지가 어머니 눈에 띄었어요. 엄마는 워낙 제가 중고등학교 때 여자친구랑 친했기 때문에 감을 잡고 있었어요. 그 선배 같은 경우는 우리 집에 굉장히 자주 왔었고 당시 선배가 대학원생이면서 자취를 하고 있어서 제가 그 집에서 자고 했기 때문에 엄마가 거의 감을 잡고 있지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데 그 날은 결정적인 물증이 나왔기 때문에 엄마랑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그 선배를 부르더라구요.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그때 선배와 저는 워낙 떨어지면 살 수 없는 상태였어요. (엄마를) 만나자마자 언니가 그냥 울어버렸어요. 엄마가 마음이 약하신 관계로 ‘그냥 딸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할테니까 잘 지내라. 그런데 다른 가족들은 몰랐으면 좋겠다. 엄마는 모른척하겠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으니까 너희 어머니가 아시면 양쪽 집안이 풍지박산 날 것 같으니까 절대 모르시게 해라’ 정도(말씀하셨죠).”

-온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때는?

“4년 전이었어요. 어머니, 아버지, 동생에게 다 얘기했죠. 그 이야기가 길고 복잡한데. (중략) 2000년 1월에 최초로 한 이반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데, 저보다 늦게 들어온 회원과 가까워졌어요. 당시 그 사람은 기혼자였어요.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걸리게 되잖아요? 그 친구의 남편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에요. 남들 보기에도 그림 같은 부부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가정을 깨는 것은 저도 원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원하지 않았어요. 저는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었고. (중략)”

“그런데 남편이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이 자기는 나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저를 선택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돈을 구해서 방을 몰래 얻었고 친구를 이사시켰죠. 이사 준비가 다 끝난 상태에서 내일 나가야 하는데 오늘 이야기를 한 거죠. 난리가 났죠. 엄마랑 둘이 껴안고 울다가 아빠가 퇴근하신 다음에 얘기를 했고, 퇴근한 남동생에게도 이야기를 했죠. (중략) 밤에 짐을 싸놓고 자는 척하고 누워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시더니 이불을 덮어주고 나가시더라구요. 진짜 그때 가슴 아팠어요. 그렇게 해서 집을 나왔죠.”

-그때 독립한 후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떠세요?

“그 이후에도 집에 자주 갔어요. 제가 집안에서 장녀이자 장남이에요. 소위 말하는 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아세요.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집안의 큰 일을 처리하는 범주가 다르니까. 엄마는 ‘아들 장가 보낼 때보다 네가 나간 것이 더 서운했다’고 지금도 말씀하세요. 어머니는 지금도 갈등하세요. 절반은 인정, 절반은 부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시죠.”

“아버지는 굉장히 말수가 적으세요. 하루는 (자가용차 플라스틱 열쇠고리를) 당신 것이랑 동생 것을 해오셨는데 너도 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니 친구 번호는 뭐고 색깔은 무슨 색이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제가 그 친구 차는 빨간색이고 차 번호는 뭐다라고 했더니 나중에 만들어가지고 저희 집에 가지고 오셨더라구요. 아버지 나름의 인정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백 마디 말보다 더 고마웠죠.”

“제 동생 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이고 보수적이고 성실한 한국의 가장인데 우리 누나는 좀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누나만 행복하면 된다. 누나가 혼자 살면서 피폐해지는 것이 보기 싫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며 동생이 가장 인정해 주는 편이죠. 인간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데 가장 동의해 주죠. 어머니, 아버지는 다들 동의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길 바라죠.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깊이깊이 치열하게 사랑하지만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도 다른 집의 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셨는데?

“엄마와 최초로 투쟁한 것이 5살 때였는데 동생이 3살 때이었어요. 엄마와 먼 데를 다녀왔는데 소변이 마려웠어요. 버스를 내리자마자 맨홀 뚜껑이 있는 데로 가서 제 남동생은 바지를 내리고 바로 쉬를 누게 했어요. ‘나도’ 그랬더니, ‘여자가 어디서 엉덩이를 까느냐?’는 거예요. 거기서 집까지 걸어가다가 바지에다 오줌을 쌌어요. 이 일이 기억나는 것은 오줌 샀다는 것도 창피하지만 그것보다도 ‘여자기 때문에 나는 밖에서 쉬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에요. 지금도 저는 그 일을 확대해서 나는 5살 때 내가 여성인 것을 알았다고 하지요.(웃음)”

