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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 세계의사상 9
다윈 지음, 이민재 옮김 / 을유문화사 / 1995년 10월
평점 :
절판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개체의 운명을 시작한다. 아버지로부터 잘 떠나기, 그리고 그 자신 아버지가 되는 것, 거기에 진화론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다. 찰스 다윈 역시 그 자신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라는 빡빡한 관문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근간이 되었던 비글호 항해를 위해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건전한 상식을 갖춘 사람 중에 네게 바다로 가라고 권하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허락해주마." 그것이 아버지가 반대 끝에 붙인 단서였다. 포기 직전까지 갔던 다윈은 마지막 수단으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쓴다.
존경하는 아버지께로 시작되어, 아버지의 사랑하는 찰스 다윈으로 끝나는 이 편지에는 아버지의 반대 이유 8가지에 대한 외삼촌의 의견이 첨부되어 있었고 '된다, 안된다'를 확답해주실 것, 만약 안되더라도 그것은 결국 제 자식됨이 부족한 탓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립의 팽팽함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할 말은 다 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강요받은 의사의 길로도, 성직자의 길로도 가지 않았던 다윈이었기에 되도록이면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제갈길로 가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으로 성사된 비글호 항해는 <종의 기원> 탄생을 위한 중요한 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윈 개인으로서도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제 길을 가게 된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고 평생동안 '아버지들의 아버지'의 진면목에 대해 연구했으며, 후에 기독교 정통파들로부터 '조물주이신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격렬한 비난을 받았던 다윈의 일생을 살펴볼 때 그의 인생 경로는 (개인적, 신적) 아버지를 떠나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아나선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오해되는 바이지만, 그의 연구 주제는 결코 종의 기원, 그러니까 '최초의 아버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았다. 최초의, 하나의 아버지란 어디까지나 기독교상의 관념이다. 그의 진화론은 최초의 기원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메커니즘,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되기'를 중심에 놓고 있다. 다윈이 말하는 '아버지 되기'란 "한 생물이 다른 생물에 의존하는 것을 포함하며, 또(이것이 한층 더 중요하다)개체의 생명을 이을 뿐만 아니라 자손을 계속 남긴다는 것" (87p)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조주 아버지란 따로 없고, 생식하는 모든 종이 '아버지'이며 이 '아버지'들로 인해 세상은 서서히 진화해간다는 다윈의 이론이 발표되었을 당시 기독교인들은 ''신의 역할을 부정했다'며 거칠게 항의했지만, 그것은 또다른 뇌관을 건드리는 실질적인 위협이기도 했다. '창조주'라는 거대한 은유로서의 '신 아버지'는 '인간 아버지'들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후광 역할 또한 함께 해왔으므로 창조주를 부정하는 것은 곧 부권 침해로도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도그마를 배태하고 있었던 '창조론'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진화론'을 만나 크게 휘청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부-자' 관계를 종이 존속하는 중요 고리로 바라보고 있다는점에서 기독교-가부장제와 진화론은 일정한 교집합 면적을 가진다. 그러나 다윈의 이론은 세대간 경쟁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직적 가부장제로부터는 한발짝 걸어나가 있다. "자연 선택은 자손의 구조를 그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시키고, 또 부모의 구조를 자손과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시킨다." (107p)는 언급이 가부장제와 진화론이 갈라지는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부장제가 수직적 수혜관계를 전제한다면 다윈의 이론은 쌍방향에서 이루어지는 '부-자' 간의 세대 경쟁을 인정한다. 전자가 질서의 호루라기를 부는 가운데 폭력을 예비하고 있다면, 후자의 경우 화살을 주고받는 격렬함이 있되, 공평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윈의 이론에서 그나마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경쟁적 부자관계를 애써 은폐하지 않고, 명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물학적) '아버지 되기'는 인간종에 있어서는 보통 결혼, 그리고 안정적 배우자와의 섹스를 토대로 이루어진다. 아들은 일가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아버지와 대등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아들을 낳으면 또 그 아들이 아버지와 경쟁하는 가운데 동등해지고 싶어한다. 그렇게.....반복.
찰스 다윈은 자연과학자답게 결혼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서 비교한 뒤 "결혼, 결혼, 결혼을 하자. 증명 끝. "그리고 해버렸다. 평생동안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했던 카프카는 약혼만 두 번하고 결혼은 망설이다 결국 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변이'하지 못했던 그는 대신 '변신'을 꿈꿨다. 퇴행적인 방식으로. 생식에 의해 아버지가 되고 말고는 중요치 않으며 다른 방식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사내들도 있다. 그들은 수직 일렬로 이어지는 고리 대신 다른 패턴의 고리를 만들려 한다. 고리를 이어가지 않는 사람들의 복제품은 결국, 신선한 은유의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