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소개한 칠레 여행 안내 책자를 보면 칠레는 ‘3W의 나라’로 소개돼 있다. 3W란 Weather (기후), Woman(여자), Wine(포도주)을 의미한다.
기후가 좋다고 하지만 사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사방이 안데스 산맥에 둘러싸인 분지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공해가 심한 곳이다. 칠레인들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자부심을 갖는 칠레 여인들은 얼굴 윤곽이 뚜렷하긴 하지만 잘 가꾸지 않아서 한국 여인네들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포도주에 문외한이라도 칠레 와인만큼은 한 번 맛보고 나면 그 훌륭한 감칠맛에 격찬을 아끼지 않게 된다.
동양에선 쌀을 재배해 정착생활을 시작했다면, 유럽에선 연중 포도를 재배하며 마을과 도시를 이뤄나갔다. 와인은 이렇게 역사적으로도 문명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리스와 로마는 와인신을 신봉했고, 영토를 확장하는 곳마다 포도 재배를 장려했다. 로마제국 이후에는 교회가 와인을 성체 의식에 사용하면서 와인 문화를 보급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칠레에 포도 재배가 처음 시작된 것도 이러한 종교적 목적과 관련이 있다. 정복자들과 함께 칠레에 들어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와인을 종교의식에 사용하려 했다. 1850년대에는 프랑스로부터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쇼비뇽 블랑, 카르메네르(Carmenere) 등의 고급 종자가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현재 칠레의 주종 품목이 됐다. 1870년대에는 유럽이 포도 병충해로 재배에 심한 타격을 입자, 프랑스의 와인 전문가들이 대거 칠레로 이주했다. 이것이 칠레 포도 재배가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됐고, 칠레 와인은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150년 역사와 이상적 환경의 ‘조화’
1980년대부터는 스페인 와인 제조업체인 미구엘 토레스(Miguel Torres)에 의해 현대적인 첨단 기술이 도입되면서 비약적 발전을 보였다. ‘칠레 와인 붐’이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칠레 와인이 갖는 맛의 경쟁력은 이상적인 포도 재배 환경에서 나온다. 좋은 포도가 재배되는 지역은 북위 30~50도, 남위 30~40도. 칠레는 안데스 산맥을 따라 국토 길이가 무려 4800㎞에 이르고 있어 남위 30도에서 40도에 이르는 모든 지역에서 포도 재배가 가능하다. 겨울철과 초봄에 강수량이 집중돼 있고 나머지 기간은 건기인데, 이 때 포도가 재배되기 때문에 병충해가 생길 가능성이 적다. 또 이 시기에는 안데스 산맥에서 녹아 흐르는 풍부한 용수로 관개를 하고 있다.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15~18도에 이르고 있어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포도가 재배되고 있다.
칠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천혜의 지형 조건을 갖고 있다. 동쪽으로는 4000m가 넘는 만년설의 안데스 산맥, 서쪽으로는 태평양, 남쪽으로는 혹한의 남극지대 그리고 북쪽으론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 병충해가 침범할 수 없는 자연적인 보호막이 형성돼 있다.
19세기 후반 ‘포도나무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포도뿌리혹벌레가 창궐해 전유럽의 포도 나무를 황폐시켰을 때에도 칠레만큼은 침범하지 못했다. 당시 포도뿌리혹벌레의 영향으로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재배되던 카르메네르종은 멸종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었다. 그러나 포도뿌리혹벌레가 나타나기 전에 몇몇 포도 재배자들이 카르메네르종을 칠레로 옮겨 심었는데, 그동안 메를로의 일종으로만 알려져 오다가 1996년 프랑스의 한 와인전문가에 의해 카르메네르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제 이 포도종은 칠레의 독보적인 와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세계 5위 와인 수출국으로 ‘우뚝’
칠레의 포도 재배 면적은 약 17만㏊에 이른다. 이 중 와인용 포도재배 면적이 10만㏊로 가장 넓고, 생식용 포도 재배 면적이 5만㏊다. 와인용 포도 재배는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카르메네르, 쉬라, 피노 누아 등 적포도주용 포도가 80%를 차지한다. 그리고 샤도네이, 쇼비뇽 블랑 등 백포도주용 포도가 약 20%를 차지한다.
칠레의 연간 총 와인 생산량은 5.7hl(헥타리터)로 세계 10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중 절반이 넘는 3.55hl를 수출, 세계 5위 와인 수출국으로 자리잡았다.
와인 수출액은 1998년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5억달러를 넘었고, 2002년에는 6억달러를 돌파했다. 칠레 와인은 80% 이상이 미국, 유럽 국가로 수출되고 있다. 국가별 수출 현황을 살펴보면 미국이 1.3억달러로 전체의 21.5%, 영국이 1.1억달러로 19%를 차지하고 있다. 캐나다, 덴마크, 독일, 일본, 아일랜드, 스위스 등도 칠레 와인의 주요 수입 국가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이 장악하고 있던 세계 와인 시장에 칠레 와인이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은 물론 우수한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바탕으로 한 경쟁력에서 나온다. 하지만 칠레 정부의 치밀한 해외시장 확대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칠레는 인구 1500만명이라는 협소한 시장으로 일찍부터 시장 개방을 통해 수출 확대를 경주해 왔다. 이미 EU, 북미,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들과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해외 수출판로를 열어 놓았다.
