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이라면 하일성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 옛날 야구해설가라는 직업이 뭔지도 잘 모를 때부터 이것을 직업으로 삼았고 프로야구 원년 때부터 계속해서 해설을 해오셨던 분이다. 원래를 환일고 선생님이었으나,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해설하는 게 너무 좋아서 안정된 선생님이라는 직장을 박차고 이 길을 나섰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야구해설가 양대 산맥은 허구연과 하일성. 이건 뭐 오래된 이야기이다. 둘다 야구에 완전 몰두하여 살아온 분들이고, 오래 된 만큼 영향력도 크고..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하일성의 해설을 좋아했다. 딱딱하지 않고 친근감있게 때론 진지한 말도 하지만 그게 질책처럼 느껴지지 않게 할 줄 알고 무엇보다 해설 자체가 쫀득쫀득하다고나 할까. 맛깔스럽다고나 할까. 듣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구를 보게 하는 맛이 있었다.

 

그런 분이 오늘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아... 지은 책 제목처럼 정말 <야구 몰라요 인생 몰라요>가 아닐 수 없다...  해설가를 하다가 KBO 사무총장을 지냈고 그러다가 다시 해설가로 복귀할 때 쯤에 여러가지 추문에 휩싸인 건 맞다. 그 진위를 떠나서 사실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일흔이 다 되어가는 야구계의 산 증인이 이런 좋지 않은 일들에 휩싸여 있다니.

 

그래도 예전에 한번 쓰러져서 건강이 매우 안 좋아졌던 때에도 담배 술 다 끊고 스스로 노력해서 잘 이겨낸 일도 있던 분이라, 설마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오늘 이 기사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냥, 차라리 쓰러져서 돌아가셨다면 이렇게 참담하진 않을 것 같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얼마나 몰렸으면 그랬을까. 그 어두운 사무실에서 혼자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를 생각하니 참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또 나의 추억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도 슬프다. 내 어린 시절부터의 야구와 관련된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이런 말로를 맞으셨다는 게.. 더없이 허무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 어딘가에서 모든 것 다 잊고 편안하시길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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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9-0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는데, 제가 다니던 학교와 광주일고가 봉황대기 4강전에서 붙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광주일고가 이길 확률이 80%라고 고 하일성님이 예언하셨고, 저희가 2:8로 졌지요... 정말 명해설가셨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연 2016-09-08 14:38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야구해설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고 애석할 따름입니다...ㅜ

cyrus 2016-09-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일성님 귀에 자란 털이 장수털이라고 해서 자르지 않았다고 하던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실 줄 꿈에 몰랐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연 2016-09-08 17:16   좋아요 0 | URL
장수털 얘기 들으니 더욱 허탈. 사람 인생이 참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이제 그 구수한 말솜씨와 목소리를 못 듣는다고 생각하니 괜히 슬퍼지구요. Rest in Peace...
 

 

감기에 걸렸다. 난데없이 기침감기. 콜록콜록... 에어컨을 너무 틀었던 걸까.

 

암튼 며칠 참다가 어제 급기야 병원에 갔고 간 김에 수액도 거나하게 맞아주시고 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약을 탔다.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저녁 약을 먼저 먹어야겠다 싶어서 약국 안에 있는 정수기로 가서 약을 먹고 기침용 시럽도 들이켰다. 강렬한 플라시보 효과 덕분인지 왠지 기침도 좀 잦아든 것 같고 몸도 좀 거뜬해진 것 같고.

 

룰루랄라... 약속장소로 갔다. 내가 계속 가고 싶어했던 가로수길 '몽리'. 와인바.

오랜만의 와인이야 하면서 끼안티 클라시코 한병을 주문하고 피자와 파스타를 안주로 한다. 아. 끼안티 클라시코를 먹으면 로마가 생각난다. 천지가 다 끼안티 류였는데, 내가 많이 먹었던 게 끼안티 클라시코. 거기선 만원 좀 넘었던 것 같은데 여기선 와인바라 그렇겠지만 81,000원이다. 아마 내가 로마에서 먹었던 거랑 빈티지나 와인의 질이 다른 걸거야 라고 애써 누르며 음미. 안주도 다 맛있다. 여기 괜찮은 걸? 애용해줘야겠어.. 라며 수다 삼매경.

 

근데, 뭔가 허전. 계속 뭔가 허전한거다.

