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에 한 절이 있어 하루는 불존(佛尊) 수좌(首座)가 법당(法堂) 뒤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꿩을 감싸고 있었고, 구렁이와 꿩이 서로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 이렇듯 서로 물고 버티며 놓지 않는 다툼이 있었는데, 둘이 서로 싸움하는 사이에 어부지리(漁父之利)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불존 수좌가 지팡이로 구렁이를 풀어 꿩을 구하니, 이날 이경(二更 밤10시경)에 하얀 형상을 한 노인이 와서 전등(剪燈)의 왼쪽에 앉아 쇠붙이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이내 이 절의 종을 주조하는 화주승(化主僧)이다. 사방에서시주를 모아 자선(慈善)을 베풀고자 이 큰 종을 주조하였으나 종소리가 맑지 못하여 도리어 죄업(罪業)에 대한 응보(應報)를 받았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구렁이의 뜻이었고, 지금에는 재앙과 액운이 헤아릴 수 없다. 오늘 다행히 꿩 한 마리를 얻어 점심으로 먹으려 하였다. 그대의 자비로 이와 같이 한번 굶주렸으니 반드시 그대를 대신으로 먹어야겠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를 위해 종을 쳐서 소리를 내면 이러한 추한 응보를 면할 것이니, 이것 또한 자비이다." 하고 말이 끝나자 홀연히 떠나갔다.


의심스러워 괴상하게 여기는 사이에 앞에 있는 울리지 않던 종이 천천히 하늘 밖으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두운 속에서 한 쌍의 꿩을 보니 부리를 사용하여 종을 울렸다. 한 번은 소리가 크고 한 번은 소리가 작아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마디가 있었고 한 번은 암컷의 소리였고 한 번은 수컷의 소리여서 암컷과 수컷의 차례가 있었다. 일종(一宗)이 죽고 일종(一宗)이 살았으니 죽고 사는 것에는 표지(標識)가 있으며 이것이 불문(佛門)에서 예악(禮樂)을 짓는 법이다.


동틀 무렵에 노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종이 울리는 힘을 입어 얽어맸던 몸에서 벗어나 승천한다."고 하였다. 해가 솟아 밝아올 무렵에 가서 보니 금구렁이 한 마리가 남쪽 처마 아래에 죽어 있으므로 승(僧)이 죽었을 때의 예와 같이 장사지냈다.


아, 꿩은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목숨을 구해준 승(僧)의 은혜를 보답했고 승(僧)은 꿩의 목숨을 구해 준 것으로 인하여 목숨을 구하는 보답을 받았다. 구렁이는 승(僧)으로 인하여 생명을 아껴 꿩을 살려 주었고, 꿩으로 인하여 쌓였던 억겁(億劫)의 고통을 벗었으니 이것이 일거삼득(一擧三得)이다. 사물은 비록 같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뛰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치악(雉樂)으로써 그 산의 이름으로 하고 종을 쳤던 소리로써 온 나라의 사찰에 퍼졌다고 한다. (자웅종기에는 雉岳이 雉樂으로 되어 있음.)


- 해남 대흥사에서 1921년 발간한 「범해선사 문집」중의 '자웅종기(雌雄鐘記)'
- 『원주얼 9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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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3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5-07-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꿩이 부리를 사용해서 종을 울렸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네요 부리가 해낸 거군요

水巖 2005-07-1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남 대흥사라니 생각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茶神傳의 초의선사와 소치 허유.
 

 

述懷  술회  산속에 사는 맛

 

結茅仍補屋  결모잉보옥  띠풀을 엮어서 지붕을 이고

種竹故爲籬  종죽고위리  대를 심어서 울타리 삼았네

多少山中味  다소산중미  그런대로 산속에 사는 맛을

年年獨自知  년년독자지  해가 갈수록 혼자서 느끼네

 

雪後(설후)                                

 

臘雪孤村積未消(납설고촌적미소)외딴 마을 섣달 눈이 쌓인 채 안녹으니,

柴門誰肯爲相敲(시문수긍위상고)그 누가 사립문을 즐거이 두드리랴.

夜來忽有淸香動(야래홀유청향동)밤이 되어 홀연히 맑은 향이 전해 오니,

知放寒梅第幾梢(지방한매제기초) 매화꽃이 가지 끝에 피었음을 알겠노라. 

