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懷 술회 산속에 사는 맛
結茅仍補屋 결모잉보옥 띠풀을 엮어서 지붕을 이고
種竹故爲籬 종죽고위리 대를 심어서 울타리 삼았네
多少山中味 다소산중미 그런대로 산속에 사는 맛을
年年獨自知 년년독자지 해가 갈수록 혼자서 느끼네
雪後(설후)
臘雪孤村積未消(납설고촌적미소)외딴 마을 섣달 눈이 쌓인 채 안녹으니,
柴門誰肯爲相敲(시문수긍위상고)그 누가 사립문을 즐거이 두드리랴.
夜來忽有淸香動(야래홀유청향동)밤이 되어 홀연히 맑은 향이 전해 오니,
知放寒梅第幾梢(지방한매제기초) 매화꽃이 가지 끝에 피었음을 알겠노라.
유방선
17살(1405년, 태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21살 되던 해 아버지가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되어 연좌되어 청주에 유배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서울서 더 멀리 떨어진 영천으로 유배되었는데, 22살의 청년은 팔공산 기슭에 태재(泰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고을 제자들을 가르치며 5년을 보냈다. 27살이 되던 해 유배에서 풀려나 원주로 가 다시 제자를 받았고, 그 무렵 법천사에 기거하며 사사를 받은 제자가 서거정, 권람, 한명회 등이다. 그 셋은 훗날 모두 영의정까지 올라 스승 유방선의 이름을 높였으나, 유방선 자신은 다시 모함을 받아 영천 유배길을 떠났고, 39살(1427년, 세종 9)이 되어야 풀려났다. 세종은 그의 학문이 깊음을 알고 유일(遺逸)로 천거하여 주부(主簿)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후학양성과 시문, 산수화로 소일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이에 굽히지 않고 집현전 학사 등을 보내어 그의 자문을 구하였고, 경제에도 밝은 그의 재능을 활용하고자 크게 등용하려던 차 55살을 일기로 병사하였다. 문집으로 태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