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보온도시락의 제품 설명에는 "한창 잘 먹는 성장기 남학생, 유달리 밥을 많이 먹는 남성을 위한 특대형 사이즈"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남들 시선에 민감한 중고생 시절 남학생들도 저 특대형 사이즈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난 저 특대형 사이즈를 여고 3년 동안 들고 다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장하다. 남녀공학 하나, 남고 2개를 지나쳐야 내가 다니던 여고가 있었는데. 통학길에 마주치는 남학생들의 징글징글한 놀림들.
"야, 저기 여자애 봐라. 지 몸통만한 도시락을 들고 다닌다."
"어디, 어디? 와, 진짜네. 여자애가 저렇게 많이 먹어? 얼굴 좀 보고 싶다."
"ㅋㅋㅋ 심지어 도시락에 가려 얼굴이 안 보여. 세상에. 쪼그만데 무지하게 먹나 보네."
"키만 작고 드럼통에 하마다리인 거 아닐까? 푸하하하하"
왁자지껄한 남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때면 난 더욱 더 부끄러워 가방에, 신발주머니에, 앉은 키의 얼굴까지 가려주는 특대형 보온도시락에 고개를 파묻곤 했다. 문제는 버스에서 내릴 때 더 심했다. 짖꿎은 남학생들은 버스 창문 바깥으로 고개까지 내밀고 놀려댔다.
"아까 그 코끼리 여자애다."
"사람은 없고 가방이랑 밥통만 걸어가는데?"
"맘모스 도시락으로 먹어대는데 키는 땅꼬마냐."
"도시락 짊어지고 다니느라 클 키도 못 큰 거지. 힘은 세겠네. 제는 잡히면 멸치어선감이다. 흐흐흐"
3년간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그 놀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마 어머니께 여자애들 들고다니는 이쁘장한 보온도시락을 사달라는 소리를 못 했다. 보온도시락 들고 학교 다닌 적 없었던 오빠들 눈치 보느라. 하나뿐인 딸래미에게 아침, 점심, 저녁을 죄다 찬밥 먹일 수 없다고, 일본여행 가는 사람에게 일부러 부탁해 특대형 사이즈를 샀던 어머니를 실망시킬까봐.
7시 자율학습, 7시 30분 방송학습, 8시에 1교시가 시작하던 시절. 10교시가 끝나면 저녁을 먹은 뒤 12교시까지 수업을 하고, 다시 방송수업 듣고, 10시까지 자율학습. 자연히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학교에서 먹어야 하는데, 밥순이 막내딸은 세끼 중 한끼도 못 거르고, 빵이나 콘프레이크로 아침을 떼우는 걸 질색을 하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특대형 보온도시락에 세끼 식사를 꽉꽉 눌러담아주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철딱서구니 없는 딸이었지만, 그런 어머니 마음을 알았기에 나 역시 특대 도시락을 3년간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고.
추억의 도시락통은 나 결혼하기 전까지도 어머니 찬장 한구석에서 먼지를 감수했는데, 당신 돌아가신 살림에는 없었다. 언제, 누구에게 준 건지. 아니면 어머니에게도 쓰레기 신세가 되었던 건지. 혹은 새언니가 버린 건지. 문득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