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水巖 > 소장품 그림에 감춰진 이야기들

주길중선생의 『망향』을 맨 위에 실었습니다. 저 작품을 저에게 주셨을때 주선생은 C호텔 초상화코너에
서 초상화를 그리고 계셨습니다. 제목이 말해주는것처럼 주선생은 이북이 고향이였습니다만 주선생은 항상 남에게 신세를 지기 싫어 하신 성격이였습니다. 또 그런만큼 남에게 베풀지도 않었습니다. 오직 자기 일에만 충실한채 사셨던것 같습니다. 선생은 나보다 몇살 연상이긴 했지만 그것을 위세로 삼지도 않었고 그냥 사회에서 사귀는 우정의 선을 그은채 살려고 했던것 같습니다.
그것이 선생이 이북에서 넘어와 고생하면서 터득하신 생활철학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운영자의 핍박아닌 핍박을 느끼면서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로의 위기에 서로 감싸주고 서로 위로하는중에 조그만 우정의 싻이 돋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헤어질때 선생은 저그림을 내게 주면서 오직 하나의 창작품이라고하면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고향을 그리워 하는 자신의 마음이라면서 극구 사양하는 저에게 떠 안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서로의 길이 달라 다시 마주치지도 않었습니다. 선생은 내게 아주 소중한 그림과 함께 벗어버릴 수 없는 이승의 빚을 제게 주신것 같습니다.

1979년 5월에 있던 전시회에서 전시회를 끝났는데 그림을 반출하지 못해 쩔쩔 매시고 계실때 C호텔
Packing center 김사장에게 부탁을 해서 김사장 차로 운반토록 해 드린게 고맙다고 주신 2호 크기의 조그만 유화작품이다. 그림의 가치를 떠나서 그분의 고마운 마음이 담긴 그림이다.
석관동 '큰대문집'에서 살때 이야깁니다. 그 골목안에서 우리집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대문이 차가 다닐정도의 철대문을 한 집이여서 그렇게들 불렀습니다. 대지는 60여평에 실 건평도 40평이 넘었습니다.
고 아무개라나하는 여배우가 살았던 집이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이사갔을때는 집이 많이 낡었지만 마당의 조경하며 넓직한 집이여서 좋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큰아이(진석어멈)가 겨우 초등학교 다닐 무렵이여서 방
두개만 우리가 쓰고 방 셋은 세를 놓았더랬습니다. 저 김 훈 선생 그림은 거실에서 가운데 방 들어가는 벽면에 부쳤는데 그 방에 이사 온 신혼 부부들은 꼭 아이를 낳으면 아들이였습니다. 10여년을 사는동안 몇차례 사람이 바뀌었는데도 나었다하면 아들을 낳는것이 신기했습니다.
이 분이 노익장으로 젊은 부인을 만나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둘씩이나 낳으셔서 그런것 같다는 미신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큰 아이 시집갈때 액자를 새로 만들어 방문 앞에 걸어주고 왔답니다.
그때 태여난 아이가 진석이랍니다. 나는 그 미신같은 생각을 믿습니다.

언젠가 책꽂이를 만들어서 썼었다는 글에 진주님께서 그 책꽂이가 있으면 보물이라고 하셨던가
그 댓글을 보면서 저도 곰곰히 생각해 보았지만 그 책꽂이를 버린 생각은 나지만 왜 버렸는지 생각이 안났었습니다.
내가 판화를 처음 시작한것은 몇해를 매달려서 하던 출판사를 청산하고 무위도식하고 있을때 판화협회를 들락거리고 최 모 형을 만나러 다닐때 이항성 선생이 반 강제로 시키다 싶이 해서 제작한 판화 2점이 특선을 하고 또 몇몇 개 풍속 판화를 만들어 판화협회에 기증을하고 집에 있을때 갑자기 목판화가 미치도록 하고 싶어졌습니다. 눈에 띠는 목판도 없고 좋은 조각도도 없었는데도 그렇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꽂이를 분해, 옹이가 없는 쪽으로 다듬어서 刻을 한것이 이 작품입니다.
나무가 소나무여서 刻할때는 제법 댓닢이 날카러웠는데 몇장 찍고나니 날카로운 맛이 전부 죽어버렸군요.
그래도 좋다고 몇장은 몇 사람 나누어주고 족자를 만들어 걸어 놓았는데 사무실에 내 간것이 벽에 습기가 차 오른때문에 얼룩이가 지고 말었습니다. 폭이 좁은 관계로 위의 글씨는 별도 피나무에 새겨서 부쳤고, 초창기에는 호를 안쓰고 이름만 쓰고 낙관도 엉성한 도장을 썼군요.

풍속판화와 까치호랑이 판화로 연명을 할때인데 그것도 흉내내서 프린트를해서 목판이라고 속여서 파는 사람들이 생겨 났다, 내 목각의 선이 너무 섬세해서 프린트인줄 알었는지 모르지만 ㅎㅎㅎ
그런 풍토속에서 아귀다툼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혜산 유숙의 대쾌도를 약 3주 동안 각을 했다. 길이가 60센티가 넘어서 그런 나무를 구할수가 없어서 보통 목판 2장을 접착제로 부쳐서 각을 했다.
사람 머리 수만 85명인가, 그리고 산수화를 방불케하는 나무들...
" 이넘들아 흉내를 내려거든 이것도 한번 흉내를 내봐라" 그런 마음으로 대쾌도를 만들었다. 이것은 몇장 팔지도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친근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에칭은 양화하는 이광하가 실험적으로 만들어 본 동판화를 프레스 기계에 넣어 2장 찍어 본 에칭이다.
저도 한장 갖고 나도 한장 주어서 2장 찍은 에칭이다. 1/2 를 내게주고 싸인을 했다.
1/2란 2장 찍은중에 첫번째란 부호다. 목판화는 많이 찍을 수록 선이 굵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판화에선 앞선 번호에 가치를 더 둔다.