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나 보호자, 노인이나 장애인이 '시민'이기 어려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사회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가 '시민적 관계'에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질병, 돌봄, 늙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돌봄을 누락한 채 이루어지는 어떤 시민권/시민성citizenship 논의도, 나아가 시민을 전제로 하는 정치체제와 법제도도, 결국 거대한 부정의를 재생산하게 된다. (p33)
누구나 젊을 때는 몰랐던 것이(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내게도 질병이 오고 늙게 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 상태가 오리라는 것, 또 내 주변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일 게다. 이건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거다 하리만치 어느 순간, 불쑥 내 인생에 쳐들어온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나혼자 고민한다고 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한번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담긴 많은 문제의식들 속에서 나의 고민이 녹여짐을 느끼며 이것이 혼자서 풀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도 이 달라짐을 '직면'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많은 관계들이 '가족 같은' 관계로 불리는 사회는 정이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상상력이 빈곤한 사회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우리가 취약할 때 바라는 모든 것을 욱여넣기 보다, 가족 바깥에서도 그럭저럭 시름시름 잘 살아갈 수 있는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타인을 든든해하고 필요할 때 기댈 곳이 있으리라 믿으며 늙어갈 수 있는 사회를 구상하고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p43)
이 문단의 첫 대목에서, 사실 웃었다. 아 정말 적나라한 지적이다. 가족 같은 회사 어쩌고 하는 광고 문구에 가슴에 멍자국이 들곤 했었는데, 역시나 이넘의 가족 같은, 이걸 붙여서 다 해결하려고 하는 사회라는 걸 이렇게 직접적으로 지적하다니. 나이들어 가장 두려운 건, 나 자신의 무너짐도 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볼모로 잡게 될까봐이다. 나처럼 비혼으로 사는 사람들은 더하다. 물론 누가 날 돌봐준다고 선듯 나서리라 믿지도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그들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남기는 존재가 될까봐, 열심히 고민하게 된다.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 경제적인 것, 육체적인 것, 정서적인 것 이런 것들을 미리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테러, 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사랑에 빗대어 그들의 인생에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리라고 전제하는 사회보다, 모든 사람이 취약함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는 사회가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의존이 이렇게 두렵고 위협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서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발달과 교육의 기본목표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는 '몸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여 성립하고 지탱된다. (p55)
사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경계는 모호하며 때로, 아니 자주 정치적이다. 아무 병도 없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며 혼자 두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개체에 대한 환상은 '건강한 노동'을 중시하는 사회가 심어준 허상일 지도 모른다. 누구든 우리가 생각하는 좁디좁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질병과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좀 가셔지고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걸음을 이제사 내딛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혹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attention, 무의미해 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가지게 하는 관계와 돌봄의 제스처라는 것이다. 여기서 테일러는 돌봄에서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라는 측면보다, 그러한 과정의 근간이 되는 관심과 배려의 측면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p221-222)
치매에 대한 얘기도 있다. 사실 누구나 너무나 두려워하는 상태. 나나 내 주변 사람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상태가 이 상태 아닐까. 기억을 잃어가고, 내가 아닌 누군가로 사는 것 같은 상태. 그게 나일까 다른 사람일까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지금 내가 생각하는 돌봄이라든가 의존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판단조차 유보되는 상태. 두렵고 두렵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조차도 인정해야 하는 상태이며, 그러나 우리는 조금씩 준비는 해나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어렵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내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긴 한가보다. 이 책에서 인용된 많은 책들을 이미 읽은 걸 보면. 물론 이 저자들이 번역한 책들도 여러 권 있었다. (이전에는 몰랐었다)
돌봄을 제공하는 서비스도 그와 같은 시장의 힘에 의존할 수 없을까? 아마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돌봄은 컴퓨터 기술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돌봄은 극도로 노동집약적이다. 일대일의 접촉과 개인별 맞춤 지식이 필요하다. 표준화되거나 객관화될 수도 없다. 훌륭한 돌봄 로봇을 만들어 내지 않는 한, 땀과 눈물을 실리콘으로 완벽하게 대체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인다. 돌봄 로봇이 있다 하더라도 그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p87)
질병은 죽음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몸이 병에 걸린 것은 우리를 배반한 것이 아니다. (p294)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멀고 먼 별자리에선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 하늘 한구석의 죽음이겠지"라고 폴 사이먼은 노래했다. 멀고 먼 별에서, 우리는 한 번 깜빡이고는 사라지는 빛처럼 보일 것이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에 우리는 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일 자체가 중요함을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적敵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 (p190-191)
사두고 아직 읽지 않고 있거나, 아직 사지 않은 책들을 담아 둔다. 이제 내겐 젊어질 길은 없고 나이들 길만 있으며 이제까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삶보다는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오히려 현실적인 노쇠와 질병과 끝내는 가야하는 죽음으로까지의 길이 남아있을 뿐이고, 이를 현명하게 개인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책을 보면 참으로 반가운 것이, 이제 우리 사회에도 우리의 글로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문제제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구나 싶어서다. 어쩌면 고령화사회에 급히 접어들지만, 아무 준비도 안되어 있고 가족주의적인 사상이 뿌리깊은 우리나라라는 사회 내에 존재하기 때문에 더 그런 지도 모르겠다. 사는 건 참 힘든 일이고 이런 모든 일들을 눈 똑바로 뜨고 '직면'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지만, 살아있기에 해야 하는 일이니, 관심을 계속 기울여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