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tout autre est tout autre

이 문장은 일차적으로 동어반복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 때 이 문장은 "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이 문장은 항상 참이지만 아무런 새로운 지식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또한 (2) "모든 타자는 전혀 다르다"로 읽을 수 있다. 곧 하나하나의 타자들 각각은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것들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1)이라는 외관 내지는 허상 아래 숨겨진 (2)라는 본질, 진리를 말하려는 것일까? 오히려 이 명제의 묘미는 이처럼 두 가지(또는 그 이상)의 상이한 의미들이 결합되었을 때 생기는 효과에 있다. 곧 이 명제는 (1)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동어반복을 말하는 것처럼, 따라서 전통적인 논리학 및 존재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동일율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동일율의 되풀이를 통해 이 동어반복 명제를 (2)에서 드러나듯이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모든 타자들 각자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명제로 바꾸어놓고 있다.
  (3) 하지만 동어반복 내에서 타자론heterologie의 드러남, 파열은 다시 동어반복의 형식으로 바뀐다. 이 때의 동어반복은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곧 신이라는 전혀 다른 자, 인간과 다르고 동물과 다르고 기타 모든 유한하고 무한한 존재와도 다른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전혀 다른 자가 전혀 다른 자이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때문에, 데리다가 본문 2부 마지막에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명에 대해 말하듯 서명은 실패하게 된다. 신이라는 절대적 환유, 절대적 타자성은 그것이 절대적 타자성이다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로서의 타자들과 다르면서도, 늘 이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이들에 앞서 절대적 타자, 절대적 환유의 이름으로 미리 서명했(던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는 동어반복 문장은 전혀 다른 자는 각각의 독특한 타자들과 전혀 다른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전혀 다른 자와 각각의 독특한 타자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문법적·논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따라서 이 문장은 고도의 사변적sp culatif 진리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 사변적 진리를 작동시키는, 또는 이 사변적 진리에 항상 이미 따라다니는 거울반영sp culation의 법칙을 보여준다. 이 거울반영의 법칙은 사변적 진리에 항상 수반되지만 사변적 진리가 포함하지 못하는, 일종의 사변적 진리의 유령일 것이다.
  이 문장은 이런 측면들로 모두 소진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는 이외에도 더 많은 의미, 더 많은 비의미들이 담겨있으며, 그것들을 읽어내고 전개하는 것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이 문장에 관한 데리다 자신의 논의는 Donner la mort, Galil e, 1997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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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난 김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기입inscription

