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얼마전 우르르 산행을 한 뒤 뒷풀이를 하며 같은 혈액형끼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노조원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누구는 별볼 일 없는 벤처요, 누구는 하청회사요, 누구는 계약직이요, 누구는 백수보다 별반 나을 것 없는 프리랜서. 힘없는 우리들은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잘 나가는 대기업의 노조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노조에 대한 비난이 새어나왔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임금인상을 내걸고 총파업이니, 범국민적 연대투쟁이니, 결사관철이니, 지난 겨울부터 강도높은 구호를 쏟아냈었지만, 결국은 임금인상 외의 요구사항은 흐지부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 휘말린 소소한 하청기업들이 덩달아 라인을 놀리는 바람에 자금압박에 시달리게 되어, 하청기업의 여러 노동자들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거나, 재계약을 못 하고 짤려 실업자가 되었다 한다.
**노조야말로 제 잇속만 차리는 귀족이라며 꽤나 거세게 성토하는 후배에게 반박하였다. 문제는 **기업 아닌가. 차라리 정규직의 2자리수 임금인상을 해주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노동시장 유연화를 고수하여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이 자본가의 속성이 아니던가. 설령 선량한 자본가가 있어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수용하겠다고 결심한다 하더라도 이미 자본가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지 않았던가. 만약 **기업이 비정규직/파견직에 대해 동등한 대우를 하겠다고 공표한다면 **기업의 외국인 주주들이 거세게 반발하거나 서둘러 자금을 회수할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노조 지도부가 차별철폐를 외쳐봤자 초국적 자본 앞에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격의 싸움일 수 밖에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실리만이라도 챙기는 방향으로 귀결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구조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임금인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전세계적 자본의 공모에 맞서 "전세계의 프롤레탈리아여, 단결하라"는 기치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선은 **노조가 경제투쟁부터 튼실히 해나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열심히 **노조를 두둔하는 나에게 후배는 치명타를 날렸다. "어쨌든 **노조의 노동자는 지갑이 좀 두꺼워졌지만, 덕분에 급여가 줄거나 실업자가 된 노동자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요?" 결국 내 논리는 클라인병에 빠진 개미와 다름없는 것이었을 뿐이다. 빠져나왔는가 싶으면 다시 병 속으로 추락하고, 밑바닥에 떨어졌어도 자유로이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개미.
우리들은 공선옥의 말처럼 "아름다운 노래 따위 부를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왜 사는가. 왜 돈을 버는가." 그리고 왜 투쟁을 하는가. 쇠팔걸이가 박혀 똑바로 누울 수도 없는 공원벤치로 밀려나가지 않기 위해 힘을 모으자고 하면서, 결국 나보다 약한 이를 노숙자로 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겨우내 지하도에 눌러앉아있던 노숙자들을 내쫒기 위해 봄맞이 물청소를 하면, 지하철 역사가 깨끗해졌다고 철없이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어차피 적자생존의 세상이라고 맥빠지게 있을 수는 없다. "한 교실 안에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누군가를 괴롭게 하는 아이와 그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 사회에도 똑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이란 늘 현장에서는 바라만 보던 사람들이며 그 목소리 높이는 시점이란 언제나 상황 끝이 된 상황"이라는 힐문을 듣고 있을 수만은 없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더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른다고, 나 역시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될 수 있다고 지레 겁을 먹고, 그저 바라만 보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순 없다. 상황 끝이 되기 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 거슬러 올라간 딴 소리 : O형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고 다른 혈액형들이 입을 모았다. O형 술자리가 제일 목소리도 크고 말도 많았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