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가 베르토프와 요리스 이벤스

그러나 상업영화의 역사와 싸운 다른 또 하나의 작가들의 연대기가 있다. 그들은 영화야말
로 역사 속에서 기록하고, 고발하고, 틀린 세상은 바꾸는 의지라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역사에 대해서 영화의 임무를 강조한 것은 지가 베르토프였다. 볼세비키혁명
이 성공한 직후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운 소비에트에서 "지금의 우리를 영원
히 기억하라" 는 슬로건으로 무장한 그는 카메라를 들고 혁명 직후의 세상을 담았다. 그
는 영화야말로 진실이라는 주장을 담은 "키노-프라우다" 선언을 통해서 카메라만이 "부르
주아들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된" 세상을 기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천(?)하였다.
지가 베르토프의 <키노 프라우다> 연작과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전 세계에 "새로운 세
상" 을 알리는 테르메스가 되었다.

지가 베르토프의 동세대였던 요리스 이벤스의 또 다른 이름은 "날으는 네덜란드인" 이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는 최전선을 찾아나섰
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에 카메라를 세워 촬영하였다.

요리스 이벤스는 "30년대에 스페인 내란을, 그리고 중국으로 가서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
을, 문화혁명을, 더 나아가 "60년대에 베트남에서 불벼락이 쏟아지는 하노이에 자신의 카
메라를 세웠다. 그는 억압받고 버림받은 자들이 어떻게 자기의 세상을 만들어가는지를 기
록하였다. 거기에는 어떻게 이름없는 자들이 역사를 하나씩 쌓아올리는 지가 담겼다. 그
의 다큐멘터리가 갖는 놀랄만한 감동은 같은 장소를 몇 년의 차이를 두고 다시 찾아가서
기록하는 정신에 있다. 그는 어떻게 시간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단련시키는 지를 기록한
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의 일보전진을 이야기한다.

요리스 이벤스의 <우공은 어떻게 산을 옮겼는가>는 중국 문화혁명의 현장에서 5년간 12부
작으로 완성된 장대한 서사시이다. 이 영화는 때로는 기나긴 인터뷰가 이어지고, 때로는
아무런 설명없이 중국 변방의 시골 공회당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편집 없이" 살아가는 일
상생활을 담는다. 그리고 수많은 중국의 우공들이 어떻게 봉건주의라는 산을 저리로 옮기
고, 사회주의라는 산을 옮겨 오는지를 "마음으로" 보여준다.

<우공은 산을 어떻게 옮겼을까> (1976, 요리스 이벤스) ;

아사아에서 사회주의는 어떤 기적을 만들어냈을까? 요리스 이벤스의 애정 담긴 "좋은 세
상"을 향한 시선.

정성일 (영화평론가)

1. 존경하는 영화, 역사적 가치
1) 칠레 전투 (파트리시오 구즈만)
2) 용광로의 시간 (페르난도 솔라나스, 옥타비오 게티노)
3) 쇼아 (클로드 란츠만)
4) 슬픔과 동정 (마르셀 오필스)
5) 아메리카 원 (로버트 크레이머)
6) 태양도 없이 (크리스 마르케)
7) 하늘, 대지 (요리스 이벤스)
8) 민중의 용기 (호르헤 산히네스)
9) 러시아 엘레지 (알렉산드르 소클로프)
10) 나리타 투쟁 8부작 (오가와 신스케)

세상을 바꾸려고 영화는 항상 시도해왔습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은밀하고도 끈질기게
지속되어온 영화의 프로젝트입니다. 이를테면 지가 베르토프의 역사의 재구성, 요리스 이
벤스의 중국여행,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인물 자서전 연작, 오가와 신스케의 나리타 투쟁,
그리고 명동성당 앞의 노동자 뉴스 제작단, 말하자면 영화와 역사, 또는 이미지와 현실,
더 나아가서 보여지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저 모순의 대
립과 이율배반을 넘어서려는 것이 영화의 프로젝트이며,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낸 저 이
상적인 총체영화에로 돌아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바로 그 사이에 우리는 끼어든 셈입니
다. 물론 빠져나갈 수도 없으며, 하지만 도피할 생각도 없습니다.