기입 또는 기입하기inscrire라는 개념은 원래 어원(in-scribere)이 말해주듯 (종이나 파피루스, 널빤지 등과 같은) 물질적 매체에 무언가를 '새겨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새겨넣는 행위는 어떤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또는 어떤 것을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친구나 자손, 또는 후세 같은)에게 손상 없이 전달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는 일차적인 어떤 것, 곧 서로 대면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또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직접 수행하는 행위을 보조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 머릿 속에 떠올린 생각이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말, 누구와 한 약속 등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처럼 상식적인(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상식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기입되고 강제되어온 생각이다) 생각을 전도시켜, 기입이나 기록이야말로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또는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고 있는 상호 주관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경험적인 기록과 일종의 유사-초월론적인quasi-transcendental 기록(데리다가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원-기록archi- criture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를 구분한다면 이 주장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데리다가 espacement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잠깐 살펴보자. 이 단어는 원래 인쇄술에서 유래한 용어다. 인쇄술에서 이 용어는 인쇄면에서 여백칸을 어느 정도로 하고 본문의 크기를 얼마로 잡을 것인지 정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간격을 얼마나 두고, 줄 간격은 어떻게 하고 하는 등의 작업을 가리킨다. 이는 학문적인 논의나 심지어 언어 활동에서 매우 부차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글자 크기나 여백, 글자 간격 등의 문제에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생각만큼 그렇게 부차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의 espacement은 우리의 언어 활동 전반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따르는 문법적인 규칙(예컨대 주어와 술어, 목적어의 순서 따위)이나 다양한 어법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를 연결해 주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가 일차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말과 말 사이의 간격두기, 곧 espacement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는 단지 단어와 단어, 말과 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게 아니라, 자음과 모음의 결합, 기표와 기의의 결합 같은 일체의 모든 언어적 관계에서도 성립하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espacement은 관계 맺기, 구분하기로서의 언어 활동에 전제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는 어떤 실정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관계,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이는 이후 구조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inscrption이나  criture, 또는 espacement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지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관계가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지 않지만 차이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데리다가 말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이런 기술적 조건들을 자연적 조건들로 전위시키고 은폐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데리다가 기입이나 기록의 작용이 주체의 자기 관계나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 주관적 관계의 (유사 초월론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그다지 허튼 소리는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분석에서 데리다는 이러한 기록의 문제 설정을 정치의 문제에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 문제에 적용될 때 기록의 문제 설정은 순수한 정초와 순수한 보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준다. 정립이나 정초, 창설은 항상 자체 내에 보존과 재생산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역으로 보존과 재생산은 그 활동 자체 내에 이미 정초와 창설의 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록으로 수록된 [독립 선언들]에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데리다가 본문에서 하이데거를 염두에 두면서 "되풀이 (불)가능성은 순수하고 위대한 정초자, 창시자, 입법가(이러한 정초자들의 숙명적 희생과 관련된 유비적인 도식에 따라 하이데거가 1935년에 말하게 될 의미에서, '위대한' 시인과 사상가, 또는 정치가)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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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힘]이 왜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는지 의아해하실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에서, 역주에 집어넣은 내용들 중 상당수를 <용어 해설>로 따로 묶자는 제안을 했고, 저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역주들 중 용어와 관련된 내용들을 <용어 해설>로 묶고, 또 몇 가지 용어들을 새로 추가하고 하느라고,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까지는 원고를 넘길 생각인데, 그 전에(또는 그 이후라도 관계 없습니다. 이 원고를 넘겨도 아직 최종 교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수정할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논평을 받고 싶어서 <용어 해설>에 들어갈 항목 중 하나를 올립니다.  좋은 제안이 있다면 최대한 내용에 반영할 생각이니,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공짜로?^^).

 