왜 허전하지? 내가 뭘 잊어먹고 있나? 뭐지뭐지? 계속 머리를 맴도는 이 찝찝함... 그리고... 알았다.

 

약을 약국에 두고 왔다!!!!

 

아 정말. 그러니까 정수기에서 약 먹는다고 위에 올려두고는 약만 먹고 바로 뒤돌아 룰루랄라... 나온 거다. 아예 까맣게 잊고는. 철푸덕. 이거 뭐냐. 노환이냐. 치매냐. 건망증이냐. 정신상실이냐... 자책자책. 밤에 기침약 먹고 자야 하는데...으앙. 덕분에 새벽에 깨서 기침하느라 잠을 못 주무시고.... 와인도 먹었겠다 잠도 못잤겠다 퀭한 눈과 거칠한 얼굴로 출근 중... 버스에서 졸다가 뒤로 목이 꺾이는 신공까지 발휘하고.. (목뼈 나가는 줄 알았다. 너무 뒤로 확 젖혀져서.) 아 챙피해...

 

약국이 8시 30분부터 한다길래 일부러 시간 맞춰 갔으나 출근 전.

아니, 자영업자가 왜 시간을 안 맞추고 난리야. 괜히 투덜거리고. 9시 넘어 전화해봤더니 그제야 나온.... 그리고 다행히 나의 약을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따 찾으러 가야지.......................... 아. 비연. 도대체 왜 그러냐.

 

(...)

 

그 와중에 어제 밤엔 달밤 운동을 했다. 집앞 중학교가 항시 잠겨 있는데 (세상이 하수상하니) 가끔 밤엔 문을 열어둔다. 아주 멋진 육상트랙이 있는 고로, 어제 열려 있길래 내려가서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사실 난 항상 걷는다. 걷는 게 어디냐. 근데 어제는 보니, 중고등학교 애들이 시험 연습을 하는 건지, 야밤에 몇몇이 나오더라. 그러더니 그들은 요이땅.. 하고는 뛰기 시작했다. 십대들의 저 뜀박질. 내 옆을 쉭쉭 지나가는 그 아이들을 보며 나의 십대가 떠올랐다.

 

나는 체육을 정말 싫어했고, 그 시간이 늘 고역이었다. 구르기도 안되고 평행봉도 안되고 뛰기도 안되고 던지기도 안되고... 악몽같은 체력장이 떠오른다. 그 중 장거리 달리기. 몇 미터였지? 4,000미터였던가 2,000미터였던가. 운동장을 대여섯바퀴 뛰는 거였던 거 같다. 심지어 지구력도 없어서 장거리 달리기 매번 꼴찌. 일등이 나와 나란히 뛰는 게 한두번이 아니고. 장거리 달리기 점수 없으면 체력장 점수를 받을 수가 없어서 정말 죽을 각오로 뛰어야 했다. 으. 생각해보니 정말 기억하기 싫은 십대의 날들이었다.

 

그런데, 어제 밤, 십대 아이들이 뛰는 걸 보니 문득 나도 몇 십년 만에 뛰고 싶어진 거다. 한번 뛰어봐? 하고는 슬슬 뛰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자리걸음 하듯이 뛰어지더니 좀 뛰니까 다리가 앞으로 나간다. 십대 애들 빠르기에는 영 못 미쳐서 그냥 내 페이스대로 뛰었지만, 나중에 한 바퀴 정도는 내 나름의 전력 질주도 가능해졌다.

 

아. 근데, 너무 상쾌했다!

 

이런 기분 백만 년 만이야 이럴 정도로. 마지막으로 한 바퀴 뛰고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을 보는데 정말 상쾌하고 통쾌하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음주 뜀박질이었는데 말이다.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 아저씨 머릿 속에서 뿅. 떠오르고. 이래서 사람들이 뛰는구나. 뛰다 보니 마라톤이란 것도 하게 되고. 그런 거구나.. 를 어제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계속 걷기는 하되, 한번씩 트랙을 뛰어봐야겠다... 생각한다. 스트레스 해소에 이 만한 게 없는 거라는 걸 알아버렸다. 뭔가 비밀을 알아버린 이 느낌. 좋다.