유방선

17살(1405년, 태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21살 되던 해 아버지가 민무구()의 옥사에 관련되어 연좌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서울서 더 멀리 떨어진 영천으로 유배되었는데, 22살의 청년은 팔공산 기슭에 태재(泰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을 제자들을 가르치며 5년을 보냈다. 27살이 되던 해 유배에서 풀려나 원주로 가 다시 제자를 받았고, 그 무렵 법천사에 기거하며 사사를 받은 제자가 서거정, 권람, 한명회 등이다. 그 셋은 훗날 모두 영의정까지 올라 스승 유방선의 이름을 높였으나, 유방선 자신은 다시 모함을 받아 영천 유배길을 떠났고, 39살(1427년, 세종 9)이 되어야 풀려났다. 세종은 그의 학문이 깊음을 알고 유일()로 천거하여 주부(簿)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후학양성과 시문, 산수화로 소일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이에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 등을 보내어 그의 자문을 구하였고, 경제에도 밝은 그의 재능을 활용하고자 크게 등용하려던 차 55살을 일기로 병사하였다. 문집으로 태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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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지정면 안창리 덕가산 입구의 마을에는 서당 훈장을 지낸 황보라는 괴짜 선비가 있었는데, 성질이 괄괄한 데다가 참을성이 없었다. 가슴에 치미는 울분은 한바탕 욕 으로 퍼부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풀지 못한 심화 때문에 때로는 몸져 누워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가 하는 욕도 가지가지여서 어 떤 욕은 입에 차마 담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그는 상스러운 욕을 마구 내뱉으므로 주위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이 황보씨는 > 원주목사로 부임해 온 원님에 대하여 심히 못마땅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제깐놈이 뭐라고 날 업신여겨 오라가라하누 △△같은 자식." 물론 마음 속으로 하는 욕이었다. 만약 욕이 원님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곤란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정 면을 향해 그의 특유한 욕설을 퍼부었을 만도 하지만 어느 존전이라고 당돌하게 나설수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째 끙끙 앓고 있었다. 의원을 데려와 진맥을 했으나 한결같이 심화로 인한 병이라 했다. "약이 소용없어요. 가슴에 품은 일이 있으면 모두 큰소리로 외쳐버려요. 그래야만 병이 나을수있어요." 다른 의원도 같은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원주목사에 대한 욕을 참다가 이> 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수개월을 앓고 있는데, 그 목사가 다시 한양으로 영전이 되어 떠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욕선비 황보씨는 큰일이 났다. "떠나기 전에 목사를 보고 실컷 욕을 퍼부어야겠는데, 어떻게 한담." 욕선비는 쇠약해진 몸을 일으켜 집의 하인을 시 켜 되도록 긴 사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무엇에 쓰려 하십니까?" "잔말 말고 긴 사다리를 만들어라" 하인은 산에서 긴 나무를 베어다 사다리 를 만들어 두었다.

그날 아침 원주목사의 행차가 덕가산 기슭 산길을 지나갈 것을 미리 알아둔 욕선비는 사다리를 메고 그 원님이 기나가는 길옆 바위에 걸> 쳐 놓고 올라가서 사다리는 바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곤 원님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자니 구종별배를 거느린 원님 일행이 나> 타나 높이 솟은 바위 아래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욕선비는 때가 지금이라는 듯, " 네이놈 듣거라 △△같은 목사놈아." 목사일행중 제일 먼저 들은 것은 한 아전이었다. 어느 정신병자이거니 생각했으나 목사를 향해서 주먹질 발짓으로 욕을 하는데, 민망스럽고 망칙스러워 들을 수가 없었다. 하도 욕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원님 행차가 발길을 멈추었다.

"저놈이 웬놈인고?" "이 고장에서 욕 잘하는 선비라 하오."
"그런데 어찌 저토록 떠들고 있는가?" "황송하옵게도 원님께 욕을 퍼붓는가 하오."
"내게 욕을 퍼붓고 있다고? 당장 잡아오너라."
몇 사람이 바위 곁으로 달려갔으나 까마득한 바위 위만 쳐다볼 뿐 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던 길을 늦추고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 > 붙잡아 내릴 수도 없었다.
"안되겠습니다. 워낙 높은 바위인 데다가 제가 올라간 사다리는 바위 위로 거둬버렸습니다."

원님은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욕선비는 갖은 욕을 퍼부었다. "△△같은 목사놈아, 너의 어미 △△은 여우 △△인데 그> 것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이놈아 그것은 이세상에 네 애비하고 나밖에 없느니라." 원님은 기가 찼다. 저런 능지처참을 할 놈 봐라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 그냥 놔두고 어서 길을 재촉하렸다." 원의 행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욕선비는 욕을 그치지 않았고, 목사는 별 수 없이 생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그냥 지나갔다는데, 그 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를 욕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욕바위는 지정면 안창리 덕가산 골짜기에 있는데, 전설의 유형 가운데 전형적인 암석 전설을 가진 바위 이릉이다. 또한 바위의 명명이 고 을 원에 대한 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서민들의 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는 전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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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장군의 부친은 원주감영의 옥사장이었다. 그는 비록 말단직에 있었으나 그의성품은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어느날 살인혐의로 한 청년이 붙잡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살인할 것 같지 않은 지극히 선량한 사람이었다. 애끓게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딱한 사정이었다. 그대로 두면 살인자로 사형을 받을 사 람이므로 한 계책을 일러주어 그를 도망가게 했다. 그후 임장군의 아버지는 옥사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손우 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느날 중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얼마만큼의 곡식을 주니 그 스님은 "이 집이 임옥사장 집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임장군의 아버지가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나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하며 고깔을 벗는 것이었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삭발에 법의를 걸친 스님의 모습에서는 아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럴만도 하시리이다 소승은 십년전 원주 감영에 살인혐의로 붙들려 갔던 사람이올시다.