대체 보충supplément

우리가 ‘대체 보충’이라고 번역한 supplément은 데리다의 초기 작업, 특히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에서 문자 기록écriture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언어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기 위해 비로소 목소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루소는 이 최초의 언어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조음적articulé이라기보다는 음량과 강세, 억양이 중시되는 소리였을 것이고, 자음보다는 모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단조로워지면서 자음이 증가하고, 강세와 음량이 줄어들면서 조음이 증가하게 되고, 감정표현보다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언어가 바뀌어가게 된다. 조음적인 언어가 등장하고 의사 소통이 언어의 주요한 기능이 되면서 사용된 것이 바로 문자 기록인데, 루소는 이 문자 기록을 ‘위험한 대체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원래 문자 기록은 목소리에 기초한 고유한 의미의 언어를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이 문자 기록은 점차 고유한 언어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루소의 이 개념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드러나는 루소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뿐 아니라, 플라톤에서 루소, 후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전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 중심주의의 맹점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개념이다. 곧 데리다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idros』나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및 『구조 인류학』에 대한 분석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서양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목소리나 말 또는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주고받는 대화를 진정한 언어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처럼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문자 기록의 존재를 완전히 말소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며, 이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이러한 양면적 태도는 사실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내재하는 아포리아의 징표라고 말한다. 곧 순수하고 충만한 현전이나 기원(목소리, 말, 대화, 로고스 등)을 인정할 경우 이를 보충해야 할 도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으며(왜냐하면 보충은 결함을 지닌 것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보충의 필요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결국 현전과 기원의 불완전성, 결핍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문자 기록의 위험성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supplément이라는 단어는 데리다에게는 존재나 구조, 또는 언어나 기타 다른 모든 체계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보여주는 개념이 된다. 요컨대 우리가 현전, 기원, 중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이(差移)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supplément 개념은 기원의 결핍과 (문자) 기록의 근원성을 보여주는 핵심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supplément은 국내에서는 ‘대리적 보충’이나 ‘보환’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이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해서 ‘대체 보충’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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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가 마슈레의 [넓은 의미의 철학] 세미나에 초대되어 했던 강연의 번역본입니다. 발리바르가 최근 여기저기서 언급했던 "정치의 비극적 차원"에 관해 궁금해한 분들이 많았을 텐데, 이 글을 읽어보면 궁금증이 많이 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매우 개략적이고 함축적인 데다가 마키아벨리 [군주론]으로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만(따라서 다른 식의 작업들이 기대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글인 듯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미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발리바르의 글을 읽고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사실 80년대까지 쓰여진 발리바르의 많은 글들은 극히 복잡한 문장들 때문에 읽기가 곤혹스러울 뿐더러 번역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는데(더욱이 직역 또는 오히려 <직문>(?)^^ 위주의 번역 때문에, 저처럼 문체가 망가져 오랫 동안 고생한 사람들도 꽤 많을 듯합니다(형편없는 문체에 대한 웬 낮뜨거운 변명?-_-;;)), 최근에 발표하는 글들이나 책들은 문장이 상당히 간결하고 명쾌해서, 읽거나 번역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글은 내용만이 아니라 문체상으로도 탁월한 성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서툴고 서두른 번역으로 그 탁월함이 많이 훼손되었겠지만. 꼼꼼히 검토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고, 이 글을 읽어보기를 원할 분들이 여럿 있을 것 같아 먼저 올렸습니다. 좀더 읽어본 뒤에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고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공적 매체에서의 인용은 불허합니다.

