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구를 다녀왔다. 오고 가는 길 기차 안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많이 망설이다가 이 책을 집어들었다. 에드 멕베인의 소설이 눈 앞에 어른거렸지만, 잠시 생각한 후 이 책으로 결정.

 

대구 갈 때는 새로 생긴 SRT 기차를 이용했다. 수서역에 가니 연결통로가 있어서 참 편리했고 게이트 통과하면 바로 기차가 보여 허겁지겁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아직 처음이라 그런 지 사람이 버글거리지도 않았고 상점들도 깨끗하게 정비된 상태였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편리해져서, 대구까지 1시간 40분 걸려 도착했다. 그냥 잠깐 자다가 책읽다가 커피 한 잔 마시니 도착. 더 빨라진다고 하던데 이제 정말 우리나라 정도는 일일 생활권이 되나 보다 싶었다. 솔직히 경기도의 어느 도시에 통근하는 것도 그 정도 시간은 걸린다고 보면, 대구까지 출퇴근을 해도 거리적인 무게감만 제외하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많이 졸리기도 했지만, 일단 책을 펼쳤다. 서문부터 인상적이었다. 아서 케스틀러가 1976년에 쓴 서문 마지막 글, "인종 청소를 위해 시체들을 녹여 비누로 만들었던 기시를 다룬 두꺼운 책들이 이제까지 수백 권 쓰였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얇은 책이 서가에서 영원히 차지할 자리를 찾아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장 도르메송이 1997년에 쓴 서문 마지막 글, "영국에서 살았던 유대계 독일인 화가가 쓴 몇 페이지의 글이 단테, 셰익스피어, 밀턴 또는 파스칼의 위대한 구성들과 공통적으로 지닌 특성은 이것이다. 최악의 것에 언제나 의지할 수는 없고, 저주받은 것들 가운데는 항상 정의가 있으며 그 정의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이 어둠 속에서 끌어 올린다는 것." ... 이 두 글만으로도 뭉클함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 책, <동급생>.

 

이 작품은, 피곤함을 물리치고 오고 가는 길에 다 읽어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리 길지 않고 대단한 철학이나 소양이 묻어나는 것도 아니며 그 비참했던 시절의 참혹한 현실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은데, 책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그 어느 책보다 그 시절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작품이라는 믿음이 생겼었다.

 

독일인 귀족 집안의 한 아이와 유대계 중산층 의사 집안 한 아이와의 우정. 그 시절은 아직 히틀러의 나치즘이 창궐하기 이전이었고 그냥 평온하고 빛나는 시절이었다. 슈투트가르트라는 곳은 독일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의 고향이었고 터전이었으며 유대인 아이의 아버지는 심지어 독일 당국으로부터 수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넘는, 9천 일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별다른 희망도 없이 그저 애쓰거나 일한다는 느낌으로 공허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았다. 그중 많은 나날들이 죽은 나무에 매달린 마른 잎들처럼 종작없고 따분했다. (p21)

 

이렇게 시작한다. 인상적인 첫 글이다. 두 아이, 독일인인 콘라딘과 유대인인 한스. 그 두 아이의 우정은 견고하고 아름다왔다.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서로를 나눌 수 있는 열여섯 살 두 남자아이의 교류.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라고 쓰기 전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이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며 내가 친구를 위해 - 그야말로 기뻐하며 -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독일을 위해 죽는 것이 달콤하고 옳은 일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듯, 나는 친구를 위해 죽는 것도 달콤하고 옳은 일이라는 데에 동의했을 터였다. 열여섯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에 있는 소년들은 때때로 천진무구함을 심신의 빛나는 순결함, 완전하고 이타적인 헌신을 향한 열정적인 충동과 결부시킨다. 그 단계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강렬함과 독특함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경험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p38-39)

 

 

이 아름다운 우정이, 역사의 소용돌이, 히틀러라는 존재와 인종에 대한 그릇된 결정론으로 어떻게 훼손되는 지, 작은 사건들로도 참 구체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학교의 교실에서도 도드라지고, 세상의 변화를 예민하게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청소년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드러난다. 그 속에서 콘라딘과 한스의 우정 또한 위태위태해지고... 그 광기와 같은 소용돌이가 다 지나간 후, 그렇게 세월이 흘러 흘러 마지막에 확인된 진실은... 이 책을 소개할 때 책의 마지막 문구에서 전율을 느낄 거라 했었는데.. 실제 그러했다. 나 또한 몇 번이나 돌이켜 읽어야 했던 구절이었다.