농산부, 무역진흥공사 등 칠레의 정부기관은 칠레비드(Chilevid) 등 와인제조사협회와 공동으로 민관 합동연구단을 구성, 칠레 와인 산업의 발전과 수출 증대를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와인수입액 200만달러 넘어
칠레 와인의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유럽산 와인에 대한 차별성을 강조하고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이미지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칠레 정부는 “칠레 와인이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병충해의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들어졌다”며 적극 홍보에 나서고 있다. 단순히 ‘값 싸고 맛 좋은 포도주’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품질을 개선하는 한편 가격을 상향 조정해 ‘맛 좋은 고급 포도주’라는 이미지를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또 호주하면 쉬라, 아르헨티나는 말벡(Malbec), 남아공화국은 피노타쥐(Pinotage)를 떠올리는 것처럼 칠레도 독보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카르메네르를 칠레의 트레이드마크로 집중 육성하기 위해 품종을 개선하고 재배지 면적을 넓혀가고 있다.
칠레가 와인 수출의 신규 타깃시장으로 꼽고 있는 곳은 아시아 시장이다. 일본은 이미 연간 대 칠레 와인 수입액이 약 2500만달러로 칠레의 5대 와인 수출 대상국이 됐다. 중국, 인도 등 거대 경제권의 와인 소비가 증가 일로에 있어 향후 와인 수출의 최대 잠재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한국과의 FTA 체결을 계기로 주류 소비량이 많은 한국시장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며, FTA 발효에 대비하여 이미 많은 한국 수입업자들이 칠레 와인 제조업체와 거래를 하고 있다. 이에 앞서 한국에서도 2000년 50만달러에 불과하던 칠레산 와인 수입이 2003년에는 200만달러를 훨씬 상회해 매년 수입이 급신장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 경쟁력 20위… 한국보다 높아
한ㆍ칠레 FTA가 발효되면 현재 수입산 포도주에 부과되는 15%의 관세가 5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철폐된다. 그렇다면 경쟁 상대국인 유럽, 미국, 호주산 와인에 비해 경쟁력이 크게 높아져 한국 내 칠레 와인에 대한 소비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여겨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 상류계층의 전유물로만 인식되던 와인이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화되고 있는 현상은 소비자들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키고 건강을 증진하는 차원에서 환영할 만하다. 와인하면 보통 우리들은 귀에 익숙한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캘리포니아산 와인이 제일인 줄로만 알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이 곳 남미 끝자락 만년설 안데스 산맥의 정기를 받아 만들어진 청정 칠레 와인을 한번 시음해 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이제까지 우리는 칠레를 그저 농업이 발달된 와인의 나라로만 인식해왔다. 하지만 칠레는 중남미 국가 중에서 가장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돼 있고, 치안 유지가 잘돼 있는 선진 모범국가다. 2002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국가 경쟁력 순위를 보면 칠레가 20위로 21위인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또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가 투명성 순위에서도 칠레는 20위로, 50위인 한국을 휠씬 앞지르고 있다.
칠레는 중남미지역의 다른 국가와 달리 역사적으로 부정부패가 거의 없는 나라이다. 최근 한국 정부에선 부정부패가 없는 칠레의 장점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까지 파견하고 있다.
생소하기만 했던 칠레가 우리나라와의 FTA 체결로 이제는 아주 친숙한 나라로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FTA 체결의 조속한 마무리로 양국의 교역이 확대됨과 동시에 문화적인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와인은 우리가 맛과 향으로 접한 최초의 칠레 문화의 한 단면이다. 달콤하면서도 혀끝에 들어붙는 와인만큼이나 한국과 칠레 관계가 돈독해지길 기대해 본다.
◆ 칠레 속의 한국인들
교민 약 1500명… 의류·잡화 수입해 판매
칠레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대략 1500명으로 대부분이 수도 산티아고에 몰려 있다. 파트로나토라는 상업 지구에 한인 상가 240여곳이 밀집해 있어 코리아 타운을 이루고 있다. 한인 상가에서 취급하는 주 품목은 의류와 잡화류. 5년 전까지만 해도 이들 품목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수입했지만, 가격 경쟁에서 한국산이 중국산에 밀리면서 최근에는 한인 교민들이 대부분의 수입거래선을 중국으로 돌리고 있다.
이곳 한국 교민들은 한국·칠레 FTA가 발효되면 품질과 디자인면에서 중국산보다 월등한 한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다소 개선될 것을 기대한다. 또 수입선 전환을 고려하고 있어, 양국간 FTA가 조속 비준되길 갈망하고 있다.
칠레 남부지역 푸에프토몬트에 교민 10여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수산가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곳에서 잡힌 홍어는 전량 한국으로 수출되고 있고, 양식 연어 및 김은 이곳에서 가공처리돼 일본이나 미국 등지로 수출되고 있다.
산티아고=구자경 KOTRA 칠레 산티아고 무역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