 

 

Etienne Balibar, “Machiavel tragique”, in La Philosophie au sens large, Séminaires de Pierre Macherey, 2001. 4. 4. http://www.univ-lille3.fr/set/sem/BalibarMachiavel.html


비극적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바탕으로 자클린 리세Jacqueline Risset와 안 토레스Anne Torrès 및 그들의 동료들이 해낸 훌륭한 작업[이는 자클린 리세와 안 토레스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연극화한 것을 가리킨다―역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목소리, 비극적인 것(또는 비극), 잔혹몰락이라는 네 개의 단어와 결부되어 있는 네 가지 관념을 토론에 부치고 싶다. 나는 이 관념들을 순차적으로(selon une progression) 배열해볼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에 인위적인 체계성을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관념들이 가리키는 주제가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주제도, 주요 주제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 주제가 본질적인 한 측면, 『군주론』에 대한 모든 독해 및 『군주론』이 제기하는 이론적 문제들에 대한 모든 토론을 어떤 식으로든 “과잉결정”하는 본질적인 한 측면―특히 우리가 여기 모이게 만든 상황에 의해 호출되는―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목소리

자클린 리세와 안 토레스의 기획의 난점 및 그 아름다움과 흥미를 이루는 것은, 내가 확신하기로는 『군주론』을 읽는 모든 세심한 독자가 생각할 만한 한 가지 직관을 [물질적 장치 안에] 구현하려(matérialiser) 했다는 데 있다. 그 직관은, 이 텍스트는 “일인칭으로”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이 텍스트를 서술하는(qui le signe) 유일한 인물이 다수의 목소리로 증가하고, 이 목소리들의 교대와 중첩은 그의 글쓰기에 독특한 복잡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직관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통사가 아무리 기묘하다 해도(마리 가이유Marie Gaille는 『군주론』의 글쓰기에서 파격문법anacoluthe의 중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사람들은 그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품고 있는 “목소리들”은 들릴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 목소리들이 공명(共鳴)하게 해야 한다. 한 목소리에서 다른 목소리로의 이행이 감지될 수 있게 해야 하고, 한 대사에서 다른 대사로 이 목소리들이 전이하도록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연극의 정의 자체다. 목소리들[대사들]을 분리하는 간격들을 [물질적 장치 안에] 구현해야 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 자신이 자신의 “목소리들”에 대한 장면분할이나 배역설정 등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 목소리들을 부여할 수 있는 인칭들[인물들]의 성(性)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안 토레스의 알레고리적인 역할배정은 나에게는 완전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런 식으로 역할 배정을 했는지 그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역량(la Vertu), 호기(好機, la Fortuna), 전쟁(la Guerre) [이 셋은 여성이다―역자] ... 또는 군주(le Prince)와 인민(le Peuple) [이 둘은 남성이다―역자]. 『군주론』 서두의 <헌정 편지>는 정치적 인식이 군주와 인민 사이에서 배분되고, 따라서 치유 불가능하게 분할되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또는 오히려 나는 이 모든 배역설정은 좀더 은밀하고 좀더 규정적인 한 가지 분할, 마키아벨리 자신의 두 개의 목소리의 분할, 자신의 텍스트를 수신자들(군주 및 아마도 그 뒤에 있는 인민. 이 양자 모두는 “도래해야 할” 존재자들이다)에게 전달하는 이가 그 사이에서 분열되고 있는(se partage) 분할에 의해 지배되고 유지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글쓰기 안에서는 누가 말하는가? 『군주론』을 쓰면서, 그리고 이 글쓰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면서 『군주론』을 “말하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들은 어떤 것인가? 하나는 이성의 목소리이고 하나는 정념의 목소리,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낫다면, 하나는 사건들 및 역사적 상황들, 고대 및 근대의 정치적 활동의 인물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성찰의 목소리이고, 다른 하나는 촉구한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호명하고 권고하는 목소리, 곧 마지막 장 맨 마지막의 독립된 싯구에서 숨김없이 자신을 들려주는, 하지만 우리가 앞의 장들에서 그 대위법적 주제(le contrepoint)를 지각할 수 있는 목소리(이탈리아의 “구세주”에 대한 호소)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두 가지 목소리를 통합할 수도,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할 수도 없고, 역으로 이것들을 분리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군주론』은 지난 모든 시기에 걸쳐 그것이 제기한 해석의 문제들과 더불어서만, 이 목소리들의 중첩 안에서만, 그리고 이 목소리들이 계속 들릴 수 있는 한에서만 바로 그 저작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는 곧 마키아벨리가 분석한 사례들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한에서만, 그리고 이 사례들이, 필요할 경우에는 명칭들을 바꿔가면서(가령 “이탈리아” 대신 “유럽”으로) 우리를 호명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 호소력을 지니는 한에서만 『군주론』은 바로 그 저작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비록 뛰어난 기교로 목소리들을 중첩시키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한 열쇠를 보유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제는 텍스트 배후에 자신의 목소리들을 배치하고 상연하는 일종의 “초-마키아벨리”적 인물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이해관계들”로 갈등을 겪고 있는 텍스트―이 텍스트는 이러한 이해관계들의 증인이나 관객이기도 하다―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들의 중첩과 간격들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침묵의 밑바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향해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사물의 실제적인 진리에 관심을 경주하기andar dritto alla verità effetuale della cosa”라는 15장의 유명한 정식이 가리키듯이, 이는 “사물” 내지는 “사물 자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다음의 몇 가지 지적들을 통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사물”의 정체를 밝혀보고,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들의 연기(jeux)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해명해보고 싶다. 하지만 만약 여기 내 앞에 있는 안 토레스의 시도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것