 

* 아래 주소로 가시면 상영일정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iljuarthouse.org/screen/s_view.html?e_uid=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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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im 2004-06-1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꼭 보러가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balmas 2004-06-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말에 일들이 계속 몰려 있어서 다음 주나 돼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전출처 : 수수께끼 > 한 번쯤 말해야 하는 뱀다리(蛇足)

 미술사학이란 학문이 참으로 재미는 있지만 쉬운 학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우선은 워낙 방대한 분량의 문헌이 남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 대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헌자료를 인용함에 있어서도 우선은 많이 읽고 찾아본 사람이 유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헌 자료에서 인용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용된 부분이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문헌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 보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실증자료와 문헌자료의 일치여부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에는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와 야사에 속하는 <삼국유사>가 대표적인 문헌자료에 속하는데 이 마저도 사실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자료가 모두 고려시대에 편찬이 되었기에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한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맞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후대에 문화재와 미술사학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백제의 무왕이 세웠다고 하는 미륵사지의 발굴시에 신라 관직명이 음각된 작은 항아리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작은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백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신라의 유물이 나왔다면 일차적으로는 "여기서 왜 신라의 유물이 나오지? 이 탑이 그럼 신라와 연관이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에는 무왕이 세운 탑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정도 <삼국유사>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작성한 것도 아니요...직접 보고 작성한 것도 아니기에 사실은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라고 할것인데, 다만 '어디어디에 의하면...'이라는 출처가 있어 일반적인 이야기 책과는 달리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어디 어디에...'라는 것에 대한 검증은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지라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그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백제가 세웠다고 알고 있는 미륵사지 탑의 바닥에서 신라의 유물이 발견 되었으니 생각을 고쳐 신라가 쌓은 탑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무척 많이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에 있는 5층탑은 분명 백제의 양식을 간직한 탑인데 탑 아래 고려시대의 기와가 나왔다 해서 제작연대를 고려로 보게 되었는데 이 또한 탑에 문제가 있어서 탑을 고쳤다던가 하는 사실은 전혀 무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궁리 5층탑은 해체수리를 하면서 사리장엄구가 발견이 되었고,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워 넣었으며, 그 유명한 신라의 감은사지 석탑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새로운 사리장치를 납입하였는데 후대...우리의 후손들이 탑을 다시 고쳐야 할 경우 지금 넣은 물품을 보고 신라의 탑이 아니라 2000년대의 탑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 경우는 단순 매납이겠지만 사실은 언제 언제 누가 고쳐서 다시 세웠다는 내용도 함께 매납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친절한 내용을 적은 경우는 극히 드문 형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혼돈을 갖고 조사나 연구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발굴 결과에 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학자간에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여 상호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은 정확한 문헌 자료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황룡사탑의 높이가 80여미터라느니...또는 100미터가 넘었다느니....당시 인구가 얼마였다느니, 또는 거북선의 모습과 내부 구조가 이렇다 저렇다니...등등 너무도 많은 분야에 달랑거리는 기록 한 장 제대로 남기지 않은 조상덕에 후손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볼성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기록을 하는 민족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고 <역사의 연구>에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의 중요성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던 잉카의 인디오 문명이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무성한 추측만 남은것을 봐도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것 같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저는 타임머쉰이라도 있다면 카메라를 달랑 메고 당시로 돌아가서 당시 상황이나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아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소!!"라고도 하고픈 마음입니다만 그런 일은 단지 꿈에 불과한 공상일 따름이라 앞으로도 많은 부분에 대하여 "왜?"라는 의문으로 다양한 검토와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우려하는 마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단지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십사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하~ 그게 그랬구나" 라고 단정을 하신다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학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가 판단하는 가장 근접한 학설에 고개를 끄덕여 주시면 된다고 하겠습니다.

