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자와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은, 주변에는 후한 인심과 깊은 신심으로 명망이 높은 인사이지만, 집안에서는 폭군이다. 폭력적이고 실제 폭력도 휘두르며, 자식과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광신을 강요하고 일과표를 통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십수 년간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들은 두렵고 공포에 떨었지만 이렇게 사는 것만이 인생이라는 생각 속에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고 아버지의 칭찬에 마음 푸근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1등은 누가 했니?" 마침내 아버지가 물었다.
"친웨 지데제요."
"지데제? 지난 학기에 2등 했던 애 말이냐?"
(중략)
"거울을 봐."
나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거울을 보라니까."
거울을 받아서 들여다봤다.
"네 머리가 몇 개냐, 그보?"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보어를 섞어서 물었다.
"하나요."
"저 애도 머리가 하나지 두 개가 아니잖니. 그런데 왜 쟤가 1등을 하도록 놔뒀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에요, 아버지." (p55, 63)
아버지가 정한 일과표에 따라 살아가는 아이들. 대화는 없고 복종만 있으며 웃음은 없고 기도만 있는 집안. TV를 볼 수도 없고 이교도라 칭하는 나이리지아 전통 음악이나 풍습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 이걸 어길 경우 날아드는 폭력. 아버지 유진은 성당에 다니지 않는 자신의 친아버지 파파은누쿠도 이교도라 하며 모른 체 하고 그 옆에 아이들이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집안에서 신이었다. 천주교의 하나님이 신이 아니라 자기가 신이었다.
"아니퀜와가 내 집에서 뭘 하는 거야? 우상 숭배자가 내 집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당장 나가!"
"내가 자네 부친과 동년배인 건 아나, 그보?" 노인이 물었다. 그가 허공에서 흔드는 손가락은 아버지의 얼굴을 가리킬 의도였지만 가슴께에서만 맴돌다 그쳤다. "자네 아버지가 엄마 젖을 먹을 때 나도 엉마 젖을 먹었다는 걸 아는가?"
"내 집에서 나가!" 아버지가 대문을 가리켰다. (p92~93)
자신이 믿는 종교 이외에는 다 부정하고, 특히 나이지리아 전통신앙을 믿는 자들을 악마라 여기는 아버지에게는 노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그냥 부숴버려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 "악마가 내 집에 텐트를 쳤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당신은 가만 앉아서 애가 공복재 어기는 걸 보고만 있었어, 마카 은니디?"
아버지는 천천히 벨트 버클을 풀었다. 몇 겹의 갈색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벨트에 차분한 색 가죽을 씌운 버클이 달린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오빠에게, 어깨를 가로질러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두 손을 들어 막는 어머니의 위팔, 성달 갈 때 입는 블라우스의 스팽글 달린 부푼 소매로 싸인 위팔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내 등에 내려앉았다... (중략)
아버지가 오빠와 나를 홱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니? 살갗이 터졌니?" 아버지가 우리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나는 등이 욱신거렸지만 아니라고, 아프지 않다고 말했다. 죄악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며 고개를 흔드는 아버지는 마치 뭔가에, 떨쳐 낼 수 없는 뭔가에 짓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p131, 132)
악마는 너다... 폭력적인 인간의 전형이다. 자기가 정한 규율을 지키지 않았을 때 때리고 심지어 벨트를 사정없이 휘두르고 나서 마치 나는 너희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양,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양, 아프냐고 물어보고 울고 살피는 짓. 이런 것에 넘어가 많은 폭력 아버지에게서 엄마와 아이들은 몸과 맘이 썩어간다. 폭력은 그 무엇도 정당화할 수 없다. 사랑해서 떄린다? 그런 건 없다. 그렇다면 뭐가 잘못 되었는 지 얘기하고 때린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매에서는 절대 벨트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를 주체못하고 상대를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거만하고 강압적이며 폭력적인 인간상의 전형적인 행태일 뿐이다.
"병원에 입원했었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이페오마 고모가 조용히 물었따.
어머니는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초침이 부러진 벽시계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나를 돌아봤다. "우리 가족 성경책 놓는 작은 탁자 알지, 은네? 아버지가 그거로 내 배를 내리쳤단다." ..(중략) "아버지가 나를 성 아녜스 병원에 데려가기 전에 이미 바닥에 피를 다 쏟은 상황이라 의사도 구할 도리가 없었다더라." 어머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느다란 눈물 한 줄기가 겨우 눈을 비집고 나온 것처럼 뺨을 흘러내렸다. (p300~301)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계속 유산을 한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잘 사는 남자가 애를 여럿 낳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보라고 하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며 어머니는 계속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아마도 폭력적으로 섹스를 시도했으리라 예상되고 그렇게 아이가 들어차면 다시 때리고 던지고 해서 아이를 그대로 유산시키곤 한다. 어머니는 이 폭력 속에서도 아버지를 감싸고 집에 돌아가곤 한다. 아. 너무 전형적이다. 너무 전형적이란 말이다.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이 말도 안되는 연계. 가하는 자는 해놓고 매번 용서를 빌고 당하는 자는 그 용서를 또 연민으로 받아들인다. 그래도 그이는.. 요즘 그이가 얼마나 힘든 지... 뭐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으아아아악.