내가 “비극적 마키아벨리”라는 제목을 제시한 이유는 『군주론』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비극이론을 구성해 보거나, 마키아벨리를 이 미학 범주로 가두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의 저작(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군주론』)의 비극적 차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마키아벨리와 함께, 역사 및 정치 안에서 “비극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한 가지 성찰을 재개해 볼 수 있으리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클린 리세는 매우 정당하게도 『군주론』의 텍스트에 현존하는 “영웅들”에 준거하고 있는데, 『군주론』 텍스트는 대부분 영웅들의 발흥과 이들에 대한 평가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이는 정체(政體)들에 대한 “분류” 및 그 실존조건들에 대한 연구와 대위법적 관계에 있다). 체사레 보르자가 이 영웅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례이지만, “군주”의 이러저러한 행동 요령 및 이러저러한 성공과 실패의 조건들을 예시해주는 다른 영웅들도 존재한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최종 분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실패다. 영웅들은 그 자체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체사레 보르자는 그 으뜸가는 사례이다.
  이는 어떻게 “군주”(아주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군주국”를 정초하는 “새로운 군주”)의 이상이 영웅주의 모델과 관계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군주의 이상은 영웅주의를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인가? 아니면 결국 그것을 멀리해야 하는 것인가? 알다시피 이는 텍스트 해석의 중대한 난점들 중 하나다. “새로운 군주”는 반(反)영웅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비르투”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특징들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 특징들을 합리적으로 통제하여 자신의 “도구들”로 삼는 방식(군주는 자기 자신의 도구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사적 인간에서 군주가 되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의 도구가 되고 이로부터 군주에 걸맞는 능력들을 길러내야 한다)을 통해서도 영웅주의의 형상들을 전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여기서, 겉보기에는 매우 반마키아벨리적인 브레히트의 『갈릴레이』의 “영웅을 요구하는 나라는 불행하다”는 문장을 재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헤겔의 성찰들이 지닌 적합성(헤겔은 브레히트 및 그의 정식의 심원한 양가성의 원천이다)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곧 헤겔에 따르면 자신의 사적 행위를 통해 공적 질서의 변동이나 정초를 수행하는 국가의 인간(정치인, homme d'Etat), “위대한 인간”, 이 “범죄자”는 사실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를, 고대적이고 야만적인 역사에서 합리적인 역사와 근대성으로, 시초의 역사에서 목적/종국의 역사로 나아가게 해주는 역사적 이행의 형상들 안에 기입하고 있다.
  하지만 비극의 “장르”를 이루고, 주기적으로 비극을 재활성화시키는 질문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적으로 이 질문들은 행위를 문제화하는 커다란 반정립들의 작용에 따라 분석된다. 수단과 목적 또는 “형상”과 “질료”의 관계(마키아벨리는 이것들을 비르투와 포르투나 같은 원리들의 지반 위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군주들과 인민들 같은 세력들의 지반 위에서도 분석한다), 결정의 모델과 기예의 모델 사이에서 행위자(agent)(또는 영어에서 좀더 적절하게 말하듯이 agency, 곧 “대행자agence”)의 동요, 자비나 잔혹의 수단을 통해 주권이나 권능을 추구하는 권력의 양가성 등이 바로 그러한 반정립들이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후에도 비극을 재발명한 위대한 작가들, 곧 셰익스피어(『리처드 3세』)와 코르네이유(『시나』), 라신(『브리타니쿠스』, 『베레니스』, 『바자제』)은 항상 마키아벨리 및 그가 불러일으킨 논쟁들과의 긴밀한, 그리고 심원하고 성찰된 관계 속에서 이런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들은 “마키아벨리언”이거나 “반마키아벨리언”, 또는 “초마키아벨리언”이다. 하지만 만약 마키아벨리 자신이 정확히 『군주론』에서 내가 비극적인 것의 가장자리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곧 비극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하는 메시아적 구원의 질문(『오이디푸스』나 『햄릿』에서처럼)이나 이해관계들 및 열강들 사이의 갈등의 변증법에 관한 질문(브레히트라면, 다른 미학적-정치적 범주의 의미를 변경시키면서 “서사극”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잔혹 및 좀더 일반적으로는 악의 비애에 관한 질문과 조우하게 되는 분리와 만남의 경계선들을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에서는, 선행한 모든 새로운 군주의 약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구세주rédemteur(이 신성모독적인 명칭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목적들에 종속시키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주요한 권능puissance은 교회의 권능이기 때문이다)에 대한 “음화적(陰畵的)인” 소개와 권능들이나 “체질들humeurs”의 변증법(마키아벨리는 다른 저작에서 여기에 대해 체계적인 외연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 변증법의 쟁점은 항상 인민의 정념들의 부정성, 인민에게 고유한 “예종에 대한 거부”를 통치 내지는 국가의 삶의 실정적 조건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념들 및 그 정치적 효과들에 대한 분석론(특히 잔혹에 대한 분석이 중요한데, 마키아벨리는 주목할 만한 “냉정함”으로 이를 다루고 있으며,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환각적인 기원invocation에 가까운 몇몇 [잔혹한 장면들의] “상연”을 제외한다면, 이는 스피노자 및 사드와 연결될 수 있다)이 서로 혼융되지 않는 가운데 중첩되고 있다. 비극적인 것, 어쨌든 마키아벨리식의 비극적인 것은 이 모든 차원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별도로 취해진 이 각각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잔혹

