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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 가기 전에 어떤 책을 가져갈까 매우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기실은 마음 속에 정해져있었는데 시늉만 한 거라고 생각된다. 난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동물원에 가기'를 계속 읽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읽어야지 내심 결심하고 있었던 거다. 얇고 작고 더군다나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작가의 에센스 같은 책. 낙점.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손에 든 건,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에서였다. 가서는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다니고 저녁에는 혼자 낭만에 취해보겠다고 수첩과 펜을 손에 딱 쥔 때 시내의 어느 바에 가서 죽치고 있었기에 책을 펼 여력은 없었다. 드디어 그 곳을 떠나는 날. 공항에 조금 일찍 가서 수속을 마친 후 게이트 앞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알랭 드 보통이란 사람. 사람의 본질적인 마음을 꿰뚫어보는, 흔치않은 작가 중의 하나다. 그저 표피적으로 남에게 들은 것을 내 것인 양 포장하거나 느끼긴 느꼈으되 마음의 겉을 돌아다니는 감정 한 가락 잡아서 낭설을 퍼부어대는 작가들과는 달리(물론 모든 작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말해두는 바이다) 이 사람은 하나를 보아도 아주 깊숙히, 아주 섬세하게 느끼고 쓴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스캔당한 듯한 느낌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가지게 하는, 그런 '놀라운' 사람이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를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은 상관관계가 있다. 때떄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술술 풀려나가곤 한다.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 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이 쉬워진다. <슬픔이 주는 기쁨, pp18~19>
비행기 창 너머로 뭉게뭉게 빠져들 것 같은 구름을 쳐다보고 있으면 나는 나와 대화를 하게 된다. 혼자 여행을 하든, 누구와 함께이든, 그 순간은 세상에 나 혼자인 듯 싶다. 왜냐하면 바깥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 크고 믿기지 않아서 주변의 '작은' 인간들이 보이지 않고 대신 내 속의 '큰' 이야기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호퍼의 그림처럼,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것들과 운송 수단은 사람을 사색하게 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공항에 가기, pp35~36>
그렇다. 창 밖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땅과 인간들이 세워둔 갖가지 장난감같은 모형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신이 된 듯한 느낌을 가진다. 아니, 신의 눈을 느끼게 된다. 앙코르 와트의 3층에서 아래를 바라볼 때도 그러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본다는 것.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 그것은 우리는 가끔 느끼지만, 위에 늘 상주하시는 신에겐 항상 보여지는 광경이고...참으로 우습기까지 한 인간사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 쓴 이야기는 보통 사건의 거족만 훑고 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해놓을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와 송어), pp123~124>
여행하는 내내 부끄러웠다. 내 펜끝에서 나오는 단어들의 미천함. '좋았다'. '굉장했다'. '멋지다'....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단어들로 내 느낌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의 능력을 비난했다. 그리고 마치 뭔가가 있는 듯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주절주절 읊어놓음으로써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했다. 그런데, 보통은 알고 있었다. 글쓰는 것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는 이의 비애를, 그리고 그 행태를. 들켜버렸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평소에 자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대목들만 추려서 완결지은 에세이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책들과 가끔 겹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지루함으로 느낀다면 보통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보통이 정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이 책 한권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책이다. 읽는 내내,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보는 시선을 너무나 말끔히 정리해서 알려준다는 것에 찬탄하였고 아울러 뿌듯했다. 어려운 말들로 그의 글들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의 글은, 이전과는 다른 인류인 현대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누구보다 충실하게 말해주는 보기드문 작가라는 말 외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