 

몇 년 뒤에 스페인 산티아고를 가려고, 그게 하루에 20km 씩 걸어야 한다고 해서, 요즘 걷기량을 조금씩 늘리고 있었다. 하루 10km씩은 걷기로. 이제 뛰기도 넣어 봐야겠다. 산티아고가 다 평탄한 길은 아닐테니 폐활량을 좀 늘려놓을 필요가 있겠다 싶기도 하고, 우선, 이 스트레스를 다 버려 버릴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생겼으니 뛰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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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9-0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고 가요!^^ 감기는( 몸) 좀 좋아지셨나요?( 응? 감기가 좋아질리..없잖아!)ㅎㅎㅎ

비연 2016-09-07 11:07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ㅜㅜ 약을 안 먹어서인지 기침이 점점 심해져서 사무실에서 눈총을...ㅜㅜ
얼렁 가서 약 도로 찾아와 입에 밀어넣어야겠어요... 이넘의 부실한 성격 땜에 고생입니다..흑흑.

[그장소] 2016-09-0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얼렁 얼렁 약 투척해쥬세욧~^^
사무실근처에 라도 약국이 있다면 요!
눈총 ㅡ그만 받게요~~

비연 2016-09-07 15:11   좋아요 1 | URL
약국에서 어제 잃어버린 약을 조우하였나이다 ㅎㅎㅎㅎ
먹었더니 좀 낫긴 한데 아직도 약간 콜록콜록... 감기가 심하게 들린 모양이에요..ㅜ

[그장소] 2016-09-07 19:30   좋아요 0 | URL
결국퇴근후 드시는군요! 에고고~ 기침 목 ..감기엔 꼭 목에 손수건을 두르세요 ..기침이 한결나아져요! 밤사이 안녕하자고 ㅡ감기한테 !

비연 2016-09-08 11:16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먹으니 좀 낫긴 한데. 어제 모임 갔다가 늦게 귀가해서 완전 피곤하네요..ㅠ 쉬어야 하는데 말이죠.
감기야, 얼렁 떨어져라 하고 있어요. 손수건도 둘러야겠어요. 감사~

[그장소] 2016-09-08 11:20   좋아요 0 | URL
약도 잘 챙겨드세요! 무리 말아야하는데~ ㅎㅎ

비연 2016-09-08 13:14   좋아요 1 | URL
네네~ 오늘은 가서 좀 쉬려구요~^^

[그장소] 2016-09-08 22:55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은 문닫고 푹 쉬어야겠어요!^^ ㅋㅋㅋ
 

 

어제 아빠가 꽉 찬 책장을 보고 말씀하셨다.

 

"저 책, 다 어쩔거야?"

 

며칠 전 집 대청소 때문에 일하러 오신 분이 서재가 있는 방에 짐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와. 멋지다."

 

 

'어쩔거야'와 '멋지다'의 중간에서 고민 중인 비연.

 

책 사면서 어쩔까를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지금 책장이 내려앉게 생겨서 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멋지다는 더더군다나 생각해본 적이 없다. 책 더미에서 진드기나 안 나오면 다행이다. 조카는 저 방에서 재우면 안 되겠어 라는 생각은 많이 했었다. 지금... 한 줄 꽂아 놓고 그 앞에 또 꽂아서 뒷줄은 하나도 보이는 칸이 없는 상태라, 어떨 땐 같은 책을 두 번 산다. 헉. 내가 이거 샀었나?... 이 쯤되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긴 하다. 적어도 책 제목이 보이기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하게 생각.

 

그런데 또 사고 싶은 책들이 눈에 띄고... 이번엔 심지어 셋트...

 

 

 

 

 

 

 

 

 

 

 

 

 

 

 

 

 

 

꼭 사야 할 것 같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저 책들. 셋트라고는 하지만 4권짜리잖아... 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기는 하나, 이 책들이 배달되면 정말 집에서 쫓겨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한 권씩 4달동안 살까? 그럼 올해까지는 다 마련하겠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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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9-05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게 공감합니다. 살다 보면 아니 버티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더라구요. 어떻게든 됩니다…

비연 2016-09-05 17:44   좋아요 0 | URL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된다... 이 말에 희망을 ㅎㅎㅎ;;

cyrus 2016-09-05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제 동생이 책장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해요. `책들 다 읽어봤어?`, `책 언제 다 읽을거야?` 전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비연 2016-09-05 17:44   좋아요 0 | URL
저두요! 산 걸 꼭 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 별루에요! ㅜ

yureka01 2016-09-0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책장에 꼽을 자리가 없어서 책장 빈자리에 쌓아 놓게 됩니다...네 어쩔 겁니까..
저도 정리는 좀 하긴 해야 하는데...
물론 사놓고 못읽은 책도 많고 ㄷㄷㄷㄷㅋ

비연 2016-09-05 17:45   좋아요 0 | URL
전... 방바닥에...ㅠ 못읽은 책 아직 많죠. 근데도 자꾸 사게 됩니당. 어쩔 수 없다는 거죠 ㅋㅋ

로제트50 2016-09-05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당~~~!

