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더 여성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 내가 점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살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얻은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항상 선생님들의 예쁨을 받는 학생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 여성이 일이 덜 고된 작업반으로 나를 지정해서 나를 보호해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삶이었지만 나를 지켜준 사람들을 만나왔다. 이 모든 것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내 입장이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을 위한 기회는 그저 운에 맡겨져 있었고 법이나 제도를 통해서 기대할 수 없었다. 차별을 시정하는 대가로, 사회는 여성이 신음하는 불평등을 줄임으로써 구체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p239)
시몬 베유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저자가 앞에서 밝혔다시피 모파상의 소설 제목 'Une Vie'. 하나의 일생 정도의 뜻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제목이 '여자의 일생'으로 번역되었다고 역자가 옮긴이의 글에 써두었다. (우리나라 제목은 왠지 별루다. 여자의 일생이라니) 이 책을 읽고 나면, 모파상의 소설 제목과 시몬 베유의 인생이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랑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아무 걱정없이 자라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었던 사람. 그 곳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어머니는 잃었고 그렇게 겨우 살아나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보건부 장관과 유럽연합의 수장까지 맡았던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베유법>이라는 임신중단법을 만들어낸 사람. 남들의 곱절 아니 열곱절의 경험을 하나의 인생에서 해 낸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시몬 베유이다. 스스로 써낸 이 글을 읽으면서, 사실 프랑스라는 나라의 정치구조를 잘 몰라 조금 당황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내내 시몬 베유라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투쟁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p118)
이 얼마나 멋지면서도 강단 있는 말인가. 이런 사람이기에 남자들로 그득한 의회에서 단 하나의 여자로 나타나 임신중단법의 당위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온갖 야유와 질타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꿋꿋이 밀어붙일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후기에 있는 1974년 의회 연설 전문은, 진심 감동이다. 나도 우리나라 국회에서 이런 연설을 들어보고 싶다.
이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하여, 허가는 자동으로 내려져야 합니다. 허가를 받기 위한 절차는 무용해질 것이며, 법정에 선 양 모욕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결정권이 돌아갈 것입니다. 입법자가 발효된 법조문을 개정하고자 하는 까닭은 음지에서 실시되는 낙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함입니다. 사회적인 이유, 경제적이거나 심리적인 이유로 곤경에 처했다고 느낄 때 여성들은 어떤 조건에 있든 상관없이 임신을 중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구체적이거나 모호한 문형으로 정의하기를 거부하고 현실을 마주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낙태에 대한 결정이 궁극적으로 여성에 의해서 내려져야 한다는 점을 인정코자 합니다. (1974년 의회연설 중 일부)
낙태는 여성의 권리임을 말하는 이 말. 그것을 무분별하게 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며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도 하겠으나, 궁극적으로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주체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이렇게 해서 출산율이 떨어지지 않겠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이 연설을 끝맺는다.
저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곤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길러지던 방식과 다르게 그들을 길러냈습니다. 젊은 세대는 다른 세대와 같이 용감하고, 열정과 헌신을 다할 줄 압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부디 신뢰합시다.
우리가 얘기하는 페미니즘은 결국 남녀의 성대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결국 인간으로서 이 땅에 있는 존재들끼리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 휴머니즘이라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 정말 엄청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이루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되었었다.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시몬 베유에 관련한 책은 삼종 셋트이다. 당연히(!) 다 사서 내 책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 두었고 이제 연이어서 읽을 생각이다. 우선은 시몬 베유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알고 싶어서 이 책부터 펼쳐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