  이 세 가지 차원들 중 마지막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또는 여기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분명 “잔혹의 정치”가 존재하는데, 이 정치의 수단들에 대한 서술 및 그 필연성에 대한 정당화가 『군주론』의 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이 『군주론』을―진지하든 아니면 가식적이든―거부하는 이유들 중 많은 것들을 해명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는 매우 독특하다.
  이는 외설적인 성격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인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마키아벨리가 잔혹의 기술 및 통치 방법으로서 이 기술의 효력에 관해 제시한 논의들―여기서 사례exemplum는 단지 성찰과 분석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덕한” 행위의 모델로 나타난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생산할 수밖에 없는 효과는 사상사에서 매우 보기드문 다른 텍스트들과 비교해 볼 만하다. 나로서는 『규방철학』의 사드나 악덕의 번창을 “증명하는” 다른 텍스트들보다는 오히려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 및 원시적인 “금발의 야수”의 “순진무구한” 잔혹성에 관한 그의 논고들과 연결하고 싶은데, 그렇기는 해도 “선악을 넘어” 위치해 있는 도덕주의에 대한 비판과, “상위의”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개인들을 다른 사람들―이들은 이 목적들의 실현을 위한 대행자들이다―의 생명 및 존엄성의 “주인들”로 확립하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변론이 내포하는 도착성perversité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이에 관해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관점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며, 우리가 “인문주의humaniste” 시대―이 시대에는 르네상스 시대 못지 않게(또는 반대로 어쩌면 더 광범위하게) 폭력이 현실적으로 발생했지만, 더 이상 정치의 “순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의 원칙 내지는 선입견들에 따라 마키아벨리 텍스트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변론에 반발하고 있다고 논박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히려 정반대로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 곧 마키아벨리는 그가 그 물질성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는 [폭력의] 관행들이 편재해 있던(정치적 암살이 문제이든 고문 또는 배반이 문제이든 간에) 시공간의 맥락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그의 화두는 사실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의 화두는, 잔혹의 유효성의 조건들 및 이를 실행하는 전략들의 합리성,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목적들의 가치에 관해 계속 되풀이되는 문제제기라는 의미에서, 사실에 대한 “비판”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잔혹의 정치학은 고전적인 “실천적 지혜prudence” 이론을 권력을 획득하고 보존하는 데 유용한 수단들 전체로 확대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으며, 전쟁을 정치의 영속적 지평으로 간주하는 홉스나 슈미트식의 관점 또는 폭력을 문화 및 제도들로 “변환conversion”하려는 헤겔식의 관점 역시 훨씬 뛰어넘는다. 사실 그의 정치학은 정치와 관계하는 폭력의 개념 자체를 파열시킨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마키아벨리 정치학을 사적 정념들과 공적 정념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와 관계시키면서, 초월적이거나 전통적인 정당성을 갖지 않는 권력의 “정초”로서 마키아벨리 정치학의 영속적인 목표를 “증오 없는 공포”의 제도화로 정의한 것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폭력의 극단성과의 이러한 대면이 갖는 궁극적 역설을 간과했다고 믿는데, 이는 폭력이 모든 도구화를 초과하는, 또는 폭력의 결과들을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으로 변용시키는―왜냐하면 이 결과들은 “만족”(또는 향락jouissance)과 공포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형태들 아래서 재현/상연되는 바로 그 순간에, 폭력이 온전하게 제어 가능하고 계산 가능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사레 보르자가 자신의 부하 장수에 의해 억압받은 인민들에게 이 부하 장수의 시체를 두 토막내어 전시함으로써 그 억압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있는(『군주론』 7장은 인민들이 이것을 보고 “만족을 느낌과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저 유명한 간계scénario야말로 정확히 이것의 사례이다. 만성적인 내전 상태에서 폭력이 궁극적으로 권력의 독점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폭력은 “익숙해진” 형태들을 초과해야 하며, 이러한 초과는 여기서 (두토막난 시체의) 전시 광경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인민을 구성하는 “사적” 개인들 다수는 살이 떨리는 공포를 느낌과 동시에 일체의 동일화 가능성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고 모종의 합리성을 성취하고 있는지, 아니면 “효과적인” 정치의 목적들 및 수단들에 관한 자신의 체계 안으로 이러한 정치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떤 사물이 침투하도록 방임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이다. 『로마사론』은 믿음들(특히 종교)에 대한 조작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대중들은 오랫 동안 통제될 수 없다는 점에 관해 길게 논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의 정치”(또는 여론 정치)의 최초 판본과 동일시해 왔다. 공포의 효과와 함께 우리는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을 넘어서게 되는 듯 보이는데, 왜냐하면 “기원”은 더 이상 신화나 제의의 형태로 재활성화될 수 없고, 대신 각자가 경험하고 억압하는 어떤 집합적 외상―이것의 결과들은 예견 불가능하다―에 준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체사레 보르자의 모험이 이루는 (또는 이탈리아에서 권력imperium을 재정초하는 데 거의 성공할 뻔했던 그의 이야기의 이면을 이루는) “파멸의 과정” 한 가운데 이 삽화를 기입함으로써 마키아벨리 자신이 수긍했던 바로 그 점이다.