비연 2016-09-05 17:4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부자아빠 2016-09-0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책 꽂을 데가 없어서 고민인데.

비연 2016-09-06 10:29   좋아요 0 | URL
부자아빠님... 동병상련...ㅜㅜ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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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하루 만에 다 읽은 후 방금 책장을 탁 덮으면서 든 생각. 아니 내가 이 책을 왜 이제야 발견했지? 그리고 나서는, 이제 정유정의 책을 다 사봐야겠군... 이라는 생각으로 옮겨갔고, 마지막에는 '난 이제 정유정 팬이야' 라고 생각을 마무리지었다. 우리나라 소설가의 책을 읽고 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언제? 꼬무작꼬무작... 있긴 있었나...

 

쫀득쫀득한 문체와 앞 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구성, 그리고 강렬한 흡인력. 또 뭘 말할 수 있을까. 유려한 단어를 구태여 골라 쓰지 않아서 화려한 느낌보다는 담백한 느낌. 우리나라 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장광설이 없이 내용으로 승부하는 책. 또 또... 뭘 말할 수 있을까. 사람의 심연을 바닥까지 다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통찰력.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긍정적인 방향성을 구차하지 않게 제시하고 있는 스타일... 내가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뒤지는 것이, 하나 이상하지 않다.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죄책감. 그 크고 작음을 떠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특히나 부모, 가족에 대한 애증의 느낌. 아이에게는 이런 것들이 가슴에 큰 구멍을 남기고 때로 헤어나지 못하는 우울함을 커서까지 끌고 가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전부,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최현수가 그랬고 강은주가 그랬고 안승환이 그랬고 심지어 오영제도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상처는 살아남은 사람, 최현수의 아들인 최서원에게로 응집된다.

 

어쩌다 벌어진 사건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그날 잘못된 에너지들이 모여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오서령이라는 아이가 그날 따라 엄마 흉내를 내며 엄마의 옷을 입고 화장을 짙게 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영제가 도망치는 딸아이를 일찍 발견만 했더라면, 강은주가 괜히 집보러 다녀오라고 최현수에게 시키지만 않았더라면, 최현수가 그날 따라 술을 그렇게 진탕 마시지 않았더라면, 안승환이 저수지에 들어가 수몰된 마을을 찍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수많은 가정들이 그냥 다 '그래 버렸기' 때문에, 그것들이 맞닥뜨린 지점에서 아이가 희생된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두의 인생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그걸 우연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왜 이렇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그렇게 세령호에서의 이 주는, 살인의 죄로 망가져 가는 한 남자와, 악착같이 돈을 벌어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고 싶어하는 그의 아내와, 아버지를 사랑하고 믿지만 점점 마음이 멍들어가는 한 아이와  '내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또 한 남자에게 가혹한 세월로 매김하게 된다. 결국 여자아이를 죽이고 아내를 죽였다는 죄명과 함께, 한 마을을 통째로 물 속에 가라앉게 만들었다는 괴물로서 '최현수'는 아들 최서원에게 돌이킬 수 있는 시커먼 구멍을 남기게 된다. 살인마의 아들은 견뎌낼 수 밖에 없었고 그걸 쳐다보는 세간의 시선이나 친척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으며 어딜 가나 따라다니며 정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어떤 세력으로 인해 결국 '아저씨'에게 의탁하여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게 되고. 그리고 지난 세월, 그 속에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 둘씩 벗겨지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이어진다.

 

저 젊은 눈동자는 그때 무엇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을까. (p512)

마지막 즈음에 이 대목에서 사실 눈물이 났음을 고백한다. 인생의 한치 앞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때 그랬던 해맑은 미소의 청년은 44살에 할아버지의 몰골이 되어 교도소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된다고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사는 것에 대한 회한이 불현듯 밀려와 이 대목을 두번 세번 읽게 된다.