  얄미운 우리 조상님네는 거북선의 그림 하나 제대로 남긴것이 없어 후손들이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반론, 그리고 반론에 대한 반론을 위한 연구, 이러한 반복과정이 다소는 지루하고 볼성사납다 할지라도 사실에 점차 근접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초기 1세대 학자들은 제대로 조사를 하거나 연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답니다. 그 분들을 결코 폄하하는것은 아니나 당시의 현실은 모든 여건이 제대로 연구를 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며,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때인지라 많은 부분 잘못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한 교정 작업이 현재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잘못이 바른 답인줄 알고 넘어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순우가 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1,2>가 나온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맞다 틀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제깐놈이 뭘 안다고 그래?"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되고 있다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잘못 조사된 부분이나 연구된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인정을 하고 재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바로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는 과거에 조사되고는 두 번 다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문화재 중에서 의문이 간다거나 재론을 필요로 하는 유물을 한 번 짚고 가자는 의미에서 마련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알고 계시는 분야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란을 통해서 논의되는 유물은 한 번쯤 되새김질을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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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5 화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

(이해찬이 나대던 시절도 심란했고 유시민이 나대는 시절도 심란한데 둘이 함께 나대니 참으로 심란한 시절이다.)

유시민은 이해찬의 보좌관이었고 이해찬은 유시민의 의원님이었는데 하여튼 둘은 많이 닮았다. 기만적인 판타지를 사용하는 대중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해찬은 민주주의 이행기에 반독재투쟁기의 판타지를 사용하면서 제 입지를 구축했는데, 유시민은 근본적 민주화가 숙제인 오늘 민주주의 이행기의 판타지를 사용하며 제 입지를 구축한다. 말하자면 둘은 이미 지난 시간을 오늘에 불러들여 보수화한 자신을 은폐한다.

유시민은 거기에 덧붙여 ‘지식인 판타지’까지 사용한다.

“나는 자유주의자의 양심상 진보주의가 탄압받는 건 볼 수가 없다.”
“진보정당을 찍는 건 사표다.”

같은 시점에 두 가지 말을 동시에 했다면 미친놈이거나 나쁜 놈일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오묘하게도 두 말을 재료로 ‘지식인의 양식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최종적인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유시민은 현재 시점에서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이다. 물론 ‘개혁적 보수’ 정치인인 그보다 더 보수적인 정치인들이 많지만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유시민 만큼 보수적인 정치인은 없다.

유시민의 개혁성은 대개 이미 개혁적인 대중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반면(결국 실제로 사회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 유시민의 보수성은 진보적일 소지를 가진 대중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정형근이라든가 한나라당의 떠올리기만 해도 비위가 상하는 인물들도 진보적일 소지를 가진 대중들에게 유시민만큼 보수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악은 ‘은폐된 악’인 것이다.

Posted by gyuhang at 02:39AM | 트랙백 (8)
 
 
2004.06.16 수
유시민, 아비투스, 김태촌

유시민은 매우 나쁜, 이젠 극우 진영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이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대표적인 개혁 정치인이라는)와 그의 나쁜 아비투스의 부조화는 역설적으로 그를 한국 사회의 재앙으로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그는 토론에서 “학자로서 양식을 가진 분인 줄 알았는데 실망스럽다.” “격조 높은 토론을 기대하고 왔는데 실망했다.” 따위의 말들은 개연성 없이,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대중들은 텔레비전의 속도감 속에서 그런 말들이 개연성이나 근거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되새기기 어렵기 때문에 순식간에 유시민의 상대를 “학자로서 양식을 가지 못한 사람”이거나 “토론의 격조를 망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유시민은 또한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엔 절대로 답하지 않으면서, 역시 개연성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런 질문 자체를 ‘쓸모없는 것’처럼 깍아 내린다. 대중들은 애초의 질문보다는 그 질문을 배제한 유시민의 답변에 휩쓸리면서 오히려 유시민의 그런 대응을 우문현답으로 인식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콧구멍 생김새까지 들여다보는 텔레비전 토론에서도 그런 식이니 좀더 작전이 가능한 부분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유시민은 건달로 말하자면 김태촌에 해당한다. 언제나 자유주의적 양심과 게임의 룰을 말하지만, 실은 ‘주먹 싸움에 회칼을, 그것도 등 뒤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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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rim > [임재석] 악몽은 릴레이될 수 없다 - 한겨레 21

이라크 오무전기 차량 피격사건에서 살아 돌아온 임재석씨, 그가 청와대 1인시위 벌인 사연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그에게 지난해 겨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계절이다. 이런 그에게 당시의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잔인한 짓이었다. 입술을 떨며 한마디 한마디 이어가던 그는, 끝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 다섯달 동안 병실에서 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견뎌야 했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무관심과 외로움이었다.


