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아끼던 후배가 저 멀리 가기 전에, 우리가 함께 보며 즐거워 하던 책은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리즈 였다. 북스피어에서 <미야베 월드 제 2막>이라며 나올 때부터 쭉 그랬다. 내가 워낙 미미여사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좋아했기에 <모방범>이나 이런 책들을 신나서 추천해도 읽기는 읽지만 그냥 그런 반응이더니, 이 에도 시대 이야기를 담은 책을 함께 읽어보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언니, 딱 내 스타일이에요." 하며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원래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책에 점점 흥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소설도 생겼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에 "그래 그럼, 이 에도 시대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다 사줄게." 했었다. 그렇게 시작되어 매번, 나올 때마다 한 권 더 사서 그 아이 집에 배달을 시켰고.. <외딴집>처럼 두 권 나왔을 때는 괜스레 투덜거리며 한꺼번에 두 권을 낸 북스피어가 원망스럽다고 농담했던 일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 아이가 저 멀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준 책도 이 시리즈 중 하나였다. 그 때, 메세지가 기억난다. "와, 언니. 너무 고마와요. 잘 읽을게요." 그 책을 다 읽고 그 먼 길을 갔을까. 아니면 읽다 말았을까.
미야베 미유키의 이 에도 시리즈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내용도 재미있지만, 볼 때 마다 이런 기억들이 떠올라서이기도 하다. 같은 책을 함께 읽으며 재미있다고 서로 웃음지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면서. 아, 이젠 과거구나. 멋진 일이었는가 하면서... 라고 써야 했던 거구나. 새삼 쓸쓸해지네. 추석날에.
<눈물점>. 이번에 나온 책에서는 흑백의 방 주인이 바뀌면서 시작된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오치카가 헌책방 차남과 결혼해서 미시야마가를 떠나고 나서 미시야마가의 차남인 도미지로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것. 오치카 없이 이 이야기들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으려나 라는 생각이 설핏 들었지만, 역시 미미여사의 이야기 푸는 솜씨는 대단하다. 여자에서 남자로 바뀌었고 마음에 상처가 있던 사람에서 별탈없이 지내온 사람으로 바뀌었고.. 그 변화 속에서 괴담의 결들도 좀 달라진 기분이다. 좀더 터프해지고 좀더 무서워졌다고나 할까. 사실 여기 실린 네 편의 이야기들을 읽고 밤에 잠이 잘 안 오기도 했다. 그게 딱히 귀신 뭐 이런 얘기라서가 아니라, 사람의 사는 것 자체가 죄인데 그 속에서 지은 죄를 이리 받는가 싶어서 오싹해졌다고나 할까.
<눈물점>이나 <시어머니의 무덤>이나 <구로타케 어신화 저택>은 죄에 대한 이야기다. 살면서 무슨 죄를 지었는지 그리고 살면서 누구랑 안 좋았는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말했을 수도 있고 숨겼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은 알기 때문에 그 댓가를 치르는 것이 나에게나 다른 가족에게의 몫이 되는 것이 못 견뎌지는 이야기다. 읽으면서 생각했더랬다. 나도 이런 상황에 몰아지는 죄를 지은 적이 있는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무서워졌다. 괴담 시리즈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한낱 귀신이나 정념, 원혼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동행이인>. 그저 계부에게 반항하던 아이였으나 파발꾼으로 잘 살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이와 부모를 전부 병으로 잃으면서 방황하게 된 사람. 그 사람에게 붙은 비슷한 처지의 혼. 그리고 깨달음.
"걷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숨이 차나 했더니."
호흡이 가빠서가 아니었다.
"저는 그제야 울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슬픔 때문이 아니라 처자식을 생각하며 울고 있었다.
"눈물이 그렇게 뜨거운 줄, 저는 잊고 있었습니다."
(p295)
누군가를 잃으면, 그것도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슬퍼서 좌절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게 잘 살펴보면 자기가 불쌍해서, 자기가 외로와서, 자기 슬픔에 겨워.. 일 때가 있다. 그건 처음에는 모르다가 시간이 흐르고, 그렇게 나를 돌아보게 되는 어느 즈음에 문득 알게 되는 감정이다. 떠난 사람을 생각하면서 울기도 하겠지만, 결국 세상에 남겨진 내가 외롭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그런 기운에 젖어 무엇을 위해 우는지 무엇을 위해 울분을 가지는지도 모른채 그냥 넋을 놓아버리는 것.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동행이인>이라는 이야기가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
역시, 이 미시야마 시리즈를 읽고 나면, 좋다. 마음에 잔잔한 파도가 치다가 잦아지는 느낌이 든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내가 못 견딜텐데, 그냥 그렇게 잔잔히 파도가 치고 잠시 하얀 거품이 끓어오르는 듯 싶다가 책을 덮을 때쯤엔 잦아진다. 그래서, 가끔 카타르시스랄까, 뭐라고 해야할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미미여사는 이 미시야마 시리즈를 99개 쓴다고 한다. 이제 31개 썼다는데, 제발 99개 다 쓸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집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에도 시리즈를 흐뭇한 마음으로 사진 찍으며 이 칸이 책장 하나 전체로 번질 수 있기를 함께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