 

대기화면에 깔린 사진을 들여다봤다. 안개낀 별채앞길. 불 켜진 가로등들, 측백나무 울타리 옆을 나란히 걷는 거구의 남자와 사내아이. 남자는 사내아이의 책가방을 들었고 사내아이는 남자의 바지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였다. 열흘 전 아침, 아저씨가 찍었을 우리의 뒷모습이었다. (p8)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좋아했던 아들. 참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훼방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공포, 불안, 죄책감... 이런 것이 아닐까. 떠났다고 다 털어 버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거기에 휘말려 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 경악이다. 남겨진 아이는 정면으로 맞부딪히고 그래서 자기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어쩌면 그 아이에게 말한다고는 하지만, 내게 말하는 듯한 느낌으로 빌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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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이라는 작가가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순간. 첫장 펼치자말자 이다.

 

 

일러두기.

3.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어느 누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만약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오직 문학의 영역에서 발화된 정치 풍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즐기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여긴다면 이는 문학적 무지와 정신 병리적 망상이 분명하므로 조속한 학습과 치료의 병행을 권하니다.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ㅋㅋㅋㅋ  문득, 읽다가 비슷한 사람 얼굴이 뿅 떠오를 때면 억지로 누른다. 아 난 아냐. 학습과 치료 필요없어. 이러기에 딱 맞는 <일러두기>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말이다. 미리 구설수를 차단하는 이 작가.

 

이 책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책에서 가져온 글들이 많다. 그게 좋기도 하고 좀 거슬리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테니까. (p62)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아니고 근심도 아니고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이다. (p90)

쇼펜하우어가 했던 양에 대한 어두운 이야기를 떠올렸다.

- 우리는 목장에서 놀고 있는 양의 무리와 흡사하다. 도살자는 그중 이것저것을 뽑아 가르고 있다. 우리는 행복한 나날 중에도 어떠한 재앙 (병, 박해, 전락, 상처, 질병, 발광, 죽음 등등)이 우리에게 예비돼 있음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인가. (p159)

스탕달은 이렇게 말했다. 연애는 열병과 같은 것이어서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p202)

사랑은 늦게 찾아올수록 격렬하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구절이다. (p209)

이러니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를 망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이다. 만약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장님이라면 나는 굳이 고래 등 같은 집도 번쩍이는 가구도 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p212)

 

다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모든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빌린 말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19페이지에 이미 버젓이 나와 있었다. 이 구절은 나중에 사랑하는 연인, 김수영과 오소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도 해주게 된다.

 

심리학에는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열 명이서 포커를 하는데요. 그중 아홉 명이 작당해 나머지 한 사람을 틀리지 않았는데도 틀렸다고 몰아붙이는 겁니다. 나아가 그 하나가 항의하면 할수록 다른 아홉은 훨씬 강하게 그를 압박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이 어이없는 상황이 하염없이 지속되면 제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도 결국엔 굴복하고 말죠. 그런데 말이에요. 정말 신기한 사실은, 그때 만약 단 한 사람만 그의 편을 들어 주면, 그는 그 어떤 혹독한 공격이 끝없이 들어온다 한들 결코 꺾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 한 사람. 이것이 바로 단 한 사람의 위대함입니다. (p19)

 

그 단 한 사람이, 연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부모 이외에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런 사람 하나, 그 사람이 연인이든, 친구든, 남편이든, 아내든, 어쩌면 자식이든, 동료든, 그런 사람 하나만 확실히 있다면 사는 게 팍팍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좀더 힘내서 살 수 있을 거다, 싶다. 위대함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게 정말 위대함인 것인 게지. 우주와 같은 한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매둘 수 있는 사람의 힘. 그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그 무한한 힘. 나는 누군가에게 '단 한 사람'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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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6-09-04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들어오게 굵게 인용하신 글, 참 좋아요.
요즈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그 한 사람, 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하고 바라 봅니다. 심지가 곧아야 할텐데 그러기가 힘들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어요.

비연 2016-09-04 20:46   좋아요 0 | URL
저도, 그 한 사람 되고 싶은 맘이 어쩌면 누군가 제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불쑥 불쑥 생기는 글귀였어요... 그 어느 것도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