△ 지난 6월9일부터 나흘간 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인 임재석씨.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 때문에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목포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사진/ 류우종 기자)

참을 수 없는 무관심과 외로움

임재석(32)씨는 지난해 겨울,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라크 한국인 피격사건’의 당사자다. 당시 오무전기의 노동자로 이라크에 파견된 지 하루 만에 그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고 동료 2명을 잃었다.

귀국한 뒤 고향인 전남 목포에서 ‘조용히’ 치료를 받던 그가 지난 6월9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나흘간 1인시위를 벌였다. 허벅지와 무릎에 박힌 총탄 파편 탓에 목발을 짚고도 다리는 연신 후들거렸지만, 임씨는 ‘파병 철회’와 ‘산업재해 인정’이라고 쓰인 피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가 “위험하다”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서울까지 올라온 까닭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감 때문이다.

지난해 11월29일, 임씨는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의 하나인 송전탑 건설을 위해 이라크를 찾았다. 당시 오무전기는 미국 워싱턴그룹의 하청을 받아 50여명이 넘는 노동자를 이라크에 파견한 상태였다. 입국 다음날인 30일, 송전탑 점검을 위해 티그리트의 현장사무소를 나섰다. 흔히 ‘알리바바’라고 불리는 이라크 좀도둑들이 송전탑을 세워놓는 족족 바로 뜯어가는 바람에 송전탑을 매일 점검하는 일은 현장 노동자들의 필수 업무였다.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송전탑의 점검을 차례로 끝낸 뒤, 길을 묻기 위해 이라크 민간인의 집을 찾았다. 건장한 사내는 경계의 눈초리로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이라크인 운전사가 “코리아”라고 답했다. 그 집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주유소에 들렀을 때도 누군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고, 운전사는 다시 “코리아”라고 답했다. 주유소를 떠난 지 몇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뒷자리에서 창 밖을 보던 임씨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때, 운전사는 가슴팍에 피를 흘리며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승용차 한대가 임씨 일행이 탄 차를 바짝 뒤따르자, 임씨가 탄 차가 2차선으로 비켜난 순간이었다. 승용차에 탄 이라크인들은 급정거하는 차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 위험을 무릅쓴 이라크 전후복구 사업 참여는 결국 화를 불렀다. 이라크 게릴라들에게 피격당한 오무전기 직원들의 차량.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또다시 총알이 퍼붓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밑으로 숨었지만, 허벅지와 무릎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상원씨는 임씨 위로 쓰러졌고. 머릿속이 하얘질 때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임씨는 신음하는 이상원씨에게 “우릴 죽이려고 오나봐요. 숨쉬지 마시오” 하고 속삭였다. 2명이 다가와 각각 창문 양쪽에 서서 한참을 지켜봤다. 잠시 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임씨와 이씨는 차 밖으로 기어나왔다. 이라크인 운전사와 조수석에 타고 있던 김만수씨, 운전석 뒷자리의 곽경해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10여분 뒤 지나가던 미군에게 구조됐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이라크 병원에 후송된 뒤에도 ‘악몽’은 계속됐다. 밤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총과 대포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초저녁에 모든 불은 꺼졌고, 담배를 피러 밖에 나가려 해도 “불빛이 보이면 표적이 된다”며 병원 관계자가 말렸다. 낮에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경계심를 늦추지 않는 미군의 행렬과 이라크 민간인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선명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한달 가까이 머무른 독일의 미군 병원에서는 많은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잃거나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린 군인들은 너무나 흔했다.