몰락ruine

  이로부터 내가 오늘 끝으로 말하고 싶은 마지막 용어가 나온다. 이는 『군주론』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어휘들 중 하나―아마도 제일 많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이다. 잠시, 안정된 권력(나중에 스피노자는 이를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부르게 되겠지만, 그가 목표로 삼게 될 것은 정치 전략이 아니라 제도들의 체계, 심지어 헌정constitution이다)의 보증 수단들에 대한 논증 내지는 탐구라는 관념을 “중립화”하면서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어보자. 우리는 이에 관한 서술(구세주에 대한 호소는 정념 및 지성의 발휘에 의해서만 이러한 서술[의 차원]을 넘어선다)에서 모든 “군주국”은 몰락하고 만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또한 모든 군주들 역시 몰락하며, 군주들은 자신들이 정초할 수도 있었을 국가도 몰락시키고 마는데, 왜냐하면 이 국가는 그들의 비르투의 구현물, 실현될 법하지 않은 구현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종말을 고하지 않을”(알튀세르), 따라서 영원으로 투사될 국가나 사회의 정초라는 관념―이는 주권에 관한 고전적인 신화와 분리될 수 없을 듯하다―에 맞서 마키아벨리와 함께 [모든 국가의] 정초들은 불가피한 몰락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사고해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초들은 가장 간교하고 가장 뛰어난 역량을 지닌 정치가들이, 겉보기에는 우연적(자신의 질병과 아버지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비했던 체사레의 계산상의 실수처럼)이지만 실제로는 불가피한 어떤 “오류”의 형태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양상들 및 기한들에 달려 있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곧바로 몰락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오류와 지성에 의해 대비되어 오랫 동안 지연되는 오류―이는 실제로는 성공과 혼동된다. 또는 그 본성상 시간이 항상 정치에 도래하는 것은 아니라면 혼동될 수 있을 것이다―사이에는 아무런 등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것이―필수불가결하며 따라서 통제 불가능한 폭력의 과잉과 더불어―심원하게 비관주의적인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비극적 차원을 이루는 것이며, 활동적인 인간들 및 그들이 이끄는 대중들의 대담함과 젊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기 위해 그것이 차례차례 빌려오고 있는 목소리들과 공유하는 기쁨 속에서 표현되지 않고 있는 『군주론』의 비밀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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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4-0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 거친 표현들이 몇군데 눈에 띄어서 좀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좀더 다듬어서 올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조금 바빠서 그랬다면 변명이 될까요?