 

프레드 울만이라는 이 책을 쓴 저자는, 화가였다고 하나 이 책 한 권으로 정말 잊을 수 없는 작가로서의 자리를, 적어도 내게는 작가로서의 자리를 매김한다. 비참하고 어지러웠던 시절을 그렇게 비참하고 어지럽게 얘기하지 않고도 그 심정의 깊이가 더없이 깊숙이 다가오게 하는 글이다. 아름답고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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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내려가는 길. <동급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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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결론 언급은 없지만,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스포일성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사건이 있었다 뿐이지, 사실 추리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는 소설이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파리로 가던 비행기가 1980년 겨울에 산속에 추락하면서 얘기는 시작된다. 전원 사망한 가운데, 기적적으로 신생아에 가까운 여자아이가 한 명 살아서 발견된다. 멀쩡하게. 그 한 아이를 두고 두 집안이 서로 자기 집 손녀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한 집은 유서깊고 돈도 많은 명문가, 또 한 집은 트럭에서 음식을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집안. 돈으로 해결하려다가 언론에 공개되는 바람에 결국 그 여자아이는 명문가에 갔으면 리즈로즈가 되었을 것이나 평범한 가정에 들어가면서 에밀리가 된다. 그러고 나서 18년이 흘렀고. 여전히 여자아이의 정체성은 미심쩍은 상태로 남아있고, 이 아이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라고 비밀을 파헤쳐보라고 다른 쪽 집에서 탐정을 돈으로 사게 된다.

 

그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동안 두 집안은 비극 속에 지내야 했다. 부잣집, 그러니까 카르빌 집안은 아이의 할아버지 격이 사람이 두 번이나 쓰러져서 결국 휠체어 신세가 되었고, 아이의 언니였을 수도 있는 말비나는 잃어버린 동생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인해 괴상한 아이, 외롭고 삐뚤어지고 성질 더러운, 통제불능의 괴물로 자랐다. 에밀리가 들어간 집인 비트랄 집안도 할아버지는 가스 중독으로 사망하고, 오빠인 마르크와 에밀리는...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탐정인 그랑둑은 지켜보면서 계속해서 조사를 하고 아이가 만으로 18살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일기로 남겨둔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고 하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그 무엇을...

 

**

 

책을 읽으며 문득,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가 생각났다. <생인손>이라는, 원래는 한무숙이 지은 동명 소설인 <생인손>을 드라마로 만든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드라마인데도 묘하게 생생하다.

 

 

조선 말기, 어느 대가집에 아가씨와 몸종 처녀가 있었다. 아가씨는 착하고 주인어른들도 좋으시고... 그냥 평온한 일상 속에서 몸종처녀가 그집 하인이랑 좋아져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즈음에 아가씨도 혼인을 했고. (이 아가씨가 서갑숙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동학혁명(?)인가가 나서 하인은 거기 갔다가 죽게 되고 몸종 처녀와 아가씨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는다. 몸종 처녀는 유모처럼 몸이 약한 아가씨 대신 두 딸아이를 다 돌보게 된다.

 

어느날, 주인어른과 아가씨 부부가 다 외출을 했는데, 간난이(몸종 처녀 이름)는 자신의 아이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을 발견한다. 자세히 보니 아이가 생인손(손가락에 나는 종기)을 앓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가 너무 가여워서 가여워서.. 어미는 마음이 찢어지고 순간 이걸 치료하는 동안만 아이를 바꿔치기 해두자, 그래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라는 마음에 아가씨의 딸과 자신의 딸을 바꿔치기해서 눕혀 둔다. 주인어른과 아가씨 부부는 전혀 모르고는 (직접 자주 보지 않았으니 몰랐을 수 있지.. 갓난아이이니) 아기가 생인손을 앓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잘 치료한다.

 