“그게 최초였고 그 다음에는…. 엄마가 나를 이쁜 딸로 키우고 싶으니까, 한번은 내게 마론 인형을 사주고 남동생에겐 짚차를 사다줬어요. 그런데 마론 인형은 너무 수동적인 장난감이잖아요. 짚차는 굴러가잖아요. 지금도 움직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바퀴 달리는 것을 다 잘 타거든요. 그때 짚차 때문에 남동생이랑 엄청 싸웠어요. 아빠는 지금도 그 때 제가 말한 것을 기억하신대요. ‘아빠 선물은 굉장히 감사한데 마음은 받겠지만 다음에는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 주세요. 이 인형은 너무 재미없어. 이렇게 생긴 애가 어딨어. 나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

“또 치마 입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저는 운동장에서 공도 차고 야구도 해야 하는데 치마는 걸리적거리니까 불편해서 싫었어요. (중략) 어쩔 수 없이 입었던 고등학교 2년을 제외하고는 치마를 입은 적이 없어요. 물론 학교가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죠. 어렸을 때는 불편해서 치마를 거부했지만 크니까 소변사건과 마찬가지로 강요된다는 것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는 여성에게 치마가 강요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각을 하게 된 거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사실 치마가 편한 점도 있더라구요. 여름에 시원하고. (웃음) 그래도 지금 저는 치마를 안 입을 뿐만 아니라 정장도 안 입어요.”

-여자를 좋아한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초등학교 5학년때였어요. 또래 남학생한테 전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유치하고 지저분하고. (웃음) 내가 누구랑 지내는 것이 편한가 생각해 보니까 예쁜 또래 여학생들과 있을 때 기분이 좋더라구요. 남자애들이랑 권투하고 공차고 노는 그 느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대화가 되는 또래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유일하게 대화가 되는 여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중략) 그 친구랑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랑은 애정은 아니었던 것 같고 처음으로 우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남학생들과는 심지어 우정도 못 느끼겠더라구.”

“반마다 공주 같은 애들 한 명씩 있지요? 남자애들이 그런 애들 놀리면 막아주고 울면 집에다 데려주면서 기쁨을 느끼면서 그때 생각했죠.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잘나서 남자를 못 사귀는구나’ 생각을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남학생들에 대한 열등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애들이 XY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지점이 다르잖아요. 그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어렸을 때는 ‘그 남자애들이 남자로 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게 컸어요.”

“그리고 제 성향 자체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서 탐미적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거울을 통해서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고 동경하게 되고.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그런 여성이 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남성도 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거기서 느끼는 제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죠. 남자애들은 적이고, 남자애들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게다가 내가 가질 수 없는 여성성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을 여자친구들을 보호해 주고 그 곁에 있으면서 누린다고 할까요, 어렸을 때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고통이 되었던 적이 있나요? 호모포비아를 느낀 적은?

“초등학교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죠.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 나오는 연애라는 것은 모두 이성애자의 연애죠. 원래 성격이 로맨틱한데 왜 나 같은 형태의 연애는 없는 것이냐는 고민에 빠졌었죠. 중학교 때는 동성애자라는 인식이 생겼는데, 저는 확신하는 게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문제이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살아가는 방식과 정체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존재를 어떻게 하던지 스스로 제 안에서 긍정하려고 애썼죠. 사실이 이 긍정이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염세 속에서 오랫동안 헤매야지 나오는 거죠.”

“첫 연애는 중학교 때 했던 것 같아요. 연애라고 해 봤자 손잡고 떡볶기 먹으러 가고 팔짱 끼고, 그게 다였지만. 누구 때문에 잠 못 자고 편지를 수없이 썼던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한 도서관 청소년 독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사이가 나빴죠. 토론만 하면 서로 공격하고 싸우다가 나중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굉장히 가까워지고 온갖 이야기를 다하게 되었죠. (중략) 당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오토바이도 타고 그랬는데. 그 집에서 알게 됐어요. 그 집 어머니는 우리 딸은 천사같이 착한데 못된 것을 만나가지고 (중략) 망쳤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사탄취급을 하고 ‘악의 화신’이라 했어요. 중 3때 집에 전화해서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처음 호모포비아를 느꼈어요.”