2004-04-06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4-04-06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포리아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카이사르>는 <체사레>가 맞군요. [군주론]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렇지요. 그리고 연극적인 의미가 들어갈 경우에는 <영웅>은 <주인공>이라는 의미도 갖겠지요. 좋은 지적을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국내에는 코르네이유 비극 작품이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고, 라신의 경우는 몇몇 작품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에서 [라신 희곡선집]이 나와 있고, 장성중 교수의 [페드르] 번역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옛날 불어로 된 작품들이라서 그리 소개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은데, 코르네이유나 라신 작품들이 좀더 많이 번역된다면,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문화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balmas 2004-04-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출판상황을 보니까 제가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더군요. 코르네이유 작품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으로 [연극적 환상/오라스]가 번역되었더군요. 작가 이름이 <코르네유>로 되어 있긴 하지만요. 저도 아직 번역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오라스]는 코르네이유의 대표작 중 하나인데, 번역되어 있어서 무척 반갑군요.
 

* 한신대 사회학과 김종엽 교수의 글입니다.  예리함은 변함이 없군요. 이제 국내에서도 헌법이 법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논의의 주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헌법에 관한 논의 없는 정치철학은 아무래도 속빈 강정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때늦은 감이 듭니다. 이는 또 각자의 이론적 입장의 차이점이 좀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

 

헌법을 민주화하자

주말에 광화문 촛불집회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짐에 따라 촛불이 아름답게 피어올랐고, 〈너흰 아니야〉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탄핵무효, 민주수호”라는 구호가 거리를 메웠다. 구호를 외치고 있으니 1987년에 서울 거리에 울려 퍼졌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떠올랐고, 지금의 구호와 그때의 구호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연속성과 계승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헌철폐’는 ‘탄핵무효’가 되었는데, 실정법적인 의미의 헌법과 그것에 근거한 행위에 대한 국민적 거부라는 점에서 둘은 연속적이다. 더불어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외쳤던 민주화 투쟁의 성과 덕에 이제 ‘독재타도’라는 구호는 ‘민주수호’로 바뀌었다. 이것은 우리가 타도해야 할 독재의 상태로부터 수호해야 할 민주주의의 상태로 옮겨왔음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엔 무언가 역설적인 것이 있다. 왜냐하면 광화문에 모인 군중들이 무효라고 외치고 있는 그 탄핵이야말로 독재타도의 성과로 얻어진 87년 헌법에 입각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이 생겨나는 이유는 대중이 현재의 헌법 전체를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87년 민주화 운동과 동일시되는 헌법적 성과는 대통령 직선제에 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된 대통령을 탄핵한 의회의 행동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중의 생각을 분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헌법에 의거한 행위와 헌법에 근거한 판결이 국민들 대다수에 의해서 존중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헌법의 제정 혹은 개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참여와 그것이 수반하는 학습과정이 있을 때만 헌법에 대한 존중이 국민 속에 확고하게 문화적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런데 해방 후에 제정되고 개정된 헌법 가운데 이런 국민적 참여를 통해서 확립된 것이 없었으며, 이 점에서는 87년 헌법조차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87년 헌법 또한, 대중적 의지를 통해서 분명하게 표현된 대통령 직선제라는 권력구조의 큰 틀은 수용하였으되, 그 외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87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를 배제한 채 당시 여당과 야당 간의 밀실협상을 통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통령 탄핵과 더불어 절실히 깨닫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통일성의 뿌리가 헌법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사람들이 만든 사회란 언제나 적대와 갈등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그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통합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합의가 존재해야 하며,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오직 헌법을 통해서만 표현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하나의 공동체라면 그것은 오직 헌법 공동체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그 헌법이 국민의 민주적 참여 없이 만들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생활의 운영원리들이 헌법에 매개되어 있어야 한다는 감수성이 약한 것은 문제적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갈등이 깊을수록 더욱 의존해야 하는 헌법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진지한 헌법 개정의 담론을 일으켜 세워야 할 것이다. 2007년에는 87년 이후 20년 만에 대선주기와 총선주기가 일치하는 때가 된다. 그간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정해온 87년 헌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통일 시대까지 대비하는 헌법을 구상할 때가 되었다. 앞으로 4년 동안 광범위한 국민적 토론과 숙고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국의 제단 앞에 바칠 만한 헌법을 만든다면, 이는 87년 민주항쟁과 최근의 촛불시위를 통해서 표현된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헌법 자체의 민주화로까지 밀고 나가는 것인 동시에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를 향해 크게 한 걸음 내딛는 일이 될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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