간난이는, 죄책감을 안고 이제는 도로 돌려놓아야지 놓아야지 하다가 그만 시기를 놓치고. 자신의 친딸은 그냥 곱게 커서 대갓집에 시집을 가고 아가씨의 딸은 씩씩하고 당차게 커서 머리를 싹둑 자르고 들어와서는 선교사를 따라 서양으로 나가버린다. 격동시기의 대한민국... 아가씨의 딸은, 대학교수가 되어 당당히 들어왔고 어머니를 찾아 모시게 된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의 집에 일하러 온 아줌마를 보고는 간난이는 화들짝 놀란다. 자신의 친딸이 몰락하여 찬모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전에 자기 집에서 하녀살던 집이란 걸 알고는, 친딸은 망나니 아들 손을 잡아 끌고 나가며 속닥거린다. "예전에 우리집 하인이었던 게 대학교수라고..." 드라마상으로는... 이젠 80 노인이 된 간난이가 신부에게 고해성사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갓집 마나님이든, 종살이 하는 간난이이든 어머니는 다 같은 어머니인데 신분이 낮으니 유모로서의 소임을 더 잘 해야 했고, 그래서 정작 자기 자식은 제대로 모유를 먹이지도 못하고 종종거리는 어미의 심정이 어땠을까. 얼마나 사무쳤으면 저런 일을 했을까. 그리고 평생.. 자기한테 참 잘해 주었던 주인집에 못할 짓을 했다는 죄책감에 가슴 졸이며 살았을 그녀의 인생이 너무나 마음 아팠었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엉켜가던 그들의 운명이 가슴에 묵직하게 다가 왔었고. 어머니라면, 자식을 위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걸 지금은 더 절실히 느낀다. 내가 어머니가 되어 보진 못했지만, 평생 딸자식을 위해서라면 늘 희생을 마다 안하시는 우리 엄마를 지켜봐와서 그런 것 같다.

 

 

**

 

이 책, <그림자 소녀>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물론 <생인손>처럼 우리나라 역사와 개인의 인생이 잘 버무려진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더더욱 사무칠 내용 정도의 깊이는 아니지만 (직접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이런 스토리를 엮어낸 작가에 대해서 한참 찾아본 기억이 있다. 소설가 한말숙의 언니이기도 하다) 비밀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그렇게 진실에 다가갈수록 비슷하다 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사실 박진감 있고 짜임새 있는 구성이긴 했지만, 템포가 조금 느려서 찰지게 와닿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마구 죽여대는 이벤트 없이도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재주는 있는 소설가인 것 같다, 미셸 뷔시.

 

 

뱀꼬리) 아... <생인손>을 책으로도 읽어볼까 했더니 이게 그저 단편소설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고, 이젠 절판이 된 책임을 알았다. 아쉽. 다른 소설들도 좋아 보이는데 다시 나왔으면 싶다. 근데 출판사가 평민사...? 아직 남아 있나...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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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일찍 퇴근하여 스타벅스에서 책 읽기 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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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은, 여러 가지 갈래로 확연히 나누어지곤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사다 지로 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박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서 산다는 것에 대한 다정함이랄까 푸근함이랄까 애틋함이랄까를 느끼게 하는 그런 소설. 나는 모리사와 아키오라는 작가를 이전엔 알지 못했었지만, 대략적인 소개글을 보고 아마도 아사다 지로의 작품과 비슷하겠구나 라는 마음으로 집어들 수 있었다. (빙고~)

 

100년이 다 되어가는 쓰가루 지역의 메밀국수집 오모리 식당. 1대의 오모리 겐지로부터, 3대 오모리 데쓰오를 거쳐 이제 4대 오모리 요이치까지 내려오는 '백년식당'이다. 요이치는 아직 식당을 물려받아야 할 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지만. 소설은 각자의 마음의 소리를 한 챕터씩 풀어나간다. 3대 오모리 데쓰오로부터 시작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대 오모리 겐지로 갔다가 이것저것 다 실패하고 지금은 도쿄에서 삐에로 일을 하고 있는 4대 오모이 요이치에게 갔다가, 어떨 땐 요이치의 여자친구인 쓰쓰이 나나미에게로 갔다가... 그렇게 각자의 생각과 추억이 교차하면서 이해하고 오해하고 하는 과정들이 참 담담하게 예쁘게 그려진다.

 

 

오모리 겐지에겐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발가락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릴 적엔 친구에게 자주 놀림을 바닸고,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중략) ... 어린 겐지는 그런 자신이 한심하고 분하고 슬퍼서, 손목으로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비탄에 잠긴 겐지를 늘 가만히 안으면서 생긋 웃어주었다. 등을 톡톡 편안할 정도로만 두드리며 이런 말도 해주었다.

"이 녀석. 남자가 울면 못써. 발가락쯤 없는 거,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오히려 발가락 외엔 다 가졌으니 넌 행복한 아이란다. 한번 생각해볼까? 발가락이 없는 만큼 넌 천천히, 천천히 걷잖아. 천천히 걸으니 다른 사람이 못 보고 지나치는 걸 발견할 수 있어. 그렇지? 음. 우리 겐지, 오늘은 뭘 가져왔을까?"