어찌 보면, 경제적인 자립이 안되는 여성이 남편에게서 떨어져나와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는 자체가 여성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겠기에, 참아야 하는 것이었을 게다. 참지 않으면 가난해져야 하고, 가난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거나 먹고 입힐 수가 없게 되고. 그러니 폭력적인 남편이라도 먹고 살게 해주는 그늘막으로, 그래서 폭력은 그냥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적 자립성이란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뛰쳐나올 원동력이고,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 자양분이다. 사회적인 능력이 없는 여성일 경우, 이렇게 고스란히 당할 수 밖에 없다고.. 시몬 드 보부아르도 얘기했었고 레이첼 모랜도 얘기했었다. 그들의 이야기들이 머릿 속에 벙벙 뛰어다니며 나를 괴롭힌다.
.... 그러나 아버지의 여동생인 이페오마 고모는 달랐다. 나이지리아 국립대학교 교수인 고모는 자유분방하고 대화가 가능하며 무슨 이야기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고모부가 차사고 죽고 없는 집에, 남자없이 어떻게 사냐며 주변에서 남자 구하라고 성화를 쳐도 꿋꿋이 혼자 아이 셋을 기르며 가난하게 사는 고모는, 자자와 캄빌리를 그 집에서 해방시켜주고자 자신의 집에 일주일 머물게 할 것을 제안한다. 말이 없고 어른에게 대꾸도 못하고 놀줄도 모르고 음식도 못하고 주고받는 대화에 낄 줄도 모르게 성장한 두 남매에 비해, 고모의 세 아이들, 아마카, 오비오라, 치마는 활발하고 자기 주장이 있으며 의견을 말할 줄 알고 집안일에 적극적인 아이들이었다. 고모는 그런 자신의 아이들을 유심히 살피고 적절한 말로 대응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봐주는 사람이었고. 이 속에서 자자와 캄빌리 두 아이도 변해간다.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다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맞서게 되고... 결국은 벗어나, 미래를 말할 수 있게 성장해 간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여기에서, 희망과 미래를 뜻하는 것 같다. 흔하지 않은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은수카에 있는 고모의 집에 있던 것이었고 다시 아버지 그늘로 돌아오던 날, 자자가 가져와 옮겨 심어 키우게 된다. 그것이 무럭무럭 자람과 동시에 이 두 남매의 세상도 다른 색깔로 바뀌어 나가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소설은, 나중에 옮긴이의 글을 읽으면 마구 뒤죽박죽 섞이긴 했지만, 나이지리아의 비극적인 역사들도 함께 다루어서, 시대의 비극은 결국 가정의 비극과도 연결됨을 인지하게 한다. 군부독재가 들어서고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그 시절. 그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대사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디나,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어디나,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불행을 잉태하는 씨앗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함이 목까지 차올랐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감명깊게 읽은 이 소설 <연을 쫓는 아이>에서도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우리에게 기억되기로는 허구헌날 전쟁통이라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여겨지는 이 곳이, 그렇게 되기 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도 역시 주인공의 아버지 바바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바바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최고 부유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넉넉하고 늘 나누는 사람이지만, 아들인 아미르를 늘 못마땅해한다. 강한 남자이길 바라는 아버지의 눈에, 문학을 좋아하고 싸움이나 운동에 능하지 않는 남자아이는, 자신의 자식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덥지 않은 존재다. 바바와 함께 성장한 하자라인 하인인 알리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산. 배운 거 없는 아이이지만, 바바는 오히려 이 아이를 더 좋아하고 아끼는 눈치다. 하산과 아미르는 형제처럼 자라나지만, 아미르의 마음 속에는 늘, 바바의 애정을 받지 못한다는 열패감과 하산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의 시선은, 이 두 아이의 인생을 크게 바꿔놓게 된다.
나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가 방금 그랬던 것처럼 다시 얘기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늘 바바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말이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결국 그의 사랑하는 아내이자 아름다운 공주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었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 것은 조금이라도 그를 닮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바와 같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p31~31)
그리고, 바바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라임 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의사가 아내의 몸에서 그 아이를 꺼내는 걸 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 걸 믿지 못했을 거네." 그러면서 하산에게 호의를 표하는 것을 아미르는 들어버렸다. 평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말을. 바바는, <보라색 히비스커스>에 나오는 아버지와 비교할 바는 안되지만, 알게 모르게 아들을 강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닮지 않은 자식.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자식.. 이라는 굴레에서 아미르는 평생 힘들어한다. 나중에 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바바가 왜 그랬는 지 이해하게 되기도 하지만, ... 아버지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시선 하나 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인생을 지배하는 지 느끼게 되었었다. 물론 폭력을 안겼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고. 쉽게 지워지지 않는...
나이지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이 두 국가 출신의 작가들이 쓴 책은 요즈음의 나를 정말 즐겁게 혹은 슬프게 했다. 여타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나라들이 아닌지라 그들의 풍습들이 신선하게 다가왔고 아픈 역사가 남의 일이 아닌 양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그 속에서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감동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주기도 하고. 하지만 두 소설 다, 마무리 즈음에... 희망을 보여줘서 왠지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이겨낼 힘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요즘 몸도 안 좋고 심경도 안 좋은 내게 괜한 위안이 된다면... 오바일까. 두 작가의 책은 몇 권 더 찾아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