“그리고 대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두 학번 위인 선배인데 굉장히 유명한 선배였어요. 이 선배는 학교에서 공인한 동성애자였거든요. 다들 욕을 해요. 나도 그 선배의 정치적 입장이나 태도는 굉장히 싫어했지만 그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이 사생활이나 성적 정체성이라는 것에 굉장히 공포를 느꼈죠. 나도 커밍아웃하면 저렇게 된다고.”

“직장에서 동성애자라는 것을 고객에게는 숨기지요. 삶의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에. 하지만 직장에서 인간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요즘 만나는 남자 어때?’라는 질문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거든요. 직장이 돈 버는 곳만이 아니라 삶을 같이 나누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존재를 알리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알려요. 저는 커밍아웃 때문에 사람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한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보다 더한 설득력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것은 아쉽죠. 처음에는 ‘너니까 봐주겠다, 너니까 괜찮다’죠. 그러나 이야기를 많이 듣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요.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되기도 해요.”

-동성애자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하다면 하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혼인신고가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어요. 만나는 친구가 있는데, 자기가 취업을 하면 같이 결혼하자더라구요. 하지만 결혼제도가 인정이 되더라도 제도적 인정이지 범사회적 인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경제적인 기반을 무시할 수 없는데. 워낙 가난하게 살아가지고 그 부분을 잘 알거든요. 그 부분에 대한 안정적인 장치 없이는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는 적어도 40에서 50까지 완전히 어느 정도 (경제적인) 틀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때는 대사회적인 커밍아웃과 함께 전투적인 활동을 하겠다고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해요. (중략)”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생각해요. 다른 가치보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복이라는 게 각자가 자기 생을 살면서 서로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약간의 교집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중략) 그런데 이게 왜 꼭 이성애자 가족에서만 가능해야 해요? 이런 폭력이 어디 있습니까? 용납이 안됩니다. 정말. 확대가족이라는 것은 서로 인정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연애라는 것이 에로스적인 것이기 때문에 배타적인 것이지만 아가페적인 것, 휴머니즘적인 것이 들어가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또 의식주를 반드시 같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파트너를 원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이성애자 틀에 있었다면 벌써 결혼을 했을 테고 굉장히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을 거예요. 저의 수많은 연애편력은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특수성 때문이에요. 그토록 많은 연애, 실연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을 버린 적은 한 번 밖에 없었다는 거죠. 상대방이 확실하게 동성애자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제가 설득을 해 볼 수는 있지만 강요하고 끌고 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작년에는 너무 힘이 들었어요. 너무 좌절했고. 두 달 동안 살이 20kg나 빠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자신에 갖고 있는 자신감은 내가 아직도 사람을 믿고 사랑한다는 거죠. 사실 저는 담배하고 연애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웃음)”


연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몇 바퀴나 돌아왔지만 현재는 인생의 반려자가 있어 행복하다는 그녀,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이것만은 꼭 좀 써 달란다.

“제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이라는 것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성명서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에 대한 이해, 동조, 공감대를 끌어내는 것이 커밍아웃이죠. 저는 제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아웃팅’이었지만 ‘커밍아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어머니와 끊임없이 대화하려고 노력했고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절반의 성공 정도는 했고, 앞으로는 완전한 성공으로 갈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제가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런 과정을 거쳐요. 너니까 괜찮아, 너를 좋아하니까. 그러다가 그들 스스로가 동성애 문제를 아주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고 같이 고민하게끔 만들었다는 것, 제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은 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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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법, 조선시대로 회귀하나
     
도덕적 규범을 법제화하면 곤란해

 김혜숙 기자
 2004-07-25 23:48:53

<필자 김혜숙 교수는 이화여대 철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편집자 주>


우리 사회의 변화의 속도는 매우 빠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빠른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런데 또 어떤 부문에서는 변화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는 전통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전통의 현대화라는 이름 하에 변화에 대해 적응을 꾀하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 대부분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고 우리의 의식은 혼돈 상태에 놓이게 된다.