어머니가 그렇게 물으면 어린 겐지는 울면서 길가에 핀 꽃 이름을 말하기도 하고, 진기한 벌레 이름을 말하기도 했다. 논두렁 길에서 캔 미나리랑 뱀밥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반들반들 빛나는 돌멩이를 내밀기도 했다.

"어머나, 정말 멋진 걸 발견했네. 겐지는 예전부터 행운이 따르는 아이였어."

(p22-23)

 

 

어머니란 존재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괜스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이가 들어서 눈물이 많아졌나.. 하면서도 두번 세번 읽으며 아 참 너무 멋진 글이다. 어쩜 이럴까. 이 아이가 '백년식당'의 1대가 된 건 어머니의 이런 푸근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어머니의 이런 말씀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힘이 된다는 거. 나이가 드니 알 것 같다.

 

 

나는 좋아하는 무 샐러드를 먹으며 1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사투리가 심한 아버지가 도쿄에 왔을 때, 나는 성질도 고약하게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창피하니까 아버지는 입 다물고 계세요."

그때 나를 조금 쓸쓸한 눈으로 바라봤을 뿐, 한마디 불평도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말수를 줄였던 아버지. 약해 보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죄책감에 울고 싶어졌다. 그 죄책감의 흔적은 지금도 내 안에 확연히 남아 있다.

(p71)

 

 

다시 눈물. 부모한테 자식은 얼마나 모진 지. 사실 마음으론 안 그런데 괜히 속상해서 툭 내뱉고는 내내 마음 아팠던 경험이 내게도... 많다. 가끔씩 사무치게 미안할 때가 있다. 이젠 연세가 드셔서 예전처럼 큰소리도 내지 않으시고 그냥 허허 웃거나 쓸쓸하게 돌아서거나 하시는 부모님을 보면, 나는 왜 이리 못되었을까. 자책하곤 한다.

 

 

나나미를 알게 된 후 도쿄에 부는 바람의 질감이 조금 바뀌었다. 왠지 동그스름해진 느낌이다. 우리는 도쿄에서 이제 '혼자'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에 마음을 덮는 피부까지 두 배로 두터워진듯 했다. 요즘은 사소한 일로는 더 이상 마음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고, 가끔 푹 찔려서 상처가 나도 함께 슬퍼하거나 웃어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 상처가 달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p127)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할 때 느끼는 최고의 느낌은, 사랑이나 애정이나 하는 어쩌구저쩌구의 강렬한 느낌보다는... '안도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함께 해서 다행이다.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있어 하나 무섭지 않다. 슬퍼도 털어내버릴 존재가 내 곁에 있다. 이런 안도감. 그것은 주변의 공기를 바꾸게 하고 나 자신의 마음도 바꾸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립다, 그 느낌.

 

 

"이건 내가 어릴 때, 이 식당을 처음 만든 할아버지한테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인데."

"네..."

"모든 일의 끝에는 반드시 감사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감사?"

"그렇지. 어떤 일이든 마지막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만 한다면 모두가 좋은 기분을 간직할 수 있다 고 초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단다."

(p279)

 

 

문득, 내가 누군가에게 감사하다고 한 게 언젯적 일이었나 돌아보게 한다. 예전엔 말끝마다 감사를 붙였던 것 같은데 요즘엔 귀찮아서 그냥 뭐 그래봐야 하는 마음에서 대충 넘기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감사라는 말로 마음으로 마무리하면 모두 좋은 기분을 간직할 수 있다.... 내게도 새겨두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에 몇 번 되새김질해본다.

 

이 책에 나온 인물들 중엔 나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선량하고 성실하고 올곧고 마음깊고 때로 실수해도 포용하고 말없이 믿어주는 사람들 뿐이다. 이런 세상은 책에나 있는 거다. 그래서 현실감이 떨어진다.. 라고 매몰차게 생각하다가도 이런 세상 하나 아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다. 그게 판타지면 어떤가. 모든 일을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무미건조하게만 바라본다고 내게 좋을 일이 뭐 있겠는가. 마음에 따뜻한 물결이 일고 그래서 오늘 하루도 좀더 씩씩하게 살 수 있다면 그만이지.

 

마지막 장에 가면 이 백년의 시간이 그렇게 그냥저냥 이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더해서, 그렇게 이어진 백년이란 걸 알게 된 순간, 가슴에 따뜻함이 다시한번 번진다. 좋은 책이다. 

 

모리사와 아키오의 책은 여러 권이 번역되어 나와 있었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게 몇 편 있고. 책도 책이지만 영화를 한번 찾아봐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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