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말에 '제2의성' 상권을 달려야 하는 입장인데, 일등은 못해도 꼴등은 안 하고 싶은 절박한 심정인데, 이 책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결국 이 책부터 읽느라 '제2의성'을 아직 달려보지 못하고 있다는 슬픈 현실. 제2의성을 읽는 동안 소설이란 존재는 거의 사탕과 같은, 아니다, 내가 스트레스 받을 때 먹는 버터링이나 약과와 같은 대상으로 한번 들면 이전보다 더더더 재미있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는 것. 요즘 안 그래도 버터링과 약과를 상시로 먹어서 살도 꿀렁꿀렁 찌는 판인데... 이젠 소설까지 내 머리 속을 잠식하여 나를 제2의성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나 이 책은 재미있다. 아니 앤 클리브스가 누구지? 하고 읽어보니 이미 나는 그녀의 작품을 읽은 상태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 <레이븐 블랙>. 근데 왜 이렇게 이 작가의 이름이 낯선 거지?
책 내용이 기억도 안 납니다만,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은 기억에 있고. 재미있게 읽었었나 그것도 가물가물. 당췌 이럴 거면 책을 왜 읽느냐 라고 스스로 자책 하다가 우선은 <하버 스트리트>를 읽겠어요 하고 패스해버렸다는, 아름다운(?) 이야기ㅠ
<하버 스트리트>는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8편인가 중에 6편에 해당한다. (아니 왜 1편부터 안 내는 겁니까, 투덜) 주인공인 베라 스탠호프는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내 마음에 드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밖에는 거대한 여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트위드 치마, 눈사람 같은 파카 차림이었다. 커다란 얼굴, 작은 갈색 눈, 머리에는 파카 후드를 쓰고 있었다. 발에는 장화, 머리카락과 몸은 눈에 덮여 있었다. 여자 뒤에 한 사람이 더 있었지만, 앞사람의 덩치에 가려 특징을 알아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공한 말한 설인이다. 케이트는 생각했다.
여자는 입을 열었다. "들어보내 주시죠? 여기 밖은 얼어붙을 것 같군요. 내 이름은 스탠호프. 베라 스탠호프 형사입니다." (p19)
덩치 큰 독신녀. 그리고 형사. 그리고 일에 대한 열정. 사람의 배경에 대해 수다스럽게 캐묻기 좋아하는 사람. 수시로 눈과 홍수에 길이 막히는 산꼭대기의 아버지집에 그냥 그렇게 계속 살고 있는 여자. 그리고 약간의 골칫거리를 안은 살인사건에 꽤나 흥분하며 좋아하는 사람.
"살인사건입니다." 가슴이 다시 부풀어 올랐지만, 곧 죄책감이 엄습했다. 피해자는 누군가의 친척이나 친구일 것이다. 그녀의 즐거움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전철에서 칼에 찔렸어요." (p21)
마가렛 크루코스키라는 외국인의 성을 가진 분위기 있어 보이는 노부인이 지하철에서 난데없이 칼에 찔려 죽었다. 그녀는 하버 스트리트에서 숙박업을 하는 케이트 듀어라는 미망인과 그 두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부유한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미모의 젊은 마가렛은 어느 폴란드인과 좋아하게 되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이라는 걸 했고 2년 만에 남자가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저렇게 살아와야 했던, 생각하면 좀 비운의 인생을 살았던 노부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누가 죽였을까. 작은 동네에 어렸을 때부터 줄곧 보아온 사람들도 많은데 이 속에서 누가 그녀를 지하철에서 칼로 찔러 죽일만큼 미워했을까... 사건을 파헤쳐나가면서 드러나는 마가렛의 과거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뭔가 아련하고 서글프고... 그러나 그걸 파헤쳐나가는 베라와 그 부하들, 조, 홀리, 찰리의 활약은 상당히 재미있다.
"자." 베라는 입을 열었다. "마가렛 크루코스키. 얼마나 진전됐지?" 베라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복잡한 사건과 맥주, 그리고 생각을 나눌 상대: 조 애쉬워스. 아내가 남편의 성공을 고대하고 있고, 언제든 승진해서 옮겨갈 수 있는 친구.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알고 있어야만 진정 무언가를 즐길 수 있는 걸까? (p134)
이 부분에서 얼마나 동감이 되던지. 내가 집중할 일과 맥주, 그리고 그 얘길 할 수 있는 상대 혹은 친구만 있다면, 세상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적중된 느낌. 갑자기 내게 얘길 나눌 수 있는 상대나 친구가 누가 있지, 머릿 속을 헤집게 된다. 이런 행복한 순간을 맞기 위해서는 뭔가 영혼이 통하는 느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흠흠.
"사실 약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떠난다니까 난리를 피우는지?" 홀리는 몸을 죽 폈다. 베라는 그녀가 진정한 고독의 아픔을 알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젊음과 건강이 넘치는 그녀라면 자신이 혼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p248)
그래그래, 홀리 너는 너무 어려. 이런 인생의 쓴맛을 내 일로 여기게 되기까지에는 많은 연륜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란다.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떠남을 슬퍼하고 괴로와하는 것은 사실 내게 남겨진 외로움과 고독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는 거니까. 더 커라 홀리. 베라는 독특하지만 이렇게 인생에 대해 노년에 대해 밑바닥 인생에 대해 따뜻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시리즈는 무조건 나와야 한다. 이런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인 베라 스탠호프 이야기를 이렇게 뜨문뜨문 내서 사람을 고문하면 안된다. 찾아보니 한 권 - <나방 사냥꾼> - 이 더 나와 있다는 기쁜 발견을 해서 지금 주문 들어간다. 이후.. '제2의성'을 달리기 위해 채비를 해야지. 이랴이랴. 다들 지금쯤 아주 멀리까지 읽으셨겠지. 흐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