부상당한 지 39일 만인 지난 1월 초,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임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달 동안 입원 치료를 받는 동안, 형편은 ‘당연히’ 크게 기울었다. 오무전기쪽에 직접적인 보상책임이 있지만, 워낙 영세한 업체라 크게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라크에 가기 전에는 한달에 500만원의 수입을 올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부인과 아이 셋이 처갓집에 의지하고 있다. 결국 이달 초, 기초생활보장법 수급권자가 되었다. 사고 당시 “치료와 보상 등 일체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한 정부는 임씨를 외면하고 있다. 지난 3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라”며 청와대 인터넷 게시판 신문고와 외교통상부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그러나 “정부가 책임질 일이 아니라 회사와 법적으로 해결할 문제니 대한법률구조공단으로 가라”는 차가운 답변이 전부였다.

임씨는 “당시 이라크 현지조사단이 ‘이라크는 안전하다’고 발표했다. 좀 꺼림칙했지만 정부 말을 믿고 간 것”이라며 “이제 와서 정부가 발뺌하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씨와 함께 부상당한 이상원씨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엉덩이와 다리에 총 세발을 맞아 하반신 신경이 손상된 이씨는, 애초에는 회복 기미가 보였지만 지금은 발가락도 움직일 수 없다. 역시 보상은 없다.


△ 이라크 티크리트주 인근의 작업현장에서 고압선을 연결하기 위해 송전탑으로 올라가는 오무전기 직원.(사진/ 연합)

누군가 총을 들고 쫓아오는 꿈…

임씨는 특히 숨진 김만수씨 가족을 볼 면목이 없다. 이라크에 가기 전부터 가족끼리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돌아온 뒤에는 연락하기가 어려웠다.

“형님은 죽었는데 나만 살아왔으니 미안하고 죄스러운 거죠, 뭐.” 김씨의 가족은 회사에서 3억원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빚잔치를 하고 나서는 여전히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고 임씨가 전했다.

임씨는 이라크에서 겪은 일을 될 수 있으면 잊고 싶어한다. 자신의 눈앞에서 관자놀이와 목에 총을 맞고 죽어간 김만수씨 등 동료들을 떠올리면 식은땀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결국 같이 방을 쓰던 환자들이 방을 바꿔달라고 병원에 요구하는 바람에, 임씨가 3인실에서 2인실로 옮겨가야만 했다. “요즘에도 낮에 이라크에 있었던 얘기를 하면, 밤에는 누가 총을 들고 막 쫓아오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도망가다 보면 막다른 길이 나오는 거예요. 이라크에서 겪은 일이 꿈에 그대로 나타나기도 해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올라와 1인시위에 나선 임씨의 바람은 ‘소박’하다. 임씨가 본 이라크는 너무나 참혹했다.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었다. “파병 문제는 국민들이 함께 다시 생각하고 다시 검토하고, 또 정말 합당한지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라크인들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파병은 막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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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일놈 잡종' 저주받은 아이들, 입 열다: [프랑스 화제 신간] 피카페가 담은 전쟁 기록 <저주받은 아이들>

박영신 기자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이 지난 6월 6일 오후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자끄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을 필두로 제 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참했던 연합국은 물론, 패전국인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등 16 개국 지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시라크 대통령은 여기서 '화해의 시대'를 역설했지만 그러나 끝내 침묵했던 이야기가 있다. 지금까지 애써 덮어왔던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 그 사이 다가온 불-독의 화해 분위기마저 이들의 그림자를 걷어내지 못했다. 긁어 부스럼 만드느니 정치인들은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저주받은 아이들> 입을 열다

▲ 피카페의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 독일과 영국에서도 곧 출판 예정
ⓒ2004 Syrtes
나치 독일이 전쟁에 패하고 물러난 1944년의 여름, 해방된 파리에서는 해괴한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를 박박 깎인 여성들이 거리로 내몰려 이른바 '조리돌림'을 당했던 것.

거리에 모여든 시민들은 민머리를 한 이 여성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거나 침을 뱉었다.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점령 프랑스에서 독일인 병사를 사랑한 이 여성들은 해방 조국에서 '국가의 수치'로 내몰렸으며 그래서 간단히 '더러운 창녀'로 치부됐다.

