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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 2008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 2010 부산시 원북원 후보도서
김곰치 지음 / 산지니 / 2008년 7월
평점 :
<빛>은 실패한 연애기다. 대체 내가 왜 너와 만나기를 그만두고 말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했고, 사랑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고백이고, 주체할 수 없는 외침이다. 성격이 맞지 않았다거나,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 속에 구겨 넣지 못하고 홍수처럼 터지고 만 말이 기나긴 편지가 되고,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결혼 적령기는 지났지만, 독신주의자는 아닌 남과 여. 그들의 사귐은 너그러움과 눈감음, 맞장구와 두루뭉술함의 잔잔한 노력 속에서 무난하게 발전해 갈 수도 있었다. ‘한 번 잘 사귀어 보라.’는 주위의 격려 혹은 ‘피차 나이도 많은데, 이것저것 잴 것 있나.’라는 조언에도 귀 기울여가며. 그러나 그들은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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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처음 봤을 거예요. 좋은 친구가 되려나 했는데, 세계관이 너무 달라서…….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것이 많지만, 세계관이 목숨처럼 소중한 사람들도 있잖아요.” (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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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그중에서도 그들은 특히 ‘종교적 세계관'이 맞지 않았다. 군대 시절 4대복음을 통독하고 아, 참 멋진 서사시구나! 하고 감탄했다는 남자에게 있어 ‘성경’이란 얼마든지 상상하고 비판할 수 있는 문학 텍스트와 다르지 않았다. 가령, 예수의 성령 잉태설은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웅녀가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각색된 신화와 같은 맥락에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기담(奇談)으로 여겨지는데, 마리아가 아이를 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과 요셉이 그러한 마리아를 끝내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비해 기독교로 개종한 지 2년 정도 된 여자에게 성경은 곧 굳건한 믿음의 대상이다. 불경스럽게 상상이 끼어들 여지란 없다.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라는 믿음은 ‘내가 니 죄 때문에 안 죽었나’라는 환시와 환청 체험으로 인해 여자의 골수에 더욱 깊숙이 뿌리박히게 된다. 이 또한 남자에게는 깨달음의 센서에 빛이 들어온 것, 혹은 ‘영적 호르몬’의 분출 현상으로 이해될 뿐이지만.
이렇듯 ‘상상력’과 ‘믿음’은 반목한다. 상상력은 갈아엎고 뒤집으려는 데 비해, 믿음은 다지고 지키려 한다. 슬프게도 이 두 힘은 고집스런 척력으로 서로를 밀어낸다. 그 대립의 자장 속에서, 그 척력의 탄성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상상력은 대단히 정력적으로 발휘된다. 기독교인인 여자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생각하고 상상할 정도다.
남자는 톨스토이와 다석 유영모, 개혁적 신학자들의 주장을 원군 삼아 성경 속 ‘기적’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우리 안의 ‘죄의식’ 혹은 ‘거지근성’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의 표적은 언뜻 ‘기독교’를 향해 있는 듯해 보이지만 그 배후에 생로병사로 인한 고통, 소멸의 공포 등 인간의 암흑지대가 놓여 있다는 것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인간의 어두컴컴한 부분을 조명하던 그는, 마침내 ‘똥’을 ‘빛’ 가운데 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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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하느님 육체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요. 하느님 내장 속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나는 참 아름다운 대장균 한 마리에요. 수십 조 마리 중 이 우주에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한 마리예요. 나는 이러한 사실을 내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깨닫고 있어요.”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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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선택받은 자’의 거대한 착각을 깨자고 말하면서, 아름답고도 절대적인 한 마리 대장균에 자신을 포갠다. 왜 하필 대장균일까? 대장균이야말로 우주만물이 순환토록 매개하는 ‘똥’을 만드는 존재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환이야말로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하고도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하느님의 존재를 해명했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시원치 못하다. “머릿속 생각이 뭐라고 사람이 사랑을 사랑하는 데 치명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178쪽)라는 의문은 결국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차이는 결국 팝콘 사건을 계기로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두 사람은 서슬 퍼래진 채 헤어진다.
끝간데까지 지혜를 짜내어 보아도 결국 자기동일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비단 이 남녀뿐이랴. 그러한 점에서 <빛>을 단지 실패한 연애기로만은 볼 수 없겠다. 세계관의 차이를 허물어뜨리지 못하는 아집이야말로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는 불씨일 테니, 파국으로 치닫는 연애와 전쟁은 결국 같은 메커니즘 속에서 진행되어 가는 셈이다.
작가는 책머리에서 “사랑은 천하무적, 만병통치”라고 썼다.
부디 그러한 생각이 썩어 거름이 되기를.
+ 2009년 가을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