그때 옥사장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영낙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으신 인정으로 무리해서 제가 살아날 기회를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나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소승은 그간 뜻한바 있어 삭발을 하고 입산하여 수도에 힘썼으며 이미 부처님의 덕을 입어 명산 대찰의 자리를 잡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승이 옛날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묘자리나 하나 잡아드려 훌륭한 자손이나 보시게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 스님은 지금 평촌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그의 조부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후 태어난 아이가 임경업이다. 그가 비명에 죽어가게 된것도 묘자리를 잡아준 스님의 주의사항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묘자리를 정하고 나서 "만약 상을 당하면 삼일장으로 하여 장사날에 청광하여 광을 짓고 거적을 씌울것이며 그때는 반드시 상주 혼자서 광을 지키다 광속에서 혹시 어떤 소리가 들리거나 괴이한 일이 일어나도 들여다보거나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 뒤 부친상을 당한 임장군의 아버지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스님의 말대로 광을 짓고 그 위에 거적을 씌우고 밤샘을 시작했다.
자정이 되었을 무렵 적막하기만 하던 광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나중에는 쨍그렁거리는 쇠소리마저 들렸다. 임장군의 부친은 무의식중에 거적 한귀퉁이를 쳐들고 광속을 들여다보다가 스님의 말이 생각나서 거적을 덮었다. 임장군의 아버지자 목격한 광속의 광경은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두 사나이가 칼을 휘두르며 겨루는 순간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가 거적을 들추는 순간 한 사나이와는 눈이 마주쳤다. 임장군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사나이가 곁눈을 파는 순간 다른 사나이의 칼에 맞아 아깝게도 무참이 쓰러져 죽는 것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는 이와 같은 두 사나이의 싸움이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하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채 스님이 정해준 묘자리에 묘를 썼다. 그리고 삼우제를 올리려고 묘에 이른즉 누구의 짓 인지 관이 묘밖으로 튕겨져 나와있었다. 그는 다시 관을 묻고 그날밤은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덤곁에서 지키기로 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세사람의 무사가 나타나더니 임장군의 아버지를 보고 꾸짖었다.
"당신같은 사람은 이 명당에는 묘를 모실수 없오. 이 자리는 따로 임자가 있는데 왜 여기다 묘를 썻소"
하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는 그들앞에 비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여기에 부친을 모시게 되기까지는 제나름대로 까닭이 있어서 그렇소.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중의 한사람이
"이왕 이리 되었으니 할수 없소"하고는
"그럼 김공의 자리는 저편으로 정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김공이라 이르는 사람이 김자림의 손에 의해 참살당한 것은 이미 이때에 맺어진 인연 때문이었다 한다.


새로 태어난 임씨집안의 경업은 어려서부터 하는짓이 달랐다. 언제나 전쟁놀이가 아니면 힘겨루기를 했고 힘을 겨루면 항상 이겨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놀이를 할 때 군율을 어기었다고 해서 낫으로 어린 부하를 찍어 그것이 문제가 되어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충주의 달천으로 이사를 하게 된것도 소년 임경업의 심한 장난때문이라고 한다. 전쟁놀이를 하는 소년 임경업이 진지라 해서 원님의 행차를 못지나가게 했을때도 있었다.
"여기는 전쟁터요, 이 새끼줄 친곳은 우리의 성이니 누구도 못지나가오. 만약 지금 지나가면 목을 베겠소" 이 깜찍한 소년의 눈은 유독 반짝이었다. 원은 후일 그가 크게 될 인물임을 알고 도리어 너그럽게 "대단한 소년이군 그래"하고 할수 없이 밭둑길로 행차를 하게 했다 한다.


1616년 광해 10년에 무과에 급제한 임경업은 문헌에 의하면 충주 달천태생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6세때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은 원성군(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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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배달받았습니다.

 바로 고맙다는 말씀 남기고 싶었지만,

 자정이 넘어서야 회의가 끝나는 바람에. 흑흑흑.

 21일까지는 계속 강행군이라 책을 읽지는 못할 거 같아요.

(사실 올해 여름휴가는 불가하다는 통고도 받았습니다. 꺼이꺼이)

그래도 님의 편지와 책만큼은 기쁨이에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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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5-07-1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여름휴가도 없다니 그렇게 무식한 회사가...
마로는 어떡한대요?

조선인 2005-07-13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문제에요. 8월 첫째주 내내 어린이집 휴원이거든요. ㅠ.ㅠ

水巖 2005-07-1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이군요. 할아버지댁엔 혼자 안가려고 하겠죠? 아빠의 휴가는 ?
거 참 큰일이네요. 그 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