해방과 동시에 꼴라보(collabo, 대독협력자)들조차 너나 없이 레지스탕스(resistance)로 둔갑하는 마당에 어디서도,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여인들은 매를 맞아야 했다. 해방의 기쁨과 '배신자' 처벌로 들뜬 분위기에 휩싸인 군중은 이렇게 가장 나약한 자부터 응징했던 것이다. 프랑스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다.

그러나 불행히도 부끄러운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던 그 때, 독일인이 '독일놈'이었던 바로 그 시절, 프랑스인 어머니와 독일군 병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른바 '독일놈의 잡종(bâtards de boche)', '기생충(parasites)'으로 불리며 어머니의 업보를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했다.

독일 점령 시기, 젊은 프랑스인 여성과 독일군 병사의 금지된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20만에 이른다. 이제는 58세에서 63세의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들'로 불리는 이들이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일간지 르피가로의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했고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 장-폴 피카페(Jean-Paul Picaper)가 이들의 증언을 담아, 저서 <저주받은 아이들(Enfants maudits)> 을 펴냈다.

"프랑스와 독일이 화해하는데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금기"라고 진단한 피카페는 저서에서 60년 동안 이들이 '두터운 침묵 속에 버려져 있었다'라고 말한다.

전후 정체불명의 아버지를 두고 태어난 그 자체가 죄가 됐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벌을 받아야 했던 것. 어머니에게 내린 징벌만으로 아이들까지 용서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아버지 자리를 메우기 위해 결혼을 하기도 했으므로 아이들은 자신의 진짜 혈통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 모두가 오랜 기간, 수치와 죄의식의 나날을 보냈으며 딸의 잘못을 속죄하는 가족들도 학대를 견뎌야 했다. 또 몇몇 아이들은 어머니가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동안 남의 가정에 맡겨지기도 했다.

피카페의 붓끝으로 쓰여진 충격적이고 한편 비극적인 이들의 삶을 소개한다.

'독일놈 잡종' 손자, 닭장에 가두고 자물쇠 채우기도

1950년대 초,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작은 마을 메그리에서는 매주 일요일, 미사를 마치고 나면 시청 서기관이 마을 광장에 주민들을 모으곤 했다. 어느날 서기관은 10살난 소년을 불러 제 옆에 세우고는 주민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독일놈과 제비의 차이를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서기관은 다시 말을 잇는다.
'제비는 프랑스에서 자기 새끼를 치면 떠날 때도 데려가지만, 독일놈은 새끼를 버려두고 가지요.'


이것은 당시, 이유도 모르면서 눈물만 흘리며,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던 10살난 소년 다니엘 룩셀의 회상이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구경거리였다. 할머니는 내가 밖으로 나도는 것을 금지시켰고 밤새 나를 닭장에 가두고는 자물쇠로 잠궈버렸다. 나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떨어야 했다.'

독일군 병사와 프랑스 여성의 딸로 추정된 미셸은 1941년 출생과 동시에 버려졌다. 1945년, 연필조차 제대로 쥘 줄 모르는 나이에 유모로 부터 '나는 독일놈의 딸이다'라고 공책에 쓰도록 강요받았다고 미셸은 회고한다.

현재 62세의 스페인어 교사가 된 미셸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애시당초 영원한 고통에 저당잡힌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독일놈의 잡종' 앙리에뜨의 기억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과 오락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학교를 찾아와 "선생님이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독일인과 잔 것은 앙리에뜨가 아니라 바로 나예요, 누군가를 욕하고 싶다면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 제게 하셨어야죠"라는 해명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죽어야 '독일놈 잡종'이라는 오명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독일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앙리에뜨 어머니의 말은 그간의 고통을 잘 말해 준다.

앙리에뜨의 어머니는 독일군 병사를 사랑했던 까닭에 해방 후 뭇매를 맞고 8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녀가 독일인 연인을 돕고, 숨겨줬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은 다름아닌 친오빠였다.