‘효도법’은 국가의 문제회피

한나라당이 마련해 입법 추진을 계획하고 있는 소위 ‘효도특별법 제정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의식을 혼돈 속에 빠뜨리는 한 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노부모 부양자에 대한 사회적 안정감 부여 및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현대적 개념의 효 문화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방안의 핵심은 가족윤리로서의 효라는 전통 도덕적 가치를 제도적 차원에서 함양시키기 위해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

사회복지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개인은 자신의 복지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가족 관계의 망이 잘 짜여진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자신의 안녕과 복지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장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미미한 가족관계의 망을 가진 개인은 그렇지 않은 개인에 비해 복지에 관한 한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더구나 가족제도가 변화하고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정의 작업이 활발한 현대사회에선 가족이 개인의 복지를 책임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어린이, 청소년, 여성, 노인, 장애인, 극빈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의 마련을 국가적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개인의 안녕과 복지를 보살필 가족이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는데도 불구하고, 국가가 가족에게로 다시 부양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의 심각한 문제로 가출한 청소년을 찾아내서 다시 그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문제를 해결한 것 같은 가상만을 만들어내어 문제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보지도 못하게 된다.

효도특별법의 또 다른 문제는 효도라는 도덕적 가치를 법적 강제로 부과한다는 데 있다. 법은 넓은 의미로 도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법과 도덕은 그 외연에 있어서 같지 않다. 합법적인 것이 도덕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예컨대 투표행위가 도덕적 행위는 아닐 것이다)이거나 심지어는 부도덕한 것(남성전용 휴게방 개업은 합법적이지만 부도덕한 것일 수 있다 )일 수도 있다. ). 또한 도덕적인 것이 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내 스스로에 대한 정직성이나 성실성의 문제는 합법, 불법의 문제가 아니다)이거나 비합법적인 것(2차대전 당시 유태인을 도왔던 독일인이 당시 나치법을 어긴 것일 수 있다)이 될 수도 있다.

도덕을 법으로 강제하면 위선만 늘어나

오늘날 법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는 도덕을 사적 차원의 문제로 두는 경향이 강하며 도덕주의적 사회를 지향하기보다는 최소 도덕주의를 지향한다. 조선 사회는 최대한의 도덕주의를 지향했던 사회로 예치를 이상으로 삼음으로써 법과 도덕의 외연을 거의 같게 두고자 했다. 이것은 공자가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사람들이 죄를 짓고도 법에 의한 처벌을 받으면 될 뿐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참으로 부끄러운 줄을 모르게 되지만, 예가 지배하는 사회는 내면으로부터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저절로 교화가 된다고 했던 데서 비롯된 정치적 이상이었다.

예치는 도덕적 규범을 법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도덕적 가치의 강제성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언뜻 보면 인간다운 세상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인 듯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관여하려 한다는 점에서 좀더 철저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법과 달리 도덕은 전 인격을 관여시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훨씬 강력하게 인간을 지배할 수 있게 한다. 효도법의 제정은 예치와 같이 겉보기의 그럴듯한 명분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사적 영역까지 법의 지배 하에 두고자 하는 무리를 범하는 것이며, 많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한 예로, 회사생활을 무난히 하기 위해 회사 규칙을 잘 지키고 사장의 지시를 잘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회사를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고 사장을 인격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할 필요는 없다. 만약 사장을 한 인간으로 좋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강제조항이 된다면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사장을 좋아하고 친밀하게 따르는 사람에게 월급을 더 주거나 보너스를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가면을 쓰고 사장을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사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사람들의 그 마음도 의미를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인센티브는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존경심이나 애정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도덕을 법적으로 강제하고서, 인센티브 제도까지 도입하는 경우 많은 위선적 행위들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위선을 해서라도 효도국가를 세워야겠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이 경우 우리는 무엇을 위한 효도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법이 도덕의 영역을 넓게 지배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율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숨막히게 된다. 도덕은 자율과 자유의지의 영역이다. 법은 물론 법에 대한 존경심과 존중, 자발적 준수가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좀더 현실적으로는 강제와 유인과 처벌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많은 행위들이 합법과 불법의 문제로 주어진다면 이 삶은 무척 답답하고 무기력한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효자와 효부라는 개념이 함축하는 남성중심적 가치의 사회, 자식이 없을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의 다양성이 부정되는 사회, 중요한 가치들이 양적 가치로 환산되는 사회, 이런 사회 안에서 우리의 삶은 매우 황량한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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