이 책에는 13세가 돼서야 자신이 독일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쟈닌의 이야기도 있다. 느닷없이 나타난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던 쟈닌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자신이 그저 '독일인'이 아니라 '살인자의 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두 달 동안 벙어리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할아버지에 의해 수녀원에 맡겨진 쟈닌은 10살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몸무게는 18kg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리고 아무도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유럽판 '이산가족', 이름만으로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

1945년 1월, 독일군은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 땅에서 대부분 쫓겨났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의 최근 보고서를 보면 2차 대전 당시인 1943~1946년 즈음 프랑스에서 프랑스인 여자와 독일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가 적군이라는 이유로, 혹은 프랑스 역사의 수치라는 이유로 버려지거나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으며 숨겨졌다.

이 '저주받은 아이들'은 정체불명인 아버지의 이름만이라도 알고자 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베를린에 있는 WASt라는 관청을 찾았다. WASt는 독일군 참전 및 전몰 용사 친족 전문 기관으로서 2차 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와 민간인의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 때문에 WASt에는 독일이 점령했던 유럽 국가를로부터 혈육을 찾고자 하는 편지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기관을 통해 가족을 찾은 몇몇은 서신을 교환하기도 하고, 또 몇몇은 관청이 주선한 단체 방문이 성사돼 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애니 프리드 링스태드도 그녀의 나이 32세때 WASt를 통해 아버지를 찾은 경우다. 링스태드는 자신의 이야기로 'Knowing me, knowing you, that's the best we can do'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독일에 있는 가족을 찾고 있는 이들도 많으나, 만난다 하더라도 오랜 이별 기간의 공백을 단번에 메꾸기란 역부족. 간혹 의붓 형제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80이 넘은 아버지들은 잊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혹은 유산을 노리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있다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자녀들을 부정하는 일도 있다고.

<저주받은 아이들>, 전쟁의 고통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위한 본격 첫 보고서

피카페에게 이들의 절절한 사연을 알린 사람은 바로 WASt의 자료 담당 직원 루드비히 노즈였다. 노즈와 함께 써내려간 피카페의 저서는 이런 이야기를 담아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판됐다.

1993년 마르탱 브로사는 여성의 삭발식을 가리켜 '야비한 카니발'이라는 책을 써서 항의한 바 있고, 2000년 파브리스 비르질리는 '씩씩한 프랑스, 해방으로 삭발된 여성들'이라는 책에서 역설적으로 못난 프랑스를 조롱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마침내 프랑스의 민영 TV < TF1 >이 다니엘 룩셀의 일기를 담은 '아이들'이라는 첫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후, 2003년 3월에 프랑스3 TV가 '독일놈 잡종'이라는 프로그램을 특별 편성 방송한 일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며 집단 따돌림과 비극의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본격 보고서는 피카페의 <저주받은 아이들>이 처음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 독일인 병사들이 젊은 프랑스 여성들을 강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차 대전 동안 수백만의 독일군이 유럽을 장악했지만 1942~1943년까지 독일군 병사들과 점령국 민간인들의 관계는 차라리 친숙하기까지 했는데, 군복을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종종 징병된 군인이었으며 나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강간이나 약탈 등은 독일 국방군에 의해 엄격히 처벌됐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다. 하여 점령군과 그 아래에 있는 국가의 젊은 여성들의 위험한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프랑스인 연인의 가정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은 테러와 포로 숙청 등으로 악화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에 의한 프랑스 거주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 집단수용소에서의 죽음 등으로 표면화됐다.

이런 가운데, 당시에는 피임이라는 것이 부재했고 아이가 생기면 출산을 해야 했지만 당시의 도덕으로 볼 때 사생아는 '악'이었으므로, 그리고 치욕적이었으므로 그들의 많은 수가 버려졌다.

이 아이들은 이른바 '매국'의 열매인 '저주받은 출생 증후군'을 앓고 있지만 1945년 5~6월, 러시아군의 베를린 여성 집단 강간으로 태어난 '러시아군 아이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상황이었다 하니 '러시아군 아이들'의 경우는 상상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오늘의 독일은 전쟁의 포화 뒤에 죽음과 끔찍한 기억만을 남겨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만족하는 듯 보인다'고 쓰고 있는 피카페의 이 저서는 머지않아 독일과 영국에서도 출판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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